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그로테스크를 통한 미학적 효과
2. 성, 폭력, 죽음
섹슈얼리티(Sexuality)에서 성(性)은 성 그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변별적 기능을 가진 두 육체의 결합만을 의미한다면, 섹 슈얼리티는 성교나 성행위와 같은 구체적인 성행동을 포함하고 더욱 넓고 다 양한 성적 욕망과 실천, 그리고 정체성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즉 인 간의 성생활과 연관되는 행위, 관계방식, 선호양식, 사회적 규범, 심리적 구조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 바로 섹슈얼리티이다.76)
이에 대해 미국의 작가 조안나 러스(Joanna Russ)는 섹슈얼리티를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여성은 성적 억압으로 인해 고통받기 때문에 성혁명이 여성과 남성을 모두 해방시켜 준다는 입장이다. 즉 성행위의 합의 와 관계없이 성행위는 모든 금지된 것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태 도이다. 둘째, 성해방이 적어도 현재의 남성 중심적 문화에서 드러나는 방식 이라면 여성에게 불리하고 남성의 특권만을 키워준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여성시에서 섹슈얼리티는 복잡한 양상을 띠며 남성/문명으로부터 빼앗긴 성적 결정권, 성적 소유권, 성적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저항과 밀착 되어 있다. “가부장적 사유에서 여성의 성은 언제나 남성의 쾌락을 충족시키 는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77)
한편 90년대 몸의 발견은 우리 시의 소재주의에서 다양성 획득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 ‘아랫도리’는 몸에 대한 부분발견에서 전체발견으로, 몸에의 전 체적인 통찰이 가능해졌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문화적인 학습 이 머리와 가슴을 주로 다루어왔었는데, 회음, 자지, 보지, 부랄, 똥구멍, 다리 등의 발견은 신성불가침에 대한 종교적(혹은 정신적) 단속의 판도라의 상자 를 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재복은 이러한 발견에 대해 “몸의 역동의 근원은 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음부나 성기, 자궁에 있으며, 여기에서 비롯되는 역동적인 에너지에 의해 몸은 혼동 속의 질서라는 복합적이면서 다채로운 세계를 드러내는 것”78) 이
76) 송명희, 『섹슈얼리티․젠터․페미니즘』, 푸른사상, 2001, 61-65면 77) 김순아, 앞의 논문, 86면
라고 주장하였다.
김언희 시에는 섹슈얼리티한 표현들인 자지, 보지, 좆, 사타구니 등이 자주 등장한다. 김언희의 시에 있어서 섹슈얼리티는 가부장적 사회체제 속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억압을 나타내며, 이에 대해 김언희는 무조건적인 수용에서 벗 어나 적극적인 반항과 파격적인 표현으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녀의 시에서 나타나는 섹슈얼리티는 ‘짐승보다 더한 짐승이 그 고기에 입을 대’거 나 ‘이 개와 다를 바 없는 아버지를, 알미늄 모조음경을 단’ 등 금속적인 폭력 의 묘사가 대부분이다.
집?
어느 집?
어느 뱀 구덩이?
포옹으로 죽이고 입맞춤으로 죽이는, 어느 귀머거리
독사 굴?
-김언희,「집」전문79)
김언희의 집, 즉 자궁은 생명의 성소가 아니다. 그녀의 섹슈얼리티는 생명 탄생의 수단이거나 상호 통정에 의한 쾌락의 획득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끄는 폭력의 지옥도이다.
그녀의 많은 시 속에서는 사람과 기계, 동물적인 살점, 음식,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도구들도 성적환상 혹은 성적 상황에 대한 묘사로 설명되고 있 으며 대부분의 시에서 시적 화자는 상처 입거나 상처 입히고자 하는 상태이 고 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복수하거나 죽음으로 상황을 종결시키려 한다.
김언희의 시에서 말하는 섹슈얼리티는 죽음으로 내모는 폭력의 조각모음이 다.
식빵 한 조각을 깔고 식빵 한 조각을 덮고
78) 이재복, 『한국현대시의 미와 숭고』, 소명출판사, 2012.
79) 김언희, 『뜻밖의 대답』, 민음사, 2005.
다져진 살코기가 오한을 참고 있다
짓무른 상추 혓바닥에 검은 반점들이 번지고
엎어놓은 스텐식기 아래
두 손을 사타구니에 찌른 채 도르르 몸을 말고 죽어 있는 괄태충 행운목은,
토막난 몸통에서 돋아나오는 잎사귀를 증오한다 제 잎사귀가
아닌
-김언희,「햄버거가 있는 풍경」전문80)-
위의 시에서 햄버거는 남녀의 성적인 장면을 표현하고 있으며, 다져진 살 코기가 오한을 참고 있는 것은 불합리한 상황 혹은 체제에서 난도질당한 자 아가 불편한 상황을 참고 견디는 것으로 해석된다. 시의 마지막에서는 토막 난 몸통에서 돋아나오는 잎사귀를 제 것이 아니라 부정하고 증오하는데, 이 는 현실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이라 추측된다.
개같은 똥같은
갈보같은 구멍
천역에 찌들린 구멍, 피로로 썩어가는 구멍, 이미
끝장이 난 구멍
80) 김언희,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자는 저 여자』, 민음사, 2000.
끝장이 난 다음에도 중얼거리는 크르륵거리는 구멍, 풍선껌을 씹는, 말랑말랑한 이빨로 내 머리를 씹는, 옴쭉 옴쭉 나를
삼키는 구멍
황혼이 질 때면
헐, 헐, 헐, 웃는
구멍
- 김언희,「황혼이 질 때면」전문81)-
위 시에서는 노골적으로 잔혹한 행위를 나타내기 위한 시어들의 사용이 눈 에 띈다. 위 시에서 구멍은 여성의 성을 상징하며, ‘개, 똥, 찌들린, 썩어가는, 끝장이 난 구멍’은 여자의 성이 폭력에 의해 지배당하고 억압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 대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에서 나아가 크르릉 거리고 머리를 씹는다는 표현은 여성성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대상에 반항하 고 복수심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의 마지막에는 웃는 구멍이라고 표현하며 현실의 상황을 조롱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나를 입고 나를 신고 나를 걸타고
한 입 또 한 입 나를
81) 김언희,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자는 저 여자』, 민음사, 2000.
베어무는 당신 피 빨고 노래 빨고 질겅질겅 씹어 재떨이에 내뱉는 당신
온몸에 남은 푸른 이빨자국들을 사랑할께요 시퍼렇게
사랑할께요 가지 말아요 버리지 말아요 나의 기둥서방 당신
붙잡을 바짓가랭이도 없는 당신 입에서 항문으로
당신의 음경에 꼬치 꿰인 채
뜨거운 전기오븐 속을 빙글빙글빙글
영겁회귀
돌고 돌께요 간도 쓸개도 없이
-김언희, 「늙은 창녀의 노래2」전문82)-
위의 시도 앞의 시들과 같이 남녀의 성교가 시의 큰 주제를 형성하고 있 다. 시적 화자인 늙은 창녀는 ‘당신’이란 존재를 입고, 신고, 걸타고, 베어물어 피를 빨아 씹어 재떨이에 내뱉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남성이 여성 에게 가학적인 행위를 하고 있으며 성적 학대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음경 을 꼬치에 꿴다는 표현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녀의 시에서 성적 대상은 주로 아버지로 대표되는데, 그녀들의 시 속에서 화자인 나는 대체로 가학적인 행 위와 성적 행위를 당하는 대상으로 표현되며, 이후 화자는 복수의 대상으로 그녀의 아버지나 혹은 다른 대상을 타자화해 남성 자체에 대한 잔혹함과 복
82) 김언희, 『트렁크』, 세계사, 1995.
수심, 증오심, 혐오감 등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영겁회귀’라는 시어로 남성을 마귀로 표현하며 이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큰 것으로 표출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그녀의 시 그라베에서 성과 죽음, 폭력 등으로 점 철되어 나타나고 있다.
열두 살에
폐경했어요, 밑구멍에 거미줄 치랴 쳤어요, 누군가에게 파고들면 누군가의 모든 것이 썩어
문드러졌어요, 나의 지옥이, 나의
참호였어요, 침대에서 잠들었는데 물이끼 시퍼런 욕조 속에서 깨어나곤 했어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랐어요, 결정적인 순간마다
배터리가 나가고, 눈이 멀 때까지 꾸역꾸역 마른밥을 먹었어오, 광풍에 구르는 모자를 쫓아다녔어요, 두 눈이
멀 때까지, 모든 걸 웃어넘기다
그 웃음에
소름이 끼쳤어요, 팔월에도
허연 입김이 나왔어요, 유령에게도 유령이 있었어요, 범접
못할 입 냄새를 풍기는,
- 김언희,「정황 D」전문83) -
위 시에서도 화자는 열두 살에 폐경을 하고, 자신과 닿는 누군가가 썩어 문드러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열두 살에 폐경을 하는 경 우는 매우 드물며, 위 시에서 폐경을 했다는 의미가 실제 생리적 의미보다 자신의 여성성을 상실했다는 뜻에 더 가깝다 볼 수 있다. 또한 실성한 듯 웃 다가 소름이 끼치고 허연 입김이 나왔다는 부분은 자신이 처한 상황,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 부정적인 현실을 이겨내려 노력하지만 곧 현실은 여전히 같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친다고 표현하였다. 마지막 연에 범접 못할 입 냄새를 풍기는 유령은 자신을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한 장본인으로 해석 되며, 12살에 폐경을 하여 유령 같은 삶을 사는 자신보다 더 끔찍한 상대를
‘냄새를 풍긴다’는 표현하고 있다. 이는 그녀의 시에서 자주 사용되는 오물, 오염된 것 등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표현이라 할 수 있으며, 마지막 연에 이를 사용함으로써 김언희 시의 고유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 여자의 몸 속에는 그 남자의 屍身이 매장되어 있었다 그 남자의 몸 속에 는 그 여자의 屍身이 매장되어 있었다 서로의 알몸을 더듬을 때마다 살가죽 아래 분주한 벌레들의 움직임을 손끝으로 느꼈다 그 여자의 숨결에서 그는 그의 屍臭를 맡았다 그 남자의 정액에서 그녀는 그녀의 屍汁 맛을 보았다 서 로의 몸을 열고들어가면 물이 줄줄 흐르는 자신의 성기가 물크레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屍姦이야 근친상간이라구 묵계 아래 그들은 서로를 파헤쳤다 손 톱 발톱으로 구멍 구멍 붉은 지렁이가 기어나오는 각자의 유골을 수습하였다 파헤쳐진 곳을 얼기설기 흙으로 덮었다 그는 그의 破墓 자리를 떠도는 갈 데 없는 망령이 되었다 그녀는 그녀의 破墓 자리를 떠도는 음산한 鬼哭聲이 되 었다.
-김언희,「그라베」전문84)-
위의 시 그라베는, 이태리말로 ‘아주 느리게’를 뜻하기도 하며, 영어로는 무
83) 김언희, 『요즘우을하십니까』, 문학동네, 2011, 22면.
84) 김언희,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자는 저 여자』, 민음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