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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보 추구를 위한 북한의 대미전략

U. S. President Barac Obama and South Korea President Myung-Bak Lee

Ⅲ. 국가안보 추구를 위한 북한의 대미전략

1. 북한 대미전략의 기원과 역사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건국된 나라이기 때문에 건국 초기에는 소련 및 국제공산주의 진영에 자신의 국가안보를 의존할 수 있었다.

외교정책 역시 소련의 지시를 따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6.25 전쟁이 끝난 1953년 이래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

특히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중국과 소련의 대립은 북한으로 하여금

소련과

중국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는 자주외교를 강조하게 하였다. 1978년 중국의 등소평이 개혁을 시작하자 북한은 다시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

하기 시작했지만 1985년 소련의 개혁‧개방정책(Perestroika) 이후

,

특히

1989년

소련이 미국과의 냉전을 공식적으로 청산하고

1990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북한은 독자적인 생존방안을 강구함과 더불어 대미 외교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 북한은 구 사회 주의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미국, 일본 등 자유진영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에 주력했다.

1990년대 초반 미국은 냉전에 승리한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했고

북한의 운명은 미국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잔존하는 사회주의 국가를 붕괴시키는 정책을 취하는 대신 사회주의 국가들도 국제부대에 동참시키기 위한 목표를 가졌던 개입과 확대정책(Engagement and Enlargement Policy)을 전개하였다. 북한은 클린턴 대통령의 개입과 확대 정책에 편승, 미국 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외교를 펴 나가기 시작 했다. 물론 북한은 자력에 의한 생존방안으로 핵무기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이 핵개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 들였고, 1994년 봄에는 미국과 북한 간에 전쟁 발발 위협마저 고조된 적이 있었지만, 이 위기는 카터 대통령의 김일성 방문으로 회피되었고 결국 미국과 북한은 1994년 10월 핵문제를 임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공식적인 합의에 이르기도 했다.13

클린턴 행정부 당시, 북한이 미국과 핵합의에 이를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미국이 북한을 그렇게 심각한 위협, 즉 전략적 위협(Strategic

Threat)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문제를 임시로

봉합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약속을 이행하기

13_ William G. Hyland, Clinton’s World: Remaking American Foreign Policy

(New York: Praeger, 1999), pp. 132-133.

이전 북한은 저절로 붕괴 될지도 모른다고 낙관했었다.14

그러나 북한이

1994년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의심하던 미국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2001년 이후 클린턴 대통령과 북한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미‧북 간의 화해무드15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 행정부가 북한이 핵개발을 지속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클린턴 당시 이룩되었던 미‧북관계의 진전을 중지시켰으며 미국과 북한 관계는 긴장관계로 빠져 들어갔다.

북한은 사실 클린턴 행정부와의 핵동결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음이 곧 판명되었다.16

2. 9‧11 이후 미국의 대북인식과 대북정책

9‧11

이후 미국은 북한 및 북한 핵에 대해

9‧11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판이한 인식을 갖게 된다. 9‧11 이전, 북한 핵문제는 북한 핵이 확산되어 여러 나라, 특히 중동 국가들의 수중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문제였다. 미국은 제네바 합의에서 보듯이 북한이 핵동결 조치를 취하는 경우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소수의 핵폭탄이 미국에게 전략적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는 북한의 핵을 동결(凍結) 하는 것이었고, 북한이 핵폭탄을 더 이상 제조하지 않는 것은 미국이

14_ Selig S. Harrison, Korean Endgame: A Strategy for Reunification and U.S.

Disengagement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2), p. xvii.

15_ 클린턴 대통령 당시 북한 인민군 차수 조명록이 백악관을 방문했고(2000년 10월 10일)

미국의 알 브라이트 장관이 평양으로 김정일을 방문하는 등(2000년 10월 24일) 양국관 계는 상당한 정도 진전 된 듯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핵무장을 계속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해빙무드는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16_ 북한은 1994년 10월 21일 미국과 제네바 핵합의를 이루어 낸 이후, 플루토늄이 아닌

우라늄 농축에 의한 원폭개발 계획에 착수했다.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9‧11 이후 미국이 인식하는 북한 핵의 문제는 핵 동결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 변했다. 미국은 이제 핵을 사용한 테러리즘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북한의 핵은 동결되는 수준에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 폐기되어야 할 일이 되었다. 그것도 단순히 폐기될 것만이 아니라 완전히, 검증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해체되어야만 할 대상으로 다시 인식되었다.17북한 핵문제는 단순한 핵확산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미국을 직접 공격할 수도 있는 핵 테러리즘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을 미국에 핵 테러를 가할 수 있는 적국 중 하나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북한 핵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부시 행정부는 강압 정책은 물론 다양한 외교 정책을 구사,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

북한에게 군사력으로 압박을 가하는가 하면,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정권 교체 전략도 구사 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북한은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명명했으며

18 부시 대통령은 2005년 5월 27일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졸업식 연설을 통해 김정일 정권과 같은 폭압 정권을 군사공격으로 제거 할 수 있다는 의미의 언급을 하기도 했다.19

17_ David Albright and Corey Hinderstein, Dismantling the DPRK’s Nuclear Wea-

pons Program A Practicable, Verifiable Plan of Action, Peace work, No. 54 (Washington D.C.: The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January 2006), p. 8.

18_ 부시 행정부는 2005년 1월 18일 상원 외교관계 위원회에서의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

장관의 언급을 통해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 “Outposts of Tyranny” 중 하나라고 명명 한다. 미국이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명명했다는 것은 북한 정권과 북한의 주민을 구분하는 정책을 시행하겠다는 의미이며 북한정권을 체제 교체 하겠다는 의 미를 함축한 말이 될 것이다.

19_ 부시 대통령의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축사는 “미국의 군사기술의 발달은 중요한 측면

에서 전쟁의 균형을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지금 더 먼 곳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민간 인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적들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새로운 전쟁의 시대 를 맞아 우리는 국가가 아닌 정권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런 사실은 그동안 죄없 는 사람들 틈에 끼여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았던 독재자와 테러리스트들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21세기 우리는 죄지은 자를 표적으로 삼을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2번째 임기 후반 이후

,

대북정책을 보다 온건한 기조로 바꾸기 시작했다. 북한의 의심스러운 핵 폐기 제스처들에 대한 대가로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테러지원국 목록에서 해제시켜 주기도 했다.20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2009년 1월 이후 미국과 북한의 관계는 오히려 부시 행정부 2기보다 더욱 악화된 상황이다. 북한은 지속적인 강경정책으로 오바마 정부를 압박하고 있으며 오바마 행정부는 더 이상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보상을 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선거기간 중 어떤 독재자하고도 대화할 수 있음을 강조한 오바마 였지만 오바마는 대통령 취임 후

9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북한과 6자

회담을 비롯한 어떤 공식적인 대화도 시작하지 못한 상태이다. 물론 두 나라의 대화가 시작되지 못한 책임은 오바마 정부 취임 이래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을 강행하며 지속적으로 강공책을 펼쳐온 북한의 책임 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21

오바마 행정부는 부시 행정부 당시 미국이 북한 핵문제 해결에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북한에 대해 환상을 가지지 않을 것이며, 미국은 북한과 대화를 할 경우 북한에게 전략적 기선을

것이며, 죄없는 사람들을 보호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기 더 쉬워 질 것이다.”라는 대단히 공격적인 내용의 언급이었다. Remarks as Delivered by Acting Deputy Secretary of Defense Gordon England, Navy-Marine Corps Memorial Stadium, the U.S. Naval Academy, Annapolis, Maryland, Friday, May 27, 2005.

20_ 2008년 10월 21일 북한은 1988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이후 20년 만에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21_ 북한은 오바마 정부 시작 직후부터 도발적인 입장을 지속해 오고 있다. 2009년 4월

5일 대륙간 탄도탄 발사용 미사일을 인공위성이라며 발사 했고, 5월 25일 두 번째 핵실험, 5월 25일부터 3일간 미사일 6발 발사, 7월 2일, 7월 4일 각각 미사일 4발, 7발 발사 그리고 최근 10월 12일 미사일을 5발 발사하는 등 북한은 오바마 취임 이후 지속적으로 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잡히지 않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22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이

2차

핵실험을 단행한 뒤 1차 핵실험 당시보다 훨씬 강력한 제재조치인 유엔 안보리 결의안 1874를 통과 시킨 후 무기를 선적하고 미얀마를 향하던 북한 선박 강남

1호의 항해를 무산시키는 등 북한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과 대화를 전개하기 시작했지만

6자회담을 개최하기 위한 조건으로 미‧북 양자대화를 할

것이며, 대화를 하는 경우라도 북한에 대한 제재를 지속한다는 강경책을 고수하고 있다.

3. 반테러 전쟁 시대 북한의 대미전략과 목표

9‧11

이후 미국이 북한을 미국에 대해 가장 위험한 테러지원국 3개국의

하나로 지정한 후, 북한 역시 미국에 대한 적대정책을 지속적으로 전개 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1994년 미국과 약속했던 핵합의를 어기고 우라늄 농축 방법을 이용한 핵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의 특사파견 제안을 서해에서 경계임무를 담당하고 있던 한국 해군을 기습 공격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2002년

6월 25일

부시 행정부는 북한 측에 대화를 위한 특사 파견을 제의한 적이 있었다.

북한이 이에 응할 경우 미국은 국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인 케리 특사를 7월 10일 평양에 파견 할 예정이었다

.

북한은 미국의 제안에 답하기 전인 6월 29일 서해상에서 경계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대한민국 해군을 공격, 남북 양측 해군 수십 명이 전사 하는 전투를 도발했다.

바로 한국이 월드컵 축구대회를 개최하던 기간의 일이었다. 이처럼

22_ Abraham M. Denmark, Nirav Patel, Lindsey Ford, Michael Zubrow, Zachary

M. Hosford, No Illusion: Regaining the Strategic Initiative with North Korea (Washington D.C.: CNAS Working Paper, June 11,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