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과 -周初 中原 勢力 北京 進入 衝突-
( )
裵 眞 永 全北大
. 머리말
Ⅰ
교체 시기의 정치적 상황은 내에서의 세력 재편성과 함께
商周 中原
그 파장이 각지로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北京 및 燕山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1) 商遺民의 대규모 이주와 燕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이 지역의 기존 질서와 세력집단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西周 이전 북경지역은 중원세력과 일정한 교류를 하였 을지라도 중원세력 즉 商族의 터전은 아니었다 상대 북경지역은 때로. 는 적대적이며 때로는 연합하였던 상의 방국인 ‘北方’ 너머의 지역이었 던 것이다.2)
이 논문은 년 정부 교육인적자원부 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
* 2005 ( )
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KRF-2005-050-A00002)
1) 고대 북경지역의 호칭에 대해서는 幽燕 幽州 燕山, , 지역 등의 명칭이 존재한 다 지리적으로는 연산지역 문화적으로는 유연문화 고대 행정구역상으로는. , , 유주지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서주시기에 중원세력의 진출이. 연산지역이나 유연지역 전체를 포함하지 않았고 핵심적 진출 지역이 북경 지 역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포괄적 명칭보다는 북경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 다.
. 머리말
Ⅰ
와 의
. 匽器 燕 立國
Ⅱ
과 의
. 黃土坡 墓葬 商遺民 進入
Ⅲ
.昌平 白浮墓와薊國
Ⅳ
맺음말 지역의 관계
. : 周初 北京 勢力
Ⅴ
그러나 상의 멸망으로 인한 상유민의 북방으로의 적극적 이동과 동 시에 상을 완전히 제압코자 하였던 주왕실의 치열하였던 동방 정벌의 과정은 결과적으로 북경지역으로 중원세력의 진입을 적극적으로 야기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북경지역은 중원세력과. 原有의 토 착세력간의 충돌과 한편으로는 공존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선진시기 북경지역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대부분 燕國과 燕文化 연 구에 치중하고 있다.3) 따라서 연의 입국으로 인해 북경 및 연산지역 뿐 아니라 중국 동북지역까지 연을 대표로 하는 중원세력이 확보하였 다는 측면만이 부각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북경지역에는 중원세. 력의 진입 이전에 토착세력이 강고하게 존재하였다 따라서 상말주초. 중원세력의 진입에 따른 기존 토착세력과 이들간의 관계를 밝혀보는 것은 선진시기 북경지역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 된다.
본고는 이러한 입장에서 고대 북경의 역사를 서주 초기 중원 세력 의 북경 진입과 그에 따른 북경지역내의 충돌과 공존의 과정을 살펴보 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은 사료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북경지역에서. 출토된 최근의 주요 발굴성과를 기반으로 삼고자 한다 이에 따라 본. 고는 匽器를 통해 중원의 핵심 세력집단인 연의 입국과, 黃土坡 묘장 에서 보이는 상유민의 진입 및 白浮墓에서 보이는 세력집단을 살펴본
2) 졸고, 「갑골 금문으로 본 상대 북경지역 정치체‐ 」 ( 중국사연구 47, 2007), pp.3-7 참조.
3) 대표적인 연국 및 연문화 연구자로는 陳平, 曲英傑, 陳光 등이 있다 중요한. 성과물로는 燕文化硏究論文集 陳光( 滙編 中國社會科學出版社, , 1995); 北
3040 ( ,
京建城 年曁燕文明國際學術硏討會會議專輯 北京市文物硏究所 北京燕山 등이 있다 이 중 은
, 1997) . ( ,
出版社 陳平 燕事紀事編年會按 北京大學出版社
등과 같은 연국 연구에서의 가장 기초적 1995); 燕文化 文物出版社( , 2006)
성과물을 내고 있는 대표적 연구자이다 이외 북경의 고고학적 성과 및 연구. 를 발표하는 간행물로는 北京文博 北京市文物局( 主辦), 北京文物與考古
등이 있다 최근에는 중국 동북지역문화와의 관련성 (北京市文物硏究所 編) .
속에서 이 지역문화를 설명하는 성과물이 나왔다(郭大順 張星德‧ , 東北文化與
, , 2005).
幽燕文明 江蘇敎育出版社
후 이들과 북경지역의 토착세력간의 관계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
와 의
. 匽器 燕 立國
Ⅱ
주지하듯이 연의 입국은 주초 북경지역에 커다란 정치적 격변을 야 기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북경지역에서의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 는 1970년대에 이루어진 北京市 房山區 琉璃河鎭 유적지 이하 유리하( 유지 의 발굴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 董家林村 古城과 黃土坡 묘장의 정황은 주초 중원세력의 북경 진출을 확인시켜 주었다.4) 유리하 유지 는 북경시 서남 교외에 있는 大石河 琉璃河( ) 북쪽에 위치하는데 북으 로는 燕山과 軍都山, 서쪽으로는 西山과 太行山脈을 병풍으로 하는 북 경의 소평원의 남부에 위치하여 남쪽으로는 大石河를 사이에 두고 華 대평원과 연결되어 있다 이 유리하 유지는. , , ,
北 洄城 劉李店 董家林
및 , 등의 촌락을 포괄하는 거주지 묘장 촌락을 모두
黃土坡 立敎 莊頭 ‧ ‧
갖춘 서주시기 유지이다 중심 촌락은 성지가 발견된 동가림촌과 귀족. 묘지가 발견된 황토파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 대형 묘장뿐 아니. 라 거마갱도 여러 기 발견되었으며 청동 예기와 筒瓦, 도범 및 배수관 과 같은 예사롭지 않은 등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 고위 관직을 의. 미하는 ‘大保’, 洛邑을 의미하는 ‘成周’ 명문을 가진 청동기의 출토는 서주시기 이 지역에 대규모의 제후분봉이 이루어진 도성지임을 적극적
4) 北京市文物硏究所, 琉璃河西周燕國墓地,1973-1977 (文物出版社, 1995);
, ( 1963-3);
北京市文物工作隊 「北京房山縣考古調査簡報」 考古 中國社會科學 , 1981-1983
院考古硏究所 北京市文物工作隊琉璃河考古隊‧ ‧ 「 年琉璃河西周燕國
( 1984-5);
墓地發掘簡報」 考古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北京市文物硏究所‧
, 1193 ( 1990-1);
琉璃河考古隊 北京琉璃河 號大墓發掘簡報 考古 北京市文
‧ 「 」
, 1995 (
物硏究所 北京大‧ 學考古學系「 年琉璃河遺址墓葬區發掘簡報」 文物 1996-6); 北京大學考古學系北京市文物硏究所‧ , 「1995年琉璃河周代居地發掘
( 1996-6); ,
簡報」 文物 北京市文物硏究所 「北京房山琉璃河遺址發掘的商代遺
( 1997-4); , 1996 (
跡」 文物 琉璃河考古隊 「琉璃河遺址 年度發掘簡報」 文物 1997-6).
으로 알려 주고 있다.5)
특히 ‘匽侯’ 명문이 적혀 있는 匽器의 출토 언후 동기 출토 정황은( 표 참조 는 이 지역에) 燕國이 분봉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당시 연. 은 匽으로 칭해졌기 때문이다.6) 문헌사료에 연의 위치나 관련 내용이 5) 유리하유지의 발굴과 그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진행중에 있다(陳平, 燕文化 참조 단 고등급의 유물이나 귀족 묘장은 모두 서주 초기에만 , pp.32-55 ).
해당되고 서주 만기와 전국시기의 문화퇴적도 일부 발견되지만 고등급의 유물 은 사라져서 중간 시기에 커다란 변화가 감지된다 아마도 도성은 서주 초기. 에 이미 폐기되어 서주 만기와 전국시기에 이르면 일반인이 거주하게 되었다 고 추정되는데 해자의 퇴적에서 이러한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즉 서주 조기. 와 중기에 형성된 해자는 河內에 방어 기능을 하는 물이 가득 찼을 때 사용된 반면 그 바로 위에 있는 퇴적층은 흙탕물로 가득찼으며 동시기의 유적 내에는 고등급의 유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리하 성지는 서주 만기에 성지에 서 일반 거주민이 거주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琉璃河考古隊, 「琉璃河遺址 1996年度發掘簡報」 文物 1997-6).
6) 燕은 전국시기에는 郾, 서주시기에는 匽이라 칭해졌으며 燕은 진한대 이후 명칭 하였다.
동기 이름 명문 내용 출토지점
小臣 鼎䖒 □( )召公□燕 休于小臣 貝五朋 用作寶尊彝, 䖒 ,
憲鼎 隹九月旣生霸 辛酉在燕 侯易憲貝金, , . 揚侯休 用作召伯,
. , .
父辛寶尊彝 憲萬年子子孫孫寶 光用太保 山東濟寧梁山 亞盉 㠱侯亞疑 燕侯易亞貝 作父乙寶尊彝. , 北京 盧溝橋 匽侯旅盂 燕侯作旅盂
匽侯旨鼎 燕侯旨作父辛尊
匽侯旨鼎 燕侯旨初見事于宗周 王賞旨貝二十朋 用作有姒寶尊彝, ,
匽侯 盂錛 燕侯作 盂鐼 遼寧 凌源
菫鼎 燕侯令菫饌太保于宗周, 庚申 太保賞菫貝 用作太子癸寶, , .
尊□□ 北京琉璃河
復鼎 燕侯賞復冕衣 臣妾 貝 用作父乙寶尊彝, , , 北京琉璃河
匽侯盾飾 匽侯 北京琉璃河
伯矩鬲 在戊辰 燕侯賜白矩貝 用作父戊尊, , 北京琉璃河 圉方鼎 休朕公君, 燕侯賜圉貝 用作寶尊彝, 北京琉璃河
匽侯盾飾 匽侯舞陽昜 北京琉璃河
銅泡 匽侯舞昜 北京琉璃河
匽侯戈 匽侯 北京琉璃河
匽侯戟 匽侯舞戈 北京琉璃河
출토 정황
<匽侯銅器 >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 발굴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 다 이로 인해 연국. 封建과 立國 과정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던 것이 다.7)
연국 입국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유리하유지 M1193 大墓에서 출토된 銅罍, 銅盉의 명문은 周王이 제후를 책봉한 일을 기록하고 있 어 당시 서주의 제후분봉을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임과 동시에 燕侯 봉 건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M1193의 銅罍(銅盉)의 명문 내용은 다 음과 같다.
이 말하길 시여 당신은 제사의
‘周王 ; “太保 ! 盟誓 美酒,
① 8)를 당신의
군왕에게 바치시니 나는 당신의 향응에 대하여 크게 응대하여 감사히 답 합니다. 克으로 하여금 羌, , , , 馭 微, 등 방국의 부족을 다스리 도록 匽의 제후가 될 것을 명합니다” 克이 匽地로 가서 토지와 臣民을 접수하고 克은 이로 인하여 寶器(보배로운 제사용 그릇 를 만든다) .’9)
(<銅罍>,<銅盉>)
이는 주왕이 태보에게 포상하여 克을 연후로 책봉하고 아울러 6族 을 사여하는 내용이다 즉 이 명문은. 授民授疆土의 제후 봉건 의식을 기록한 것이다 이 명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분봉과. . 관련된 논의는 시기와 作器者 즉 1대 연후의 문제로 정리해볼 수 있
7) 졸고, 「西周 前期 燕國의 成立과 姬燕文化의 形成」( 東洋史學硏究 73, 2001), pp.2-4 참조.
8) 이 부분은 원문에는 ‘唯乃明乃鬯’이라고 되어 있다 이 중. 明은 盟을 의미하는 바, 盟의 주요 의식은 희생을 죽여서 그 피를 마시고 신명에게 맹세를 고하는 것으로 克이 정식으로 책명을 받아 연후가 되기 전에 필수적으로 천자에게 맹 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 明은 맹서의 盟자로 이해할 수 있다 또. 鬯은 제사 때 사용하는 울창주로 흑기장으로 만든 香酒이다(陳平, 「克罍,克盉銘文及其有
, pp.266-267).
關問題 燕文化硏究論文集」
9)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北京市文物工作隊‧ ‧琉璃河考古隊, 1981-1983「 年琉
;
璃河西周燕國墓地發掘簡報」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北京市文物硏究所 琉‧ ‧ 명문 내용은
, 1193 ( 1990-1).
璃河考古隊 「北京琉璃河 號大墓發掘簡報」 考古
다음과 같다. ‘王曰; “太保 唯乃明 盟, ( )乃鬯 享于乃辟 余大對乃享 命克侯于, . ,
, ,
匽 事羌 , , , ,馭 微”. 克 匽, 納土 厥有司 用作寶尊彝, ’.
다 시기문제에서 가장 논쟁이 된 부분은 명. 문에서 보이는 王이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 다 이에 대해서는. 武王,10) 武王 혹은 成 王11), 成王12), 成王 혹은 康王13) 등의 설이 있다 그러나 명문에 보이는. 太保의 존재는
이 가 되고 이 가 되어
‘召公 太保 周公 太師 成
을 도와 가 되었던’
王 左右 14) 것에서 보듯 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문의 召公奭
왕을 성왕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 다.
둘째 작기자가 소공석인지 혹은, 克인지의 문제이다 이는. 克을 인명 혹은 조동사 가능 의 의미 중 어떤 것으로‘ ’ 보는가가 관건이다 조동사의 가능이라는 의미로 볼 경우에는 작기자. 는 克이 아니라 태보 즉 소공석이 되며 이에, 1대 연후 역시 소공석이 된다.15) 반면 克을 인명으로 볼 경우 작기자인 극은, 1대 연후로 소 공석의 아들이 된다.16) 그런데 당시 召公은 周公과 함께 宗周에 남아 을 보좌하였기 때문에 은 비록 군후임에는 틀림없지만
成王 召公 始封
실제 取封할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魯에 봉해진 周公 대신 한 자가 주공의 이라는 점으로 볼 때 역시 과
取封 元子 伯禽 召公 周公
당시 중요 공신이었으므로 燕地에 가서 취봉할 겨를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극이 소공의 원자였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10) 方述鑫, 「太保罍, 盉銘文考釋」( 燕文化硏究論文集 ), p.288; 張亞初, 「太保
, ( ), p.296.
罍 盉銘文的再探討」 燕文化硏究論文集
11) 殷瑋璋 曹淑琴‧ , 「周初太保器綜合硏究」( 燕文化硏究論文集 ), p.239.
12) 孫 華, 「匽侯克器銘文淺見 兼談召公建燕及其相關問題- 」 ( 燕文化硏究論文集 ), p.278; 陳平, 「克罍,克盉銘文及其有關問題」, p.276.
13) 杜迺松, 「克罍克盉銘文新釋」( 古宮博物院院刊, 1998-1), p.63.
14) 尙書 「君奭 序」, ‘召公爲保 周公爲師 相成王爲左右, , .’
15) 張亞初, 「太保罍, 盉銘文的再探討」, pp.293-297; 殷瑋璋, 「新出土的太保銅
( ), pp.254-255, p.264.
器及其相關問題」 燕文化硏究論文集
16) 孫 華, 앞 글, p.279; 陳 平, 「克罍,克盉銘文及其有關問題」, pp.274-275.
<銅罍 銅( 盉>동기명문>
극이 소공 대신 燕地에 취봉했을 가능성이 높아17) 극을 인명으로 보 는 것이 합리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연후로 취봉한 자. 는 극으로 극이 제 1대 연후임을 알 수 있다.18) 한편 다음의 청동기 명문에는 燕侯旨가 보인다.
가 처음으로 종주에 가서 인사를 올렸다 왕은. 에게 상으
匽侯旨 旨
②
로 패20붕을 내리시어 (旨는 이에 어머니) ( ) 有姒를 위하여 보배로운 제 사용 그릇을 만든다.19) (<燕侯旨鼎>)
언후지가 부신을 위하여 제사용 그릇 준 을 만든다( ) .
③ 20) (<燕侯旨
>) 鼎
이 명문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旨가 몇 대 연후가 되는가이다 명문. 의 ‘初見事于宗周’는 旨가 즉위하여 宗周로 가서 주왕에게 朝見하는
②
것으로 그 때, 太保奭은 건재하였고 旨의 母인 有姒는 이미 고인이 되 었기 때문에 旨는 그 母 有姒를 위해 제기를 만든 것이다.21) 명문중
의 父辛은 太保 召公奭으로 旨는 召公奭의 아들이 된다.
③ 22) 그런데
명문 ③의 경우에는 ‘作父辛尊’시에 燕侯旨의 父인 父辛 즉 召伯父辛 즉 太保 召公奭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旨가 그 父인 辛을 위하여 제기 를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旨는 그 父 太保 召公奭의 과 의 두 시대를 뛰어 넘는 과도성의 인물이 되어서 그가 가
生 死 燕侯
17) 陳 平, 燕事紀事編年會按 , p.119 참조.
18) 이 동기 명칭에 대해 연후상사를 나타내는 이 청동명문은 克이 1대 연후가 된다고 이해하여 이 청동예기를 克罍, 克盉로 지칭하기도 한다 혹은 극을 인. 명으로 보지 않는 경우 작기자, 1대 연후 묘장을 모두 소공석 즉, 太保와 직 결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이 동기를 太保器 혹은 태보뢰 태보화라고 칭하기도, 한다(張劍, 「論西周燕國殷遺民的政治地位」( 北京建城3040年曁燕文明國際學術
, p.270 참조).
硏討會會議專輯
19) 殷周金文集成 5.2628, ‘匽侯旨初見事于宗周 王賞旨貝二十朋 用作有姒寶, ,
’.
尊彝
20) 殷周金文集成 4.2269, ‘匽燕侯旨作父辛尊’.
21) 陳 平, 燕事紀事編年會按 , p.157.
22) 陳 平, 燕事紀事編年會按 , p.162.
되는 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 燕侯克 이후가 되는 것이다.23) 정황상 와 은 모두 소공석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 는 다음의 2대 연
旨 克 旨 克
후가 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즉 명문중 보이는. 旨는 앞서 克과 형제 이며 또한 소공석의 아들로 2대 연후라 할 수 있다 이상에 의하면 주. 초 북경에 입국한 연국은 소공석을 대신하여 취봉한 克이 1대 연후이 며 그와 형제인 旨가 2대 연후로 취봉하였던 것으로 이들 동기 명문 에서 대 연후까지를 확인해 볼 수 있다2 .
그렇다면 연의 입국은 어떤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명문 ①에서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명문에 보이는. ‘羌, , , , 馭 微, ’ 등은 연후를 도와 연 입국 과정에 참여한 이들로 연 입국시에 연후에게 사여된 집단이다 이들에 대한 분석과 이해에. 대한 諸家들의 견해에는 차이가 난다.24) 그러나 보편적으로 M1193 대묘에서 보인 6족은 바로 周王이 燕地 이외에 있는 각 족을 사여한 것으로 그들은 모두 克을 따라 北燕에 가서 연국을 안정시켜 건국하고 강토를 개척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25)
이들 6족중 羌은 史記 「周本紀」에서 보이는 ‘庸 蜀, , 羌, 髣 微, , 등 국족이 을 따라 와 결전에 참여한 기 , , ’
廬 彭 濮 諸 武王 牧野 商紂
록에서 보이는 羌26)으로 羌族도 姬周克商을 협조한 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는 馬, , 免, 貍, 혹 豸 등으로 각기 달리 인식하지만 陳
에 의하면
平 方은 상왕실의 중요 盟國으로 상 멸망후의 중요 유민이 되어 ‘武王克商’ 이후 주에 반발한 東夷 諸방국과 같이 周에 적대시한 23) 陳 平, 燕事紀事編年會按 , pp.156-160 참조.
24) 이 6족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며 燕文化硏究論文集 에는 다음과 같은 연구 성과가 실려 있다. 張亞初, 「燕國靑銅器銘文硏究」; 張亞初, 「太保罍, 盉
; , ; ,
銘文的再探討」 殷瑋璋 曹淑琴‧ 「周初太保器綜合硏究」 孫 華 「匽侯克器銘
- ; , , ; ,
文淺見 兼談召公建燕及其相關問題」 方述鑫 「太保罍 盉銘文考釋」 陳 平 「 등.
克器克盉銘文及其有關問題」
25) 陳 平, 「克器事燕六族會釋考證」( 北京建城3040年曁燕文明國際學術硏討會會 ), p.257 참조.
議專輯
26) 史記 卷4 「周本紀」; ‘武王曰 嗟 我有國 君, 冢 , 司徒·司馬 司空· , 亞旅 師氏· ,
· , · · · · , , , , .’
千夫長 百夫長 及庸 蜀羌髳微纑彭 濮人 稱爾戈 比爾干 立爾矛 予其誓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있거나 혹은 蒲姑, 商奄之民의 叛周 반란을 허 락하거나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따라서. 克器 중 方은 반 란을 평정한 후 바로 周室에 신복한 商遺民 혹은 東夷 某方國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27) 또 이들의 위치를 河內, 河東지구 혹은 羌
인근의 지구가 아니라
方 陝甘 28) 東夷 강국인 國과 인근일 가능성이 있어서 豫, 魯 지구로 보았다.29) 는 羌方의 인근 융적30) 혹은 太行
부근
山 31)에 있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에 따르면 는 동이세력의 한 갈래로 叛周세력의 평정 이후 주에 신복한 세력으로 보았다.32)
는 盂方33) 으로 보는데 이는 서북 지역 정벌에 공을 세워 大盂鼎 과 小盂鼎을 만든 盂34)와 동족일 것으로 추정된다.35) 馭는 대부분 복 사중의 御方으로 보지만 그 위치는 아직 확정하기는 어렵다. 微는 일 반적으로 微國으로 본다.36) 陳平은 微는 상왕실 종실의 支族으로 상 왕조가 수백년 연속됨에 따라 微의 支族이 商의 각지에 몇 차례에 걸 쳐 확산되어 山東, 河北 陝西, , 관중 등지에서 모두 보이게 되었으며 이후 및 그 부근은 를 종주로 삼은 족이 유민
滅商 商 王都 微子 微氏
이 되어서 대부분 천도, 流亡하게 되어 일부는 宗周, 岐周로 안치되거 27) 陳平에 의하면 <亞 鴞尊>에서 보이는 은 商代의 중요 방국 부족을 표기 한 것이고 은허 부호묘에서 나온 모 세트 기물의 명문에 의하면 方의 여자 가 상왕에게 시집가는 것을 표시한 것으로 상왕의 후비가 되었다고 한다(陳
, , pp. 258-259 참조).
平 「克器事燕六族會釋考證」
28) 方述鑫, 앞 글, p. 289. 方述鑫은 이를 免方으로 보았으며 卜辭중의 兎는 을 벌한 주요방국이 되므로 인근이라고 보았다.
羌 羌方
29) 陳 平, 「克器事燕六族會釋考證」, p.259.
30) 殷瑋璋, 앞 글, p.255.
31) 孫 華, 앞 글, p.279 주 9) 참조. 孫華는 이들은 모두 방국 부족으로 연후 극이 연지에서 통력하거나 혹은 연지 이외에서 겸하여 관할한 방국 부족으로 보았으며 그들은 모두 태행산 부근에서 활동하였다고 지적하였다.
32) 陳 平, 「克器事燕六族會釋考證」, p.263.
33) 方述鑫, 앞 글, p.289 참조.
34) 白川靜, 金文 世界の -殷周社會史 ( 平凡社, 1971), pp.80-81 참조. 35) 李成珪, 「先秦文獻에 보이는 ‘東夷’의 性格」(韓國古代史硏究會 編, 韓國古代
1 , 1991), p.140.
史論叢 輯
36) 殷瑋璋, 앞 글, p.255. 陳 平,「克器事燕六族會釋考證」, p.266.
나 새로 분봉된 제후에게 사여되어 각국을 따라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 며 여기에서 보이는 微族도 이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았 다.37)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 6족은 대체로 周의 동맹족 혹은 에 한 상유민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이 연후를 따라와 연의 입 周 臣服
국 과정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姜叔에게 ...殷民 7족을 나누어주고, 魯에게 ...은민 6족을 나누어주고, 唐叔에게 ..懷姓 9종을 나누어주고...’38)에서 보이는 상유민의 사여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비록 문헌기록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이 명문의 6족 사여 내용은 각 제후들에게 分與된 상황이 연국에서도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연 분봉과정을 나타내는 명문 중 보이는 匽의 실체 즉, 燕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상대부터 존재한 방국 혹은 서주시기에 새로이 입, 국한 봉건제후국이라는 두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다 첫 주장은. 匽 은 상대부터 존재하였던 상대의 방국이자 북경지역의 토착 종족으로, 갑골문의 ‘ ’족이 匽, 즉 연국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다음의 주장은. 상 멸망 이후 주의 분봉과정에서 북경지역에 새로이 이식한 세력으로 의 匽, 즉 서주 姬姓의 연국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중국. 학계에서는 상고시대부터 북경지역을 중원의 세력범위였다는 점을 부 각시키기 위해 갑골문의 을 금문의 匽과 연계시켜 상대 이 북경 지역의 토착세력이며 이 세력에 근거하여 匽國, 즉 燕國이 성립되었다 고 보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갑골문의. 이 금문 상의 匽이 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상대부터 북경지역에는 족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음을 밝혀보았다.39) 또 의 명칭은 이 지역과 관련된 일정한 명칭 즉 로부터 비롯되어
‘ ’匽 匽水
새로이 입국한 봉국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었다고 추정한 바 있다.40) 37) 陳 平, 「克器事燕六族會釋考證」, p.267.
38) 左傳 卷27 定公 四年, ‘分康叔以 殷民七族 分魯以 殷民六族 分唐叔... , ... ,
··· ···’
以 懷姓九宗
39) 졸고,「甲骨 金文‧ 으로 본 商代北京地域 政治體」, pp.18-23 참조.
특히 匽器에서 보이는 주초 제후분봉의 수민수강토의식이 분명하게 나 타난다는 점에서 볼 때 유리하유지에 분봉된 연국과 연후집단은 서주, 세력이 이 지역에 새롭게 분봉된 명백한 정황이라 할 것이다.
이상으로 본다면 연은 서주 왕실이 북경지역에 새로이 분봉한 姬姓 동성 제후국으로 봐야 할 것이며 원래 토착세력인, 古燕族에게 분봉해 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匽器의 출토로부터 본 燕의 입국은 북방 지역을 제어하고자 하는 중원세력의 북경지역으로의 진출이자 이 지역 에 중원의 식민세력을 이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묘장과 의
. 黃土坡 商遺民 進入
Ⅲ
과정에 참여한 상유민 집단은 앞서 살펴본 6족에서만 찾아 燕 立國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국 주체세력인. 召公 일가와 周王이 사여한 이 6족 이외에 黃土坡 묘장에서 출토된 청동기 명문을 봤을 때 많은 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황토파 묘장은. 를 중심으로
商遺民 京廣鐵路
동서 양구로 나누어진다.41) 1973 1974〜 년에 발굴된 서쪽 구역(Ⅰ구) 의 묘는 모두 중소형 묘장에 해당되는데 일부 약간 큰 묘들에는 人殉
도 있다 이 구역의 묘장에는 보편적으로. 아래에 의
墓 墓室 殉狗 腰坑
이 있으며 도기는 鬲 簋‧ ‧罐 조합이 많다 이 점에서 이들이 모두. 安陽 의 와 기본적으로 같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동쪽 구역. (
殷墟 商墓 Ⅱ
구 의 묘는) 1981년〜1983년에 발굴된 것으로 墓道를 갖춘 묘 묘도, 가 없는 대 중형묘․ , 車馬坑이 있는 묘로 분포되어 있다 단 이들 묘. 장에서는 대소를 불문하고 모두 殉人 현상은 보이지 않고 殉狗‧腰坑 현상이 극히 적다 도기는 주왕실과 같은. 鬲‧罐의 조합이 많다 따라. 서 두 구역 묘장에서 보이는 이런 차이점으로 볼 때 서쪽의, 殉狗, 腰 40) 졸고,「西周 前期 燕國의 成立과姬燕文化의 形成」, p.23 주74) 참조. 41) 北京市文物硏究所, 琉璃河西周燕國墓地, 1973-1977 , p.4.
혹은 묘장은 상유민의 묘장이 되고 동쪽 묘장은 가
, ,
坑 殉人 周人墓
된다고 볼 수 있다.42) 이처럼 상유민 묘장과 周人 묘장의 분리된 형 태는 당시 서주 왕실이 소재한 宗周와 成周, 혹은 偉 晋 齊‧ ‧ ‧魯 등 제 후국의 도읍에서도 모두 이와 같아서 혹자는 이처럼 주초부터 전국 중 기까지 모두 두 부류의 각기 특색을 갖춘 묘장으로 나누어질 수 있었 던 것은 성내 두 개의 다른 종족의 존재를 반영하는 것43)으로 보는데 타당한 지적이라 생각된다.
한편 유리하 묘장에서 상유민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有銘 동기 는 66건이 나왔는데 燕器(133 )건 의 반 정도를 차지한다.44) 상유민의 족씨명이 匽侯名과 함께 나오는 동기와 족씨명만 나오는 동기도 많아 서 糾貫‧ ‧ ‧ ‧史 魚 叔戈 등 모두 30여종에 달하는 商代 族氏名이 나온 다.45) 이것으로 본다면 상당수의 상유민이 주초 연국 도성지에서 일 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유민이 어떤 형태로 북경에 진입하였고 또한 연국 입국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대표적인 관련 청동명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東區 묘장에서 분봉 상황을 알려주는 명문을 가진 청동예기는
에서 출토된 에서 출토된 등
M253 <圉方鼎>, <菫鼎>, M251 <伯矩鬲>
을 대표로 들 수 있다 이외에. 西區 묘장에서 보이는 대표적인 대명청 동기는 M52의 <復尊>, M53의 <攸簋>이다 이들은 모두 연후 혹은. ( 왕 에게) 賞賜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동구에서 출토된 청동. 명문의 내용이다.
연후가 太保에게 안부를 전하고 음식을 전달하기 위해 종주에 가도
①
록 菫에게 명하였다 경신일에 태보가. 菫에게 패를 상으로 주었다 이에. 태자 癸를 위하여 보배로운 제사용 그릇을 만들어서 이를 기념한다.46) 42) 張 劍, 앞 글, p.270 참조.
43) 張 劍, 앞 글, p.270.
44) 張亞初, 「燕國靑銅器銘文硏究」, p.227.
45) 北京市文物硏究所, 琉璃河西周燕國墓地, 1973-1977 , pp.103-199 참조. , 앞 글, p.271.
張 劍
46) 殷周金文集成 5.2703, ‘燕侯令菫饌太保于宗周, 庚申 太保賞菫貝 用作太, ,
(<菫鼎>)
연후가 圉에게 패를 상으로 주니 이에 보배로운 제사용 그릇을 만
②
든다.47) (<圉方鼎>)
왕이 成周에 .. 갔다 왕이. 圉에게 패를 상으로 주니 이에 보배로운
③
제사용 그릇을 만든다.48) (<圉簋>)
무진날에 연후가 白矩에게 패를 주니 이에 父戊를 위하여 제사용
④
그릇을 만든다.49) (<伯矩鬲>)
의 <菫鼎>은 성왕시기의 기물로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燕侯가 陪
①
을 에 파견하여 인 태보 소공석에게 를 올리고 음식을
臣 菫 宗周 老父 禮
헌납하여 안부를 묻자 태보 소공석이, 菫에게 貝를 상으로 주니 菫이 태자 癸를 위해 기물을 만들어서 이를 기념한 것이다. ②의 <圉方鼎>
은 圉가 燕侯에게 賞賜를 받아 동기를 주조한 내용이 된다. ③은 圉가 의 에 참가하고 의 를 받는 내용이다. < >
成周 祭典 周王 賞賜 ④ 伯矩鬲
역시 燕侯가 伯矩에게 패를 주어 이를 기념하여 동기를 만든 내용이 된다.
다음은 서구 출토 동기명문이다.
연후가 復에게 冕衣, 신첩 패를 상으로 주니 이에 부을을 위하여,
⑤
보배로운 제사용 그릇을 만든다.50) (<復尊>)
후가 復에게 패 3붕을 주니 복은 이에 부을을 위하여 보배로운 제
⑥
사용 그릇을 만든다.51) (<復鼎>)
子癸寶尊□ ’
47) 殷周金文集成 4.2505, ‘燕侯賜圉貝 用作寶尊彝, .’
48) 殷周金文集成 7.3825, ‘王 于成周□ ,···王賜圉貝 用作寶尊彝, .’
49) 殷周金文集成 3.689.1, ‘才 在 戊辰 燕侯賜白矩貝 用作父戊尊( ) , , .’
50) 殷周金文集成 11.5978, ‘燕侯賞復冕衣 臣妾 貝 用作父乙寶尊彝, , , ’(<復
>).
尊
51) 殷周金文集成 4.2507, ‘侯賞復貝三朋 復用作父乙寶尊彝, .’
연후가 攸에게 패 3붕을 상으로 주니 攸가 이에 父戊를 위하여 보
⑦
배로운 제사용 그릇을 만든다.52) (<攸簋>)
여기에서 제시한⑤의 <復尊>과⑥의 <復鼎>도 연후가復에게 상사 하여 동기를 만든 내용이다. ⑦의 <攸簋>도 攸가 연후의 상사를 받아 동기를 만든 것이다 이중. ⑥ <復鼎>과 ⑦ <攸簋>에서 보이는 賞賜의 정도를 3朋으로 구체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족휘가 새겨진. 청동예기는 상당수 출토되었다.53)
한편 이처럼 琉璃河 유지 묘장구 청동 예기에 드러나는 족휘는 상 대 복사에서도 볼 수 있어 이들은 商代부터 존재하던 족속이었을 가능 성이 매우 높다 예컨대. , 商代의 저명한 족이었던 糾貫族, 擧族, 戈族 등도 눈에 띠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 보이는 이들은 商遺民일 가능성 이 높다고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동구에서 나온. <伯矩鬲>은 동출된
의 ‘ ’
盤 X伯矩作寶尊彝54)의 동기 명문에서 볼 때 이 X를 癸로 보아 가 군후이고 인 가 이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伯矩 癸國 癸伯 矩 55) 또
에서 보이는 과 는 지간으로 이들 동기에서
<菫鼎>, <圉方鼎> 菫 圉 父子
보이는 족휘 는 상유민 糾貫族의 족휘에 해당한다 이들은 연국. 禮賓 의 직무를 담당하여 모두 서주 왕실로 파견되어 종주 혹은 성주에서 중요한 祭典 활동에 참여한 점으로 미뤄 볼 때 지위가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56)
다음으로 M52호 출토의 <復尊>에서 보이는 復은 擧族에 속하는 상 유민으로 추정된다 뒤에서 보이는 족휘. 는 여기 뿐 아니라 陝西 西 에서 모두 출토되었으며 이는 상유민인 이 주왕조 ,
安 甘肅 靈臺 擧族
및 각 제후국에게 사여되어 臣服하였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57) 이
52) 殷周金文集成 7.3906.1, ‘侯賞攸貝三朋 攸用作父戊寶尊彝, .’
53) 北京市文物硏究所, 琉璃河西周燕國墓地, 1973-1977 , pp.101-199 참조. 54) 北京市文物硏究所, 琉璃河西周燕國墓地, 1973-1977 , p.195 참조. 55) 曹淑琴, 「伯矩銅器群及其相關問題」( 燕文化硏究論文集 ), p.204.
56) 張 劍, 앞 글, p.272.
57) 張 劍, 앞 글, p.272.
은 명문 내용으로 미루어 의 신변에서 공직하며 정치상 특권을
復 燕侯
향유하였던 인물로 추정된다 다만. ‘3朋’이라는 다소 적은 賞賜 量으로 볼 때 서구의 復과 攸는 동구에서 보이는 伯矩 菫, , 圉 등과는 연후 집단과의 관계에서 실제로는 신분이나 지위 등에서 차이가 있었을 것 으로 추정된다 즉 동일한 상유민일지라도 이들의 정치적 지위에는 차. 별화될만한 모종의 요소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상당수의 상유민이 연국 도성지 묘장구에서 보이는 이유를 어 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이곳에서 보이는 이들의 존재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일련의 상황하에서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商 멸망 이후 이 지역으로 피신하여 온 상유민은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이 지역이 비교적 동쪽에 있었던. 商과 거리 상 가깝다는 점과 商의 북방에서 燕의 분봉지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는 商의 수많은 방국들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河北省 邢臺지구에는 商 북토의 방국인 갑골문의 井方이 존재하 였고58) 하북 淶水는 淸末에 北伯 北子銅器, 가 출토되었는데 복사중의
부족의 소재지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北方 59) 또 하북 保定 지구 이남
은 商의 활동 지구였음이 밝혀졌으며 商代 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또. 한 商代로 추정되는 100,000㎡ 이상의 藁城 臺西 유지의 발견과 출토 된 수많은 청동병기는 이 유지가 농후한 군사색채를 띠고 있었음을 보 여준다.60) 이외에도 定縣 北莊子유지에는 42좌의 상대 묘장이 발견되 었고 특히 청동 병기 출토가 많다.61) 현재 河北省 중남부 경내에는
58) 河北 元氏 西張村 출토의 臣諫簋명문에 의하면 여기는 상대 井方의 소재지 임을 알 수 있다(鄭紹宗, 「商周金文和河北古代方國硏究」 河洛文明論文集 ,
, 1993, p.237).
中州古籍出版社
59) 이에 대해서는 이 지역이 상의 북방 소재지이거나 혹은邶 유민의 거주지일 가능성을 논한 바 있다 졸고( , 「甲骨 金文‧ 으로 본 商代 北京地域 政治體」, pp.3-7).
60) 河北省博物館河北省文管處‧ -臺西發掘小組, 「河北藁城縣臺西村商代遺址 -1973年的重要發現- (」 文物 1974-8).
61) 河北省文物硏究所 保定地區文物管理所 定州北莊子商墓發掘簡報, ,「 」( 文物春秋 , 1992 增刊本).
의 많은 취락유지가 있어 원래 의 북방
商代 商畿 藩屛62)이었을 가능성
도 보여준다 따라서. 商이 멸망했지만 서주 초기에까지도 이 지역은 의 영향력이 분명하게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商
또 이와 함께 고려되는 것은 상말부터 그 지역으로 이동하여 거주 하던 상의 方國 遺民 중 일부가 周公의 東征에 따라 이후 재차 이동을 하였을 터인데 이주한 곳의 하나가 바로 이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점이 다 이는. 周公 東征 이후 召公의 北伐이 단행된다는 점으로 볼 때 충 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아마도. 周公의 東方 정벌은 두 단계로 볼 수 있을 듯 하다.63) 첫 단계는 三監의 저항을 진압한 즉 管‧ ‧蔡 武庚 을 정벌한 것으로 이는 周公의 통솔 하에서였다. 三監의 저항이 실패 로 돌아가면서 동정의 1단계는 마무리 되었고, ‘王者祿父의 北奔’으로 평정의 제 2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 제. 2단계 과정에서 熊 盈族十,
을 정벌
有七國 64)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史記 에서 보이는 을 로 삼고 을 로 삼아 동쪽으로는 를 정벌하고
‘召公 太保 周公 太師 淮夷
을 진압하고 그 군을 로 이동시켰다’
奄 蒲姑 65)는 내용으로 볼 때, 召公 이 제 2단계의 평정에 참여하였고 周公은 이 동정을 통솔한 자의 하 나였음을 설명한다고 보인다.66) 즉 이때 召公은 직접 군대를 통솔하 여 周公과 함께 東征에 참여한 것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召公의 東征 참여는 <保卣>명문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성왕시기 동기인. <保 명문에는 을묘일에 왕이 태보에게 은의 동국 를 쫓도록 명하
> ‘ 5侯
卣
였다 라고 하였다’ .67) 여기에서 殷東國五侯는 武庚 叛周시 함께 반란한 등으로 보인다.
徐 盈 奄 熊 薄姑‧ ‧ ‧ ‧ 68) 이 명문중의 保는 태보를 지칭한 62) 王宇信, 「 史記‘封召公奭于燕 的武王爲宏見’ ‘武王 時期( )’說」( 北京建城3040年
), p.84.
曁燕文明國際學術硏討會會議專輯
63) 陳恩林, 「論魯‧ ‧齊 燕的侍奉及燕與邶國關係」( 北京建城3040年曁燕文明國際 ), p.106 참조.
學術硏討會會議專輯
64) 逸周書 作「 雒」, ‘···王者祿父北奔, 管叔經而卒, 乃囚蔡叔于郭凌, 凡所征
, .’
熊 盈族十有七國
65) 史記 卷4「周本紀」, ‘召公爲保 周公爲師, , 東伐淮夷 殘奄 遷其君薄姑, , .’
66) 陳恩林, 앞 글, p.106.
67) 殷周金文集成 10.5415.1, ‘乙卯 王令保及殷東國五侯, .’
것으로 召公奭에 해당된다. 周公 동정의 중점은 동남 즉, 淮夷를 정벌 하고 奄을 진압하는 것이었는데 召公 정벌의 중점은 동북지역이 되어 북으로 도망간 祿父와 북방의 반란에 참여한 夷族을 평정하는 것이었 다.69) 소공의 북방 정벌에는 이와 같은 상유민의 존재가 반영되고 있 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비교적 많은 상의 유민들은. 召公의 北伐 과정 과 연국 분봉에 의해 연국에 복속되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듯하 다 앞에서 살펴본. M1193 <동뢰> 명문에서 보이는 方, 國 등은 아마도 이러한 맥락에서도 이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여러 정황과는 별개로 武王滅商 이후 상유민이 이 지역으로 이동하였 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북경 지역으로 이동한 이들이 연국에서 귀족 지위에 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의 묘장 내용을 보면 더욱 확인 해볼 수 있다 서구에서 발굴된 묘장중 중요 묘장이. 7좌인데 腰坑‧殉 라는 상 묘장의 특색 이외에 이들 묘장중 6좌는 관곽 사이 牲 二層臺‧
혹은 곽 위에 이층대에 순장 현상이 보인다 두 좌는 각기. 殉人 2명 이, 4좌는 순인 1명으로 모두 순인 8인이 있다 특히. 52호묘 남쪽에 서는 3좌의 馬坑이 발견되기도 하였는데70) 상유민의 묘장 중 일부는 거마갱으로 배장을 하기도 한다.71)
이처럼 상유민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장에서는 귀족 통치자가 향유 하였을 청동기와 병기가 수장되었고 순장의 존재와 거마갱의 배장 등 을 고려한다면 이들 묘장의 주인공은 서주시기에도 여전히 통치 집단, 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연후 집단은 아마도 당시 문화적 선진성. 을 갖추었던 상유민의 도움을 통해 새 분봉지에서 세력 기반을 잡고자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살펴본 묘장의 정황을 통해 봤을 때 묘. ,
68) 陳恩林, 앞 글, p.106.
69) 陳恩林, 앞 글, p.106.
70) 琉璃河西周燕國墓地, 1973-1977 , pp.23-28.
71) 이외에도 M53 묘장도 거마갱이 존재하며 M253의 경우에는 거마순식이 배 장되어 있다( 琉璃河西周燕國墓地, 1973-1977 , pp.28-30, 36-38).
장 주인공은 아마도 이러한 역할을 하였던 상유민으로 중원의 세력집, 단과 함께 입국과정에 참여하거나 혹은 연에서 정치적 역할을 일정하 게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유리하 유지의 성지와 묘장의 분석을 통해 봤을 때 연의 성립 은 연후집단과 周王이 사여한 6족 및 이 지역으로 이동하였을 상유민 의 도움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당시 선진문화를. 옹유하였을 상유민의 참여를 통해 중원세력은 북경지역에서 개국의 기 틀을 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은 상말주초부터 시작하여 서. 주 연국 입국을 기점으로 이 지역에 이주한 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연의 도성지 묘장에서 보이는 수많은 족휘에서 보이는 상유민의 존재 는 상말주초의 특수한 정황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 昌平 白浮墓 와 薊國
Ⅳ
서주시기 북경지역 정치체를 논할 경우 대부분 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에 의해서도 주초 북경지역의 중원세력은 서주왕. 실에서 분봉한 연후 집단과 북경지역으로 이동한 상유민 집단이라 할 것이다 다만 유리하유지는 북경. 房山區 지역에서도 서남 끝에 치우쳐 있어 북경을 가로지르는 永定河 이남에 위치한다 일반적으로 연 성립. 이후 북경지역은 연 세력이 확장하여 요서지역으로까지 이어졌다고 이 해하지만 연의 세력이 영정하 이북으로 세력을 확산시켰다는 뚜렷한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근래 북경지역에서 발굴된 백부묘의 정황은 서주시 기 영정하 이북에서 또 다른 정치체의 존재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 다 북경시 북부. 昌平縣 白浮村 龍山 아래에 위치한 白浮墓는 1975년 에 발굴 정리되었다‧ .72) 이곳에서 서주 중기의 대형 목곽묘 3기가 발견 72) 北京市文物管理處, 「北京地區的又一考古收穫 昌平白浮西周木槨墓的啓示- 」(
되었다 발견시에 묘장은 이미 파괴되었지만 출토물이 약. 400여건으로 풍부한 편에 속한다.73) 이 묘장의 정황과 출토물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묘장 형태는 기본적으로 장방형, 廓室로 전형적인 서주식 묘장 에 해당하며 頭向은 북쪽이다 동예기 중. 鼎 簋 壺‧ ‧ 및 當盧‧ ‧ ‧ ‧銮輨 轄 와 같은 와 과 같은 병기의 일부는 형태가 하
銅泡 車馬器 戈 戟‧ ‧ ‧矛 盾飾
남 섬서 유리하유지 서주 묘 출토의 동기 기물과 동일하고 서주식, , , 도 출토되었다 둘째 수장품 중에 북방식 청동기가 대량. , 灰陶 繩紋鬲
포함되어 있다. 즉 銎戈 寬胡斜刃戈‧ ‧雙鉤戟‧三銎孔刀‧鷹首劍‧馬首劍‧ 등은 북방 초원 청동문화의 풍격을 강렬하게 나타내 鷹首刀 帶鈴匕首‧
고 있다.74) 셋째, 1호묘는 파괴되어서 분명하지 않지만, 2호와 3호 묘에는 중앙에 모두 腰坑이 있고 2호묘 요갱에는 殉犬 1구가 있는 점 은 주목할 만하다 넷째 약. , 100편의 卜甲 조각이 발견되었다 그중. 판별할 수 있는 것은 ‘ ’,貞 ‘其祀’, ‘其尙上下韋馭’, ‘不止’ 등이다 이는. 전 연산 남북지구 서주시기 묘장중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刻字卜甲가 되는 셈이다 다섯째 병기인. , 銅戈와 銅戟에는 ‘ ’, ‘ ’라는 명문이 있다.
이중 첫 번째 제시한 묘장 형태 및 두향북의 전형적 서주식 묘장, 출토된 동기명문과 卜甲 등을 통해 볼 때, 白浮墓는 중원 계통의 문화
좌의 묘장은 자 형태로 배열되었고 두향은 북쪽이다 비
1976-4). 3 .
考古 品
록 파괴되었지만 묘장과 수장품은 대부분 보존되었다. 1, 3호 묘는 목곽 아래 판이 보존되었고 호묘는 비교적 잘 보존되었는데 묘장 면모는 장방형 곽실이2 다 출토 기물은 약. 400건이 넘는데 수장품은 死者 머리 앞과 양측에 놓여 있 었다 청동예기 병기 거마기 공구 옥석기 및. , , , , 刻字卜甲등이 있다.
73) 1호묘의 경우에는 사자 허리아래에서 한건의 小玉系 璧이외에 다른 수장품 이 없었으며 묘주는 노년 남성으로 판명되었다. 2호묘의 묘주는 중년 여성이 며 3호묘의 묘주는 중년 남성으로 이 두 묘장에서 출토물이 약 400건 나왔 다 특히. 2호묘의 경우에는 戈 戟 刀 劍‧ ‧ ‧ 과 銅盔 등의 대량 병기가 나왔기 때 문에 그 묘주를 위풍당당한 여장군으로 칭하기도 한다(陳 平, 燕文化 , p.72).
74) 陳 平, 燕文化 , p.72.
면모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형적인 서주 묘장임에도 두 번. 째 제시한 특징인 농후한 북방 특색의 문화 요소를 대량 포함하고 있 다는 점은 중원 청동문화와 북방 청동문화가 북경지구에서 상호 영향 을 상당히 주고받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다음의 세 가지 특징. 은 상문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들 묘장에서 상대. 묘장이 특유한 요갱을 설치하여 개를 순장하는 풍습을 그대로 채용하 고 있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75)
또 이 묘장 규모가 상당히 크며 대규모의 청동예기 銅兵器 車馬盾‧ ‧ 등이 존재하는 것은 묘주인의 지위가 매우 높았음을 표명하는 飾 玉器‧
바이다 더욱이 묘장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갑골 재료의 출토는 점복. 의례를 행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점복을 장악한 자와 갑골을 새긴 자는 모두 상당히 높은 통치자일 가능성이 높다 즉 묘주인은 군사 수. 령임과 동시에 무속인 신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76)
이상과 같은 특징을 가진 백부묘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북방 초원문화 기물을 근거로 이 문화의 주인공을 북방초원. 문화에 속하는 족속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77) 북방초원문화는 단지 청동 병기에 한정되었고 다른 요소는 중원의 서주묘와 어떠한 구별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의견에 부정적이도 하다.78) 한편 문화적으로 볼 때 이 유적이 중원문화 북방청동문화 남방청동문화, ‧ ‧ 79)의 여러 요소를 함유하지만 중원의 燕文化를 주요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姬周族의 유 존일 가능성이 다른 족속에 비해 크다고 보기도 한다.80) 이처럼 이 묘장의 주인공 문제는 복잡한 내함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75) 陳 平, 燕事紀事編年會按 , p.123.
76) 郭大順 張星德‧ , 앞 글, p.446.
77) 北京大學歷史系考古硏究室商周組 鄒衡( ), 商周考古 (文物出版社, 1979), pp.199-200.
78) 張長壽, 「西周墓葬的分區硏究」( 新中國的考古發現和硏究, 文物出版社, 1984), p.261.
79) 白膏泥로 봉해서 묘장을 닫아놓은 점을 남방 문화적 특징으로 보고 있다(李
, , 2000-3, p.53).
維明 「北京昌平白浮墓地分析」 北京文博 80) 李維明, 앞 글, p.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