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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물질로의 DNA 발견 및 구조규명에 대한 과학사 및 과학사에 반

Dalam dokumen 저작자표시 (Halaman 80-96)

(1) 유전물질로의 DNA 발견 및 구조규명에 대한 과학사

(가) 멘델의 유전법칙(1822 - 1900)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사로서 수도원의 농장

•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와 맬서스의 ‘인구론’이라는 타학문 과의 연계를 통해 진화론을 주장한 점.

가설 설정과 예측

• 핀치새가 다양한 부리를 갖게 된 원인을 추측하는 과정에서 먹 이에 따른 적응이라는 가설로 다양한 변종들이 출현하게 되었 을 것이라는 예측으로 자연선택설을 주장한 점.

과학 지식의 역사성

• 자연신학으로 인해 진화론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 기에서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한 점.

창의성 • 다윈의 진화론이 ‘지질학 원리’와 ‘인구론’의 영향을 받은 점.

과학과 문제 제기

• 진화론 이후에 유전적 변이의 출현원리와 성 선택 그리고 감정 을 진화적 관점에서 해석해낸 점.

자료의 분석과 해석

• 다윈이 핀치새의 부리라는 자연 현상을 먹이에 따른 분화로 분 석하여 진화에 대해 생각해낸 점.

과학 연구 과정 에서의 협력과

공동 연구

• 다윈보다 빨리 진화에 대한 논문을 쓴 월러스가 다윈과 함께 공 동저자의 형태로 논문을 발표한 점.

과학적 이론과 법칙

• 다윈의 진화론과 멘델의 유전법칙을 통해 이론은 현상을 설명하 는 것이며 법칙은 현상을 기술하는 것이라는 점.

과학적 지식에서 사회·문화의

영향

• 다윈의 진화론이 사회적으로 잘못 해석되고 적용되어 강자의 논리 를 정당화하고 우생학을 통해 인종차별을 정당화할 때 사용된 점.

에서 9년간의 완두콩 교잡실험을 통한 자료로 유전법칙을 설명하였다. 이 연구에서 멘 델은 완두콩의 형질이 잡종으로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였다. 두 형질 중 첫 번째 자손 세대에서 한쪽 부모의 형질만 발현이 되는데 이때 발현되는 형질을 우성이라 하였고 다시 이 첫 번째 자손을 다시 교배시키면 두 번째 자손세대에서 첫 번째 자손세대에서 발현되지 않았던 형질을 갖는 개체가 나타나는데 이를 열성이라 하였다. 멘델은 이 실 험결과에 의아해 하였다. 당시 유전현상은 양친의 형질을 물감을 섞듯 혼합되는 ‘혼 합설’이었는데 이런 방식은 첫 번째 자손에서 어버이의 형질이 나타나지 않다가 두 번째 자손에서 갑자기 발현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자손에서 첫 번째 자손에서 보이지 않던 형질이 발현되는 개체의 비율이 전체의 1/4로 나타나는 것에 주목하여 멘델은 부모의 형질이 후대에서 섞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 었다. 멘델은 이 실험결과가 보여주는 유전 법칙에 대해 설명하고자 완두의 키뿐만 아 니라 떡잎의 색, 콩깍지의 색, 씨의 형태라는 다른 여러 대립형질을 이용하여 동일한 실험을 수행한다. 그 결과 서로 다른 형질임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결과가 나타남을 관 찰하여 ‘유전 인자’라는 것이 쌍을 이루며 이 ‘유전인자’는 다음세대로 전달될 때 대립형질이 서로 결합되지 않고 따로 분리되어 양친으로부터 각각 하나씩을 받게 된다 는 것을 알아내었다. 멘델은 자신의 실험을 1865년 뷔론 자연사 학회에서 ‘식물잡종 에 대한실험'(Versuche über Pflanzen-Hybriden, 1865)이란 제목으로 발표하고 당대 저명한 학자들에게 자신의 연구 결과를 알렸으나 아무도 이 발표에 관심을 갖지 않았 고 이해하는 사람 역시 없었다.

이 학자들 중에 포함된 다윈은 당시 진화론으로 유명한 학자였지만 진화에서 중요 한 형질의 다음세대로의 유전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는 판게네시스 (pangenesis)이론으로 체세포에 있는 제뮬(gemmule)이 생식세포에 모여 다음세대로 전 달된다는 어떻게 보면 라마르크(chevalier de Lamarck)의 획득형질의 유전을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유전을 설명하였다. 안타깝게도 다윈은 멘델의 논문을 뜯어보지도 않은 채 방치하였으며 멘델의 업적은 이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35년간 묻혀있게 된다. 멘델의 연구가 당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점은 사람들이 그를 과학 자가 아닌 신부로만 생각하였기 때문에 저명한 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것도 있었 다. 그리고 그 당시 과학계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된 때라서 대다수의 과학자 들이 진화론에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란 점도 멘델의 실험은 주목받지 못한 이유 중 하 나였다. 게다가 그의 연구는 당시 유전현상이 ‘혼합설’로 이해되던 시대에 ‘입자 설’의 개념을 도입했기에 사람들에게 생소한 개념이었으며 생물학 연구에 수학적 통

계의 기법을 사용한 그의 논문은 당시 생물학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쑨이린, 2009).

멘델의 업적은 그가 죽고 난 후에 그 진가를 평가받게 된다. 그의 논문이 발표되고 35년이 지난 후 식물학자인 휴고 드브리스(Hugo de Vries, 1848-1935)는 패랭이꽃의 털이 유전되는 규칙성에 대해 연구하다 우연히 멘델의 논문을 접하게 된다. 그는 이 내용을 ‘독일 식물 학회보’에 ‘교배의 분리 규칙에 관하여’(Das Spaltungsgestetz der Bastarde, 1900)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연구 업적과 합께 멘델의 실험의 재발견을 알렸다. 이와 같은 시대에 카를 코렌스(Carl E. Correns, 1864-1933)역시 멘델의 법칙 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옥수수와 완두콩을 이용한 독자적인 식물교배를 통해 유전의 법칙에 대해 알아낸다. 하지만 그는 이미 멘델이 자신과 같은 실험을 통해 유전의 법 칙을 알아낸 것을 알게 되었고 1900년 4월 21일 드브리스의 논문을 접한 후 ‘잡종교 배 행위에 관한 멘델의 법칙’(G. Mendel's Regel über das Verhalten der Nachkommenschaft der Rassenbastarde, 1900)을 발표하였다. 멘델의 법칙은 또한 체르 마르크(Gustav Tschermak von Seysenegg, 1871-1962)에 의해서도 발견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완두콩 교배실험에서 발견한 규칙이 과거 멘델이 말한 것임을 깨닫고 드브리스 와 코렌스의 논문이 발표된 것을 접한 후 ‘완두의 인공교배’(Über künstsliche Kreuzung bei Pisum sativum, 1900)라는 논문을 드브리스와 코렌스에게 보내 자신의 발견을 알리게 된다. 이들 세 명의 과학자들은 각자 독립적인 연구를 통해 유전의 법 칙을 알게 되었지만 자신들은 유전 법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단지 멘델의 연구를 재 발견 했다고 하며 자신들의 공적을 멘델에게 돌렸다(쑨이린, 2009; 오진곤, 1996; 장 혜경, 2006). 이 시대의 과학자들과 그들의 주장 내용을 [표 Ⅳ-15]로 요약 하였다.

시대 대표 과학자 주장

1865 Gregor Johann

Mendel ‘식물잡종에 대한 실험'(1865)을 통해 유전법칙을 주장함.

1900 Hugo de Vries ‘교배의 분리 규칙에 관하여’(1900)를 통해 멘델의 유전 법칙을 재발견함.

1900 Carl E.

Correns

‘잡종교배 행위에 관한 멘델의 법칙’(1900)을 통해 멘델 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함.

1900

Gustav

Tschermak von Seysenegg

‘완두의 인공교배’(1900)를 통해 멘델의 유전법칙을 재발 견함.

[표 Ⅳ-15] 멘델의 유전법칙이 발표될 당시 과학자들과 그들의 주장

(나) 멘델 이후의 유전학(1909 - 1941)

1900년 멘델의 유전법칙이 재발견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유전학이 생물학의 한 분야 가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베이트슨(William Bateson, 1861-1926)은 1900년 5월 왕립 원예학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멘델의 법칙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멘델의 유전법칙 을 과학계에 알리는데 공헌하였으며 그의 저서 ‘멘델의 유전 원리’(Mendel's principles of heredity, 1909)를 통해 유전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설명하였다. 지금 까지 쓰이는 많은 유전학의 전문용어들은 이 책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며 특히 이 책에 서 그는 유전질환중 하나인 알캅톤뇨증의 증상을 유전자와 효소와의 관계에서 찾아 유 전자와 유전정보의 발현의 관계에 대해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당시 과학계 에서 유전자와 효소라는 용어가 이제 막 등장한 시점이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30년이 지난 1941년이 되어서야 조지 비들(George W.Beadle, 1903-1989) 과 에드워드 테이텀(Edward L.Tatum, 1909-1975)의 붉은빵곰팡이 실험을 통해 밝혀지 게 된다. 이들은 이 실험은 ‘빵곰팡이 속에서의 생화학 반응의 유전학적 조 절’(Genetic Control of Biochemical Reactions in Neurospora, 1941)이라는 논문을 통해 유전자가 효소의 발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밝혀내었고 1유전자 1효 소설의 개념 정립의 기반이 된다. 멘델의 법칙이 아직 학계에 재발견되지 않았을 19세 기 후반 세포학의 발달은 세포에 있어 핵의 중요성에 주목하였다. 과학자들은 세포의 분열에 있어 염색체의 분리현상을 통해 체세포분열과 감수분열을 알고 있었으며 1900 년 멘델의 법칙이 재발견된 후 이러한 핵의 분열과 멘델의 법칙이 말하는 유전현상과 의 유사성을 인식하여 유전자란 것이 염색체에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품게 되 었다. 베이트슨은 염색체에 유전자가 있다는 주장을 처음에는 반대하였지만 모건 (Thomas Hunt Morgan, 1866-1945)의 초파리 실험을 통해 염색체에 유전자가 있을 것이 란 입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모건은 멘델의 법칙을 접하고 나서 이 법칙이 완두콩뿐만 아닌 동물에게서도 적용이 되는지와 아직 실험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추측단계일 뿐인 유전인자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다. 모건은 1908년에 엑스레이 광선을 통한 초 파리의 돌연변이의 유발을 이용하여 연구를 시작 했는데 1910년 5월 암실에 방치한 초 파리들 중 기존의 붉은 눈이 아닌 흰 눈 초파리가 탄생하게 된다. 흰 눈의 초파리와 붉은 눈을 가진 초파리의 교배실험에서 처음 1세대 자손들이 모두 붉은 눈 이였다는 것 까지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부합하였다. 하지만 1세대 자손들을 다시 교배하여 얻어 진 2세대 자손들에서는 멘델의 이론과 달리 붉은 눈 초파리와 흰 눈 초파리가 3:1로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흰 눈의 암컷은 한 마리도 없는 결과에 모건은 흰 눈이라는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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