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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향교는 우리나라 전체 향교 234곳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 고 있다. 현 경주향교의 구역이 신라의 국학이 존재하였던 곳으로 경주 향교의 의례는 다른 향교의 의례와는 조금 다르다. 춘추(春秋)의 석전대 제도 다른 향교의 경우 봄에는 공자의 기일(忌日)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5월 11일에, 가을에는 공자의 탄강일(誕降日)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9월 28일에 지내고 있다. 그런데 석전은 성현에게 개학을 알리는 축제인 만 큼 공자의 기일이나 탄강 일에 지내서는 안 된다는 일부 이견(異見)도 있다. 그래서인지 경주향교는 「고려사」의 기록대로 봄과 가을 음력 2월 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 初丁日)에 지낸다.19) 고법에 의하면 성균관은 2월과 8월의 상정일에 지내는 것에 비하여 향교는 2월과 8월의 중정일 (中丁日)이나 하정일(下丁日)에 지낸다. 경주향교가 특별히 2월과 8월의 상정일에 석전대전을 올리는 것은 경주향교의 지위를 성균관과 동격으 로 간주한 결과이다.

1) 석전대제(釋奠大祭)

옛날 중국에서 자연이나 조상들의 묘에 올리던 제사와 학교에서 앞선 성인들과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기 위하여 올리던 제사를 말하 는 것이었으나, 후에는 학교에서 행하는 제사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19) 仲春仲秋上丁釋奠儀 齋戒 前享五日 凡應享之官 散齋三日 皆於正寢 致齋二日 一日 於本司 一日於享所 無本司者 於尙書省 「高麗史」 卷62, 志 卷第16,)

학교에서는 봄. 가을에 공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스승들 중 훌륭하신 분께 석전을 올렸다. 시대에 따라 모시는 분이 조금씩 다르긴 하였지만 대부분 공자를 으뜸으로 여겨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서 공자 및 그 제자들 한국의 유학자 등 명현의 위패를 모시는 제례의식이다.

이는 모든 유교적 제사 의식의 전범(典範)이며, 가장 규모가 큰 제사이 다. 또한 임금이 직접 참여하는 국가적 의례이기 때문에 석전을 가장 큰 제사라는 의미로 석전대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석전은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신라가 성덕왕 16년 (717)에 신라왕자 수충(守忠)이 당나라 다녀오면서 문선왕(文宣王)과 공 문십철(孔門十哲)과 72제자(弟子)의 화상도(畫像圖)을 가지고 와서 국학 에 봉안하였다. 이후 고려 헌종 11년(1019) 8월에 신라의 시랑 최치원 이 선성묘(先聖廟)에 배향되고 문창후(文昌侯)로 봉해졌고, 헌종 14년 (1023) 봄 정월에 신라 한림 설총을 선성묘에 종사하고 홍유후(弘儒侯) 로 봉해졌다(성균관, 1994: 957).

고려 숙종 6년(1101) 4월의 일기를 보면 “국자감(國子監)에서 아뢰기 를, ‘문선왕묘(文宣王廟)의 좌랑(左郞)과 우랑(右郞)에 61자와 21현을 새 롭게 그려 넣고 청하건대 석전(釋奠)에 종사(從祀)하시옵소서’라고 하니 이를 따랐다.”20)라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아 국자감에 문선왕을 포함 하여 83위를 설위(設位)한 것은 확실하며 석전을 봉행한 것도 알 수 있 었다. 또한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은 나란히 남쪽 벽에 모신다.”21)라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아 설총과 최치원도 문묘에 종향함으로서 우리나라 성현을 문묘에 배향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러 시대를 지나면서 성균관 대성전에서는 공부자를 비롯하여 4성 공문십철22) 송조 6현23) 중국역대 94현과 우리나라 18현 총 133위를 봉

20) 肅宗六年四月癸巳 國子監奏 文宣王廟左右廊 新畫六十一子 二十一賢 請從祀于 釋 奠從之 「高麗史」 卷62, 志 卷第16, 肅宗 6年(1101) 4月)

21) 文宣王廟 文昌侯崔致遠弘儒侯薛聰 竝南壁 「高麗史」 卷62, 志 卷第16, 禮四 吉禮) 22) 孔門十哲: 閔損, 冉耕, 冉雍, 宰予, 端木賜, 冉求, 仲由, 言偃, 卜商, 顓孫師 「慶州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 고을의 향교 중에서는 다스리는 지도자의 직 위에 따라 즉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가 다스리는 곳은 중설 위(中設位, 五聖, 孔門十哲, 宋朝六賢, 東國十八賢)라 하여 39위를 봉향 하고, 현령(縣令) 현감(縣監)이 다스리는 곳은 소설위(小設位, 五聖, 宋 朝四賢, 東國十八賢)라 하여 27위를 봉향했다. 그러다 1949년에 성균관 혁제에 따라 중국역대 94현의 위판을 동 서무(東 西廡)에서 비우고 공 자와 4성 공문10철 송조6현 동국18현 등 합 39위만을 대성전에 배향함 에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각 지방의 향교는 그 지방마다 차 이가 있는데, 대부분 향교에서는 25위를 봉안하고 있고 경주향교에서도 25위를 봉안하고 있다.

본래 ‘석전’이란 석채전폐(釋菜奠幣)의 줄임말로 ‘채(菜)를 놓고 폐(幣) 를 올리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즉 석전은 나물종류만 차 려 올리는 석채(釋菜)와 달리 제물(祭物)과 폐백(幣帛)은 물론 음악과 헌 작(獻酌)이 있는 성대한 제전으로 옛 성현들을 기리기 위하여 문묘에서 거행하는 제례의식이다. 그리고 ‘석(釋)’은 놓다(舍) 또는 두다(置)라는 뜻을 지닌 글자로서 ‘베풀다’ 또는 ‘차려 놓다’라는 뜻이다. ‘전(奠)’은 정(停)의 뜻이다. 상형문자로서 추(酋)는 술병에 술을 담아놓고 덮개를 덮어놓은 형상으로 술을 빚은 지 오래된 술을 의미하며, 대(大)는 물건 을 얻어놓는 받침대의 모습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는 정성스럽게 빚어 잘 익은 술을 받들어 올린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석전이 제사와는 달 리 시(尸)가 없음은 그 주목적이 예(禮)를 행하는 자체에 있고 보공(報 功)까지 미치지 않음을 뜻한다. 석전은 공자의 도(道)와 덕(德)을 숭상하 는 것을 보이는 것이며 이로써 모든 유자(儒者)들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되게 하고자 하는데 그 뜻이 있다.

석전대제 때 참례자는 4배를 올리는데, 두 가지 설(說)이 있다. 첫째,

鄕校誌」, p38~41)

23) 宋朝六賢:周敦頤. 程顥-明道, 程頤-伊川, 邵雍-康節, 張載, 朱熹 「慶州鄕校誌」, p41~44)

1배는 천지자연에 대한 예의, 2배는 웃어른들에 대한 예의, 3배는 법을 숭상하는 예의, 마지막 4배는 동포나 이웃에 대한 예의 뜻으로 절을 한 다는 설과, 둘째, 공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란 시호를 받았기 때문에 임금에게 올리는 예법으로서 4배를 올린다는 설이 있다.

경주향교는 공자를 정 가운데 모시고 그 주위 동서에 4성을 배향(配 享)하고 또 그 둘레 동서 벽 쪽으로 송조 2현과 아국 18현을 종향(從享) 하여 모두 25위를 대성전 안에서 봉향하고 있는데, 봉향 위차(位次)는 다음과 같다.

정위(正位)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孔子)를 봉 향하는 위치로 그 방향은 남향을 향한다. 동쪽의 배향(配享)은 연국 복성공 안자(兗國復聖公顔子)를 제1의 위치로, 기국 술성공 자사자 (沂國述聖公子思子)를 제2의 위치로 봉향한다. 그 자리는 서향하여 동쪽에 위치한다. 서쪽의 배향은 성국 종성공 증자(郕國宗聖公曾 子)를 제1의 위치로, 추국 아성공 맹자(鄒國亞聖公孟子)를 제2의 위치로 봉향한다. 그 자리는 동향하여 서쪽에 위치한다.

대성전 안의 동쪽 종향(從享)은 제1의 위치에 신라 홍유후(弘儒 侯) 설총(薛聰), 제2의 위치에 宋나라 정자(程子), 제3의 위치에 고 려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제4의 위치에 조선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제5의 위치에 조선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제6의 위치에 조선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제7의 위치에 조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제8의 위치에 조선 문원공(文元公) 김 장생(金長生), 제9의 위치에 조선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 제10 의 위치에 조선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봉향한다. 그 자 리는 서향하여 동쪽에 위치한다.

대성전 안의 서쪽 종향은 제1의 위치에 신라 문창후(文昌侯) 최 치원(崔致遠), 제2의 위치에 宋나라 주자(朱子), 제3위 위치에 고려 문충궁(文忠公) 정몽주(鄭夢周), 제4의 위치에 조선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제5의 위치에 조선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제6의 위치에 조선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 제7의 위치에 조선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제8의 위치에 조선 문열공(文烈

公) 조헌(趙憲), 제9의 위치 조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제10의 위치 조선 문순공(文純公) 박세치(朴世采)을 봉향한다. 그 자리는 동향하여 서쪽에 위치한다(경주향교, 2002: 347).

석전의 모든 절차는 종합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는 홀기(笏記)에 의거 하여 진행되며 이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규격을 그 원형으로 한 다. 석전은 희생(犧牲)과 폐백(幣帛) 그리고 합악(合樂)과 헌수(獻酬)가 있는 성대한 제사 의식이다. 다음은 석전향사(釋奠享事)에 관한 준비와 실제 진행 과정이다(박선덕 2019: 34-70).

준비과정으로 헌관천망(獻官薦望)의 경우, 문묘제례의 의례를 봉행할 제관을 선정하는 일로서, 제사에 참여 하는 모든 제관들 중에 그들을 대표해서 헌작할 헌관이 필요하다. 헌관의 자격은 제사를 엄숙하고 정성 스럽게 지내야 된다는 측면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제관을 선출한다.

선출된 헌관은 삼헌의 예의에 따라 석전의 한 달 전부터 원로급 및 수석 장의 회의에서 집사가 될 만한 사람을 추천하고 또한 모든 장의들이 모 인 장의 회의에서 집사가 결정된다. 이렇게 천망(薦望)된 집사를 ‘칠집 사’(七執事)라 하는데 칠집사는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 (終獻官), 동분헌관(東分獻官), 서분헌관(西分獻官), 집례(執禮), 대축(大 祝)을 말한다. 천권(薦卷-望紙)전달 때에는 선임된 칠집사에게 문묘제례 에 해야 할 소임에 대한 수락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아 향교의 관인을 날인하여 헌관들에게 전달한다. 이때에 헌관(칠집사)들은 천권을 받을 때에 소반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예를 다하면서 정중하게 받는다. 재계 (齋戒) 때에는 제관으로 선정되어 천망되면 제관으로서의 내면적인 마음 가짐을 갖고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제사는 준비부터 마칠 때 까 지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경(敬)의 자세로 전일(全一)한다. 즉 제사를 앞두고 제사에 온몸과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재계라 하는데 「국조오례 의」에서도 “제사 전(향 4일전)에 재계를 청하여 2일 동안 별전에서 산재 (散齋)하고 1일 동안 정전(正殿)에서 치재(致齋)한다. 무릇 산재할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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