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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정에 의한‘김일성

항일무장투쟁’ 의

신화화( 神話化 )

북한의 정권이 소련에 의하여 수립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이다. 소련이 군사적으로 북한지역을 점령하였고 소련에서 500여 명의 고려인들을 차출하여 정권수립의 실무역할을 하게 하였으 며, 소련군 88여단에서 김일성을 차출하여 최고지도자로 옹립하 였다. 김일성이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 여 빨치산파를 지배적 집단으로 성장하도록 지원하고 육성하였 다. 또한 소련은 빨치산파가 지배적 집단으로 안착하도록 하기 위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새정권의 정당성의 논리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소련의 계획과 노력이 오늘날 북한체제의 뿌리가 되었고 골간이 된 것이다. 즉, 소련이 북한체제 형성과정에서 행 한 역할은 이처럼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역할에 대한 자 료가 많이 공개되기는 하였지만 아직 소련의 역할과 그 영향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부분이 많다.

소련의 역할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기 때문에 북한체제의 특성 에 대해서도 아직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가령, 북한체제 의 형성과정을 소비에트화라는 관점에서 보는 시각이 있고 또 다 른 한편에서 김일성 자력혁명 발전의 관점으로 북한체제의 형성 을 보는 시각도 있다. 물론 후자는 북한 당국의 공식입장이지만 국내와 일본의 일부의 연구중에는 이를 은연중에 뒷받침하는 연 구도 있다. 가령 와다 하루끼의 연구가159 김일성 자력혁명발전론 의 전형적인 예이다. 와다 하루끼는 유격대국가론이라는 개념으 로 김일성 일파인 빨치산파들이 자력으로 경쟁세력을 제거하여 권력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그들의 논리에 따라 체제를 형성하 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김일성의 자력혁명발전의 관

159 와다하루끼,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점을 지지하는 관점이다. 김일성의 빨치산파가 자력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체제를 형성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와다하루끼의 관 점으로는 초기에 김일성이 어떻게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최고지도자가 된 뒤 어떻게 그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북한체제의 형성에 관한 소비에트화 관점은 북한에서의 인민정 권 수립과정은 소련의 계획된 프로그램에 따른 정치과정으로 이 해한다. 김일성의 권력장악에 대해서도 소비에트화 관점은 소련 이 김일성을 옹립하여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키웠다는 관점이다.

그에 반해서 김일성 자력혁명발전론은 김일성이 조직 영도한 항일무장투쟁이 “첫 민족해방전쟁, 혁명전쟁으로서 조국해방의 최후 승리를 이룩한 역사적 대사변”이며 나아가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이 정권수립의 역사적 뿌리였다고 설명한다.160 즉, 김일성의 자력혁명발전의 관점은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토대로 그 세 력이 북한을 해방하여 북한정권을 수립하였다는 관점이다.

김일성 혁명발전론에 입각한 북한의 주장은 소련이 북한을 점 령하여 소련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을 대거 동원하여 친소정권을 수립한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는 역사왜곡이지만, 1948년 소련군 철수이후 김일성이 북한체제의 형성을 주도하였다고 주장하는 측면에 대해서는 반박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소비에트화의 관점에 대한 보완적 연구가 필요하다. 소 련이 북한의 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 을 하였기에 김일성이 정권초기부터 정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

160 김광운, 󰡔북한정치사 연구 I : 건당·건국·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pp. 18~21.

고 소련 군정 철수이후에도 김일성이 지도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 지에 대한 원인 분석이 요구된다.

소비에트화의 관점이 더욱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김일성이 최고지도자로 육성되고 빨치산파가 지배적 세력으로 형성되도록 하기 위해서 소련이 어떻게 계획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그들을 지 원하고 실천하였는지를 논증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장은 소련이 김일성을 최고지도자로 옹립하고 그의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정당성의 근거로 활 용하고, 같은 방식으로 빨치산파들을 지배집단으로 육성하는 과 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소련의 북한 점령과 친소정권의 형성

일제 패망과 더불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대가 북한지역을 소 비에트화하여 친소정권을 수립하였다는 것은 소련에서 공개한 공식 문서들이 증명하고 있다. 소련의 북한에 대한 지배권 확보 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동북아에 대한 지배권 확장, 부동항의 확보, 미국에 대한 견제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였 다고 볼 수 있다.

소련이 북한에 친소정권을 수립하였다는 것은 당시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한 소련파 고려인들의 증언, 당시 소련 담당자들의 증언, 최근 공개된 소련의 공식 문헌에서 잘 드러나 있다.

소련이 북한에서 친소 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 은 정치기구를 수립하는 것과 더불어 최고지도자와 권력엘리트

들을 소련을 지지하는 인물로 채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현지 공산주의자들에 의지하여 공산화 를 추진할 수 없었던 북한 상황은 소련의 전술에 적지 않은 영향 을 미쳤다. 이는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운동이 아주 미약했기 때문 이다. 1925년 창당된 조선공산당은 자체내의 파벌싸움으로 인해 코민테른의 특별결정에 의해 1928년 해산되었다. 또한 철저한 일 본 경찰의 통제와 극심한 탄압 때문에 비합법적으로 활동을 전개 한 소수의 공산주의자들만이 주로 서울과 한반도에서 보다 발전 된 지역인 남부지방에서 활동하였다. 그 결과 소련 군정당국은 북한점령 초기부터 심각한 간부요원 문제에 직면하였다. 즉 북한 에는 책임있는 직책을 맡길 만한 현지 공산주의자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161

초기단계에서 소련 군당국은 당시 평양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 치가였던 조만식을 자기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희 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가을 소련군 장교들 은 조만식이라는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를 여러차례 만나서 구 성중인 행정기구의 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교섭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소련 군정당국은 현지 민족주의자들과의 제휴가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만식을 우선적으로 제 외하였다. 민족주의는 공산주의와 완전히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 다.162

그래서 소련은 북한 정권의 간부들을 대거 소련에서 데리고 왔

161 안드레이 란코프, 󰡔소련의 자료로 본 북한 현대정치사󰡕}(오름, 1995), p. 104~

105.

162 위의 책, pp. 68~70.

다. 소련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 중에서 차출해 온 것이다. 소련의 고려인들이 북한에 오게 된 것은 3가지 정도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해방직후 소련 군인의 신분 으로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온 사람들이며, 두 번째 그룹은 1945년 9월부터 10월에 걸쳐 징병업무를 관할하던 특수기관인 군 사동원부를 통하여 선발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허가이를 포함하 여 모두 12명으로서 군인처럼 징집되어 1945년 10월 29일 우즈베 키스탄의 타시켄트를 출발하였으며 북한으로 파견, 제25군 참모 부 관할하에 두었다. 세번째 그룹은 1947년이후 기술전문가 혹은 정부기구내 각 분야에 고문으로 파견된 사람들이다.163 소련파중 에서 가장 거물급은 허가이이다. 그는 1945년 11월에 북한에 도 착하자마자 지도적 역할을 맡았으며, 1945년말에 이미 형성되기 시작한 북조선 공산당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그는 소 련파 한인들 중에서 북한 공산주의체제의 국가기관 창설 작업에 직접 참여한 최초의 인물이다.

소련파가 숙청되던 1955년 10월 당시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을 지냈던 정상진의 증언164에 의하면 소련에서 북한으로 나갔던 고 려인 간부는 428명이며 1955년~1956년 숙청당할 때 까지 이들 소련계가 북한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북한의 각 부문 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였는데 각 부처의 차관직을 차지하고 실권 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즉, 각 부처의 실세는 소련파 고려인들이 었다. 정상진의 증언에 의하면 각성의 부상으로서 북한 정국의

163 소련파 형성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정상진 (1955년 10월까지 북한 문화선전 성 부상, 북한에서의 이름은 정율) 2004년 5월 3일~5월 10일 면접; 2006년 10월 13~14일 재차 면접.

164 정상진 인터뷰, (2004년 5월 3일~5월 10일).

실무자 실세 역할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 20명이었다고 한다.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허가이를 비롯하여, 문화성 부상 태성수, 육 군대 부총장 기석복, 선전성 부상 정상진, 최고재판소 부소장 김 봉철, 임업부 부상 이용석, 내무 부상 방학세, 외무 부상 박동추, 법무 부상 김택영, 러시아담당 서기 문예리(문일), 교통 부상 박 의왕, 고급당학교 교장 김승완 등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허가이 는 1953년에 김일성에 의하여 자살을 위장한 방식으로 살해되었 다. 허가이가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졌기 때문에 김일성은 허가 이를 가장 먼저 제거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각 군부대에도 소련 고문이 있었다. 책임자 자리에는 전부 김일 성 계열을 앉혔지만 실세는 소련파들이었다. 당시 군부의 인사들 로서는 최용건, 최현, 김책 등인데 오랫동안 빨치산활동을 하던 사람들로서 대개는 교육을 받지 못하여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정 상진의 증언에 의하면 최현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 라고 한다.165

대체적으로 소련파 한인들은 각종 기관의 장으로 임명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소련의 지배에 대한 불만을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제2인자’로 있었으나 실권자 였기 때문에 제반 조직 활동을 통제하거나 지도하는 일이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 1950년 북한 정부의 각료중 3명의 부장만을 소련 파가 차지하였으나 부부장급은 6명이나 되었다.166

소련파가 결국 북한의 정권과 체제를 창설한 실무자들이다. 정

165 박창욱 (한국전쟁 당시 조선족으로서 북한군에 지원하여 참전) 인터뷰, (2004 년 2월).

166 정상진 증언; 안드레이 란코프, 󰡔소련의 자료로 본 북한 현대정치사󰡕, p.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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