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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 前期 鴻臚(少)卿의 對外 活動과 變化 樣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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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 前期 鴻臚(少)卿의 對外 活動과 變化 樣相

*1)

廉 景 伊 (全北大)

Ⅰ. 서론

Ⅱ. 홍려(소)경의 사신 활동 Ⅲ. 홍려(소)경의 군사 활동

Ⅳ. 결론: 변화 양상과 의미

Ⅰ. 서 론

중국은 고대로부터 賓館을 세워 외국의 使者를 접대하였는데, 唐代 에 이를 담당한 기구는 鴻臚寺이다. 鴻臚寺1)는 賓客 접대의 임무를 담 당한 典客署와 凶禮관련 사무를 담당한 司儀署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최고 책임자는 鴻臚卿이다.2)

鴻臚寺 鴻臚卿의 직무에 대해

唐六典

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3) ① 사방 夷狄君長의 朝見에 그 等位를 변별하여 빈객으로 접대 한다. ② 二王(북주와 수)의 후예와 夷狄 君長의 자식이 관작을 계승할

* 이 논문은 2011년도 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NRF-2011-35C-A00079]

1) 鴻臚寺는 同文寺(662-670) 혹은 司賓寺(684-704)로 개칭되기도 하였다.

2) 李林甫 等撰, 唐六典卷18 (北京: 中華書局, 1992), pp.504-508; 歐陽脩, 唐書卷48 百官3 (北京 中華書局, 1995), pp.1257-1259; 劉, 舊唐書卷44, 職官3 (北京 中華書局, 1995), pp.1884-1885.

3) 唐六典卷18, pp.504-508.

(2)

때 그 嫡庶를 분별하고 가부를 심사하여 尙書에 올린다. ③ 만약 諸蕃 大酋渠를 봉건하는 禮命(예빙과 책명)이 있으면, 책봉 문서를 받아 그 나라에 간다. ④ 천하 寺觀의 3綱 및 京都의 大德은 도덕이 高妙하여 추천을 받은 자를 취하여 보충하고, (禮部)상서 祠部에 상신한다. ⑤ 무릇 황제ㆍ황태자가 5服 내의 친속 및 大臣의 喪事에 臨弔하면 贊相 한다.

위 5가지 항목 중 ①과 ②는 홍려경의 賓客(來唐使臣) 관련 사무이 고, ③은 사신(冊封使)의 직무이며, ⑤는 凶禮 관련 사무이다. ④에 대 해서 최재영은 본래 홍려시 崇玄署의 직무이지만 태종 貞觀年間에 崇 玄署를 폐지하면서 더 이상 홍려경의 직무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라 고 지적하였다.4) 이로써 볼 때 홍려경은 빈객 접대와 使行의 직무를 담당하는 일종의 외교 담당관이라 하겠다.

이러한 鴻臚卿의 성격에 주목하여 그 동안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 다. 먼저 黎虎는

漢唐外交制度史

(蘭州大學出版社, 1998)에서 외교전 문기구 홍려시의 제도적 변화과정과 직무를 분석하고, 나아가 외교와 관련된 다른 관직의 직무나 홍려시와의 상관성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고찰하였다. 또 石見淸裕는

唐の北方問題と國際秩序

(汲古書院, 1998)

Ⅲ部에서

唐開元禮

에 규정된 賓禮를 천착하여 鴻臚客館을 중심으로 홍려시의 빈객 접대가 어떻게 행해지고 있는가를 면밀히 분석하였다.

이 밖에 鴻臚寺의 부속기관을 분석하거나5), 唐代 홍려시의 구조와 임 무6), 혹은 조직 구성과 그 비중7)에 대해 살펴본 논문도 있다.

이를 통해 鴻臚寺 鴻臚卿은 대외 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존재임을

4) 최재영, 唐代 長安의 朝貢使節의 변화와 鴻臚寺의 기능 (동북아역사논총 24. 동북아역사재단, 2009) pp.282-284. 최재영은 崇玄署가 唐初에 鴻臚寺 소속 이었다가 정관년간에 폐지되었지만 開元25년에 玄宗이 내린 조칙으로 복구되 어 宗正寺에 예속되었다고 하였다.

5) 石 曉軍, 唐代における鴻臚寺の附屬機關について (史泉86. 1997).

6) 馬國榮, 唐鴻臚寺述論 (西域硏究1999-2).

7) 최재영, 唐代 長安의 朝貢使節의 변화와 鴻臚寺의 기능 (동북아역사논총 24, 2009.6).

(3)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홍려경에 관한 연구는 대체로 제 도적으로 규정된 홍려경의 직위와 직무에 집중되어 있다. 홍려경의 직 무나 역할, 나아가 홍려경의 대외적인 활동에 대해 보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제 홍려경을 역임한 인물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또한 홍려경의 대외 활동은 당의 대 외 정책 안에서 행해지는 것8)으로, 그 활동상은 당대 대외 정책의 내 용과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초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홍려경을 역임한 인물을 대상으로 홍려경의 외교 직무, 나아가 대외 관계에서 홍려경의 역할을 살펴본 연구는 거의 없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당 전기9) 홍려경을 대상으로 그들의 대외 활동 을 수집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홍려경의 대외 활동이 어떻게 전개 변화되고 있으며 그 시기별 특징과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하고 자 한다. 나아가 이를 통해 唐代 대외 정책의 성격도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당 전기 홍려(소)경10)을 역임한 인물은

新唐書

舊唐書

의 本 紀 와 列傳 ,

資治通鑑

,

冊府元龜

,

通典

,

唐會要

,

全唐文

,

唐大詔令集

등의 사료에서 구하였다.11) 그 결과 당 전기에 홍려경을 역임한 인물은 37명이고, 홍려소경이 11명, 그리고 임시(攝) 홍려경이 7명으로, 모두 55명가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중에는 홍려경

8) 馬國榮, 唐鴻臚寺述論 , p.23; 黎虎, 漢唐外交制度史(蘭州大學出版社, 1998), pp.267-310.

9) 일반적으로 당은 안사의 난을 계기로 전기/후기로 구분하는데, 전기에 당의 대외활동이 후기에 비해 보다 주도적이고 적극적이라고 평가된다. 본 연구는 먼저 당 전기만을 연구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10) 서술의 편의를 위해 홍려(소)경을 홍려경으로 적고자 한다.

11) 조사 대상은 鴻臚卿 만이 아니라 鴻臚少卿과 攝鴻臚(少)卿(임시 홍려(소)경) 도 포함하였다. 이는 홍려소경이 홍려시의 부책임자로 홍려경을 보좌ㆍ대리할 수 있는 존재이고 실제로도 홍려소경이 전쟁이나 使行을 통해 대외적으로 활 동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며, 또 攝鴻臚(少)卿은 임무 수행을 위해 임시적ㆍ일 시적으로 부과된 관직이지만 홍려경을 本職으로하는 인물보다 대외 활동에 있 어 홍려(소)경의 의미를 더욱 잘 부각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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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서의 행적이 분명하지 않고12) 심지어 홍려경을 역임하였다는 사 실 외에는 홍려경으로 활동한 시기조차 불분명13)한 예가 많다. 또 당 건국원년(武德元年, 618년)에 대내적인 할거세력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활동한 인물도 있다.14) 따라서 홍려경으로서의 활동 내용을 비교적 분 명히 살펴보거나 추정할 수 있는 인물은 25명이다.

이들의 활동 내용은 당의 사신으로 이민족 국가에 파견되거나(14명) 이민족 국가와의 전쟁에 참여하는(11명) 것으로 양분된다.(부록 <표>

참조) 즉 홍려경은 사신 외교와 군사 전쟁의 양방면에서 대외적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본문에서는 홍려경의 사신 활동과 군 사 활동이라는 두 가지 측면의 대외 활동에 대해 각기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홍려경의 사신 활동

당 전기 홍려경으로 사신(唐使)의 임무를 수행한 인물은 모두 14명 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태종 정관 중엽인 640년부터 무주통치기인 695년까지 무려 56년간 홍려경의 사행이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에 대 12) 李景諶ㆍ史務滋ㆍ崔神基ㆍ豆盧欽望(2회)ㆍ姚璹ㆍ甘元柬ㆍ李逈秀ㆍ史崇玄ㆍ葉 法善ㆍ唐晙 등 10명은 무후집정초로부터 현종 즉위초까지 홍려경을 역임한 인 물로, 이 시기에 홍려(소)경은 무후나 태평공주 등 권력과 관련된 이들이 昇罷 의 과정에서 임명되고 있다. 이는 태종대의 崔仁師나 현종대의 楊銛(양국충의 형)과 楊昢(양국충의 아들)도 유사하다. 開元年間의 韋抗ㆍ宇文融ㆍ李齊物ㆍ蕭 諒과 관련한 기사도 홍려경의 직무와 연관성이 거의 없다.

13) 李佩(靖恭太子 琬의 子)ㆍ李琄(惠宣太子 業의 子)ㆍ李偡(壽王 瑁의 子)ㆍ李僅 (숙종의 5子)의 황실 인물을 비롯하여 杜敬同ㆍ劉知柔 등은 홍려경으로서 만 이 아니라 여타 다른 활동 내용도 부재하며, 활동시기 조차 불분명하다.

14) 劉世龍과 李孝基는 건국 공신으로 당 건국 원년(618)에 홍려경에 임명되었고 (舊唐書卷57, 劉文靜傳, p.2294; 舊唐書卷57, 劉世龍傳, p.2295; 新唐書 卷88, 劉義節傳. p.3743; 舊唐書卷60, 列傳第10, p.2339), 張俟德은 그해 8월 에 凉州의 李軌를 책봉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다(資治通鑑卷186, p.1238. 高 祖 武德元年 8월기사; 舊唐書卷55, 李軌傳, p.2250).

(5)

해서는 뒤에서 논의하도록 하고, 먼저 640년 이전과 695년 이후의 홍 려경 사행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당은 건국 초에 강력한 돌궐의 요구를 수용하며 돌궐의 압박을 피 하였다. 이는 고조대 19건의 遣使 기록 중 13건이 돌궐에 파견된 것이 고, 그 대부분이 예물을 전하는 聘使라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15) 639 년까지 홍려경의 사행이 주로 돌궐로 향하는 이유도 이와 유사하다.

622년(武德 5) 8월에 鴻臚卿 鄭元璹이 돌궐에 파견된 것은 頡利可汗 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16) 정원숙은 15萬騎를 끌고 幷州를 침략한 頡利可汗에게 “지금 노략한 것은 모두 國人에게 들어가니 可汗에게 무 엇이 남는가? 군대를 돌리고 다시 (당과) 화친함만 같은가 跋涉의 노 고 없이 앉아서 金幣를 받으니 또 모두 可汗의 府庫에 들어간다”17)라 고 설득하였고, 이에 頡利可汗은 군사를 돌려 돌아갔다.18)

홍려경 정원숙은 627년(太宗 貞觀元年)말에 또 돌궐에 파견되었 다.19) 이때 정원숙의 임무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태종 즉위초에 便橋의 役에서 태종이 賄(공물)를 약속하고20) 이후로 양국간 에 큰 갈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원숙은 돌궐에 예물을 전하는 聘使 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행 후에 정원숙은 “돌궐이 大雪로 육축이 죽 고 굶주려 반드시 멸망한다”21)라고 보고하였는데, 이는 頡利政亂22)

15) 廉景伊, 당 고조대 사신파견과 외교 (전북사학35, 2009.10), pp.247-260.

16) 司馬光 編著, 胡三省 音註, 資治通鑑 (上海古籍出版社, 1987) 卷190, p.1270, 高祖 武德 5년 8월기사; 冊府元龜第8冊, 奉使部 敏辯2. p.7899.

17) 각주 16)과 동일.

18) 당시 頡利可汗은 大可汗의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고 幽州 북방에 자리잡은 突 利可汗(始畢可汗의 아들)과 하남에 세력을 가진 郁射設(處羅可汗의 아들) 등과 세력을 나누고 있었다. 정원숙은 이러한 돌궐의 정황을 간파하고 頡利可汗에게 金幣를 약속하여 回軍하도록 한 것이다.

19) 資治通鑑卷192, p.1289. 太宗 貞觀元年 기사. 정원숙의 돌궐 사행 시점에 대해 新唐書舊唐書의 鄭元璹傳에는 모두 ‘貞觀 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貞觀元年 겨울에 돌궐이 대설로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과 정원숙의 보 고가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 논문에서는 資治通鑑을 따라 정원숙의 파견시점을 貞觀元年으로 보았다.

20) 資治通鑑卷191, p.1283, 高祖 武德 9년 8월 기사.

(6)

로 표현되는 돌궐의 근본적인 내부모순에 부합한다.

정원숙은 이미 622년(武德 5) 이전에도 돌궐에 사행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돌궐 사행 중에 죽을 위기도 겪었던 인물이다.23) 그가 홍려경 에 임명된 시점도 돌궐에 억류되었다가 귀환한 622년(武德 5) 3월이 다.24) 그렇다면 그는 홍려경으로서 사행에 나서게 되었다기보다 사행 을 통해 홍려경에 임명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당은 외교적 능 력이 있는 정원숙을 홍려경에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외교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원숙을 이어 돌궐에 사행한 인물은 唐儉이다. 당검은 629년말(貞 觀 3)에 禮部尙書로 돌궐에 파견되어 隋 蕭后와 楊正道를 당에 송환하 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25) 다음해(630년) 정월에는 鴻臚卿으 로 다시 돌궐에 파견되어 頡利可汗을 위무하였다.26) 그는 이후로도 薛 延陀ㆍ吐谷渾 등에 파견되어 사행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태종은 이러한 당검에 대해 “말을 잘하여 다른 사람을 잘 和解하게 한다”27)고 평가하였다.

鴻臚少卿 劉善因28)은 633년(貞觀 7)에 서돌궐에 책봉사로 파견되었 21) 新唐書卷100, 鄭元璹傳, p.3938; 舊唐書卷62, 鄭元璹傳, p.2380; 舊唐書

卷194上, 突厥傳, p.5158, “其國大雪 平地數尺 羊馬皆死 人大飢 乃懼我師出乘 其弊.”

22) 당시 頡利可汗은 다른 계승자나 돌궐 왕족과 심각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음 에도 동족에게 소원하고 胡人을 믿고 신임하였다. 資治通鑑卷192, p.1287, 太宗 貞觀元年 5월 기사에는 이를 ‘頡利政亂’이라 하였다.

23) 資治通鑑卷190, p.1270. 高祖 武德 5년 8월 기사.

24) 資治通鑑卷189, p.1261. 高祖 武德 4년 4월 기사. 정원숙은 620년(武德 3) 에 돌궐에 파견되었다가 622년(武德 5)에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廉景伊, 당 고조대 사신파견과 외교 (전북사학35, 2009. 10), pp.249-253 참조).

25) 冊府元龜第8冊, 奉使部 謀略, p.7848.

26) 新唐書卷215上, 突厥傳, p.6035; 舊唐書卷194上, 突厥傳, p.5159; 冊府 元龜第12冊, 外臣部 征討4, p.11565; 新唐書卷89, 唐儉傳, p.3760; 舊唐 卷58, 唐儉傳, p.2307.

27) 資治通鑑卷197, p.1324, 太宗 貞觀 18년 8월 기사, “上曰, 唐儉言辭辯捷, 善 和解人, 事朕三十年, 遂無言及于獻替…(후략).”

28) 岑仲勉은 突厥集史(下, 中華書局, pp.619-620)에서 新唐書(卷215下, 突

(7)

다.29) 이후 어느 시점에 홍려경이 되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鴻臚卿 유선인은 639년(貞觀 13) 7월에 돌궐30) 가한(阿史那思摩)을 책봉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다.31) 홍려소경 유선인이 홍려경에 임명되어 재차 사행한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외교적 능력이 있는 인물로 판단된다.

639년에 홍려경 유선인이 책봉사로 파견된 이후로부터 695년까지 거 의 60년간 홍려경의 使行은 확인되지 않는다. 홍려경의 사신 활동은 武周통치기인 696년(萬歲通天元年)에 左衛郎將 田歸道가 攝司賓卿(鴻 臚卿)으로 돌궐(제2돌궐)32)에 파견되면서 다시 확인되기 시작한다. 攝 司賓卿 田歸道의 파견 시점과 임무는 사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록하 고 있지만,33) 그가 左衛郎將 攝司賓卿으로 돌궐에 파견되어 억류되었 다는 사실만큼은 동일하다. 당시 전귀도는 돌궐과의 화친은 믿을 수 없으며 당은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은 끊임없는 돌궐의 압박 속에 6州 降戶 수천 帳과 비단 5 만단, 농기구 4천개, 철 4만근의 요구를 수용하고,34) 또 돌궐의 혼인

厥下, p.6058)에 기록된 劉善이 劉善因임을 논증하였다.

29) 新唐書卷215下, 突厥下, p.6058; 舊唐書卷194下, 突厥下, p.5183; 資治 通鑑卷194, p.1299, 太宗 貞觀 6년 7월 기사.

30) 太宗 貞觀 13년(639)에 당에 내부한 돌궐 항호민인 結社率이 반란을 시도하 였다. 이에 당은 돌궐 항호민을 漠南으로 옮겨 돌궐을 재건하도록 하였다.

31) 新唐書卷215上, 突厥傳, p.6040. 이 사행은 禮部尙書 趙郡王 孝恭(正使)과 홍려경 유선인(副使)이 파견되었다. 이러한 예외적이고 파격적인 구성은 피책 봉국인 돌궐의 역량에 기인하기보다 오히려 재건된 돌궐이 당의 괴뢰국이며 북방 설연타를 저지할 방어선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32) 630년에 멸망한 돌궐과 구분하여 제2돌궐로 부르기도 하지만, 본문에서는 편 의상 돌궐로 칭하고자 한다.

33) 田歸道의 사행에 대한 각 사료의 내용은 각기 다르다. 먼저 資治通鑑(卷 205, p.1386)에는 萬歲通天(696) 元年 9월에 豹韜衛大將軍 閻知微과 田歸道가 책봉사로 돌궐에 파견되었고, 이때 전귀도가 돌궐에 억류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新唐書 舊唐書의 돌궐전이나 전귀도전에는 696년에 묵철을 책봉하 는 사신으로 閻知微만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新唐書 舊唐書전귀도전 에는 거란을 토벌한 묵철이 선우도호부에 이르자 이때에 전귀도가 攝司賓卿으 로 파견되었으며, 당이 묵철의 요구를 거절하자 돌궐이 전귀도를 억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34) 新唐書卷215上, 突厥傳, p.6045; 舊唐書卷194上, 突厥傳, pp.5168-5169;

(8)

요청도 받아들였다.35) 당은 698년(聖曆元年)에 무승사의 아들 武延秀 와 함께 豹韜衛大將軍攝春官尙書 閻知微ㆍ右武衛郎將攝司賓卿 楊齊 庄36)을 파견하여 수많은 金帛을 혼인 예물로 전하였다. 그러나 武延秀 는 측천무후의 일족으로 당 황실이 아니었던 까닭에 돌궐은 무연수를 감금하였고, 攝司賓卿 양제장은 염지미와 함께 돌궐 가한의 신하가 되 었다가 그해 10월에 당에 송환되어 죽임을 당하였다.37)

707년(景龍元年), 臧思言이 假鴻臚卿으로 돌궐에 파견되었다가 不屈 節을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38) 당은 武周 통치말인 703년(長安 3)에 돌궐의 청혼을 수락하였지만 중종 즉위 이후 돌궐의 공격과 약탈이 계 속되자 絶婚을 결정하였는데,39) 장사언은 바로 이 시점에 돌궐에 파견 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장사언은 당의 絶婚을 전하는 세유사였을 가능 성이 높다.

예종 즉위 후, 당은 돌궐의 청혼을 받아들이고40) 御史中丞ㆍ攝鴻臚 卿 和逢堯를 聘使로 파견하였다. 언변이 뛰어났던 화봉요는 돌궐이 예 물을 문제 삼자 이를 회유하고 나아가 돌궐 가한으로 하여금 당의 관 대를 착용하고 남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칭신하게 하였다.41)

玄宗 開元年間에 홍려경으로 사행한 인물은 6명이다. 719년(開元 7) 에 발해왕 大祚榮이 죽자 당은 左監門率上柱國ㆍ攝鴻臚卿 吳思謙을 조 문겸책봉사로 파견하였다.42) 양국은 중종대에 당이 侍御史 張行岌을

資治通鑑卷206, p.1388, 則天皇后 神功元年 3월 기사,

35) 舊唐書卷6, p.127, 則天皇后 聖歷元年 5월 기사. 돌궐은 이미 696년에 당에 청혼하였고 당도 697년에 이를 수용하였다.

36) 新唐書돌궐전에는 楊鸞庄으로 기록되어 있다.

37) 舊唐書卷6, p.127, 則天皇后 聖歷元年 7월 기사; 資治通鑑卷206, p.1392, 則天皇后 聖曆元年 10월 기사. 그의 귀국에 대해 舊唐書本紀에는 ‘叛歸’라 기록되어 있고 資治通鑑에는 ‘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8) 新唐書卷4, p.109, 中宗 景龍元年 5월 기사.

39) 新唐書卷215上, 突厥傳, p.6047; 舊唐書卷194上, 突厥傳, p.5170.

40) 資治通鑑卷210, p.1420, 睿宗 景雲 2년 3월 기사. 당은 宋王 成器의 딸을 金山公主로 삼아 돌궐과 혼인하기로 하였다.

41) 新唐書卷123, 和逢堯傳, p.4378; 資治通鑑卷210, p.1421, 睿宗 景雲 2年 10월 기사.

(9)

招慰使로 파견한 이후로 책봉-조공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 었다. 그러나 양국관계는 725년(開元 13)에 당이 黑水靺鞨에 黑水府를 둔 사건을 계기로 충돌하게 되었다. 즉 발해왕 大武藝는 당과 말갈의 연합을 우려하여 동생 大門藝에게 黑水府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大門藝 가 이에 불복하고 당으로 도망쳐버린 것이다.43) 발해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大門藝의 주살을 요구하였지만 당은 鴻臚少卿 李道邃와 源復을 파견하여 문예를 영남에 유배하였다고 거짓 보고하게 하였다.44)

725년(開元 13), 당은 中書直省ㆍ攝鴻臚卿 袁振을 돌궐에 파견하였 다.45) 이는 현종의 東巡을 앞두고 혹시 모를 돌궐의 침략에 대비하여 돌궐 大臣이 東巡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자 함이었다.46) 이밖에도 728년(開元 16)에 大理正ㆍ攝鴻臚少卿 喬夢松이 疏勒과 于闐에 책봉사 로 파견되었고,47) 737년(開元 25)에 贊善大夫ㆍ攝鴻臚少卿 邢璹이 신라 성덕왕의 죽음을 조문하고 그 아들 承慶(효성왕)을 책봉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다.48)

이상에서 살펴본 홍려경의 사신 활동을 바탕으로 아래 3가지 측면 을 고찰해 볼 수 있다. 첫째로, 홍려경 임명에 관한 것이다. 639년(太 宗 貞觀 13)까지 당의 홍려경(정원숙ㆍ당검ㆍ유선인)은 거의 사신으로 42) 新唐書卷219, 渤海傳, p.6180; 冊府元龜第12冊, 外臣部 褒異1, p.11446.

43) 舊唐書卷199下, 渤海靺鞨傳, p.5361;新唐書卷219, 渤海傳, p.6180.

44) 資治通鑑卷213, p.1443, 玄宗開元 14년 기사; 渤海國志長編卷3 (金毓黻 編, 태학사, 1977). 그러나 사실이 누설되어 발해왕이 재차 大門藝의 주살을 요 구하자 당은 그 책임을 물어 鴻臚少卿 李道邃와 源復을 좌천시켰다.

45) 新唐書卷215, 突厥下, p.6053; 資治通鑑卷212, p.1441, 玄宗開元 13년 4 월 기사.

46) 資治通鑑卷212, p.1441. 玄宗 開元 13년 4월기사. 이는 당이 가장 강력한 돌궐의 大臣이 동순에 참여하면 戎狄 君將이 모두 오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 한 것에 따른 것이다.

47) 冊府元龜第12冊, 外臣部 封冊2, p.11344; 新唐書卷221, 疎勒傳, p.6234.

48) 김부식, 최호 역해, 三國史記(홍신문화사, 1997) 新羅本紀 제9, p.191; 王 溥 撰, 唐會要(中華書局, 1998) 卷95, p.1712. 新唐書 舊唐書新羅傳에 는 신라는 군자의 나라로 형숙이 학술을 강론하기에 적합하며, 또 신라인들이 바둑을 잘 두는 까닭에 兵曹參軍 楊季鷹을 부사로 참여하게 하였다고 기록하 고 있다.

(10)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홍려경에 임명된 이후에 使行한 것이 아니라 使 行을 통해 그 외교 능력을 인정받은 후 홍려경에 임명되고 있으며, 이 후로도 거듭 使行하고 있다. 이로써 볼 때, 639년 이전에는 당이 외교 적 능력이 검증된 인물을 홍려경에 임명하며 일종의 외교 전문가를 양 성하고 있었고, 당의 대외 관계에서 외교 비중은 상당히 컸다고 하겠 다.

반면에 696년 이후 홍려경으로 사신 활동을 펼친 인물들은 出使를 위해 홍려경(司賓卿)을 攝ㆍ假하여 일회적인 사행을 담당하였고, 재차 使行한 예가 없다. 또한 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화봉요는 鴻臚卿이 아닌 戶部侍郞에 임명되었다.49) 보건데 무주통치기에 당은 돌궐의 압 박과 요구에 수동적으로 唐使를 파견하였고, 파견된 섭홍려경은 돌궐 의 내ㆍ외정을 간파할 수 있는 외교(돌궐) 전문가는 아니라고 하겠다.

따라서 당은 돌궐의 내 외정을 판단하기 어려웠고 돌궐에 대해 장기적 이고 유효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채 돌궐의 요구를 모두 수용해야 했다. 즉 당은 고종대에 비해 군사적 역량이 쇠퇴하였음에도 대외 관 계의 또다른 통로인 사신 외교에도 미숙하고 소극적이었다고 하겠다.

현종대에도 외교 사행은 홍려경이 아닌 섭홍려경이 주로 담당하였 지만 그 사행 횟수는 많아졌고 목적지도 다양하다. 그러나 726년(開元 14) 이후로는 섭홍려경이 아닌 섭홍려소경이 파견되고, 이마저도 730 년(開元 18) 이후로는 신라에 한차례(開元 25) 파견된 것이 전부이다.

이는 외교 전문 기구인 鴻臚寺의 전문성이 점차 약화되고 또 외교의 필요성이나 비중도 크게 축소된 까닭으로 해석된다. 현종 天寶 14년 동안 唐使 파견이 3차례50)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두 번째로, 640년부터 695년까지 약 60년간에 걸친 공백기에 관해서 이다. 이 공백기 동안에 당의 대외 관계의 관건은 羈縻府州體制라 할 수 있다. 金浩東은 기미부주의 설치 과정에 대해, 돌궐 붕괴 직후 돌궐 49) 資治通鑑卷210, p.1421. 睿宗 景雲 2년 11월 기사.

50) 廉景伊, 唐 玄宗代 使臣派遣과 그 外交的 役割 (中國史硏究54, 2008.6), pp.38-54.

(11)

항호민을 대상으로 河南에 기미부주가 두어졌다가, 639년(貞觀 13)에 돌궐 수령 結思率의 반란으로 河北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649년(貞觀 23)에 최종적으로 도독부의 節制를 받는 11개의 羈縻州가 설치되었 다51)고 하였다.

주목할 것은 당이 639년에 돌궐 항호민을 내지(河南)가 아닌 외지 (河北)로 강제 이주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華夷不殊觀을 말하던 태종의 대외 정책에 변화가 있음을 보여 준다. 바로 다음해인 640년 (貞觀 14)에 당이 高昌을 정벌하여 西州로 편제한52) 것은 당의 대외 정책이 정벌과 지배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건이다. 또 태 종말에 설연타가 멸망하자 이곳을 6府7州의 기미부주로 편제한53) 것 은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630년(貞觀 4)에 당이 돌궐 을 정벌하였지만 그 지역에 대해 당의 책봉을 받은 薛延陀 夷男의 지 배를 인정한 것과 크게 비교된다.

당의 정벌을 받고 당의 관료(도호)가 파견되는 곳은 더 이상 공식적 인 외교 대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의 대외 정책이 정벌 과 지배로 변화되는 640년을 기점으로 홍려경 使行의 공백기가 시작된 다는 것은 상관성이 크다고 해석된다. 그렇다면 696년 이후로 홍려경 의 사행이 돌궐에만54) 행해졌던 이유도 당이 돌궐을 더 이상 기미부 주가 아닌 책봉-조공의 외교 대상국으로 인정하며 외교적으로 대우하 였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토번에 파견된 崔琳의 관직 변동에 관한 것이다. 현종 개원년간에 유일하게 홍려경을 본관으로 사행의 임무를 부여받은 인물 은 홍려경 崔琳이다. 홍려경 崔琳은 731년(開元 19) 정월에 토번 사행 을 부여받았지만 그해 3월에 御史大夫로 出使하였다.55) 당시 당과 토 51) 金浩東, 唐의 羈縻支配와 北方 遊牧民族의 對應 (歷史學報137), p.140.

52) 資治通鑑卷195, p.1312, 太宗 貞觀 14년 8ㆍ9월 기사.

53) 新唐書卷217上, 回鶻上, p.6112; 舊唐書卷195, 回紇, p.5196.

54) 같은 시기에 당이 신라ㆍ토번ㆍ서돌궐 등에 파견한 사신은 右武衛冑曹參軍ㆍ 安西都護ㆍ御史中丞ㆍ侍御史 등의 本官으로 출사하였다(廉景伊, 당 무후ㆍ중 종대 사신 파견과 그 외교적 역할 江原人文論叢18, 2007, pp.5-14 참조).

(12)

번은 730년(開元 18)에 화친한56) 이후로 737년(開元 25)에 河西節度使 崔希逸이 토번과의 맹을 깨고 토번을 습격하기까지 우호적인 通使를 거듭하였는데, 최림은 이 과정에서 파견된 報聘使이다.

그런데 왜 인물이 아니라 관직이 변경되었을까. 이는 무주시기로부 터 현종 즉위 전까지 돌궐에 파견된 唐使가 임시 홍려경으로 임명되었 던 것과 정반대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당이 武周통치기에 섭홍려 경을 돌궐에 파견한 것이 돌궐을 외교 대상국으로 인정한 것이라면, 최림의 관직을 굳이 홍려경이 아닌 어사대부로 한 것은 양국이 우호적 인 사신 교류를 하고 있는 현실과 상관없이 책봉-조공이 없는 토번과 의 관계를 외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이는 토번과 사신 교류가 시작된 이후로 현종대까지 유독 토번에 는 외교 전문기구의 최고 책임자인 홍려경이 파견되지 않았던 사실에 서도 유추할 수 있다.

Ⅲ. 홍려경의 군사 활동

당 전기 홍려경 중 대외적으로 군사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인물은 11 55) 新唐書(卷216, p.6085)와 舊唐書(卷196, p.5231) 吐蕃傳과 冊府元龜

(第12冊, 外臣部 和親, p.11502)에는 崔琳이 ‘御史大夫’로서 報聘하였다고 기 록하고 있고, 舊唐書(卷8, p.196)에는 정월에 홍려경 崔琳이 토번에 파견되 었고 2월에 어사대부가 되었으며 3월에 崔琳이 토번에 파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혼동을 가중시키고 있다. 全唐文(上海古籍出版社, 1995)에는 命崔琳使 吐蕃詔 (卷30, p.143)와 賜吐蕃贊普書 (卷40, p.189)가 실려 있는데, 조서는 홍려경 崔琳에게 내려졌으며, 贊普에게 보낸 칙서에는 御史大夫 崔琳이라 기록 하고 있다. 종합해보면, 崔琳이 토번에 파견될 사신으로 정해져 조서가 내려진 시점과 그가 토번에 파견된 시점에 차이가 있으며 그 사이에 그는 홍려경에서 어사대부로의 관직 변동이 있었기에 사료마다 기록의 차이를 두고 있는 것으 로 보인다.

56) 冊府元龜第12冊, 外臣部 和親, p.11502. 新唐書(卷216上, p.6084) 吐蕃 傳에는 皇甫惟明과 내시 張元方이 토번에 화친사로 파견되어 토번과 금성공주 의 예물에 답례하며 토번과의 화친을 성사시켰다.

(13)

명으로, 이들을 시기적으로 구분하면, 태종 고종대에 각 2명이고, 나머 지 7명은 모두 현종대에 집중되어 있다. 태종ㆍ고종대 홍려경의 대외 활동은 江夏王 道宗57)을 제외하고는 639년 이전의 사신 활동과 이후의 군사 활동으로 구분된다.

639년 이후로부터 고종대까지, 당의 홍려경은 阿史那社爾ㆍ契苾何力 ㆍ蕭嗣業 3명이며, 이들은 모두 대외적인 군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먼 저, 阿史那社爾와 契苾何力은 당에 內降한 이민족이다. 阿史那社爾는 요동 정벌에서 돌아온 후 646년(貞觀 20)에 홍려경에 제수되었고,58) 서 돌궐 阿史那賀魯를 격퇴한59) 契苾何力은 657년(高宗 顯慶 2)에 檢校鴻 臚卿을 겸하였다.60) 이들이 얼마 동안 홍려경에 임명되었고 이후의 군 사 활동61) 중에도 홍려경이었는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들은 內降한 이민족으로 蕃情을 잘 알뿐 아니라 대외 정벌에도 공을 세웠다는 공통 점을 가지고 있다.

蕭嗣業은 고종초에 홍려경에 임명된 인물이지만, 이미 태종말(646년, 貞觀 20)에 회흘에 위무사로 파견되기도62) 하였다. 그가 홍려경으로 활동한 기간은 658년(高宗 顯慶3) 11월63)부터 679년(調露元年) 10월64) 57) 江夏王 道宗은 627년(太宗 貞觀元年)에 홍려경에 임명되었다(舊唐書卷60, p.2354). 그는 임명 시점을 전후하여 줄곧 靈州에서 돌궐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격퇴하여 전공을 세우며(資治通鑑卷190, p.1271. 高祖 武德 5년 11월 기사;

卷191, p1279. 武德 8년 8월 기사; 卷193, p.1293. 太宗 貞觀 3년 11월 기사) 군 사적으로 활동하였다.

58) 舊唐書卷109, 阿史那社爾傳, p.3289;新唐書卷110, 阿史那社爾傳, p.4115.

59) 新唐書卷215下, 突厥下, p.6061; 舊唐書卷194下, 突厥下, p.5186; 資治 通鑑卷199, p.1337, 高宗 永徽 2년 7월 기사.

60) 舊唐書卷109, 契苾何力傳, p.3291.

61) 阿史那社爾는 647년에 崑丘道行軍大總管으로 龜玆를 정벌하고 또 그 다음해 에는 서돌궐에서 處密을 격파하였으며, 契苾何力은 661년(龍朔元年)에 遼東道 行軍大總管으로 출격하고 있다(舊唐書卷109, 阿史那社爾傳. 契苾何力傳).

62) 舊唐書卷199下, 鐵勒傳, p.5348.

63) 舊唐書卷4, p.78, 高宗 顯慶3년 12월 기사, “鴻臚卿蕭嗣業於石國取賀魯至獻 於昭陵.”

64) 資治通鑑卷202, p.1362, 高宗 調露元年 10월 기사, “遣鴻臚卿單于大都護府 長史蕭嗣業ㆍ右領軍衛將軍花大智ㆍ右千牛衛將軍李景嘉等將兵討之.”

(14)

까지이며, 대체로 고종 통치시기(650-683)와 일치한다.65)

소사업의 활동상을 살펴보면, 655년(永徽 6)에 回紇을 이끌고 고구려 에 진격하였고,66) 657년(顯慶2)에 燕然(회흘)副都護로 서돌궐 阿史那賀 魯를 토벌하였으며,67) 661년(龍朔元年)에도 회흘을 이끌고 평양으로 진 격하였다.68) 하지만 같은해(661년) 10월에 回紇이 同羅ㆍ僕固와 함께 변방을 침탈하자 소사업은 仙萼道行軍總管으로 이들을 토벌하였고,69) 673년(咸亨 4)12월에 弓月이 吐蕃과 결탁하여 疏勒을 공격하자 출병 하였다.70) 그러나 소사업은 679년(調露元年) 10월에 돌궐 항호민의 반 란을 진압하지 못하고 대패함에 따라 桂州에 유배되었다.71)

舊唐書

소사업전에는 “어려서(隋末) 돌궐에 들어갔다가 貞觀 9년 (635년)에 당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蕃情을 잘 알았으며, 이러한 까닭에 당은 그로 하여금 돌궐 무리를 統領하게 하였다”72)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646년에 소사업이 회흘에 특사로 파견되고73) 이후로 燕然副都 護로서 회흘을 동원하여 군사 정벌에 나섰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가 어려서 祖姑를 따라간 곳은 돌궐 내에서도 구체적으로 회흘 부락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즉 소사업은 회흘의 蕃情을 잘 아는 인물이고, 이러한 까닭에 당은 소사업을 회흘에 사신으로 파견하였고 또 고종대에는 회흘을 統領하여 從軍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태종대에 정원숙이나 당검과 같

65) 소사업은 고종 통치 기간 중 거의 20년간 줄곧 홍려경이었다. 이는 이 기간 중에 소사업 이외의 다른 인물이 홍려경으로 언급된 기사가 없고, 新唐書  舊唐書의 本紀 突厥傳 裴行儉傳과 資治通鑑에서 줄곧 ‘홍려경 소사업’을 기 록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66) 舊唐書卷195, 回紇傳, p.5197.

67) 資治通鑑卷200, p.1343, 高宗 顯慶2년 閏正月 기사; p.1344. 12월 기사.

68) 資治通鑑卷200, p.1347, 高宗 龍朔元年 정월 기사; p.1348. 4월 기사.

69) 資治通鑑卷200, p.1348, 高宗 龍朔元年 10월 기사.

70) 資治通鑑卷202, p.1358, 高宗 咸亨4년 12월 기사.

71) 資治通鑑卷202, p.1362,. 高宗 調露元年 10월 기사.

72) 舊唐書卷63, 蕭嗣業傳, pp.2405-2406.

73) 舊唐書卷199下, 鐵勒傳, p.5348.

(15)

이 이민족 국가에 정통한 인물을 홍려경에 임명하고, 또 이민족 출신 으로 蕃情을 잘 아는 阿史那社爾와 契苾何力을 홍려경으로 삼았던 측 면과도 상통한다.74)

蕭嗣業 이후로 홍려경의 군사 활동은 현종이 즉위하는 712년까지 전혀 살펴볼 수 없다. 그러나 현종대에는 군사 활동을 수행한 홍려경 이 7명으로,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상당히 많다. 이들 중 開元年間에 활동한 인물은 王晙 郭知運 來曜 3명이다. 王晙은 714년(開元 2) 윤2월 에 鴻臚少卿ㆍ朔方軍副大總管으로 安北大都護ㆍ朔方道行軍大總管을 兼 하였고 豐安ㆍ定遠ㆍ三受降城을 통할하였다.75) 그는 예종대에 朔州鎭 軍副總管으로 郭虔瓘을 보필하며 來附한 돌궐을 안무하였고,76) 714년 10월에는 용맹한 병사 700명으로 토번을 기습 공격하여 큰 전공을 세 웠다.77) 다음으로 郭知運은 716년(開元 4)에 河曲의 돌궐 항호민의 반 란을 대파하였고,78) 714년(開元 2)과 717년(開元 5)에는 토번을 격파하 며79) 전공을 세워 鴻臚卿ㆍ攝御史中丞에 임명되었다.80) 또 來曜는 730 년(開元 18)에 鴻臚卿同正員ㆍ安西副都護ㆍ持節磧西副大使ㆍ四鎭節度 使였고 그 명성이 西邊에 자자하였다.81)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이렇게 현종 開元年間에는 군사 능력이 있는 인물이 홍려경으로 임명되었지만 더불어 섭홍려경의 使行이 병용되었 고, 섭홍려경의 사행(7건)이 더 많다는 점이다. 반면에 현종 天寶年間 74) 이는 당 태종대에 내항한 이민족 군장들을 唐의 使臣로 파견하여 외교 능력 과 성과를 극대화시켰던 것과 유사하다(廉景伊, 唐 前半期 使臣 外交 硏究 (전북대학교박사학위논문), pp.102-106).

75) 資治通鑑卷211, p.1426, 玄宗 開元 2년 윤2월 기사.

76) 新唐書卷195上, 突厥傳, p.6048.

77) 資治通鑑卷211, p.1428. 玄宗 開元 2년 8월 기사, 10월 기사, 8월 기사에는

‘太僕少卿王晙’으로, 10월에는 ‘太僕少卿隴右群牧使’로 기록되어 있다.

78) 舊唐書卷194上, 突厥傳, p.5174; 資治通鑑卷211, p.1432, 玄宗 開元 4년 10월 기사.

79) 資治通鑑卷211, p.1428, 玄宗 開元 2년 10월 기사; p.1433. 開元 5년 7월 기 사.

80) 舊唐書卷103, 郭知運傳, p.3190.

81) 舊唐書卷114, 來瑱傳, p.3365.

(16)

에는 홍려경의 사행은 없고 군사 활동만이 확인된다.

天寶年間에 홍려경으로 대외 활동을 한 인물들은 皇甫惟明ㆍ王忠嗣 ㆍ哥舒翰ㆍ高仙芝이다. 隴右節度使 皇甫惟明은 746년(天寶 5) 정월에 兼河西節度使로 토번의 침략을 방어하였는데,82)

舊唐書

韋堅傳에는 皇甫惟明을 河西節度 鴻臚卿으로 기록하고 있어, 그가 河西ㆍ隴右節度 使로서 홍려경을 겸하였다고 볼 수 있다. 황보유명이 이림보의 간계로 播川太守로 좌천되자 王忠嗣가 河西ㆍ隴右節度使로 知朔方ㆍ河東節度 使를 兼하였고83) 또 홍려경에 임명되었다.84) 하지만 747년(天寶 6) 10 월에 왕충사가 토번의 石堡城을 공격하라는 현종의 명령을 제대로 수 행하지 못하고 徵召되었고,85) 현종은 哥舒翰을 불러 홍려경으로 삼았 으며86) 왕충사를 대신하여 隴右節度使에 임명하였다.87) 또 같은해에 高仙芝가 小勃律王과 토번 공주를 사로잡아 돌아오자 당은 그해 말에 고선지를 홍려경에 제수하였다.88)

이상에서 당 전기 홍려경의 군사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군사 활 동을 담당한 홍려경은 임명 이전부터 이민족 국가의 침략을 방어하거 나 혹은 당의 대외 정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고, 이후에도 行軍大總 管으로, 혹은 변방의 都護나 節度使로 활약하고 있다. 다시 말해 홍려 경에 임명된 이후에 대외적으로 군사적 임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아 홍려경에 임명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외교적 능력보다 군사적 능력을 가진 인물이 홍려경에 임명 된 시점에는 당이 대외 관계에서 외교 보다 전쟁과 군사적 측면을 더 중요하게 여겼음이 분명하다.89) 이는 홍려경의 군사 활동이 많았던 고

82) 資治通鑑卷215, p.1463, 玄宗 天寶 5載, 정월 기사.

83) 資治通鑑卷215, p.1463, 玄宗 天寶 5載, 정월 기사.

84) 舊唐書卷103, 王忠嗣傳, p.3199.

85) 資治通鑑卷215, p.1464, 玄宗 天寶 6載, 10월 기사.

86) 舊唐書卷104, 哥舒翰傳, p.3212; 新唐書卷135, 哥舒翰傳, p.4570.

87) 資治通鑑卷215, p.1465; 玄宗 天寶 6載, 11월 기사.

88) 舊唐書卷104, 高仙芝傳, p.3205; 新唐書卷135, 高仙芝傳, p.4578.

89) 廉景伊, 唐 高宗代 對外 政策의 性格과 意味 (中國史硏究75, 2011),

(17)

종대와 현종 天寶年間의 양시기에 당의 대외 관계가 공격적이고 전투 적이었던 사실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고종대는 당의 羈縻支配體制가 최대로 확대되는 시점으로 이에 대 해서는 앞서 살펴보았다. 현종 개원년간에는 기미지배가 아닌 책봉을 통해 대외 관계를 안정적으로 재구축하였지만,90) 開元末에 돌궐의 군 사실력자(闕特勤)와 毗伽可汗이 잇달아(731년, 732년) 사망한91) 것을 계기로 당의 대외 정책은 급변하였다.

당은 732년(開元 20)에 거란 可突于을 정벌하였고,92) 732년(개원 20) 에 발해가 登州를 공격하자93) 곧 右領軍將軍 葛福順을 보내 발해를 토벌하는94) 한편 신라에 발해 협공을 요청하였다.95) 또 736년(開元 24)에 당의 경고96)에도 불구하고 토번이 小勃律國을 침공하자 군사를 발동하였다. 小勃律은 토번이 서역으로 나가는 통로에 위치한 나라로 당의 변경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곳이지만, 당은 토번의 서역 진출 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은 738년(開元 26)에 토번과 연합한 突騎施 蘇祿이 莫賀達干에게 살해되는 사건에도 개입한 것으로 보이며,97) 이후 吐火仙可汗(蘇祿의 아들)이 당의 초위에

pp.49-51.

90) 廉景伊, 唐 玄宗代 使臣派遣과 그 外交的 役割 (中國史硏究54, 2008), pp.54-62.

91) 舊唐書卷194上, 突厥傳, p.5177; 新唐書卷215下, 突厥下, pp.6053-6054.

冊府元龜第12冊, 外臣部 封冊2, pp.11346-11347.

92) 資治通鑑卷214, p.1450, 玄宗 開元 22년 12월 기사. 거란은 開元初에 당에 내항한 이후로 끊임없이 來唐과 反唐을 반복하였지만, 당은 오랜 시간 참을성 있게 책봉 혼인 分賜를 통해 이들을 기미하다가 이 시점에 이르러 정벌을 단 행한 것이다.

93) 사료에는 732년에 발해가 등주를 공격한 것에 대한 설명이 없다. 다만 발해 의 등주 공격에 앞서 당이 거란을 정벌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양국의 균형을 깨는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닐까 짐작된다.

94) 資治通鑑卷213, p.1448, 玄宗 開元 20년 9월 기사.

95) 三國史記 新羅本紀 제8, p.180; 張文獻 撰, 曲江集(上海: 中華書局) 卷5, 勅新羅王金興光書 , pp.4-5.

96) 曲江集卷6, 勅吐蕃贊普書 , p.15.

97) 이는 蘇祿이 살해되고 그의 아들이 가한에 추대되자 莫賀達干이 그 사실을

(18)

불응하자 磧西節度使 蓋嘉運을 파견하여 섬멸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당은 開元末로부터 대외 관계에서 군사력을 동원한 공격적 인 정책을 취하였는데, 이 시점에 홍려경이 사신 활동이 아닌 오로지 군사적인 활동만을 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니라 하겠다. 특히 현 종대에는 사신 활동이 섭홍려경에 의해 행해진 반면(이마저도 개원년 간에 국한된다) 군사 활동은 홍려경을 本官으로 하고 있다. 외교 사신 은 임시직을 세워 파견하고 군사 정벌과 방위를 담당하는 절도사를 홍 려경에 임명한 것은 당의 대외 정책이 고종대와 같은 군사 정벌로 전 환되었음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홍려경이 군사 활동에 주력하던 시점에 당의 대외 정책 은 책봉을 통한 외교 보다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화주의를 실현시키는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Ⅳ. 결론 : 변화 양상과 의미

홍려경의 대외 활동은 당의 대외 정책의 틀 안에서 행해지는 것으 로, 홍려경의 대외 활동을 통해 당대 대외 정책의 내용과 성격 및 그 변화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홍려경의 대외 활동은 크게 사신 활동과 군사 활동으로 양분되며, 시기적으로도 거의 중첩되지 않는다. 즉 고조대로부터 태종 정관 13년 (639)까지의 사신 활동(使行) - 태종말ㆍ고종대의 군사 활동 - 사행이 나 군사 활동이 없는 공백기(17년가량) - 武周통치기의 사행(攝鴻臚 卿) - 현종 개원년간의 사행(섭홍려경)과 군사 활동의 병용 - 현종 천 보년간의 군사 활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를 간단히 표현하면, 사신

군사…사신(섭홍려경)

사신(섭홍려 경)+군사

군사이다. 좀더 곰곰이 살펴보면 사신

군사의 흐름이 사신

신속히 당에 전하고 있음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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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홍려경)

사신(섭홍려경)+군사

군사로 변용되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홍려경의 사신 활동이 군사 활동으로 전환되는 시점은 당이 고창을 정벌하여 西州로 삼았던 640년(太宗 貞觀 14)이고 또 돌궐 가한이 사 망하고 양국 간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현종 開元末이다. 640년 을 기점으로 당은 군사력을 앞세워 이민족 국가를 정벌하고 기미지배 체제를 확대하기 시작하였고, 開元末로부터 군사력을 바탕으로 당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국가를 정벌하였다.

그렇다면 홍려경의 대외 활동은 왜 사신 활동에서 군사 활동으로 전환되는 것일까. 홍려경의 사신 활동은 당의 사신 외교라는 큰 틀에 서 살펴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대외 관계는 책봉-조공관계를 전제로 한다. 唐 역시 돌궐 정벌 이후로 책봉을 통해 국제 질서에서 보다 주도적 지위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요구하는 책봉-조공 관계는 ‘天子’의 나라인 중국 중 심의 질서와 세계관 위에 형성되는 것으로, 당과 대외 관계를 형성한 이민족 국가가 이러한 중국적 이념에 동의하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즉 이민족 국가의 군주가 당의 책봉을 수용, 혹은 요구하는 것은 대체 로 자국의 필요에 따른 것이며, 중국적 이념이 실현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또한 책봉은 당과 국가적 이익을 달리하는 이민족 국가의 존 속을 전제로 하며, 이러한 국가 관계 속에는 역학관계가 작용한다.

따라서 책봉-조공의 국제 관계에서는 당이 중국적 이념을 바탕으로 종주국의 지위를 지속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실제로 당 태종대에 당 의 책봉을 받았던 설연타는 이후로 점차 강성해지면서 당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고, 친당 정권이 수립된 토욕혼에서도 反唐적 인사들이 반기 를 들었으며, 당의 책봉으로 지위를 굳건하게 했던 서돌궐 가한도 당 의 타림분지 요구를 거절하고 있다.

이에 당은 640년에 고창을 정벌하여 하나의 州로 편제하였고, 이로 부터 당은 책봉을 통한 외교관계가 아닌 정벌과 지배의 기미지배체제 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마찬가지로 현종은 변방 절도사체제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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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능력을 배양하는 한편 군사적 능력만으로 역부족인 대외 관계 를 사신 외교를 통해 극복하였지만, 당이 국제 관계에서 주도적인 지 위를 장악하게 되자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군사 활동으로 전환하였다.

홍려경의 사신 활동이 군사 활동으로 전환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왜 홍려경의 대외적인 군사 활동이 중지되 고, 다시 사신

군사의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가에 관해서이다. 그 이 유는 실현 불가능한 중국의 천하관에서 찾을 수 있는데, 즉 天下가 중 국이 될 수 없는 현실에서 중국의 지배 영역이 확대될수록 그 통제력 은 점차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 고종대는 최대 영토가 확보되어 기미지배체제가 실현된 시점이지만, 이 과정에서 당은 확대된 드넓은 영토에 군사를 배치해야 했고 한편으로는 강력한 토번과 끊임없이 충돌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미지배를 거부하는 신라와 전쟁을 해야 했다. 그 결과 고종말부터 당의 군사력은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당의 통치 영역은 변방 방어선 안으로 축소되어야 했다.

때문에 이때로부터 대외 관계에서 전쟁 보다는 외교적 측면이 부각 되고, 홍려경의 대외 활동도 군사 활동이 없는 사신 활동으로 선회하 고 있다. 하지만 사신 외교의 기능과 역할은 이미 당이 대외적으로 최 대한 팽창되는 과정과 반비례하여 축소된 상태이다. 또한 당은 돌궐이 나 토번과 같은 강력한 이민족 국가의 출현으로 크게 수세적인 상황에 처하였고, 이 과정에서 홍려시 홍려경의 외교 기능과 정치적 입지도 점차 축소ㆍ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홍려경이 아니라 섭홍려경이 사행 을 담당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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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시기 / 사행목적지 및 관직 출처 활동 내용 鄭元璹 622 武德5 使突厥 舊 鄭元璹傳, 冊 敏辯

2, 資, 舊 劉世讓傳 627 貞觀元年 使突厥

李道宗 627 貞觀元年 江夏王 舊 列傳10 宗室,

新 列傳3 宗室. ⦿

唐儉 630 貞觀4 使突厥 資, 冊 謀略,

新․舊 突厥傳

劉善因(少) 632 貞觀6 使西突厥 資, 新․舊 突厥下

劉善因 639 貞觀13 使北突厥 資, 新․舊 突厥

阿史那社爾 646 貞觀20 師旋 後 兼授鴻臚卿 新․舊 阿史那社爾傳 ⦿ 契苾何力 657 顯慶2 兼檢校鴻臚卿 舊 契苾何力傳. ⦿

蕭嗣業

661 龍朔元年 鴻臚卿爲夫餘道行軍總管

資, 新․舊 本紀,

新․舊 蕭嗣業傳, ⦿ 673 咸亨4 發兵討之(弓月ㆍ疏勒)

679 調露元年 鴻臚卿單于大都護府長史 田歸道 696 萬歲通天元年

使突厥 左衛郎將攝司賓卿

資, 新․舊 突厥,

新․舊 田歸道傳 楊齊庄 698 聖歷元年 使突厥

右武衛郎將攝司賓卿

資, 新․舊 突厥,

舊 本紀

臧思言 707 景龍元年 使突厥, 假鴻臚卿, 死. 新 本紀 和逢堯 711 景雲2 使突厥

御史中丞攝鴻臚卿 資, 新․舊 和逢堯傳 王晙(少) 714 開元2 以鴻臚少卿朔方軍副大總管

兼安北大都護 ⦿

郭知運 718 開元6 兼鴻臚卿ㆍ攝御史中丞 新․舊 郭知運傳 ⦿ 吳思謙 719 開元7 使渤海

左監門率上柱國攝鴻臚卿 新 渤海傳. 冊 褒異1. 袁振 725 開元13 使突厥,

中書直省攝鴻臚卿 資, 新․舊 突厥

李道邃(少) 726 開元14 使渤海

喬夢松(少) 728 開元16 使于闐疏勒

大理正攝鴻臚少卿 新 疎勒, 冊 封冊 來曜 730 開元18 鴻臚卿同正員安西副都護

持節磧西副大使四鎭節度使 舊 來瑱傳 ⦿

崔琳 731 開元19 使吐蕃 資, 新 吐蕃, 冊 和親, 부록 <표> 唐 前期 鴻臚卿의 대외 활동

(사행 :⦾, 군사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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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唐文30․40 邢璹(少) 737 開元25 使新羅

贊善大夫攝鴻臚少卿 三國史記 新羅本紀 9.

唐會要 95

皇甫惟明 746 天寶5 鴻臚卿 舊 韋堅傳 ⦿

王忠嗣 747 天寶6 尋遷鴻臚卿 新 王忠嗣傳 ⦿

哥舒翰 747 天寶6 遂以爲鴻臚卿 新․舊 哥舒翰傳 ⦿

高仙芝 747 天寶6 鴻臚卿ㆍ攝御史中丞 舊 高仙芝傳 ⦿

*출처는 資治通鑑; 資, 新唐書; 新, 舊唐書; 舊,冊府元龜; 冊으로 표기하였다.

新唐書 舊唐書에 모두 수록된 것은 新․舊로 약축ㆍ표기하였으며,  은 생략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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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Foreign Activities and Changeable Aspects of Hung-lu (shao)ch'ing in the Early Period

of Tang

Yum, Kyoung Yi

Hung-lu ssu is the official institution which handled Foreign-related business in Tang. Hung-lu ch'ing, the head of it, externally acted as envoy and carried out military affairs. We can know that mostly he worked actively as an envoy from Gao-zu to the early of T'ai-tsung and did only the military activities from the end of T'ai-tsung to Kao-tsung. This is seen that Tang changed the foreign policy from the investiture of foreign kings by the Chinese emperor to the aggressive ways through conquest and control.

We can examine again his envoy activities from 696 when Turk was reestablished and resumed diplomatic relations with Tang. But he went only on the envoy's way to Turk unlike one of the nation's earliest days and was dispatched temporarily. Although he succeed in envoy activities, they didn't related with promotion to public office. This fact was interpreted as not given more weight to securing and training the diplomatic experts, and to diplomacy through envoy.

In conclusion, he carried briskly out diplomatic activities as env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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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period to achieve the unification of the whole country or to overcome political and economical contradiction and confusion.

Hung-lu ssu, however, weakened as the organization in charge of foreign countries and he was responsible for military conquest activities after internal unification and stability were constructed.

Because Tang should attempt to expand to a foreign countries and realize world view centering on China.

주제어: 당, 홍려시, 홍려경, 사신, 기미지배체제 關鍵詞: 唐, 鴻臚寺, 鴻臚卿, 使臣, 羈縻支配體制

Keywords: T'ang, Hung-lu ssu, Hung-lu ch'ing, envoy, Jimi Local Administration System

(원고접수: 2012년 4월 30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6월 11일, 수정원고 접 수: 8월 6일, 게재 확정: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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