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자혜의원 설립’과 일련의 사건은 부산부립병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부산부의 병원 운영 성격을 시사한다. 또, 부산부가 공공의료에 가진 태도와 인식을 보여주 며 우선순위를 정할 때 병원을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부분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는 사례이 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민심을 달래는 방법 중 하나로 자혜의원 증설 계획 을 세웠다.105) 이에 맞춰 1920년 4월, 부산부는 부산부윤을 필두로 부산부립병원을 조선총 독부에 기부하고 자혜의원을 설립하겠다는 취지의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부산부가 자혜의원 설립을 추진한 이유는 ‘근년 물가 폭등 문제로 경영비(인건비)가 팽창하여 경영하기 어려움’
이 있고, 부산부민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주민이 진료받는 것이 3할 이상이었기 때문에 경 상남도의 “장래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106) 즉, 부비로 운영하는 부산부립병원과 달 리 자혜의원은 국고와 도 지방비로 운영하기 때문에 병원 운영의 부담을 피할 수 있었다.
또, 부산부립병원을 이용하는 환자 중 30% 정도가 도민(道民)이기 때문에 부립병원 대신 자혜의원으로 운영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과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부산 자혜의원 설치를 확정하였다.107) “부산부 내 관민 유지”의 바람이었던 자혜의원 설립은 부비를 써서라도 “하루 빨리 신속하게 건축”하고 싶은 것이었다. 부산부는 자혜의원 설립을 위해 경비 50만원 중 30만원을 조선총독부로부터 받고, 20만원은 기채로 하여 지을 것을 계획하였다.108) 또한 자혜의원이 지어지면 현재 부산부립병원은 필요없기 때문에 이를 매각하여 자혜의원 설립 비용에 충당하기로 하였다. 당초 조선총독부는 부산부 에 자혜의원을 설립할 계획이었지만 마산부에도 자혜의원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총 독부는 부산 자혜의원 예산을 반으로 나누어 각각의 자혜의원을 짓기로 하였다. 조선총독부 가 자혜의원 설립 지역을 정하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표 8>은 경상남도 의료기관 수를 정리한 것이다.
105) 박윤재, 앞의 책, 2005, 252쪽.
106)「府立病院移管申請, 間然を避けんが爲め」,『朝鮮時報』, 1920.4.27. ;「釜山病院移管申請」,『東 亞日報』, 1920.5.1.
107)「醫療機關擴張」,『朝鮮日報』, 1921.3.6.
108)「釜山慈惠院問題, 府立病院は賣却職員は引繼」,『朝鮮時報』, 1921.4.20.
109) 한지개업의(限地開業醫)의 경우, 조선총독부가 산간벽지와 같은 지역에 배치한 지정 의료 인력을
출전 : 朝鮮總督府,『朝鮮總督府慶尙南道統計年報 : 大正10年』, 1923
비고 : 지면 부족으로 모든 지역을 표시하지 못했지만, 대신 인근 군(郡)의 수치를 표시하 였다. 부산부와 마산부를 제외한 나머지 군에서의 일본인 의사 및 산파 수는 비슷하였다.
부산부와 마산부의 의료기관 수를 모두 합쳐 <표 8>의 경상남도 전체 의료기관 수와 비 교해보면 사립병원 75%, 의사 40%, 산파 65%, 간호부의 경우 87%를 차지하였다. 즉, 두 지역은 다른 군(郡)에 비해 의료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특히 부산부는 의사 1명당 1,500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반면, 경상남도는 평균적으로 의사 1명당 1만 500명의 환자를 봐야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산부는 의료 인프라가 갖춰진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 었다.110)
반면, 대부분 조선인이 거주하였던 군에서는 사립병원이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며 개업 의(開業醫)마저도 1~3명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111) 대부분 군민들은 의생(醫生)에 의지하며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외과 수술과 같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의료 공백의 대안으로 공의(公醫)나 한지개업의를 파견하고 순회진료를 실시하였지만 이 역 시도 한계가 존재하였다.112) 또한 자혜의원을 이용하려고 해도 설립 초기와 달리 1920년대 들어서면서 운영 일수가 한 달이 채 안되거나 시료 혜택이 감소하는 등 군민의 병원 이용이 점차 어려워졌다.113) 이처럼 부산부와 마산부보다 의료기관 설비가 시급한 지역이 더 많았 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의 자혜의원 설립 선정 기준은 인구에 따른 결정도 아니었다. 1922년 기준으 로 부산부와 인근 지역의 인구를 확인하면 <표 9>와 같다.
의미한다.
110)「一人の醫者が七萬人を受持つ 釜山は一千五百人の割 慶南醫師の割當調べ」『釜山日報』
1929.4.28.
111) 1936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학생들은 울산군 달리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사회위생학적 측면에서 인류학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후기 중 “의료에서 방치되어 있는 듯한 조선 농촌의 상황”이라는 표 현을 빌려보자면 1930년대 후반이 되어서도 대부분 농촌이었던 군의 의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 던 것으로 보인다. 울산읍 달리마을 조사는 1940년에 책으로 발간됐으며 2008년 국립민속박물관 에서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조선농촌사회위생조사회/임경태 역,『조선의 농촌위생』, 국립민속박물 관, 2008, 353쪽.)
112) 공의나 자혜의원과 같은 지방 의료기관은 “일본인들의 지방 정착 보조 역할”을 하였다. 주로 일 본인 의료진이 파견되면서 조선인들이 진료를 받는 데 언어 문제가 발생하였고, 경제적인 이유에서 도 하층계급에 있었던 조선인들의 이용이 어려웠다. 한편, 조선총독부의 의료기관 증대 목표와 달 리 의료 수요에 비해 의료기관은 부족하였고, 지역 간 의료 빈곤 격차가 심화되어 갔다. (박윤재, 앞의 논문, 2009, 164~177쪽. ; 김영수, 앞의 논문, 2015, 162쪽.)
연도 보통환자 시료환자
시행일수 연도 보통환자 시료환자
조선 일본 조선 일본 조선 일본 조선 일본 시행일수
1913 24 132 12,250 4 145 1918 89 122 8,273 - 107 1914 25 84 12,572 - 170 1919 137 113 7,810 - 115 1915 61 155 15,367 1 227 1922 - 3 397 - 3 1916 288 411 13,894 - 163 1923 - - 814 - 11 1917 158 408 11,518 - 149 1924 11 - 1,111 - 16 113) 아래는 1913년~1924년 진주 자혜의원 영업 일수와 병원을 이용한 환자를 분류하여 정리한 표
이다.
출전 : 朝鮮總督府,『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12~1924
비고 : 1920년은 통계 자료가 결락되었고, 1921년은 진주 자혜의원을 운영하지 않았다.
지역 부산부 마산부 양산군 울산군 동래군 조선인 42,971(55%) 12,817(72%) 38,995(98%) 126,622(98%) 83,696(97%) 일본인 34,915(45%) 4,810(27%) 742(2%) 3,135(2%) 2,771(3%) 합계 78,161 17,726 39,922 129,798 86,503
<표 9> 1922년 경상남도 내 일부 지역 인구 (단위 : 名)
출전 : 통계청 인터넷페이지 (http://kostat.go.kr/)
비고 : 소수 첫째자리 반올림. 외국인은 전체 인구에서 소수였기 때문에 표기하지 않았다.
부산부와 마산부의 전체 인구는 군에 비해 적지만 일본인의 거주 비율은 각각 전체 인구 의 45%와 27%를 차지하였다. 그에 반해 군은 일본인의 인구 비중이 전체 인구의 2~3%를 차지하며 조선인의 거주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결과적으로 조선총독부가 자혜의원 증설 지 역으로 부산부와 마산부를 선택한 것은 공공의료를 제공하고자 할 때, 우선순위에 일본인을 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조선총독부의 계획과 달리 자혜의원은 마산부에 만 설치되었고 부산부에는 자혜의원 건물만 지어지고 운영은 무산되었다.114)
부산 자혜의원 운영이 무산된 배경에는 부산부로의 경상남도청 이전이 있었다. 조선총독 부 입장에서 볼 때, 진주군보다 부산부가 지리적 요건이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위치 에 있었으며 경상남도는 경성, 평양과 달리 도청소재지와 부가 일치하지 않아 행정면에서도 불편함이 많았다. 이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경상남도청 이전을 위해 다양한 ‘전략’을 세웠다.
조선총독부가 부산부로 도청(道廳)을 이전하려는 계획은 통감부 시절부터 제기되어 왔다.
초대 경상남도장관이었던 향천휘(香川輝, 가가와 데루)는 1911년 경상남도 도청이전안(道廳 移轉案)을 작성하여 조선총독에게 품청하였다. 그러나 도청 이전 계획은 진주군민의 이전 반대, 도청 이전 비용 문제 등으로 즉각 실현되지 않았다.115)
1920년, 부산부와 경상남도의 공식적인 품청 이후에도 부산부 및 인근 지역의 유지들은 도청 이전 청원에 가담하며 도청 이전 주장을 피력하였다. 이들은 이전에 필요한 건물과 부 지 기부를 약속하며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듬해 조선총독부가 경상남도청 이전의 당위 성을 알고 있음에도 도청 이전을 실현하지 않자, 부산부 내 유력자들은 ‘도청이전계획서’를 제출하였다. 그들은 30만원 기부를 조건으로 내세우며 도청 이전 계획에 관한 구체적인 방 안을 밝혔다. ‘도청이전계획서’에서 부산부가 내걸었던 기부 조건 중 ‘도청 신축 기부금’은
‘도청 건물 및 관사 부지 기부’로 바뀌었다. 이때, 부산 자혜의원 부지와 건물이 ‘도청 건물’
로 기부되었다.116)
부산 자혜의원 기부는 지역 사회 내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 인다. 부산 자혜의원 건물 기부가 이루어지기 6개월 전만해도, 부산부는 부산부협의회를 소 집하여 부산부립병원 매각비를 통해 자혜의원을 설립할 것을 가결하였다.117) 그런데 8월이 되
114) 1910년 9월에 경상남도 내 설립된 자혜의원은 당시 도청 소재지였던 진주군에 위치했다. 마산 자혜의원은 1922년 진주 자혜의원 출장소 형태로 지어졌다. (朝鮮總督府,「晉州 慈惠醫院出張所設 置」(朝鮮總督府慶尙南道告示第56號),『朝鮮總督府官報』, 1922.9.12.)
115) 도청이전안은 진주군은 도청소재지로서 불리한 점이 많으며 경상남도청 이전 후보지인 부산부는 진주군의 문제점을 상쇄시킬 수 있는 지역이라는 내용의 이유서(理由書)였다. (전성현,「일제강점기 식민권력의 지방지배 ‘전략’과 도청이전을 둘러싼 ‘지역정치’」,『사회와역사』126, 한국사회사학 회, 2020, 59~94쪽.)
116) 전성현, 앞의 논문, 2020, 67~87쪽.
117)「釜山病院寄附諸問滿塲一致可決」,『京城日報』, 1924.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