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奏讞書

案例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蠻夷律의 존재는 만이에게 해당 법률이 원칙적으로는 적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법률의 적용과 해석이 한인 관리에 의해서 恣意的으로 해석되고 있다 고도 느껴진다. 왜냐하면 賨錢 56錢을 君長에게 납부한 蠻夷 毋憂는 법령의 해석에 근거하면 둔졸의 의무를 수행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 이다. 그러나 판결은 “腰斬刑”이 내려진 것이다. 案例1의 기사를 통해 서 한초 주변민족에 대한 한의 상반된 조치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賨錢의 납부라는 우대적 조치와 君長을 통한 간접적 지배라는 점과 또 다른 하나는 율령을 통한 한인 관리의 직접적 지배가 관철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의 경우는 案例1의 기사외에도 漢 高祖가 漢王이 된 이후, 이 지역 大姓인 渠帥 7姓에게 요역을 면제하고 租賦를 거두지 않았으 며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매년 賨錢 40錢을 납입케 한 사실에서도 확 인할 수 있다.102) 이와 같은 조치는 무제가 연속적인 출병을 통해 羌 과 兩越을 멸하고 나서 그 습속에 따라 통치하며 조세를 거두지 않은 番禺以西에서 蜀南에 이르기까지 설치한 17개의 初郡에서 시행되었음 은 틀림없다.103)

101) 睡虎地秦簡 語書 , p.15, “凡法律令者, 以敎導民, 去其淫僻, 除其惡俗, 而 使之之於爲善也.”

102) 後漢書 卷86 南蠻西南夷列傳 , p.2842, “至高祖爲漢王, 發夷人環伐三秦, 秦地旣定乃遣環巴中, 復其渠帥羅․朴․督․鄂․度․夕․龔七姓, 不輸租賦, 餘戶 乃歲入賨錢口四十.”

그러나 이러한 조세 경감과 같은 우대 조치는 漢 武帝가 邊郡을 개 척할 시기까지 시행된 듯하다. 왜냐하면 무제시기 이후에는 주변민족 에 대한 조세 우대 조치보다는 불공평한 조세 징수에 불만을 품고 반 란을 일으킨 기사가 빈번히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후한대의 기사인

後漢書

卷86 南蠻西南夷列傳 의 주요 관련 기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安帝 원초2년(115) 澧中蠻은 군현에서 요역과 세금을 공평하게 부 과하지 않자 (이에) 원한을 품고 마침내 允中 등 여러 종족 2천 여명을 결속하여 城을 공격하고 長吏를 살해하였다…(중략)…順帝 永和元年(136) 무릉태수가 上書하여 만이를 다스리기 위해서 한인에 비하여 租賦를 증 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논의한 사람들은 모두 찬성하였다…(중 략)…그 해 겨울 澧中․漊中蠻이 貢布가 옛 규약과 다르자 항의하였다가 마침내 향리를 살해하고 종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 해 봄, 蠻夷 2 만 명이 充城을 둘러싸고 8천 여명이 吏道에서 노략질하자 무릉태수 이 진을 파견하여 이들을 진압하였다(安帝元初二年, 澧中蠻以郡縣徭稅失平, 懷怨恨, 遂結充中諸種二千餘人, 攻城殺長吏…(중략)…順帝永和元年, 武陵 太守上書, 以蠻夷率服, 可比漢人, 增其租賦. 議者皆以為可…(중략)…其冬澧 中․漊中蠻果爭貢布非舊約, 遂殺鄉吏, 舉種反叛. 明年春, 蠻二萬人圍充城, 八千人寇夷道. 遣武陵太守李進討破之; p.2833).

② 和帝 영원13년(101) 巫縣지역 蠻夷 許聖 등은 郡에서 세금을 공평 하게 거두지 않자 원한을 품고 마침내 마을에 진을 치고 반란을 일으켰 다(和帝永元十三年, 巫蠻許聖等巫縣․屬南郡, 以郡收稅不均, 懷怨恨, 遂屯 聚反叛; p.2841).

①의 주요 내용은 安帝 元初2年(115) 군현이 종래처럼 공평하게 세역 징수를 하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은 澧中蠻이 이천 여 인의 만이들을 결집시켜 현성을 공격하고 장리를 살해한 사건이다. 또한 順帝 永和元 年(136) 무릉태수가 만이에게 징수하는 租賦를 증가해야 한다는 상소 의 내용에 대해 찬성하였다는 점과 만이들이 납부하는 貢布가 예전의 규약과 다르자 鄕吏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내용이다. 이와 같이 103) 漢書 卷24, 食貨志․下 , p.1174, “漢連出兵三歲, 誅羌 滅兩越, 番禺以西至

蜀南者,置初郡十七, 且以其古俗治, 無賦稅.”

古人堤簡牘

賊律 法律名 二年律令․賊律

條文 古人堤簡牘

賊律 法律名 二年律令․賊律 條文 盜出故(?)物 奴婢賊殺 婢賊殺傷主主父母妻子, 皆梟其首

揄(踰)封 父母殴笞子 父母毆笞子及奴婢, 子及奴婢以毆笞

辜死, 令贖死 毁封 毁封, 以它完封印印之,

耐爲隸臣妾 殴決□□ 鬪而以釰及金鐵銳椎傷人, 皆 完爲城旦舂. 其非用此物而(眇)人,折 指, 胅体, 斷決鼻耳者, [表 3] 古人堤簡牘 「賊律」목록 법률명과 張家山漢簡 「二年律令․賊律」 조문 비교 한초에는 蠻夷에 대해 慰撫 혹은 優待的인 ‘차별’적 대우를 취하였지만 후한시기에는 만이들이 불만을 품고 관리를 살해하거나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상반된 상황이 전개된 까닭은 무엇인가?

案例1에서 확인한 蠻夷에 대한 두 종류의 조치 가운데 律令의 직접 적 지배의 관철에 주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후한시대 만이들이 거주 한 지역에 한초와 마찬가지로 거의 동일한 법령의 실시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湖南省 張家界市 근처 古人堤遺蹟에서 발견된 후한시 대 簡牘의 내용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104) 발견된 간독은 총 90 片으로 간독의 文字 가운데에는 後漢의 “永元”․“永初”의 연호가 보인 다. 바로 이 시기는 상기한

後漢書

卷86 南蠻西南夷列傳 의 南蠻 반란시기와도 일치하는 시기이다. 또한 간독 내용 중 주목을 끄는 것 은 漢律과 漢律 목록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보고에 의하면 14簡 正 面에 보이는 賊律 조문의 일부 내용과 29簡 正面에 기록되어 있는 盜律 과 賊律 의 목록이다.105) 특히 賊律 목록에 보이는 법률명은

張家山漢簡

二年律令 의 율령과 동일한 내용으로 이를 정리하면 다 음과 같다.

104) 古人堤遺蹟 및 簡牘에 대한 개괄적 내용과 석문은 湖南省文物考古硏究所․

中國文物硏究所, 湖南張家界古人堤遺址與出土簡牘槪述 (中國歷史文物 2003 -2).

105) 湖南省文物考古硏究所․中國文物硏究所, 湖南張家界古人堤簡牘釋文與簡注 , (中國歷史文物 2003-2, pp.76, 79.

賊殺人 賊燔燒宮

賊燔城官府及縣官積冣(聚), 棄市.

(賊)燔寺舍民室屋廬舍積冣(聚), 黥爲城旦舂. 其失火延燔之, 罰金四

鬪殺人 賊殺人鬪而殺人, 棄

失火 有不從令而亡有敗失火, 官吏有 重罪

鬪殺以刀 賊殺傷人 賊傷人, 及自賊傷以避事者, 皆黥爲

城旦舂 戱殺人 其過失及戱而殺人, 贖

犬殺傷人

謀殺人 謀賊殺傷人, 未殺,

黥爲城旦舂 船人□人 船人渡人而流殺人, 耐之

懷子而 奴婢射人

有挾毒矢若謹(菫)毒蠱, 及和爲謹(菫)毒者,

皆棄市 諸坐傷人

父母告子 父母告子不孝, 皆棄市

간독에 보이는 율령이 시행된 시기가 呂后2年 (B.C.184) 이라 추정 되는 이년율령 과 “永元”․“永初”라는 후한의 연호가 확인된 古人堤 簡牘의 법률 집행의 시간적 차이는 무려 300여 년 정도이다. 이 기간 동안 동일한 내용의 법령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법령에 의한 군현 지배질서가 만이지역에도 관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군현지 배의 관철은 고인제한간의 인근 지역에서 발견된

里耶秦簡

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秦이 楚지역을 점령한 이후, 곧바로 습속과 문화가 다른 지역에 대해서 一元的 제국 질서를 강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조치는 비단 南蠻지역에서만 진행한 것 이 아니라 四夷지역을 모두 동일한 방식의 군현질서로 실시했을 것이 다.

천하 질서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변민족을 현실적으로 부정 할 수 없다면 이들로 하여금 ‘內郡’과의 일치됨을 강요하여 통일된 秦 漢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즉 진말․한초시기 주변민족과의 통합은

‘一統’을 향한 제국의 강렬한 의지로서 이는 邊郡의 설치로 완성되었 다. 주변 민족의 거주지역에 대한 변군의 설치는 곧 ‘중국’을 확장함과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주변민족의 ‘漢化’를 의미한다.106) 상이한 문화적

특성을 지닌 주변민족을 한의 지배영역으로 편입시키려 한 것은 內郡 의 존립과 안정된 천하질서를 위해서 두 지역이 결코 분리된 지역이 아닌 ‘하나’의 존재라는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鹽鐵 論

卷8 誅秦 의 기사 중 ‘중국’과 변경을 사람의 팔다리와 몸통에 비 유하여 변경이 없으면 國內가 해를 당한다는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 다.107)

鹽鐵論

의 기사 내용은 일단 ‘중국’과 주변민족의 대등하면서 도 긴밀한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사기

한서

무제기 기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주변민족에 대한 침입 기사 는 주변민족은 정복과 통합의 대상이었지 결코 대등한 공존적 관계를 기술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주변민족에 대한 회유적․우대적인 차별 적 조치는 통일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일차적인 수단과 조치였지 제 국의 ‘불변’한 통치방식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통일 제국의 군현지 배질서 체제는 문화와 습속이 상이한 주변민족을 ‘차별적’정책으로 그 지배하에 두면서 점차 이들에 대한 일원적 지배를 도모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106) 史記 卷112 主父偃傳 2961쪽, “廣中國 滅胡之本也.”

107) 鹽鐵論校注(定本) (中華書局, 1992, 이하 鹽鐵論) 卷8 誅秦 488쪽, “中 國與邊境 猶支體與腹心也. 夫肌膚寒於外 腹腸疾於內 內外之相勞 非相爲助也.…

(中略)…故無手足則支體廢 無邊境則內國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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