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일제강점기 문헌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국립공원의 시대적 상황 고찰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3

Membagikan "일제강점기 문헌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국립공원의 시대적 상황 고찰"

Copied!
13
0
0

Teks penuh

(1)

일제강점기 문헌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국립공원의 시대적 상황 고찰

박석곤1

김영찬2*

1국립순천대학교 산림자원⋅조경학부 교수, 2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 전임연구원

Study on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Jirisan National Park by Reviewing Literature in Japanese Colonial Eraa

Seok-Gon Park

1

and Young-Chan Kim

2*

1Division of Forest Resources and Landscape Architecture, Sunchon National Univ., Sunchoen 57922, Korea 2Centre for Documentary Heritage, The Korean Studies Institute. Andong 36605, Korea

요약: 일제강점기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과 제국대학 연습림 관계자가 기록한 지리산 관련 문헌(4권)을 통해 지리산을 둘러싼 시대적 상황을 고찰하고자 했다. 지리산 산중턱 또는 대략 해발 400m 내지는 700m부터 소나무림, 신갈나무림, 구상나무림 등이 양호하게 보전됐다는 점을 이 문헌의 식생분포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100여 년 전의 과거와 현재의 지리산 식생을 비교해 보면 식생 발달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알 수 있어 학술적 의미가 클 것이다. 지리산에 제국대학들이 연습림을 설치한 목적은 표면적으로 산림보호와 연구였지만, 연습 림 경영을 통해 경제적 이익 추구 목적이 더 컸다. 지역민은 오랜 세월 지리산 환경에 적응해 목재와 임산물 채취 등 지리산이 베풀어주는 이로 움을 기반으로 삶을 영위해왔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연습림 설치로 인한 지리산 입산 제약과 이용 제한은 지역민들에게는 생활방식을 탈바꿈 하게 되는 계기이자 핍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나카이가 식물을 채집했던 시기(1913년 이전)의 지리산은 숭배의 대상이라서 일반인이 깊은 산속까지 오르지 않았으며, 일부 유학자들은 심신수양의 계기로만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에 들어 탐험 또는 스포츠라는 개념의 등산 이 도입되어 조선산악회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지리산을 찾으면서 금강산과 함께 지리산 국립공원화 논의가 본격화됐다. 물론 무산됐지만 이런 논의 자체가 지리산의 자연자원이 우수해 국립공원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했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이 문헌을 통해 100여 년 전의 지리산 을 둘러싼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알아야 지리산의 현주소가 보이고 지리산국립공원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주요어: 고로쇠수액, 나카이 다케노신, 조선총독부, 연습림, 화전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historical background surrounding Jirisan Mountain by investigating literature related to Jirisan (four documents) written by Takenoshin Nakai who was a botanist in Japanese colonial era and staffs of imperial universities who were involved in the experiment forest. A vegetation distribution map of this document confirms the fact that Pinus densiflora forest, Quercus mongolica forest, and Abies koreana forest in the mountainside or from approximately 400 and 700 meters above sea level have been preserved well. This study has a significant meaning in terms of vegetation study because comparison of the vegetation in Jirisan between present and a hundred year ago can reveal the development process of vegetation. On the surface, the installation of experiment forest in Jirisan by the imperial universities was for forest conservation and research purpose. However, the original purpose of the university was to pursue additional economic benefit from the management of the experiment forest. Local residents had adapted themselves to the environment in Jirisan over a long period of time and managed their life based on the benefits that Jirisan gives, such as gathering of lumber and forest product. Restriction on entry to Jirisan Mountain because of the sudden in- stallation of experiment forest must have felt as a persecution to the local residents that forced the change of lifestyle. At the time Nakai collected plants (before 1913), Jirisan was an object of worship and ordinary people did not enter deep into the mountain. Only some Confucian scholars visited the mountain seeking mental and physical cultivation. People began to think mountain climbing as a type of exploration and sport from the 1930s. As growing number of people, mainly those from Korean Alpine Club, visited Jirisan, debates for creating Jirisan National Park, along with Geumgangsan Mountain, began to develop. Although the debate foundered, it provides supporting evidence that Jirisan has value high enough to be designated as a national park with its rich natural resources.

Dwelling on the historical background surrounding Jirisan a hundred years ago through these paper documents will make under- standing of the present state of Jirisan and designing of future Jirisan National Park possible.

Key words Maple sap, Takenoshin Nakai,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Experiment forest, Burnt field

Received 18 January 2021; Revised 25 February 2021; Accepted 9 March 2021

*Corresponding to 김영찬(Young-Chan Kim) E-mail. chan4241@hanmail.net

(2)

서론

1967년 최초로 지리산을 국립공원 1호로 지정해 50여

년 동안 국립공원 관리청에선 체계적인 관리와 생태계 복원사업 등으로 지리산의 생물종다양성 증가, 생태계 서비스와 문화적 가치가 지속해서 상승했다. 하지만 국 립공원 지정 이전, 특히

100여 년 전 구한말과 일제강점

기 지리산의 이용현황, 식생, 훼손지 등의 상황을 파악 가능한 관련 문헌이 부족해 그 변천 과정을 연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이때의 상황을 일본의 근대식물 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이

1915년에 지리산

식물조사 보고서를 남겼는데 이 문헌은 근대식물학자 관점에서 지리산 관련 상황을 기록한 최고(最古) 문헌이 라고 볼 수 있다. 또 조선총독부로부터 지리산을 1912년 에 80년간 무상대여 받아 도쿄제국대학, 교토제국대학, 규슈제국대학은 지리산을 나눠서 연습림을 설치했다.

도쿄제국대학은 구례와 광양 백운산 일대로 자리를 잡 았고, 규슈제국대학은 산청⋅하동지역에, 교토제국대학 은 함양⋅남원 일대에 연습림을 만들었다(藤岡, 2019).

3곳의 제국대학은 연습림 구역의 식물상, 식생 상황 및

산림경영 등에 관한 보고서를 각각 발간했고, 이것은 나 카이가 보고한 지리산식물조사보고서(1915년)와 함께

100여 년 전의 지리산 상황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문헌

이다. 식물관련 연구자들은 이 문헌들의 존재를 오래전 부터 알고 있었고, 이 문헌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 다. 그러나 이 지리산 조사 문헌은 근대일본어로 기록되 어 내용 파악이 쉽지 않아, 100여 년 전의 지리산 관련 상황을 연구하는데 그 문헌의 활용성이 낮았다. 이런 까 닭으로 일제강점기 지리산 관련 문헌을 논의한 연구 결 과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

3곳의 제국대학은 지리산에 연습림을 지정하여 개벌,

조림 등의 산림경영과 땔감, 임산물 채취 등의 행위 제한 을 해방할 때까지 지속했다. 해방 이후에 도쿄제국대학 연습림 부지는 그대로 서울대 부속 학술림으로 편입됐 고, 교토제국대학 일부 구역이 경상대 학술림(경남 산청 군 삼장면⋅시천면 일대)으로, 규슈제국대학 구역은 경 남과학기술대가 일부 학술림(경남 산청군 금서면 일대) 으로 관리하고 있다. 제국대학들의 연습림 중에 잘 보전

된 지리산 지역은

1967년에 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런 법적 점유권이나 산림경영 등 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선 일제강점기 상황을 알아야 한 다. 일제강점기의 지리산에서 행해졌던 일들이 단절되 지 않고 현재에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헌을 통해

100여 년 전의 지리산을 둘러싼 시대적 상

황을 적확히 이해해야 지리산국립공원의 현주소가 보이 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만 분포하는 특산식물 학명 끝에 따

라오는

Nakai가

바로 나카이 다케노신이다. 나카이는

1909~1940년까지 40년 동안 조선총독부 지원을

받은

학술서 「조선삼림식물편 22집(1915-1940년)」을 발간했 으며, 또한 「제주도⋅완도식물조사서(1914년)」, 「지리산 식물조사보고서(1915년)」, 「백두산식물조사서(1918년)」,

「금강산식물조사서(1918년)」, 「울릉도식물조사서(1919 년)」 등의 식물조사 보고서를 발간했다(Lee, 2012). 이처 럼 나카이는 한반도 식물상 전모를 밝힌 조선식물의 권위 자이며, 우리나라의 근대 식물분류학 체계에 큰 영향을 미 쳤는데 이 점은 부인할 것 없는 사실이다

(Kim

et al., 2006).

여기서 궁금한 점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인 1913 년에 왜 먼저 지리산을 조사했을까 하는 점과 1912년부터 제국대학들이 지리산에 연습림을 설치했던 의도에 관해 서이다. 이 의문점을 파헤쳐 보고, 지리산 등반, 연습림의 산림사업, 식생 상황, 지역민의 생활상 등의 시대적 상황 을 지리산 관련 문헌(4권)을 토대로 고찰하고자 한다.

연구방법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작성한 지리산 조사 문헌 4권

(Table 1)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이를 토대로 지리산을

둘러싼 식생 및 시대 상황, 민속학적 측면에서의 시대적 상황을 고찰했다. 이 문헌들은 일본인의 시각과 입장에 서 작성한 것이라서 기록한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 이면 역사적 진실과 동떨어진 결론에 이를 수 있다(Bae

and Youn, 1991).

동일 사항이나 사건에 대해 지배자 일

본인과 피지배자 조선인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 다. 지리산 조사 문헌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역사적 진

(3)

실에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뒀다. 이 문헌에 기술된 사항에 대해 지배자 일본인과 피지배자 조선인 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지리산식물조사보고서(1915년)」와 「규슈제국대학 농 학부 연습림보고(1934년)」에는 지리산의 식생분포도가 첨부되었는데 전자는 주로 전남 구례와 경남 하동⋅산 청을 중심으로 작성됐고, 후자는 경남 하동⋅산청⋅함 양 일대가 그려졌다. 당시의 식생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서 이 식생분포도를 디지털화하여, 서로 중첩하여 하나 의 식생분포도를 만들어 현 지형도에 올려 식생별 분포 비율을 분석했다. 2곳의 식생분포도 위치가 같지 않으므 로 중첩된 곳의 식생은 시기적으로 나중에 작성되어 정 확도가 더 높은 것으로 판단된 규슈제국대학의 식생분 포도를 기준으로 작성했다.

결과 및 고찰

1. 일제강점기 지리산의 식물 및 식생 상황

나카이는 조선 식물의 권위자이며 우리나라의 근대

식물분류학 체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Kim et al., 2006).

구한말까지 조선의 식물 연구자들은 식물의 약성(藥性) 을 중시해 한약재로서의 본초학이 강조된 반면, 일본은 유럽을 중심으로 한 근대 식물분류체계(린네식 식물분 류법)를 일찍 받아들였고, 특히 도쿄제국대학 이학부를 근거지로 동아시아 식물연구에 열을 올렸다(Lee, 2012).

이런 상황 속에서 1909년 나카이는 최초 한반도 관속식 물상에 대해 전반적으로 논의한 Flora Koreana 1권을 완

성했다1)

. 1913~1922년까지 나카이는 조선총독부 연구

촉탁직2) 신분으로

18차례 채집조사를 통해 조선식물 연

구를 집중적으로 수행했는데(Kim et al., 2006) 1913년 에 일찍이 지리산의 식물상을 조사했다.

지리산식물보고서(1915)의 식물상 목록을 분석한

Jirisan National Park H.Q. Office(2019)에서 관속식물은

총 470분류군이며, 나카이가 특산식물로 명명한 식물은

59분류군이었다.

나카이(Nakai)가 명명자(author)로 된

식물종은

59종(전체

분류군의

12.6%)이었지만,

국가표 준식물목록(국립수목원)3)에 기준해 현재 정명(定名)으 로 남아있는 식물종은 22개(37.3%)뿐이며, 학명이 변경 되었거나(24종) 추적 불가인 경우(13종)가 많았다고 보 고했다. Chang(1994)이 지적했듯이 나카이는 한반도 식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생물학(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83%9D%EB%AC%BC%ED%95%99&ridx=

0&tot=17 접속일: 2020.10.27)

2) 조선총독부의 정규연구원이 아니라 임시직으로 고용되어 연구업무에 종사하는 사람 3) 국립수목원: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http://www.nature.go.kr/main/Main.do

Literary name Year of

issue Issuing agency Number of

pages Main contents Other matters

Jirisan Plant Survey Report

「지리산식물조사보고서」 1915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98 Vegetation situation, vascular plants by the

region and altitude

Vegetable distribution (map) of Gurye and

Hadong areas Overview of Jeollanam-do Experiment

Forest with the Department of Agriculture at Tokyo Imperial Univ.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부속 전라남도연습림 개요」

1925 Tokyo Imperial

Univ. 23 Vegetation situation,

forest projects,

utilization, etc -

Overview of the Experiment Forest with the Department of Agriculture

at Kyoto Imperial Univ.

「교토제국대학 농학부 부속 연습림 개요」

1928 Kyoto Imperial

Univ. 35 Vegetation situation,

forest projects, forest

fires, etc -

Report on the Experiment Forest of the Department of Agriculture at

Kyushu Imperial Univ.

「규슈제국대학 농학부 연습림 보고」

1934 Kyushu Imperial

Univ. 281 Vegetation situation,

vascular plants, useful plants, etc

Vegetable distribution (map) of Hadong and

Sancheong areas Table 1. Details of the Jirisan(Mt.) survey literature of Japanese colonial era

(4)

물을

40년 가까이 연구하는 동안 식물종 분류에서

혼동 과 혼란이 거듭되었음을 그의 문헌에서 쉽게 찾을 수 있 으며, 품종(forma) 수준의 개체를 변종(variety)으로 혹은 종(species)으로 격상하기도 했으나 반대의 경우가 있는 등 식물분류의 미숙함이 있었음을 언급했다.

나카이는

1942년까지 30년간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식물연구를 지속했으며, 이런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은 나카이의 조선식물 관심과 식민지 통 치정책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Lee et

al., 2012). 조선총독부는 한일강제병합 체결 후에 「토지

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林野調査事業)」을 본격화해 한국의 식민지적 토지소유 관계와 식민지 경제체제를 구축했다4)

.

조선총독부의 나카이 지원은 조선의 식물 등 다양한 정보를 수집해 체계화하여 식민화 통치정책 에 활용하기 위함이었으며, 나카이는 이 정책에 충실히 일조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나카이는 조선에서 신종과 미기록종을 찾는 데 주력 했으며, 특히 조선의 명산이나 깊은 산속 등 식생이 우수 할 거라 생각되는 곳에 식물채집을 집중했는데 연구촉 탁직 신분으로

1913년에

먼저 지리산을 조사했다(Kim

et al., 2006). 지리산식물조사보고서(1915년)에 화엄사

계곡, 의신계곡, 세석봉-천왕봉 일대 등은 원시림에 가까 울 정도로 산림이 울창하다고 언급했다. 또 1910년 전후 로 지리산에 일본의 제국대학들이 연습림을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교토제국대학 연습림보고서(1928년)에는 「 조선 전국토가 삼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북한의 금강산, 남한의 지리산, 제주도의 한라산, 즉 소위 조선의 3대 명 산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라고 기록했다5)

.

어느 곳 보다 지리산에 식물종이 풍부할 것으로 생각한 나카이 는 이곳으로 식물채집 여행을 서둘러 떠났을 것으로 능 히 추측할 수 있다.

지리산식물조사보고서(1915년)와 규슈제국대학 농학 부 연습림보고(1934년)의 식생분포도를 통합해 그려보 니 그 지역이 전남 구례, 전북 남원, 경남 하동⋅산청⋅

함양 일대로서 현 국립공원 노고단-천왕봉 능선부 기준 으로 남사면 일대가 대부분 들어왔다(Fig. 1). 식생 분포 면적 비율을 보면, 낙엽활엽수림이 35.96%로 가장 넓었 고 다음으로 소나무군락(23.35%), 미립목지(20.12%), 신 갈나무군락(8.48%), 아고산대 침엽수림(3.80%), 구상나 무군락(2.76%) 순이었다. 전남 구례군 광의면⋅마산면⋅

토지면,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인가와 인접해 있는 산기 슭과 저지대(해발 400~700m 이하)는 수목이 자라지 않 거나 밀도가 낮은 미립목지(未立木地)6)로서 당시 산림벌 채 등의 인위적인 교란이 심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지 리산 관련 문헌에서 언급됐다. 산중턱 또는 대략 해발

400m

내지는 700m부터 소나무림이 출현했고, 해발

800m

1,000m부터는 신갈나무를 주요 수종으로 한 활엽수

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고산대 침엽수림은 대략

1,300m부터 중봉,

세석, 반야봉, 연하봉 일대의 능선부

와 정상부에 주로 분포해 양호하게 산림보호가 된 것으 로 보인다. 전남 구례, 전북 남원, 경남 하동⋅산청⋅함 양 일대 마을에 인접한 산기슭 저지대는 지역민들의 삶 의 터전이라서 농지의 비료(녹비)7)나 땔감, 임산물 채취 등은 당시 상황에선 당연한 행위였다. 이곳은 소유주가 없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 아니라 촌락공동 이용지로 서 녹비나 땔감 등을 제공하던 곳이라서 촌락주민들이 배타적인 관리권을 가졌다.8)

1917년에

추진된 임야조사 사업을 통해 조선총독부는 이곳에 대해 촌락주민들의 공동산림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Bae and Youn, 1994).

이곳은 조선총독부 소유로 강제 이관되어 제국대학 연 습림으로 무상 임대되었으므로 지역민들은 이용 권한을 빼앗겼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 식생분포도(Fig. 1)에서의 저지대 미립목지를 연습림 관계자들은 산림 훼손이라고 인식했지만, 당시 지역민에게는 경작지처럼 실생활에 필요한 삶의 터전이었다. 지리산 저지대 산지에 대한 지 역민과 연습림 관계자들 사이의 인식과 개념이 달랐다 고 본다.

4) 임업연구원(2002) 뺷조선후기 산림정책사뺸 278p.

5) 京都帝國大學農學部附屬演習林(1928) 뺷京都帝國大學農學部附属演習林概要뺸 pp.188 6) 산지에 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은 곳이나 드문 지역

7) 산지에서 풀이나 나뭇잎을 잘라서 농사에 필요한 거름을 만들거나 녹비(綠肥)로 이용하였음 8) 임업연구원(2002) 뺷조선후기 산림정책사뺸 278p.

(5)

2. 일제강점기 지리산을 둘러싼 시대 상황

나카이는 1913년에 약 40일간 지리산의 식물을 채집

하고

2년 후에 그

결과로 지리산식물보고서(1915년)를

작성했다(Kim et al., 2006). 이 보고서에는 지리산의 위 치⋅등산로, 기후, 고도별 식물변화, 지역별 식물상, 유 용식물 등에 대해 식물학자의 관점에서 적어놓아 지리 산을 둘러싼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에서 지 리산 천왕봉의 접근 등산로와 그 상황에 대해 「경남 산 청, 전북 운봉, 경남 하동으로 올 수 있으며 경남 하동군 화개면을 거쳐 오르는 길이 가장 빠르다」고 기술했다.

또 「그 길은 폭 30~60cm를 넘지 않고 종종 풀로 뒤덮여 있어 길을 잃을 우려가 있다」9)고 서두에서 언급했다. 조 선시대가 되자 많은 유학자가 유람 목적으로 민족의 영

산인 지리산에 올랐는데 대표적인 지리산 유람기가 김 일손의 두류기행록(1489년), 양대박의 두류산기록행

(1586년)

등이다(Choi, 2015). 그뿐 아니라 조선 중기 이 후에는 민간인, 승려, 무당이 관의 침탈에 저항 또는 은 둔 목적으로 지리산을 찾았다(Kim, 2011). 지리산식물 조사보고서(1915) 기록을 보면 등산 목적으로 일반인이 자주 오르지 않아서 등산로가 불명확했던 것으로 보인 다.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단체인 「조선산악회」는

1931

10월 28일 창립되어(Park, 2012),

최초의 지리산 여행 안내기가 조선산악회의 회지 뺷조선산악뺸에 수록됐다

(Park, 2013).

이것으로 보아 현대개념으로 휴양, 스포츠 등의 목적으로 지리산을 등반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1938년에 들어 산청 쪽으로

접근도로 개설과 숙박 및

9) 朝鮮総督府(1915) 뺷智異山植物調査報告書뺸 pp.1 (분포 비율 2.76%)

(23.35%) (8.48%)

(5.41%)

(35.96%) (3.80%)

(20.12%) (0.12%)

[범 례]

Gurye

Hadong

Sancheong Cheonwang

-bong

Nogodan Namwon

Hamyang

Seseok -pyeonjeon

Fig. 1. Unified vegetable distribution of the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1915) and Kyushu imperial univ.(1934)

(6)

휴게소를 만들고,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10) 이 사실로 미뤄보아

1930년대부터

사람들이 등산을 목적(Park, 2011)으로 지리산을 찾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 무렵에 지리산 방문객이 늘어나면서 1937년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다무라 쓰요시(田村剛) 박사가 지리산을 조사해 국립공원 가능 성을 발표하면서 논의가 본격화됐다.11) 그러나 중일전 쟁(1937년)과 제2차 세계대전(1939년)이 발발하면서 일 본 내의 국립공원 행정이 정지됨에 따라 금강산국립공 원 지정계획(1935년)과 함께 더는 논의되지 못했다.12) 수액 채취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지리산 부근 사찰 에서는 스님이 산에 올라가 이른 봄에 나무에서 수액을 채취해 이것을 참배객에게 제공했다.」 또 「게으른 조선 인들은 굳이 등반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자도 없어, 스님들은 여전히 일종의 불가사의한 약수로 이것 을 채취한다. 지역민은 지리산을 숭배한 나머지 이 물에 대해 영험한 건강 약제와 같은 확신을 가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이것을 구걸한다. 하지만 약학상 무해 무효한 물에 지나지 않는다.」13)라고 기술했다. 위 표현에서 나카이는 조선인의 의식과 생활방식을 전근대 적이고 부정적으로 적어놓았는데 서구의 신문물로 무장 한 당시 식민지 지배층의 인식이 그대로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리산 인근 주민들의 산림 이용 실태를 기록한 지리 산식물조사보고서(1915년)에서 일제강점기에 지리산의 목재 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대체로 목본식물이기에 모두 장작이나 숯 용도로 이용할 수 있지만, 지리산에서 조금 큰나무로 목재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종류 가 있다. 가문비나무, 구상나무, 소나무, 잣나무 (중 략) 등은 상당한 크기에 달하며 모두가 좋은 목재지 만, 이미 남벌되어 그 수가 줄어들어 지리산에서 수 를 세기 쉽지 않다. 지리산 명물인 목공예는 인근

주민이 산속에 1~2개월간 임시 거처하며 벌목하여 만들지만, 가장 좋은 재료인 주목이 현재 멸종상태 에 놓여 있는 이유로 점차 그들은 가문비나무, 구상 나무를 베어 상이나 그 외 일용품을 만들고 있다.14)

이 기술에서 알 수 있듯이 지리산 저지대에서 천왕봉 인근까지 땔감, 숯제조, 목공예 등을 위한 용재를 구하기 위해 산림자원 이용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 쿄제국대학(1925)과 교토제국대학 연습림보고서(1928) 는 당시 지리산 식생 상황에 관해 기술했는데, 구한말 임업 행정이 크게 완화되고 산림관리가 제대로 이뤄지 지 않아 지역 주민은 자유롭게 입산해서 비료(녹비), 땔 감 혹은 농기구 등의 재료를 얻기 위해 지리산에서 산림 벌채가 지속됐고, 이 상태가 계속되어 한일강제병합 후 에 이르러 천연림이 차츰 사라졌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 로 약 70%는 일시적 혹은 영구적 무입목지(無立木地)이 며, 수림을 형성하는 곳은 겨우 28%였다고 도쿄제국대 학 연습림보고서(1925)에서 기술했다. 또 다른 산림 훼 손의 원인으로 산불을 언급했는데

1919년부터 1924년

까지의 만 5년 동안 도쿄제국대학 연습림에서 55회, 피 해면적이

16.57㎢(연습림 전체면적 10.1%)였다고 적어

놓아, 당시 지리산 산림 훼손이 지역민들의 무분별한 남 벌과 산불에 의한 것으로 기술했다.

한편,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체결된 후에 일본제국 대학들은 지리산에 연습림을 설치했는데 이 연습림의 설치와 관리가 지리산의 식생 발달 및 지역민의 실생활 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리산에 3개 제국대학이 앞다투 어 연습림을 설치한 배경과 목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일제는

1906년 2월 통감부 설치와 동시에 식민지 경

영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할 목적으로 조선의 토지제도 와 토지소유 관습에 대한 기초조사에 착수했다. 1910년

3월에는

토지조사국을 설치해 토지조사사업의 단서를

확립했다.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은 자본주의적 토지제도 를 정비해 조세 확충을 통해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재정

10) 「지리산의 국립공원화에 제반시설 착착진보 등산도로, 숙박소, 휴게소 등 관계가 구체적 협의」, 뺷매일신보뺸 1938.6.12일자 11) 「智異山を語る、田村林學博士踏査談」 조선시보 1937.10.13.일자

12) 뺷국립공원관리공단 30년사뺸, 1998, pp.99; 국토환경정보센터(http://www.neins.go.kr/etr/ecology/doc03b.asp) 13) 朝鮮総督府(1915) 앞의 pp.91-92

14) 朝鮮総督府(1915) 앞의 pp.90-91

(7)

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또 토지조사 방법의 복잡한 신고 절차와 막대한 비용 등의 이유로 신 고하지 않는 농민들이 많아 무지주⋅무신고 토지의 대 부분이 국유화되어 조선총독부 소유로 이관됐는데 이때 몰수된 토지가 농경지

2만 5,800정보

15)

,

산림 및 원야 1

9,400정보에 달했다고 한다.

16) 고시카 가쓰토시(小鹿

勝利)의 「연습림 경영에 관한 사회경제사적 연구(1985)」

라는 논문에서 「식민지 경영의 추진을 위해 토지소유의 근대화를 실시해 임야의 대부분을 국유화하고 새롭게 일본 본토 자본에 대해 토지처분의 길을 열어 산림 개발 을 진행했다. 즉, 조선의 국유림은 조선의 식민지화 강화 의 과정에서 주민의 생활수단을 강권으로 빼앗는 형태 로 성립한 것이다.」17)라고 논의했던 것처럼 토지조사사 업과 함께 임야조사사업도 식민지 수탈의 대표적인 사 업이었다.

이처럼 근대적 토지제도의 확립이라는 명분에 따라 행해진 식민지 토지와 임야 수탈사업은 조선총독부의 국유림 확보로 이어졌다. 이렇게 편입된 지리산 국유림 은 일본 제국대학의 연습림18) 조성이라는 목적으로

4개

대학에 80년간 무상으로 임대됐다. 당시 조선에 설치된 제국대학 연습림의 설치 내역은 Table 2와 같은데 특히 지리산에 한일강제병합 체결 후에 빠르게 도쿄⋅교토⋅

규슈 제국대학들이 각각 연습림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대학이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에 연습림을 설치한 것은 2가지 목적이 있었다. 우선 첫 번 째는 연구와 교육의 목적으로서 농학부의 조림 실습을 위한 연습림이 필요했다. 규슈제국대학 농학부의 연습 림 보고서(1934)에는 일본 본토의 연습림을 포함해 조 선, 대만, 사할린에 각각 연습림을 설치한 목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대만연습림은 아열대, 가스야(粕屋)연습림은 난 대, 남선연습림은 위도로 보자면 35° 20′ 내외에 위 치해 삼림대 상으로 보자면 온대 상부이지만, 대부

분은 300m 이상의 고지를 점하고 있어 그 식물은

온대 중부에 속한다고 보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할린 연습림은 북위 49° 30′ 내외에 위치하여 한 대를 대표한다. 즉 각 연습림은 4개 계절대에 위치 하는 것으로 위도의 변화에 따른 생활형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좋은 경우의 관계에 있다.19)

즉, 난대(暖帶)에 있는 일본 본토 규슈의 가스야(粕屋) 연습림을 비롯해 온대 중⋅상부의 조선 남부, 아열대와 한대 기후대에 있는 대만⋅사할린에 각각 연습림을 설

15) 1정보는 약 0.99ha(9,917㎡)에 해당

16) 국가법령정보센터 토지조사령(http://www.law.go.kr/ LSW/lsInfoP.do?lsiSeq=65041#0000, 접속일:2020.09.22.)

17) 「植民地経営の推進のために土地所有の「近代化」を行い林野の大部分を国有化し、新たに内地資本に対する土地処分の道をひらき、山林開発を

進めた。すなわち朝鮮の国有林は朝鮮の植民地化の強化の過程で住民の生活手段を強権的に奪う形で成立したのである。」 小鹿勝利(1985)

「演習林経営に関する社会経済史的研究」 뺷北海道大學農學部 演習林研究報告뺸 42(2), p.805-806. 이하, 일본어 원문의 한국어 번역은 필자에

의함

18) 학생들의 실습과 동시에 시험연구를 목적으로 학교가 관리하는 산림을 말하며, 현재는 ‘학술림’이라고 말함 19) 九州帝國大學農學部附属演習林(1934) 뺷九州帝国大学農学部演習林報告뺸, p.23.

Experiment forest name

Tokyo imperial

univ. Kyoto imperial

univ. Kyushu imperial

univ. Hokkaido imperial

univ.

Jeollanam-do Province of Joseon

「조선 전라남도」

Joseon Gangwon-do

「조선 강원도」

Joseon

「조선」 Namsun

「남선」 Buksun

「북선」 Joseon

「조선」

Location Jirisan (Gurye), Baegunsan (Gwangyang)

Sudong-myeon, Goseong-gun,

Gangwon-do

Jirisan (Namwon, Hamyang)

Jirisan (Sancheng,

Hadong)

Musan, North Hamgyong

Province

Deokyusan Mountain (Muju, Jangsu)

Area(㎢) 263.85 207.49 169.47 168.88 46.08 164.17

Installation year 1912 1912 1912 1926 1913

*Data Sources: 藤岡健太郎(2019)

Table 2. Establishment of experiment forests for imperial universities in Japanese colonial era (as of 1931)

(8)

치함으로써 각 기후대를 대표하는 연습림을 확보하고자 했다. 표면적으로 임업 연구 및 실습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은 1912년 8월 홋카이도제국대학 농과대학장이 당시 조선의 전라북도 무주군 소재 국유림에 연습림 설치를 목적으로 총장에게 요청한 신청서에도 기록됐다. 즉, 「우 리 영역에 속하는 조선은 임학상 연구해야 할 것이 대단 히 많아 연습림을 설치해 임학의 실지연구 및 연습에 충 당하는 것은 비록 본 대학의 교수상 이익이 많을 뿐만 아니라 조선임업 발달에 이바지할 것이 분명하다.」20)와 같이 연습림 설치가 연구 및 실습에 필요하며, 조선 통치 에 이바지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다음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식민지의 연습림은 농학 부 부속시설인 동시에 대학의 기본재산이 된다. 각 제국 대학이 앞다투어 식민지에 연습림을 설치하면서 표면적 으로 내세운 목적은 연구였지만, 그 이면에는 식민지 산 림경제 개발과 그것에서 얻는 수익에 목적이 컸다(奥山,

1999).

네기시 켄이치로(根岸賢一郎)는 도쿄대학 부속

치바연습림(千葉演習林) 연혁에 대해 언급하면서

1898

년부터 1920년 사이에 식민지 연습림을 포함해 전체 연

습림이

7곳으로 확대되면서 연습림 수입이 늘어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러일전쟁 후 대정시대 초에 걸쳐 불황의 시기도 있었지만,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 하에는 목재 가격 이 올라 연습림 자체의 기반 정비가 진행된 것과 아 울러 임업경영의 수익은 증가했다. (중략) 연습림 수익은 연습림 자체 정비를 발전시켜 치치후연습림

(필자주: 1916년 사이타마현埼玉県 치치후시秩父市

산지 일대의 연습림), 아이치연습림(필자주: 1922년 아이치현愛知県 오와리尾張 동부의 연습림) 구입을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도쿄대학 정년제 실시에

필요한 퇴직금에 충당하였다. (중략) 이처럼 연습림 수입은 부속병원 환자 수입과 함께 특별회계에 이 월되어 대학교 전체 예산의 일부가 되었다.21)

이처럼 러일전쟁 이후 식민지에 연습림을 설치해 이 로부터 얻어진 수익은 본토의 또 다른 연습림 구입에 쓰 이거나 심지어 대학 교직원의 정년 퇴직금에 충당하기 도 했다. 1931년 당시 각 대학이 보유했던 전체 연습림 중에 식민지에 설치한 연습림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도쿄제국대학이 77%, 교토제국대학이 98%, 규슈제국대

학이

99%,

홋카이도제국대학이 38%이었다22)

.

특히 교

토⋅규슈 제국대학은 대부분의 연습림을 식민지에 설치 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에 농학부가 설립(규슈제국대학

1918년,

교토제국대학

1923년)되기도 이전에 조선연습

림을 설치했기에 연구목적보다 경제적 이익 창출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시 대학 연습림을 통해 행해지던 경제적 이윤 추구 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기사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1923년 4월에 발간된

잡지 뺷개벽뺸 제34호에 「慶南人民

의 怨府인 智異山大學林」이라는 제목으로 지리산 연습림 에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其外에 大學에서는 또 山下주민으로 소위 山林保 護組合을 성립케하야 組合金을 징수하고 此組合員 이 안이면 一草(山菜藥材까지)一木이라도 채취치 못 하게 한다. 그나마 保護組合도 또한 인민이 자유로 조직하는 것이 안이라 面에서 조직하야 面長이 반듯 시 組合長이 되고 此 許可願은 군청을 경유하야 河 東郡에 在한 大學演習林管理事務所에 제출하면 同事 務所에서는 또 大學에 보고하야 其許可를 得하게 되 얏다. 如斯히 無用의 수속이 복잡함으로 자연 시일

20) 「我版図ニ属シタル朝鮮ハ林学上研究スヘキモノ頗ル多キヲ以テ該地ニ演習林ヲ設置シ林学ノ実地研究竝ニ演習ニ充ツルハ独リ本学ノ教

授上利スル所多キノミナラス朝鮮林業ノ発達ニ資スル所鮮カラサル」 인용은 小鹿勝利(1985) 논문, pp.235-236에 의함.

21) 「日露戦争後大正年代初めにかけては不況の時期もあったが、続く第一世界大戦下には木材価格が高騰し、演習林自体の基盤整備が進んだこ

ととあいまって、林業経営の収益は増加した。(中略)演習林の収益は、演習林自体の整備を進め、秩演、愛演の購入を可能にしただけでな く、東大での定年制実施に必要な退職金にあてられた。(中略)このように演習林の収入は、附属病院の患者収入などとともに特別会計に 繰り入れられ、大学全体の予算の一部となった。」 根岸賢一郎(1997) 「千葉演習林沿革史資料(東大演習林の歩み)」 뺷演習林뺸 36, 東京大学大学 院農学生命科学研究科附属演習林, pp.274-275.

22) 「植民地演習林の面積比率をみると北大の38%に対して, 東大77%, 京大98%, 九大99%となり北大の演習林の設置基盤は北海道に, これに対し他

の3帝大は植民地にあり, とりわけ京大, 九大はそれが顕著であった。」 小鹿勝利(1985) 앞의 p.237.

(9)

이 遷延되야 인민은 其生活에 필요불가결한 柴木까 지라도 採伐할 시기를 失하야 곤란이 막대하다. (중 략) 德山(山淸郡 矢川面)과 如한 지방에서 共益組合 員인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원금 2원을 대여하고 3 년만에 60원을 受한 事가 有하고 又 원금 20원을 대 여한 자가 원금 15원을 受한 후 잔금 5원에 利上加 利를 하야 3년 만에 家庄什物까지 매갊하야 100원 을 受하고도 아즉 淸帳을 못한 事가 잇다.23)

당시 지리산에 의지해 살던 지역민들은 지리산 연습 림을 이용하기 위해선 산림보호조합에 가입해 조합금을 내야 했는데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산채나 약재는 물론 생활에 필요한 잡목도 채취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또 조합에 가입하는 절차나 허가가 상당히 까다로웠으며 시일도 많이 지체되어 많은 불편함을 겪고 있었다고 한 다. 또 대학연습림 조합원인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원금

2원을 대여하고 3년 만에 무려 30배인 60원을 갈취했다

는 사실은 제국대학 연습림 이용을 빌미로 만연했던 조 선인 학대와 억압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 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남한에 산림이 우수하게 남아있던 지리산에 앞다투어 제국대학들이 연습림을 설 치했던 표면적인 목적은 산림보호와 연구였지만, 실상 은 연습림 설치를 통해 경제적 이익 추구 목적이 더 컸 다. 연습림의 산림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목재 벌채 등의 산림자원 이용은 더 체계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유추 할 수 있다. 지리산에 제국대학의 연습림 설치는 일제의 식민지 경제 수탈과 궤를 같이한다고 본다.

일제강점기 관련 보고서에서 지리산 대부분의 산림 훼손이 지역민들의 생활방식 때문이라고 부정적으로 기 술했다. 그러나

3개 제국대학이 지리산에 연습림을 설치

한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지리산에 우수한 산림이 남아 있어 이용 가치가 컸기 때문이다. 지역민은 오랜 세월 지리산 환경에 적응해왔고 토지이용 및 농경, 임산물 채

취 등 지리산이 베풀어주는 생활사의 다양한 이로움을 기반으로 삶을 영위해왔다(Choi, 2015). 연습림 설치에 따른 지리산 입산 제약과 이용 제한 조치는 지역민들의 생활방식을 탈바꿈하게 되는 계기이자 핍박으로 다가왔 을 것이다.

3. 일제강점기 지리산을 둘러싼 민속학적 시대 상황

이번 장에서는 지리산 관련 문헌의 기록 중에 당시의 시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민속학적 기록을 중심으로 논해보고자 한다. 우선 지리산식물조사보고서(1915)에 서 지리산 수액 채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지리산 부근의 각 사찰에서는 스님이 산에 올라 가 이른 봄 나무에서 수액을 채취하여 이것을 참배 자들에게 제공한다. 이 시기는 각 사찰이 가장 붐비 는 때로 유복한 양반은 관기를 데리고 며칠간 체재 하는데 악기연주와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따 라서 사찰의 수입도 이때 가장 많다. 종래 이것에 이용되는 나무는 스님이 비밀로 하여 알려주지 않 았지만, 산속에 들어가 조사해 보았더니 수액을 채 취한 흔적이 있어 분명히 그것임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가지를 꺾어 돌아와 스님에게 보여주니 맞 다는 증언을 얻었다.24)

지리산에는 서어나무류나 층층나무, 곰의말채나무, 말채나무 등 수액 채취에 많이 쓰이던 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수액을 채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 고, 주로 이용된 수종은 고로쇠나무, 당단풍나무, 거제수 나무였다고 나카이는 식물조사보고서(1915)에서 기술했 다. 또 이 보고서에서 고로쇠나무 수액은 설탕을 대신할 수 있으며 일본 산간에서도 종종 채취했는데 당시 조선 에서 고로쇠나무보다 해발

1,100m

이상에서 자라는 사

23) 「朝鮮文化의 基本調査 一部發表」 뺷개벽(제34호)뺸 개벽사, 1923년 04월. 단 인용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잡지자료 데이터베이스에 의함

(http://db.history.go.kr/id/ma_013_0330_0170, 접속일: 2020.09.22.)

24) 「智異山付近ノ各寺院ニテハ寺僧ヲ山中ニ派シ早春樹木ヨリ水ヲ探リ之ヲ遠近ノ参詣者ニ供ス此ノ期節ハ各寺院ノ最モ賑フ時ニシテ有福ノ

兩班は官妓ヲ伴ヒ滞在數日各寺共絃歌ノ音絶エストカ從ツテ寺院ノ収入モ此ノ時ニ於テ最モ多シ從來之ニ用井ル木ハ寺僧之を祕シテ語ラ サレトモ山中ニ入リテ檢スレハ水ヲ探リシ痕迹ニ依リ明ニ夫ト認メ得タリ故ニ枝ヲ携ヘ歸りて寺僧に示シ其ノ然ルコトノ證言を得タリ」

朝鮮總督府(1915) 뺷智異山植物調査報告書뺸 日韓印刷株式會社, pp.91.

(10)

스래나무에서 승려만이 채취했고, 이 수액을 받은 참배 자들은 지리산 숭배 정신에 근거한 불가사의한 약수 즉 영험한 건강 약제로 확신했다고 기술했다. 또 1928년에 간행된 교토제국대학 농학부의 연습림개요(1928)에도 일부 수액 채취와 관련해 「거제수나무 줄기에 구멍을 뚫 어 흘러나오는 수액을 약수로 칭하며 이것을 채취하기 위해 백 리를 마다치 않고 오는 자도 있으며, 가문비나무 껍질에 상처를 내 흘러나오는 수지(樹脂)를 약용으로 팔 기 위해 산 정상에 올라가는 자도 있다.」25)고 기록했다.

1913년에 식물채집 조사로 작성된 나카이의 보고서 기

록으로 미뤄보면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고로쇠수액을 음 용하지 않았고, 지역민들이 아니라 사찰 승려만이 채취 해 양반 등의 부유층만이 마셨던 불가사의한 약수로 인 식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에

15년이 지난 1928년

교토제국대학 기록처럼 이때부터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수액 음용 문화가 스며들어 조금씩 대중화되기 시작했 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도쿄제국대학 농학부연습 림에서 간행한 연습림개요(1925)에는 녹비 채취, 산불, 숯제조, 기타 임산물의 활용과 관련한 사항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는데 그 중 녹비 채취로 인한 산림 훼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지방주민이 쌀농사를 시작할 때 논에 넣는 풋거 름은 옛날부터 대체로 본 연습림으로부터 구하는 관습이 있다. 그 가구수가 약 7,500여 호 정도로 이 것에 필요한 추산면적은 2,080정보 정도인데, 전 연 습림의 12%에 상당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 결과는 대단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26)

예로부터 4, 5월 논농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필요한 녹 비 대부분을 지리산에서 채취했는데 인근 지역민은 물 론 광양, 구례 멀리는 하동, 순천 등에서도 지리산에 들 어가 식물 잎과 줄기 등의 녹비를 채취했다고 적었다.

교통이 불편한 곳이나 인구가 적은 곳 또는 벌목 반출이 곤란한 산 정상부 일부의 산림만이 남아있을 뿐 산림 대 부분이 황폐했는데 그 원인이 온돌문화에 따른 땔감⋅

녹비 채취가 큰 이유라고 연습림 관계자는 분석했다. 지 리산의 사찰림을 제외하고, 주거지에 가까운 산록부 저 지대 대부분에 임목보다 초목이 분포한 이유도 땔감⋅

녹비 채취 등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기준으로는 산림 훼손으로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생활방식 이었다. 또한 도쿄제국대학 연습림 보고서에는 산불과 관련한 기록도 자세히 기술했다. 지리산의 산불 원인에 대해선 주로 가을부터 초봄에 걸쳐 땔감 채취 목적으로 입산한 자의 실화, 화전(火田) 경작자의 방화 등으로 산 불이 일어났다고 한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5년간

총 52회에 걸쳐 1,671정보(16.57㎢)의 막대한 산불 피해 가 있었는데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방화선 설치와 순찰, 전화 설치를 통한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 등의 방지 노력 을 했지만, 아직 효과를 보지 못하는 점이 유감이라고 적었다.27) 녹비 및 임산물을 채취하거나 화전을 경작하 는 데는 수림이 형성되면 알맞지 않아 계속해서 지역민 들은 산불을 놓아서 연습림 관계자는 이를 막기 위해 다 방면으로 노력했다고 기술됐다.

산림자원 중에서 조릿대 이용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1481년(성종 12년)

광양에서 최초로 김양식이 이뤄졌고 이 방법이 일본으로 전파됐 다(Bae, 1991). 광양을 중심으로 김양식이 번성한 데에 는 인접한 지리산 일대의 산림자원과 무관치 않다. 지리 산에 흔히 자라는 조릿대(이대 포함)는 종래에 양잠 도 구, 담배 파이프 등의 재료로 썼지만, 산업적으론 이용되 지 않았다. 광양⋅하동 근해에서 일제강점기 김 양식업 이 급속하게 발달함에 따라 양식에 필요한 김발의 수요 가 급증해 지리산 조릿대를 많이 공급하기에 이르렀다 고 적었다. 지리산 조릿대는 김 부착량이 많은 장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가격도 현저히 싸고 섬진강을 통한 운

25) 「カバノ樹幹ニ孔ヲ穿チ溢レ出ヅル樹液ヲ薬水ト稱シ之ガ採集ノ爲百里ヲ遠シトセズ來ル者ガアル、エゾマツ其他ノ樹皮ヲ傷付ケ洩レ出ヅ

ル樹脂ヲ薬用ニ供スル爲ニ山頂ニ擧ヅル者ガアル、斯クノ如キハ其害未ダ必ズシモ大ナリトセズ」 京都帝國大學農學部附屬演習林(1928) 京都帝國大學農學部附属演習林概要뺸 似玉堂印刷所, pp.214.

26) 「殊ニ地方民ガ米作ノ初メニ當リ水田ニ投ズル綠肥ハ古來槪ネ本林ヨリ之ヲ得來リシ慣習アリソノ戶數約七千五百餘戶之ニ要スル推算面積

二千八十町歩餘ニシテ全林ノ一二%ニ相當スルヲ知ラバ蓋シ其結果ヤ想像ニ難カラザルベシ。」 東京帝國大學農學部演習林(1925) 뺷東京帝 國大學農學部附属全羅南道演習林概要뺸 農藝化學敎室印刷所, pp.3.

27) 東京帝國大學農學部演習林(1925) 뺷東京帝國大學農學部附属全羅南道演習林概要뺸, pp.20~23.

(11)

반이 편리해 양식업자는 앞다투어 요구했다고 덧붙였 다.28) 이 기록으로 보아 지리산 연습림에서 반출된 조릿 대가 우리나라 김 양식업 부흥에 큰 역할을 한 것은 틀 림이 없다.

숯제조와 관련한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지리산 하동 인근에서 일본인이 연습림 목재를 무단으로 베어 돌가 마를 이용한 백탄 제조가 성행했는데 숯 품질과 생산율 도 대단히 낮아 수요자들의 불만이 높았다고 한다. 연습 림 차원에서 숯제조법 개선을 도모할 필요성을 인정해

1922년 7월 일본 고치현(高知県)에서 기술자를 초빙해

직접 숯제조 기술을 지도한 결과 품질이 향상됐다고 적 었다.29) 도쿄제국대학 연습림 수입의 대부분은 숯 판매 로 얻어졌으며, 그로 인해 발생한 수익은 직원의 봉급 수당과 토지 구입, 건설공사비로 충당했다고 한다.30) 또 교토대학 농학부 연습림개요에도 숯제조와 관련한 기록 이 있는데 조선인들은 숯 사용량이 적어 판로를 일본 본 토로 찾았는데 교통 개선으로 점차 운반이 쉬워져 숯제 조를 연습림에서 진행했다고 보고했다.31) 제국대학 연 습림 보고서에선 화전, 도벌, 녹비 채취 등에 대해 철저 히 단속하고, 황폐지의 적극적 조림사업 추진 등 치적을 상당 부분 기술했다. 그 이면에서 연습림의 경영유지에 필요한 노동력은 저렴한 지역 노동력으로 충당했고, 특 히 지리산 연습림의 산림자원인 고로쇠수액, 김발용 조 릿대, 목재, 숯 등을 지역민들 또는 일본 본토에 판매하 여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교토대학 농학부 연습림개요(1928)에는 지리산 일대에서 경작되던 화전과 관련해 기록했다. 교 토대학 지리산 연습림에선 이전부터 총면적

33ha에

걸 쳐 화전이 이뤄졌는데 일제 금지는 사실상 불가능해 현 단계(1917년)에서 경작되는 곳에 한정해 허용했고, 새롭 게 개간하는 경작지 또는 타지에서 온 자의 경작은 엄격 히 단속했다. 또 기존 경작지라도 산림보호 차원에서 관

리 감독이 쉬운 곳에 개간하는 경우 동일 면적을 인정하 는 방침을 세워 노력한 결과 약 4ha 정도의 면적을 정리 했다는 내용이다.32) 하지만 당시 덕유산 일대에 조성된 홋카이도대학 연습림의 화전민에 대해 조선총독부 산림 부가 전문가 협력을 받아 화전 실태를 조사해 대책을 수 립했는데 결국 충분한 효과를 올리지 못했다고 했다.33) 이처럼 종래 지리산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져 오던 화전 농업의 단속과 정리가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미뤄 짐작 할 수 있다. 지리산 연습림 설치에 따른 화전 단속은 화 전민 처지에서는 생존권이 달린 문제라서 제국대학 연 습림과의 투쟁기라고도 볼 수 있다.

4. 결론

한일강제병합 직후인

1913년에 일찍이 나카이는 지리

산에 식물채집을 왔다. 이는 지리산에 울창한 산림이 남 아있어 식물상이 풍부할 거로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나 카이는 한반도에서 신종⋅미기록종 보고라는 성과를 올 렸다. 이 성과는 조선총독부의 정보수집 체계화라는 식 민화 통치정책과 잘 맞아떨어졌다. 이런 까닭으로 30년 동안 조선총독부의 적극 지원을 받았고, 지리산뿐만 아 니라 백두산, 금강산 등 한반도 여러 곳을 나카이는 수월 하게 식물채집 조사를 다녔다.

1912년에 일본 제국대학들이

앞다퉈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지리산 등 국외에 연습림을 설치했다. 제국대학 연습림보고서에 기술된 것처럼 표면적으론 산림보호와 연구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우수한 산림 개발을 통한 경 제적 이익이 워낙 커서 식민지 연습림 설치는 제국대학 입장에선 일거양득이었다. 지리산의 연습림도 마찬가지 였다.

조선인들이 지리산 산림을 훼손했는데 제국대학 연습 림이 산림 복구를 위한 온갖 노력을 했다고 문헌에 기록

28) 東京帝國大學農學部演習林(1925) 앞의 pp.26~27.

29) 東京帝國大學農學部演習林(1925) 앞의 pp.25 30) 東京帝國大學農學部演習林(1925) 앞의 pp.25 31) 京都帝國大學農學部附屬演習林(1928) 앞의 pp.214.

32) 京都帝國大學農學部附屬演習林(1928) 앞의 pp.207~208.

33) 「最近朝鮮總督府山林部ニ於テハ殖産局、內務局ソノ他關係官署並帝國大學敎授等專門家ノ協力ニ依ツテ火田ノ實地調査ヲ行ヒ更ニ整理ノ方策ヲ樹

立シタト確聞スルガ、コレ要スルニ從來ノ森林令モ內訓モ共ニ充分ナル効果ヲ擧ゲ得ナカツタコトヲ裏書スルモノデアル。」 渡部義郞(1932)

「火田ト火田民ニ就テ:主トシテ朝鮮演習林ニ於ケル火田」 뺷北海道帝國大學農學部演習林硏究報告뺸 7号, 北海道大学農学部演習林 p.273.

(12)

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소유의 관유림, 귀족소유의 사 유림,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나눠 산림자원을 관리했 다. 주인이 없는 산이라는 무주공산이라는 산림도 촌락 공동 이용지로서 지역민들이 배타적인 관리권을 가졌 다. 즉, 무주공산이라고 해서 아무나 나무를 베고 개간할 수 없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34) 지금의 시각으로 과 거를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조선의 산림관리 체제 하에서 산림자원이 몇백 년 동안 적절하게 이용됐다. 하 지만 국가의 통제력이 느슨한 조선 말기나 구한말에 지 리산 등의 산림 훼손이 급속도로 심해진 것 같다. 당시 상황엔 생존을 위해 산림자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는 점도 이해가 필요하다.

일제강점기 지리산 조사 문헌의 표현처럼 지리산 전 체가 민둥산처럼 훼손됐다면 나카이의 식물채집 조사도 제국대학의 연습림 설치도 없었다고 본다. 이 문헌의 식 생분포도에서 확인했듯이 전남 구례군과 경남 하동군 인가에 인접했던 산기슭과 저지대(해발 400~700m이하) 는 나무가 거의 없는 미립목지였다. 당시 지리산 지역민 들은 이곳을 녹비나 땔감 등을 채취하는 경작지와 같은 곳으로 보았다. 반면 연습림 관계자는 이곳을 산림 훼손 으로 보아 서로 관점이 아주 달랐다. 이곳에 제국대학의 연습림 설치로 인한 입산 제약과 이용 제한 조치는 삶의 터전을 빼앗겨 지역민들에게는 핍박으로 다가왔을 것이 다. 지금도 지리산국립공원의 자연자원을 이용하는 지 역민과 국립공원사무소와의 갈등이 존재한다. 과거 역 사를 교훈 삼아 지역민은 관리대상이 아니라 지리산국 립공원 보전을 위한 협력자로 더욱더 동참하여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

조선인의 수액 채취와 음용에 대해 전근대적이고 부 정적으로 표현했는데 나카이의 우월 의식이 잘 드러난 대목이다. 일제 지배층 역시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인식 이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지리산 상황을 기록 한 일본인은 일제의 산림관리체제가 더 우월하다고 생 각해, 조선의 관리체제와 상황을 무시한 채 일제의 입장 에서 현상만을 기록했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문헌 대부 분은 일본인이나 조선총독부의 관변단체가 기록했기에 일제 식민지 정책을 합리화하는 편향이 강하고, 이 정책

에 불리한 점은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Bae and Youn,

1994).

이 지리산 조사 문헌의 기술 내용을 그대로 받아

들이면 역사적 진실과 동떨어진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일제가 조선을 수탈의 대상인 식민지로 바라보았다는 점을 대전제로 하고 지리산 조사 문헌을 비판적으로 바 라봐야 역사적 진실에 더 다가갈 수 있다.

사사

본 논문은 2019년 지리산국립공원본부 일제강점기 지 리산 조사 연구문헌 용역으로 실시된 연구의 데이터를 활용해 발전한 것을 밝힘.

참고문헌

Bae SH, YC Youn. 1991. A study on the forest policy and Japanese capital infiltration proces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Korean Journal of Forest Economics.

2(1): 1-37. (in Korean with English abstract)

Bae SH. 1991. The origin and development process of laver culture industry in Korea. Ⅱ. Laver history during Japannese ruling period. Bull. Kunsan Fish. J. Coll. 25(1): 137-153.

(in Korean with English abstract)

Chang CS. 1994. A reconsideration of nomenclatural prob- lems on Korean plants and the Korean woody plant list.

Korean journal of plant taxonomy. 24(2): 95-124. (in Korean with English abstract)

Choi WS. 2015. A Reconstruction of the residents’ life through the premodern travel Records of Jiri Mountain.

南冥學硏究 46: 299-344.

Jirisan National Park H.Q Office. 2019. A Study on Jirisan Document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p. 644.

Jirisan National Park H.Q Office. (in Korean) Kim H, GS Chang, CS Chang, BH Choi. 2006. Reexamination

on foreign collectors’ sites and exploration routes in Korea (II) - with respect to T. Nakai -. Korean journal of plant taxonomy. 36(3): 227-255. (in Korean with English abstract)

Kim JH. 2011. Resistance exercise in and around Mt. Jiri(智異 山)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南冥學硏究. 31:

34) 임업연구원(2002) 뺷조선후기 산림정책사뺸 278p.

(13)

267-304. (in Korean with English abstract)

Lee J. 2012. Contested Botanizing in Colonial Korea (1910-1945) Conflicting Visions of Modernity Emerging through Colonial Interactions between Korean and Japanese Researchers. p. 289. Ph.D. Dissertation, Seoul National Univ. (in Korean with English abstract) Park CM. 2011. Jirisan, a virgin forest of exploration and

conquest - focusing on student essays in 1930s. Korean Literary Theory And Criticism. 51: 171-196. (in Korean with English abstract)

Park CM. 2012. Chosun mountain association and Jirisan(Mt.) tourism. The Journal of Namdo Area Studies. 23:

133-163. (in Korean with English abstract)

Park CM. 2013. A study on Mt. Jiri, the colony ‘on exhibition’

and the multi-layered views. The Journal of Modern Literary Theory. 53: 127-154. (in Korean with English abstract)

京都帝國大學農學部附屬演習林. 1928. 京都帝國大學農學部附 属演習林概要. p. 35. 似玉堂印刷所.

九州帝國大學農學部附属演習林. 1934. 九州帝国大學農學部演 習林報告 (第五号). p. 281. 九州帝國大學印刷所.

根岸賢一郎. 1997. 千葉演習林沿革史資料(東大演習林の歩み) 뺷演習林뺸 36. Pp. 274-275. 東京大学大学院農学生命科学 研究科附属演習林.

渡部義郞. 1932. 火田ト火田民ニ就テ:主トシテ朝鮮演習林 ニ於ケル火田. p. 273. 北海道帝國大學農學部演習林硏究 報告 7号, 北海道大学農学部演習林.

東京帝國大學農學部演習林. 1925. 東京帝國大學農學部附属全 羅南道演習林概要. p. 23 農藝化學敎室印刷所.

李鎭昊, 杉山和一, 石松隆和. 2014. 朝鮮林野調査事業の問題点 の探究と分析. 林業経済. 67: 1-15.

小鹿勝利. 1985. 演習林経営に関する社会経済史的研究. 海道大學農學部 演習林研究報告. 42(2): 805-806.

奥山 洋一郎. 1999. 戦前期における東京大学演習林をめぐ る縮小論議 -国有財産整理事業における東大の対応-.

東京大学大学院 農学生命科学研究科 附属演習林. 102:

151-201.

朝鮮総督府. 1915. 뺷智異山植物調査報告書뺸. p. 98. 日韓印刷株 式會社.

藤岡健太郎. 2019. 帝国大学農学部の形成と展開に関する研

究 -九州帝国大学を中心に-. p. 107. 研究成果報告書.

Referensi

Dokumen terkait

Liu, ”Performance Analysis of Intelligent Reflecting Surface Assisted NOMA Networks,” IEEE Transactions on Wireless Communications, doi: 10.1109/TWC.2021.3114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