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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 老官齋敎亂에 대한 연구는 주로 천년왕국적, 즉 종말론적인 종 교 반란 또는 정권 탈취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반란이라는 입장에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叛徒들이 내건 구호나 반란이 일어난 지역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특히 반란 참여자들의 구성에 있어서 새로운 측 면에서 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것을 뒷받 침해주는 중요한 요소가 바로 복건성 서북 산간지대에서 경제 활동을 하고 있던 棚民들이 아닌가 한다.

결국, 이 사건은 정권 탈취의 추구라든가, 종말론적인 종교적 이상세 계를 추구한 종교집단의 반란이라기보다는, 당시 복건성 서북 산악지 63) 老官齋案 新柱摺 (乾隆 13年 3月 14日) (史料旬刊第27期, 民國20年), p.

天967右.

대에서, 종교 시설인 庵堂들을 통해 교세를 확장해 가고 있던 羅敎에 가담한 교도들이 그 지역의 사회ㆍ경제적 모순 속에서 자신들의 요구 를 표출하면서 일으킨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반란의 전개 과정 에 종교적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 집단의 동원 등에 종교 조직이 이용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棚民들이 山場에서 경제 활동을 시작한 것은 대략 明代에 시작되어 淸初에 이어 乾隆帝 때 왕성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체제 하에서 붕민 들은 사회 문제로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토착인들과 경제적 이익과 관 련해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다는 것 외에, 외지에서 붕민의 유입이 그 지역의 치안을 위협하고 당시 사회적으로 잠복해 있던 불안을 증폭시 켰다는 것이었다. 해당 지역의 신사들과 지방 관원들은 유입해 들어오 는 붕민들에 대해 편견과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고, 土ㆍ客民 간 의 갈등의 빈발은 정부로서도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雍 正 初에 천민해방령과 관련해 붕민에 대해서는 일정한 정도 평민으로 서의 사회적 지위가 유지되었으나,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驅逐의 대상 으로서 붕민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심지어 지방관에 의해 토벌의 대 상,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집단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따라 서,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산지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던 붕민들은 불안정한 생활로 인한 불만이 누적되어 갔을 것으로 생각된 다.

복건성 서북부 建寧府 등의 지역들에서 이러한 붕민들을 통제하고자 할 때, 민간 종교 시설의 존재와 그것을 통한 교도들의 집회 활동 등 은 늘 관심과 경계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결국, 붕민들의 활동 지역이 었던 산악지대에 대한 지방관의 통제력이 약했다는 것, 羅敎와 같은 종교 집단의 활동, 그리고 붕민들의 사회, 경제적 상황들이 결부되어 老官齋敎의 난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무엇보다도, 반란에 가담한 자들의 진술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 이 난의 실체를 파악하 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 난의 처리 등과 관련해서, 건륭제 자신도 지방 관리들의

失察에 대해 처벌함으로 야기될 지방 통치에 있어서의 혼란을 두려워 하여, 지방관에 대한 사건 초기의 질책도 모두 용서하는 방침을 취하 고 있다. 이는 사건의 처리에서도 보이는데, 건륭제는 사소한 민간 종 교집단들에 대해서 ‘防微杜漸之說’이라는 입장을 유지함이 절실함을 알 면서도, 종교집단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탄압이 지방 사회에 어떠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인가를 고려하여, 무엇보다도 ‘閭閻의 寧謐이 중 요하다’64)고 보고 있다. 따라서, 단지 사건 연루자들에 대해서만 법대 로의 처벌을 지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민간종교 집 단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에 있어서의 한계가 점차 드러나고 있음을 보 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65)

종래 棚民에 대한 연구가 주로 江西省과 安徽省 歙縣 지역에 집중되 어 온 측면이 있다. 이것은 아무래도 사료에서 오는 제약으로 말미암 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연구가 앞으로 복건성 지역은 물론이고 절강 성 등 여타 지역에서의 각기 특수한 처지에 있는 붕민에 대한 이해와 그들 지역의 棚民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64) 『淸高宗實錄』卷341, 乾隆 14年 5月下 甲子條, p.712上下.

65) 이러한 방침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乾隆18년 7월 13일에 浙 江 寧波府에서 발생한 周喜吉의 龍華會 사건에서, 이 (羅敎)龍華會가 곧 건륭 13년에 난을 일으킨 老官齋敎의 別名임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護道榜文, 經卷 등에 특별하게 패역한 내용이 없고, 周喜吉 등이 騙錢入會한 것에 불과하 고 또한 作奸함이 없었다는 점에서 周喜吉 등 체포한 범인만 법대로 헤아려 처벌하도록 처리방침을 통보하고 있다(『淸高宗實錄』卷444, 乾隆 18年 8月上 乙丑條, p.786上; 淸代 龍華會 史料 選編[中國第一歷史檔案館『歷史檔案』, 2000.3]).

(Abstract)

Dwellers of Make-shift Huts(棚民) at the North-western Mountainous Region of Fujian

Province and Lao-guan-zhai Teachings Rebellion in Mid-Qing Period

Song, Yoo Who

So far, the rebellion of Lao-guan-zhai Teachings was studied from standpoints of a religiously-oriented eschatological rebellion or a rebellion for acession to political power. But, when we consider the slogan, "Urge the rich to relieve the poor(勸富濟貧)" hoisted by the rebels and the circumstances of the regions where the rebellion broke out, especially on the groups of rebels, there is considerable room for looking over from a different angle. One important element that endorses that view would be dwellers of make-shift huts(棚民) who, for only livelihood or making economic gains, departed from their registered native place and moved to the north-western mountainous regions of Fujian Province.

Luojiao temples(羅敎 庵堂) were established at remote and secluded places in the mountainous regions of Fujian Province(福建 省) where dwellers of make-shift huts(棚民) lived. Life of Dwellers of make-shift huts(棚民) was deeply related with these temples.

Under the Qing political system, dwellers of make-shift huts(棚民) gradually appeared as an important social problem across the country. First, fierce native-settler conflicts occurred frequently over the economic interests. Secondly, the influx of dweller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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