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복수의 부정을 통한 회한과 체념
2015년 11월 명동예술극장에서 고선웅에 의해 공연된《조씨고아, 복 수의 씨앗》은 중국 고전의 핵심을 포착해 지금 우리의 삶을 비춰주는,
‘고전의 재해석’에 대한 창의적인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 작품 안에는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성찰, 그리고 배우 의 신체를 통해 구현되는 연극적인 형식 실험들과 서사적이면서도 멜로 드라마적인 극작과 연출 등이 모두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고선웅은 빠른 대사와 과장된 신체언어를 사용하여 판타지적인 무대 에서 대중의 감각을 능란하게 다루며 고전물에서부터 시대극을 포괄하는 연극들로 평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서양 고전을 재해석한 연극들에 서 그는 음악과 춤, 카툰과 애니메이션, 삼류 멜로와 액션, 신파 등을 발 랄한 상상력으로 섞어 놓고 마냥 웃기면서도 씁쓸한 사유를 남기는 독특 한 고선웅표 비극 무대를 창조해냈다.
그의 연출《칼로막베스》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재해석하여 먼 미래를 배경으로 칼을 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강력범과 무정부주의자들 의 수용소 이야기를 다룬 바 있다. 특유의 가벼운 웃음과 슬랩스틱으로 관극의 재미를 주면서도 근저에 인간과 사회, 폭력에 대한 진지한 사유 로 이끄는 것도 잊지 않았다.《리어왕》에서는 통속적이고 서사적으로 원작을 비틀어 쪽방촌 유기노인수용소에 살게 된 한국의 리어를 그려내 우리 사회와 독거노인의 현실을 쓴 웃음으로 돌아보게 했다.
<그림 13> 복수를 포기하는 조씨고아
본 공연을 통하여 결과적으로 희극과 비극, 동양과 서양, 현실과 비 현실, 가벼움과 진지함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지속적으로 실험해온 고선 웅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결실로 나타났다.
고선웅은 서양연극에서 흔히 사용되는 암전 대신 훤히 보이는 무대 장면전환을 사용한다던가, 검정 부채를 얼굴에 갖다 대면 그것이 죽음이 되고 이 부채질에 따라 죽은 배우는 무대에서 퇴장하는 연극적 약속, 즉 원초적 연극성을 본 것이다. 혈투와 살상을 관객에게 눈요기로 제공했던 셰익스피어의 스펙터클을 잉여처럼 보이게 하는 동양 연극미학의 발견이 라고 할 수 있다.
고선웅은 주인공 정영을 통해 인간의 신념과 이데올로기가 과연 가 족을 희생하고 평생을 바쳐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새로운 비극의 형 식으로 되묻고 있다. 먼저 연극의 결말에 죽음을 배치하는 서양의 비극 과 대비되는 극적 구성이 고선웅의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가 잘 포착 했듯 죽음의 자리를 재배치하는 것만으로도 동양 특유의 비극성을 담는 고유의 형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다. 죽음이 삶의 끝이나 비극의 완 성이 아니라 순환하는 과정의 하나로 보는 세계관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고, 시(연극)는
보편적인 것을 말한다. 연극에서 재생산된 기억은 플롯을 통한 재구를 거쳐 개연성이 부여되며 보편성을 갖게 된다. 과거 역사를 현재의 문제, 보편의 문제로서 다시 성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을 거쳐 그 역사적 사실은 허구 안에서 그 궁극적 실재가 확인되고 아픈 기억의 주 체들은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를 받기도 하고, 허구 속 역사 인물들의 기 억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오늘의 행위를 선택하고 정당화하기도 한 다.68)
복수라는 주제도 마찬가지다. 서양 비극에서 복수는 대체로 너도 죽 고 나도 죽는 가운데 갈 데까지 가는 양상을 띤다. 양심과 책임, 선택적 의지를 지닌 인간성의 승리를 찬양하기에 서양 연극에서 복수는 인간의 자타에 대한 도덕적 응징이기도 하다. 많은 서양의 연극이론가들이 복수 를 행하는 주인공의 의지와 정신적 가치를 높이 사며 닮기를 유도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복수는 그렇게 깨끗하게 수행되기는 힘들다. 오히 려 평생을 다져온 복수를 완성한 순간 허망함에 넋을 잃고 찝찝한 기분 에 휩싸인 정영의 모습이 보다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이미 자신의 존재 의미는 상실한 채 복수의 미션이 대체해 버린 정영에게 복수 뒤에 남은 삶은 껍데기다. 충성과 의리, 약속이라는 명분에 묶이고 이념과 이데올로 기에 갇힌 채 평생을 허비해버린 정영이 예상치 않게 맞닥뜨린 씁쓸한 심정에 오늘의 관객은 보다 공감하리라 본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는 그림에 대한 웅변적 설명으로 핏 빛 역사를 환기시키고도 고아를 설득하지 못한 정영이 마지막 남은 생명 을 담보로 자신의 팔뚝을 잘라내어 보임으로써 역사적 진실과 복수의 당 위성을 천명한다. 이는 온전히 복수라는 목적과 등치된 정영의 존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드디어 고아가 스스로 고아로의 정체성을 받 아들이고 복수가 완수되었을 때, 도안고의 처단에 그치지 않고 또 한 차 례 벌어진 대살육 앞에서 정영은 복수의 본질을 깨닫고 허탈감에 빠진 다. 고선웅은 복수란 아픈 과거가 정산되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많은 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기제라는 이치를 설파하며, 봉건 시
68)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역),「시학」, 서울: 문예출판사, 2011. 68면.
대 기군상이 펼친 복수 서사의 결말을 뒤집어 버렸다.
권력과 삶의 무상함을 깨닫고 인생을 무대에, 인간을 자신의 역을 다하고 퇴장해야 하는 배우에 비유하던 맥베스의 독백과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퍽의 에필로그를 섞어 놓은 것 같은 인상을 주어 옥의 티 가 되었다. 바로 이전 장면에서 도안고의 냉소적인 대사와 정영의 짧은 침묵이 정교하게 구축해 놓은 강력한 연극적 감동이 순간 약화되고 말았 다. 연극이 끝나고 관객이 마침내 무대의 묵직한 메시지에서 고개를 돌 려 자신의 삶과 마주하려는 찰나 그 사유의 여지와 즐거움을 앗아갈 수 도 있어 아쉬웠다.
1.2. 과거의 극복을 통한 미래에 대한 의지
지금 현대사회에도 폭력이 난무한다. 21세기 문명사회에서도 폭력이 그치지 않으니, 혹자는 인간이 자발적 본능으로의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 고 말한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 종 내에서의 경쟁이 필요하기 때문이라 고 한다. 그래서 공동체를 이룬 인간은 강자와 약자를 인식하고 위계질 서를 만들어 집단 내 공격성을 억제하려 한다.69) 유가 사상에 기초한 동 양에서는 위계질서와 윤리라는 공동체 내적 관습을 통해 자발적 도덕성 을 고취하여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기제로 삼았다
본 연구의 조씨고아 공연에서 ‘복수’의 본질은 생명의 파괴, 인성의 파괴에 있다. 공의와 신의를 위해 생명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위대한 품성이며 용기라면, 인간의 삶을 피폐케 하고 또 다른 무 고한 희생을 초래하는 복수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다. 따라 서 고선웅 연출은 기군상의 원작에서는 신의와 자기희생 등의 내러티브 에 묻혀서 간과되었던 개인의 행복과 생명의 가치를 부각시켰다.
부부의 사랑과 행복한 가정의 꿈, 모성과 부정, 작은 인물들의 꿈과 행복 등을 드러내어 대조적으로 복수의 파괴성을 강조하였다. 원작에서 와 달리 한국 공연은 국가뿐 아니라 개인과 가정의 가치를 더 중요시하
69) 콘라트 로렌츠, 송준만(역),「공격성에 관하여」, 을지사, 1993, 33-34면.
였다. 부마 趙朔과 장희 공주 부부 그리고 정영 부부의 행복과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왕실과 민간의 대조와 함께 상징적으로 제시하여, 도안고 의 권력 추구로 아름다운 가정들이 파괴되고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봉건 사회의 신분에 의해 생사가 엇갈 리는 두 아기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이 모든 슬픔을 극복하고 미래로 의 열정으로 전환시키는 주제의식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