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상해 일원을 중심으로-
宋 堯 厚 (東國大)
Ⅰ. 서언
Ⅱ. 북경 지역
Ⅲ. 상해 지역
Ⅳ. 이후의 연구와 관련 된 제언
Ⅰ. 서언
필자는 1980년대 후반 석사과정 재학 중, 현재 서울대학교 역사교 육과 명예교수이신 이원순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강의 주제가 ‘조선 서학사’였다고 생각되는데, 七克 등을 비롯한 한 문서학서들에 대한 강의가 매우 흥미를 끌었다. 선생님의 『朝鮮西學 史硏究』에 실린 논문들, 최소자 선생님의 박사학위 논문, 梁啓超의
『中國近三百年學術史』에 나오는 西學 관련 내용 및 明․淸시대에 중 국에서 활동한 耶穌會敎士와 그들의 한문 저술들은 어렴풋이 나의 기 억 속에 잠겨 있었다.
2015년도 한국연구재단 토대 연구 주제들 중 하나로 지정된 “조선 지식인의 서학 연구”는 필자의 기억과 흥미를 되살렸고, 이 분야를 전 공하신 동국대학교 사학과 노대환 교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 주제 를 3년 동안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연구를 위해, 우 선 중국에서 출판된 430여 종에 달하는 한문 서학서들의 목록을 작성
하고, 이 중에 조선으로 유입된 130여 종의 한문 서학서들을 다양한 연구 결과물들을 참고하여 목록화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이들 130여 종의 서학서들을 분류하고, 국내․외 소장처를 확인하였다.
최근 국외 연구소에서 출간된 많은 영인본들과1) 국내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과 한국교회사연구소 등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하 였다. 그러나 특히 천주교 교리서들에 있어서 많은 자료들이 公刊되지 않았으므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천주교 교리와 관련된 한문서학서를 번역, 해제하는 가운데 중국에 어느 정도 자료가 소장되어 있는지, 또한 동․서문화교류와 관련 해서 중국에서 이 분야의 연구 동향은 어떠한지 등에 관심을 갖게 되 었고, 이로써 1차년도에 중국을 대상으로 북경대학, 상해도서관, 복단 대학, 그리고 徐家匯藏書樓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것은 조선시 대에 천주교와 서양 과학 문물의 전래에 대한 조선지식인들 및 일반 민중들의 동향을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쌓는데 일조가 될 수 있을 것 으로 생각한다.
일정에 따른 구체적 방문 장소는 아래와 같다.
1. 北京市 일원: 2016년 1월 11일 - 1월 13일
1) 조선 연행사신이 방문한 천주교당: 東堂, 南堂, 北堂 2) 마태오 리치(利瑪竇)와 外國傳敎士墓地
3) 北京古觀象臺
1) 法國國家圖書館明清天主教文獻 vol.1-26, (ed. Nicolas Standaert(鍾鳴旦), Adrian Dudink(杜鼎克), Nathalie Monnet(蒙曦), 臺北: 台北利氏學社, 2009);
徐家匯藏書樓明淸天主敎文獻 vol.1-5, (ed. Nicolas Standaert(鐘鳴旦), 臺 北: 輔仁大學神學院, 1996); 徐家匯藏書樓明清天主教文獻. 續編 vol.1-34, (ed. Nicolas Standaert(鐘鳴旦), Adrian Dudink(杜鼎克), 臺北: 台北利氏學社, 2013); 耶穌會羅馬檔案館明清天主教文獻 vol.1-12, (ed. Nicolas Standaert(鐘鳴旦), Adrian Dudink(杜鼎克), 臺北: 台北利氏學社, 2002); 天 主敎東傳文獻 (中國史學叢書 24, 臺北: 學生書局, 1964); 天主敎東傳文獻續 編 (中國史學叢書 40, 臺北: 學生書局, 1966); 天主敎東傳文獻三編 (中國史 學叢書 21, 臺北: 學生書局, 1972); 『明末淸初耶穌會思想文獻彙編』제1권-제 5권 (樓宇烈 顧問, 鄭安德 編輯, 北京: 北京大學宗敎硏究所, 2003); 明末淸初 天主敎和佛敎辯論資料選, 鄭安德 編輯, 北京大學宗敎硏究所, 2000).
4) 북경대학 宗敎․哲學系 宗敎文化硏究院, 북경대학교 도서관 2. 上海市 일원: 2016년 1월 13일 - 1월 16일
1) 復旦大學 歷史系. 복단대학 도서관 2) 上海圖書館
3) 上海圖書館徐家滙藏書樓(Shanghai Library Bibliotheca Zi-Ka-Wei)
4) 徐光啓墓 등.
Ⅱ. 북경 지역
1. 北京 天主堂 방문
출장 기간은 2016년 1월 11일(월)부터 2016년 1월 16일(토)까지였 고, 동국역사문화연구소 내의 본 연구팀의 전임연구원인 필자와 장정 란 교수, 공동연구원인 대구가톨릭대학교 김혜경 교수, 그리고 연구보 조원인 신경미 양의 네 명이 동행하였다. 본 연구팀에서 연구보조원은 두 명으로, 학문 후속 세대의 양성을 고려하여 현지에서의 다양한 경 험을 쌓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매년 한 명씩 현지 출장에 참여하도록 배려하였다.
2016년 1월 11일 12시 30분 김포비행장을 떠나 11일 14시 10분 경 북경에 도착하였다. 숙소의 위치를 고려하여, 조선 지식인(연행 사 신)과 서학의 만남이 있었던 天主敎堂인 北堂과 南堂을 먼저 방문하였 다.
북당은 西什庫天主堂이라고도 하며 西安門 내 西什庫에 위치해 있는 데, 원래는 中南海의 西岸 蠶池口에 소재했었다. 프랑스 예수회 선교 사 퐁타네(Jean de Fontaney, 洪若翰) 신부가 淸 康熙帝의 학질을 고 쳐 준 공로로 하사받은 부지에서 1703년 12월 9일 開堂式을 거행하 였고 ‘救世主堂’이라 명명되었다. 강희제는 친히 ‘萬有眞原’이라는 현판 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 예수회 중국 선교 본부가 되어 왔다.
북경 교구의 제3대 교구장 포르투갈 예수회원 수자(Polycarpo de Souza: 1697-1757년) 주교가 1757년 5월 북 경에서 사망한 후, 교 구장이 없는 상태에서 1773년 7월 21일 글레 멘스 14세 교황이 「주 님이자 구속주」라는 소칙서를 반포해, 중국 선교의 개척자였던 예 수회가 해산되었다.
이에 오스트리아 출신 예수회원이면서 남경 교구장직을 수행하고 있 던 라임벡호벤(Gottfried Xaver von Laimbeckhoven: 1707-1787년) 주교2)와 당시 마카오 교구장이었던 실바(Alexandre da Silva:
1727-1779년) 주교3) 사이에 북경 교구에 대한 관리권을 놓고 대립이 일어났다.
20년 넘게 공석 상태였던 북경 교구장에 1778년 초 로마 교황청 과 리스본 궁정 사이의 합의로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사였던 살루티 (Goivanni Damase Salutti: 1727-1781년)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를 합법적인 북경 교구장 주교로 임명하는 문제로 선교사들이 두 진영 으로 나뉘어졌는데, 그를 인정한 프랑스 예수회원 3명(방타봉, 푸아로, 그라몽) 등은 북경의 西堂에서 1780년 4월 2일 살루티 주교 성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살루티 주교는 자신의 취임을 지지한 그라몽 신부
2) 당시의 교회 법규에 따라서 북경 교구의 관리는 가장 가까운 지역의 교구장 주교에게 위임되어 있었으므로 라임벡호벤 주교가 북경 교구장 서리가 될 자 격을 보유하고 있었다.
3) 포르투갈은 포르투갈 국왕에게 배타적으로 부여된 선교활동에 대한 보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북경의 포르투갈 예수회원들은 포르투갈 국왕에 속하지 않은 고위성직자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중국에 왔다.
北堂 입구의 모습
를 北堂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중에 1783년 말 조선 사신을 따라 북경에 들어온 이승훈이 북당에 찾아가 선교사들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이승훈은 예수회 철수 문제를 처리하려고 북당에 남아 있던 그라몽 신부들을 만나 교리를 배 워 세례를 받았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781년 살루티 주교가 사망하여 프란치스코회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1731-1808년) 신부가 북경 주교로 임명되어 1785년 1 월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는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로 하여금 북 당에 상주하며 예수회 선교지 사무를 접수하도록 하였다.
1785년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북당에 거처하며 선교하였는데 흠천감의 실권과 산동성(山東省)의 포교권을 장악하려는 남당 ․ 동당의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서당의 이탈리아와 북당의 프랑스 선교사들 간에 갈등을 겪었다.
1790년 초 조선 교회에서 보낸 윤유일이 북당을 찾아 갔는데, 북당 은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의 관리 하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윤유일 은 라자로회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그는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 교회의 상황을 보고하였고, 구베아 주교는 假聖職制度와 조상숭배를 금지하였다.
1820년에는 극심한 박해로 프랑스 라자로회 라미오(Lamiot) 신부4) 가 마카오로 추방되고, 1826년 10월 북당을 관리하던 포르투갈 라자 로회 세라(Serra) 신부마저 마카오로 떠나면서, 북당은 중국 조정이 점거하다가 만주족 고관에게 넘어갔지만 폐허로 변하였고 1827년 道 光帝의 명령으로 파괴되었다.
1860년 청 정부는 이 땅을 교회에 반환하였고, 1866년에 새로운 교 당이 건립되었다. 1887년 皇宮을 확장하면서 교회는 銀 45만냥을 받 고 西什庫로 이전하며, 수도원 및 고아원 등의 시설과 함께 다시 지어
4) 북경의 북당에 설치되어 있던 프랑스 선교지 장상이었다. 그는 광동성 광주로 추방되면서 세라 신부를 그의 대리로 임명하였고 중국 조정도 이를 승인하였 다.
졌다. 그리고 190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조되었다. 북당은 1860년 부터 1958년까지 북경 교구 주교가 교무를 담당해 온 곳이었다.
南堂에는 날이 저물녘에 도착하여 이미 교당의 문은 굳게 잠 겨 있었다. 다행히 관리실을 찾아 부탁을 하니 열쇄를 직접 주고 들어가 보라고 하였다. 교당의 전체적 규모는 북당에 비해 아주 작아 보였는데, 성당 안의 내부 모습은 북당과 비슷한 구조로 보 였다.
그곳에서 얻은 팜플 렛에 의하면, 남당은 속칭이고 원래 이름은 宣武門天主堂이다. 明 萬曆 년간인 1601년 마태오 리치(利瑪竇) 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이 작은 敎堂은 1650년 淸 欽天監 監 正 아담 샬(Adam Schall von Bell)에 의해 20m 높이의 바로크식 大敎堂으로 다시 건립되었다. 1652년에 준공될 때까지 順治帝는 24차례나 이곳 을 방문했고 1657년에는 “通玄佳境”이라는 친필 門額을 내렸다.
아담 샬은 직접 설계하여 교회를 건립하였는데, 신축교회는 북 경에 있는 유일한 천주교 교회였으므로 처음에는 단순히 天主堂 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1662년 東堂이 세워지자 이에 상대되는 西堂이라 칭하여졌고, 1703년(康熙 42년) 프랑스 파리외방전교 회 신부들에 의해 북경 북부에 北堂이 세워지자 아담 샬의 교회 는 남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북경의 네 번째 교회는 1723년 라 자로회 페드리니(T. Pedrini)신부에 의해 건립되어 西堂이라 하 였다.
남당은 그 후 여러 차례 훼손되고 다시 중건되었으므로 당시 南堂의 모습
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은 없다. 1775년 1월 14일 화재 로 소실되었는데, 乾隆帝의 도움으로 재건되었다. 또한 1900년 義和團 운동 때에도 북당을 제외한 세 개 천주당이 거의 파괴되 었는데, 남당은 1905년에 재건되었다. 남당은 현재 북경교구 주교 좌성당이다. 남당에서 조선인 윤유일이 1790년 견진성사를 받았다.
2. 北京大學校 宗敎文化硏究院 방문
다음날 오전 9시 40분경에 北京社會科學院 李花子 교수와 북경대학 교 인근에 있는 보야쥬뎬(博雅酒店)에서 만났다. 李 교수께서는 미리 북경대학교 종교․철학과(북경대 哲學系와 宗敎系는 통합되어 있다) 리 스롱(李四龍) 교수(불교철학전공)께 연락을 해서 함께 북경대학교 李兆 基人文學苑 2號樓 117室에서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해 놓으 셨다. 리스롱 교수는 종교․철학과 소속의 종교문화연구원 부원장이며 佛敎敎育硏究中心 主任이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얼마 후, 리스롱 교수, 종교․철학학과 청러송(程 樂松) 교수(道敎 전공), 사종핑(沙宗平) 교수(이슬람 철학과 종교학 연 구)가 참석하였고, 孫尙揚 교수(中西文化交流史, 中國 基督敎史 硏究) 는 이화자 교수께서 미리 연락해서 함께 만나기로 했으나 신병으로 참 석을 못하였다. 이 자리에서 우리들은 현재 진행 중인 연구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였고, 리스롱 교수를 비롯해 모든 분들께서 여러 측면에서 조언을 해주셨다.
리스롱 교수는 우리들의 연구가 매우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하고, 博 士生들을 비롯해서 학문적인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리스롱 교수는 鄭安德씨에 대해 설명하며, 그가 많은 私財를 들여 만든 자료집인 『明末淸初耶穌會思想文獻彙編』제1권-제 5권(樓宇烈 顧問, 鄭安德 編輯, 北京: 北京大學宗敎硏究所, 2003)을 전 달하며 이 자료를 한국의 많은 학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분야 자료 수집에 관해서 中國國家圖書館, 燕京神學院
과 金陵神學院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였다.
청러송(程樂松) 교수는, 우선 서양 선교사들의 천주교와 자연과학에 관한 지식이 조선 연행사들을 통해 조선에 전파되었는데, 어떤 선교사 를 접했는지를 확인하고, 서학에 관한 서적을 수입할 때 초기에는 抄 本일 가능성이 많으므로 원본과의 대조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하였 다. 또한, 중국 지식인의 서학 접촉과 중국 지식인들의 서학에 관한 지식이 조선에 전파되는 2차적 전파와 그 영향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 져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자료와 관련해서는 上海와 廣州市檔案館, 특히 광주시당안관은 본인이 조사했었는데, 우리 연구에 적절한 중국 에 들어온 耶穌會士 자료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광주 廣 東省檔案館과 廣東省圖書館에도 소장 자료들이 많다고 하였다. 홍콩 中文大學의 崇基神學院, 홍콩 貞信神學院에서도 같은 주제로 연구 중 인데, 동창이 그곳에서 연구 중이므로 필요하다면 연결시켜 줄 수 있 다고 하였다. 이들 연구소들은 경비도 충분하고 또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문제이므로 비용을 아끼지 않을 것이니 교류가 가능할 것이라고 하였다. 홍콩 中文大學의 邢福增 교수가 같은 분야를 연구하고 있고 동문 한 사람도 신학원 교수로 있다고 하였다. 臺灣 輔仁大學 철학과, 신학원에 소장 자료가 특히 엄청나게 많음에도 정식으로 출판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싱가폴
국립대학 명․청연구중심 ( 明 淸 硏 究 中 心 ) 에 서 도 서학서들을 연구, 번역 중임을 언급하였다.
대담을 마친 후, 리스 롱 교수는 미리 북경대 학교 도서관에 연락을 하여, 도서관 내의 고문
서실에 들어가 우리들이 수집하고자 한 문헌들의 소장 여부를 조사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그 결과 『聖敎切要』(特藏閱覽室.
마태오 리치 묘: “耶穌會士利公之墓”라고 써 있다.
왼쪽에 아담 샬, 오른 쪽에 페르비스트의 묘가 있다.
목록번호: 1981.3/2621) 는 모두 사진으로 찍었 고, 『四末眞論』(古籍特 藏室. 목록번호: 1981.2/
4601)은 통제를 받아 전 체 40면 정도에서 6면만 사진을 찍어 왔다.
점심 식사 후, 이화자
교수의 도움으로 마태오 리치(利瑪竇)와 외국전교사 묘지(外國傳敎士 墓地)를 참관하고, 이어서 북경 고관상대(北京古觀象臺)를 참관하였다.
특히, 외국인 전교사 묘지에서 마태오 리치, 아담 샬, 페르비스트의 묘 를 직접 보고 만져 보면서 많은 감회를 느꼈다.
3. 東堂 방문과 上海 도착
2016년 1월 13일 오전에 왕푸징천주교당(王府井天主敎堂) 일명 동 당(성 요셉 성당; 聖若瑟堂)을 참관하였다. 왕푸징 거리에 위치해 있는 이 성당은 원래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선교사가 살던 곳이었다. 이탈리 아 선교사 불리오(Lodovico Buglio, 利類思; 1606-1682년)와 포르투 갈 선교사 마갈라스(Gabriel de Magalhães, 安文思; 1609-1677년)가
명말에 四川에서 전교 하다가 淸軍에게 포로 로 북경으로 잡혀와 肅王府에서 일을 돌보 았다. 후에 이 두 선교 사는 신도들을 위해 집을 사서 작은 敎堂 으로 삼았다. 順治帝는 즉위 후, 아담 샬을 임 東堂
北京 古觀象臺
용해 欽天監을 맡게 함으로써 천주교는 보호를 받게 되었다. 순치12년 (1655년) 순치제는 불리오와 마갈라스에게 주택을 주어 머물게 하였 는데, 그곳이 바로 오늘날 동당의 소재지이다. 두 선교사는 이곳에 동 당을 세웠다. 동당은 1720년의 지진과 1807년 화재로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었다. 1900년 의화단 운동 때 다시 불탔으나 1905년 重修되었 고, 이것이 현재 우리들이 보는 동당이라고 한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도 견뎌 내었고, 그후 천주교 북경 교구에 반환되었다.
동당을 참관한 후, 북경을 떠나 오후 20시에 상해 홍챠오 공항에 도 착하였다. 공항에서 남경대학 한국어과 尹恩子 교수의 제자 다이린졘 (戴林劍) 학생과 만났다. 그의 안내로 21시 40분경 復旦대학 인근의 옌위안빈관(燕園賓館)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복단대학까지 가는 지하 철 노선이 있어서 큰 불편 없이 갈 수 있었다. 도착 즉시 복단대학교 역사계(歷史系) 류핑(劉平) 교수와 통화하여, 다음날 오전 09:30에 류 핑 교수 연구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Ⅲ. 상해 지역
1. 復旦大學校와 徐家滙藏書樓
2016년 1월 14일 오전에 류핑 교수와 면담하였다. 이미 메일로 필 자 일행의 방문 목적을 잘 알고 있는 류핑 교수는 復旦大 哲學學院宗 敎學系의 리톈강(李天綱) 교수와 우리의 만남을 주선하고자 했지만 사 정이 여의치 않았다. 류핑 교수의 제자인 박사연구생 장차오(張超)가 동행하며 복단대학교 도서관에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자료를 검색했으 나 찾지 못하였다. 이후 장차오는 우리와 계속 동행하며 도움을 주었 다.
복단대학교 학생식당에서의 점심 식사 체험은 아주 신선한 것이었
다. 식사량, 가격 및 위생이나 모든 면이 수수하고 내실이 있었다. 류 핑 교수께서 의도적으로 그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된다.
전철을 타고 상해도서관에 가서 류핑 교수의 사촌 여동생인 차오잉 의 도움으로 상해도서관 고적실에서 검색했으나 찾고자 한 서적들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전철을 타고 上海圖書館徐家滙藏書樓(Shanghai Library Bibliotheca Zi-Ka-Wei)를 방문하였다. 서가회장서루는 상해 도서관에 소속되어 있고 “上海圖書館 中西文化交流硏究資料中心‘이라 는 명패가 붙어 있다. 류핑 교수께서 미리 장서루의 담당자에게 연락 해 주셔서 출입이 허락되었다.
서가회장서루에 소장된 서적들은, 우리들이 알기로는, 공산화되면서 필리 핀으로 옮겨졌고, 후에 다시 대만으로 반입되어 현재 서가 회장서류에는 별반 찾을 만한 것이 없 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찾고자 한 자료들을 검색 한 결과, 서가회장서루 담당직원인 쉬진화(徐錦華)는 장서루에 모두 소 장되어 있음을 확인해주었고 목록 번호까지 알려주었다. 다만, 쉬진화 (徐錦華)씨는 도서관이 현재 자료들을 정리 중이라 보여 줄 수 없고, 복사 가능 여부와 비용에 대해서는 4-6개월 뒤에나 알려주겠다고 하 며, 자신의 메일 주소를 필자에게 알려주고, 필자의 명함을 달라고 하 였다. 그는 명함에 있는 메일 주소로 상황을 알려주겠다고 하였다. 그 에게 명함을 주고 가능하면 빨리 알려 줄 것을 부탁하고 돌아왔다. 장 서루에는 아마도 많은 서적들이 여전히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 며, 이곳에서도 한문서학서 영인본 전집을 낼 계획이 있는 것으로 보 였다. 저녁에는 류핑 교수께서 만찬을 베풀어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徐家滙藏書樓
가질 수 있었다.
2. 徐家滙天主堂과 徐光啓 墓
다음날 상해 와이탄을 거쳐 서가회천주당, 서광계기념관, 서광계 묘 소 등과 인근 문화 유적지들을 방문하였다. 서가회천주당은 현재 天主 敎 上海敎區 主敎座 성당이다. 徐家滙聖依納爵主敎座堂(St. Ignatius Cathedral)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일행이 방문했을 때에는 대대적인 수리 중이어서 개방되지 않았다. 보기에도 굉장히 큰 규모였는데, 본 당에는 한꺼번에 3천명의 신자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 옆에는 天主敎上海敎區 主敎府 건물이 높이 서 있다.
徐家滙는 徐씨 가문이 이곳에서 모여 살았으므로 붙여진 명칭으로, 17세기에 중국 그리스도교 포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서광계 (1562-1633년)의 저택
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 다. 그는 서양의 학문과 과학 기술을 중국에 수용 한 중서문화교류의 선구 자 중 한 사람이며, 李之 藻(1565-1630년), 楊廷 筠(1577-1627년)과 함 께 중국 천주교의 3대 柱 石으로 그리스도교가 중 국에 뿌리내리는데 지대 한 공헌을 하였다.
1603년 세례를 받은 서광계는 1607년 부친상 을 당해 상해로 귀향하여 자택에 說敎所를 열고 전
徐家滙聖依納爵主敎座堂
서광계 묘 입구의 牌坊
교에 주력하여 이 해 말 카타네오(郭居靜) 신부는 200여 명에게 세례 를 주었다. 그 후 서광계는 설교소 서편에 상해 최초의 성당 徐家匯天 主敎會를 건립하였다.
서광계의 묘소도 인상에 남는 곳이었다. 현재 중국인들이 서광계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 된다. 입구에 돌로 세운 牌坊이 있는데, 문이 세 개로 되어 있다. 가운 데 문 위에는 “文武元勳”, 왼쪽 문 위에 “王佐儒宗(帝業의 성취를 보 좌한 대학자)”, 오른쪽 문 위에 “熙朝元輔(명나라 정치를 크게 일으킨 重臣)”라고 새겨져 있다. 그 안쪽으로 좌우 양편에 石像들이 배열되어 있고, 묘 앞에 대리석으로 된 큰 십자가상이 세워져 있다. 그 십자가 의 사각형 기단의 정면에는 라틴어 碑文이 나머지 삼면에는 馬相伯(馬 良)5)이 쓴 “徐文定公墓前十字記”가 새겨져 있다.
그 주위에는 徐滙區 人民政府가 세운 서광 계의 雕像이 있는데,
“明代科學家徐光啓”라 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또한 徐光啓紀念館, 徐 光啓召解碑廊 등이 공 원과 함께 배치되어 있 었다. 이 모든 것들은 徐家滙觀象臺, 聖母院舊址, 徐滙公學舊址, 交通大學, 土山灣博物館 등 과 어우러져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깊이를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저녁에는 우리 일행이 답례로 류핑 교수와 제자들에게 만찬을 마련 하여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류핑 교수는 앞으로 우리의 연구
5) 馬相伯(1840-1939년): 원명은 建常. 字 相伯(후에 良으로 개명). 천주교 세례 명은 요셉(若瑟). 근대 중국의 유명한 교육가, 정치활동가이며 천주교 신부이 다. 震旦學院, 復旦公學(復旦大學의 전신), 輔仁大學의 창시자이다.
서광계 묘 앞의 十字聖架
성과가 복단대학교와 상호 교류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Ⅳ. 이후의 연구와 관련된 제언
필자가 이 분야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管見이지만, 우리 학계가 臺灣이나, 이탈리아 및 프랑스 등은 물론이고 중국의 학 문적 성과나 연구 동향에도 관심을 갖고 그로부터 학문적 성과나 자료 들을 유입하는데 힘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 교회의 역사나 조선 후기 천주교나 서양 문물의 유입에 대한 지식층이나 민중 의 대응 등에 대해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 각 지역의 연구집단과의 국제적인 네트워크의 형성을 통한 교류 시도도 이루어져 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번 중국 방문을 통해서 필자가 알게 된 西學에 대한 전문 연구자 로는, 북경대 철학․종교학과의 孫尙揚 교수, 복단대 哲學學院宗敎學系 의 李天綱 교수, 중국역사지리연구소 周振鶴 교수6)가 있다. 위에서 程 樂松 교수가 말한 바처럼, 臺灣 외에 홍콩 中文大學과 싱가폴 국립대 학 연구소에서의 연구 동향도 관심을 기울여 봐야 할 것이다.
중국 본토에서도 서학서 영인본들을 출간하고 있고, 앞으로 같은 문 헌들이 계속 출간될 것으로 보인다.7) 류핑 교수는 학술 교류차원에서 우리들의 연구 결과를 복단대학에서 발표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 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작업이, 명말․청초 시기에 예수회 선교사 를 통해 크게 일어난 동․서문화교류 현상이 그 이후에 전개된 서구 열 강들에 의한 강제적인 문호 개방의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에는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6) 周振鶴 主編, 紀志剛 董少新 等校点, 『明淸之際西方傳敎士漢籍叢刊』(南京:
鳳凰出版社, 2013) 第1輯-第6輯.
7) 張西平, 任大援, 馬西尼 等主編, 『梵蒂岡圖書館藏明清中西文化交流史文獻叢 刊』(大象出版社, 2014.8; ISBN: 9787534776021) 第一輯(第1冊-第44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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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Exploration of Historic Sites Related with Western Learning of Joseon Period
―Beijing and Shanghai Areas in China―
Song, Yoo Who
From September last year(2015), our Institute has run a project on "Translation and Introduction of the Western Learning(西學) Materials from Joseon Dynasty". The project is deeply related with missionaries of Society of Jesus(S.J.) in Ming-Qing period who came to China to write and translate the catechism of the Catholicism and scientific books in Chinese.
Our researchers visited historic Cathedrals in Beijing where Joseon diplomatic corps to Beijing went to meet western missionaries to get materials on western learning, the Institute for the Study of Religion(Peking University), Fudan University Library, Shanghai Metropolitan Library, and Bibliotheca Zi-Ka-Wei from 11th Jan. to 16th Jan. 2016.
Especially, it was very impressive that materials that we hoped to find have been housed in Xujiahui Bibliotheca. We are very pleased to know Xujiahui Bibliotheca Catalog Card Numbers of the materials, because we thought that it would be impossible even to access to the Bibliotheca. I think that it is also a great outcome to get instructive advices and invaluable materials from
professors of Peking University. An even more important outcome is that we could get information on how the research on this area is carried out in China, Hong Kong, Taiwan and Singapore.
If possible, in later years we hope to hold an international academic conference to invite foreign researchers in this area from those countries, and that all these academic activities prepare the ground for better understanding on movements of Korean intellectuals and the masses in the period of open-door under pressure of western powers.
주제어 : 서학, 예수회, 조선연행사, 서가회장서루, 동서문화교류 關鍵詞 : 西学, 耶稣会, 朝鲜燕行使, 徐家滙藏书楼, 东西文化交流
Keywords: Western Learning, Society of Jesus(S.J.), Joseon Diplomatic Corps to Beijing, Bibliotheca Zi-Ka-Wei, Cultural Exchange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원고접수: 2016년 4월 4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6년 4월 15일, 수 정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