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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國時期 여성 지식인의 산아제한 인식과 피임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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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國時期 여성 지식인의 산아제한 인식과 피임의 실천 *

兪 蓮 實 (全南大)

**

1)

Ⅰ. 머리말

Ⅱ. 출산의 고통: 어머니가 되는 것은 과연 행복한 일인가?

Ⅲ. 여성 지식인의 산아제한 문제에 대한 인식

Ⅳ. 여성 지식인의 피임 실천 1. 전통적 피임법의 沿用

2. 서구적 피임법의 보급과 여성 의 반응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은 생리적으로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간주되 어 왔다. 특히 전통적 가족질서 속에서 여성의 출산은 ‘傳宗接代’라는 대의명분 하에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여졌다.

여성의 출산과 임신을 둘러싼 생물학적ㆍ가족주의적 당위성은 근대적 담론 지형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변화 없이 유지되어왔다. 특히 여성의 출산과 임신은 모성과 결부되어, 생물학적 생육 기능을 가진 여성은 당연히 자녀를 낳고 기를 의무가 있는 어머니로 규정되었다.

즉 여성=모성=천성, 출산=여성의 천직이라는 젠더 논리 하에 여성의

*본 논문은 2010년 한국여성학회 제 26차 추계학술대회 “초/국가시대의 여성주의 지식생산”(2010년 11월 20일)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전남대학교 사학과 BK사업단 post-doc.

모성성이 강요되고, 이를 통해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사회적ㆍ국가적 간섭이 합당화 되었다.

그러나 리치(A. Rich)는 구체적 경험으로서의 모성과 여성들이 재생 산과 자녀들에 대해 갖는 잠재력을 남성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는 제 도들, 즉 모성이라는 제도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 리치는 또 한 모성 이데올로기2)에 입각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통념, 성별 분업을 극복하고 여성의 현실과 경험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리치의 요구는 여성 중심적 시각에서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의 의미는 무엇인 가, 근대적 모성 담론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이면의 여성의 현실 은 어떠했는가를 새롭게 탐색해 보아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때문 에 이를 民國時期 중국 여성의 출산 경험과 연계지어 생각해 봄으로 써, 근대 중국 여성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모성을 수용하고 혹은 거부 하였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근대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 한 자기표현 방식이 어떻게 근대적 모성 담론 속으로 흡수되었으며, 이것이 모성 이데올로기의 확립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922년 4월 미국 산아제한 운동가 마거릿 생어(Margaret Sanger, 1879∼1966년)가 중국을 방문한 이후, 중국의 지식인들은 모성자결ㆍ 新性道德ㆍ인구문제ㆍ우생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산아제한에 관한 논 1) 아드리엔느 리치 저, 김인성 역,더이상 어머니는 없다(평민사, 2002); 심영 희ㆍ정진성ㆍ윤정로 공편,모성의 담론과 현실: 어머니 성ㆍ삶ㆍ정체성(나 남출판, 1999).

2) 모성이데올로기란 여성의 위치는 가정이며, 가정에서 여성의 임무는 가족구성 원을 돌보고 이들에게 정서적인 안정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말 한다. 여성의 모성은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 영역에서 여성의 능력과 한계를 규정하는 본질임과 동시에 종종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의존을 정당화하는데 이 데올로기적으로 봉사해 왔다. 모성 이데올로기가 문제시되는 것은, 그것이 아 이들을 돌보고 함께 지내는 것이 정신적ㆍ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을 은 폐하기 때문이다. 결국 모성 이데올로기는 어머니와 자녀의 경험을 가족이라는 영역에 국한시킴으로써 여성을 고립화ㆍ무력화시킬 뿐 아니라 아동 양육의 사 회화를 이념적으로 방해한다[이연정, 여성의 시각에서 본 ‘모성론’ (모성의 담론과 현실: 어머니 성ㆍ삶ㆍ정체성, 나남출판, 1999), pp.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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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전개하였다.3) 또한 1920년대 후반부터 產兒制限研究會ㆍ生產限制 診查所ㆍ中華節育研究社ㆍ北平婦嬰保健會ㆍ上海節育研究社 등의 산아 제한 단체와 산아제한 지도소가 설립되어 의료와 공공위생 영역에서 피임 의료 서비스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근대적 의료 기 관을 중심으로 서구 피임약과 도구, 피임링과 피하주사 등을 이용한 피임 시술이 도입되어 ‘피임의 의료화’가 가속화되었다.4) 때문에 근대 산아제한 운동과 함께 여성의 출산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되었으 며, 산아제한에 대한 여성의 입장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 다. 또한 여성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의 출산을 억제했는지, 즉 여 성들의 산아제한에 대한 구체적 경험과 실천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5)

3) (韓) 兪蓮實, 民國時期關于“生育節制”的四大論戰 (史林總第108期, 2008年 第5期), pp.128-146; 유연실, 1920년대 마거릿 생어의 중국 방문과 산아제한에 대한 사회적 반응 (중국사연구67, 2010.8), pp.123-166.

4) 유연실, 民國時期 산아제한 단체의 설립과 피임의 의료화 (中國近現代史硏 41, 2009.3), pp.63-96.

5)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주로婦女雜志新女性女子月刊東方雜誌中華醫學雜志中華健康雜誌申報北平晨報ㆍ人口副刊등의 신문 잡 지 자료와 民國時期 여성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사회조사 자료를 이용하였다.

婦女雜志를 필두로 한 여성 잡지는 근대 여성 주체성의 형성을 둘러싼 다양 한 권력 집단의 논쟁과 여성이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체현하는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또한中華醫學雜志中華健 康雜誌등의 의료 잡지는 근대 의료 권력의 여성 신체에 대한 이해 및 근대 의료 시스템이 남녀의 본질적 성차를 규정하고 제도화해 가는 측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申報는 근대 상하이 지역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문화 적 현상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의약품ㆍ생활 용품ㆍ기호 제품 등 광 범위한 광고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근대 피임 약품 및 피임 의료 서비스 에 관한 광고도 적지 않게 게재되어, 이를 통해 근대 피임 약품의 소비와 유통 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마지막으로北平晨報ㆍ人口副刊(1932-1936)은 1930년대 주요 산아제한 단체의 하나였던 北平婦嬰保健會의 기관지로서, 근대 산아제한 담론 및 피임 의료 서비스의 보급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담 고 있다. 특히人口副刊의 ‘通信欄’에는 230여 통에 달하는 독자들의 편지가 실려 있어, 이를 통해 근대 개인의 출산 통제 욕망이 어떻게 표출되었으며, 출 산 통제를 위한 가족적ㆍ여성적 차원의 노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필 수 있다. 물론 근대 출산 통제의 경험에 관한 여성들의 구술 자료나 전기 자료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착안하여 ① 民國時期 모성 담론과 산아 제한론은 어떠한 연계 속에서 형성되었는가, ② 여성 지식인의 산아제 한에 대한 태도와 입장은 어떠하였는가, ③ 근대적 피임 의료의 보급 속에서 전통적 피임법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④ 여성 들은 근대적 피임 의료를 어떻게 수용 혹은 거부했는가라는 네 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가도록 하겠다. 특히 전통적 피임법 의 沿用과 서구 피임 의료의 보급을 통해서 여성의 생육공간을 둘러싼 新ㆍ舊 혹은 中ㆍ西 의료 권력의 길항을 보다 입체적으로 규명해 보고 자 한다.6)

도 살펴보아야 하나, 이에 대한 사료의 수집이 어려운 상황에서人口副刊 실린 독자들의 편지는 개별 여성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일차 사료라고 할 수 있겠다.

6) 20세기 서구 과학 담론의 영향 하에서 전통적 性迷信 및 유교적 성질서가 해 체되고 의학적 성관념(Medicalization of sexuality)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서 는 Frank Dikötter, Sex, Culture and Modernity in China: Medical Science and the Construction of Sexual Identities in the Early Republican Period (London: Hurst & Company, 1995) 참조. 또한 근대 의학의 권위를 빌어 우생 학이 개인의 몸과 출산을 통제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작용하게 되는 측면에 대 해서는 Frank Dikötter, Imperfect Conceptions; Medical Knowledge, Birth Defects, and Eugenics in Chin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참조. 이외에 근대 중ㆍ서 의학 논쟁 및 중ㆍ서 의료 질서 충돌하의 질 병관념ㆍ일상생활ㆍ사회구조의 변천에 대해서는 李傳斌,基督教在華醫療事業 與近代中國社會(1835—1937)(蘇州大學歷史系博士學位論文, 2001); 雷祥麟, 負責任的醫生與有信仰的病人: 中西醫論爭與醫病關系在民國時期的轉變 (新史 14卷 l期, 2003.3), pp.45-96; 楊念群,再造“病人”: 中西醫沖突下的空間政治 (1832-1985)(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06); 신규환 지음,국가, 도시, 위 생: 1930년대 베이핑시정부의 위생행정과 국가의료(아카넷, 2008); 王曉翠,民國時期中西醫論戰研究(曲阜師範大學歷史系碩士學位論文, 2010); 劉天路 編,

身體ㆍ靈魂ㆍ自然: 中國基督教與醫療社會事業研究(上海人民出版社, 2010) 참조. 또한 전통적 산파 및 출산 의료 질서의 해체와 근대적 출산 의료 시스템 의 구축에 대해서는 姚毅, 產婆的‘制度化’與近代中國的生育管理: 以南京國民政 府爲中心 (中國史研究20, 2002.10), pp.293-303; 賀蕭(Gail Hershatter), 生 育的故事: 1950年代中國農村接生員 (百年中國女權思潮研究, 復旦大學出版社, 2005), pp.301-327; 姚毅, 近代中國における新式出產運動に對する女性たちの對 應 (中國女性史研究15, 2006.1), pp.1-21; 辛圭煥, 助產士의 制度化와 近代 的 生育管理: 1930年代 北平市政府의 衛生行政과 出生統制 (中國史研究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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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출산의 고통: 어머니가 되는 것은 과연 행복한 일인가?

중국에서는 1920년대 엘렌 케이(Ellen Key, 1849-1926)의 모성론이 소개되면서 여성의 모성성에 관한 논의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7) 사실 상 아동중심주의를 주창한 케이는 자녀의 양육에 있어서 어머니의 역 할을 중시하며, 여성의 노동활동에의 참여가 모성성을 점차 파괴한다 고 우려하였다. 때문에 케이는 모성을 일종의 천부적 자연력으로 인식 하고, 여성의 노동ㆍ독신주의ㆍ육아의 사회화를 비판하였다. 또한 그녀 는 국가가 어머니에게 연금(Mother’s Pension)을 제공하여 어머니의 경제적 독립을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8) 이러한 케이의 모성 주의는 여성의 육아와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존중과 보장을 이끌어 내기는 했지만, 모성 이외의 여성의 역할을 부정했기 때문에 “여성의 모성을 지옥에서 천당으로 끌어올렸지만 동시에 여성을 다시 천당의

2006.6), pp.199-232; 姚毅,產科醫ㆍ助產士ㆍ接生婆: 近代中國生育的近代化與 國家化(東京大學綜合文化研究科相關社會科學博士請求論文, 2008.3); 於文,生育與國家: 1950年代中國婦嬰衛生運動中的政治科學與性別(復旦大學歷史系 碩士學位論文, 2008.6); 趙婧,近代上海的分娩衛生硏究(1927-1949)(復旦大學 歷史系博士學位論文, 2009.12); 周春燕,女體與國族: 強國強種與近代中國的婦女 衛生(1895-1949)(高雄: 麗文文化事業, 2010) 참조. 이처럼 본 논문은 기존의 의료 사회사 연구 토대 위에서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근대적 인식의 전환 및 근대적 의료ㆍ국가 권력의 여성의 출산과 신체에 대한 통제, 이에 대한 여성 주체의 반응 및 대응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근대적 피임 의료의 수용 과 거부를 중심으로 근대적 여성 주체의 모성ㆍ출산ㆍ신체에 대한 인식을 살 펴보는 것이 본 논문의 주된 목적이다.

7) 천성림, 1920·30年代 中國知識人의 ‘母性’ 談論과 ‘母性保護’ 認識 (中國史硏 24, 2003.6), pp.207-245; 천성림, 모성의 ‘발견’: 엘렌 케이(Ellen Key, 1849∼1926)와 1920년대의 중국 (동양사학연구87, 2004.6), pp.187-220; 천 성림, 모성의 거부: 20세기 초 중국의 “독신여성” 문제 (중국근현대사연구24, 2004.12), pp.47-68.

8) 黃石, 婦女果不適於職業麼 (婦女雜志第10卷 第6號, 1924.6.1), p.875.

감옥 속에 가두어버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9)

중국의 지식인들은 엘렌 케이의 모성론을 빌어 모성의 신성을 찬양 하며 여성=모성=천성이라는 젠더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瑟廬는 愛倫凱女士與其思想 이라는 글에서

현재 부녀해방의 제창은 종종 남녀평권의 주장에서 여자의 男子化를 주장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矯枉過正의 폐단을 초래하였다. 남녀 는 물론 당연히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나, 여자는 실로 남자에 비해 더 중대한 직무를 책임지고 있다. 이 직무는 무엇인가? 즉 엘렌 케이가 말한

“어머니가 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녀가 말한 “어머니가 되는 일”이 새와 짐승이 새끼에게 젖을 먹이듯, 단지 아이를 부양하고 기르는 것만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육체와 정신의 두 측면에서 아이를 훈련하 고, 인류의 후사를 대대로 개량하여 인류의 문화를 대대로 진보시켜야 한 다. 이러한 “어머니가 되어야” 비로소 인류ㆍ사회에 대한 가장 중대한 임 무를 완성한 셈이다.10)

라고 하여, 모성을 여자만의 중대한 직무로 강조하였다. 이 글에서 瑟 廬는 모성을 단지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이 아닌 자녀의 훈육과 보살핌 이라는 사회적 역할로 규정하였다. 또한 그는 현대 부녀운동의 결과 남자도 여자도 아닌 ‘第三性(Third Sex)’의 변태 여성이 출현했다고 비 판하며, 여성의 천직은 바로 모성에 있다고 역설하였다. 潘光旦 또한 여권운동에 종사하는 여성은 모성이 박약한 여성으로, “그들은 출산을 위험한 일로 보고, 간혹 출산을 하면 양육의 책임을 매번 타인에게 전 가시킨다”고 비판하며, 모성이 강한 여성은 “출산을 싫어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유아의 心力을 비교적 세심하게 보살핀다”11)고 하였다.

때문에 여성의 독신과 경제적 독립, 산아제한을 종용하는 여성운동은 사회적 요구와 상반되며, 지금의 부녀문제는 어떻게 대다수의 부녀로 하여금 합당한 가정생활을 회복하도록 하는가에 있다고 주장하였다.12) 9) 天矞, 婦女與家事 (新女性第3卷 第2期, 1928.2), p.126.

10) 瑟廬, 愛倫凱女士與其思想 (婦女雜志第7卷 第2號, 1921.2.5), p.27.

11) 潘光旦, 中國之家庭問題 ,民國時期社會調查叢編: 婚姻家庭卷(福州: 福建 教育出版社, 2005), p.307.

12) 前山加奈子, 母性は劣位か?-1930ㆍ40年代におけゐ潘光旦の女性論 (論集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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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중국의 남성 지식인들은 엘렌 케이의 모성론을 이용하여 여성 의 직업이나 공적영역에서의 활동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결국 그들은 엘렌 케이의 모성론을 통해 근대적 모성을 제창하였으나, 그 본질은 男主外女主內의 젠더 질서를 유지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모성주의의 영향 속에서 中華婦女節制會의 회장 劉王立命과 같은 여성은 ‘母親節’의 제정을 촉구하면서, 국민정부의 현모양처 교육 과 함께 모성의 제도화를 부추겼다.13) 劉王立命은 모성은 여성의 생리 적인 내분비 작용에 의해 형성된 특수한 ‘性情’으로, 내분비선을 잘라 버리지 않는 이상 여성은 모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14) 劉王立命은 기독교적 자선활동을 통해 모성성의 사회적 확장을 추구한 인물로 여성이 모성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 을 긍정하였다. 劉王立命은 黃寄萍이라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되는 것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되고 어려운 일이다.……예 를 들어 아동의 양육ㆍ위생ㆍ관리ㆍ간호 등등을 어머니는 모두 이해하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뿐만 아니라 가정의 경제ㆍ바느질ㆍ재봉ㆍ남편의 사업 보조 모든 일이 家政의 범위에 속한 것으로, 이는 교원이 수업 한 두 과목을 가르치는 것보다 혹은 어떤 직업보다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나는 新賢妻養母는 가정의 책임을 방기해서는 안 되며, 설사 여력이 있어 사회를 위해 일하더라도 아이를 출산한 후에는 반드시 새롭게 시간을 분 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家政을 奴僕에게 맡기면 그것은 절대적인 손실이다.15)

國女性史, 吉川弘文館, 1999), pp.150-167.

13) 1930년대 초 憲法草案 중 모성보호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제 23조 “어머니는 국가의 보호와 원조를 받을 권한이 있다”와 보충 제 1조 “부 녀는 출산 전후 및 수유기간 동안 법에 의거하여 국가의 특별한 보호와 원조 를 받는다”는 규정이 그것이다[金仲華, 目前中國之婦女兒童保護問題 (東方 雜誌第30卷 第9號, 1933.5.1), p.3]. 또한 南京國民政府의 현모양처 교육과 여 성국민의 통합 과정에 대해서는 지현숙, 北平市의 中學男女分校令(1935年) 실 시를 통해 본 賢母良妻敎育 (東洋史學硏究72, 2000.10), pp.205-235; 지현 숙,南京國民政府(1928-1937)의 國民統合과 女性: 新賢母良妻敎育을 中心으로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2002); 지현숙, 1930년대 中國의 ‘婦女 回家’論爭과 南京政府 (歷史敎育88, 2003.12) pp.221-247 참조.

14) 劉王立明, 母性應擺脫嗎? (女聲第1卷 第19期, 1933.7.1), p.6.

라고 하여, 新賢妻養母를 ‘모성적’ 혹은 ‘母性型’ 여성으로 규정하였다.

때문에 당시 일부 남성 지식인들은 “한편으로 사회사업에 열심히 참여 하고, 다른 한편으로 家政의 관리를 방기하지 않으며, 여성계의 복리와 남편과 자녀의 행복을 동시에 돌볼 수 있는”16) 劉王立命과 같은 여성 상을 모범적 여성상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범적 여성상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여성의 정체성을 모성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여성 은 가정적 존재이며, 여성의 주된 역할은 자녀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일”17)이라는 모성 이데올로기를 더욱 고착시키는데 이바지하였다.

모성에 대한 찬양과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대 속에서 여 성들은 태교를 중시하고, 모유수유를 하며, 과학적 방법으로 자녀를 양 육하고, 가정의 위생을 개조하는 어머니가 될 것을 스스로에게 기대하 였다.18) 1931년

婦女雜誌

의 “어머니가 된 경험”에 관한 수기모집에 서 意紅이라는 한 여성은 ‘賢妻養母’형의 친구와 비교하며, 자신의 허 약함ㆍ조급함ㆍ쓸모없음을 질책하였다.19) 또한 惲怡라는 여성도 “아이 를 버리고 가정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마다 모성적 의지로 “혹 독함을 인내하지 못하는”20) 자신을 책망하였다. 그러므로 모성에 대한 사회적 역할 기대 속에서 적지 않은 여성들이 ‘어머니답지 못한’ 일탈 적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적지 않은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종의 경험으로써 모성을 체험한 여성들은 때때로 어머니의 역할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도 하고, 또한 이데올로기적 모성 과 현실사이에서 적지 않은 정체성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결국 여성

15) 黃寄萍, 劉王立明訪問記 (新女性講話, 上海: 聯華出版社, 1937), p.27.

16) 俞洽成, 家庭訪問記: 劉王立明女士 (申報1934.6.21), 18면.

17) 張溪愚, 知識婦女與優生問題 (華年周刊第4卷 第18期, 1935.5.11), p.348.

18) 征文當選: 假使我有了兒子 (女子月刊第1卷 第10期, 1933.12.15), pp.137—

146.

19) 意紅, 隨筆: 作了母親(三): 連帶想到做了妻子 (婦女雜志第17卷 第1號, 1931.1.1), p.37.

20) 惲怡, 隨筆: 作了母親(一) (婦女雜志第17卷 第1號, 1931.1.1), p.34.

(5)

의 정체성을 모성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사회적 통념 속에서 자녀의 출 산과 양육에 따르는 어머니의 고통과 희생은 철저하게 간과되었던 것 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모성 이데올로기는 임신ㆍ출산ㆍ육아를 신성한 자연의 섭리로,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자연법칙으로 미화한다.

金仲華는 女性與生育的藝術 이라는 글에서

일찍이 누군가 “생육은 여성 최대의 예술이다” 라고 말했다. 모든 예술 이 긴 시간 각고의 단련을 필요로 하듯이 여성의 생육의 ‘예술’도 긴 시 간 고통의 경험을 거쳐야 성공한다. 우리의 숭고한 모성은 완전히 모성의 깊은 자애만을 위한 것은 아니며, 주로 모성으로 무한한 고통을 인내하고 위대한 생육의 ‘예술’을 완성하기 위함이다.……과학은 출산의 위험을 최 대한 감소시키고, 출산의 고통을 없앤다. 여성의 출산 과정 중에 위험과 고통이 완전히 사라질 때 정결하고 환하게 빛나는 예술화된 産室에서 비 로소 진정하고 완벽한 ‘예술’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그러나 우리 시 대의 여성은 그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만약 그들이 몇 대에서 몇 십대 이전의 모성이 출산 중에 겪은 구제할 수 없는 고통 을 안다면, 비로소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21)

라고 하여, 근대적 산부인과 의료의 발전 속에서 출산이 과학화됨으로 써 현대의 여성은 출산의 행복을 향유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모성을 출산의 고통에 대한 인내로 형상화하고 생육을 예술로 미 화시킴으로써, 이를 통해 모성=생육=예술=행복이라는 등식의 당위성을 옹호하였다. 또한 모성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성의 신체는 아이를 낳기 위한 기능적 신체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었다. 周建人은 많은 사람들이

“여자에게 분명히 유방과 자궁이 있으니 아내가 되지 않고 어머니가 되지 않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22)라는 가부장적 억압 기제로 여성의

21) 仲華, 女性與生育的藝術: 女性之話一 (東方雜志第29卷 第4號, 1932.10.

16), p.12.

22) 周建人, 現代女子的苦悶問題 (新女性第2卷 第1期, 1927.1), p.32.新女性

잡지는 창간 1주년을 기념하여 “現代女子的苦悶問題”를 주제로 전문가들의 각종 의견을 수집하였다. 편집자는 현대 여성이 학문 연구와 사회 개조의 염원 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천부적인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저버릴 수

신체를 규정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여성의 자궁과 유방은 섹슈얼리 티가 철저하게 탈색된 채 생물학적 기능성만 강조되어, 임신ㆍ출산ㆍ 수유를 위한 도구로 부호화되었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출산을 위한 몸 으로 규정된 여성의 신체는 임신과 출산을 자연스러운 일로, 모성을 자연스러운 감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규정당했던 것이다. 결국 모 성 이데올로기의 근저에는 여성=모성=천성, 즉 모성이 여성의 본질적 정체성이고 임신과 출산이 자연적인 역할이라는 가부장제 논리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출산이 여성에게 자연스러운 일이고 행복하기만 한 일 이었을까? 民國時期 출산의 고통을 호소하며 산아제한의 방법을 알려 달라고 요구하는 여성의 편지을 통해, 근대적 모성 담론이 어떻게 여 성의 출산에 대한 경험과 고통을 철저하게 주변화 시켰는지 대략 짐작 할 수 있다.

몇 년 동안 저를 괴롭힌 것은 저 자신이 영원히 쉴 수 없는 生育의 기 계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현재 겨우 33세인데 이미 6차례 출산 을 경험했습니다. 현재 4명의 아이가 살아 있는데, 3명은 딸이고 1명은 아들입니다. 지금 저의 배 속에는 아이가 없지만, 예전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올 겨울 저의 남편이 집에 다녀 간 후, 내년 봄쯤에는 바로 임신 소 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저의 고통을 아랑곳 하지 않고, 시어머니도 아 들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아! 그들이 이처럼 저를 이해하지 못 하니 13년 동안 저는 거의 한 아이가 젖을 때자마자 곧바로 또 임신을 해서, 10달 동안 아프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나면 또 다시 작은 짐 덩어 없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어떻 게 두 가지 일을 조화롭게 병행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즉 여성 의 정체성을 모성에 둘 것인가 아니면 모성의 경계 밖에서 새로운 여성의 정 체성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공개적 토론을 제기한 샘이다. 그러나 투 고자 가운데 가족제도의 해체와 兒童公育과 같은 급진적인 발언을 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 사람들은 여성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모성과 사회 참여를 절 충적으로 병행할 수 있다고 단정 지음으로써 모성성의 해체와 거부 자체를 부 정하였다. 이는 일하는 여성, 자기실현 욕구를 가진 여성의 등장에 대해 사회 가 수용의 틀을 마련하지 못하고, ‘현모양처’라는 천부적인 역할에 저촉되지 않 는 범위 내에서 여성의 공적영역으로의 진출을 제한적으로 승인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6)

리가 태어나 젖을 물려야 했습니다. 태어난 아이는 하필 여자 아이가 많 아, 저는 늘 시어머니의 길고 긴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아! 눈앞의 이 한 보따리 아이들을 위해서 저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고 통을 참아야 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 저는 결코 부녀가 출산을 거절하 고 출산을 혐오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출산이 부녀의 天職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혈액ㆍ사람의 정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절제 없이 출산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 하지 않습니까?……생육의 기계 노릇을 언제까지 해야 멈출 수 있을까 요?23) (__밑줄 표시는 필자)

위의 黃秀芬이라는 여성은 13년간 쉴 틈 없는 출산의 고통 속에서

“생육의 기계 노릇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반문하고 있다. 그녀는 심지어 한 차례 낙태를 시도했다가 거의 죽을 뻔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성의 임신과 출산 경험 속에는 ‘행복’ㆍ‘기쁨’ㆍ‘자연스 러움’ 보다는 ‘고통’ㆍ‘짐 덩어리’ㆍ‘혐오’ㆍ‘위험’과 같은 감정들이 노골 적으로 표출되었다. 이처럼 차별화되고 분절된 모성의 경험 속에서 民 國時期 일부 여성들은 “생육의 기계”로 규정된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22년 마거릿 생어의 중국 방문 이후, 중국의 지식인들은 여성해방 ㆍ자유연애와 性해방ㆍ우생학과 종족개량ㆍ신맬서스주의와 인구 억제 의 차원에서 산아제한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산아제한 논의의 주된 방향은 인구의 ‘질’과 ‘양’에 대한 통제를 통해 국가 혹은 민족의 부강을 도모해야 한다는 우생학 및 신맬서스주의에 초점이 맞 추어졌다.24) 여성해방과 관련해서는 산아제한의 모성자결의 측면이 부 각되었는데, 당시 여성해방론자들은 산아제한의 정당한 이유로서 ① 배우자의 선택을 포함한 자녀의 출산시기와 수를 결정할 권리를 여성 에게 부여하고, ② 과도한 출산으로부터 모체를 보호하고, ③ 모성의 본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자녀의 교육과 가정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④

23) 黃秀芬, 通信: 一. 生育的機器要做到幾時爲止呢 (婦女雜志第17卷 第1號, 1931.1.1), pp.221-223.

24) 兪蓮實, 앞의 논문(史林2008年 第5期), pp.145-146.

교육기회를 확대하여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경제적 독립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 등을 거론하였다.25) 사실상 마거릿 생어는 여성이 모성자결 을 통해 적절한 자녀를 낳음으로써, 모성을 더욱 충분히 발휘하여 우 수한 자녀를 양육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26) 그 이면에는 산아제한을 통해 획득된 여유를 자녀교육에 투자해야 한다는 모성보호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모성자결은 여성의 생물학적 해방을 통한 모성의 거부라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모성 이데올로기와 교집합을 형성 하는 측면이 많았다.

民國時期시기 모성보호ㆍ우생학ㆍ신맬서스주의가 산아제한 담론의 주류를 형성했지만, 일반 여성들의 출산 억제에 대한 욕망이 이러한 담론에 일방적으로 함몰된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 北平婦嬰保健會는 산아제한을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人口副刊

27)이라는 잡지를 창간했 는데, 그 안에는 산아제한을 원하는 여성과 남성들의 230여 통에 달하 는 편지가 포함되어 있었다.28) 그 중에 여성이 쓴 편지는 42통으로, 이 를 통해 근대 중국 여성들이 어떻게 자신의 출산 억제에 대한 욕망을 표출하였는지 대략 살필 수 있다.29)

25) 兪蓮實, 앞의 논문(2010.8), p.143.

26)(美國)山額爾夫人著, 陳海澄譯,節育主義(上海: 商務印書館, 1925), p.151.

27)人口副刊北平晨報의 부록 판으로 매달 첫째 주 일요일에 발행되었다.

1932년 4월 3일부터 발행되어 1936년 3월 8일 정간되기까지 총 47期를 출간하 였다. 주요 집필진은 陳達ㆍ陳長蘅ㆍ李景漢ㆍ吳景超ㆍ潘光旦이었다. 또한 北平 婦嬰保健會 휘하의 節育指導所의 주요 의료진 이었던 楊步偉ㆍ蘇汝江ㆍ雷潔瓊 등도 다양한 논설을 게재하여 피임 의료의 보급 상황을 알렸다.

28)人口副刊은 “節育者通信”, “讀者來信”란을 만들어 산아제한을 원하는 독자 들의 편지를 게재하였다. 사실상 독자 투고란의 편지들은 北平婦嬰保健會의 의 료진에게 피임 방법에 관한 정보를 구하기 위해 쓴 것으로, 독자들은 자신들의 연령ㆍ자녀 수ㆍ경제 상황ㆍ여성의 건강 상황ㆍ산아제한을 원하는 이유 등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다. 독자들의 편지의 구체적 내용은 俞蓮實,民國時期城 市生育節制運動的研究: 以北京ㆍ上海ㆍ南京爲重點(復旦大學歷史系博士學位論 文, 2008.6), pp.406-466 참고.

29) 독자들의 편지 가운데 남성들의 편지가 더 많은 이유는 당시 남성들의 교육 수준, 문자해독력과 연관 지어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는 北平婦嬰保健會의 節 育指導所에서 진료를 받은 852쌍의 부부의 교육수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7)

① 편집자 선생님: 온 얼굴에 눈물과 수심이 가득 찬 여자를 아십니 까? 저는 결혼 한지 일 년여 남짓 지났으나 남자 아이 한명을 낳았습니 다. 우리부부는 처음에는 애정이 매우 좋았으나 최근 시댁의 재산 다툼 때문에 오해가 생겨서 예전에 비해서 사랑이 식었습니다. 남편의 수입은 매월 60여 元에 불과한데, 어른과 어린아이까지 합쳐 모두 7명을 부양해 야 하니 생활이 매우 궁핍합니다. 뜻밖에 저는 최근 또 임신을 하였는데, 대략 3개월쯤 되었습니다. 저희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 부사이도 화목하지 않으니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30)

② 편집자 선생님: 저는 어려서 양친부모를 여읜 고아입니다. 비록 양 친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이처럼 장성(이미 어머니가 되 었습니다) 할 때까지 살았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위안입니다. 그러나 저의 건강한 체격은 이미 쇠잔해져 연약하고 자주 병에 걸립니다. 특히 폐병은 첫 번째 아이를 낳은 후 病因이 생겼습니다.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공부 하던 저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중도에 학업을 그만두었습니다. 이 일은 저 를 너무나 슬프게 했습니다! 아아! 불행한 일은 더 많은 걸요? 첫째가 2 살 때 또 둘째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의사의 진찰을 받은 후 수술을 해서 아이를 지웠습니다. 이로 인해 3개월의 어린 생명을 희생했습니다. 이후 저는 온 힘을 다해 보양을 하였습니다. 병은 악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러나 걱정이 많은 저는 또 심각한 불면증을 앓았습니다. 이는 저로 하여 금 세상의 고통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만약 다시 임신한다면 오히려 일찍 자살을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아아! 여자는 이렇게 살아가기 힘든 것입 니까? 31)

③ 저는 올해 29세로, 23세에 결혼을 하여 현재 이미 세 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지금 느끼는 고통을 어찌 필묵으로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852쌍의 부부 가운데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은 273명이나, 남성은 단지 27명에 불과했다[沈驥英, 北平節育診所八百五十二例案之研究 (中華醫學雜志第22 卷 第5期, 1936.5), p.361]. 즉 32%의 여성이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반면, 남성 은 단지 3.2%만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때문에 교육률이 높은 남성이 근대적 매체를 통해 피임 의료 서비스에 관한 정보를 접하고, 적극적으로 산아제한 단 체에 편지를 보내어 피임에 관한 자문을 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성들이 쓴 편지의 대부분이 출산을 직접 담당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형태로 쓰 여 졌다. 그러므로 남성이 쓴 편지 속에서도 과도한 출산으로 인한 여성의 신 체적 고통, 여성의 자녀양육과 가사노동에 따른 정신적 부담을 살필 수 있다.

즉 여성들은 남편을 통해 자신들의 출산의 고통을 호소하였으며, 남성들은 아 내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필자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30) 已嫁婦的呼吁 (北平晨報ㆍ人口副刊第10期, 1933.1.1), 8면.

31) 節育者通信 (北平晨報ㆍ人口副刊第13期, 1933.4.2), 8면.

다만 가장 주요한 것은 대략 세 가지 입니다. (一) 신체가 본래 약하고 병치레를 많이 하였으나, 3명의 아이를 모두 모유 수유하여 신체가 날로 야위고 허약해졌습니다. (二) 경제적 곤궁입니다. 집에 재산도 없고, 남편 은 政界에서 소일을 하는데 월급이 가족을 부양하기에도 부족합니다. 이 후 자녀의 교육비용을 어떻게 감당할지 두렵기만 합니다. (三) 저는 원래 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했는데, 아이를 낳은 이후 선생노 릇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번잡하고 힘겨운 가사 일은 본래 제가 진심 으로 원하는 바도 아닙니다.32) (__밑줄 표시는 필자)

이처럼 여성들은 과도한 자녀의 출산으로 인한 경제적 압력을 경감 하기 위해서, 혹은 다산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과 질병으로부터 자신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 산아제한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또한 일부 여 성들은 자녀 교육ㆍ직업 생활ㆍ부부간의 애정 결핍이라는 이유 때문에 산아제한을 원하기도 하였다. 즉 사료 ③의 여성처럼 “번잡하고 힘겨 운 가사 일”이라는 모성적 역할로부터 벗어나 공적 영역에서의 자아실 현을 위해 산아제한을 원하는 여성도 출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48 년 12월

婦女

잡지에는 “영원히 더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한 여 성의 편지가 실렸는데, 胡桂芬이라는 이 여성은 자신의 사회적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남편을 설득하여 용감하게 ‘수란관절제술’을 실시하였다 고 고백하였다.33) 이외에도 “젊고 예쁜 부인네들이 자신들의 아름다운 청춘을 손상 시키지 않기 위해, 예쁜 옷을 입고 무도장을 드나들기 위 해 출산을 회피하는”34) 경향이 나타났다. 이들은 임신 2~3개월 때 의 사를 찾아가 낙태를 하거나, 매달 ‘刮宮(자궁 내막을 긁어내는)’ 시술을 받음으로써 임신을 억제하였다. 이를 통해 대부분의 여성이 가족의 경 제적 안정과 자신의 신체적 건강을 산아제한의 주요 이유로 제시하기 는 하였지만, 이외에도 여성의 출산 억제에 대한 욕망이 분절된 형태 로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2) 節育者通信 (北平晨報ㆍ人口副刊第19期, 1933.10.8), 8면.

33) 胡桂芬, 永不會再添孩子了 (婦女第3卷 第9號, 1948.12), p.7.

34) 一個讀者, 高等婦女逃避受孕的情形 (中央日報․婦女周刊第49期, 1936.3.

18), 3장 2면.

(8)

혼인의 주체 이상적 가정 조직 이상적 자녀 수 결혼 후 직업 활동

의견 人數 의견 人數 의견 人數 의견 人數

부모의견자주적, 40 분가, 그러나 부모에게

경제적 원조를 제공함 25 1남 1녀 14 찬성 45 부모의견,

본인의지 10 부모와만 동거 30 1남 2녀 6 반대 6

완전히자주적 6 경제적 형편에 따라

결정 3 2남 2녀 33 무응답 6

부모 결정완전히 4 확정할 수 없음 2

2남 3녀 1

따라 결정시간에 3 3남 5녀 1

無자녀 5

총수 60 총수 60 총수 60 총수 60

Ⅲ. 여성 지식인의 산아제한 문제에 대한 인식

民國時期에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사회ㆍ경제적 변화 속에서 부부 중심의 소가정이 확산되면서 가족의 기능도 점차 변화되었다. 또 한 서구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사상적 영향 하에 전통적 가족제도와 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사회적 태도도 점차 이완되기 시작하였다. 民國 時期 행해진 일련의 사회조사를 살펴보면, 당시 젊은 청년남녀의 결혼 ㆍ배우자ㆍ출산ㆍ이혼 등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급격하게 변화하였는 지 대략적으로 살필 수 있다.35) 특히 그 중에서도 중등교육 이상의 교 육을 받은 여성 지식인은 여성해방과 자유연애 사조의 직접적인 수용 자로서 직업ㆍ결혼ㆍ출산문제에 있어서 급격한 의식변화를 나타냈다.

1930년 梁議生은 燕京大學의 60명의 여학생을 대상으로 혼인문제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를 표로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1> 燕京大學 60명 여학생의 婚姻調査36)

35) 李文海 主編,民國時期社會調查叢編: 婚姻家庭卷(福州: 福建教育出版社, 2005).

36) 梁議生, 燕京大學60女生之婚姻調查 (民國時期社會調查叢編: 婚姻家庭卷,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燕京大學의 여학생은 결혼에 있어 자유연애에 의한 본인 주도적 결혼에 부모의 동의를 얻는 형태를 선호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결혼 후에는 시부모만을 모시는 핵심가족 형태 를 선호했으나(50%), 부모에게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되 독자적인 소가 정을 꾸리기를 원하는 여학생도 적지 않았음(41.7%)을 알 수 있다. 또 한 대부분이 결혼 후에도 단지 자녀의 양육과 가사노동에만 힘쓰기 보 다는 독립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하기를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출산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는 이상적인 자녀 수에 대해서는 55%이상의 여 학생이 2남 2녀를 선호했다. 그러나 5명이상의 자녀를 희망하는 여성 이 극히 적다는 점과, 자녀를 원치 않는 여학생도 5명이나 된다는 점 에서 ‘多子多福’과 ‘傳宗接代’의 전통적 생육관념이 어느 정도 이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60명의 여학생 모두가 산아제한을 찬성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은 산아제한을 찬성하는 이유에 대해

① 자녀가 너무 많으면 부모가 세심한 교육을 할 수 없으며, 어머니의 신체도 상처를 받는다. ② 경제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신체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③ 소수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정력을 집중해야 많은 사람들이 고 통을 받지 않는다. ④ 자녀가 많으면 완전한 교육을 받을 수 없다. ⑤ 유 전병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산아제한을 해야 하며, 자녀가 너무 많으면 老少 모두 약해지고 국가도 손해를 본다. ⑥ 자녀가 너무 많으면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사회를 위해 훌륭한 공민을 만들어 내기 어렵다.37) 라고 하였다. 즉 대부분 경제적 부담, 신체적 건강, 교육문제를 산아제 한의 이유로 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929년 陳利蘭의 中國女 子對於婚姻的態度之研究 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드러난다. 설문에 응한 200여 명의 여성 가운데 181명(90.5%)이 산아제한을 찬성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육ㆍ경제ㆍ국가 부강 때문이었다.38) 그러나 “유전병이 있는

福州: 福建教育出版社, 2005), pp.57-68.

37) 同上注, p.66.

38) 陳利蘭, 中國女子對於婚姻的態度之研究 (民國時期社會調查叢編: 婚姻家庭 , 福州: 福建教育出版社, 2005), pp.250-251. 陳利蘭의 설문에 응한 200명의 北京 지역 여성은 燕京大學女校ㆍ燕大女附中ㆍ貝滿中學校 등 여학교에 재학

(9)

사람은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 “산아제한을 실행하지 않으면 중국 인 종을 개량할 수 없다”, “만약 중국을 강하게 하려면 출산을 제한하고 우생학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39) 등의 의견 속에서 산아제한을 민족의 질적 향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우생학적 시각들 을 엿 볼 수 있다. 이처럼 출산에 대한 여성의 국가적ㆍ민족적 책임은 여성의 모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변함없이 강조하고, 그 결과 여성 지식인의 산아제한에 대한 태도도 모성을 벗어나서 여성≠모성≠

생육의 담론 질서를 형성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일부 여성들은

“어머니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여성의 각오도 존중해야 한다”40)는 張 競生이나, “여성이 산아제한을 통해 생리적으로 해방되어야 비로소 진 정한 남녀평등을 이룩할 수 있다”41)는 金仲華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모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즉 “생육은 여자의 직 업인가”42)라는 물음 속에서 초보적이나마 생육의 자주권에 대한 인식 이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上海 滬江大學의 사회학과 교수였던 Lamson은 1930년과 1933년 두 차례에 걸쳐서 중국의 기혼 여성 지식인의 산아제한 경험과 태도에 관 중인 여학생들이었다. 그 가운데 기혼이 40명, 약혼한 여성이 40명, 미혼인 여 성은 120명이었다. 이들의 연령층은 14∼27세 사이였으며, 평균연령은 20.8세였 다.

39) 同上注, p.250.

40) 江中孝 主編,張競生文集上卷 (廣州出版社, 1998), p.188.

41) 金仲華, 節制生育與婦人生理的解放 (婦女雜志第17卷 第9號, 1931.9.1), pp.2-10. 金仲華는 산아제한이 여성의 생활에 미친 최대의 영향은 생리적 측면 의 부담을 감소시켜 자유롭게 사회적 활동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한 점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여성이 과학적 피임법을 자유롭게 응용할 수 있게 된다면, 가정의 ‘生育器械’라는 호칭을 벗어던지고 남자의 맹목적이고 무리한 욕구에서 벗어나 새롭게 사회의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피임을 통해 여성이 생리적 한계에서 벗어나 ‘생육의 자주권’을 획득함으로써, 연애에 기초 한 新性道德을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생리적 해 방을 얻은 여성의 종족 품질개량에 대한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우생학적 조건 에 부합한 여성만이 모성의 자격이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42) 魏文英, 社評: 生育是女子的職業麼 (婦女月報第2卷 第9期, 1936.10.10), p.4.

已婚年數 平均已 婚年數

現在 平均年齡

平均 結婚年齡

平均 受胎次數

平均 現存兒童

現存兒童數相 次數(百當受胎 分比)

平均 受胎間隔 年數

平均 死亡兒童

平均 流産次數

平均 墮胎次數

平均 理想的子 女數 1-5 3.07 54 24.93 21.85 1.89 1.48 78.43 1.63 0.24 0.07 3.28 6-10 7.62 27 30.15 22.52 3.44 2.59 75.26 2.22 0.41 0.48 3.81 11-15 13.33 18 34.44 21.11 6.33 4.28 67.54 2.11 1.38 0.33 0.22 4.75 16-20 18 8 38 20 5.00 3.13 62.50 3.60 1.00 0.50 0.37 3.62 21-25 22.16 6 42 19.83 6.33 3.8 60.52 3.50 2.00 0.33 4.50

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1930년의 조사는 단지 34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43) 1933년의 조사는 120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생육실태 ㆍ산아제한에 대한 태도ㆍ피임 경험ㆍ낙태 경험을 광범위하게 조사하 였다.44) 때문에 이를 통해 보다 상세하게 당시 여성 지식인의 피임에 대한 이해 정도 및 피임의 실천 정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설 문조사의 결과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2> 120명 기혼 여성 지식인의 혼인과 생육 실태45)

43) Lamson, Herbert Day, “Educated Women and Birth Control in China”

(Chinese Medical Journal, Nov.44, 1930.11), pp.1100-1109. 1930년 봄 上海 滬 江大學 사회학과 Lamson교수의 지도하에 社會問題研討班의 한 여학생이 34명 의 기혼 여성 지식인의 산아제한 경험과 태도에 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에 응한 여성은 모두 이 여학생의 친구 혹은 안면이 있는 주변 인물로 일정 정도의 교육을 받고 上海에 거주하였다.

44) Lamson, Herbert Day, “Family Limitation among Educated Chinese Married Women: A Study of the Practice and Attitudes of 120 Women”(Chinese Medical Journal, Nov.47, 1933.5), pp.493-508. 이 설문조사 에 응한 여성의 평균연령은 30.7세였으며, 한 사람당 평균 3.7차례의 임신 경험 이 있었다. 120명의 여성 가운데 대학 학력자는 12명, 중학교는 71명, 소학교는 13명이었다. 16명은 가정과 私塾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았으며, 8명은 학력이 명확하지 않다. 물론 대학교육을 받은 여성부터 私塾교육을 받은 여성에 이르 기까지 교육적 격차가 매우 현격하기 때문에 이들을 일괄적으로 ‘여성 지식인’

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여성 지식인을 일 정 정도의 교육을 받은 문자 해독 능력을 갖춘 여성으로 정의하고, 보다 광의 적 의미로 사용하도록 하겠다.

45) Lamson, “Family Limitation among Educated Chinese Married Women”, pp.494. 이하 각 표의 분석 내용은 위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10)

26-30 28.25 4 45.75 17.50 9.50 6.25 65.79 2.97 2.25 0.75 0.25 7.67 30年以上 37.33 3 56 18.66 7.33 6.00 81.82 5.09 1.33 6.00 綜合 9.28 120 30.73 21.44 3.73 2.65 71.14 2.49 0.68 0.27 0.07 3.88

120명 여성 지식인은 결혼 연수를 기준으로 7개 그룹으로 구분된다.

이들의 평균 결혼 연수는 9.28년이나, 개인적 편차는 결혼 1년에서 45 년까지 광범위하다. 이들의 평균 결혼 연령은 21.4세이나, 결혼 연수가 짧을수록 결혼 연령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즉 결혼 연수가 30년 이상인 7조 그룹의 3명의 여성은 모두 1900년 이전에 결혼하였는데, 이들의 평균 결혼 연령은 18.66세이다. 1ㆍ2조 그룹의 81명 여성은 1921∼1931년 사이에 결혼을 하였는데, 이들의 평균 결혼 연령은 22.07 세이다. 결국 이 두 그룹 사이의 평균 결혼 연령은 3∼4세의 차이가 난다. 民國時期 여성 지식인의 교육수준과 사회진출이 증가함에 따라 혼인 연령이 점차 상승하는 경향이 출현하였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출 산 연령의 상승과 출산율의 감소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여성 지식인의 임신과 출산의 상황을 살펴보면, 120명 여성은 총 447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개인 당 평균 3.7차례 아이를 출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이 아직 가임 연령기에 처해있었기 때 문에 평균출산율은 3.7명을 훨씬 상회하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가 임기가 끝난 7조 그룹의 여성의 경우 평균출산율은 7.3명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또한 120명 여성의 평균 임신 간격은 2.5년에 한 차례 정 도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임신 간격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실상 유산과 낙태한 태아의 숫자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만 약 이 숫자까지 포함한다면 여성들의 임신 간격은 2.5년보다 훨씬 짧 아질 것이다. 실질적으로 수태 횟수가 전혀 누락되지 않은 31명 여성 의 경우 평균 임신 간격은 1.9년이었다.

120명 여성의 생존 자녀 수는 447명 가운데 318명으로 71.14%의 자 녀만 생존했음을 알 수 있다. 30%에 가까운 높은 유아 사망률은 당시 여성들의 출산 의료 환경이 여전히 열악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또한

질문 내용 응답자 수

산아제한에 대한태도

여성은 응당 아동 수를 제 한해야 하는가?

불응답 제한

불가능 제한할 필요

없음 응당 제한 기타 총수

24 3 3 90 0 120

여성은 응당 生殖을 자연 적으로 내버려 둔 채, 간섭 해서는 안 되는가?

불응답 간섭 간섭할 필요 없음 기타 총수

24 85 5 6 120

여성이 生育의 간격을 결 정할 수 있는가?

불응답 모르 겠음 쉽지

않음 불가

결정할 수

있음 기타 총수

28 2 6 3 81 0 120

여성의 신체가 과도한 生 育으로 인해 심각한 영향 을 받는가?

불응답 영향

없음 과도한 生育은 모체의 건강에

영향을 미침 기타 총수

16 7 97 0 120

피임지식 정도 피임

만약 더 많은 아이를 원하 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피임하겠는가?

불응답 모르 겠음 中藥

복용 西藥 사용 산아

제한 침대

분리 수술 기타 총수 58 22 7 4 13 3 2 11 120 피임을 실행해 본 경험이 불응답 경험 피임을 해본 적이 있음 기타 총수

120명 여성 가운데 24명의 여성이 32차례의 유산을 경험했는데, 한 여 성 당 평균 1.3명의 유산을 경험한 셈이다. 이외에도 5명의 여성이 8차 례 낙태를 시도해 본 경험이 있으며, 그 가운데 오직 4차례만 성공했 다고 고백하였다. 마지막으로 이상적 자녀 수는 생존 자녀 수를 포함 한 숫자인데, 120명 여성은 평균적으로 3.8명의 자녀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적 자녀 수는 결혼 연수가 짧을수록 적은데, 결혼 10년 이하 의 여성은 평균 3.4명의 아이를 원한 반면, 결혼 21∼30년의 여성은 5.5명의 아이를 원했다. 즉 1900년 이전 결혼한 여성과 1920년 이후 결 혼한 여성의 이상적 자녀 수는 2명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 다. 이 결과는 燕京大學 60명 여학생의 婚姻調査와도 유사한데, 당시 여성들이 3∼4명을 이상적인 자녀 수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그렇다면 120명 여성 지식인의 산아제한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을까?

아래의 표를 통해 여성 지식인의 서구 피임법에 대한 이해도와 피임 지식을 얻는 경로 등을 살필 수 있다.

<표3> 120명 기혼 여성 지식인의 산아제한에 태한 태도와 피임 경험

(11)

경험

있는가? 어떤 방법을 사용 하였는가?

없음

22 75 23 0 120

성생활을 유지하면서도 피 임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어떠한 방법인가?

불응답 그런 방법은없음

성생활을 유지하면서 임신을

억제할 방법은 있음 기타 총수

24 57 39 0 120

근대적 피임 방법을 알고 싶은가?

불응답 모르

겠음 알기 원함 원치 않음 필요

없음 기타 총수

24 10 69 10 3 4 120

당신이 알고 있는 기타 기 혼 여성도 피임 지식을 환 영하는가?

불응답 모르

겠음 알기 원함 원치 않음 필요

없음 기타 총수

15 11 85 9 0 0 120

낙태정도 낙태 방법

당신이 알고 있는 여성 가 운데, 낙태가 보편적인가?

불응답 보편적아님 보편적 잘 모르겠음 기타 총수

20 64 26 10 0 120

어떤 방법으로 낙태를 실 행하는가?

藥 복용 穩婆 의사 전통적

방법 麝香 복용 기타 총응답

14 2 1 1 1 0 19

의사와피임서 적에대한 태도

의사가 산아제한 방법을 제공해야 하는가?

불응답 반대 모르

겠음 의사가 산아제한

방법을 제공해야 함 기타 총수

18 7 4 91 0 120

피임 문제를 탐구한 중국 서적이 있는가?

불응답 모르 겠음 서적

없음 피임에 관한 서적이

있음 기타 총수

31 37 25 27 0 120

위의 표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여성이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인식하 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여성은 반드시 자녀 수를 통제해야 하 는가”라는 물음에 90명이 “예”라고 답변하였다. “생식을 자연적으로 방 기한 채, 인위적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물음에는 85명의 여성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출산간격을 결 정할 수 있다고 믿느냐”는 물음에는 81명의 여성이 가능하다고 답변하 였다. 그중 3명의 여성은 이상적인 출산 간격을 각각 1.5년, 2년, 3년이 라고 대답하였다. 이외에 “과도한 자녀의 출산이 여성의 건강을 해친 다”는 물음에 97명의 여성이 “그렇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를 통해 여성 지식인은 임신을 자연적ㆍ숙명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인위적 통제

가 가능한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은 피임을 통해 출산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이는 피임법에 대한 앎의 욕망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만약 더 많은 아이를 원치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피임하겠 는가?”라는 물음에 58명의 여성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으며, “모 른다”고 대답한 여성도 22명이나 됐다. 29명의 여성은 구체적 피임법 을 언급했는데, 13명-산아제한46), 7명-중의약, 4명-婦女的友(Ladies' Friend), 3명-침대분리, 2명-수술이라고 대답하였다. 기타에 속한 11명 가운데 5명은 각각 성교 절제 및 체외사정, 성교 횟수의 축소, 성관계 중지, 수유기간 연장, 射精 중단이라고 대답했다. 나머지 4명은 피임이 필요 없다고 대답했으며, 2명은 각각 “임신은 회피할 수 없다”, “피임 법을 알고 있으면 알려 달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120명의 여성 가운데 명확하게 산아제한 방법을 알고 있는 여성은 겨우 17명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피임을 시도해본 경험이 있는가? 그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75명의 여성이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즉 120명의 여성 가운 데 75명은 피임을 실시해본 경험이 없었으며, 23명의 여성만 피임을 시행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23명 여성이 사용한 피임법과 그 효과는 ① 페서리 (성공), ② 피임약 (성공), ③ 성교 후 질 세척 (완전히 성공하지 못함), ④ 마거릿 생어의 방법 (성공), ⑤ 침대 분리 (성공), ⑥ 성관계 중단 (성공), ⑦ 예방적 방법 (상당 성공), ⑧ 산아제 한 (성공), ⑨ 성교 절제 및 성교 후 뜨거운 물로 질 세척 (성공), ⑩ 婦女的友 (부분 성공), ⑪ 금욕 (좋지 않다), ⑫ 수술 (성공), ⑬ 중의약 복용 (실패) 등 매우 다양하고 편차가 심했다. 이를 통해 23명의 여성 46) Lamson, Herbert Day의 설문조사에는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29명의 구체적 피임법을 언급한 여성 가운데 13명이 단지 산아제한이라 고 말했다. 산아제한은 물론 서구적 피임 도구를 이용한 피임법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지만, 구체적으로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 없다. 또한 피임을 시행해본 경험이 있는 여성 가운데 일부 여성은 단지 “마거릿 생어의 방법”이 라고 대답하였는데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Referen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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