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는 주로 국가의 役制 경영 방면에서 고용노동의 활용 방식을 援用한 사례들과 그 내역 및 그로 인한 役制上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 았다. 아울러 그 작업 과정에서 종래 여러 이견의 난립으로 불투명하 였던 更役制 해석상의 몇 가지 난점들이 해명될 수 있었다.
한편 국가 경영상의 고용노동 援用 현상은 役制 방면에만 그칠 수 없는 것이었다. 成帝 永始 연간에 昌陵 건설로 많은 폐해가 발생하였 을 때 이전에 大司農中丞이었던 常侍 王閎이 공사의 중단을 奏請하여 큰 공을 세운 바 있었는데 안사고는 대사농중승을 주석하길 “司農中丞 主錢穀顧庸, 故云典主”라 하였다.75) 즉 국가의 雇傭 업무를 담당하는 전문 관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서 권70 「陳湯傳」에 의하면 그 昌陵 건설 공사에 “卒徒工庸의 비용이 鉅萬數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정부의 대형 공사에는 卒徒의 징발 뿐 아니라 傭賃을 주고 工人 등을 고용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官需物資의 운송에는 상당 부분 雇賃에 의지하였다. 한서 「 식화지」에서 桑弘羊은 균수평준법의 시행을 주장하면서 “여러 관부에
74) 위의 책, p.62.
75) 한서 권10, 「成帝紀」, 永始3년조.
서 각자 물자를 구입하느라 서로 다툰다. 때문에 물가가 급등하고, 천 하의 賦輸 수입이 그 僦費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항을 제시한 바 있 다.76) 僦는 곧 운송기구와 그 인력을 雇傭하는 것인데(師古注) 징수된 賦稅類의 운송에 관용의 운송기구로는 부족하여 민간의 운수업자와 그 기구를 雇傭하는데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九章算術均輸篇에는 “今有均輸粟, …… 乙县傭價一日一十錢, 到輸所 七十里, 丙县…傭價一日五錢, 到輸所一百四十里ㆍㆍㆍ…” 등 수송해야 할 현까지의 거리에 따른 일당 傭價 계산문제가 있다. 이 뿐 아니라 武帝期에 시행된 재정 증수를 위한 새 정책들은 대부분 定例의 징발 노동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어서 새로 대규모의 고용노동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었다. 무제시 재정 궁핍의 상황에서 대사농이었던 鄭當時는 “빈객 등을 大司農 僦人으로 任用하였다”고 하 였다.77) 사기 「평준서」 索隱引服虔云, “雇載云僦”라 하였다. 宣帝 때 대사농 田延年은 民의 牛車 三萬兩(乘)을 僦(雇賃)하여 능묘 건설에 모래를 실어 날랐다. 이 때 車 1兩 當 僦直(雇賃費)이 1천전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1량 당 2천전을 증액하여 장부상에 기록한 후 그 반을 횡령한 죄로 고발당했다.78) 僦人은 私有 또는 官有의 牛馬車등 운송기 구와 인력을 지니고 관부의 물자 운송을 下請받아 종사하는 업자들이 다. 진한에서 <走馬樓吳簡>의 삼국시기까지 이러한 僦人 고용의 사례 가 이어진다. 이러한 모습과 사정은 앞에 든 전국진의 <운몽진률> 「 效律」에서 백성이 관부에 나아가 僦人으로 轉運(移輸)의 일을 맡는 것 을 처벌한다는 규정에 크게 배치되는 것이다. 이제 그러한 일이 관부 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무제기의 신재정책 시행 이래 운송비용 등 다방면의 비용이 크게
76) 한서 「식화지」에 “弘羊以諸官各自市相爭. 物以故騰躍, 而天下賦輸或不償其 僦費.” 注에 ”師古曰, 僦, 顧也. 言所輸賦物不足償其餘顧庸之費也.”
77) 史記 卷一百二十, 「鄭當時傳」에 “及晩節, 漢征匈奴, 招四夷, 天下費多, 財 用益匱. 荘任人賓客為大農僦人, 多逋負.”
78) 한서 90, 「혹리전」 田延年條에 “初, 大司農取民牛車三萬兩爲僦, 載沙便橋 下, 送致方上, 車直千錢, 延年上簿詐增僦直車二千, 凡六千萬, 盜取其半.”
증대되어 조정의 창고는 텅 비게 되었고, 이를 메꾸기 위해 또 다른 대규모의 사업들이 연이어졌다. 그 가운데 豪民 내지 빈민 유민, 被災 民들에게 公田 또는 荒地 등을 假貸하여 그 임대료를 조세로 징수하는 시책이 있다. 유민ㆍ피재민 등을 위한 구호용으로서의 假貸일 경우는 수년간 부세역의 면제 혜택을 주기도 하였지만 豪民의 이른바 ‘分田劫 假’에 의해 일반 조세보다 고율인 경우도 있었다.79) 어떤 경우이든 그 假貸의 성격은 공전 소유자인 정부가 경작 인력을 새로 고용한 형태였 다. 武帝 때 甯成은 “陂田千餘頃을 빌려서 빈민에게 假하고 數千家를 役使시켰다”고 하였는데80) 안사고는 이 ‘假’를 “假謂雇賃也”로 주석하 였다.
또한 염철전매와 균수평준의 운영은 그 성격상 엄청난 고용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특히 鑄錢 방면에서는 私鑄든 官鑄든 모두 顧 租(傭賃 雇傭)에81)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이 방면에 서는 기존의 상인과 수공업자를 고용하여 운영하는 형태가 주류를 이 루었다. 아울러 그들의 자본 투입을 유도하여 활용하기도 하였다. 한 서식화지에 “募豪富人相假貸”라거나, “募民自給費” 등은 그러한 사실 을 말한 것이다. 이후 武帝 時의 신재정책은 부분적으로 잠시 중단된 적은 있지만 전한말까지 거의 지속되었고, 왕망은 이를 부분적으로 더 욱 확대하여 시행한 셈이다. 이러한 정부 주도의 경제정책은 소요되는 노동력이 방대한 것이어서 更卒이나 형도, 謫民, 노비, 유민 등 외에 다급한 사정으로 고용노동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진전에 따 라 고용노동 운영이 점차 일반화 내지 보편화되는 경향이 있게 된 것 으로 생각된다.
후한 초 이래 武帝期 이래의 신재정책 일부분이 중단되거나 쇠퇴되
79) 한 대의 分田劫假에 대해서는 王彦辉, 「漢代的“分田劫假”與豪民兼并」 (東北 師大學報: 哲社科版5, 總187期, 2000) 참조.
80) 한서 권90, 「酷吏傳」, 甯成條에 “乃貰貣陂田千餘頃, 假貧民, 役使數千家.”
81) 한서 「식화지」에 “法使天下公得顧租鑄銅錫爲錢, ….” 注에 “師古曰: 顧租, 謂顧庸之直, 或租其本.”
는 가운데 군사제도에 있어서도 상비군으로서의 군현병(正卒)이 일단 폐지되고, 募兵에 주로 의존하게 된 것도 그 영향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후한 초 이래 국가경제 운영 여러 방면에 고용노동을 援用하는 형태가 자주 보인다. 광무제 建武3년에 “여자 형도를 雇山하 게 하고, 귀가시킨다(女徒雇山歸家)”고 하였다. 여기서 雇山이란, 여자 죄수는 귀가시켜 주고 대신 每月 出錢해서 타인을 고용하여 산에서 伐 木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82) 후한서 권3 「章帝紀」 元和원년조에 전 토가 없는 지역의 주민들이 肥饒한 땅으로 이주하고자 하거든 허용해 주고, “公田을 賜給해주고, (그들을) 고용하여 경작하고, 종자와 식량 을 빌려주며…”83)라 하였다. 즉 公田을 빌려주는 것을 “(그들을) 고용 하여 경작한다(為雇耕傭)”고 하였다. 公田의 假貸는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그 운영방식은 일정 기간 농업노동력을 국가가 고용하는 것 과 같기 때문에 “為雇耕傭”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고용의 傭賃은 종자와 식량 및 田器를 빌려주고, 수년간 賦稅를 면제해주는 것이다.
또 자연재해로 인한 유민과 빈민에 대한 구호조치로 이들을 관부에서 傭賃을 주고 고용하여 여러 작업에 사역시키는 시책이 펼쳐진다. 이러 한 형태는 현대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는 모습과 같다. 후한서에 “其 以見錢穀取傭”이라거나, “以見錢雇直”이라 한 것은 그것을 기술한 것 이다.84) 또 농사지을 형편도 못되는 빈농에게 국가가 犁牛 및 그 傭賃 費를 지원해주는 시책도 편다.85) 후한서 권58 「虞詡傳」에 “永平(明
82) 후한서 권1上, 「光武帝紀」, 建武三年條에 “女徒雇山歸家”의 注引 前書音 義曰 “令甲: 女子犯徒遣歸家, 每月出錢雇人於山伐木, 名曰雇山.”
83) “其令郡國募人無田欲徙它界就肥饒者, 恣聽之. 到在所, 賜給公田, 為雇耕傭, 賃種餉, 貰與田器, 勿收租五歲, 除筭三年.”
84) 후한서 권1, 「光武帝紀」 下, 建武22년조에 “吏人死亡, 或在壞垣毀屋之下, 而家羸弱不能收拾者, 其以見錢穀取傭, 為尋求之.”
후한서 권7, 「桓帝紀」, 永壽元年조에 “司隸ㆍ冀州飢, 人相食. 敕州郡賑給貧 弱. 若王侯吏民有積穀者, 一切貣十分之三, 以助稟貸. 其百姓吏民者, 以見錢雇直.
王侯須新租乃償.”
85) 후한서 「和帝紀」, 永元16년조에 “遣三府掾分行四州, 貧民無以耕者, 為雇犁 牛直.”
帝期) 章和(章帝期) 중에 州郡이 走卒錢으로 貧人을 給貸(雇賃金을 지 급)하였다”고 하였다. 필자는 전고에서 그 사정에 대해 자세히 해설한 바가 있다.86) 走卒錢이란 三百石 官長 이상의 관리를 導從하는 走卒 伍伯 등 下吏들의 職役을 면제해주는 대신 그 면역전으로 징수하는 것 인데 州郡에서 走卒錢을 징수하여 그 역을 면제시켜주고, 대신 빈궁 한 자를 그 役에 고용한 것인데 不法이었다. 이러한 불법 행위가 후한 明帝期 이래 있었고, 順帝 때 그 범법자들이 탄핵되고 있다. 渡邊信一 郞은 導從役이 民으로부터 강제 징발된 것이었는데 후한 초에 이미 走 卒錢이 징수되고, 특정 임무는 면역전을 재원으로 한 고용노동으로 전 환되었다고 한다.87) 그러나 章帝 이후 50여년이 지난 順帝期에 옛 사 례로서 지적되고 있는 것에 의하면 고용 노동으로의 진전이 전면적 내 지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음을 뜻한다. 어떻든 導從役의 고 용 방식 운영이 不法이었다 함은 그것이 본래 導從役의 의무자가 정해 져 있고, 그들을 징발하는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錢이 있는 자로부터 走卒錢을 받고 이 재원으로 빈한한 자를 고용하여 雇賃을 지급하는 不法을 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지적에서(
후한서 권58 「虞詡傳」) 지방관들의 謫罪人에 대한 贖錢 강요의 사례 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私利 도모에 의한 것이다. 또한 그 의무자에 富者가 있어 그 實役을 피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러한 사정과 현상도 결국 직역의 징발체제를 국가 또는 官長 주도 하 에 고용 노동 방식으로 전환시키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후한 광무제 건무6년 郡國의 都尉官 폐지, 동 7년에 輕車ㆍ騎 士ㆍ材官ㆍ樓船士 등의 군현상비군을 폐지하여 民伍로 돌아가게 한 이 래88) 모병제의 비중이 커졌다. 특히 후한 말에는 전란상황에서 중앙정 부가 刺史 군수 등 지방장관에게 모병의 權을 줌으로써 이들은 거의
86) 박건주, 앞의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87) 渡邊信一郞, 中國古代の財政と國家 (汲古書院, 2010, 第三章), p.128.
88) 後漢書 권1하, 光武帝紀下 建武六年條에 “是歲, 初罷郡國都尉官.”
同 7년조에 “詔曰: 今國有眾軍, 並多精勇, 宜且罷及軍假吏, 令還復民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