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논의에서, 주로 참조하는 사료인 公家의 日記는 대체로 사항 중심 으로 무미건조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렇기에 天皇에 관한 것이든 서술자 공 가 본인이나 여타의 인물에 관한 것이든, 서술의 주체나 객체가 가졌던 주 관・심리를 파악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하지만 이하에서 거론할 몇 가지의 편 린들은, 닌코(仁孝) 천황이 會讀 등 宮中에서의 학문과 관련된 행사들을 그 저 의례적・형식적인 일정의 하나로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반대로 적극적인 의지로 주도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분세이(文政) 13(1830)년 10월 4일에는, 회독 자리에서 ‘틀리게 읽는 부 분을 지적하지 않는 것’에 대한 천황의 말이 주재자 공가들에게 전달되고 있 117) 「橋本實久日記」, 仁孝天皇實錄, 4卷954頁.
118) 天保 14년 2월 17일의 禮記 진강에서, 東坊城聰長은 당시 白氣(혜성)가 관측되 던 현상에 대해 역사상 분분히 있던 일이라는 의견을 올리고 있다. 「橋本實久日記」,
仁孝天皇實錄, 4卷986-987頁. 3월 8일에도 聰長의 예기 진강이 이루어지는데, 이날에 番을 맡아서 參內하였으며 進講에도 동석했던 橋本實久(하시모토 사네히사) 가 혜성 출현에 관해 천황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橋本實久日記」, 仁孝天皇實錄, 4 卷989頁. 이처럼, 진강에서는 텍스트의 학습뿐만 아니라 천황이 당대의 관심사에 대 한 이야기를 하고, 참석한 공가가 그에 관해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생겨나기도 했다.
119) 「橋本實久日記」, 仁孝天皇實錄, 4卷1113頁.
다.120) 틀리게 읽은 주체가 천황 본인인지 여타의 배석 공가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어쨌든 천황은 주재자들이 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나서서 회독의 수 준이 향상되기를 원하고 있던 것이다.
덴포(天保) 7(1836)년 2월 14일에는 회독 주재자의 일원인 기요하라(淸 原) 일족의 후나바시 아키카타(舟橋在賢)를 닌코 천황의 뜻에 따라 회독에 참석시키지 않도록 하였으며, 후나바시 본인에게도 그렇게 알라는 어명을 전 달하도록 조치되고 있다.121) 여기서 그 이유는 명기되어 있지 않다. 학습에 불성실한 태도로 임하였거나 다른 참석자에 비해 텍스트를 잘 이해하지 못했 던 것, 혹은 논의에서의 태도 문제나 견해 차이로 천황의 비위를 거스른 것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중 어떤 이유에서든, 이는 역사서 회독이 그저 형식 적・의례적인 궁중행사의 일환으로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천황의 주관과 의지가 비중 있게 개입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덴포 10년 5월 2일과 26일 일본서기의 회독에서는 “親王을 御前에 불렀 다”고 하여,122) 훗날의 고메이(孝明) 천황인 오사히토(統仁) 親王이 회독을 참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오사히토 친왕은 세는나이로 10살에 불과 했기에, 그의 회독 참관은 본인의 뜻이라기보다는 부친인 닌코 천황의 분부 에 의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즉 닌코 천황은 본인이 학문에 적극적이었 을 뿐 아니라, 아들이자 황위 계승자인 오사히토 친왕의 양육에서도 학문의 중요성을 일깨우려 한 것이다.
도쿠가와 초기 禁中幷公家諸法度에서 규정된 바대로, 와카까지 포함된 ‘藝 能’의 일환으로서 힘써야 할 것이 기존 궁중에서의 학문이었던 것에 비해, 닌 코 천황은 특히 經史의 학습에 유달리 적극적이다(그렇다고 와카 등이 소홀 히 여겨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닌코 천황이 보였던 經史 중심의 학문 에 대한 적극성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經史의 학습은 중국・한반도의 역대 왕조에서는 통치자의 교양으로서 王室 과 士大夫 계층에게서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져 왔다. 科擧官僚制의 확립 이후에 그 경향은 한층 농후해졌다 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 달리 현실정치와는 엄연히 유리되어 있던 일본 궁중의 학문에 대한
120) 「東坊城聰長日記」, 仁孝天皇實錄, 3卷620頁.
121) 「東坊城聰長日記」, 仁孝天皇實錄, 3卷770頁.
122) 「山科信成卿記」, 仁孝天皇實錄, 4卷847頁.
관심은, 일견 정치의식 등과는 괴리된 단순한 ‘好學’에서 비롯된 취미로서의 움직임이라고 느껴질 만도 하다. 하지만 당시의 천황이나 關白 등 조정 상층 부가 학문에 대해 부여하고 있던 의미는, 단순히 嗜好・취미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관백 다카쓰카사 마사미치(鷹司政通)가 미토의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 昭)에게 보낸 덴포 14년의 서한은 당시 조정의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다카쓰카사는, ‘천황이 國史 이하 經典을 항상 좋아하고 和漢의 舊事 를 생각하기에 泰平의 時勢가 느껴진다’고 표현한다. 이어서 ‘近年에는 특히 萬事의 처리에서 호겐(保元, 1156-58) 이전의 舊例를 조사하여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123)
‘國史 이하 經典’이라고 國史가 먼저 언급된 것으로부터는, 經史 중에서도 일본의 자국사와 자국 고유의 학문에 대한 관심이 특히 고조되고 있음을 다 시금 느낄 수 있다.
‘호겐 이전의 舊例’라는 것은 명백히 호겐의 난을 의식한 것이다. 당시 황 실 내란의 승패가 겐지(源氏)・헤이시(平氏) 武士團의 개입에 좌우되었고, 이 를 기점으로 무사 계층의 정치적 대두가 명확해진다는 것이 일본에서 확립되 어 있던 역사적 평가였다.
위는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는 단순하고 막연한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무사 계층의 정치적 대두를 하나의 기점으로 상정하고, 그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역사의식이 천황이나 조정 상층부에 공유되며 ‘만사의 처리’
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것이다. 조정에서 이전 시대부터 있었던 복고의 지향 이 ‘國史 이하 經典’・‘和漢의 舊事’에 대한 관심, 즉 經史의 적극적인 학습과 맞물리고 있던 것이다.
닌코 천황 재위기 조정의 학문에 관련되어 중요한 문제가, 교육기관인 學 習院 설립사업의 추진이다. 학습원 설립은 천황이나 관백의 강력한 의지로 추진된 것이며, 학문에 대한 관심이 취미로서의 ‘호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 었음을 다시금 보여주는 사례이다.
덴포 13년 10월, 조정에서는 교육기관 설립의 의향을 막부에 전달하며 그 비용의 지원을 요청했다. 조정 측은 우선 ‘근래 당상공가의 기풍과 행실이 좋 지 못하다는 소문이 많기에 관백의 걱정이 많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당상공 123) 水戶藩史料 別記 上 卷五, 247頁.
가 중에는 경제적으로 궁핍하며 교사를 초청하기도 어렵기에 不學 文盲한 무 리가 많다’며 문제의 이유를 교육의 부재에서 찾는다. 이어서 ‘고대의 大學寮 나 四姓學校의 선례도 있으니 習學所를 세워 젊은 공가들이 교육을 받으면 품행이 두텁고 단정해질 것’이라며 교육기관 설립의 당위성을 역설한다.124)
여기서 교육에 투자할 여력이 없는 이유로 내세워지는 공가의 경제적 궁핍 은, 과장된 면이 있다. 우선 분세이-덴포 연간에 조정의 재정지출은 증가하 고 있었다. 그리하여 기존의 재정 충원 체계로는 수요를 충당할 수 없게 되 었다. 당시 막부는 조정의 늘어나는 재정적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던 것은 아 니었지만, 교토 代官이나 마치부교(町奉行)가 관리하던 貸付金을 비롯한 다 양한 지원책을 통해 천황의 경제적 ‘불편’(不自由)이 없도록 하려는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125)
덴포 5년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로주 오쿠보 다다자네(大久保忠 實)에게 초대 진무(神武) 천황의 山陵을 보수할 것을 건의했다. 오쿠보는 ‘京 師로부터는 이런저런 이유로 막부에 요구하는 것이 무한한데, 새롭게 일을 만들면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이라며 불가 의사를 표명한다.126) 여기서도, 조정에 대한 재정지원이 늘어나며 막부가 곤란을 겪고 있던 도쿠가와 후기의 상황이 드러난다.
게다가 상층부 공가는 緣家의 다이묘 등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여타의 많은 공가들도 이른바 이에모토(家元) 제도 하에서, 와카・서 예나 악기・스모 등의 예능에서 세습적 권위의 근원으로 대우받으며, 부수입 을 확보할 수 있었다.
확실히 공가의 액면상 수입은 무가의 그것에 비하면 훨씬 적기는 했다. 그 러나 실제로는, 공식 祿高가 100石이 넘지 않는 당상공가의 하위층도 유복한 무사 집안과 견줄 수 있을 만큼 부유했다는 것이 웹(Webb)의 지적이다. “로 스엔젤레스 시의 예산과 영화 스타의 수입을 비교”한다는 그의 비유처럼, 영 지를 통치해야 하는 정부로서의 무가의 수입과, 그렇지 않은 공가의 수입을 1대 1로 등치해서는 안 된다.127)
124) 「續泰平年表」, 仁孝天皇實錄, 4卷1112頁.
125) 이상의 서술은 佐藤雄介, 「京都町奉行・京都代官と朝廷財政 : 文政~天保年間を中心 に」, 史学雑誌 118(3), 2009에 의거하였다.
126) 水戶藩史料 別記 上 卷五, 216頁. 德川齊昭의 修陵 건의에 대해서는 II.에서 보다 상세히 논의하기로 한다.
즉 공가의 경제적 어려움은, 그들 스스로가 당위적으로 가져야 하는(그렇 다고 생각하는) 위상에 대한 욕구와의 괴리였다고 할 수 있다. 절대적 빈곤 과는 거리가 먼,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비롯되는 심리적인 면이 강했던 것이다.
도쿠가와 후기가 되면 상품경제 발전에서의 소외나 재정위기 등으로, 경제 적 곤란과 박탈감이라는 것은 무사계층 또한 공유하고 있던 구조적 상황이 다.128) 그렇기에 공가가 경제적 궁핍을 느꼈다고 해도, 그것이 갖는 특수성 은 더더욱 사라진다. 오히려 위에서 보았듯이 재정악화의 와중에서도 조정에 대한 막부의 지원은 증가하고 있다.129)
조정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강조하는 데는 막부의 재정적 지원을 끌어내려 는 상투적인 ‘修辭’의 면이 있는 동시에, 자기정체성, 자신의 사회적 위상에 대한 조정 구성원들의 문제의식이 증가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가의 기강 해이를 거론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이 시 기 공가의 풍속이 다른 시대에 비해 유독 좋지 못했는지는 의문이다. 공가들 은 교토라는 문화(즉 유흥・풍속업을 포함하는)의 중심 도시에 집주하고 있 다. 도쿠가와 시대 무사계층이 전투의 부재, 城下集住와 도시문화 수용으로 본래의(본래 그러했다고 여겨지는) 질박・강건한 기풍을 잃어갔음은 누차 지 적된다. 비슷한 흐름은 동시대의 공가에게도 있었을 것이며, 1840년대 초반 단계의 공가에게서 그 경향이 유달리 두드러졌다고 볼 수는 없다.
이렇게, 학습원 설립 발의에서 거론되는 공가의 문제점들은 결코 이 시기 에 새삼스레 두드러졌다고 할 만한 것들이 아니다. 공가의 교육 부족이 학습 원 설립 명분으로 내세워지지만, 설립이 발의된 덴포 13년은 궁중에서 경서 의 진강이 활성화되고 육국사 회독의 참가자가 늘어나 3그룹으로 분반이 결 정된 것과 같은 해이다. 당시 천황을 정점으로 한 조정 구성원들에게서, 오 127) 이상의 논의는 주로 Webb, Herschel, The Japanese Imperial Institution in the
Tokugawa Period, Columbia Univ. Press, 1968. pp.90-99를 참조.
128) 德川期 武家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박훈, 2014a, pp.40-42; Rozman, Gilbert, “Social Change”, Janson, Marious ed.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Volume 5 : The Ninetennth Century, Cambridge Univ. Press, 1989, pp.528-531 등의 설명을 참조.
129) 18세기 후반 이후의 幕府는 大政委任論을 표명하며 스스로의 권위 강화에 朝廷을 이 용하려 했기에, 조정에 관계된 각종 현안에서 협조의 기조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II-1.에서 詳述키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