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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투른' 작가의 반(反)소설: 아르카지의 수기 - S-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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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 회 숙*

1.

문제재기

직접성과 순진함이 문학(과 문화 일반)의 역사에서 이미 과거의 미덕에 속 하는 시점에서 다시금 표면에 내세워질 때, 거기에는 선행한 문학의 복잡함보 다 더욱 복잡한 단계의 단순함과 정교한 수사학보다도 더욱 의도적이고 노회 한 ‘서투름’이 들어 있다.1) 도스토예프스키 (φ.

M.

aOCTOeBCKHR) 와 하름스 (a.

11.

XapM이야말로 이같은 서투름의 전략을 극단적으로 구사하면서, 문학 장르의 혁파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문학과 언어의 매체성에 대해 회의와 성찰을 시 도한 작가들일 것이다. 이중 하름스의 경우 ‘부조리 문학’이라는 범주가 그의 서투름을 작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부터 보호해주는 차단막의 역할을 하 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돈과 재능의 곤궁함 때문에 허겁지겁 써대는 작가로 자주 비판받아야 했던바, 예컨대 나보코프 (B.

B.

HaÓOKOB)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서투름을 그 어떤 전략적인 것도 아닌, 글자 그대로 변변찮은 작가의 주접스 럽고 유치할 뿐인 서투름이라고 경멸했다.2) 그러나 이 논문은 바로 도스토예 프스키의 작가적 서투름이 교묘한 문학적 장치로서 발전되어 나온 배경과 의 도, 그것의 작동 양상을 러시아 소설사와의 연관 속에서 『미성년 (nOllPOCTOK).!I 을 중심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서술자는 대개 작가들이다 .3) 그것도 대부분 인정받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1)

로트만의 개염을 사용하자변 이것은 마이너스-기법 (Mlmyc-npHeM) 으로 설명될 수 있 다.

10. M. JIoTMaH(1972)

AHaJ1H3 n03TH'leCKOrO TeKCTa

, JI.: npOCSe

Dl

eHHe , cc.

23-33에 서 그는 이 개념에 기반하여 시와 산문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설명한다.

2) V l. Nabokov (1 984) Die Kunst des Lesens, Frankfurt am Main: S. Fischer , S.

147-200에서 나보코프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말하는 어조는 상당히 노골적이다 (영어본은

Lectures on Russian Literatures , New York , 1981).

3)

f 가난한 사람들 (BenHble J\IO띠).!I은 글쓰기 연습에 열심인 하급관리의 편지이고백야

(Be

J\bl

e

Ho'm) .!I는 ‘어느 몽상가의 회상’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프로하르친씨
(2)

2

러시아연구 제 13권 제 2호

지 못하거나 실패한 작가, 또는 마구잡이로 써대거나, 작가를 경멸하면서도 작가로 데뷔하길 원해 마지않는 비직업적 작가들이다. 그런 만큼 이들의 글은 제도권의 문학 장르와 문학 양식에서 벗어나 있는 비문학적 또는 반문학적 장르와 담론 방식을 택한다. 전기, 일기, 편지, 회상록, 연대기, 수기 둥의 양 식이 그것들로, 이 양식들이 불러일으키는 다듬어지지 않은 서투름과 나이브 한 직접성의 인상은 우리가 도스토예프스키익 소설에서 다름아닌 ‘누군가의 말’을 읽고 있다는 사실 책을 여는 순간 바로 그 누군가에 의한 담론의 탄생 에 함께 자리한다는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소설 속에 묘사된 세계에 앞 서 누군가의 말 그 자체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깨우쳐준다. 이 점에서 리하효 프 (ll.

C.

재xalleB) 의 도스토예프스키론은 연대기적 시간구조를 매개로 도스토 예프스키의 소설세계와 고대문학의 연접성을 증명해보이는 혜안에도 불구하 고, 수정될 필요가 있다. 리하효프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줄거리, 사건, 인물들이며, 서술자는 상당 정도 잊어버려도 좋은 존재라고 말 하지만,4) 이는 1 인칭 서술자가 소설의 전개와 함께 거의 3 인칭 서술자처럼 중성적으로 변해 버리는 『악령 (5eCbI).!l같은 소설에서나 예외적으로 타당하다 할 것이다. 그의 대부분의 소설 특히 (의사)고백록적이고 (의사)전기적인 수 기 소설은 규범적이고 중성적인 말이 아니라 말하고 쓰는 누군가를 언제나 느끼게 하는 집요한 담론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이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

-

서술자로 둥장하는 서 투른 작가, 전적으로 그의 지평에 맞추어진 서술의 완전한 주관주의, 묘사대 상을 대체하다시피 하는 묘사매체, 비(반)문학적 장르의 선택을 통해 더욱 과 시되는 반(反)문학선언, 삶의 텍스트와 문학 텍스트의 동시성 추구

-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과 소설에 대한 입장, 이것이 지금부터

(rOcnonHH npoxap'깨H)~ 의 허구적 작가는 전기작가를 자처한다정직한 도둑 (4eCT

Hblll BOp)J 은 ‘어느 무명씨의 수기에서’ 가져온 것으로 되어 있고네토치카 네즈바

노바 (HeTot.{J< a He3BaHOBa)J 와 r 지하생활자의 수기 (3anHC J<H H3 nOnnOJlbjj)~ , ~죽음의 집의 기록 (3anHC 써 H3 MepTBOrO nOMa)~ 은 모두 수기 형식이다학대받은 자들

(YHH:I<eHHble H OC J<Op6J1eHH퍼e)~ 은 실패한 작가가 쓰는 수기이며하상동기 (3HMHHe

3aMeTJ<H 0 J1eTHHX Bnet.{aTJleHH꺼X)~ 는 허구적 서술가의 여 행기다도박사 (Hrpo l<)~

,

『미성년 (nonpOCTO l<)~도 모두 허구적 수기이다. 그밖의 작품에서도 많은 서술자들이 연대기작가로 자신을 소개한다.

4) n.

ßHxat.{eB(1987) #3φaHHlJe pa60TlJ 8 TpeX TOMaX

, ß.:

Xyno:l<ecTBeHHajj 재 TepaTypa , T.

1 ,

CC. 607-608을 참조하라.
(3)

들여다 볼 문제들이다.

2.

전기(傳記)의 소유권과 서투른 작가

먼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대거 등장하는 작가-주인공-서술자부터 살 펴보자. 그의 이 전형적인 서술자 유형은 중세 이후 시작된 전기 텍스트 전통 의 변화과정 속에 자리한다. 로트만 (10.

M.

J1oTMaH) 에 의하면, 전기란 한 사회의 모든 사람이 다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 게 아닌바, 전기를 갖는 인간과 갖 지 못하는 인간의 모델이 정해지는 것은 그 시대의 문화유형에 의해서이다.

인간은 문화코드체계에 의해 완전히 규정되는 인간과 어느 정도 자유롭게 스 스로의 행위모델을 선택하는 인간의 두 유형으로 구분된다. 이들 중 후자, 즉 문화가 규정하는 행위규범 속에서도 선택과 그것에 따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들만이 전기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자신의 삶과 이름을 문화 기억 속에 남길 권리를 획득한다. 이것은 규범의 이상적 수행을 목표로 하는 중세적 문 화유형에서나, 모든 규범으로부터의 일탈과 이단아적 개성을 지향하는 낭만주 의적 문화유형에서나 전기의 전제로서 공통되게 적용된다.5)

그렇다면 작가는 앞에 말한 두 범주의 인간 중 어디에 속하는가? 고대와 중세의 문화는 작가에게 그 자신의 전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작가는 전기를 가진 사람과 전기를 갖지 못하고 그것을 읽게 될 사람들(대중) 사이에서 전기 를 쓰는 존재로서, ‘전기를 가진 인간에 관한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전기를 갖지 못하는 인간’이었다,6) 교회슬라브어가 신성한 신적 근원과 결합되어 있 어 그 자체로 이미 진실을 담보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세 의 전기 작가 역시 ‘작가’라기보다는 신성하고 높은 근원으로부터 텍스트를 받아 그것을 청중-독자에게 전하는 진실한 매체로 기능하는 데 그의 소명이 있었다,7)

5)

10.

M.

)J

onlaH(1992)

")J

HTepaTYPHa

Jl 따orpa빼JI

B HCTOpHKo-KynbTypHOM KOHTeKCTe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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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KoMy COOTHOmeHHIO TeKCTa H n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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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CTH aBTOpa)

," H36p8HHble Cr8rbH B rpex rOM8X

, T. 1 , TannHHH:

A.n

eKcaHLIpa , CC.

365-366를 참조하라.

6)

같은 책, 367-368쪽.

7)

같은 의미에서 로트만은 중세 러시아의 기호 의식에 대해 말하면서 매개자-작가의 기능을 사진 현상액에 비유한다 “텍스트를 창작하는 작가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
(4)

4

러시아연구 제 13권 제 2호

그러나, 개성을 지향하는 문화유형의 정착은 전기의 소유권에도 커다란 변 화를 초래한다. 중세로부터 전기 작가가 될 권리만을 부여받았던 작가는 이제 스스로에게 전기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고 스스로 자신의 전기를 창조하게 되 었기 때문이다. 중세 문화가 텍스트의 신빙성과 작가의 무전기성을 유지시켰 던 것과 달리, 19세기의 도래는 (18세기에서의 작가 의식의 첨예화를 거쳐) 텍스트를 작가에 의해 매개되는 애초부터의 진실이 아니라, 작가-개성에 의해 창작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텍스트는 이제 더 이상 진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고, 진실성에 대한 믿음은 창작자의 개성에 좌우되게 된 것 이다.

이러한 변화는 러시아 문학에서 순수한 픽션소설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 니라, 의사역사로서의 역사소설과 의사전기를 정당화했다.8) 같은 맥락에서 도 스토예프스키의 허구적 수기 일기 소설들은 의사전기의 과격한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전기 텍스트 전통과의 연관성은 서술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가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있을지언정 도스토예프스키가 과시하는

‘서투른’ 작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것은 감상주의에서 리얼리즘에 이르 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적 생애에 보다 동시대적으로 작용한 문학 조류들,

그리고 특히 고골 (H.

B.

rOrOJlb) 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이해해야할 문제일 것이 다.

중세 문학과 고전주의가 규정해 놓았던 엄격한 양식체계 속에서 작가는 교 회와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매체성을 인정받았지만 그 매체성이란 묘사대상을 어떤 식으로도 변화시켜서는 안되는 고유가치 제로의 독자성을 갖는 것이었

도 자신의 작품의 창조자가 아니다. 그들은 중개자(매개자)일 뿐으로 그들을 통해 내용 자체 속에 포함되어 있는 표현이 가시화된다.

(…)

예술가는 새로운 것을 창 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있었고 영원히 있는 것을 발견해낸다. 텍스트 창작 에서 그가 행하는 기능은 사진 제작에서 현상액의 역할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역할은 수동적이지 않다 예술가는 자신의 심리적 능동성을 통해 세계의 영원하고 선결정되어 있는 의미를 현상하게 하는 ‘현상액’의 역할, 매개자의 역할로 나타날 수 있는 권리를 입증해 보이는 인간이다 ” 삐 M. JIoTMaH

(1 970)

"np06J1eMa 3Hal<a 11 3Hal<OBOR CIICTeMbl 11 TlIlIOJlOrllJl pyccl<oR l<yJlbTypbl

11-19

BB. ," CTa TbH TlO THTlOJTOrHH KyJTbTypbl. TapTy

,

C.

22.

8)

푸쉬킨의 『벨킨 이야기 (nOBeCTII 1I0 l<O뻐oro HBaHa neTpOBIIQa EeJlI< IIHa)~ , ~고류 히 노 마을의 역사 (HCTOpIIJl ceJla rOp~xIIHa)~ 도 이 에 속한다.
(5)

다. 따라서 매체의 기능은 전적으로 대상의 영구불변한 신성함과 진실성을 조 금의 훼손도 없이 투과시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글쓰기가 점차 개성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변모해 가면서 이같은 공적인 코드가 사적인 문학쿄드에 자 리를 내어주게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대로이다. 그리하여 작가 는 자신의 전기를 갖게 되었고, 특히 감상주의에 오면 오직 작가(시인)만이 전기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말해도 무방한 상황이 된다. 여기서 ‘서투른’ 작 가로 이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감상주의 작가들이 그들의 전기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사랑에 빠진 시인’, ‘글쓰는 연인’9)의 자기이미지이 다. 그들의 글에서 중요한 것은 위로부터, 또는 밖으로부터 선규정되어 주어 진 진실이 아니라, 그들 감정의 현실, 감정의 진실이다. 외부 세계뀐 모든 것 들은 텍스트 속에서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된 이 다감하고 감상 적인 작가 형상에 의해 지각되고 표현된다. 감상적 자아의 직접적인 지각에 완전히 부합하게끔, 표현은 직접적이고 솔직하고 진정하고 자연스러워야 했 고, 이를 위해 감상주의 작가들이 택한 것이 섬세하고 다감한 (rrpHJITH피ß) 중문 체였다.

중세와 고전주의의 작가들이 언어양식 매체와 더불어 그들 자신도 매체로 기능했다면, 감상주의 작가는 스스로 매체를 선돼하고 매체를 부리는 주체의 지위에 올라선다. 그는 주체로서 자신의 감정을 언어화하고 자신의 언어를 감 상화한다. 묘사대상의 선택, 배열, 평가는 전적으로 그의 주관적 시각에 달렸 다. 감상주의자가 “진정한 시인은 가장 평범하고 진부한 것들에서 시적인 면 을 발견한다”라고 선언할 때, 거기서 강조되는 것은 객관적으로 만물에 편재 하는 시적 성질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시인의 권능이다.10) 시적 대상은 작가 에게 지시되는 게 아니라, 그가 발견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작가는 작은 것을 크게 만들고 큰 것을 작게 만들 수 있으며, 사소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고, 사소한 감정에 파토스를 부여할 수 있다. 일상의 사실 (6b1TOBO꺼 lþaKT) 은 작가에 의 해 문학적 인 사실 (JIHTepaTypHbI때 lþaKT )이 된다. 모든 것은 작가

9)

P. J1axMaHH(2001) /1eMOHT(j)f( KpaCHOpe 'lHJf. PHTOpH'leCKaJf TPIll1HIJHJf H nOHJf THe n03TH- 'leCKOrO

, cn6., c. 238

10) 감상주의의 마니페스토라 할 수 있는 H.

M.

KapaM3HH 의 "HaXOIlHTb B ca뻐X o6h1J(- HOBeHHhIX Be띠ax nHHTH앤CKy.o CTOPOHY"

,

"니TO Hy)i(HO aBToPY" 를 참조하라. H. M.

KapaM3HH

(1 984)

CO 'lHHeHHJf B PByX TOMax

,

π'eHHHrpap: Xypo*ecTBeHHaJf JJHTepa Typa

,

T.

1,

CC.

88-90,

60-62.
(6)

6

러시아연구 제 13권 채 2호

시각의 주관주의 아래 놓인다.

작은 인간, 사소한 것, 일상의 사실

-

이것들은 감상주의를 배격하고 나선 자연파의 프로그램에서 문학의 대상으로 오히려 더 확고히 자리를 굳히게 되 는 감상주의의 발견물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감상주의 작가가 스스로에게 전기의 권리를 인정하고 평범하고 사소한 인간들에게 전기의 가 능성을 인정한 것이 자연파에서는 사회현실에 의한 전기의 무력화와 심지어 전기의 비참한 파멸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형식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역설이 다. 가까스로 주체성을 확보하고 자신의 전기를 가질 수 있었던 개인은 자연 파에서 다시 운명과 전기를 박탈당한다. 만델쉬탐이 말하듯, 소설이 근본적으 로 한 개약이나 개인 집단의 운명에 관한 확장되고 완결된 이야기이고 따라 서 소설의 구성적 수단은 인간의 전기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전기를 갖지 않는 인물이 소설의 주제적 축이 될 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하다11l 마찬가지 로, 개인적인 인간의 운명과 전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 소설 또한 있을 수 없 다. 자연파는 사소한 인간들을 전기의 주인공이 아니라 전기로부터 버려진 존 재로 바라보며, 따라서 자연파에서 그들이 동장할 수 있는 텍스트는 (장편)소 설이 아니다. 오체르크 (OqepK) 에서 주제의 핵심은 인간이 아니라, 사회환경에 의한 인간의 피결정성이다.

그렇지만 전기와 운명의 상실은 자연파의 공격에 앞서 이미 감상주의 안에 서 재촉되고 있었던바 그 과정은 감상주의의 혁신성이 상투성으로 전락하는 것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더구나 모든 사소한 인간이 감상주의 텍스트의 주인 공이 될 수 있었고 문학 텍스트의 감정이 삶의 감정과 진정하게 일치해야 했 던 만큼, 자동화와 상투화는 다른 어떤 문학조류에서보다도 빠르고 넓게 나타 났다 문학 텍스트 속에서 표현은 표현을 반복 재생산했고, 바깥의 삶 또한 문학 텍스트의 양식을 모방하여 자신을 리모델링했다. 삶과 감정에서 직접성 과 진정성의 추구가 서투른 모방으로 변질하면서, ‘사랑하는 시인’, ‘글쓰는 연 인’은 이미 생생한 인간-작가가 아니라 감상적 담론의 복제를 위한 상투적 마스크가 돼버렸다. 삶도 문학 텍스트도 모두 서투른 아류의 것이 되고 만 상 황에서 묘사대상과 아주 동떨어져버린 매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 상과의 진정한 일치성을 내세우는 ‘허위의 양식’을 낳았다 12)

11) 소설의 구성적 수단으로서의 전기에 관해서는 o. 3. MaHlleJJbmTaM(197

1)

"KOHel.\

poMaHa

,"

Coφ co t{. B

3

T.

,

New York: Mell<llyHapollHoe JJHTepaTypHoe cOIlP

y*

eCTBO

,

T.

2 ,

cc. 266-269를 참조하라.
(7)

3.

스키즈와 정서

-

문체와 작가 존재의 매체성

감상주의가 양산시킨 ‘서투른 작가’는 자연파에 의해 또다른 관점에서 계속 생산되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가 의도하지 않은 불행한 결과였다면, 후자는 프로그램에 따른 계획생산이었다. 자연파의 의도는 독자적인 힘으로 커져버린 매체에 대한 묘사대상의 종속을 중단시키고 묘사매체와 묘사대상간의 간극을 최대한 축소시킴으로써 텍스트의 진실성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자 연파 작가들은 비문학적 산문 장르 (04epK)를 택했으며 대상과 현실 (ÕblT) 을 왜 곡과 조작의 위험이 있는 퍼스펙티브를 거치지 않고 바로 텍스트 속으로 들 여왔고, 사회환경에 의해 결정된 전형들의 비문학적이고 서투른, ‘자연스러운’

말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그러나 서두에서 말했듯이, 러시아 문학은 정말로 서투른 아류 작가가 아니 라면 단순히 서투른 작가일 수 없는 지점에 이미 오래전에 와 있었다. 문학 텍스트의 자연스러운 말은 결코 자연스러운 말이 아니라, 인위적인 교묘한 문 학적 장치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스러움의 ‘인상’이고 ‘환상’이었다. 이것이 자 연파의 충실한 오체르크 작가들과 고골을 구별지으며, 바로 여기에 고골에 대 한 그들의 아전인수격 인 오해의 본질이 있다.

서투른 작가-서술자의 글쓰기를 통해 고골이 시도하는 것은 사회비판적 동 기에서 출발하여 인물 전형들의 실제적인 말을 굴절없이 재현하는 평면적인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그는 문학 텍스트 속에서 글을 통한 말의 팩토 그라피가 과연 가능한가라는 메타시학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글과 말이라는 언어적 실행의 서로 다른 두 매체간의 호환성에 대한 성찰은 스카즈 장치를 사용한 소설 텍스트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매체성에 대한 성찰은 스 카즈에서 그치지 않는다. 재현의 수단으로서 여러 상이한 매체의 적합성 문제 는 점차 동일 매체(글, 문자)에 의한 재현의 문제로 특화되어 다루어진다. 정 서사(햄書司)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여러 편의 소설에서 문자와 문학양식의 매체성에 대한 성찰은 곧바로 작가 존재의 매체성에 대한 성찰을 촉발시킨다.

고골의 스카즈 서술자와 정서사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

12)

라흐만은 이 과정을 두고, 고전주의의 비진실한 수사학을 비판하고 나섰던 감상주의 가 스스로 공허 한 수사주의 에 빠져 버 렸다고 말한다. P. 끼aXMaHH

(2001) ,

CC. 236-240를 보라.

(8)

8

러시아연구 제 13권 쩨 2호

히 살펴볼 펼요가 있다. 그들은 러시아 문학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수의 ‘서 투른’ 작가를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생생하게 ‘육체적’

으로 느끼게 하는 텍스트, 금욕적인 정서사, 정서와 팩토그라피의 연관성, 반 문학 선언 둥은 두 사람의 문학에서 공통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 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새삼 빌지 않더라 도, 도스토예프스키는 고골의 ‘외투’를 누구보다 즐겨 입었던 작가였고, 그때 마다 고골은 그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고골의 스카즈 텍스트가 자연파가 생각하듯 인물 전형의 자연스러운 말을 서술자의 시점이나 문학적 코드에 의한 변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찍어내 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에이헨바움 (5. 3ßXeHÕayt.f)이 지적한 바다 13) 에이헨바움은 재현적 스카즈를 읽을 때 ‘환상’으로 떠오르게 되는 구연 행위 를 강조했고, 그것을 아예 논문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14) ‘말하는 텍스트’ 스 카즈가 재현하고 있는 말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 (lþaKT )가 아니라, 스카즈 장 치에 의해 만들어져 나오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비노그라도프 (B.

B. BHHorpa-

JlOB)도 15) 스카즈를 ‘구어적인 독백적 말의 예술적 상응’으로 정의하면서, 스카 즈가 모방하는 구어적 독백(특히 서술적 유형의 독백)이 실제로 민중의 화행 에서는 오히려 드문 것임을 잊지 않고 지적했다. 결국 스카즈가 앞세우는 화 자는 실재하지 않는 화자이며 그의 육체언어는 재현되고 재생산된다기보다는 스카즈 장치를 통해 인위적으로 합성되는 예술적 구성물로서, 예술 텍스트 바 깥에서는 실재하지 않는 환상이다. 이 사실은 텍스트 발생론적인 관점에서 원 본과 복사본, 1 차 텍스트와 2차 텍스트의 일반적인 관계를 뒤집어 놓는다. 다 시 말해, 재현되는 1 차 텍스트로부터 재현하는 2차 텍스트가 나오는 것이 아 니라, 2차 텍스트로부터 1 차 텍스트가 상상되고 유추되는 것이다. 1 차 텍스트 의 위치는 바현실적이며, 2차 텍스트에 대해 오히려 부수적이다. 현실은 고골 의 스카즈에서 비현실이 된다. 왜곡없이 현실을 재현해야 할 스카즈는 자연파 의 확실한 현실을 유령으로 만들어버린다.

13) B. 311xeHôayw(1969) "KaK Clle

Jl

aHa <WHHe

Jlb)

rOrO

JlJl,"

Texte der russischen Formalisten , Bd. 1, München: Wilhelm Fink Verlag, S. 122-159.

14) B. 311xeHôayw(I969) "H

JIJII0

3HJI cKa3a," Texte der russischen Formalisten , Bd. 1, München, S. 160-167.

15) B. BHHorpalloB(I969) "npOÔ

Jl

eMa CKa3a B CTH

Jl

HCTHKe

,"

Texte der russischen

Formalisten , Bd. 1, München, S. 168-207.

(9)

여기서 고골의 스카즈가 제기하는 물음은 예술텍스트와 현실, 문학과 진실,

묘사매체와 묘사대상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문학텍스트 바깥에 현실이, 진실 이 실재하는가? 전자가 후자를 온전하게 재현할 수 있는가? 근본적으로 존재 론적이고 동시에 매체론적인 이 문제를 이해하기에 앞서 먼저 짚어두어야 할 것은 스카즈가 구어 지향성과 함께 문자에 의한 녹취성을 본질적인 요소로 갖는다는 점이다. 스카즈는 단순히 재현된 구연(口演)이 아니라 글을 통해 재 현된 구연이다. 이렇게 스카즈를 한 매체(말)에서 다른 매체(글)로의 이행으 로, 즉 매체를 넘어서는 재현의 시도로 이해한다면, 현실의 환상을 불러일으 키고 현실을 환상으로 만드는 것은 다름아니라 스카즈의 문자텍스트성이다.

고골이 이야기꾼들 (CKa3HTeJlb) 이 우세한 초기 스카즈 텍스트로부터 정서하 기, 베껴쓰기, 글쓰기를 주제 차원에서 다루는 소설 텍스트로 점차 옮겨간 것 도 문자매체성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의 맥락에서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소설 텍스트들은 문자매체의 경계를 넘지 않으면서 문자 그 자체의 매체성 본성에 관한 성찰을 극단적으로 진행시킨다.

스카즈 텍스트의 목표가 현실의 환상, 이야기꾼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데 있 다면, 문자매체 내에 머무르는 소설 텍스트, 대표적으로 「광인의 수기 (3anHCKH cyMacme때ero)J 가 보여주는 것은 반이성적 글쓰기의 작동 양상이다. 그럼에도 이 두 종류의 텍스트들은 본질적인 공통점을 지닌다. 전자에서 실제의 구어적 이야기가 실재하지 않는 것의 환상인 것처럼, 후자에서 미치광이 정서사에 의 해 정서되는 원본 문서(또는 글)도 그가 써놓은 2차 텍스트로부터 역으로 유 추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묘사대상)에 대한 관계에서 자연파가 스카즈나 수 기를 통해 노리는 직접성은 역설적인 것이 되고 만다. 또다른 공통점은 2차 텍스트의 저자가 두 경우 모두 ‘서투른 작가’라는 것이다. 스카즈 서술자가 문 법과 공식적 문학 쿄드에 맞지 않은 ‘자연스러운’ 민중적 말을 써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치광이 정서사 역시 의미와 이성의 궤도에서 이탈한 뒤죽박죽 인 일기의 저자이다. 고골은 이 제멋대로인 일기에 ‘수기’라는 비문학적인 장 르 명칭을 씌운다.

광인의 수기를 채우고 있는 베껴쓰기(공문 개의 편지 감상주의 소설 등의 1 차 텍스트 베껴쓰기)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틀린’ 베껴쓰기와 정서사 존재 자 체의 전적인 매체화에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서로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첫날 (10월 3 일)의 일기에서 이미 암시된다:

(10)

10

러시아연구 제 13권 제 2호

4TO 3TO Y Te6꺼, 6paTeu

,

B rOJIOBe BCerlla epaJIam TaKOA? TbI HHOA pa3- MeTaembC$I KaK yropeJ며A , lleJIO nOll'lac TaK cnyTaemb

,

'1TO CaM CaTaHa He pa36epeT

,

B THTyJIe nOCTaBHmb MaJIeHbKy~ 6yKBy

,

He BblCTaBHmb He '1HCJIa

,

HH HOMepa."16)

“자넨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머리 속이 뒤죽박죽인 것 같잖은가? 때론 가 스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멍청해지고, 이따금 문서의 표제에다 소문자를 쓰기도 하고, 날짜나 번호를 아예 빼먹어서 통 알아볼 수 없게 억망으로 만 들어 버리지 않나

문제는 정서의 부정확성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이 말이 타자(직장 상관)의 것이지, 정서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반대로, 종일 뭉둑한

‘펜’을 깎아 뾰족하게 만들고 있는 그의 행위는 자기 자신을 원(原)저작자의 펼기도구로 남김없이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한다. "Bellb Tbl HyJlb

,

60Jlee HWlerO" (“자넨 제로야. 그이상 아무것도 아니야’')17) - 상관이 정서사의

무가치함을 공언하는 이 말은 이런 관점에서 그의 존재의 무가치함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추구하는 욕망에 대한 정의가 될 수 있다. 그는 매체 그 자체, 독자적 의미는 제로인 순수한 매체적 도구가 되기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의 ‘틀린’ 정서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것처럼 1 차 텍스트 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이나, 정상적인 세계에 대한 환상적인 해석, 혹은 부당 한 사회적 관계의 전복이나 권력 관계의 바흐친적인 카니발화로서 시도되는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억압받는 섬세한 내면적 인간의 좌절된 돌파나 혹 은 다른 매체를 위한 문자 매체의 부정으로 설명되기에도 부적합하다. 1 차 텍 스트와 자신의 2차 텍스트의 차이는 자기 자신을 온통 매체화하는 정서사의 광적인 진지함에서 비롯되며, 뾰쪽하게 깎아 놓는 펜은 그의 매체적 분신에 다름아니다. 정확한 베껴쓰기에 대한 직업적 책무의식은 개의 이름, 개의 편 지, 개의 대화를 옮겨적는 데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이 대목은 한 인 간의 발광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서사의 직업적 행위의 한 사례로서 의미를 갖는다.

중세적 작가 유형으로 분류해도 좋을 이같은 정서사는 「외투 (lliHHeJlb)J 에서 도 등장한다. 에이헨바움이 「고골의 <외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Kal< clle- 16) H. B. roroJIb(1977) Coφ CO 'l. B 7 T.

,

101.

,

T.

3 ,

c. 157.

17) 같은 책, 161 쪽.

(11)

JJaHa <mßHeJJb> roroJUl )J 에서 스카즈의 음성적 측면, 이른바 ‘귀의 문헌학’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스카즈의 문자녹취성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여러 연 구자들에 의해 비난받은 바이지만,18) 「외투」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오로지 정 서만이 그의 유일한 기쁨이고 열정인 금욕적이고 수도사적인 정서사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서를 위해 문서 속으로 태어난 것이나 다 름없는 그에게 글쓰기(베껴쓰기)는 그가 가질 수 있는 여러 직업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야말로 신성한 임무이다:

"Korlla H B I<al<oe BpeMJI OH rrocTyrrHJJ B llerrapTaMeHT H I<TO OrrpelleJJHJJ 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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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BI깨I.lt.fYHIlHpe H C JIbICHHOR Ha rOJJoBe."19)

“언제 어느 때 그가 관청에 들어갔으며 누가 그를 그 자리에 앉혔는지,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장이나 부장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 는 언제나 같은 자리, 같은 지위에서 한결같이 서기라는 똑같은 직무를 맡고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사람들은 그가 분명 엄마 뱃속에서부터 관리 제복을 입고 이마가 벗겨진 채 완전히 준비가 되어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현실을 그가 정서해야 할 텍스트로 받아들이며, 그 의 지각은 문서 텍스트와 외부 세계 간에 어떤 분리나 차이를 두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의 육체를 완전히 사로잡아서, 문서를 베껴쓸 때 글자 모양대로 움직이는 그의 입술은 육체화된 글자에 다름아니다. 글자는 바로 그의 옴에 씌어지고 그의 육체는 글자의 거울이 된다 .20) 정서 행위는 안과 밖의 분리도

18) ]. Murasov

(1

997) "Orthographie und Kameva

l.

Nikolaj Gogol’s schizoides Schriftverständnis

," Wiener Slawistischer Almanach ,

Bd. 39

,

S. 85-106;

B. 끼HHel.l1<때(1 993)

'mHHeJJb CTpYl<TypaJJH3Ma

," HOBoe

J1

HTep a. TypHoe OðOJpeHHe ,

No.

5 ,

CC.

38-44;

N. Drubek-Meyer,쩌. Meyer(1997) "Gogol

s medial: skaz(ki) und zapiski,"

Wiener Slawistischer

Almα1αh, Bd. 39, S. 107-1

54/

B. 없HorpallOB (1969) "np06JJeMa CI<a3a B CTHJJHCTHl<e

," Texte der russischen Formalisten ,

Bd. 1

,

München: Wilhelm Fink Verlag

,

S. 168-207를 참조하라.

19) H. B. roroJlb(1977) Coφ CO 'l. B 7 T‘’ T. 3

,

c. 117.

20) 이것은 f 지칸카 근촌 야화 (Beqepa Ha xyTope 6깨3 뻐l<aHbI<H)~ 에서 스카즈가 이야

(12)

12

러시아연구 제 13권 제 2호

육체와 글자의 분리도 무효화시키면서 그의 육체에서 주체성과 인격성을 지 워버린다. 그의 육체는 그로테스크한 글쓰기 도구 그 자체가 된다. 도구적이 고 기계적인 것과 육체적이고 유기적인 것의 차이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타자 텍스트를 그대로 투과시키면서 복제하는 순수 한 매체로서의 글쓰기에 송두리째 사로잡혀 있는 가장 극단적인 정서사이다.

그의 ‘서투른’ 글쓰기는 바로 여기에 연유한다. 그의 충실한 근무에 포상을 하 고 싶어진 국장이 ‘동사 몇 개를 3인칭에서 1 인칭으로 고쳐 쓰도록’ 지시했을 때, 그가 진땀을 흘리며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서사로서의 그의 본질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일이다. 1 차 텍스트에 대한 어떤 주체적이 고 개성적인 관점도 그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21)

글쓰기 매체에 자신을 전부 내맡기고 스스로 고유가치 제로의 순수한 매체 가 되는 것은 미치광이 정서사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만이 아니다. 작가 고골 도 그의 작가적 생애의 끝에서 문학적 작가권을 포기한다. 문학 코드에 의한 원텍스트의 변형을 부정하고 모든 작가권을 반납하면서 그는 오로지 성스러 운 매체 그 자체, 도구 그 자체가 되길 결심한다.22) 그의 정서사들처럼 고골

기꾼의 육체를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육체의 거울’이 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21)

이후의 슈셋 발전에서 개성화, 주체화는 외투 모티프와 함께 진행된다. 금욕적 질 서에 대비되는 ‘외투’ 모티프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중세적 정서사의 ‘바른’ 길 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파국으로 몰아가는 역할에 대해서는

]. Murasov (1 997) , S.

85-106를 참조하라. 실제로, 금욕적 정서가 개인적 육체의 경계를 집단적 매체, 집 단적 육체 속에서 소멸시키는 데 반해 외투는 이중적인 기능을 갖는다, 한편으로 그것은 외부의 대상 세계에 속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형체에 자신의 맞춤 으로써 외부 세계와 내면세계의 경계를 유표화하는, 개성과 주위 세계간의 소통매 체로 기능한다. 외투 모티프의 발전과 함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점차 개체화,

개성화되고, 외투에 대한 그의 리비도적 태도는 그의 정서를 이미 절대적으로 신 뢰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파멸과 관련해 그의 악마적 성격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로는

D. Rancour-Laferriere(1982) Out from under Gogo l' s Undercoat. A Psychoanalytic Study. Ann

ArborlMichigan을 참조하라.

Drubek-Meyer는 『지칸카 근촌 야화』의 「성탄절 전야 (Ho'lb

nepell PO

:l<

lleBTBOM)

J 의 끝장변에 나오는 ‘KaKa’라는 단어가 악마를 가리키는 우크라이나어임을 들어 아카 키 아카키에비치의 이름이 이미 악마성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N. Drubek Meye r/ H. Meyer (1 997) "Gogol’s medial: skaz(k i) und zapiski

,"

Wiener Slawistischer Almanach , Bd. 39 , S.

116을 참조하라.

22)

Drubek-Meyer는 정서사와 작가의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의 공통된 구성소 비교 를 통해(정서가의 nepenHCblBaTb 와 작가의

nHcaTb ,

정서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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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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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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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Hy .n b , õO

J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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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IerO’가 되 고자 하는 것 이 다.

4.

서투른 반(反)작가 아르카지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연파가 놓쳤던 고골 문학의 복잡한 미학적 차원을 올 바로 인식했고, 고골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텍스트에서 담론과 문체의 문제를 반복하여 주제로 삼았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미성년』은 메타시학적 논문으 로 읽어도 좋을 소설이다. 물론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일인칭 소설에서의 여러 서술상의 문제들, 이를테면 서술자의 주관성, 허구적 독자 지향성, 일인 칭 화자의 현실 접근과 그것의 전달, 추상적 작가와 이상적 독자 간의 관계,

서술자와 인물의 말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간섭과 같은 문제들에서 그의 능 력을 현란하게 시범한다.잃) 그러나 이 논문에서 『미성년』에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주관적인 일인칭 서술자, 그것도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당연 한 미성년 서술자와 일인칭 소설이 객관적인 사실 기록 그 자체임을 표방하 는 비문학적 장르 ‘수기’와 한 텍스트 내에서 충돌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충돌은 앞서 다루었던 문제들을 다시 환기 시 킨다 스카즈의 담론적 사실 들 (pe"leBbJe lþaKTbJ)이 실제 현실 (ÕblT) 의 것들인가 아니면 문학적 사실들로서 예술적으로 합성된 구성물인가? 문학적 기호와 문체가 과연 묘사대상을 오로 지 그대로 현상시키거나(중세적 작가, 고골의 마지막 선택) 투과시키는(자연 파), 고유가치 제로의 순수한 매체가 될 수 있는가? 서투름에도 불구하고 끝 없이 이야기하고 써대는 서투른 작가의 수다 또는 서기광(書記狂 )24)은 어디서

CO

'l

HHHTb)

고골이 정서사의 일과 작가의 글쓰기를 처음부터 동일선상의 것으로

여 기 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N. Drubek-Meyer/ H. Meyer(1997) , S. 118.

23)

이 문제 에 대 한 탁월 한 분석 으로는

W. Schmid(1973) Der

Textatφau

in den Erz äh1 ungen Dostoevskijs. Die Interferenz von Erz äh1 ertext und Personentext und die

0πientierung

am fiktiven Leser , München: Wilhelm Fink Verlag , S.

229

엉4 를 참조하라.

24)

서기광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담론적 분석은

F. Tchouboukov-Pianca(1995) Die

Konzeptz따lisierung

der Graphomanie in der russischsprachigen post- modernen Literatur , München: Verlag Otto

Sagner와

A. K. *o

Jl

KoBcKHR(l986)

"rpaφOMaHCTBO

KaK npHeM:

J1eG~llKHH , XJl

eGHHKoB ,

끼HMOH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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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P

yrHe ," Velimir

Chlebnikov (1885-1922): Myth and Reality. Amsterdam Symposium on the

(14)

14

러시아연구 제 13권 제 2호

연유하는가? 창작으로서의 글쓰기를 알지 못하거나 부인하는 서투른 작가(또 는 글자 그대로 매체를 자입하는 筆者)를 내세운 실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 가? 아래에서 『미성년』은 이같은 점들에 초점을 두고 다루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성년』에서 인물 아르카지를 창조하고 그에게 서술가­

작가로서의 권능을 부여한다. 자신이 서술하는 세계가 다른 작가에 의해 만들 어진 허구임을 절대로 알아첼 수 없는 아르카지는 불과 몇 달전만 해도 열아 홉살짜리 인생 풋내기였던 자신의 경험과 행동에 대해, 그것도 그중 며칠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수백 페이지에 걸친 거대한 장광설을 풀어낸다. 이 ‘미 성년의 자서전’은 첫줄부터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본질적인 특징인 ‘말로부 터 소설의 탄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He yTepneB

,

.51 ceJl 3anHCblBaTb 3Ty HCTOpHIO MOHX nepBbIX marOB Ha :l<H3- HeHHOM nOnpHDle

,

Torlla KaK MOr 6b1 o6oATHCb H 6e3 TOro."25J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지만,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인생 의 무대에서 내가 첫 발걸음을 내디였던 때의 이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서 자리에 앉았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을 참지 못하고 하는 말’

-

이같은 말의 충동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작가는, 나아가 인간 모두는, 말 속에 존재한다는 인간 존재 일반의 조건성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26) 아르카지는 말을 통하여 자신 을 고백하고 자신의 삶을 텍스트로 재구함으로써 ‘나’를 탐색하고 ‘나’의 의미 를 발견해내려 한다. 그러기 위해 그의 말은 진실과 사실의 고백이 되어야 하 는 까닭에, 아르카지는 무엇보다 ‘지어낸’ 글, 문학적 글쓰기의 허위성을 배격 하고 나선다. 때문에 앞에서의 ‘말의 충동력’에 대한 고백에 이어 곧장 반(反) 작가 선언, 반(反)문학 선언이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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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1HTepa- TOp 6b1Tb He xo~y H TaDlHTb BHyTpeHHoCTb nymH MoeA H KpaCHBOe OnHCaHHe

centenarγ

01 Velimir Chlebnikov ,

ed. by W.

G.

Weststejn

,

Amsterdam: Rodopi

,

pp. 573-593를 참조하라.

25) φ M. llocTOeBcKHA(1972-1990) nOJlH, COφ CO I.f. B

30

T.

, J1.:

Hay

Ka,

T. 13

,

c. 5. 앞으 로 『미성년』에서의 인용은 이 책의 쪽수만을 인용문 뒤에 명기한다.

26)

지하생활자, 제부쉬킨, 이폴리트 등은 대표적인 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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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온 힘을 기울여 모든 부차적인 것, 특히 문학적인 아름다웅을 피하 면서 오직 사건들만을 적는다

(…)

나는 작가가 아니다. 작가가 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나의 영혼의 내면이나 감정의 아름다운 묘사를 그들의 문학시 장에 끌고 나가는 일은 무례하고 비열한 짓이라고 여길 것이다”

반(反)작가 선언은 『악령』이나 「온순한 여인 (KpOTKa.ll )J 에서도 나오지만, 이 두 소설의 경우 그것이 단 한번의 총괄적인 선언으로 끝나는 데 반해, 아르차 지는 그의 반작가, 반문학 선언을 되풀이한다. 그만큼 『미성년』에서는 문학과 수기, 허구와 사실의 문제가 텍스트 전체의 메타시학적 주제를 구성한다. 그 의 반문학 전선을27) 재구축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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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빙성, 진실 그 자체를 추구하는 수기작가-고해자에게 ‘소설쓰기’와 ‘거짓 말하기’는 같은 것이다. 때문에 완전한 진실, 사실은 문학화를 허용하지 않고,

감정과 사색의 묘사는 수기가 아닌 허구의 영역에 속한다. 그렇게 정의되는 문학은 아르카지에게 삶의 현실 속으로도, 그것의 기록인 수기 속으로도 들어 와선 안될 해악이다. 훌륭한 성품과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소설 같은 사랑

27)

아마도 로자노프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상투화된 문학성 (nHTepaTYPHOCTb) 에 체험 (nepell<HBaHHe) 을 가장 맹렬하게 맞세운 작가일 것이다. 그는 체험에 대한 거리, 즉 문학의 비진정성에서 문학의 비도덕성을 보았고, 때문에 문학의 변형적 성격을 제 거함으로써 문학과 삶을 동일화할 것을 주장했다 삶에서 분리된 문학성이 지배할 때 문학은 타락하고 인위적이고 실용적인 차원, 상품으로 축소되고 만다는 것이었 다. ‘문학의 종말’이라는 그의 개념도 이와 연관된 것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삶의 완전한 문학화로 매우 쉽게 뒤집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B. P03aHoB (1 970) H36paHHoe , nO

Il

pell. EB.

lK

HrneSHqa , München: A. Neimanis , CC. 40-41 , 87-88 , 133

차조

(16)

16

러시아연구 제 13권 제 2호

도,28) 소설같은 행동도,잃) 소설을 쓰는 것도, 소설을 읽는 것도30) 어울리지 않 는다.

그러나 아르카지는 자신이 원하는 문체를 고수할 수 없으며, 문학적 문체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때문에 수기 첫머리의 반작가선언 후에 곧 유보적인 발언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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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11

m JleHIIR (...)"(5)

“그러나 속상하긴 하지만 감정묘사나 사색이 전혀 없이는 안 될 것같은 예감이 든다

(…)"

이것은 무엇보다 수기가 그의 ‘고백록’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고백의 내용은 다름아닌 그 자신이며, 감정과 사색도 역시 ‘나’의 ‘사실 (lþaKTbJ)’이기 때문이다.

고백록으로서 수기가 갖는 특성은 또 있다. 아르카지는 토마스 아퀴나스, 루 소, 카프카로 이어지는 고백자의 계보에 속하며, 이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아 르카지의 내면의 판관은 도덕적이거나 신성한 목소리라기보다는, 마조히스트 적인 고백자를 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고백을 끝까지 계속하게끔 강요 하고 부추기는 사디스트적인 호기심이다.3D 자신을 더욱 가혹하게 별하기 위

28)

베르실로프와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그리고 그녀의 의붓딸 사이에 있었던 일올 두 고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진지하고 건전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일고의 가치 도 없는 미묘하기 짝이 없고 게다가 저속하기까지 한 일종의 소설적 혼란('1TO-T。

BpO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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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TO ...

pOMaH배eC l<oR nyTaH뻐bI)’'(58) 이 라고 단정 한다.

29)

아르카지가 친구들과 함께 밤거리에서 어린 소녀를 희롱했던 일에 대한 묘사를 보 라. “아주 어린 소녀로 나이는 열 여섯이나 아니변 더 어렸을지도 모른다. 매우 깔 끔하고 양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자기 힘만으로 살고 있으며 그때 도 일을 끝내고 늙은 어머니에게로 자식들을 거느린 가난한 과부에게로 돌아가는 길이었는지로 모른다. 하지만 감상에 빠질 건 없다 (He'lerO

BnallaTb B '1yBcTBIITeJlb-

HOCTb). 끼79)

30)

앞에서 세 사람간의 일에 대해 그렇게 말한 마리아 이바노브나 자신도 “어릴 때부 터 소설로 머리가 꽉 차 있었으며 (HamnllpOBaHa

pOMaHaMII) ,

훌륭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밤낮 소설만 읽고 있었던 것이다(새'1뻐{

c대M。아Tp따Jl H없a n매pe l<p띠ac대H뻐u뼈꺼 xap띠al< Te매p)."’/기끼’”끼’'(5않8)

3 1)

W 미성년』에서의 고해의 담론에 대해서는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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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해 어리석은 얘기를 다 털어놓고자 할 때 고통스런 수치와 파렴치에 대한 쾌 감 때문에 고백은 실제 사실보다 훨씬 과장된 것이 돼버린다. 아르카지는 수 기를 시작하면서 이 쾌감을 애써 부인했지만,32) 고백의 발동이 걸린 시점에서 는 이미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루소의 『참회록』을 인용하는 데서 도 분명해진다. 그가 인용하는 일화는, 하필이면, 신체의 은밀한 부분을 노출 시킨 채 길모퉁이에 숨어 지나가는 여자들을 기겁시켰던 얘기이다 (78).

노출욕구와 함께 고백록을 조종하는 것은 자기은폐와 자기방어의 욕구이다.

물론, 아르카지에게서 이것은 고의적인 거짓말은 아니다. 그가 수기를 쓰겠다 고 책상 앞에 앉은 목적은 궁극적으로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상을 자기 자신 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내보이는 데 있다 .33) 그가 지난날의 악행이라고 고백 하는 것도 그 행동이 용서받고 변명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은 사춘기 특유의 나르시스트적인 감정 메커니즘을 쉽게 알아첼 수 있는 것이며,

앞뒤가 맞지 않는 사고와 논리도 그것에 미루어 이해될 수 있다.엉)

심리적인 메커니즘의 작용이 아니라 해도, 수기는 이미 기억의 부정확성 때 문에 그 신빙성이 훼손된다. 모든 것은 사건 당시의 직접적인 현실 지각에서 지금 아르카지에게 남아 있는 간접적이고 불완전한 기억에 의해 재구되고 있 기 때문이다. 그가 전해주는 ‘대화’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객관적인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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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4-239를 참조하라.

32)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면서 (6e3

cTbllla)

자신에 대해 글을 쓰려면 너무도 비열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 도취해 있어야만 한다, "(5)

33)

형식주의식으로 말하자면, 삶의 사실들을 전기적 수기를 위한 사실들로 가져온다 는 것은, 이미 미적 컨텍스트 속에서 구성적 npHeN을 투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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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나이가 든 성인(成)\) 고백자들은 훨씬 교활한 자기기만, 자기은폐, 자기방어로 정 직한 자서전을 더욱 불가능하게 만들며 그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 하고 있다. ‘지하생활자’는 그의 수기 (r3anHCKH

H3

nOllnOJlb5l J) 에서 정직한 자서전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하이네는 정직한 자서전이란 거의 불가능하며, 인간은 자기 자신의 문제에 있어서는 필시 거짓말을 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 해에 따르자변, 이를테면, 루소는 자신의 참회록에서 반드시 자기 자신을 비방했 고, 심지어 고의적으로, 그것도 허영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하이네 가 옳다고 확신한다. 때로 인간은 단지 허영 때문에 자신에게 모든 범죄를 덮어씌 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이해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 허영이 어떤 종류의 것일 수 있는지 하는 것까지도 잘 인식하고 있다 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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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8

러시아연구 제 13권 제 2호

현실’ 그 자체라고 제시하는 ‘편지’와 ‘서류’, ‘신문광고’ 같은 다큐멘트도 예외 라고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객관적 기록의 불가능성은 ‘사실’ 그 자체의 혼란과 무질서에서 도 연유한다. “회오리바람처럼 밀려들어 나의 생각을 머리 속에서 마치 가을 날의 마른 나뭇잎처럼 벙벙 돌게 만드는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Coõ비TH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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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논리를 찾아내려고 애쓸수록, 아트차지는 더욱 심한 혼란에

빠져든다.

이와 같이 아르카지가 원하고 추구하는 것(이성적으로 쓰는 것, 사실 그대 로 쓰는 것, 모든 진실올 쓰는 것)과 그가 피할 수 없는 상황(감정의 묘사와 사색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사이의 심연은 아르카지의 언어관계에 영향을 미 친다. 그것은 아르카지 자신의 언어능력과 러시아어에 대한 회의를 넘어서서 언어의 언어성에 대한 숙고, 언어 자체에 대한 회의로 확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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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적 아름다움을 피하겠노라고 맹세해놓고, 첫줄부터 나는 그러한

아름다움에 빠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명료하게 쓰기 위해서는 그저 바람만 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또한 말해두지만, 유럽의 어느 언어도 러시아어만큼 글쓰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쓴 것을 다시 읽어 보았는 데, 쓴 것보다는 내가 훨씬 똑똑해 보인다. 똑똑한 사람의 업에서 나온 말이 그 사람의 내부에 남아 있는 것보다 훨씬 어리석다니 어떻게 해서 그리 되 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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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나는 내가 받은 인상을 표현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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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들은 이야기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35)

같은 생각은 36쪽에서도 되풀이된다
(19)

‘말’에 대한 불확실한 관계 언어화되어 나타난 것과 언어 뒤에 있는 것 사 이 의 심 연 앞에 서 아르카지 는 종종 ‘침 묵의 기 법 (~Hrypa YMOnqaHH~)’으로 달아 난다. 하지만, “인생의 무대에서 자신의 첫 발걸음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반 문학주의가 무색하게 수기의 목적부터가 문학적 상투어로 제시된다), 모든 진 실을 고백하겠다고 선언한 그로서 커다란 딜레마에 봉착하는 것은 자명하다.

때문에 그는 이 용어를 그가 배격하고 조소했던 문학의 대명사로 전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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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뻐e."(65)

“이 〈침묵의 기법〉에 의해 나는, 내 무능으로 말미암아, 나 자신이 앞에 서 조소했었던 소설가들의 그 〈아름다움〉에 또다시 빠지 고 말았다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은 ‘팩토그라 피로서의 수기’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팩토그라피는 쉴 새 없이 팩트 (~aKT) 로부터 미끄러지고, 아르카지 스스로 그의 수기를 ‘나의 페테르부르크 소설

('MoR neTep6yprcI< HR pOMaH " 65)’이 라고 부른다. 이 ‘소셜’은 그가 배 격 했던 문 학의 성질 가운데 ‘아름다운 형식’을 구현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텍 스트의 ‘+아름다운 형식’보다 ‘-객관적 신빙성’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객 관적 인식능력과 묘사능력에 대한 의구심은 개별 팩트에 대한 회의를 넘어서 서, 모든 현실에 대한 절대적 회의로 확대된다. 안개 낀 페테르부르크의 이른 아침에 아르카지에게 스쳐가는 생각이 바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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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나는 내가 받은 인상들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환상이고, 결국은, 시이며, 따라서 잠꼬대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어떻게 알겠는가, 이 모든 것이 어쩌면 다 누군가의 꿈이고, 여기엔 실제의 진정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현실의 행동은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지?

이 모든 것을 꿈속에서 보고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게 되면,

-

모든 것이 갑자기 다 사라져 버리리라>"

결국, ‘이른바 예술성이라는 것’과 ‘감정’을 희생시키고 ‘짤막한 신문기사’처

(20)

20

러시아연구 채 13권 제 2호

럼 “직접적이고 간단한 설명 "("npjlM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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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을 쓰고자 했던 아르카지는 팩토그라피의 신빙성과 문학의 아름다운 형식 중 어느 것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서투르고 미숙한 작가임을 노출시킨다. 소설의 아름다운, 닫힌 형식은

õblT(He-nHTepaTypa)

차원 과 문학적 상투어들의 끊임없는 간섭에 의해 부서지고, 슈셋 라인은 쉴 새 없 이 끊긴다. 수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미 은유적 기능조차 상실한 진부한 문학적 상투어들은36) 그 자신의 공공연한 반문학선언과는 상반되는 아르카지 의 문학적 취향을 드러낸다. 그가 자신의 문체를 은근히 문학적이라 자처하고 있음은 곳곳에서 드러나며, 문학적 아름다움 없이 쓴다고 하는 말은 서투른 문체에 대한 독자의 예상되는 비난에 대한 자기 방어로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내놓는 것은 팩토그라피가 아닌 방대한 스카즈다.

수기의 모든 것은 아르카지의 기억과 그의 시각과 그의 감정의 프리즘을 통해 상기되고 선택되고 배열되고 제시된다. 사실과 해석의 경계는 일찌감치 뒤섞인다. 미성년 아르카지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서는 안되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그에게 달려 있다. 그의 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것조차도 그에 의해 이야기되어야 하므로, 모든 것은 일단 그에게 관련지어져야 한다. 수기 전체는 그의 기질에 달려 있고, 그가 묘사하는 것은 결국 그 자신의 세계, 그 자신의 전적으로 사적인 현실이다.

현실은 사춘기적 심리적 메커니즘에 의해 제시되며 이 프리즘은 장편소설을 거대한 스카즈로 채운다. 바로 이것이 ‘수기’라는 표면적으로 가장 객관적인 장르를 팩토그라피가 아니라, 가장 주관적이고 가장 문학적인 장르로 탈바꿈 시키고 있다.

36)

r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지하생활자의 행동과 내면의 독백도 그의 사고와 상상력 이 얼마나 문학적 도식과 모델(예를 들어, 푸쉬킨의 r 일발 J , 례르몬토프의 r 가변무 도회 J ,우리 시대의 영웅』 등)에 의해 각인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완전무 결한 ‘문학적’ 태도를 통해 사회에서 자신의 아웃사이더 위치를 극복하고 자신의 개성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물론 그의 이 자기주장은 ‘문학적 틀’에 대한, 다시 말 해 사회에서 ‘반듯하다’라고 인정되는 것에 대한 완전한 적응을 전제하기 때문에 결국, 피상적인 자기주장에 불과하며, 존재형식의 축소에 다름아니다. 삼류 문사에 게 문체를 배워 그것으로써 사회적 신분 상승과 개인적 행복을 고대하는 r 가난한 사람들」의 제부쉬킨도 다르지 않다미성년』에서 젊은 베르실로프가 소피아를 유 혹하는 문학적 동기에서도 삶과 문학의 간섭, 삶의 문학화는 목도된다.
(21)

5.

소설이 끝난 후

-

새로운 소설의 탄생

미성년 작가 아르카지는 그의 수기를 자신의 말로써 직접 끝맺지 않고 니 콜라이 셰묘노비치가 보낸 편지의 발훼문을 결미에 덧붙인다. ‘수기가 끝난 후’의 이 편지는 니콜라이 셰묘노비치의 생각에 의하면 ‘소설이 끝난 후’의 편 지가 되어야 했었지만, 노련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서사 아이러니는 그도,

그의 편지도, ‘소설의 종말이후의 새로운 소설’ 속으로 입주시킨다.

니콜라이 셰묘노비치의 편지는 소설의 (동시에 수기의) 서두에서 수기작가 아르카지가 제기했던 문제, 즉 현대(그들의 당시)의 상황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문제로 되돌아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것이기도 했던 이 문제는 가족의 문제와 불가분 결합된다. 도대체 이 시대에 소설과 같은 것 이, 가족과 같은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아 르카지로부터 그의 수기에 대한 평을 부탁받은 니콜라이 셰묘노비치에게 맡 긴다. 이 인물은 가족의 해체와 소설의 종말을 인과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미학과 윤리학, 문학과 사회학적 차원을 결부시키는 러시아 문학비평의 전통 적인 테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 대변한다. 물론 아르카지는 자신의 ‘사춘 기적’ 혼란이 ‘성인’이고 더구나 그의 옛 스승이기도 한 니콜라이 셰묘노비치 에 의해 사회학적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는 것에 으씀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수기 속에서 독자의 존재를 초연하게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극도로 예민하게 잠재적 독자의 반응을 곁눈질하던 그가 자신의 수기에 대한 최초의 독자이자 비평가인 니콜라이 셰묘노비치의 비평에 자신의 말을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 고 수기를 끝내고 있다는 것이 이런 추측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다른 한편, 소설 장르와 문학 형식의 운명을 오로지 사회적이고 도덕윤리적 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는 이 허구적 비평가의 관점을 결코 도스 토예프스키의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니콜라이 셰묘노 비치의 마스크 뒤에서 말없이 아주 교묘하게 등장하며, 그 속에서 그의 서사 적 아이러니 예술은 진면목을 발휘한다.37) 니콜라이 셰묘노비치의 논쟁 목표

37)

배변의 아이러니를 간파하지 못하고 이 인물의 비평올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것 으로 간주하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니콜라이 셰묘노비치가 도스토예프 스키 의 대 변 인 이 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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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까 HaYKa) , 그의 편지는 도스토
(22)

22

러시아연구 제 13권 제 2호

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논쟁 목표는 구별되어야 하며, 따라서 ‘편지’는 이중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니콜라이 셰묘노비치가 펀지에서 쓰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즉 사회적 인 발전경향, 그리고 그것과 예술형식간의 연관성에 관한 것이다. 그에 따르 면 도덕의식의 타락, 즉 명예와 의무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가치들의 경시 는 그것들과 함께 결합되어 있던 완성된 형식의 조화를 와해시켰으며, 사회적 차원에서 그같은 완성된 형식은 ‘가족’이었다. 이 진단은 도스토예프스키도 동 의할 만한 객관성을 가진다. 문제는 완성된 아름다운 형식으로서의 ‘가족’과

‘소설’(‘소설 가족’)의 운명 간의 필연적인 연관성에 있다. 니콜라이 셰묘노비 치는 형식의 완성과 와해에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하나의 과정을 보고 있는 바, ‘유서 깊은 귀족가정’

‘우연한 가족’

:

‘가족소설

역사소설

수기’

가 그것이다. 아름다움이 극치에 달한 완성된 형식은 러시아의 유서 깊은 귀 족 가정이며, 소셜은 마땅히 그같은 귀족 가정을 그리는 것이어야 한다 (453).

그러나 오늘날 귀족 가정, 진정한 가정이라는 것은 지난 역사 속에서만 존 재한다. 이는 미적 예술 작품으로서의 소설이 현대 소설로서는 불가능함을 의 미한다. 아직도 소설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은 가족소설의 상세한 사실들을 재 현함으로써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예전의 사건과 모댈들을 독자로 하여금 재 구하게 하는 역사소설의 형태로나 가능하다. 이것은 이미 소설의 노년기 형식 으로, 문학이라기보다는 이미 역사의 범주에 속한다(뼈4).

니콜라이 셰묘노비치는 아르카지의 글에서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형식 의 와해를 본다. 그것은 ‘우연한 가족’의 일원에 게 걸맞는 완전히 해체된 텍스

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이 지년 특성을 포괄적으로 기술하면서 작품의 비완벽성에 대해 이론적 정당화를 제공하거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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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pT(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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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 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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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Ha , T. 2 , 1I., c. 83) ,

자신의 작품에 대해 코벤트하고 있거나 (r.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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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1.

A. C. BymMHHa ,

T.

2,

M.-

lI., c. 244),

또는 도스토예프스키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의구심을 표

하고 있는 것 (π

rpoccMaH(1959) "lloCTo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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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I. CTenaHosa , Moc

l<

sa , 1959 , C.

392)으로 해 석 한다. 심 지 어

Maximilian

Braun은 이 ‘편지’를 소설의 일부분이 아니라 ‘비평적 에셰이’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M.

Braun(l96l)

Das Nachwort zum <Jüngling> ,"

Welt der Slaven

,

VI , S. 16-25).

그러나 니콜라이 셰묘노비치도, 그의 편지도, 결코 픽션의 경계 바 깥에 있지 않다.
(23)

트이며, 소설과는 아주 다른 무엇이다. 아예 문학에 속하지도 않는 이 글을 그는 그저 ‘원고 (PYKonHCb)’라고 부를 뿐, 어떤 문학 장르의 이름도 주지 않는 다. 아르카지가 붙였던 반항기 넘치는 장르 명칭인 수기는 언제나 경멸의 따 옴표 속에서 처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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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4)

“이 우연한 가족의 전형을 당신도 당신의 원고 속에서 부분적으로 제시하 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르카지 마카로비치. 당신은

-

우연한 가족의 일 원입니다. 그것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러시아의 유서 깊은 전형, 당선 과는 너무도 다른 유년시대와 소년시대를 가졌던 우리의 전형들과는 정반대 인 것입니다

이 비평가의 확신에 따르면, 자신이 살고 있는 현대의 묘사를 목표로 하는 예술가는 우연한 전형들이 범람하는 지금의 상황에선 잠정적이고 과도기적인 것, 우연한 장르, 우연한 이야기밖에 쓸 수 없다. 소설쓰기로부터는 우연한 디 테일과 우연한 형식을 가지는 팩토그라피, ‘수기’ 같은 것이 나올 뿐, 디테일 들에 하나의 통일된 의미를 부여해주는 긍정적인 단일 퍼스펙티브와 아름다 운 형식을 완성시키는 결말은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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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si

Dokumen terka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