가. 정책결정 및 집행기구
북한에서 대외정책의 결정은 헌법상으로는 최고인민회의에서 수립하 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당우위 체제특성상 실제로는 외교정책 결정에 관해서는 노동당의 당적 지도에 따르도록 되어 있다.12)
노동당에서는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이를 심의·결정하며 그 중심역 할은 대외문제를 관장하는 비서국의 국제부가 담당하고, 여기서 결정 된 문제가 최고인민회의에 통고·추인되는 것이 상례이다.
이와 같은 결정과정을 거쳐 그 집행은 형식상 당과 정권기관인 내각 이 분담하여 시행하게 되는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주요 책임 을 맡는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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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헌법 제91조 4항.
●●13
사회주의헌법 제11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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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사회주의헌법 제110조, 제111조.
민회의 상임위원회로 대폭 이관되었는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국가를 대표하며 다른 나라 외교사절의 신임장과 소환장을 접수한다.
외교정책의 결정 및 집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다른 나라와 맺은 조약을 비준 또는 폐 기하며, 다른 나라에 주재하는 외교대표의 임명 또는 소환을 결정, 발 표한다.14)
정부간 외교는 내각의 외무성이 주로 관장하고 있으며, 정당외교는 당 국제부가, 의회외교는 최고인민회의가, 민간외교는 노동당 외곽단 체인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등이 맡고 있다. 내각의 외무성은 과거 정무 원 외교부에 비해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수립, 집행할 수 있는 등 권한 이 강화되었다.
외무성은 외국과의 국교 수립, 협정 체결, 재외공관 운영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외무상과 다수의 부상들이 30여개에 이르는 지역국과 기능국 을 분담해 업무를 관장하며 산하에‘군축 및 평화연구소’를 두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대외업무는 당과 내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뿐만 아 니라 여러 조직에 의해 다양하게 분담되어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노동당
당중앙위원회 (정치국·비서국)
최고인민회의
내각
외무성
국방위원장
국제부
대외문화
연락위원회 기타
외곽단체
(대외정책결정) (대외정책수립)
(대외정책집행)
북한개요 02 09
민간외교는 주로 당 외곽단체인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대 외문화연락위원회 등이 담당하고, 직총 등 기타 근로단체들도 대외활 동 업무에 참여하고 있다.
나. 외교 현황 (1) 미국
북한이 대서방 접근을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로 닉슨 미대통령 의 중국 방문과 미·중, 미·소의 화해 등 동서화해 분위기가 형성되면 서부터였다. 북한은 이와 같은 국제정세의 흐름에 자극받아 1971년 11 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대서방 접근을 정당화하는
‘당면한 제문제의 전술적 전환’을 결의하였다.15) 그러나 1980년대 말 까지 이어진 미·소 냉전은 북한의 대서방 외교가 활발히 전개되기 힘 든 구조적 제약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북한의 미·일관계 개선노력은 1990년대에 들어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미·일 양국과 유대를 통해 체제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국제사회에서의 대 한국 열세를 만회하며 이들 두 나라로부터 식량지 원 획득 및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는 동시에 미·일과의 관계정상화를 서방 선진제국에 접근하는 발판으로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대미접근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문제를 내세 우면서 시도되었다. 북한은 1974년 3월 25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 로 바꾸기 위한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처음으로 제기한 이후16) 유엔총 회, 비동맹회의 등을 통해 계속해서 이를 주장해왔다.
1984년 1월 10일 북한은 북·미간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간 불가침 선언을 하자는 이른바‘3자회담’을 제의하는가 하면, 1986년 6월 17 일에는 남북한 및 미국과의‘군사당국자회담’개최를, 1988년 7월 20 일에는 북·미간‘국회대표회담’개최를 제의하였다.
또한 북한은 1994년 4월 28일 외교부 성명을 통해 새로운 평화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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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공산주의자 들은 정세를 혁명에 유 리하게 전변시키기 위 해 적들과 일시적으로 타협할 수 있다”고 주 장, 대서방 접근을 정 당화하였다:「김일성 저작선집 6」, p.161.
●● 16
허담,‘조선에서 긴장상 태를 가시며 조국의 자 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 키기 위한 전제를 마련할 데 대하여’, 최고인민회 의 제5기 제3차 회의 보 고:「북한 최고인민회의 자료집 Ⅲ」(서울: 국토통 일원, 1988), p.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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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측은 정전체제를 무실화시키기 위해 중 립국감독위원회 체코 대표단 철수(1993.4.2 0),‘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설치(1994.5.
24), 군사정전위원회 중 국측 대표단 소환(19 94.12.15), 중립국감독 위원회 폴란드 대표단 철수(1995.2.28), 판문 점 북측 지역 사무실 폐쇄(1995.5.3)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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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신문」(1993.3.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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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합의를 통해 북한 측은 NPT 완전복귀, 특 별사찰을 포함한 모든 핵 시설에 대한 IAEA의 사 찰 수용, 핵활동 전면동 결 및 기존 핵시설에 대 한 해체를 약속하였고, 미국측은 2003년을 시한 으로 북한에 2,000MWe 경수로 지원, 중유제공 및 경제제재 완화, 연락 사무소설치 등에 합의 하였다.
대변인 담화, 비망록 및 유엔 사무총장 앞으로 보내는 서한 등을 통해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1996년 2월에는 평화협 정의 과도적 조치로서‘잠정협정’체결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북한은 지난 40여년간 한반도 평화보장 장치로 기능해왔 던 정전협정 체제를 무실화시키기 위해 군사정전위에서 일방적으로 중 감위 공산측 대표단을 철수하고‘판문점대표부’를 설치하는 등 일련의 조치들을 잇따라 취하였다.17)
북한이 정전협정 폐기를 시도하고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 한·미 안보동맹 체계를 와해시 키고 연방제통일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1990년대부터 북한측의 미군유해 발굴 및 인도사업이 시작되 었다. 그러나 이후 송환유해의 신원확인 문제가 제기되어 1996년부 터 공동 발굴작업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1997년부터 4회 작업으로 7 구의 미군유해가, 1998년에는 5회 작업으로 22구의 미군유해가 각각 발굴되어 미국측에 인도된 바 있다. 1999년 10월 이후부터 북한군과 유엔사측간에 유해를 인도인수해 오던 관계에서 벗어나 미군과 북한 군간에 직접 미군유해를 인도인수하고 있으나 2005년 5월 이후 중단 된 상태이다.
북·미관계에 가장 중요한 사안은 북한의 핵개발 문제이다. 북한이 1992년 1월 30일‘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함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 (IAEA)는 북한 핵시설에 대한 임시사찰을 실시하고 북한측이 미신 고한 영변지역 2개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 (1993.2.25)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이 1993년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 약(NPT) 탈퇴를 선언함으로써18) 국제적인 긴장국면이 조성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북한과 미국은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단계에 걸 친 고위급회담을 개최하고 마침내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기 본합의문」을 채택하였다.19) 북·미 제네바합의는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토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개선의 실마리 를 제공하게 되었다.
북한개요 02 09
제네바합의에 따라 1995년 6월 13일 콸라룸푸르에서 한반도에너지 개발기구(KEDO)가 경수로 노형 및 주계약자를 선정한다는 등 주요 원칙에 합의하였다. 또한 북한과 미국은 연락사무소 개설 문제, 폐연료 봉 보관·처리문제 등을 협의하였으며,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완화조치 발표(1995.1.20), 대북 중유제공 및 북·미간 직통전화 개설(1995.4.10) 등이 이루어졌다.
핵문제가 제네바합의로 해결되는 듯 하였으나 북한의 미사일 수출 의혹이 새롭게 제기되면서 1996년 4월부터 북·미간에 미사일협상이 진행되었다.20)
그러나 북한은 협상에서“미사일 문제는 자주권에 속하는 문제로서 미국이 진실로 미사일 수출을 막으려면 하루빨리 경제제재를 해제하 고 미사일 수출중지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하 였다.21)
1998년 8월에는 미사일(광명성 1호) 발사 실험을 강행함으로써 급 격히 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1998년 8월에 평북 대관군 금창리의 지하 핵의혹 문제가 제기되어 북·미간에 1998년 11월부터 1999년 3월까지 4차례의 협상이 진행되었다.
북한은 미국측의 현장방문을 허용하는 대가로 약 60만톤의 식량을 제공받았고 1999년 5월 미국의 현장방문단이 금창리 터널을 현지 조 사함으로써 금창리 지하 핵의혹시설 용도를 둘러싼 논란은 7개월 만 에 일단락되었다.
이와 같은 긴장상황에도 불구하고 남북한과 미국·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이 개최되었으며22) 1995년 이후 지속되어온 미국의 대북 인도 적 식량지원도 계속되었다.23) 클린턴 행정부는 1998년 11월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 한·미·일과의 공조하에 북한이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를 포기할 경우 북한에 외교적·
경제적 이익을 제공한다는 내용의 대북 포괄적 협상틀을 마련하였다.24) 미사일 문제와 관련하여 1999년 9월의 북·미 베를린합의가 이루어 지자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두번째의 경제제재 완화조치를 발표했으며, 북한 역시‘미사일 재발사 유보입장’을 밝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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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 협상은 이후 20 00년 11월까지 총 6회에 걸쳐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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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통신」(19 98.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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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양국이 1996년 4월 16일 한반도 평화체제 구 축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4자회담을 제의한데 대해 북한측이 호응, 1997년 3월 5일 공동설명회 개최를 시 작으로 예비적 성격의 회 담을 거친 이후 1997년 12월~1999년 8월 사이 6차례의 본회담이 제네바 에서 진행되었으나 별다 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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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995년 이후 매 년 세계식량계획(WFP), 유엔아동기금(UNICEF) 등 국제기구를 통해 북 한을 지원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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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조정관은 보고서에 서 미행정부와 의회에 대 해 첫째, 북한의 핵무기 및 장거리 미사일개발 포 기와 함께 미국의 포괄적 인 대북관계 정상화 조치 를 취하고 둘째, 북한의 상응한 조치를 취하지 않 을 경우를 상정하여 북한 위협을 봉쇄하기 위한 조 치가 필요하다면서, 봉쇄 전략은 위험하므로 첫 번 째 전략이 바람직하다고 건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