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 高宗代 對外 政策의 性格과 意味
-唐使 派遣을 중심으로-
廉 景 伊 (全北大)
Ⅰ. 서론
Ⅱ. 東西 정벌과 羈縻支配의 확대
Ⅲ. 吐蕃의 팽창과 唐使의 임무
Ⅳ. 결론 : 고종대 대외정책의 성격과 의미
Ⅰ. 서 론
630년(정관 4)에 당 태종이 돌궐을 정벌하면서 당의 국제적 위망은 급속히 높아졌다. 이후로 당은 분열된 서돌궐에 책봉을 통해 친당 정 권을 구축하고, 이것이 여의치 않은 토욕혼에는 군사를 동원한 위무로 친당적 책봉을 실현시켰다. 그러나 당은 640년(貞觀 14)에 고창을 정벌 하여 西州로 편제하였고, 646년(貞觀 20)에 설연타를 정벌하여 철륵을 6부7주로 편제하였다. 즉 당의 대외정책은 보다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지배로 전환되고 있었다.
태종을 계위한 고종(650-683)대에, 당은 천산북로의 서돌궐로부터 요동의 고구려까지 최대 판도의 영토를 확보하였으며, 이를 기미부주 로 편제하고 도호부를 두어 총괄하였다. 이러한 대외 정벌과 확장, 편 제와 지배를 목표로 한 대외정책은 태종말 대외 정책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외정책은 군사력을 앞세운 전쟁만이 아니라 사신외교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使臣은 외교의 실질적 수행자로, 이를 둘러 싼 다양한 요소들(파견 횟수, 파견대상국, 파견시기, 파견 목적과 임무 등)은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각 시기 당의 대외 관계와 정책이 어떻 게 추진되고 어느 정도 실현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뿐 만 아니라 이는 당의 이념적이고 현실적인 입장과 요구를 파악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전쟁과 정벌을 통해 기미지배체제를 확대시킨 측면에서 보면 고종 대 대외 정책은 태종대와 유사하지만, 고종대 당의 외교적 입장이나 외교 비중 역시 태종대와 유사한가는 의문이다. 먼저 양시기에 당이 사신을 파견한 횟수를 통해 살펴보면,1) 태종 통치 23년 동안에 최소 52회(연평균 2.26회)의 사신이 파견되었고, 고종 34년간에는 17회(연평 균 0.53회) 정도에 불과하다.2) 이는 단순 수치비교이지만, 고종대에 비 해 태종대에는 적극적이고 활발한 사신 외교를 펼쳤음을 보여준다.
태종대에 활발한 사신 외교는 사신 외교의 중요성과 효율성에 대한 인식에 기인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貞觀初 嶺南 高州 酋帥 馮盎의 반란에 대한 당의 대처와 평가이다.3) 태종은 정벌이 아닌 위무 사 파견을 통해 사건을 수습하고, 이에 대해 ‘한 명의 사신으로 십만의 군대에 승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평가 속에 태종대에는 說諭ㆍ招慰ㆍ安撫ㆍ冊封ㆍ和親 등 다 1) 당의 사신파견 기사는 新唐書 (北京: 中華書局, 1995)와 舊唐書 (北京: 中 華書局, 1995)의 本紀 와 列傳 , 資治通鑑 (上海古籍出版社, 1988),冊府元 龜 (北京: 中華書局, 1982),通典 (北京: 中華書局, 1982), 唐會要 (北京: 中 華書局, 1998), 全唐文 (上海古籍出版社, 1995), 唐大詔令集補編 (上海古籍 出版社, 2003), 貞觀政要 (上海古籍出版社, 1978), 三國史記 (서울: 홍신문 화사, 1995), (완역)日本書紀 (서울, 일지사, 2002) 등에서 구하였다.
2) 태종과 고종 양시기의 入唐 조공사절에 대해서는 최재영의 唐代 長安의 朝貢 使節의 변화와 鴻臚寺의 기능 (동북아역사논총 24, 동북아역사재단, 2009.6) 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태종과 고종대에 入唐使는 241 : 90(최재영, 같은 책, p.266)으로 크게 차이가 난다. 이렇게 다른 시기와 비교하여 태종대에 入貢 사절이나 唐使 파견이 잦았던 것은 그 시기 당의 대외 정책과 외교 방침 을 보여주는 중요하고 특징적인 면이라 하겠다.
3) 資治通鑑 太宗 貞觀元年 9월ㆍ10월 기사. 貞觀政要 卷9 征伐.
양한 임무의 사신이 각국에 파견되었다. 또한 대외 정벌에 사신 외교 를 겸행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630년(貞觀 4)초, 동돌궐 정벌에 앞서 唐使 唐儉으로 頡利可汗을 안심시켜 정벌을 용이 하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4) 뿐만 아니라 薛延陀에 사로잡혀있는 契苾 何力을 구하기 위해 642년(貞觀 16)에 薛延陀 夷男의 청혼을 받아들였 다가5) 다음해 聘幣의 소홀함을 빌미로 혼인을 파기하였고,6) 결과적으 로 夷男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즉 태종대에 실현된 당 중심 의 국제질서는 다만 많은 군사를 동원한 전쟁에 의한 것은 아니고, 경 직되지 않은 유연한 외교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 다.7)
唐을 둘러싼 사신외교에 대해서는 入唐使를 중심으로 다양한 주제 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와 달리 唐이 파견한 使臣(唐使)에 관한 연구는 그다지 많지 않다. 대표적으로 黎虎의
漢唐外交制度史
(蘭州大學出版社, 1998), 李大龍의
唐朝和邊疆民族使者往來硏究
와
漢唐藩屬體制硏究
,8) 彭建英의
中國古代羈縻政策的演變
9) 등이 있다.그 나름의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연구물들은 전통적인 중 화주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또한 중국 영토 안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라 는 현재적 필요에 부응하여 藩屬, 혹은 소수민족의 羈縻를 전제로 사 신 왕래를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사신의 임무가 국제적 力學關係 속 에서 시기별로 어떠한 성격을 갖는지 또 그러한 성격변화를 보이는 당 의 대외 방침은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은 이루 어지지 않았다.
4) 舊唐書 卷144上 突厥傳.
5) 資治通鑑 太宗 貞觀 16년 10월 기사.
6) 資治通鑑 太宗 貞觀 17년 윤6월 기사.
7) 염경이, 당 태종대의 사신 파견과 그 외교적 역할 (대동사학 5: 현전북사 학, 2005. 10).
8) 李大龍, 唐朝和邊疆民族使者往來硏究 (黑龍江敎育出版社, 2001); 漢唐藩屬體 制硏究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6).
9) 彭建英, 中國古代羈縻政策的演變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4).
시기 토번 서돌궐/ 처월 서역 신라 왜 650 永徽元年 1(조문)
651 永徽 2 1(초위) 1(처월, 초위)
654 永徽 5 1(책봉)
655 永徽 6 1(책봉) 658 顯慶 3 1(置官 책봉)
651 龍朔 1 1(置府官)
663 龍朔 3 1(세유)
665 麟德 2 1(세유)
670? 1(세유) 1(포로송환)
672 咸亨 3 1(화친) 678 儀鳳 3 1(화친) 679 調露元年 1(조문) 680 永隆元年 1(조문)
681 開耀元年 1(책봉)
? 1摩揭它(立碑)
이에 본 연구는 唐代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던 고종대를 중심으 로 사신외교의 구체적인 면모를 고찰하고자 한다. <표1>에 보면, 고종 대 唐使는 대체로 통치 전기에 서돌궐(서역 포함)에, 후기에 토번에 파 견되었다. 이러한 唐使 파견의 양상에 따라 본문에서는 먼저 서돌궐에 파견된 唐使의 성격과 의미를, 다음으로 토번에 파견된 唐使의 임무와 변화상을 분석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신 외교의 역할과 특 징을 바탕으로 고종대 대외정책의 성격과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표 1> 고종대 사신 파견과 임무
Ⅱ. 東西 정벌과 羈縻支配의 확대
1. 서돌궐 정벌과 羈縻支配의 실현
고종 즉위 초(永徽 2년 정월), 서돌궐 阿史那賀魯10)가 반란을 일으 켰다.11) 기사에 따르면 阿史那賀魯의 모의가 당에 보고되자 당이 通事 舍人 橋寶明을 보내 慰撫하였는데, 橋寶明의 慰撫는 반란 도모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사전에 이를 억제하기 위해 賀魯의 아들인 咥運을 당 에 宿衛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咥運이 右驍衛中郎將이 되어 귀 환함과 동시에 서돌궐 賀魯의 반란은 현실이 되었다.
당은 서돌궐 別部인 處月ㆍ處密이 賀魯에게 호응하는 것을 저지하 기 위해 같은 해(651, 永徽 2) 12월에 處月의 朱邪孤注에게 單道惠를 파견하여 招慰하였지만, 朱邪孤注는 唐使 단도혜를 죽이고 賀魯와 연 합하였다.12) 또 655년(永徽 6)에 서돌궐 頡苾達度設이 賀魯 토벌을 위 해 당에 청병함을 기회로, 당은 豐州都督 元禮臣을 파견하여 頡苾達度 設를 가한으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賀魯에게 저지당하였다.13)
당의 서돌궐 정벌은 657년(顯慶 2) 12월에 소정방이 賀魯를 생포하 면서14) 마무리되었다. 당은 조서를 내려 阿史那賀魯 정벌을 위해 파견 10) 阿史那賀魯는 서돌궐 乙毗咄陸可汗시기에 당에 내항한 阿史那彌射와 阿史那 步眞을 대신하여 葉護로서 處月、處蜜、姑蘇、歌邏祿、弩失畢 등 5姓을 거느 렸다가 咄陸可汗의 실각 후에 역시 당에 내항하였다. 賀魯는 당의 龜玆 침략에 향도가 되어 공을 세우고 左驍衛將軍 瑤池都督으로 庭州 莫賀城에 거하며 부 락민을 거느렸는데,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모여들었다[新唐書 卷215下 突厥 傳(下). 舊唐書 卷194下 突厥傳(下)].
11) 新唐書 卷215下 突厥傳(下). 資治通鑑 高宗 永徽 2년 정월기사.
12) 新唐書 卷218 沙陀傳. 資治通鑑 高宗 永徽 2년 12월기사. 處月ㆍ處密은 乙毗咄陸可汗시기에 葉護 賀魯에게 통솔되었고 이후 庭州 莫賀城에 있는 賀魯 에게 모여들었던 만큼, 이미 서돌궐의 강력한 실력자로 급부상한 沙鉢羅可汗 (賀魯)과의 관계는 밀접한 것이었다.
13) 資治通鑑 高宗 永徽 6년기사. 冊府元龜 卷964 外臣部 封冊2.
했던 서돌궐 가한의 후예 阿史那彌射와 阿史那步眞을 可汗兼都護로 삼 아 五咄陸部와 五弩失畢部를 거느리게 하였다.15) 또 그 땅을 주현으로 나누고, 다시 6개의 도독부와 夢池ㆍ昆陵 2都護府를 두었으며 안서도 호부로 총괄하게 하였다.
彌射와 步眞의 책봉을 위해 파견된 이는 光祿卿 盧承慶16)이다. 노승 경은 조서에 따라 彌射ㆍ步眞을 책봉하고 이와 함께 편제된 도독부의 자사 및 이하의 관료를 선별하였다.17) 그러나 노승경의 임무는 서돌궐 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당서
서역전에는 東安, 石, 米, 史, 寧遠, 吐火羅 등 서역의 많은 국가가 658년(顯慶 3)을 전후 로 도독과 자사에 임명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18) 노승경의 관료선별 의 임무는 서돌궐을 비롯하여 서역 각국에 당의 영향력과 통제력을 행 사한 것이라 하겠다. 당이 서돌궐 정벌과 편제를 통해 그 지배력을 강 화한 것은 그와 인접한 서역국에도 당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ㆍ강화시 킬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이렇게 서역에 대한 당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자, 661년(龍朔 1)에 波斯王이 당에 청병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당은 隴州南由縣令 王名遠 을 파견하여 波斯도독부를 두고 卑路斯를 도독으로 책봉하였다.19)
구 14) 阿史那賀魯가 생포된 것은 658년(高宗 顯慶 3) 12월이다.15) 新唐書 卷215下 突厥傳(下). 資治通鑑 高宗 顯慶 3년 11월 기사. 阿史那 彌射는 興昔亡可汗兼驃騎大將軍ㆍ昆陵都護로, 阿史那步眞은 繼往絶可汗兼驃騎 大將軍ㆍ夢池都護로 삼았다.
16) 노승경은 ‘明辯’으로 태종에게 발탁되었던 인물로 어수선한 서돌궐 지역의 혼 란을 수습하고 그곳에 기미부주를 설립하기에 적합하였던 인물 같다. 사신으로 다녀온 뒤 그는 度支尙書를 제수받고 同中書門下三品으로 재상의 반열에 올랐 다(舊唐書 卷81 列傳 卷31 盧承慶傳).
17) 舊唐書 卷194下 突厥傳(下). 資治通鑑 高宗 顯慶 2년 12월 기사. 冊府元 龜 卷964 外臣部 封冊2.
18) 新唐書 卷221 西域傳. 冊府元龜 外臣部 封冊2에는 이때에 龜玆왕에 대 한 임명도 기록하고 있다. 康ㆍ石ㆍ吐火羅ㆍ罽賓 등에는 도독부가 두어지고 그 왕은 도독에 임명되었으며, 東安ㆍ米ㆍ何ㆍ史ㆍ寧遠 등은 州로 구분되어 자사 가 두어졌다.
19) 舊唐書 卷198 西戎傳. 왕명원은 군사적 지원의 임무가 아닌 波斯都督府를 두고 卑路斯를 都督으로 삼는 책봉사였다.
당서
罽賓傳에는 같은해에 罽賓王을 十一州諸軍事兼修鮮都督으로 삼았 다고 하고,
資治通鑑
에는 罽賓ㆍ波斯 외에도 吐火羅ㆍ嚈
噠 등 16국에 都督府 8,州 76,縣 110,軍府 126개를 두어 安西都護府로 관할하도 록 했다20)고 기록하고 있다. 罽賓王의 도독 임명과 서역국에 대한 편 제는 唐使 왕명원에 의해 수행된 것으로 보인다.21)이렇듯 당은 고종 즉위 초로부터 이후 8년간 지속되던 서돌궐 阿史 那賀魯의 반란을 진압한 후, 이곳을 府州로 편제하고 서돌궐 가한 阿 史那씨의 후손을 도독에 임명하여 지배ㆍ관리하였다. 더불어 서역의 많은 국가도 都督府로 편제하여 당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은 통사사인 교보명을 보내 위무하였고 또 655년(永徽 6)에 풍주도독 원례신을 파견하여 頡苾達度設을 가한으로 책봉하여 賀 魯를 견제하고자 했다. 또 서돌궐 정벌과 賀魯 생포 이후 광록경 노승 경을 보내 당의 지배체제(도호설치와 기미부주로의 편제)를 구축하였 다. 즉 고종 통치 초기에 행해진 서돌궐 정책은 태종대에 실행된 공격 적인 대외 정책의 연장선에 있고 나아가 그 정책 대상이 확대되는 양 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동북방 정벌과 羅唐戰爭
이러한 양상은 이 시기에 당의 고구려ㆍ백제ㆍ신라에 대한 정책에 서도 살펴볼 수 있다. 당의 동북방 정책은 고종 통치 초기에 8년간이 20) 資治通鑑 高宗 龍朔元年 6월 기사.
21) 新唐書 西域傳에는 서역이 평정되고 당이 사신을 보내 서역 국가들의 풍속 과 문물을 조사하였다고 한다. 이는 왕명원이 파사에 사신으로 파견된 시점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왕명원은 파사와 계빈 등 여러 서역국에 도독 설 치와 임명 등 책봉의 임무를 수행할 뿐 아니라 서역의 풍속과 문물에 대한 조 사도 함께 수행하였다고 짐작된다. 또 新唐書 西域傳 摩擖它관련 기사에는 그 시기가 정확하지 않지만 고종이 왕현책을 摩擖它에 파견하였고 왕현책은 摩訶菩提祠에 碑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현책은 태종대 천축에 사행하였 던 인물로 아마도 摩擖它에서 熬糖法을 알아오는 임무도 수행한 것으로 보이 는데 이러한 연유로 고종이 그를 다시 摩擖它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나 지속된 서돌궐 阿史那賀魯의 거병을 진압한 직후에 본격적으로 추 진되어, 660년(顯慶 5)에 백제를 정벌하여 서돌궐에 그러했듯이 熊津 등 5都督府를 두었다. 뿐만 아니라 당은 663년(龍朔 3)에 신라에도 鷄 林大都督府를 두고 신라왕 金法敏22)을 鷄林州都督으로 삼아23) 신라 역시 기미부주체제로 흡수하고자 하였고, 668년(總章元年)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전역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당 의 동북방 정책 역시 서돌궐에서와 마찬가지로 태종말의 정벌과 지배 의 대외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의 동북방 정책에 대해 신라는 672년(咸亨 3)에 고구려 유 민을 군사적으로 원조하며24) 항거하여 제동을 걸었고, 이로써 나당동 맹은 결렬되고 전쟁으로 치달았다.25) 하지만 서변의 토번이 급속히 팽 창함에 따라 당은 675년(上元 2)에 ‘신라의 사죄에 따른 용서’26)라며 서둘러 나당전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다.27) 이에 따라 당은 백제 故地와 22) 신라 무열왕 김춘추는 661년(龍朔元年) 9월에 죽고 그 아들 法敏이 계위하여 樂浪郡王、新羅王에 책봉되었다(資治通鑑 高宗 龍朔元年 9월 기사. 舊唐書 卷199上 新羅傳).
23) 資治通鑑 高宗 龍朔 3년 4월 기사. 舊唐書 卷199上 新羅傳.
24) 資治通鑑 高宗 咸亨 3년 12월기사. 十二月,高侃與高麗餘衆戰于白水山,破 之. 新羅遣兵救高麗,侃擊破之. 이렇게 신라가 대당전을 선포하는 군사행동을 감행한 것은 당시 당이 처해있는 국제적 상황에 기인한다. 즉 당은 670년 토번 이 안서4진을 함락시키며 세력을 확대시킴에 따라 군대를 분산시킬 수밖에 없 었으므로 669년에 고구려 유민을 이주시키고 안동도호부도 新城으로 옮긴 후 설인귀를 토번전에 투입하였다. 또 徐榮敎는 나당전쟁의 발발에서 종결까지 토 번과의 연관성을 세밀하게 분석하였다[ 羅唐戰爭의 開始와 그 背景 (역사학 보 173, 2002); 羅唐戰爭과 吐蕃 (동양사학연구 79, 2002)].
25) 674년(上元元年)에 당이 劉仁軌를 鷄林道大總管으로 삼아 신라를 토벌하고자 하였고 이는 676년까지 지속되었다.
26) 資治通鑑 高宗 上元 2년 2월 기사. 二月,劉仁軌大破新羅之衆于七重城,又 使靺鞨浮海略新羅之南境,斬獲甚衆. 仁軌引兵還. 詔以李謹行爲安東鎭撫大使,
屯新羅之買肖城以經略之,三戰皆捷,新羅乃遣使入貢,且謝罪;上赦之,復新羅 王法敏官爵. 金仁問中道而還,改封臨海郡公.
27) 당은 660부터 시작된 동방 원정 중에 토욕혼과 천산남로의 안서4진을 모두 토번에게 빼앗겼다. 676년(儀鳳元年)초에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기며 나당 전을 종식시키고 서둘러 모든 군사력을 서변에 집중시켰다. 그럼에도 신라의
고구려 영토를 병합하고 유민을 받아들이며 당의 분할지배를 거부하는 신라를 암묵적으로 인정해야 했다.
당의 동북방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 신라에 파견된 唐使는 조문과 책봉의 임무로 나당동맹시기(663년, 龍朔 3)에 1차례, 고종 통치말(681 년, 開耀元年)에 1차례 행해졌다. 신라왕에 대한 책봉명은 663년에 文 武王 法敏이 鷄林州都督에 임명된 이후 줄곧 鷄林州都督이었지만, 이 것은 1국가 1기미주로, 당의 기미주 설립과 이를 통한 적극적 분할지 배라는 취지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28) 나당전쟁 이후(681년) 에 행해진 당의 책봉사 파견에29) 대한 신라의 반응은 비교적 냉담하 여 당의 책봉에 대한 謝恩使의 파견이나 중종 즉위에 대한 축하 사절 도 없이 줄곧 침묵으로 일관하였다.30) 고종대 당의 동북방정책은 도독 부 설치와 도독 임명을 통해 실현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신라가 1국가 체제를 유지하는 상황으로 볼 때, 지배ㆍ통제를 목표로 한 당의 공격 적인 대외 정책에 제동이 걸렸다고 하겠다.
이는 서돌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돌궐에 대한 당의 기미 지배는
태도가 못마땅하였던 당은 678년(儀鳳 3)에 파병하여 신라를 징벌하고자 하였 으나 시중 장문관의 만류로 시행되지 못하였다(資治通鑑 高宗 儀鳳 3년 9월 기사. 上將發兵討新羅,侍中張文瓘臥疾在家,自輿入見,諫曰今吐蕃爲寇,方發 兵西討;新羅雖云不順,未嘗犯邊,若又東征,臣恐公私不堪其弊. 上乃止).
28) 堀敏一, 中華的世界帝國 (中國と古代東アジア世界, 岩波書店, 1993), p.222. 堀敏一은 당이 사실상 신라에 의한 한반도의 영유를 인정하였고 또 한 반도 전체가 하나의 기미주로 되고 이것에 종래의 낙랑군왕신라왕 등의 책봉 호가 더했진 것으로, 결국 완전한 책봉관계라고 하였다.
29) 文武王 法敏이 죽고 아들 政明(神文王)이 즉위하자, 681년 10월에 당은 견사 하여 정명을 신라왕에 책봉하고 문무왕의 관작을 이어받게 하였다(資治通鑑 高宗 開耀元年 10월 기사. 十月,丁亥,新羅王法敏卒,遣使立其子政明. 唐會 要 卷95 ; 삼국사기 신라본기 8. 唐高宗遣使 冊王爲新羅王 仍襲先王官爵).
권덕영[ 8, 9세기 ‘君子國’에 온 唐나라 使節 (新羅文化 25집), p.6]은 신문왕 통치기에 신라가 견사하여 正朔을 受領하기도 하며 관계 변화가 모색되었지만 692년에 신문왕이 죽음으로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고 하였다.
30) 일반적으로 이 시기는 나당관계는 거의 단절된 시기였다고 본다. 신형식, 統 一新羅의 對唐關係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일조각, 1984), p.327; 권덕영, 古代韓中外交史 (일조각, 1997), p.43.
불안정하였고,31) 이때에 ‘十姓無主’32)의 서돌궐을 이끈 阿史那都支는 吐蕃ㆍ于闐과 연합하여 670년(咸亨元年)에 당의 四鎭(龜茲ㆍ于闐ㆍ焉 耆ㆍ疏勒)을 빼앗았다. 서돌궐과 토번의 연합에 대응하여 당은 679년 (調露元年)에 裴行儉을 파견하여 都支를 사로잡으며 다시금 서돌궐과 서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였지만, 이미 북방에서 부흥한 돌궐 묵철 과 토번의 위협 속에서 서돌궐 부락 대부분은 산실된 상황이었다.33)
이렇게 동서로 확대된 기미지배정책은 각지의 저항에 무력진압으로 일관함으로써 대내적으로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였다.
資治通鑑
667 년(乾封 2) 기사에는 ‘빈번한 四夷의 정벌로 만필의 말과 창고가 점점 비어가자 장문관이 수 멸망의 교훈이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원컨대 백 성의 원망이 나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고 종대 대외정책이 대내외적으로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이렇게 고종대 대외정책에 제동이 걸리고 정책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 은 토번과의 관계에서 큰 요인을 찾을 수 있다.
Ⅲ. 吐蕃의 팽창과 唐使의 임무
당 고종대에 토번으로 파견된 唐使는 조문-세유-화친의 임무를 순 차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는 당이 서돌궐 정벌과 지배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唐使의 임무와는 크게 다르다. 그렇다면 토번에 파견 31) 唐이 可汗兼都督으로 책봉한 彌射와 步眞은 綏御의 재간이 없었고, 또 권력 갈등 속에 대총관 蘇海政이 彌射를 참수(662년, 龍朔2)하자 鼠尼施ㆍ拔塞干部 가 이를 원망하며 분산하였다.
32) 新唐書 卷215下 突厥傳(下).
33) 舊唐書 卷194下 突厥傳(下). 資治通鑑 則天武后 天授元年 10월기사. 당은 685년에 阿史那彌射의 아들 元慶을 昆陵都護로 삼고 또 686년에 阿史那步眞의 아들 斛瑟羅를 濛池都護로 삼아 서돌궐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 다. 하지만 斛瑟羅는 형벌이 잔혹하여 국인의 마음을 얻지 못하였고 斛瑟羅의 부하 莫賀達干(오질륵)이 세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元慶이 692년(如意元年) 내 준신의 무고로 죽고 서돌궐은 阿史那俀子를 가한으로 삼고 토번과 연합하였다.
된 각 임무의 의미와 특징, 나아가 唐使 파견의 성과와 한계는 무엇이 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1. 冊封 없는 弔問使의 파견
토번에 파견된 唐使의 임무 중 두드러지는 것은 冊封 없는 조문이 다.34) 고종대에는 토번으로 3차례의 조문사가 파견되는데, 먼저 650년 (永徽元年)에 당의 문성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贊普 棄宗弄贊이 죽자 당이 右武衛將軍 鮮于臣濟를 보내 조문하였다.35) 3품의 將軍이 조문사 로 파견된 것은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것으로,36) 鮮于臣濟는 조문 이외 에 또 다른 임무를 부여받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이는 679년(調露元年)에 토번 贊普 芒松芒贊의 죽음37)에 대한 당의 태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즉 贊普 芒松芒贊이 죽고 8세의 어린 아 들 器弩悉弄38)이 즉위하자 당 고종은 이를 기회로 토번을 도모하고자
34) 649년(貞觀 23)에 즉위한 고종은 토번 贊普 棄宗弄贊을 駙馬都尉 西海郡王에 책봉하여 토번과의 通使를 조공과 책봉에 의한 중국 중심의 관계로 구축하고 자 하였다. 그러나 사료 중에는 당의 책봉에 수반되는 토번의 답사나 조공은 없다. 다만 贊普 棄宗弄贊이 長孫無忌에게 서신을 보내 ‘신하로서 불충함이 있 으면 마땅히 병사를 끌고 가 토벌할 것이다’고 으름장을 놓을 뿐이었다(資治 通鑑 太宗 貞觀 23년 10월 기사).
35) 舊唐書 本紀 高宗 永徽元年 5월기사. 舊唐書 卷196上 吐蕃傳. 永徽元 年, 弄贊卒. 高宗爲之擧哀, 遣右武候將軍鮮于臣濟持節齎璽書吊祭.
36) 고조대에 돌궐에 파견된 조문사는 정5품상의 內史舍人 鄭德挺이고 고창에 파 견된 이는 前河州刺史 朱惠表다. 또 태종대에 백제에는 정5품상의 祠部郎中 鄭 文表가, 고구려에는 종5품하의 太常丞 鄧素가 각기 조문사로 파견되었다. 이밖 에도 특별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당의 조문사는 太常丞ㆍ司農丞ㆍ郎將ㆍ京 兆少尹ㆍ左淸道率ㆍ贊善大夫 등 5-6품관에 해당한다.
37) 劉立千은 西藏王臣記 각주272)에서 芒松芒贊(松贊干布의 손자)의 사망 시 점에 대해 芒松芒贊이 죽고 수일 후에 태어난 器弩悉弄이 704년에 29세로 사 망한 것을 역추적하면 芒松芒贊의 죽음은 676년이 된다고 언급하였다. 資治通 鑑과新唐書 吐蕃傳에는 679년(儀鳳4)으로 기록하고 있다.
38) 五世達賴喇嘛의 西藏王臣記 (氏族出版社, p.33)에는 都松芒布吉으로 기록하 고 있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裴行儉이 토번 內政이 論欽陵에 의해 안정적으 로 장악ㆍ유지되고 있으므로 불가능하다고 반대함에 따라 당의 토번 정벌은 결국 실행되지 못하고,39) 다만 정5품상의 郞將 宋令文을 조문 사로 파견하였다.40) 여전히 토번이 내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680년(永 隆元年)에도 당은 문성공주의 죽음을 조문하는 사신을 파견하는데41) 그저 遣使로만 기록하고 있다.
이를 되짚어보면, 650년에 당이 右武衛將軍 鮮于臣濟를 조문사로 파 견한 것은 679년에 고종이 토번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과 같은 이유 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贊普 棄宗弄贊의 죽음과 어린 손자의 계위 상황에서42) 贊普의 죽음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토번 내부의 혼란에 당 이 군사개입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고종 통치 초기에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대외 정책이 구사되었음을 상기하면 더욱 그러하 다. 그러나 토번은 棄宗弄贊의 총신으로 그의 사후에 토번 권력을 장 악한 論欽陵과 그의 아들들에 의해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고, 그러한 까 닭에 군사 행동을 수반한 안무는 수행될 수 없었다고 하겠다.43)
2. 責讓의 說諭와 한계
토번 贊普 棄宗弄贊이 그 통치 말기에 羊同을 완전히 통일하면서44) 39) 資治通鑑 高宗 調露元年 2월 기사.
40) 舊唐書 卷196上 吐蕃傳. 冊府元龜 卷979 外臣部 和親2. 冊府元龜 卷 980 外臣部 通好. 資治通鑑 高宗 調露元年 10월기사. 癸亥, 吐蕃文成公主遣 其大臣論塞調傍來告喪, 幷請和親, 上遣郎將宋令文詣吐蕃會贊普之葬.
41) 舊唐書 卷196上 吐蕃傳.新唐書 卷216上 吐蕃傳.
42) 資治通鑑 高宗 永徽元年 5월기사. 壬戌,吐蕃贊普弄贊卒,其嫡子早死,立 其孫爲贊普. 贊普幼弱,政事皆決于國相祿東贊.
43) 고종대 토번에 책봉 없는 조문사가 파견된 것은 고조대에 돌궐에 파견된 조 문사와 같다. 이는 당과 토번의 관계가 당 건국초 돌궐과 마찬가지로 당의 책 봉을 받는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44) 羊同은 티벳고원의 서북부에 위치한 Zhangzhung을 말한다. 棄宗弄贊이 여동 생을 Zhangzhung왕과 결혼시키고 연합한 후 말년에는 Zhangzhung을 완전히 소멸시키는데 진력하여 644년에 Zhangzhung왕을 죽이고 653년에 완전히 멸망
토번은 내부적으로 통일과 안정을 이루었고, 그 사후에 大臣 祿東贊45) 이 토번의 정치ㆍ군사권을 장악하면서 토번은 대외 팽창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46) 이렇게 토번이 타림분지와 吐谷渾으로 세력을 확장시키 고자 하면 당과의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660년(顯慶 5) 8월에 토번은 吐谷渾이 당에 내부하였음을 이유로 吐 谷渾을 공격하여47) 결국 663년(龍朔 3) 5월에 吐谷渾을 대파하였다.48) 그해 6월에 靑海에 주둔한 祿東贊(噶尔ㆍ東贊域松)이 견사하여 화친을 청하자 당은 左衛郎將 劉文祥을 토번에 파견하여 책망하였다.49) 그러 나 토번은 다시 665년(麟德 2)에 견사하여 吐谷渾과의 화친을 청하며 赤水에서 목축하기를 요구하였다.50) 이는 토번이 吐谷渾에 대한 토번 의 지배권을 당이 인정함과 동시에 청해 근처의 赤水51)를 요구하는 것으로, 당이 이를 거절한 것이다.
한편으로 당과 토번의 서역쟁탈전은 于闐을 중심으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52) 이 과정에서 서돌궐은 당과 토번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당하였다. Warren W. Smith, Jr. Tibetan Nation, Westview Press, 1996. p.65.
Christopher I. Beckwith, The Tibetan Empire in Central Asia,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7. p.20. p.25.
45) 棄宗弄贊(松贊干布)의 어린 손자(芒松芒贊)가 贊普로 즉위함에 따라 棄宗弄贊 의 총신이었던 祿東贊은 군부를 장악하며 토번의 실권자로 자리 잡았다.
46) 徐榮敎는 정부 실권을 장악한 祿東贊이 군사적 팽창을 통해 내부 갈등의 발 생 소지를 감소시켰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羅唐戰爭의 開始와 그 背景 . pp.14-15).
47) 資治通鑑 高宗 顯慶 5년 8월 기사.
48) 資治通鑑 高宗 龍朔 3년 5월 기사. 新唐書 卷216上 吐蕃傳. 舊唐書 卷 196上 吐蕃傳. 토번이 강성해지자 吐谷渾 내부에는 토번과 연합한 반당세력이 형성되었고 친당적인 吐谷渾 가한과 홍화공주는 양주로 內徙하였다.
49) 資治通鑑 高宗 龍朔 3년 6월 기사.
50) 資治通鑑 高宗 麟德 2년 정월 기사.
51) 舊唐書 地理志에는 赤水가 하서절도사 관할로 赤水軍이 涼州城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52) 이미 662년(龍朔 2)에 彌射의 죽음으로 촉발된 반란세력을 당군이 疏勒까지 추격하였을 때, 토번에 弓月이 疏勒 남쪽에서 이들과 대치하였고, 663년(龍朔 3)에 토번과 弓月이 내응하여 于闐을 공격하였으며, 또 665년(麟德 2)에 疏勒 과 弓月과 연합한 토번이 于闐을 침략하였다.
세력을 강화하고자 하였고,53) 당은 백제전에 이어 숙원사업이던 고구 려 정벌과 對신라전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서돌궐과 연합한 토번 은 670년(咸亨元年) 4월에 서역 18州와 龜玆의 발환성을 함락시키고 당의 안서4진54)을 파하였다.55) 이에 당은 그해 8월에 설인귀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토번을 토벌하게 하였지만 결과는 당의 대패였다.56)
吉州長史 陳行焉이 토번에 파견된 것57)은 이 시점으로 보인다.
新 唐書
토번전에는 陳行焉이 토번의 권력자 欽陵58)에게 절하기를 거부 하여 10년간 당에 돌아오지 못하다가 永隆元年(680)에야 당으로 돌아 와 睦州刺史에 추증되었다고 기록하고59) 있기 때문이다. 欽陵에 대한 태도나 欽陵의 반응으로 볼때, 唐使 진행언은 토번의 안서 4진 함락과 吐谷渾의 귀환에 대한 당의 입장을 세유하기 위해 파견된 것으로 짐작 된다. 하지만 토번은 이미 龜玆를 비롯한 타림분지를 장악하고 또 당 의 10만 대군을 대파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굳이 당과 타협할 의사 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토번이 唐使를 억류하고 군사 실력을 행사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唐使 劉文祥과 陳行焉은 토번을 責讓하는 세유사로 파견되었다. 이 는 돌궐 정벌 이후 토욕혼이나 고구려에 파견된 세유사가 위압적으로 責讓한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태종대에 의도하고 경험한 바와 달리 唐使의 억류라는 강경한 반응이었다.
53) 토번과 타림분지는 곤륜산맥이 있어 진출이 용이하지 않았다. 余太山은 西 域通史 (中州古籍出版社, 2003. p.173)에서 이러한 여건으로 토번이 서역에서 대규모 전쟁을 하는 것은 힘들고, 당과 토번의 서역내 군사력은 서돌궐 유목부 락에 대한 장악력에 좌우되었다고 지적하였다
54) 資治通鑑에는 龜茲ㆍ于闐ㆍ焉耆ㆍ疏勒을 안서4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余 太山은 焉耆가 아닌 碎葉이라고 설명한다(余太山, 같은책. p.172).
55) 新唐書 卷216上 吐蕃傳. 당은 이때 안서4진을 모두 廢하였다.
56) 資治通鑑 高宗 咸亨元年 4월 기사. 8월 기사.
57) 冊府元龜 卷661 奉使部 守節.
58) 토번의 승상 祿東贊의 아들로, 祿東贊이 죽고 동생 贊婆ㆍ悉多于ㆍ勃論과 함 께 권력을 장악하였다.
59) 永隆元年, 文成公主薨, 遣使者吊祠, 又歸我陳行焉之喪. 初, 行焉使虜, 論欽陵欲 拜己, 臨以兵, 不爲屈, 留之十年. 及是喪還, 贈睦州刺史.
3. 강요된 和親
토욕혼과 타림분지로 무섭게 팽창하던 토번은 결국 672년(咸亨 3) 2 월에 吐谷渾의 영토를 모두 획득하였다.60) 이에 옛 땅으로 돌려보냈던 吐谷渾이 토번의 강성함에 밀리게 되자 당은 다시 靈州에 安樂州를 두 어 吐谷渾을 거주하게 하였다.61) 당의 이러한 조처는 비록 당이 吐谷 渾 영토에 대한 토번의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닐지라도 실제적으로는 그 지배권을 유보 내지는 포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같은 해 4월에 토번이 당에 견사하자 당이 都水使者 黃仁素 를 답사로 파견하였다.62) 이때 토번의 요구와 唐使의 임무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한참 후인 696년에 欽陵이 ‘황인소가 화친을 약 속하므로 변방을 지켜 경계하지 않았는데…(후략)’63)라고 언급한 내용 을 통해 唐使 황인소는 吐谷渾의 영토에 대한 토번의 지배권을 묵인하 며 토번과의 화친을 도모하는 임무를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 을 둘러싼 당시 국제 정황을 살펴보면, 당은 668년에 고구려를 정벌한 이후에도 고구려 부흥을 추진하는 세력과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따라 서 당은 이미 상실한 토욕혼 영토에 대한 토번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서 최소한 토번과의 직접적 군사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675년(上元 2)에 토번은 다시 사신 論吐渾彌를 보내 吐谷渾과의 善 隣友好 관계의 회복(與吐谷渾復修鄰好)을 요구하였다.64) 이미 672년에
60) 資治通鑑 高宗 咸亨 3년 2월 기사.
61) 新唐書 卷221 吐谷渾傳.舊唐書 卷198 吐谷渾傳..
62) 資治通鑑 高宗 咸亨 3년 4월기사.
63) 新唐書 卷216上 吐蕃傳. 靑海之役 黃仁素約和 邊守不戒…(후략).
64) 資治通鑑 高宗 上元 2년 정월 기사. 670년에 토번이 吐谷渾의 영토를 차지 하였는데 675년에 다시 토번이 당에게 吐谷渾과의 ‘復修鄰好’를 요구한 것은 토번이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쇠퇴하였음을 시사한다. 또 토번과 연합하던 서돌궐의 阿史那都支가 671년에 당으로부터 匐延都督으로 임명되고 673년에 소사업이 弓月을 토벌한 후 弓月과 疏勒, 于闐이 차례로 당에 입조하였다.
토번에 의해 강점된 吐谷渾에는 친토번정권이 수립되었고65) 토번은 당이 이러한 吐谷渾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 이 이를 거부하자 토번은 676년(儀鳳元年)에 鄯ㆍ廓ㆍ河ㆍ芳州와 疊州 를,66) 677년(儀鳳 2)에는 서돌궐과 연합하여67) 扶州의 臨河鎭을68) 공 격하였다. 이에 당은 서둘러 신라와의 전쟁을 종결하고 678년(儀鳳 3) 에 이경현을 대총관으로 하여 대토번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당은 토 번에 크게 패하였고 직후에 監察御史 婁師德을 토번에 파견하고 있 다.69)
資治通鑑
에는 ‘누사덕이 황상의 뜻을 알리며 禍와 福으로 타이 르니 論贊婆가 매우 기뻐하고 이로써 수년간 변방을 범하지 않았다’70) 고 하였고, 또
新唐書
누사덕전에는 利害를 開陳하였다71)고 기록한 다. 즉 토번의 論贊婆가 기뻐한 이유는 利의 확보였고 이는 토번의 요 구, 즉 ‘與吐谷渾復修鄰好’임이 분명하다.위의 두 기사에 보이는 토번의 ‘請和’는 대외적으로 팽창한 토번이 吐谷渾을 점령하고 타림분지의 안서4진까지 획득한 이후 지속적으로 당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면서 이들 영역에 대한 토번의 지배권을 인정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에 대해 당은 都 水使者 黃仁素, 監察御史 婁師德을 파견하여 토번의 요구를 수용하고 화친해야 했다.
중국의 사료에는 당과 외국의 화친이 항상 외국의 請和에 따른 것 이며 당이 不許 혹은 許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 현과 달리 唐使 파견을 통해 살펴본 당과 토번의 관계는 토번의 강압 65) 楊銘, 唐代吐蕃與西域諸族關系硏究 (黑龍江敎育出版社. 2005), p.3.
66) 資治通鑑 高宗 儀鳳元年 3월 기사. 8월 기사.
67) 671년 당의 도독책봉을 받았던 阿史那都支가 676년 다시 토번과 연합하였다.
68) 新唐書 本紀 高宗 儀鳳 2년. 資治通鑑 高宗 儀鳳 2년 5월 기사.
69) 新唐書 卷216上 吐蕃傳. 資治通鑑 高宗 儀鳳 3년 9월 기사. 대총관 이경 현이 사로잡히고 유심례는 전사하는 등 고전을 하다가 흑치상지가 500명의 용 사로 토번을 크게 이기며 난관을 벗어나 한숨 돌릴 수 있었다.
70) 資治通鑑 高宗 儀鳳 3년 9월 기사. 因命使于吐蕃, 吐蕃將論贊婆迎之赤嶺.
師德宣導上意, 諭以禍福, 贊婆甚悅, 爲之數年不犯邊.
71) 新唐書 婁師德傳. 師德喩國威信, 開陳利害, 虜爲畏悅.
적인 요구를 당이 수용하여 화친하는 것이다. 바로 강요된 화친이다.
묘하게도 이러한 관계는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하며 기미지배를 실현 시켰던 고종대에서 확인된다.72)
Ⅳ. 결론 : 고종대 대외정책의 성격과 의미
唐이 정벌을 통해 邊外에 羈縻府州體制를 시행하기 시작한 것은 태 종말의 일이지만, 고종대에는 이를 서돌궐과 고구려까지 확대시키면서 최대 판도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고종대 唐使 파견은 고종즉위(650)로 부터 661년까지는 서돌궐에, 670년부터 고종말까지는 토번에 집중되었 고, 파견 횟수도 년 0.53회로 무척 적다. 뿐만 아니라 고종대의 조공 횟수73)도 태종대에 비해 현격히 적다. 이는 당의 주된 사신 교류국(돌 궐을 비롯한 철륵, 서돌궐, 고구려, 백제 등)이 정벌되었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신라나 토번과의 관계를 통해 볼 때, 정벌과 지배를 목표로 한 고종대 대외 정책의 성격에 기인한 측면이 강하다고 하겠다.
고종대 당의 사신 외교는 주로 정벌 전 招慰와 정벌 후 冊封이다.
반면에 당의 說諭가 유효하지 않았던 토번에는 주로 군사적으로 대응 하였고,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토번의 요구를 수용ㆍ화친하 였다. 또한 당의 지배를 거부한 신라와의 사신 왕래는 거의 단절된 상 황이었으며, 일본에 파견된 두 차례의 사신 역시 일본과의 국교가 목 적이 아니라 신라를 견제하는 측면이 강하다. 즉 고종대 대외정책은 주로 군사 정벌과 기미부주체제의 확대였고, 이 과정에서 사신외교의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고종대에는 사신 외교의 비중이 낮았고 또 토번과 같 72) 그럼에도 토번은 현종 즉위 후에야 당에 敵國禮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고종 -중종 통치시기에 양국관계가 敵國禮를 요구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 라, 이러한 중국적 질서에 토번이 크게 얽매이지 않았던 까닭으로 보인다.
73) 각주2) 참조.
은 강력한 국가에 대해서는 효과가 없었을까.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고종대 대외정책은 태종대에 구축된 국제적 지위와 대외적 역량 이 상승곡선을 그리는 시점에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당은 국제 질서의 중심에서 각국의 군주를 책봉하며 전통적인 중화이념을 실현시키고, 나아가 기미지배체제의 실시로 책봉 보다 강력한 통제가 가능해졌다.
이렇게 당의 국제적 위력이 커지면서 더불어 대외관계에서 중화적 이념 역시 크게 고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74) 때문에 고종대에는 강성한 토번의 공세와 요구에 여전히 효과 없는 ‘천자의 說諭’를 반복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미 광범위한 이민족 지역에 당의 지배체제를 실현한 고종대에 책봉-조공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사신 외교는 그 비 중이 낮아지고 경직되었다고 보인다. 그렇기에 토번에 대해 전쟁 이외 의 유효한 외교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고종대의 대외 정책은 토번의 공세와 서돌궐의 反唐으로 동 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신라는 당의 지배를 거부한 상황이었고, 고종 말에 북방 돌궐 역시 당의 지배체제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는 당 의 군사력이 광범위하게 확장된 기미부주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며 기 미부주체제를 통한 지배라는 대외 정책에 한계가 드러났음을 보여준 다.75)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은 678년(儀鳳 3)에 황제 고종의 주도하에 신 라를 토벌하려76) 하고, 679년(調露元年) 2월에 贊普의 죽음을 기회로 토번을 도모하고자77) 하였다.78) 이 밖에도 당은 동요하는 대외질서에 74)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세심한 분석이 요구되며, 다른 기회에 보다
더 살펴보고자 한다.
75) 唐代에 중요한 대외 문제는 주로 황제가 재상회의를 거쳐 결정하였던 만큼 황제 고종을 위시한 통치집단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분석할 필요가 있지만, 이 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대외 관계를 다룬 것은 아니지만 고 종대 통치집단을 전ㆍ후기로 나누어 분석한 임대희의 논문[ 唐 高宗 統治前期 의 政治와 人物 (김문경교수정년퇴임기념동아시아사연구논총, 혜안, 1996);
唐 高宗 統治後期의 政治와 人物 (중국학보 47)]이 있다.
76) 각주 27)참조.
분주하게 토벌군을 파견하여79) 당의 지배질서를 지속시키고자 하였다.
이로써 볼 때, 고종대 당의 대외정책은 다양하고 융통성 있는 사신외 교에 무척 소극적인 반면, 정벌과 지배의 팽창 정책이 그 한계에도 불 구하고 고종말까지 일관되게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77) 본문 Ⅲ. 1. 冊封 없는 弔問使의 파견 참조.
78) 이러한 고종의 토벌 계획은 장문관과 배행검의 반대 건의에 따라 실현되지는 않았다. 또 679년(調露元年) 6월에는 당의 조정에서 토번과 연합한 서돌궐 阿 史那都支와 李遮匐을 군사를 발동하여 토벌하고자 하였는데, 배행검은 이를 반 대하고 대신 波斯王 책립과 大食 안무사로 가장하여 이들을 제압하였다(資治 通鑑 高宗 調露元年 6월기사). 하지만 이것이 고종대 대외 정책의 전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79) 資治通鑑에는 676년(儀鳳元年) 정월의 납주 요족의 반란, 679년(調露元年) 10월의 선우대도호부 관할의 돌궐 반란, 682년(永淳元年) 서돌궐 阿史那車薄의 배반 등에 당이 군사 토벌을 결정ㆍ실행하였다고 하였고, 또 677년(儀鳳 2)에 도하군에 진수하는 유인궤로 하여금 군사를 크게 발동하여 토번을 토벌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Abstract)
The Character and Meaning of Foreign Policy during the Reign of Tang Kao-tsung:
Focused on the Dispatch of Tang’s Envoys
Yum, Kyoung Yi
Tang acquired the largest territory during the reign of Kao-tsung. In this period, the dispatch of Tang’s envoys became concentrated on Western Turkic Khaganate and Ancient Tibet, but the number of dispatching them was too few. The task and object of Tang's envoys were different from country to country, and Tang aimed to conquer and swayed the Western Turkic Khaganate in early Tang. But Tang accepted demands of the strong Ancient Tibet and entered into friendly relations with it, and almost broke off diplomatic relations with Shilla. This is a result that Tang under Kao-tsung's reign gave little weight to the diplomacy through envoys and pushed ahead the foreign policy of conquest and control.
The foreign relations of Tang started to be changed rapidly around 670. Western Turkic Khaganate and Ancient Tibet united against the Tang, and Shilla broke the link with the Tang and rejected the control of Tang. Ancient Tibet in northern, too, began to resist strenuously it. Already at the end of Kao-tsung's reign, Jimi local administration system reached the limit to the foreign
policy. In other words, the military power of Tang was inadequate to be capable of Jimi local administration largely expanded.
In this, Tang dispatched punitive forces and actively coped with the situation. Its friendly relations with Ancient Tibet resulted not from the change of its foreign policy in a large sense, but from military attacks of Ancient Tibet on Tang. Tang fundamentally adhered to previous foreign policy in spite of the rapidly changing international circumstances. We can find the fact that Tang would subjugate the Shilla in 678 and Ancient Tibet in 679 under the leadership of Emperor Kao-tsung.
The diplomacy in one of contemporary sense that presupposes the equal and independent foreign policy didn't exist in many chinese dynasties as well as Tang. Barbarians who weren't directly ruled by the Chinese emperor, a son of Heaven were the subject that would become domesticated by the son's virtue, and the figure that should receive the investiture and pay the tribute to China. We can find that diplomacy based on the Sinic ideology, which contained the control of the world by means of the investiture of foreign kings by the Chinese emperor, had weakened, on the contrary, during the reign of Kao-tsung who had established the Chinese control system to the wide area of Barbarians.
주제어: 당, 고종, 대외정책, 사신, 외교, 기미지배체제, 서돌궐, 토번 關鍵語: 唐, 高宗, 對外政策, 使臣, 外交, 羈縻支配體制, 西突厥, 吐蕃
Keywords: Tang, Kao-tsung, Foreign Policy, Envoy, Diplomacy, Jimi Local Administration System, Western Turkic Khaganate, Ancient Tibet
(원고접수: 2011년 10월 3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12월 4일, 수정원고 접 수: 12월 13일, 게재 확정: 1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