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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풍속화에 관한 연구 - 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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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월 석사학위 논문

조선 후기 풍속화에 관한 연구

조선대학교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나 혜 은

[UCI]I804:24011-200000233159

(3)

조선 후기 풍속화에 관한 연구

A StudyOnTheLateJoseonGenrePai nti ngs

2006년 2월 24일

조선대학교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나 혜 은

(4)

조선 후기 풍속화에 관한 연구

지도교수 조 송 식

이 논문을 미학미술사학 석사학위신청 논문으로 제출함

2005년 10월 18일

조선대학교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나 혜 은

(5)

나혜은의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위원장 미 술 대학교 교수 김승환 위원 미 술 대학교 교수 조송식 위원 미 술 대학교 교수 장문호

2005년 12월 09일 석사

조선대학교대학원

(6)

차 차 차 차 례 례 례 례

ABSTRACT‥․………6

제1장 서론‥………7

제2장 조선 후기 풍속화의 경제와 사상적 배경………․13

제1절 경제적 측면…………․………‥․13

제2절 사상적 측면………․………‥․18

제3장 조선 후기 회화사적 배경………‥24

제4장 조선 후기 회화와 풍속화의 관계………‥33

제1절 문인화와 풍속화의 관계(속화)‥………‥………

33

제2절 기록화와 풍속화의 관계․………‥………

․48

제3절 궁중화원과 풍속화의 관계․………‥………

53

제5장 결론…․………․61

참고문헌………․․63

부록………‥

70

(7)

Na Hye-eun

Department of Aesthetics & Art history Graduate School of Chosun University

ABSTRACT ABSTRACT ABSTRACT ABSTRACT

The purpose of thesis is to look into the Genre Painting styles of the late Joseon era. Many scholars have mainly focused on Painting's style or, in contrast, only on history and the context of paintings. Although ideology history has developed even in psychological aspects, people have been unaware of it. This thesis deals with influence and correlation among the context of society, study, and paintings.

These three categories approach the late Joseon Genre Paintings in various, integrated forms. Because the Genre Painting has been changed along with different ages and related to national structures which are easily divided.

There are compared with Wen Ren hua(文人畵), documentary paintings(記

錄畵), and court painters(宮中畵員) to study Genre Paintings. The

conclusion, being in accordance with comtemporary philosophy and art

history, is a manifestation of a national consciousness and should be

evaluated in this context.

(8)

제 제 제

제 1 1 1 1 장 장 서론 장 장 서론 서론 서론

조선 후기 풍속화는 중국회화의 직접적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의 실제 생활 모습

풍속

풍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중국식의 산수화풍에서 벗 어나 우리의 자연경관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던 진경산수화와 함께 우리나라 회화가 도달한 독자적 경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1)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서 민과 서민의식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막연하게나마 실학의 발달과 연관짓는 경향이 있었고,2) 겸재 정선, 공재 윤두서, 관아재 조영석 등 사대부화가의 주도적 역할에 주목하여 그 출현이 진경산수화와 마찬가지로 조선성리학과 조선의 문화자존의식을 배경으로 하는 것임을 밝힌 견해가 제 기되었다.3) 풍속화의 소재와 기법을 조선 전 기간에 걸쳐 성행하였던

‘계회

도’라든가

‘아회도’나 ‘빈풍칠월도’[그림1,2참조], ‘무일도’[그림3참조]와 연결

지어 보려는 시도가 있는가 하면,4)

‘패문재경직도[그림4-11참조]’등 중국화

본의 경직도 계열 화풍과의 유사성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5)

안휘준과 이동주는 각각 한국회화사론과 한국 회화사로 풍속화의 장르만이 아니라 한국회화사를 연구해 왔다.6) 근래에 와서 다시 출간한 안휘준은 한국 회화사 연구에서 책의 목차가 보여주듯이 그동안 저자가 우리나라 회화에 관 하여 써 온 논문들은 시대적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말기 까지, 주제나 내용 상으로 총론적인 것으로부터 세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즉 저자 한 사람이 시대와 주제를 가리지 않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음이 드러난다.

이는 저자가 우리나라 회화사 전문 연구자가 매우 드물던 시기에 활동을 시 작하였던 데에 기인한 결과임을 부인하기 어려웠다.7) 그렇기에 회화사 전반 도 그렇지만 풍속화만의 개성과 특성을 살리기에는 연구의 깊이 면에서 부족

1) 유봉학, 「조선후기 풍속화 변천의 사상적 배경」, 『진경시대』, 돌배개, 1998, p. 217.

2) 이동주, 『우리나라의 옛그림』, 박영사, 1975 ; 안휘준, 「한국풍속화의 발달」, 『풍속화』,

『한국의 미 』19, 중앙일보사, 1985 참조.재인용

3) 최완수, 「겸재 진경산수화고」, 『간송문화』21 ․ 29 ․ 35, 1981~1988 ; 「겸재정선 진경산수 화」, 범우사, 1993 참조. 재인용

4) 홍선표, 「조선시대 풍속화 발달의 이념적 배경」『풍속화』, 『한국의 미』19, 중앙일보사, 1985.

5) 정병모, 『패문재경직도의 수용과 전개 - 특히 조선조 후기 풍속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6) 안휘준, 『한국회화사』, 일지사, 1990, 이동주, 『한국회화사론』, 열화당, 1971.

7) 안휘준, 『한국회회사 연구』, 시공사, 2000, p.12.참고

(9)

하였다. 또한 이동주의 한국회회사론에서는 한국 회화사를 가능한 그림 자체 를 기준으로 쓰려했기 때문에 그림의 미에 대한 그 시대의 기준을 중심으로 적어내려 가고 있다.8) 또한

1990년 초 ․

중반에 이들이 엮었던 한국회화사

한국회화소사 등을 바탕으로 한국회화사 연구9)

우리나라의 옛 그림 등이 각각 씌워졌다. 그러므로 이들의 연구가 풍속화에 대한 자료 및 탐구면 에서 도 불충분함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는 모든 분야에서 다양한 흐름이 혼재된 시대였다. 서양과학과 문 물이 전래되고 실학이 대두되는 등 전통적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진보적 사상이 배태되는 시기였다. 화폐와 상품경제의 발달로 봉건적 신분제 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평민 의식도 점진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래 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이전과 다른 변화가 나타났 다.10) 여기서 서양문물의 영향에 대해서는 크게 논하지 않겠다.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

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였던 실학의 대두와 변천은 동시대 미

술의 추이와 유사함을 보여준다.11) 또 이러한 여러 가지 시대적 배경 하에서 후기의 회화는 일반과 보다 가까워졌으며, 아울러 서민문학의 경우와 마찬가 지로 꾸밈없는 애정과 감정의 표현을 미술에서도 가능하게 했는데 이는 전에 없던 일로 괄목할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시대에는 자아 를 발견하고, 생활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소재를 택하여 한국적 미술을 형 성하였다는 점이다.12)

풍속화에는 일상적인 삶이 드러나기에 조선 후기 풍속화에 우리가 주목하 는 것은 사실주의적 화풍에 드러난 한국적 개성, 주체적 자기인식의 흔적 때 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풍속화가 우리나라 회화사 속에서 정당하게 자리 매김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화법이나 화론적인 접근만이 아니라 그 배경에 대한 사회사상사적인 접근이 함께 요청된다.13)

한국의 회화사에 대한 이해와 회화와 더불어 사회가 같이 하였던 분위기를 깊이 있게 나눠가기 위한 바탕으로서 앞선 학자들의 연구를 뒷받침 하지 않 을 수 없다. 특히 그 동안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진경산수화의 출현에 대한

8) 이동주, 『한국회화사론』, 열화당, 1971.

9) 안휘준, 위의책, 이동주, 『우리나라의 옛그림』, 학고재, 1995.

10) 김희정, 『조선 후기 회화에 사실성 연구』, 전북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논문, 2002, p.1.

11) 실학의 의의에 관하여는 全海宗, 『한국연계사 연구』(일조각, 1981), p.116~185; 조선후기 실 학의 발전에 관해서는 『한국사』14(국사편찬위원회, 1975), p.125~364 참조. 재인용

12) 안휘준, 위의 책, p.643.

13) 유봉학, 위의 책, p.218.

(10)

사상적 배경과 풍속화의 시대사적 관련성에 대하여 상당한 논의가 있었기에 조선 후기 회화에 나타나는 변화와 사상의 연계성에 대한 논의에서 각기 다 른 주장들이 피력되고 있다. 또한 작품의 내면 해석과 외양에 대한 구조적 접근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연구는 작가 중심이거나 시대 중심의 평면적 분석에 그쳤으며,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사상사적 흐름과 작품 자체에 대한 외양 분해를 연계시키는 구체적인 접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시대 에 따라서 작품이 지니는 사상은 주변의 사상사적 문헌을 중심으로 연구될 수 있지만, 작품의 형식적 특징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작가 자신의 생각과 함 께 작품의 조형 의지가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 다.14)

다만 필자는 조선 후기의 사회적 변화와 학문 즉 사상적 측면을 다루어 풍 속화가 번성하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나아가 그 시대 회화적 경향 속의 풍 속화의 영향력과 그 안에서 드러나는 사회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유봉학은 풍속화의 변천을 세 시기로 나누어, 숙종대부터 영조대 전반까지 를 풍속화가 등장하였던 시기, 영조대 후반부터 정조대까지를 풍속화가 유행 하였던 시기 그리고 순조대 이후를 풍속화의 변모기로 보았다.15) 이와 비슷 하게 필자도 역사적 의미로써 각 시기별 사회상과 사상적 동향을 관련시켜 회화사의 의미를 부각시켜 보려 한다. 이를 위해서 화법 면에 치우쳤던 안휘 준외의 한국의 미

19권의 『풍속화』

16)

,

이태호의

『풍속화』

17)

,

조선 후기 회화에 사실성을 사상적으로 본 이태호의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

18) 과 김희정의

『조선 후기 회화에 사실성 연구』

19)를 참고 하겠다.

회화 양식에 관해서

『신판 한국미술사』

20)가 회화 부분을 보강하였고,

『진경시대 Ⅰ․ Ⅱ』

21) 등이 있다. 『진경시대

Ⅰ․ Ⅱ』는 조선 후기 진경산

수화나 풍속화들이 당시의 사상적 조류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고 판단하면 서 회화 부분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까지도 예를 들어 그 시기 전체를 진경시 대로 설정해 설명하려 했다. 주로 조선 시대 사상사 학자들과 연대하여 사상

14) 김희정, 앞의 글, p.2~3 참조.

15) 유봉학, 앞의 책, p.218.

16) 안휘준외, 『한국의 미 19- 풍속화』, 중앙일보사, 1985.

17) 이태호, 『풍속화 1』, 대원사, 1995, 『풍속화 2』, 대원사, 1996. 01. 05.

18) 이태호,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 학고재, 1996.

19) 김희정, 『조선 후기 회화에 사실성 연구』, 전북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논문, 2002, 08, 22.

20) 김원용 ․ 안휘준, 『신판 한국미술사』, 일지사, 1993.

21) 최완수외,『조선 왕조의 문화 절정기, 진경시대 1. 사상과 문화』, 돌베개, 1998.

최완수외,『조선 왕조의 문화 절정기, 진경시대 2. 예술과 예술가들』, 돌베개, 1998.

(11)

과 예술분야를 접목하고 미술현상을 사상에서 유출한 점은 높이 평가 되고 있으나, 회화 부분 밖의 다른 많은 부분가지를 진경 시대로 일반화 한 것은 지나치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아울러 작품 분석과 제작 기법 연구에 치중 한 국립박물관 계열과 민중예술 총연합 산하 민족미술 협의회 계열, 진경산 수화는 중국 시대 실경 산수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홍익대 계열 등이 있다.22) 앞서 언급한 진경시대는 조선후기 풍속화가 성행했던 시대이므로 필 자에게도 의미가 매우 크다.

더욱이 통속주의부터 시작하여 역사와 화법 그리고 사상까지 두루 살폈던 정병모의

『한국의 풍속화』

23)와 화원층을 객관적 자료로 본 강관식의

『조

선 후기 궁중 화원 연구』24)등 이들 연구를 적극 반영 하지 않을 수 없다.

유봉학의

『조선 후기 풍속화 변천의 사회 ․

사상적 배경』25)에서 중국풍의 묘사에서 벗어나 우리나라의 의관풍물과 일상적 풍속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 고자 하였던 사실적 회화정신의 출현과정, 사인의 여러 생활모습은 물론 일 반 민의 일하는 모습까지도 감상의 대상으로 화폭에 올리게 되었던 영조

정 조

순조대의 화가의 작화의식과 이 같은 의식을 낳았던 문예관이나 사상의 궤적, 그에 대한 감상 및 수요층의 문제, 그리고 정조대 이후 화면에 등장하 여 그 이후 노골화되는

‘속태’ ․ ‘색태’의 시대적 의미 등이 풍속화의 성격

규 명에 선결과제로 삼아 필자와 논의 하고자 하는 방향이 같았다. 하지만 서술 하는 과정에서 그가 언급했던 사회상과 제반 문화현상, 그리고 사상적 동향 을 폭넓게 관련시킴26)은 기술 하는 면에서 다르다. 게다가 필자는 조선후기 회화에 있어 풍속화의 발전 성향에 대해 문인화와 속화

기록화와 서민풍속 화

궁중화원과 풍속화의 관계를 차례대로 살펴볼 것이다. 조선 후기 풍속화 는 쇠퇴하였고 그 이유에 대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학자들이 말하여 왔던 부분들에 대해 일부를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유봉학은 풍속화의 유행에서 조선사회를 이끄는 위치에 서게 되었던 서울의 경화사족에서부터 새로운 사상적 지향을 모색하였다. 또한 춘화가 나온 이유 를 풍속화의 화풍을 통하여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감상자들이 여기서 추구하는 관심과 흥미는 앞 시기와 달라져 있었다27) 하여 신윤복 등의 그림

22) 김희정, 『조선 후기 회화에 사실성 연구』, 전북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논문, 2002, p.5~6.

23) 정병모, 『한국의 풍속화』, 한길아트, 2000.

24) 강관식, 『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 상(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을 중심으로)』, 돌베개, 2001.

25) 유봉학, 『조선후기 풍속화 변천의 사상적 배경』, 진경시대, 돌배개, 1998.

26) 유봉학, 앞의 책, p.218.

27) 유봉학, 위의 책, p.244.

(12)

이 추구하는 분방한 색태를 풍속화가 나아가던 변화의 방향성으로 여겼다.

필자는 풍속화가 쇠퇴했던 원인으로 뿐만 아니라 회화사의 한 부류로 속태나 색태를 정랄 하게 표현한 작품에 대해서 논하지 않을 것임을 밝힌다.

한 편에는 이태호가

『조선 후기 회화의 사실정신』에 수록되어 있고 이미

월간미술에

1993~1994년에 걸쳐 연재물로,

또 위에서 언급한

『풍속화』에

도 나오는

「조선 후기 풍속화의 유행과

퇴조」가 있다. 유행하였던 부분은 김홍도에 대한 내용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그와 더불어 신윤복 그리고 김득신 등의 작가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그가 보는 풍속화는

19세기 화단에서 선

비 화가의 풍속화가 급격히 줄어든 풍속화의 쇠잔과도 유관하다.28) 그 또한 쇠퇴의 이유를 춘화의 확산으로 보고 타 풍속화에 관한 연구에 비해 많은 자 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29) 더불어 그는 뒤이은 작가들의 역량부족을 탓하기 도 하였다.30)

조형된 모든 것은 양식을 갖추고 있다. 회화 작품을 포함한 모든 조형물들 은 표현 양식을 갖추기 위하여 그 때 그 때 적절한 방법이 모색되는데 그 과 정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양식에 대한 견해는 재료

기술

실리성과 같은 물질적 조건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예술 유물론적唯物論的 접근과 각 시대 또는 민족 특유의 예술 의욕의 성과로 보 려는 경향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후자는 예술 발전의 내재적 자율성內在的

自律性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의 양식은 전 일체全一體이며 종합적綜合的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표현양식 분석에 대한 견해가 각기 다를 수 있다. 최근 조선 후기 회화 양식의 변화에 대한 다양한 문제나 해석이 제기되는 이유도 그것이 당시 복합적인 시대 사조時代 思潮에 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실학에 대한 연구 성과 는

1950년대 실학의 개념 정리를 위한 논쟁을

거처 어느 정도 마무리 되어 있다. 실학에 대한 연구는 윤사순(1997)31)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199

28) 이태호, 위의 책, p.267.

29) 이태호, 『풍속화 1』, 대원사, 1995.;, 『풍속화 2』, 대원사, 1996.

30) 18세기 후반 김홍도에서 19세기 1810년대의 김득신과 신윤복으로 이어진 풍속화는 농업 중심의 사회상에서 도시문화로의 변화를 담으면서 형식미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사회변화에 대한 회화 적 수용은 근대적 사실주의를 지향하는 것이었고, 당대의 삶을 그리는 풍속도의 고전적 전형은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다. 그 전형은 19세기 중엽 이후 향수층의 증가와 함께 계승되었다. 그 런데 대부분 새롭게 변화되는 사회상을 포착하기보다 답보적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또 신윤복 이나 김득신처럼 풍속화가라고 할 만한 작가도 배출하지 못하였다. 이태호,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 학고재, 1996, p.260-p.261 참조.

31) 윤사순, 「탈성리학적 실학」, 『한국유학사상론』, 예문서원, 1997.

(13)

5)

32)

,

이우성(1980)33)등 이 있다. 또한 동양화의 사실적인 표현 기법에 관 한 한국 문헌은 동양화론의 원문을 인용한 원갑희(1976)의

『동양화론선』

과 김종태(1981)의

『동양화론』

34)

,

이동주(1987)의

『한국회화사론』

35)

,

안휘준(1983)의

『한국회화사』

36)등이 있다.37)

필자가 의도한 글은 회화사에 대한 작품경향에 치우치지 않고, 더군다나 사 상적으로 기울여지지 않는 연결 고리를 찾아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러 책 들을 인용하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한 가지 학문의 깊이 면에서는 서툴거나 다소 부족한 점이 있다. 이 논문을 통해서 회화가 결코 시대를 떠나 나타나 지 않았고, 사상에 끼친 회화의 영향력을 확인 할 수 있다.

32) 윤사순, 『실학 의미의 변이 -민족문화연구 28-』,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95.

33) 이우성, 『실학연구서설』, 일조각, 1980.

34) 김종태, 『동양화론』, 일지사, 1981.

35) 이동주, 『한국회화사론』, 열화당, 1971.

36) 안휘준, 『한국회화사』, 일지사, 1990.

37) 김희정, 앞의 논문, p.4~5.

(14)

제 제 제 제 2 2 2 2 장 장 장 장 조선 조선 조선 조선 후기 후기 후기 후기 풍속화의 풍속화의 풍속화의 풍속화의 경제와 경제와 경제와 경제와 사상적 사상적 사상적 사상적 배경 배경 배경 배경

제 제 제 제1 1 1 1절 절 절 절 경제적 경제적 경제적 측면 경제적 측면 측면 측면

조선 후기는 문예 부흥기로써 그 절정기를 진경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조선 후기를 살펴보는 것에 있어서는 진경시대라 일컬어 서술되어 지는 문화가 최완수 외38)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 쓰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경시

대’는 시기적으로 조선후기에 속한다.39)

진경시대는 조선 후반기로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에 해당되므로

40) 풍속화 가 포함된 시기이다. 17세기 중엽 이래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농촌경제의 변 동, 이에 따른 농업과 공업의 분리, 농촌 수공업의 부분적인 발전, 관영이 수 공업과 광공업의 민영화 움직임, 시전상업체제의 붕괴와 상품화폐경제의 발 전, 그리고 임진왜란 후 봉건정부의 복구정책과 경제 변화에 따른 대동법, 균 역법 등의 새로운 조세정책에 의하여 중세 봉건경제는 크게 변동하는 가운데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진경시대는 중세 봉건사회의 어느 시 기보다도 경제가 성장하여 나라 전체로 보면 상당히 넉넉한 시대였다.41)

조선 시대에 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 구성원의 신분은, 사

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사는 지배 계층으로 양반 사족들이 이에 해 당되며 그 외 농

상은 피지배 계층인 서민에 해당되는 데, 서민의 대다

38) 강관식, 「조선 후기 진경풍속의 자생적 지평」, 『한국미술의 자생성』, 한길아트, 1998.;동,

「진경시대 후기 화원화의 시각적 사실성」, 『간송문화』49, 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95.;동,

진경시대 초상화 양식의 이념적 기반」,『조선 왕조의 문화 절정기, 진경시대 2. 예술과 예술 가들』, 돌베개, 1998. 방병선, 「진경시대의 백자」, 앞의 책. 이세영, 「진경시대의 사회경제 적 변화」『조선 왕조의 문화 절정기, 진경시대 1. 사상과 문화』, 돌베개, 1998. 정병삼, 「 경시대 불교의 진흥과 불교문화의 발전」, 앞의 책. 정옥자, 「조선 후기의 문풍과 진경시문 」, 앞의 책. 최완수, 「겸재진경산수화고」, 『간송문화』21293545, 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81198519881993.;, 「겸재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 화풍」,『조선 왕조의 문화 절정기, 진경시대 2. 예술과 예술가들』, 돌베개, 1998.

39) 조선후기 풍속화에 대한 이해에 따르는 절정기와 융성기의 구분이 학자에 따라 영 ․ 정조와 정

순조로 나뉜다. 영 ․ 정조를 조선 후기 풍속화의 절정기로 본 이세영, 「진경시대의 사회경제 적 변화」『조선 왕조의 문화 절정기, 진경시대 1. 사상과 문화』, 돌베개, 1998. 유봉학, 「조 선후기 풍속화 변천의 사상적 배경」, 『진경시대』, 돌배개, 1998, p. 218. 정 ․ 순조때를 융 성기로 본 정병모, 『한국의 풍속화』, 한길아트, 2000.;강관식, 『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 상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을 중심으로)』, 돌베개, 2001.

40) 이세영, 「진경시대의 사회경제적 변화」『조선 왕조의 문화 절정기, 진경시대 1. 사상과 문 화』, 돌베개, 1998, p.195.

41) 이세영, 앞의 글, p.195.

(15)

수는 농민이었다. 조선 후기에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게 된 주요 요인 은 임란 이후 농지 개간에 따른 부의 축적이 이루어 졌다는 것과 농업 기술 의 발달과 그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를 들 수 있다. 농업 기술의 발달은 곧 생산력의 증대와 결부 되어 서민들의 경제생활에 밀접하게 작용하였다.42)

당시 신분 간 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상민과 노비가 양반으로 올라감에 따라 상민과 노비는 점차 줄어드는 대신 양반은 늘어나고 있었다. 즉 봉건적 신분구조가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나 반촌보다 농촌촌락에서 신분 이 동은 더 심해서 양반은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엽 이후가

되면 양반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평민, 노비 순이었다. 노비와 평민이 평민 과 양반으로 신분 상승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18세기 전반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울산부

호적 분석에 의하면, 양반은

1/5에서 2/3로 크게

늘고, 평민은

1/2에서 1/5로,

노비는

1/3에서 1/6로

줄어들었다. 진경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봉건적인 신분구조가 이미 무너져서 가장 많은 양반을 상층으 로 한 역삼각형의 신분구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상공업이 발전해 가고 있었지만 경제의 주축은 여전히 농업이었다. 쌀, 보 리, 콩 등 중심의 곡물생산 농업은 일차적으로 경지규모에 의존하였다. 전체 토지 면적은 세종대에

160여만 결이었고,

임진왜란 직전에

150만여 결이었

다. 그러나 이미 황무지가 되어 버렸거나 토사에 묻혀 버린 전답, 묘지가 들 어섰거나 숲이 무성해진 곳을 제외한 실제 경작지는 전체 토지면적의 약

70~80%

수준으로

100만~ 120만 결 정도였다.

그런데 임란으로 인구가 감 소하고 전국토가 황폐화되었다. 토지에 대한 수세장부가 소실되고, 주인 없는 진황지가 광범위하게 발생함으로써 정부는 재정위기를 맞고 있었다.

인조는 즉위 초부터 호패43)법 시행과 양전44) 실시를 촉구하였다. 양전 추 진은 대동법45) 실시를 위해서도 절실한 과제였다. 그리하여 이전의 양안量 案46)을 보완하고, 수제장부에서 빠진 토지 즉 은루결을 조사하고, 그동안 진 황지 가운데 개간된 토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1634년 삼남을

포함한 도별 양 전을 실시하였다. 전란의 피해가 완전히 복구되었다고 판단하고 임란 이전의 토지면적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갑술양전으로 삼남 지방에서 새로 파악된

42) 김희정, 앞의 글, p.40.

43)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닌 패.

44) 고려 ·조선 시대 토지의 실제경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실시한 토지측량 제도. 45) 조선시대 선조 이후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46) 지난날, 논밭의 소재(所在)·자호(字號)·등급·면적·사표(四標)·소유주 등을 기록한 책. 오늘날 의 토지 대장과 같은 것. 전적(田籍).

(16)

은루결은

188,695결이었고,

진전은

354,629결이었다.

그리하여 갑술양전으로 파악된 삼남의 토지면적은 사실상 임란 이전의 수준을 회복한 것이었다. 이 후 정부의 주된 관심사는 방대한 진전의 개간을 촉진하고, 그 결과인 신기전

환기전을 파악하는 것과 소규모로 개간된 화전, 그리고 목장지

저습지

해택지 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또한 토호들의 은루결 색출을 위해서도 양 전은 계속되어야 했다.47)

이 시기의 농촌경제는 크게 변동하고 있었다. 그 계기는 우선 농업생산력의 발전이었다. 논농사의 경우 조선 초에 경상도 북부의 일부 지역, 그리고 강원 도 동해안 일부 지역에서만 조금씩 실시되었던 이앙법48)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하삼도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이 같은 이앙법의 일반화는 수리시설의 확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란 이후 제언堤堰49)의 복구와 신축, 보의 수축 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보는 작은 하천 혹은 개울을 가로질러 둑을 쌓아 물을 저장하는 것으로 천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조대에는 수리시설과 수 리문제가 최대의 현안으로 논의될 정도였다. 18세기 말엽에 전국의 제언 수 는

3천개나 되었다.

이앙법을 사용하게 되면서 직파법에 비해 김매는 노동력을 약6,7할50) 정도 절감하였다. 또한 모내기에 앞서 객토를 넣거나 퇴비 등 여러 가지 비료를 만들어 미리 뿌리고, 벼가 자라는 동안에도 추비를 할 수 있어서 논을 기름 지게 함으로써 직파법에 비해 수확량을 배로 늘릴 수 있었다. 더욱이 이앙법 으로 벼 수확 이후 이듬해 모내기가 시작되는 초여름까지 논을 밭으로 이용 할 수 있어서 보리농사도 지을 수 있었다. 이러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은 금 강 이남 지역에 일반화되었고, 이 이모작으로 생산량 또한 크게 늘어났다. 한 편 이앙법은 김매기 노동력을 줄일 수 있었지만 모내기 때에는 한꺼번에 많 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이앙법이 일반화되면서 두레라는 공동노동 조직이 생겨났다. 51)

이외에도

17세기 이후 도시의 인구

집중으로 인해 주변 농촌에서는 채소를 중심으로 하는 상업적 농업이 발전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경제 작물로 면화

삼베

․모시 ․담배 ․

마늘 등이 대대적으로 보급되었다. 또한 전국적으로 장시

47) 이세영, 위의 글, p. 201~202.

48) 벼농사에서, 못자리에서 모를 어느 정도 키운 다음에 그 모를 본논으로 옮겨 심는 재배법.

49) 물을 가두어두기 위하여 하천이나 골짜기 따위에 쌓은 둑. 언제(堰堤).

50) 10으로 등분하여 그중 몇’을 나타내는 말.

51) 이세영, 「진경시대의 사회경제적 변화」『조선 왕조의 문화 절정기, 진경시대 1. 사상과 문 』, 돌베개, 1998, p.195, p.203.

(17)

가 발전하여 대도시에 한정되었던 상설시장이 지방 중소도시로 확대되었으며 이에 따라 상업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 농민들 가운데 상업적 작물을 재배하 여 팔거나 수공업 제품을 생산

판매하여 소득을 늘려가기도 하였다.52)그 결과 인구가 증가하고 유통량이 늘어남에 따라 도시화가 촉진되었는데, 도시 를 중심으로 향락적인 소비 풍조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이앙법, 섞어짓기, 견종법 등 농업기술의 향상과 집약농법의 유행으로 토지 생산성은 전례 없이 높아졌다. 천수답이나 밭, 묵은 땅을 개간한 곳이나 척박 한 경지의 토지생산성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18세기 이래 비옥한 곳의 토 지생산성은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 단당 쌀의 평균 수확량은 최고로

40~100두

53)

,

평균

25~30두였다.

다만 소수의 지주들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해 가고 있는 반면 대다수의 농민들은 토지를 잃어가고 있었다.54)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이러한 서민들의 신분 상승을 적극적으로 대변하고 옹호하였다. 정약용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양반되기를 바란다.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양반이 되어 버린다면 이는 곧 온 나라에 양반이라는 것이 따로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55)라는 파격적인 신분혁파를 주장하였다. 또한 정 약용은 인성의 차별에 관한 경학적 근거를 깨버리고 민중의 힘에 의한 상향 적인 정치로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이 밖에도 유성원은

“사람이 다

동류인데 어찌 사람을 제물로 삼는 도리가 있을 수 있는가”하면서 노비 제도 를 비판하는 등 실학자들을 통해 조선 시대 민 개념이 새롭게 인식되기에 이 르렀다.“56)

이러한 실학자들의 의식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분제의 변화, 화폐

상 품경제의 전개, 전국적인 시장권의 형성, 농민문화와 상업적 농민의 발전, 상 공업자의 사회적 진출, 그리고 평민층의 민란과 저항 운동 등을 반영한 것으 로서 결국 실학자들은 신흥 시민층의 사상적인 대변자이면서 동시에 그 지도 자로서의 역할을 의미하는 것이다.57) 특히 홍대용은 조선시대 신분 의식에

52) 김대길, 「조선후기 장시의 사회적 기능」『국사관론?』37, 국사편찬위원회, 1992, p.174-p.181.

53) 두는 즉 말로써 곡식이나 액체 따위를 되는 데 쓰이는 원통 모양의 나무 그릇. [열 되들이로서 18리터의 용량. 곡식이나 액체 따위의 용량의 단위. [되의 열 곱절로, 18리터임.] (斗).

54) 이세영, 앞의 글, p.206~207.

55)「정다산전집」上『시문집』, 발고정림생원론

56) 실학의 민개념에 대해서는 김영호, 「실학에 있어서의 민개념의 새로운 전개」『조선후기문 화』, 동양학연구회, 1988, p.40-p.45 참조

57) 김영호, 「실학사상의 발흥」『한국사』14, 국사편찬위원회, 1984, p.182.

(18)

따른 한계를 뛰어 넘은 인물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장정은 노동을 해야 하며 신분을 막론하고 균등하게 교육의 기회를 갖게 하 고, 신분을 막론하고 과거제 대신 재능 있는 자를 뽑아 중용할 것을 주장하 였다.58)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상품 경제의 발달과 도시화, 상업적 농민 의 발전 등으로 민의식이 고양되었으며, 더욱이 신분제의 붕괴는 불변할 것 만 같은 고정된 신분 의식을 분열시켜 신분 상승의 욕구를 부채질하였다.59)

앞서 살펴본 사회 경제의 분위기는 이세영의 글을 참조 하였는데, 그 글에 서 나타나는 경향은 농업 발전을 세밀하게 언급한다. 구조상 통치자가 씨를 뿌려 거둬내기 보다는 서민층에서 땀 흘려 일하고 그것을 다시 나라에서 거 둬들였던 방식으로써는 그들 즉, 서민들에 의한 농업의 발전이 그 시대의 경 제를 보는 가장 큰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조선후기 회화 안에서의 풍속화의 성행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정조 때에 붉어졌던

'속화'가

눈에 뛴다. 이는 강관식의 규장각의 자비대령화 원을 살펴 본 결과 속화의 화제는 궁관 풍경에서부터 시정 풍물에 이르기까 지 상하 조야의 내용을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각신들보다도 오히려 국왕들이 주도적으로 주재主宰했다는 사실60)이 밝혀진바 있다.

그러므로 다음 장에서는 경제에 이어 지배층에서 이루어 졌던 학문의 경향 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중인에서 양반층으로 양반층에서 국왕의 방 향으로 조선후기 풍속화의 순환적인 과정을 드러내고자한다. 어느 층이 높다 거나 어떤 층이 낮다 혹은 우월하다를 떠나서 우리가 서로 층을 막론하고 영 향을 주어온 관계이며, 환경에 있어서도 경제

정치

학문 등의 지배적인 영 향이 결국 풍속화에 끼쳐 졌음을 알기 위해 마지막장에는 문인화와 속화

기 록화와 풍속화 그리고 궁정화원과의 관계로 접근하겠다.

58) 홍대용, 「湛軒書」『林下經論』.

59) 김희정, 앞의 글, p.42.

60) 강관식, 『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 상(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을 중심으로)』, 돌베개, 2001, p.610~611.

(19)

제 제 제 제2 2 2 2절 절 절 절 사상적 사상적 사상적 측면 사상적 측면 측면 측면

정치적으로는 청나라에 복속되는 것 같이 되었지만 사상적으로는 조선이 명 나라 이래의 정통을 잇는, 즉

‘조선이

곧 중화’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즉 효종 때의 북벌사상으로 적개심이 저류에 흐르고 있었으며, 중국의 성리학이 조선 에 들어와서 비로소 맥을 잇는다는 일종의 중화사상이 존재했다. 중국에서는 강희

옹정

건륭연간을 소위 청나라의 성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강희 초 만 하더라도 반란이 빈발하는 등 사회가 어수선했다. 그래서 조선에서도 사 신을 보낸 후 청이 혹시 붕괴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여러 정보를 수집하곤 했다. 그러던 것이 강희

50년,

숙종

18년에

김창업이 지은

『노가재연행

록』을 보면 청나라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눈에 띄는 청의 문물 등도 전하게 되고,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청조에 관 심을 돌리게 된다. 그러다가 숙종 말, 영조, 정조 대에 들어서 사회가 안정되 면서 교류가 시작되고, 중국의 유행 같은 것도 우리에게 전파된다. 그러나 우 리의 경우를 보면 중국의 여러 그림을 들여올 때 어떤 파를 구분하여 들여오 지 않고 그저 유행하면 들여왔다. 예를 들어

『개자원화전』이래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던 명대의 오파라고 하는 심석전, 문징명 그림만 하더라도 오파 라고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심석전의 그림으로, 문징명의 그림으로 받아들였 다.61)

위와 같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17세기 이후 조선은 사회변동과 함

께 문화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문화 변동의 가장 두드러 진 배후 현상은 실학사상과 같은 새로운 가치관의 등장이며, 이와 아울러 자 국 역사에 대한 인식의 대두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 경제적으로 상공업이 발달하고 그에 따른 신분제의 변동과 사상의 영향이라 할 수 있 다.62)

경제가 그 시대의 신분제에 영향을 미침과 동시에 당시 발달되어가던 자국 에 대한 정신을 볼 수 있다. 천민의 입장에서 보면 상업으로 돈을 얻었고, 신 분을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 졌으며 동시에 조선이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얻게 되어 졌다면 신분상승에 대한 일면의 우월의식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 는 추측을 해본다. 이 조선 중화사상에 대해 살펴보면 그 주류에는 지배층이 있고, 이들을 바라보는 것에는 사상적으로 우리나라에 대한 자체적인 자부심 61) 이동주,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전통회화의 감상과 흐름』, 시공사, 1996,p.179~p.180.

62) 김희정, 『조선 후기 회화에 사실성 연구』, 전북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논문, 2002,p.34.

(20)

을 엿 보더라도 경제가 분명 발달하던 때이다.

김희정의 글에서 조선 중화사상은 조선 후기 자국 역사에 대한 관심이 가져 온 결과로 보여 진다. 한국사에 대한 연구가 다양하게 전개되어 가면서 역사 연구자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 역사서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은 새로운 역사서 의 저술을 촉진 하여 실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역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실학자 들은 정치와 사회 및 경제적으로 파탄 상태 에 이른 역사적 현실의 이해와 개혁을 자각하고서 자국사에 대한 깊은 연구 를 시도하게 되었다.63) 즉 실학자들은 당시 사회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기 위 해 역사를 연구했으며, 현실 비판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고자 했다.64)

특히 정약용은 과거시험 과목에 국사를 넣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으며, 안정 복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우리나라에 태어난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이 기 때문에 자국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5) 이처럼 자기 역사를 알아야한다는 의식은 곧 주체적인 의식을 가지려는 맥락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학자들은 조선 후기에 강화되고 있던 자국사 연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을 발전시켜 자국사는 중국사와 분명히 다르며 이를 독자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을 주장했는데, 그 주장한 실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태어났으면서도 우리나라의 사실에 대해 전

혀 알지를 못하고, 심지어는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누가 읽겠는가 라고 말하니 어긋남이 이와 같다. 우리나라는 스스로 우리나라인 것이니 규제체세規制體

勢가

스스로 중국사와는 달라야 한다.”66)

위 인용문은 자국민이 자국사에 대한 지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관심조차 보 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익의 질책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는 중국사와 구별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조선 후기 역사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화이관華夷觀의 극복과 자아의식自我認識의 강화를 들 수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실학자 계열의 역사 가에게서 집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63) 황원력, 「실학파의 역사인식」『한국사론』6, 국사편찬위원회, 1981, p.187.

64) 조 광, 『조선후기 역사인식』, 한국사학사 연구, 을유문화사, 1986, p.135.

65) 정구복, 「조선후기의 역사의식」『한국사상사대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p.91.

66) 이 익, 「星湖先生文集」『答安百順 問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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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관이란 송대 이후 중국의 사학 인식에 있어서 강하게 드러나던 특징으 로서 이는 역사 서술에 있어서 중화와 이적을 엄격히 구별하고 한족왕조의 방어를 도덕적 사명으로 강조하던 역사 인식의 태도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 에 이르러서는 지리적 지식의 확대와 명

청 교체라는 대륙 정세의 변동으로 인해 중국 중심의 세계관의 전통적 화이관이 수정되기에 이르렀고, 이는 곧 조선후기의 역사 인식에서 자아에 대한 인식을 강화시켜 주었던 것이다.67)

17세기 국학 연구의 고조와 이를 바탕으로 한 자국 역사에 대한 관심은 무

엇보다 강역彊域에 대한 연구로 확대 되었다. 특히 역사적 진실과 객관적 연 구를 추구하는 실학풍의 역사학은

17세기 이래 한백겸의 『국지리지』,

유성 원의

『동국여지지』를 계승, 18세기에 와서는 지금까지의 고구려의 역사무

대를 한반도에 설정하려한 것을 만주 지역으로 확대시켰다. 또한 단군과 기 자조선의 강역도 평양 일대에 비정하던 설에서 요동과 요서지방을 포괄하는 지역으로 확장 이해하는 경향과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보려는 경향이 나타났 다.68)

조선 후기에 서양 천문학과 서양지도등이 전래되어 그에 대한 지식이 확대 되면서 중국 및 지구 중심의 우주관이 극복되었고, 중국 이외의 다른 나라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형성되면서 이를 통해 자국에 대한 주체적 인식이 정립 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이미 동서남북의 한가운데 中이 있으니 어디를 가나 중국인데 어찌

우리나라를 동국東國이라 부르는가. 또한 가는 곳마다 중국인데 무엇으로써 중국이라 부르는가”69)

그리하여 어느 지역에서나 동서남북은 있으므로 정해진 중심이라는 것은 없 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즉, 조선 후기 지리관의 확대로 전통적인 중국 중심 의 화이관을 극복하고 주체적인 자아 인식에 도달하기에 이른 것이다.70)

정약용의 화이관은 지금까지 이적으로 멸시받아 온 선비, 여진, 동호, 일본 등 동화제족을 재평가하고 지역 중심으로 굳어진 화이관을 문화 중심의 화이 관으로 바꿔 놓은 것이라 평가받고 있다.71)문화가 높은 곳은 어디라도 중국

67) 조 광, 앞의 글, p.147.

68) 김희정, 앞의 글, p.36.

69) 정약용, 「與猶堂書」『送韓校理致應使燕序』.

70) 김희정, 앞의 글, p.38.

71) 한영우, 「19세기 초 정약용의 역사관과 대외관」『한국학보』1, 일지사, 1975, p.385.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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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보는 다산의 인식은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자기가 서 있는 곳은 어디 든지

中이 된다는

새로운 방위관과 지리관에서 도출된 것으로서 중화란 고정 불변이 아닌 문화수준에 따라 부단히 변화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었다.

조선 후기의 자주적인 역사의식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는

18세기 전반에

등장하는 풍속화의 사상적 배경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된다. 왜냐하면, 주체적 자기 인식과 사실적인 묘사, 현실 생활의 실상들을 주제화하여 회화로서 재 해석하고 작품들의 화화성을 특징으로 하는 인물 풍속화의 사경된 모습이나 진경산수는 한편으로 조선의 독자적이고도 고유한 문화적 자존의식의 현상으 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풍속화의 사상적 배경에 바탕한 문화적 자존 의식은 소중화가 아닌 조선 중화사상 속에서 탄생했다고 보고 있다.72)

조선 후기 역사 인식의 변화와 회화 양식의 실득은 민중들이 생활하는 모습 을 테마화 하여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써 얻어졌다. 이와 같이 사실 중심의 풍 속화는

18세기 초

노론 계열 및 남인 계열의 사대부화가들에 의해 가장 먼저 시작되었고, 이 사실은 감상적 그림만이 아닌 현실적인 자각 속에서 탄생했 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73) 한편, 조선 후기에는 민 의식의 성장과 신분제의 와해를 바탕으로 서민 문화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문학에서는 국문학 의 성장이 눈에 띄게 두드러졌는데, 이러한 국문학의 활기는 평민층의 사회 경제적 성장과 그에 따른 문화적 욕구의 증대, 한글 해독 인구의 증가, 상업 적 출판 및 서책 유통업의 대두, 시정 문화 확산에 따른 창악唱樂 예술의 발 전 등이 직접

간접적인 연관을 맺으면서 작용했다.74) 특히 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는데, 훈민정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에 대한 음운학적 연구는 영

정 시대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었다. 실학자들은 문 자

음운

문법

어의

어원 등을 연구 대상으로 하였으며 언어자료의 정리 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75) 이렇듯 국어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문학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언문일치로 접근하려는 의식이 나타나게 되었다.76)

문학 작품은 당시 사회의 경제적 조건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마련인데, 조 선 후기에는 문학 작품이 상업적으로 유통되었다. 특히 부녀자들이나 서민들 을 중심으로 국문 문자의 사용이 확대되면서, 국문 문학이 성장하였다.77)

72) 김희정, 위의 글, p.39.

73) 김희정, 위의 글, p.40.

74) 국사편찬위원회, 「조선후기의 문화」『한국사』35, p.182.재인용

75) 강신항, 「한국어학사한국문화사대계』Ⅴ,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71, p.521. 인용

76) 김희정, 앞의 글, p.43.

77) 서종문, 「국문문학의 성장과 현실인식」『한국사상사대계』5, 정신문화연구원, 1992,

(23)

선 후기 문학에는 그 이전시대에 비해 현실인식이 심화되어 나타났는데 이러 한 현상은 국문 문자를 사용하는 다양한 사회계층의 작가와 독작가 참여한 결과로 초래된 현상이었다.78) 또한 보다 대중적인 문화라 할 수 있는 판소리 또한 국문 문학의 성장을 촉진 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특히 판소리의 생산주체가 천민 출신인 광대라는 사실은 문학과 예술의 담당층이 다양했음 을 보여준다. 더욱이 판소리의 감상층이 양반 사대부에서 향사등의 중인층과 부농과 부상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이에 따라 판소리에 담긴 내용도 점점 다 양해지고 공연 작품도 늘어났다.79)

상업의 발달과 시정문화의 성장은 민속극과 판소리 등 여러 가지 대중예술 이 성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탈춤

꼭두각시놀음과 남사당 같 은 전문적 놀이패의 예능은 상당히 오랜 기원을 가지는 것이지만, 상업과 교 통의 발달로 전국 각지에 도시적인 생활공간이 많이 생겨나면서 더 널리 퍼 질 수 있었다.80)

그림에서도 진경산수와 풍속화가 등장했으며, 특정계층에서 전유하던 민화 류의 그림이 전승되어 시정으로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책가문방도冊架文房 圖81) 등과 같은 청대의 새로운 경향이 유입되어 성행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 의 민화류는 궁정을 비롯한 상층에서의 고급수요와 시정 상인과 부농을 포함 한 중간계층과 이들을 상대하는 기방 등의 유흥가를 비롯한 시정과 향촌의 호사가들을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수요층에 의해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 을 정도로 많이 제작되었다.82) 영조(1725~1776)와 정조(1777~1800)를 거 쳐 순조(1801~1834)에 이르는 시기에 실학은 물론 문학, 회화, 음악 등 학 술의 각 분야에 걸쳐 새로운 경향은 결국 민족적 자아의식에 토대를 둔 것이 었다. 자신과 자신의 주위를 돌아보고 자신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 무엇이 며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 이 시대의 학자들 과 예술가들 사이에 은연중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학술분야 에서 실학이라고 총칭되는 새로운 학문이, 문학에서는 우리의 주인성을 한글

p.491-p.500참조.재인용

78) 조선 후기 국문 문학의 담당층은 기녀부터 양반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 여성과 천민에서 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서종문, 앞의 글, p.499)재인용

79) 서종문, 『신재효 판소리 해설 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83, p.15-p.28 참조.재인용 80) 서종문, 앞의 글, p.391.

81) 책거리 그림은 대중적인 민화(民畵)가 유명하지만, 궁중에서도 유행하여 화원(畵員)의 실기시 험 문제로 출제되기도 하였다. 한편 정조(正祖)는 책 볼 시간이 없을 때 책이 가득 그려진 그림 을 보며 마음을 풀기 위해 옥좌 뒤에 책거리 그림을 붙여두었다고 한다.

82) 김희정, 앞의 글,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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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매체로 표현하는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등의 한글문학이,

그 리고 미술에서는 실존하는 한국의 산천을 한국적으로 표현한 진경산수와 당 시의 생활주변을 파헤친 풍속화가 유행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겠 다.83) 이 밖에 경제발전과 그에 따른 문화욕구의 증대, 청조문화의 파급과 그를 통해 들어온 서양화법의 수용 등도 이 시대의 미술과 문화의 변화에 기 여했을 것으로 믿어진다.84)

이태호는 풍속화에 대해 민중의식을 중심으로 논하려 한 것에 비해, 김희정 은 조선후기 회화사를 사실성이라는 것으로 써내려가고자 하였기 때문에 경 제 성장과 더불어 조선 중화사상에 대해 지배층의 입장에서 보여 진 듯하다.

전자는 풍속화를 작품 자체적인 것에 중점을 두고 그 속에서 민중의식을 끄 집어내었지만, 후자는 조선 후기의 회화사를 통틀어 보면서 회화 작품보다는 시대적인 것 속에서 보이는 사실성을 이끌기 위함이었다. 또한 정병모는 풍 속화에 대해 각각의 층이 입장에서 나누어 정리하였다.

서민들이 살고 있던 실태는 사회적 변화 안에서의 경제 상황을 통해 살펴보 았다. 양반계층 즉, 학문을 향유했던 계층의 상황은 학문적 경향을 통해 전황 을 예측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핵심으로써 바라보고 자 하는 대상은 바로 국왕이라는 위치이다. 국정 안에서 조선후기 회화 그것도 풍속화가 성 행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미 강관식이 실증적 자료85)를 통해 서술하였다. 필자는 서론에서 보았듯 한국회화사와 풍 속화 그리고 조선후기 정치와 경제

문화뿐만 아니라 국왕의 개인적 취향까 지도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83) 이동주, 『우리나라의 옛그림』, 박영사, 1975, p.198~208 참조 재인용.

84) 허 조, 「서양화법의 동전과 수용-조선후기회화사의 일단면-」(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1981) 참조 재인용.

85) 『규장각차비대령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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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제 제 제 3 3 3 3 장 장 장 장 조선후기 조선후기 조선후기 조선후기 회화사적 회화사적 회화사적 회화사적 배경 배경 배경 배경

숙조선후기의 회화에서 새로운 경향들이 구체적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는 숙종(재위

1647~1720)조 후반에 해당하는 1700년경 전후였을 것으

로 생각된다.86)

숙종조(1625~1720)의 후반에 해당되는 시대의 회회상 새로운 큰 조류로 는, 첫째 중기 이래 유행하였던 절파의 화풍이 쇠퇴하고 그 대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점, 둘째로는 남종화에 기반을 두고 일어난 진경산 수화가 대두한 점, 셋째로는 풍속화가 풍미하게 된 점, 그리고 넷째로는 서양 화법이 유입된 점, 다섯째로는 신선도가 유행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서민들 사이에서 민화가 풍미한 점도 얘기 되었으나 필자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민화에 대한 자료는 작가와 작품제작시기에 대해 서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여서 논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회화상 변모가 가능하게 되었던 이면에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새로운 회화 관이 크게 작용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면에는 문인화론을 근거로 하여 일 어난 그림에 대한 문인들의 새로운 견해가 크게 작용했음이다.87)

그런데 조선 후기의 화가들 중에는 어떤 한 가지 분야나 화풍만을 전문으로 그렸던 경우도 많지만 그와는 달리 여러 분야나 다양한 화풍을 구사한 경우 도 역시 많았다. 절파 화풍과 남종화풍의 산수와 함께 인물, 풍속, 말 등을 폭넓게 그렸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1668~1715), 남종화풍을 소화하여 진경산수화풍을 형성하고 그밖에 소극적이나마 인물, 화조, 초충 등을 그렸던 정선鄭敾(1676~1759), 절파 화풍과 남종화풍의 산수와 더불어 서양화풍의 인물과 동물을 잘 그렸던 남리 김두량南里 金斗梁(1696~1763), 남종화풍과 절충화풍折衷畵風의 산수 이외에 화조화에 크게 기여한 심사정沈師正

(1707~1769),

절충화풍의 산수, 도석인물道釋人物, 풍속, 화조에 두루 기량 을 발휘하였던 김홍도金弘道(1745~1816이후)등은 한 가지 분야나 한 가지 화풍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나 화풍을 폭넓게 구사하였던 화가들이 이밖에도

18세기

에는 많이 활약하였다. 이는 당시에는 다양한 회화의 전통이 축적되고 있었 고, 기능이 뛰어난 화가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화가들이 새로운 화풍 창출 86) 안휘준, 『한국회회사 연구』, 시공사, 2000, p.643.

87) 안휘준, 『한국의 미술과 문화』, 시공사, 2000, p.13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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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한 폭넓은 시도를 했던 결과임을 부인하기 어렵다.88)

앞서 조선후기 사회

학문적 경향에서 살펴봐왔던 것과 같이 조선에서는 자 기 현실에 대한 사실적 인식과 자기문화에 대한 자신감 위에서 조선의 자연, 인물과 풍물, 풍속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사실주의적 예술이 꽃피게 된다.

화 모두에 일관되게 관철되었던 이 같은 경향은 소재의 선택은 물 론 표현수법에 있어서도 중국적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것을 추구하였으 므로 그만큼 개성적일 수 있었다.89) 이 시기에 등장한 동국진경과 풍속화, 동국진체와 사경시 등의 공통적 저류는 이러한 사실주의와 개성주의의 문예

문화 이념으로서 이는 주자주의에 입각하여 사회를 이끌던 당대 사대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90) 이러한 경향은 서울에서 활동하던 겸재 정선, 공재 윤두 서, 관아재 조영석 등 사인화가들과 그들 주변 지식인들의 그림과 문예활동 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91)

조선후기에 이르면 중기(약1550~약1700)에 풍미했던 김시金禔→이경윤李

慶胤→김명국金明國등의 절파계 화풍과 초기 이래의 안견파 화풍의

잔재등이

모두 쇠퇴하면서 남종화풍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92) 이때에는 미법 산수화풍, 황공망黃公望 ․ 오진吳鎭 ․ 예찬倪瓚 ․ 왕몽王蒙의 원말사대가를 위 시해서 명대의 심주沁周 ․ 문징명文徵明등의 오파吳派, 명말의 동기창董其昌, 청대의 정통파인 왕시민王時敏 ․ 왕감王鑑 ․ 왕휘王翬 ․ 왕원기王原祁 ․ 운수평

惲壽平을 일컫는 사왕오운四王吳惲등의 화풍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현존의 작품들이나 화찬畵贊등을 참조하면 그 중에서도 미불米芾 ․ 황공망, 예찬, 심주, 문징명, 동기창 등의 화풍이 애호를 받았고, 자주 방작倣

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시대가 내려가면서 동기창의 화풍이나 화론이 현저해지고 또한 청대의 개성있는 화가들의 화풍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93)

남종화풍은 북경을 다녀온 사행원들에 의해 전래된 진작이나 방작을 통해서 수용되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고씨역대명인

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 『십죽재화보十竹齋畵譜』, 『당시화보唐詩畵譜』등 을 비롯한 명

청대의 화보들이라 하겠다. 사실상 현재 전해지고 있는 적지

88) 안휘준, 위의 책, p.644.

89) 유봉학, 「조선 후기 풍속화 변천의 사회 ․ 사상적 배경」,『조선 왕조의 문화 절정기, 진경시 대 2. 예술과 예술가들』, 돌베개, 1998, p.220.

90) 최완수, 「겸재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참조 91) 유봉학, 위의 글, p.221.

92) 안휘준, 제4장「절파계 화풍의 제양상」『한국회회사 연구』, 시공사, 2000, 참조 재인용. 93) 우리나라 남종화의 변천에 관하여는 안휘준, 『한국회화의 전통』, 문예출판사, 1988,

p.250~30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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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은 수의 작품들이 그러한 중국 화보들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94)

남종화 중에서 원초 고극공膏克恭계의 미법산수 화풍은 이미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에 전해져 수용되었으며 원말의 황공망과 명대 오파 문징명의 화풍 도

17세기초에 참고되었음이 분명하게

확인된다.95) 그러나 남종화가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은

18세기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당시 의 사회적 분위기와 명

청대 문화의 자극이 합쳐져서 남종화가 크게 풍미하 게 된 것으로 믿어진다.96)

또한 조선 후기의 회화가 이룩한 업적으로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우 리나라 특유의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창출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에 실재하 는 산천을 한국적 화풍으로 묘사한 것이 진경산수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 의 창출은 정선에 의해 이루어 졌다.97) 정선이 언제 진경산수화를 시작하였 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98) 그의 진경산수화풍은 당시에도 파격적인 것 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 점은 그의 친구였던 조영석의 말에서도 드러난 다.99)

조영석은 정선이 금강내외산을 출입했으며 영남지방을 편력했고 위쪽으로는 여러 승경들을 유람하여 그 특색을 파악하였다는 점과, 스스로 신격을 창출 하고 우리나라 회화의 누습을 싹 씻어버렸으니 우리나라 산수화는 그로부터 개벽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하였다.100) 정선이 신격을 창출하고 산수화에 개벽

94) 이의 몇 가지 예에 대해서는 吉田宏志, 「朝鮮の水墨畫-その中國化受容一局面」, 『古美術』

52, 1977, p.83~91 참조 재인용.

95) 안휘준, 『한국회화의 전통』, 문예출판사, 1988, p.250~309 참조.

96) 안휘준, 위의 책, p.645.

97) 정선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논문들이 발표되어있다. ① 高裕燮, 「仁王霽色圖-鄭敾齋小考」,

『문장』2권7호(1940) 및 『韓國미술문화사논총』(通文館, 1966), p.294~296, ② 김원용, 「정 - 산수화풍의 진수」, 『한국의 인간상』1(신고문화사,1965), p.301~309, ③ Lena Kim~Lee,

"Chong Son : A Korean Landscape Painter", Apollo(August, 1968), p.85~93, ④ 이동주, 「정 선일파의 진경산수」, 『월간아세아』(1969.4), p. 160~186, 『우리나라의 옛그림』, p.151~192, ⑤ 최순우, 「겸재정선」, 『간송문화』1(1971.10), p.23~27, ⑥ 유준영, 「聖오틸 리엔(St. Ottilien) 수도원 소장 정선화첩」, 『미술자료』 제19호(1976.12), p.17~24, ⑦ 정양 모 책임감수, 『겸재 정선』, 한국의 미, 중앙일보 ․ 계간미술, 1977/1983개정판, ⑧ 허영환,

『겸재 정선』, 열화당, 1978, ⑨ 최원수,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4, ⑩ 안휘 준, 「겸재 정선의 회화와 그 의의」, 『한국 회화의 이해』(시공사, 2000), p.300~314라고 쓰 인 안휘준, 『한국회회사 연구』, 시공사, 2000, p.650~651의 주14 참조.

98) 김원용 박사는 정선이 30세 전후해서부터 진경산수화를 그린 것으로 추측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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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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