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塘沽停戰協定 이후 국제정세와 職業外交官의 항전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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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業外交官의 항전 입장

石 美 子 (高麗大)

Ⅰ. 서론

Ⅱ. 당시 잡지를 통해 본 국제 정세

Ⅲ. 직업 외교관의 선전 활동

Ⅳ. 직업 외교관의 항전 입장

Ⅴ. 결론

Ⅰ. 서 론

본고는 직업 외교관들이 만주사변 이후 외교부의 중요한 요직에 배 치되면서 국내외에서 일본군의 침략을 중지시키고 국가의 위기를 구제 하기 위해 대외 선전과 외교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면서 어떠한 외 교적 입장을 취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직업 외교관은 북양정부 시 기부터 외교부가 전문화, 근대화라는 방침의 개혁을 실행하여 전문적 인 외교 인재의 충원뿐만 아니라 장기간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 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임용 시험에 합격하거나 외국 유 학으로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고, 정치, 경제, 법률, 국제관계 등 외교와 관련된 지식을 갖추었으며, 외국 공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인물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채용된 후에도 외교 부서와 해외 공관에서 대외관계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면서 외국어와 관련 전문 지식을 계속 수학하였다. 외교관은 외국 주재 공관 직원과 외교부의 직원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본고는 양자를 통칭하여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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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으로 부르고자 한다.

직업 외교관은 滿洲事變 시기부터 남경정부의 서구 열강에 대한 외 교․선전 정책에 대해 전적으로 국제연맹을 신뢰하여 일본군을 철수시 키는 방식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군사적 항전과 적극적인 영토 방위를 강조하였다. 上海事變 시기에는 남경정부의 항 전하면서 동시에 교섭하는 정책에 대하여도 그들은 지속적인 항전으로 승리를 확실히 굳히고 만주사변까지 포함해 해결할 수 있는 계기를 마 련하자는 입장을 취하였다. 長城抗戰 시기에도 그들은 1933년 5월 31 일 당고정전협정을 서둘러 체결하는 것을 반대했고, 당고정전협정 이 후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도 이와 같은 항전 입장 을 더욱 강경하게 표명했으며, 나아가 남경정부에 적극 항전을 요청하 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만주사변 이후 중국 국민들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한 남경정부 의 소극적 대응책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고, 특히 지식인과 학생들은 즉각적인 항전을 요구하며 비판하였다. 비판자들은 남경정부가 좀 더 강경한 태도를 보일 것을 요구했고, 대일본 타협 정책을 반대했다. 당 시 남경정부의 대일본 정책이 국민당 외부로부터만 비판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국민당 내부에도 일본에 대한 강경한 태도와 항전을 요청했 던 세력으로 직업 외교관들 이외에 胡漢民, 孫科, 廣州 중앙위원, 上海 주둔 제19로군, 馮玉祥 등이 있었다. 본고는 국민정부 내부의 비판자들 중 직업 외교관들이 남경정부의 대일본 정책의 결정과 수행 과정에 참 여해 활동하면서 항전을 주장했고, 좀 더 타당한 논리를 갖고 객관적 이고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한 점에 주목하였다.

중화민국 시기의 중국외교사 연구를 일별해 볼 때, 북양정부 시기와 중일전쟁 시기의 외교관과 외교 제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연구 성과 가 나왔지만,1) 본고가 주목하는 만주사변 시기부터 중일전쟁 이전 시 1) 북양정부 시기 외교 제도와 직업 외교관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王立誠,

中國近代外交制度史(甘肅人民出版社, 1991), p.207. 여기에서는 남경정부 시 기에 외교 제도와 직업 외교관에 대해 개략적으로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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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1931-1937)에 대해서는 당시 남경정부의 외교적인 변화와 직업 외 교관의 활동 및 역할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이 시기에 관한 약간의 연구들은 顧維均 외교부장, 羅文幹 외교 부장 등 개별 주요 인물의 외교적 입장과 견해를 살펴보는 정도에 그 치고 있어, 남경정부의 외교 전반에서 차지하는 직업 외교관 집단의 총체적 역할과 그 특징을 파악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본고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당고정전협정 체결 이후 직 업 외교관의 동향을 고찰하고자 한다. 직업 외교관들은 1933년 5월 만 주사변을 일단락 지으며 체결된 당고정전협정 이후에도 계속되는 일본 의 침략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항전 준비를 해줄 것을 주장했고, 국 내외에 관련 선전 활동을 전개하면서 항전 입장을 피력하였다. 필자는

外交部公報와 中央政治會議檔案, 中華民國外交史料彙編, 革命文 獻(抗戰前國家建設史料 -外交方面)(第72輯) 등 문헌 자료 이외에도 직업 외교관의 회고록과 獨立評論, 東方雜誌, 外交月報, 中央日 報, 傳記文學 (臺灣)등 당시 저명한 잡지, 신문 등도 참조하였다. 특 히 이 시기에 직업 외교관의 활동과 관련된 자료를 찾기가 어려워 그 한계성이 있다는 점도 밝혀두고자 한다.

Ⅱ. 당시 잡지를 통해 본 국제 정세

제2장에서는 1930년대 초기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독립평론, 동 방잡지 등의 언론 매체에 실린 당고정전협정 이후 국제연맹과 일본 謙厚, 近代外交失敗與民國職業外交家勃興 (山西師大學報 第27卷 第3期, 2000年 7月), pp.97-98; 石源華, 論留美歸國學人與民國職業外交家群體 (復旦 學報 2007-4), p.32; 川島眞, 中國近代外交の形成 (東京: 名古屋大學出版會, 2004), p.136; 岡本隆司 川島眞, 中國近代外交の胎動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2009), p.181; 중일전쟁 시기에 외교부의 제도와 직업 외교관에 대한 연구는 다 음과 같다. 陳雁, 抗日戰爭時期中國外交制度硏究 (上海: 復旦大學出版社, 2002),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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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국제정세에 대한 기사를 분석해 국제사회의 동향 및 중국 국내의 상황 인식에 대해 간략하게 검토하겠다. 당시 1920년대와 1930년대  독립평론, 대공보 등 여러 신문, 잡지 등이2) 중국 사회와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대책을 제시하면서 대중을 계몽하고 여론을 형성 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역할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또한 당시 직업 외교관도 국제연맹 및 일본의 정세에 대해 분석해 중일 양국 간의 갈등에 대해 국제연맹을 신뢰해 해결하지 못하며 일본 의 중국 침략 야심도 지속적임을 경고했고, 외교 실무자로서 국제사회 에서 대외관계에 관한 업무에 종사하는 이외에도 국제사회의 동향을 선전하고 대일본 정책을 제시하면서 항전 입장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 은 직업 외교관의 선전 활동은 언론에 담화문 발표와 기자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본고는 직업 외교관의 국제사회 및 일본의 동향에 대한 인식과 항전 입장이 당시 중국 국내의 여론과 일정 정도 맥락을 같이하고, 대외관계 종사자로서 좀 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대 안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이는 다음 장부터 후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본고는 당고정전협정이후 국제 사회의 동향과 대일본 정책에 대한 중국 국내 여론의 상황을 당시의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간략하게 고찰하였다.

당고정전협정 체결 이후, 남경정부는 국제연맹에 일본군의 침략을 제소해 외교적으로 대응하는 정책에서 기술 합작 정책으로, 일본에 대 한 항전과 교섭을 병행하는 정책에서 타협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장성 항전 시기 연이은 중국 군대의 패배와 재정 상황의 악화로 인해 일본 2) 우선 1872년 신보가 창간된 이후 연이어 여러 신문, 잡지, 평론 등이 창간되 면서 관련 종사자인 언론인 뿐만 아니라 지식인, 대학 교수 등이 평론과 논설 등에 글을 발표해 당시 남경정부의 정책과 중국 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지 도적 역할을 다하였다. 그리고 1902년 창간된 대공보는 신문의 국가와 사회 에 대한 지도적 역할과 책임을 강조했고, 항전 시기 일본에 항전할 것을 주장 하였다. 특히 독립평론은 1932년 胡適 북경대학 철학과 교수 주도로 창간되 어 1937년 244호로 종간되었고, 당시 북경대학, 청화대학, 연경대학 등의 저명 한 정치학자와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남경정부의 정치와 대일본 정책 등에 대 해 비판 및 견해를 제시하며 대안을 주장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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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당고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남경정부는 일본에 대한 국교 조정과 타협 정책으로 난국을 타개하려고 모색하였다. 국제연맹에 대해서도 외교·선전 정책을 계속 실행하지만, 일본에 대한 제재보다 국제사회와 기술을 합작하거나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는 대책에 주력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남경정부는 1933년 6월 미국과 5천만 달러의 ‘棉麥借款協定’

을 체결하였고, 항공 사업 건설에서도 원조를 받았다. 독일은 중국에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여 기술과 자금을 원조하였고, 소련도 경제 합작 에 동의하였다. 1933년 7월, 남경정부는 국제연맹과 기술합작위원회를 성립시켰고, 관련 기술 원조를 제공 받았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1935년 이탈리아 뭇솔리니의 이디오피아 침략 및 합병에 대한 조정에 실패하면서 중일 양국 간 분쟁을 완전하게 해 결하지 못한 데에 이어 다시 불안감을 증가시켰고, 유럽에서도 군축회 의가 성과 없이 끝나면서 독일 히틀러의 군비 확충 등 각국의 군비 경 쟁으로 불안한 정세가 계속 되었다. 당시 중국 언론은 이와 같은 점을 언급하면서 국제연맹의 장래가 밝지 못하고 일본이 지속적인 대중국 무력 정책을 실행하고 있어 중국의 대응 정책도 큰 성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결국 이는 중일 양국 간 분쟁을 해결하는 데에 국제연맹이 큰 역할을 하기 어렵고, 일본의 대중국 무력 정책을 견제 하기 힘들 것이라는 의미였다.

당시 동방잡지에서는 국제연맹의 국제분쟁 해결 능력과 평화 기 구로서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어둡게 전망하였다.

이탈리아가 1935년 5월 9일 이디오피아를 침공해 합병을 선포하였다.

이는 국제연맹의 맹약을 위반한 것이다. 국제연맹 맹약 제10조에 의거하 여 각 회원국은 다른 회원국의 토지의 완전과 정치적 독립을 존중하고 유지해야 한다. 뭇솔리니가 이디오피아의 합병을 선포한 것은 그가 이미 국제연맹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국제연맹이 회원국의 생존을 보 장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직권을 계속 행사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도리 가 아니다. 이로 인해 국제연맹의 전도는 매우 암담하다.3)

3) 東方論壇 (東方雜誌 第33卷 第11號),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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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평론에서도 국제사회의 정세를 분석하면서 장래를 낙관할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1933년 7월, 나는 올 한해가 국제사회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했다. 1933년, 이 해에 세계의 3대 사업은 모두 실패하 였다. 국제연맹은 중일 문제의 처리에 실패하였고, 군축회의에서도 성과 를 거두지 못했으며, 런던세계경제회의에서도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 3대 사업의 실패는 바로 제1차 세계대전 이래 국제주의의 파산을 뜻하며, 각 국가가 군비 경쟁과 무역 전쟁을 벌이는 국가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

인류의 장래는 낙관할 수 없다. 반년이 지난 지금도 이 추세는 더욱 현저 하다. 1933년의 전반기는 국제주의의 최후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고, 후 반기는 국가주의가 신속하게 팽창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구체적으로 국제사회의 정세를 연구한다면, 우리들은 그 엄중성을 더욱 이해할 수 있 을 것이다.4)

또한 독립평론에서는 1934년 4월 17일 아마우(天羽) 일본 외무성 정보부장이 비공식적이지만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의 중국 지원과 기 술 합작에 대해 반대한 것을 논평하면서 히로다 고우키(廣田弘毅) 외 상의 ‘선린 외교’가 이전 우찌다 야스야(內田康哉) 외상의 ‘초토 외교’

와 다른 것이 없다고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지금 히로다 고우키 외상의 ‘선린 외교’는 우찌다 야스야의 ‘초토 외교’

와 어떠한 구별이 있는가? 우찌다 야스야는 만주사변 시기 군인들에게 아부하여 ‘초토 외교’를 주창했는데, 이는 이상할 것이 없다. 히로다 고우 키는 외상에 취임한 후 수세적인 외교 자세를 취하였고, 세계 각 국가들 은 이 외교적인 태도의 변화를 환영하였다. 6개월 정도가 지나자, 특히 미일관계가 호전되어 일본의 국제적인 지위가 유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냉철하게 관찰하면, 히로다 고우키의 신 외교도 일종의 기회를 엿보는 방 식을 취하고 있다. 만주국을 황제의 국가라고 부르고 영국, 미국과 해군 비율의 평등을 선언하여, 이는 일본 외교가 국제사회의 조언에도 상관없 이 지속적인 공세를 취하면서 세계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5)

4) 蔣廷黻, 國際現勢的分析 (獨立評論 第88號, 1934年 2月 4日), pp.5-6.

5) 胡適, 協和外交原來還是焦土外交 (獨立評論 第98號, 1934年 4月 29日), p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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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生活週刊에서도 히로다 고우키 외상의 ‘선린 외교’가 이전 우찌 다 야스야 외상의 ‘초토 외교’와 방법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다음 과 같이 비판하였다.

히로다 고우키는 우찌다 야스야의 뒤를 이어 외상이 된 후 일본 외교 의 변화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지만,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주의 의 지역 질서 체제를 주창해 단지 방법에서 다를 뿐이다. 즉, 일본은 대 중국 무력 정책을 실행할 때 제일 장애가 되는 국가로 영국, 미국, 소련 을 지적하고 있으며, 특히 미국과 소련의 간섭을 우려하고 있다. 히로다 고우키는 현재 국제사회의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먼저 미국과의 화해 정 책을 추구하여 만주국의 승인에 대해 묵인을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러한 방침 하에 일본 외무성은 외교계의 유능한 인물들을 만주사변 이후 주미국 대사로 임명하였다.6)

그리고 일본 외무성은 1934년 12월 30일 워싱턴 해군군비제한조약의 폐지에 관련된 뜻을 다음과 같이 공표하였다.

워싱턴 해군군비제한조약(1922년 2월 6일)은 일본 정부가 가장 공격적 인 함선의 보유를 인정하면서, 비율주의에 의거하여 대해군국 사이의 병 력 차등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 조약의 존속은 일본 정부의 근본 방침에 비추어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이 열등 비율인 것은 국민에게 만족 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이 조약을 1936년 말, 즉 조약의 최초 유효 기한이 도래할 때 폐지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식하여 조약의 규정에 따라 1934년 말 폐지 의사를 통고한다.7)

위의 세 글은 히로다 고우키 외상의 새로운 ‘선린 외교’가 국제사회 및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표방하고 있지만, 만주국을 국가로 승인하고 서구 열강과 일본 해군의 비율을 평등하게 할 것을 주장하는 등 독단 적인 행위를 계속하여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을 제 6) 小評論: 日本朝野和美中國外交將如何? (新生活週刊 1934年 第1卷 第1期), pp.2-3; 張明養, 日本反對國際援華聲明與中國外交前途 (東方雜誌 第31卷 第10號), pp.19-20.

7) 華府海軍軍備制限條約廢止通告ニ關スル外務當局談 (1934年 12月 30日) (外 務省, 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下), 東京: 原書房, 1988), pp.28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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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고 있다. 특히 아마우 정보부장은 1934년 4월 17일 대중국 관계에 서 일본의 특수한 지위와 사명을 논하고 동아시아의 특수한 책임을 실 행하는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중국과 외국의 금융 혹은 상업의 합작을 반대했고, 외국이 중국에 경제적 혹은 군사적 원조를 하는 것도 그 진 의를 의심하였다.8) 여기에 대해 호적은 위와 같이 비판하면서 일본을 견제하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국제연맹에 가입 하여 무력한 국제연맹을 개조하고, 유럽이 군축을 단행해 평화를 유지 하면서 태평양 지역에서도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 다. 그러나 그도 이와 같은 방안에 대해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언급하 였다.

이와 같이 당시 언론에서는 국제연맹의 국제 분쟁 조정에 대한 실 력 없음과 일본의 중국과 세계 침략에 대한 야심을 비판하는 가운데 남경정부의 대일본 국교 조정과 타협 정책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비 난하였다. 大公報는 1935년 12월 29일 왕정정 외교부장의 취임 후에 중일 양국의 조약 내용이 명확하게 공개되지 않는다고 외교 정보의 공 개를 다음과 같이 요구하는 글을 실었다.

정식 혹은 비정식의 방법으로 조약을 체결했더라도 외교 관련 상황은 공개해서 일반 국민들이 명료하게 국가의 지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과거 2년 동안 외교에 관한 선포가 극히 적어 조약의 경과 및 진상 이 어떠한가 일반 국민들이 알 수 없었다. 만주사변 이후 상해정전협정의 교섭까지 중국은 일본과 외교적인 담판이 없었다. 1932년 3월 상해정전협 정이 공개적으로 선포되었고, 협정의 내용과 범위가 확정적이었다. 이후 2년 동안 북방의 여러 분쟁은 모두 이들 문자 상의 엄밀하지 못하고 범 위가 확정적이지 못한 데에서 기원한다. 우리들은 당고정전협정 제4조의 내용을 비록 신문에서 비정식적으로 보았지만, 이후의 우편 문제, 차량 수송 문제 등의 교섭을 알지 못해 지금까지 당고정전협정의 정확한 내용 과 범위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라문간과 곽태기는 상해정전협정 을 체결한 인물들이고, 비록 당시 곽태기가 부상을 입었지만, 국민들은 지금까지 라문간과 곽태기에게 책임을 물어 비난한 적이 없다.9)

8) 對中國國際援助問題に關する情報部長の非公式談話(1934年 4月 17日) (外務 省, 앞의 책), pp.284-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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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평론에서도 중국은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과의 관계를 중요 하게 유지하면서도 국력을 충실하게 신장시켜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만주사변 발발 이후 국내에는 두 종류의 의견이 있었다. 하나는 만주 사변을 국제연맹에 제소해 해결하는 방안이다. 만약 국제연맹이 조정에 실패하면, 소련과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패배시키는 방법을 언급하며, 이것이 중국의 유일한 출로라고 본다. 다른 하나는 국제연맹과 외국은 믿을 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국은 국제연맹을 탈퇴하여 스스로 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방안이다. 나는 두 의견에 대해 맞기도 하고 틀 리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국가도 국제관계를 경시하지 말아야 하 고, 또한 전적으로 다른 나라를 의지하지도 말아야 한다. 과거 중국의 실 패는 중국이 완전히 국제관계를 경시하거나 혹은 국제관계를 중요하게 여겨 국력을 충실하게 건설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이 두 가 지는 모두 틀린 방안이다. 그래서 나는 자국의 국력을 충실히 갖추면서 국제관계를 소홀히 하거나 국제관계를 중요하게 여겨 자국의 실력을 충 실하게 준비하지 못하는 두 가지 방법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장 래 중국의 출로는 반드시 실력을 준비하면서 국제관계를 운용해야 한 다.10)

위의 두 글은 일본과의 협상과 조약 체결에 대한 내용을 명확하게 발표해 국민에게 알려주어야 하고,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에 대한 외 교 정책을 실행하면서도 군사력의 강화와 대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 다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이전 라문간 외교부장과 곽태기 차 장이 상해정전협정의 중국 대표로서 협상을 주도할 때는 조약의 체결 내용과 범위를 발표해 이를 명료하게 알 수 있었지만, 당고정전협정 이후 왕정정 행정원장이 외교부장을 겸임한 후로는 당고정전협정과 그 부속 조약 등 일본과의 조약 내용을 명확하게 발표하지 않아 그것을 잘 알 수 없었다는 뜻이다. 당시 상해정전협정을 체결할 때는 라문간, 고유균 등 직업 외교관이 중국 대표로서 활동하였고, 당고정전협상의 9) 胡適, 我們要求外交公開 (國立編譯館(陳志奇), 中華民國外交史料彙編(8),

臺北: 渤海堂, 1996), pp.3644-3647.

10) 張忠紱, 中國與國際 (獨立評論 第133號, 1934年 12月 30日), p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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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에서는 황부와 하응흠 등이 교섭을 주도했으며, 그 이후로도 왕정 정이 겸임 외교부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직업 외교관을 참여시키 지 않았다. 왕정정은 일본과의 타협 정책을 주장했고, 당고정전협정 이 후에는 분쟁이 발생한 그 지방 정부에서 일본과의 조약을 체결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로 인해 이 시기 체결된 조약에는 중국의 주권에 손해 를 주는 굴욕적인 내용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Ⅲ. 직업 외교관의 선전 활동

이때 직업 외교관도 실무적인 외교 종사자로서 국제연맹 및 일본의 정세에 대해 분석해 일본의 중국 침략 야심을 선전하고 국제 분쟁에 대한 국제연맹의 조정 무능력을 언급하면서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중국의 나아갈 방향과 대책을 제시하였다. 당시 그들은 국제연맹 및 국제회의에서 여전히 일본의 중국 침략과 세계 제패에 대한 야심을 분 석하여 폭로, 선전하면서 서구 열강으로부터 지지와 지원을 획득하려 고 노력하였다.

우선 이 시기 그들은 일본에 대한 타협 정책을 반대하고 만주사변 시기부터의 항전 입장과 강경한 태도를 더욱 견지했으며,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에 대한 외교․선전 활동을 전개하면서도 국제분쟁에 대한 국제연맹의 해결 능력 부족을 언급하며 국내의 일치단결과 항전을 주 장하였다. 당시 직업 외교관들은 주로 국제연맹 회의의 참가, 언론에 담화문 발표, 기자와의 인터뷰, 주재국에서의 기념대회 개최와 선전 책 자 배포 등을 통해 국제연맹의 국제분쟁 해결 능력 부족과 일본의 중 국과 세계 침략에 대한 야심을 선전하였다.

金問泗는 外交工作的回憶에서 직업 외교관이 국제연맹에서 수행 한 선전 활동과 지원 획득을 위한 노력을 회고하였다. 1933년 2월 24 일 국제연맹 특별대회에서 만주국을 불승인한 외교적 성과를 거둔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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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균은 프랑스 공사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갔고, 김문 사는 나중까지 남아서 관련 사무를 처리하였다. 곧 그는 1933년 5월 20일 주네덜란드 공사로 임명되어 7년 동안 직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김문사는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으로부터 기술 합작과 경제 원조를 획득하기 위해 활동하였고, 일본의 중국 침략을 선전하면서 지 지를 얻으려고 다음과 같이 노력하였다.

각 국가의 주외국 공사관은 평화와 전쟁 시기를 막론하고 대외 선전을 당연한 직무로 수행하였다. 나는 1933년부터 1939년 국제연맹이 활동을 중지할 때까지 매년 제네바로 가서 국제연맹 회의에 참가하였다. 국제연 맹 대회 및 행정원에 관련된 일 이외에도, 나는 헌장위원회와 같은 다른 기구에도 출석하였다. 중국 대표단의 업무를 분담하여서 나는 매년 제2위 원회에 참가하였다. 그 위원회는 세계의 경제, 재정, 금융 문제를 토론하 고, 국제연맹의 각종 기술 기관을 검토하는 업무를 실행하였다. 이 위원 회에서 나는 1935년, 1936년 法幣정책과 같은 중국의 재정, 경제 상황을 간략하게 보고하였고, 영국, 미국 등 각 국가의 중국과의 합작과 지원에 감사하였다. 또한 중국에서 도로, 건축 등 공공위생이 개선되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국제연맹과의 기술 합작 계획에 환영하는 뜻을 표시하였다.

이외에도 나는 제2위원회에 매번 참석하여 경제, 금융, 기술 문제를 토론 할 때 일본의 중국에 대한 경제 침략 상황을 보고하였고, 중국에서 다른 국가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지적하면서 우방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지지와 지원을 획득하려고 노력하였다.11)

위와 같이 김문사는 국제연맹 대회 및 제2위원회의 회의에 참가하 여 중국의 경제 상황을 보고할 때,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으로부터 기 술 원조를 요청했고, 이때 연설의 결론 부분에서 일본의 중국 경제와 서구 열강의 이권에 대한 침해 사례를 지적하였다. 비록 영국과 프랑 11) 金問泗, 外交工作的回憶(臺北: 傳記文學出版社, 1968), pp.38, 48. 50-52페이 지에서는 김문사가 중일전쟁 시기에도 국제연맹 및 네덜란드에서 일본의 중국 침략을 선전하고 열강들의 지원과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한 점이 잘 나타나고 있다. ‘내가 헤이그에 있는 7년 동안, 독일, 이탈리아, 일본 3국의 대외 침략으 로 국제 상황은 점차 악화되었다. 나는 네덜란드 당국과 수시로 토론하여 의견 을 들었고,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하여도 보고하면서 그들의 원조와 지지를 얻 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실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중국을 동정하 지만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12)

스 등 서구 열강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중일 간의 갈등에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러한 활동을 지속하였다. 또한 그는 중일전쟁 시기에도 네덜란드의 중요한 인물들과 화교들에게 일본의 중국 침략 상황을 선전하는 영문 책자를 만들어 배부했고, 헤이그의 한 호텔에서 교민들을 소집하여 만주사변에 대한 기념대회를 개최하여 그 침략상을 폭로하고 의연금을 모아 외교부로 송금하였다.12) 이와 같은 그의 선전 활동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중일전쟁 이전 시기부터 전개되어 중 일전쟁 시기까지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유균 주프랑스 공사와 곽태기 주영국 공사도 국제연맹 第 14屆 대회(1933년 9월 25일)에서 각 회원국들에게 기술 합작과 지원을 요청했고, 이전 중일 문제에 관한 국제연맹의 결의안이 신속하게 집행 되고 있지 않는 것을 유감이라고 주장하였다.13) 특히 당고정전협정 이 후 국제사회에서 중일 충돌 사건에 대해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 자, 고유균은 국제연맹에서 연설을 할 때마다 일본군의 중국 침략에 대해 더욱 주의를 기울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같이 직업 외교관 은 국제연맹 및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여전히 일본의 침략을 폭로․선 전하고, 중국의 국제적인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와 같 은 직업 외교관의 활동에 힘입어 중국은 1934년 노동국 이사로, 1935 년 10월 9일 국제연맹 이사회 비상임 이사국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童德乾 주오스트리아 공사도 외국 신문 기자와 담화한 내용을 외교부로 보내왔는데, 일본의 중국 및 세계 침략 계획과 서구 열강의 정세를 명확하게 분석하여 국제사회에 선전하면서 중국이 서구 열강과 공동으로 세계의 평화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 다.

12) 金問泗, 앞의 책, pp.50-52. 34페이지에서 그는 1936년 네덜란드의 화교 수는 약 1천 명 정도였고, 화교 보호에 관한 일은 영사관의 업무이지만 또한 공사관 직무 중의 하나라고 설명하였다.

13) 南京國民政府外交部, 外交部公報 第六卷 第四號(1933年 10月-12月), p.245.

(13)

전중주접(田中奏摺) 및 일본 당국의 宣戰 계획에 의거하면, 일본의 육 군과 공군은 중국과 소련 군대에 비교하여 우세하고, 중국 및 동아시아를 점령하려면 중국과 소련 국민들의 저항 이외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해 군과 공군이 절대적인 장애가 될 것이라고 한다. 미국은 태평양을 국방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만약 일본이 태평양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시 도하면 미국은 즉시 위협적인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가 아시아와 태평양의 南洋에 흩어져 있는데, 만약 일본이 미국과 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이를 보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중국과 러시아를 국방의 제1 방위선으로 보고 있고, 일본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일본이 영국, 미국과 동등하게 해군의 실력을 유지하려고 모색하고 공군의 제한을 받지 않으 려고 하는 것도 모두 이와 같은 이치이다.

중국의 국방에 대한 방침은 서구 열강이 평화를 유지하고, 정치와 경 제에서 발생하는 모든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중 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와 합작하여 공동으로 질 서를 유지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므로 중국은 서구 열강의 평화 보장에 관 한 제의가 성공하기를 희망한다. 만약 서구의 평화가 견고하면, 서구 열 강이 중국과 동아시아, 태평양의 질서를 함께 도모할 수 있고, 일본은 중 국 침략과 세계 정복의 계획을 실현할 수 없게 된다.14)

위와 같이 童德乾은 일본의 중국 및 세계 정복의 야심을 파악하고 서 유럽의 평화가 중요하다고 언급하였고, 서구 열강이 중국 및 동아 시아의 평화에 관심을 갖고 지지해 줄 수 있으면 일본의 침략을 방위 해낼 수 있다고 선전하였다. 아울러 중국은 서구 열강과 세계 평화를 함께 도모하는 것을 방침으로 세우고 있으며, 일본이 해군 세력에 대 해 제한을 받지 않고 영국, 미국과 동등하게 유지하면서 국방력을 강 화해 세계를 제패하려는 야심이 있는 점 등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 구하였다.

만주사변 이후 주미국 공사로 파견된 안혜경도 많은 연설과 담화문 의 발표를 통해 일본의 중국 침략과 관련된 잘못된 보도를 폭로, 반박 하고 미국인들에게 정확한 소식과 중국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 기 위해 노력, 활동하였다.15) 이와 같이 주외국 공사들은 주재국에서 14) 駐奧童德乾代辦公使與駐奧外國新聞記者談話 (外交月報 第3卷 第6期,

1933), pp.167-171.

(14)

일본군의 중국 침략 상황을 알리면서 일본의 자국 옹호와 거짓 선전을 객관적이고도 논리적으로 반박하여 외국 정부와 국민들의 중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아울러 외교부도 일본군의 중국 침략 및 폭력 행위와 만주국의 수 립 등을 국제사회에 선전하여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으로부터 지지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주력하였다.

외교부는 제네바 일보의 윌리엄 마틴(William Martin) 등 외국 신문의 주요한 주필을 각 국가에 보내는 중국의 선전 관련 전보 내용을 작성하 는 데에 참석시켰고, 외국 신문 기자가 중국에 대해 혹평을 하지 못하도 록 등록제를 제정하였으며, 외국의 언론계가 중국과 관련된 불확실한 정 보를 실을 때는 반박하여 수정하도록 요구하였다. 아울러 만주국의 성립 및 그 진상을 영문 책으로 만들어 서구 열강에 배부하며 선전하였다.16) 이와 같은 선전 활동 이외에도 라문간은 당고정전협정에 대한 불만 으로 외교부장을 사직하고 난 후 이임하는 이탈리아 공사에게 중국과 이탈리아 양국의 우호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공사를 대사로 승격시 킬 필요성을 제안하였다.17) 이후 외교부는 주요한 각국과 여러 차례 교섭을 진행하여 각국의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키기로 결정하였 다. 중국은 이탈리아와 1934년 9월, 미국, 영국, 일본, 독일과 1935년 5 월 공사를 대사로 승격시켰다. 이로써 장작빈 주일본 공사가 초대 일 본 대사로, 곽태기 駐영국 공사가 초대 영국 대사로, 시조기 駐미국 공 사가 초대 미국 대사로 되었고, 유숭걸 駐독일 공사는 정천방 초대 대 사로 바뀌어 임명되었다. 남경정부는 각 국가와 공사를 대사로 승격시 킴으로써 중국의 국제적인 지위를 향상시키고 열강과의 관계를 돈독하 게 강화하였다.

이외에도 직업 외교관은 일본의 지속적인 대중국 무력 정책에 대해

15) 微塵, 如此外交! (獨立評論 第138號, 1935年 2月 17日), pp.2-3.

16) 中國國民黨中央委員會黨史委員會, 抗戰前國家建設史料 -外交方面革命文獻 第72輯 (臺北: 中國國民黨中央委員會黨史委員會, 1977), pp.361-363, 428-430.

17) 中國國民黨中央委員會黨史委員會, 앞의 책, pp.407-409.

(15)

주의를 기울이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요코야마(橫 山) 일본 주제네바 총영사는 1934년 4월 17일 아마우(天羽) 외무성 정 보부장의 발표에 대해 일본과의 친선을 반대하는 세력이 중국 국내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고 유해한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면서 중 국과 국제연맹 및 각 국가와의 기술 합작과 지원 획득에 우려를 표시 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이에 대해 호세택 스위스 공사 겸 국제연맹 중국 대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일본 주제네바 대표가 1934년 4월 23일 발표한 선언은 일본이 동아시 아 및 태평양을 독점하려는 계획을 증명하고, 일본의 야심을 더욱 명백하 게 드러내고 있다. 일본은 중국을 감시하는 권리를 완전히 장악해 중국 국내의 정치 혹은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과의 관계에 모두 간섭하려고 한다. 만주 지역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중국과의 합작을 희 망한다고 발표하고 중국의 평화와 통일을 말하지만, 1931년 9월 만주사변 발생 이후 국제적인 비통한 사건으로 중국을 압박해 오고 있다. 중국인들 은 매우 가슴 아파하면서 단결하여 통일 사업을 매우 진전시켰다! 또한 중국은 평화 건설을 위해 국제연맹과의 기술 합작을 요구하고, 경제적 혹 은 다른 곤란한 점에 대응하며 건설을 진행하였다. 중국은 국제연맹의 회 원국으로 스스로 국제합작의 의무를 실행하고 있다. 중국은 번영하고 있 고 구매력의 증가로 인해 다른 국가의 생산품을 흡수할 수 있다. 이번 일 본 대표의 성명서 뜻은 일본이 중국의 번영과 문호개방을 우려하고, 중국 의 자유로운 통상에 대해서도 외국과 국제합작의 구실이 될 위험이 있어 저지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중외합작에 어떠한 위험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외국의 대중국 원조가 평화와 질서의 유지 에 유해하고 일본을 혼란하게 한다는 것은 독단적인 판단이다. 실제로 일 본은 중국에서 일종의 특수한 지위를 수립하려고 희망한다. 이러한 지위 는 중국의 주권 및 국제조약에 부합하지 않고, 더욱이 구국공약을 파괴하 는 행위이다. 즉 일본은 중국의 부흥을 방해하고, 세계 각 국가와의 합작 을 저해하려고 한다. 실로 그 선언은 평화를 유지한다는 구실 하에 평화 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이는 이전에 일본의 만주 침략 행위가 국제연맹의 맹약을 위반하지 않았고, 또한 만주국의 수립이 만주 주민들의 공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관점과 같다.18)

위의 글은 요코야마 제네바 총영사의 발표도 아마우 외무성 정보부 18) 中央日報, 1934年 4月 27日.

(16)

장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내정 간섭이고 침략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당시 히로다 고우키 외상은 1934년 이전 우찌다 야스야의 ‘초토외교’와 일본군의 중 국 침략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여 대외적인 관 계 개선을 모색하였다. 이전 우찌다 야스야는 ‘초토외교’를 내세워 만 주국의 승인과 국제연맹의 탈퇴를 중심으로 하는 강경한 대외 정책을 실행하였다. 실제로 히로다 고우키는 1935년 1월 23일 국회에서 대외 불침략과 불위협, 對中國 선린 정책을 제시하면서 군부의 강경한 방침 보다 협조주의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에구치 게이치(江口圭一)는 히로 다 고우키의 ‘선린외교’도 아시아 지역에서 배타적인 패권을 추구하는 점에서 군부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지적하였다.19) 즉 히로다 고우키 의 ‘선린외교’도 만주국의 승인을 전제로 한 정책으로 위와 같이 중국 의 주권을 경시하는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하였다.

Ⅳ. 직업 외교관의 항전 입장

이와 같이 직업 외교관은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에 일본의 계속된 중국 침략과 야심에 대해 관심과 경각심을 가져줄 것을 요구하면서 외 교․ 선전 정책을 실행했지만, 그 성과에 대해서는 낙관하지 않았다.

전술한 것처럼 그것은 국제연맹의 국제분쟁 해결 능력 부족, 세계 경 제 대공황, 서구 열강의 국내 사정 등으로 인해 일본의 계속된 중국 침략에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라문간은 1933년 12월 21일 국민당 제4계 중앙집행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국가의 위기를 구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국제 연맹이 실제적인 이해관계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외교적인 수단 만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견제하기 어렵다고 국내의 일치단결을 다음과 19) 江口圭一, 十五年戰爭小史 (東京: 靑木書店, 1986), pp.68-69.

(17)

같이 요청하였다.

라문간은 어려울 때에 외교부장의 직책을 맡아서 보국을 다하고자 했 다. 일본군의 중국 침략은 법률과 인도 정신을 위배하고, 국제연맹의 맹 약, 구국공약, 부전조약, 국제 공법의 원칙, 국제연맹의 여러 차례 결의안, 일본이 국제연맹에서 한 서약 등을 위반하였다. 라문간은 중국의 국가적 인 위기를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외교적으로 중국의 권리와 입장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 중국이 항상 견지해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무엇 인가? 그것은 동북 문제를 해결할 어떠한 방법도 만주국의 유지를 전제 로 할 수 없고, 국제연맹의 맹약, 부전조약, 구국공약의 문자와 정신, 중 국의 주권에 손상을 줄 수 없으며, 동아시아의 영구한 평화를 견고하게 하는 방안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 국제연맹의 형세를 보면, 평화와 공정, 조약의 존엄을 견지하기보다 이해관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중국은 전국 역량의 집중과 일치단결로 외교적 대응 을 해야 한다. 라문간은 일본군의 무력 침략이 최종적으로 실패할 것이라 고 믿고 있다. 이는 중국과 외국의 고금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20)

위와 같이 라문간은 국제연맹이 정의와 공리, 국제공약의 존엄을 준 수하여 국제 분쟁을 해결하지 못하고 실제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 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에 대한 외교 정책으 로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 여, 그는 중국이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국내의 일치단결과 역 량의 집중을 토대로 외교적 대응을 모색하는 방안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고유균, 안혜경, 곽태기 국제연맹 중국 대표단도 중앙집행위 원회 상무위원회에 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국외에서 분투도 국내적 일치단결과 지지가 있어야 외교적 성과를 거 두며, 국운을 회복하는 계기를 찾을 수 있다.21)

이미 국제연맹 중국 대표단은 외교부에 일본군의 침략에 대해 중국 20) 中國國民黨黨史館 所藏, 4.2/16.9.1 外交部羅文幹向三中全會報告詞節要 (

議紀錄, 中央政治會議檔案).

21) 中國國民黨黨史館 所藏, 4.3/70.19 顔惠慶等致外交部電 (會議紀錄, 中央政 治會議檔案).

(18)

의 좀 더 강경한 태도와 대응 준비가 필요하다고 보고하고,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중국 군대의 자위와 영토 방위 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남경정부에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국제연맹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동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남경정부 와 국민들이 협력하여 철저하게 일본상품배척운동을 실행해야 한다. 또한 각 지역에서 정예 부대를 선발하여 熱河를 방위하고, 일본 군대가 楡關을 다시 침범하는 것에 대한 대비를 하며, 동북 지방 의용군을 원조하여 자 위할 수 있어야 한다. 이후에야 중국은 세계의 동정과 국제연맹 및 우방 의 원조를 얻을 수 있으며, 실지를 회복하고 국운을 진작시킬 수 있다.22) 위의 두 글에서 중국 대표단은 먼저 일본 군대의 공격에 대해 항전 해 영토를 방위할 수 있어야지만 국제연맹과 우방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들은 국제연맹에 대한 외교 및 선전 정책만으로 관동군의 침략을 중지시킬 수 없으므로, 국내의 일치단결, 일본상품배 척운동, 각지의 정예 부대 선발, 만주 의용군의 지원 등 다방면의 대응 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외교부에 보고하기 위해 귀국한 김문사도 1936년 4월 14일 남 경 중앙廣播 방송국에서, 5월 25일에는 남경 육군 대학에서, 5월 26일 에는 중앙 정치 학교에서, 6월 9일에는 상해 복단 대학에서 네덜란드 공사로서 있었던 3년 동안의 네덜란드 및 유럽과 국제연맹의 불안정한 정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연하였다.

본래 국제연맹은 公理로써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설립되었지 만, 이는 하나의 몽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국제연맹에 대해 비관 할 필요는 없다. 지금 유럽의 각 국가는 자국의 안전을 우선으로 여기고 있고, 프랑스도 그러하다. 이탈리아가 1935년 이디오피아를 침공한 사건 에 대해서도 국제연맹은 조정에 실패하였다. 중국은 국제연맹 및 종이 위 의 보장에 불과한 조약 등에 의존하지 말고 자력갱생해야 한다. 지금 세 계 각 국가들은 군비의 증강을 경쟁하고 있고, 세계 경제는 쇠퇴하고 있 다. 전쟁 이외에는 다른 출로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미국은 중립 정책 22) 駐國聯代表致外交部電(1932年 12月 15日) (中華民國外交問題硏究會, 앞의

책 (5)), pp.131-132.

(19)

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지위가 매우 중요하다. 대정치가는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않고 공명정대한 정신으로 국가를 위해 일을 하고, 일부 모순이 있더라도 꺼려하지 않는다. 중국은 국방에 주의해야 한다.23)

위의 글도 국제연맹의 무능력과 서구 열강의 관망하는 태도로 인해 국제조약상의 여러 보장도 확신할 수 없으므로, 중국의 국방력 강화가 중요하다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1936년 2월 김문사는 외교부의 귀 국 보고 명령을 받았고, 부인과 2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영국에서 배를 타고 항해하여 다음 달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는 남경으로 가서 林森 주석, 장개석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군 외교부장 등을 만났다. 그는 국 제 정세에 대해 경제 공황 등 세계 경제가 쇠퇴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 으며, 각 국가는 군사 무기와 물자의 비축에 예산을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로 인해 그도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명확하게 분석하여 언급하면서 중국 군사력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이때 곽태기도 국제연맹에서 중국 대표로 활동하며 국제연맹 및 서 구 열강의 소극적인 태도를 직접 보면서 느낀 감상과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는 국제연맹의 이번 대회에 대한 감상이 복잡하다. 외교는 실력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제대로 역할하기 어렵다. 나는 가장 긴요한 시기에 외교의 요직을 담당해 중국인들이 단결하기를 희망한다. 진실로 단결해야 자위하여 중국을 구제할 수 있는 방책을 도모할 수 있다. 외국인들은 2백 여만 명의 중국 군사들이 내정에는 용감하고 외적을 방어하는 데에는 너 무 겁이 많다고 동정한다. 상해사변 시기 중국군의 전투가 국내외에 그 명성을 떨쳤으나, 지금 장성항전 시기 중국군의 전투를 보면, 어찌 동북 지역의 의용군과 상해사변 시기에 전사한 장병들에게 얼굴을 들 수 있겠 는가? 본래 국토를 보위하는 것은 군인의 천직이다. 외국인들은 중국 군 인들이 할거해 다투는 데에 능하고, 연합하여 외적에 항전하는 데에 약한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중국 대표단이 외국에서 이와 같은 소리를 듣고 분개하고 있다. 일본은 무력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면서 중국인들을 업신여긴다. 정의를 포기하고 공법을 경시하는 일본의 행위에 대해 세계 의 각 국가는 일본의 육해공군의 무력을 두려워하여 암암리에 분개하고 23) 金問泗, 앞의 책, pp.44-46.

(20)

있지만, 명백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중국은 실력이 부족하여 국제연맹 의 공리와 판단을 요구했으나, 국제연맹은 일본의 폭력 행위에 대해 경고 하지만 대책이 없고 공허한 기구에 불과하다.24)

또한 고유균도 1934년 7월 휴가 기간 동안 귀국하였을 때 신문 기자 들에게 다음과 같이 국제사회의 불안정한 정세를 언급하면서 중국의 군사력 강화의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국제사회는 세계 경제 공황과 군사 시설 및 예산의 증가 등으로 인해 급변하고 있고, 이는 중국에 유리하지만은 않다. 중국은 국내의 일치단결 과 역량 집중만이 구국을 위한 대책이 될 것이다.25)

전술한 것처럼 직업 외교관은 국제사회의 정세를 정확하게 분석하 고 일본의 중국 및 세계 침략 야심을 폭로하였으며, 점차 이를 방위하 기 위한 중국의 국방력 강화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 경제 공황 및 군사 관련 예산의 증가 등 국제사회의 불안정한 정세와 일본 의 지속적인 강경한 태도를 언급하면서 국내의 일치단결과 항전을 요 청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중일 양국 간 분쟁에 대해 이제까지 국제연 맹 및 서구 열강의 소극적인 태도를 고려할 때 장차 국제사회의 불안 정한 요인의 증가로 인해 더욱 동아시아에 관심을 쏟지 못할 것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오수봉도 남경정부 시기 초기부터 국제연맹의 비서청에서 업무를 수행한 인물로 국제연맹에 대한 외교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견해를 표시하였다.

비록 국제연맹이 어떠한 理想을 표방하더라도 그것은 열강들의 이해관 계를 반영한 기구이고, 서구 열강은 중국에서 일본과 공통된 이해를 갖고 있다. 그들이 국제연맹의 기치 하에 무력으로 중국을 지원하여 일본군의 침략을 방위해주지는 않을 것이다.26)

24) 我出席國聯代表郭泰祺, 本日對國聯情形發表談話,‘蓋外交無實力爲後盾, 求人之 難, 實難於上靑天’, 曷勝感慨 (12月 10日) (國立編譯館(陳志奇), 앞의 책 (7)), p.3194.

25) 國立編譯館(陳志奇), 앞의 책 (8), pp.3361-3362.

(21)

위의 글은 국제연맹도 서구 열강의 이해관계에 의해 운영되므로, 중 국의 강경한 의지와 항전 태도가 사태 해결에 중요하다는 의미를 나타 내고 있다. 그리고 오수봉은 국제연맹이 1933년 2월 24일 특별대회에 서 만주국 불승인의 결의안을 통과시킨 점에 대해 적극적인 의사 표시 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는 국제연맹의 만주국 불승인 이후 남경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일본군의 침략에 대해 항전하며 대 응하지 못하고, 일본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불만스러워하였다.

또한 심근정도 일본 유학 출신인 亞洲司 司長으로서 당고정전협정 이후 왕정위 외교부장에게 보고할 때 일본의 정세에 대해 자문을 받으 면 다음과 같이 강경한 태도로 대응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1934년 9월 외교부 기념일 연설과 왕정위에게 보고할 때 天津시 당부에 대해 배일운동을 억제하고 면직품의 관세를 인하한 것을 일본과 협조한다는 방침 아래 너무 관대하게 처리한 점이라고 지적하고, 작은 사 건이라도 명확한 태도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27)

위와 같이 심근정은 일본에 대한 타협 정책을 실행하면서 그들의 요구를 허용해 줄 수만은 없고, 명확한 대책을 정해 강경한 태도를 취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을 드러내었다. 그는 왕정위가 상해사변 이 후 일본에 대해 저항하며 동시에 교섭하는 정책을 선언하였고, 당고정 전협정을 체결한 후 라문간의 사임에 이어 외교부장을 겸임하고부터 외교 정책 결정을 대부분 주도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심근정은 당고정전협정 이후 대일본 정책이 명확한 원칙 없이 타협적이기만 하 다고 외교부에 보고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접수되지 않았고,

26) 吳秀峰, 國際聯盟處理日本帝國主義侵略中國事件的經過 (北京市政协文史委,

北京文史资料選編 第2辑, 北京出版社: 2001), pp.71-72. 그는 먼저 중국이 항 전으로 대응해야 다른 국가의 원조를 기대할 수 있다고 제시한 국제연맹 아브 놀(愛文諾, Avenol) 사무총장의 권고를 인용하였다. 그는 이 말을 고유균을 통 해 장개석에게 보고하였지만, 남경정부의 대일본 타협 정책은 변화가 없었다고 지적하였다.

27) 沈覲鼎, 對日往事追記 (傳記文學 第25卷 第6期, 1974), pp.65,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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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1935년 주파나마 공사로 파견되었다.

이외에 안혜경도 1935년 남경정부가 대일본 정책에 대해 명확한 방 침을 정하기보다 일시적으로 대응하고, 국제 정세가 호전되기를 기다 리고만 있다고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남경정부는 외교에 대해 어떠한 결단도 보이지 않고, 시기에 따라서 적당한 행동을 채택하며 국제사회의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28)

어느 시대에도 외교 문제에 대해 국가의 여론을 일치시킬 수 없었다.

외교부 부장이 되면 무엇이 정확하고 현명한 여론인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대다수가 어떠한 정책을 채택하기를 원한다면, 외교부장은 그 것을 결정해야 한다.29)

위와 같이 안혜경은 한 국가의 외교 정책이 여론에 좌우되어서는 안 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명확한 판단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위의 두 번째 글은 그가 당고정전협정 이후 외교부의 한 고위 관리가 여론으로 인해 정부의 정책을 명확하게 결정하지 못한다는 뜻 을 드러낸 데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화북사변 시 기 남경정부가 계속되는 중일 충돌 사건과 일본군의 위협에 대해 타협 하고 중국의 주권을 손상시키는 何梅協定과 秦土協定을 체결하자 위와 같이 불만을 표출하였다.30)

당시 그는 1932년 12월 12일 소련과 국교를 회복한 후 다음해 주소 련 공사로 파견되었고, 1935년 주외국 공사를 대사로 승격시킬 때 초 대 소련 대사가 되었다. 그리고 위와 같은 불만으로 사직하였다. 위와 같이 직업 외교관은 국내 정세와 대일본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주로 그들이 국제사회에서 활동할 때 국내 의 불안정으로 인해 서구 열강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곤경에 처하게 28) 桂崇基, 中國現代史料拾遺 (臺灣: 中華書局, 1989), p.350.

29) 顔惠慶 著, 上海市檔案館 譯, 顔惠慶日記 第2卷 (中國檔案出版社, 1996), p.274.

30) 안혜경은 1936년 주소련 대사를 사직하고 귀국한 후 자선 문화 사업에 전념 하였고, 중국 홍십자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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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으며, 또한 남경정부의 대일본 타협 정책과 점차 견해를 달리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당고정전협정 이후 남경정부의 대일본 국교 조정과 타협 정책은 일 본의 강경한 대중국 정책으로 인해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본이 화북 지방으로 계속 침략하면서 중일 충돌 사건도 河北事件31), 張北事 件32) 등으로 끊이지 않았다. 화북사변 시기 왕정위 행정원장 겸 외교 부장은 양국의 충돌 사건을 지방 정부가 처리하도록 결정했고, 일본군 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주권 손상은 더욱 심하였다. 결국 장개 석은 1935년 11월 12일 국민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최후의 시 기’33)와 관련된 연설을 발표하였고, 이후 점차 일본에 강경하게 대응하 였다.

Ⅴ. 결 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고정전협정 이후 중국 국내의 동방

31) 하북사건은 1935년 5월 초에 천진의 일본 조계에서 胡恩溥 國權報 사장과 친일파이고 振聲報의 사장인 白逾桓이 암살된 사건을 말한다. 5월 29일에는 동북 의용군인 孫永勤 부대가 灤州 동쪽에 주둔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구 실로 삼아 타카시 사카이(酒井隆) 화북 주둔군 참모장과 다카하시 단(高橋坦) 주북평 무관은 何應欽 북평 군사위원회 분회 위원장 대리를 압박해 何梅協定 을 체결하였다.

32) 장북사건은 중국 군대가 察哈爾省 장북 지역에서 첩보 활동을 하고 있던 일 본 정보원 4명을 감금했다가 석방한 사건을 말한다. 도이하라(土肥原) 관동군 대표가 이를 구실로 삼아 중국을 위협해 秦德純 신임 찰합이성 주석 대리와 秦土協定을 체결하였다.

33) 장개석의 ‘최후의 시기’와 관련된 연설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의 침략에 대 해 최대한 인내하고, 완전히 절망에 이르지 않으면 쉽게 평화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최후의 시기(關頭)에 도달하지 않으면 희생을 가볍게 말하지 않을 것 이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평화의 한도를 넘어서면, 그때는 黨國의 명령을 들어 최후의 결심을 하겠다.” 苗建寅, 中國國民黨史 (西安交通大學出版社, 1990),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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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독립평론 등 유력한 잡지들은 국제분쟁에 대한 국제연맹의 역할 한계와 더불어 중국에 대한 일본의 강경한 입장을 언급하면서 국 세사회의 정세를 낙관할 수 없고 중국에 매우 불리하다는 점을 잘 인 식하고 있었다. 직업 외교관들은 이들 잡지의 국제 정세에 대한 분석 시각과 같은 맥락에서 사태를 파악하면서도 더 나아가 보다 객관적이 고 구체적 대응 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그들은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 이 취하고 있던 소극적인 태도, 일본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제재 반 대, 일본의 강경한 대중국 무력 정책 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 로 하여, 국제연맹의 국제분쟁 조정에 대한 역할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중국군의 항전과 영토 방위를 포함한 실질적인 대책을 중요하게 제시하였다.

즉, 구체적인 활동으로서 직업 외교관들은 국내외에서 담화문 발표, 기자와의 인터뷰, 각종 국제회의 참가, 선전 책자 배포 등의 방법을 통 해 일본의 중국침략과 세계 제패의 야심을 선전하면서 국제사회로부터 지원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의 외교 활동 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중국 군사력의 강화 필요성을 인식하고, 남경 정부에 강경한 태도로 항전을 요청하면서 대일본 타협 정책에 불만을 표출하였다.

이때 남경정부의 대일본 정책에 대한 외교관들의 불만은 다양한 방 식으로 표출되었다. 라문간 외교부장은 당고정전협정이 비밀리에 서둘 러 체결된 점을 불만스러워하며 사직하였다. 안혜경 주소련 대사는 華 北事變 시기 남경정부가 대일본 국교 조정과 타협 정책으로 何梅協定 과 秦土協定을 체결하여 중국의 주권을 손상시키는 점을 반대하면서 1936년 소련 대사를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시조기 주미국 대사도 1937 년 5월 대사직을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고유균도 남경정부의 대일본 타협 정책에 다양한 방식으로 불만을 표현하였다.

본고는 이와 같이 직업 외교관들이 국제연맹 및 일본의 동향에 대 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선전 활동과 항전 입장의 주장을 통해 중 국 국내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남경정부의 대일본 정책의 결정에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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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정도 영향을 주려고 노력했지만 그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본 다. 그러나 남경정부의 대일본 타협 정책으로 인해 이들의 역할을 소 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며, 이들의 활동과 역할은 다음 중일 전쟁 시기에도 지속되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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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提要)

塘沽停戰協定以後國際情勢 和職業外交官的抗戰立場

石 美 子

本論文討論了塘沽停戰協定以後職業外交官的活動與作用. 以獨立評論

, 東方雜誌爲中心對國際情勢看到了. 職業外交官以國際聯盟和西歐列 強的消極態度和日軍的武力政策為依據,滿洲事變以後在各個時期講求不 同的對應方案,逐步走向軍事支持和領土防衛的抗戰方向. 塘沽停戰協定 以後特別是他們在國際聯盟內部的活動 -揭露日本關東軍侵略行為及對日 宣戰制止日軍對中國的侵略起到了一定的作用,為實現國際社會不承認偽 滿洲國揭露日軍對華侵略的外交成果做出了貢獻. 這也提升了中國的國際 地位、警醒世人關注日本對中國和世界的侵略野心,可以說為中日戰爭爆 發以後廢除過去與列強簽訂的不平等條約及走向“抗日外交”奠定了基礎.

주제어: 당고정전협정, 남경국민정부, 직업외교관, 항전 關鍵詞: 塘沽停戰協定, 南京國民政府, 職業外交官, 抗戰

Keywords: the Tanggu Armistice Agreement, the Nanjing Nationalist Government, diplomat, coercive stance

(원고접수: 2012년 12월 30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2월 12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11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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