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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54년 이후, 동북아시아의 양자동맹들을 기반으로 하는 미 국의 서태평양 집단방위 계획은 어떻게 구성, 그리고 실행되었는가? 해 당 계획은 54년 미국 내부에서 극동 정책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진행 되던 중, 합동참모본부(Joint Chiefs of Staff, 이하 JCS)의 제안으로부터 시 작되었다.72) JCS는 극동 지역의 비공산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 안 보 협정 체결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73) 이는 곧 JCS의 의장 래드포드 (Arthur Radford)를 비롯하여 국무장관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및 여러 인사의 지지를 얻어74)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이하 NSC)에서 논의된 극동 정책에 한국-대만-일본 간의 집단방위 수립 계획 을 명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미국은 해당 구상이 실제로 이루어 지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이는 당시 미국이 한일 관계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 고 있었기 때문이다.

덜레스 장관은 1-c 문단에 나와 있는 서태평양 방위조약의 형성이 쉽

1955–1957, Japan, Volume XXIII, Part 1.

https://www.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5-57v23p1/d28. (검색일:

2019.04.16.) ; “24. National Security Council Report”. February 25, 1955. FRUS,

1955–1957, Korea, Volume XXIII, Part 2.

https://www.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5-57v23p2/d24. (검색일:

2019.04.16.)

72) Sakata, Yasuyo. “The Western Pacific Collective Security Concept and Korea in the Eisenhower Years : The U.S.-ROK Alliance as an Asia-Pacific Alliance”, The journal of Kanda University of International Studies, volume 20 (2008), pp 4-5.

73) “Memorandum by the Secretary of Defense (Wilson) to the Executive Secretary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Lay)”, April 10, 1954. FRUS, 1952–1954, East Asia and the Pacific, Volume XII, Part 1.

https://www.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12p1/d150. (검색일:

2020.05.21.)

74) Sakata. 2008. pp 6.

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러한 조약을 가능하게 만들 조건들을 위 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러한 조건들을 당장에 성립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75)

나는 궁극적인 가능성을 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 한 국, 대만, 미국, 그리고 어쩌면 필리핀까지 함께 이을 안보조약을 당장 추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일은 그 지역에서 상호 의존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76)

위의 첫 번째 인용문은 NSC 회의에서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덜레 스의 발언 내용이 정리된 것이며, 두 번째는 그가 주일본대사관으로 보 낸 전보 중 일부이다. 이 글들은 ‘동북아에 집단방위를 성립시키는 것 이 최종적 목적이며, 이를 위하여 대상국들 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덜레스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기 동북아시아 담당 부서의 맥클러킨(Robert J. G. Mcclurkin) 역시 ‘서태평양의 안보조 약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주 내에서 장기적인 목표로 두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77) 당시의 미국은 동북아의 3국을 상대로 긴급히 집단방위를 추진할 생각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54년 극동 정 책이 여러 사람의 피드백을 거쳐 조정되는 과정에서 서태평양 집단방위

75) “Memorandum of Discussion at the 210th Meeting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Held on Thursday, August 12, 1954”. August 12, 1954. FRUS, 1952–1954, East Asia and the Pacific, Volume XII, Part 1.

https://www.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12p1/d297. (검색일:

2019.11.13.)

76) “The Secretary of State to the Embassy in Japan”. August 5, 1954. FRUS, 1952–1954, East Asia and the Pacific, Volume XII, Part 1.

https://www.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12p1/d289. (검색일:

2019.09.17.)

77) “The Acting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 (McClurkin) to the Ambassador in Japan (Allison)”. September 16, 1954. FRUS, 1952–1954, East Asia and the Pacific, Volume XII, Part 1.

https://www.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12p1/d365. (검색일:

2019.09.17.)

실현의 현실적 어려움에 관한 문구를 유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하였는데,78) 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4년 당시 미국이 서태평양 집단방위의 실현에 가장 큰 장해 요인 으로 보고 있던 것은 일본, 그리고 일본을 둘러싼 관계들이었다. 이는 많은 선행 연구들이 지적했던 바와도 같다. 당시 미국은 ‘한일 간의 관 계 문제나 일본과 필리핀의 배상 문제 등이 먼저 해결되지 않으면 서태 평양 집단방위의 정착은 어렵다’고 보고 있었다.79) 그러나 그럼에도 동 북아 안보에 대한 미국의 궁극적 목표는 여전히 집단방위로 남아있었고, 이 내용을 포함한 54년의 극동 정책은 50년대 후반까지 계속 유지되었 다. 실제로도 미국은 집단방위 추진의 주요 걸림돌 중 하나였던 한일관 계를 개선시키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는80) 등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은 강경한 반일노선을 고수하던 한국에 ‘일본이 지역적 집단안보에 포괄되 는 것이 오히려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안전을 지키는 확실한 방법’이라 는 논리로 설득하기도 했는데,81) 이는 한-일 갈등을 해소하려는 미국의 노력이 어느 정도는 한국과 일본을 모두 포함하는 집단방위를 목표로 이 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54년, 동북아시아의 집단방위체제가 처음으로 논의되던 시 기 미국은 이 목표를 점진적·장기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는 반공산주의적 분위기가 미국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었던

78) “Memorandum by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 (Robertson) to the Secretary of State”. August 10, 1954. FRUS, 1952–1954, East Asia and the Pacific, Volume XII, Part 1.

https://www.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12p1/d293. (검색일:

2019.11.14.)

79) “The Acting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 (McClurkin) to the Ambassador in Japan (Allison)”. September 16, 1954. FRUS, 1952–1954, East Asia and the Pacific, Volume XII, Part 1.

https://www.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12p1/d365. (검색일:

2019.11.14.)

80) 일본 국회의사록, 第24回-衆議院-外務委員会-第57号, 昭和31年6月3日, 中川融의 발언 참고. http://kokkai.ndl.go.jp/. 검색일: 2020.02.17.

81) 윤석정. “이승만 정권과 일본의 재군비 (1953~1955)”, 『일본공간』 21권 0호 (2017), pp 136-137.

시기였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적 측면에서의 생각도 일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구상을 담은 조항은 1959년에 들 어서며 새롭게 제안된 극동 정책에서는 삭제되었고82) 60년대 즈음하여서 는 대한·대일정책에서도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었다.83) 성립이 어려울 것을 처음부터 알았음에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려진 구상이 불과 5년 만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본 논문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며, 이후의 챕터들에서 동북아 시아 집단방위의 의미 그리고 그 구상이 사라진 원인을 밝히고자 한다.

82) “48. National Security Council Report”. September 25, 1959. FRUS, 1958–1960, East Asia-Pacific Region; Cambodia; Laos, Volume XVI.

https://www.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8-60v16/d48. (검색일:

2019.11.25.)

83) 한국이나 일본이 지역의 다른 국가들과 협력과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도록 지원 한다는 식의 언급은 있지만, 그 이전과 같이 집단방위에 대한 직접적 기술은 나 타나 있지 않다. “334. National Security Council Report”. November 28, 1960.

FRUS, 1958–1960, Japan; Korea, Volume XVIII.

https://www.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8-60v18/d334. (검색일:

2020.01.14.) ; “175. National Security Council Report”. June 11, 1960. FRUS,

1958–1960, Japan; Korea, Volume XVIII.

https://www.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8-60v18/d175. (검색일:

2020.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