宣和畵譜 의 山水門에 나타난 北宋末의 山水畵觀 *
朴 恩 和 (忠北大)
Ⅰ. 머리말
Ⅱ. 宣和畵譜의 體制와 山水門의 構成
Ⅲ. 山水門에 收錄된 畵家와 畵家傳 敍述의 특징
1. 山水畵傳統의 成立과 傳承 의 系譜
2. 文人畵論의 受容과 官撰 畵 史書의 性格
Ⅳ. 맺음말
Ⅰ. 머리말
북송 徽宗年間(1101-1125)인 1120년경에 편찬된 宣和畵譜는 魏晉 時代에서 북송 말에 이르는 시기에 활동한 화가의 傳記와 作品目錄을 중심으로 회화의 포괄적인 양상을 수록한 著錄으로 郭若虛(?-1086 이 후)의 圖畫見聞誌, 鄧椿(약 1109-1180)의 畫繼와 함께 송대에 출 간된 대표적인 畵史이다.1) 이밖에 송대에 편찬된 중요한 회화 관련 저 록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黃休復(약 954-1017)의 益州名畵錄, 劉道順(11세기 중반 활동)의 聖朝名畵評과 五代名畵補遺, 郭熙(약
* 이 논문은 2009년도 충북대학교 학술연구비지원사업의 연구비 지원에 의하 여 연구되었음.
1) 이 글은 畫史叢書(一) (臺北: 文史哲出版社, 1974), pp.357-641에 수록된 宣和畵譜를 근거로 하였다. 다른 板本과 서지학적 고증에 대해서는 謝巍, 中國畵學著作考錄 (上海: 上海書畵出版社, 1998), pp.161-164 참조.
1001-1090)·郭思(약 1080-1125 활동) 부자의 林泉高致, 米芾(1052 -1107)의 畵史, 韓拙(약 1095-1125 활동)의 山水純全集 등이 있으 며 沈括(1031-1095), 蘇軾(1037-1101), 黃庭堅(1045-1105), 秦觀(1049 -1100), 董逌(약1079-1140) 등 문인들이 그림에 대해 쓴 題跋과 題詩詞 도 현전하는 眞作이 零星한 송대 회화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준다.2) 宣和畵譜는 휘종 勅撰의 유일한 官撰書로 개인이 편찬한 다른 저록들 과 구별되며 다양한 계층에 속하는 화가들의 활동과 작품제작, 당시의 繪畵觀을 비롯한 북송대 회화의 양상을 이해하고 북송까지의 회화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문헌자료의 하나로 평가된다.
최근 徽宗年間에 대한 역사학계와 미술사학계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서 형성된 문화 전반을 다양한 관점에서 고찰하는 연구서가 출간되었고 이들 연구 중 회화에 관한 논 의에서 宣和畵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3) 宣和畵譜 자체에 대해서는 편찬자와 편찬시기를 밝히는 문헌학적 연구를 비롯하여 儒敎 와 道敎思想의 영향을 고찰하고 미학적 관점에서 선화화보의 내용을 분석해 당시의 회화와 관련된 종교적, 사상적 의미를 규명하는 연구가 주로 이루어졌다.4)
2) 郭若虛 지음·박은화 옮김, 곽약허의 도화견문지 (시공사, 2005); 鄧椿, 畫 繼 (畫史叢書(一)), pp.265-356; 云告 譯註, 宋人畵評 (長沙: 湖南美術出 版社, 2004); 신영주 역, 곽희의 임천고치 (문자향, 2003); 米芾, 畵史 (黃賓虹·鄧實 編, 美術叢書 10, 臺北: 藝文印書館, 1975), pp.3-58; 韓拙, 山水純全集(美術叢書 9), pp.13-44; 楊家駱 主編, 宋人題跋 上 (藝術叢 編第一集 第二十二冊, 臺北: 世界書局, 1974).
3) Patricia Ebrey and Maggi Bickford eds., Emperor Huizong and Late Northern Song China: The Politics of Culture and the Culture of Politic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Ronald Egan, The Problem of Beauty: Aesthetic Thought and Pursuit in Northern Song Dynasty Chin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王耀庭 主編,
開創典範: 北宋的藝術與文化硏討會論文集 (臺北: 國立故宮博物院, 2008);
Patricia Buckley Ebrey, Accumulating Culture: The Collections of Emperor Huizong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8).
4) 倪根法, 《宣和畵譜》的成書年代及米芾的關係 (華東師範大學學報,
이 글에서는 북송에 이르러 가장 중요한 畵目으로 대두되었고 宣 和畵譜의 성격과 편찬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분야인 山水門의 면 밀한 분석을 통해 회화사적 관점에서 그 내용이 북송말 산수화에 대한 인식과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이루어진 산수화의 변화 양상을 어 떻게 반영하는지, 기타 畵史와 다른 官撰書로서의 특징은 무엇이며 나 아가 북송 이후 산수화의 이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기왕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고찰해 보려한다.
Ⅱ. 宣和畵譜 의 體制와 山水門의 構成
모두 20卷으로 이루어진 선화화보는 卷頭에 “宣和庚子歲(1120)夏 至日宣和殿御題”라는 序가 있지만 撰人의 이름을 수록하지 않아 편찬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고 徽宗 趙佶(1082-1136)의 勅命으로 당시 궁정에서 활동하던 내부의 관리와 내신 등 여러 인물이 공동으로 참여 해 편찬한 것으로 여겨진다. 序를 쓴 시기는 1120 년이지만 편찬 당시 활동하던 인물의 畵家傳에 1120년에서 1121년까지 任職한 官職名이 언 급되어 1120년 이후에도 편찬 작업이 계속되었고 1121년 후반 경에 완 성된 것으로 추측된다.5)
1985), pp.81-83; 陳翔, 《宣和畵譜》的繪畵美學思想 (朶雲編輯部, 中國繪 畵硏究論文集, 上海: 上海書畵出版社, 1992), pp.365-387; 蕭百芳, 由《宣和 畵譜》的繪畵美學探討宋徽宗時代畵院山水畵風 (國立成功大學歷史學報20, 1994), pp.138-197; 衣若芬, 《宣和畵譜》與蘇軾繪畵思想 (李曾坡 編, 中 國第十屆蘇軾硏究會議論文集, 濟南, 1999), pp.209-238; 안영길, 宣和畵譜 에 나타난 미학 사상 (美術史學報 12, 1999), pp.73-82; 한방임, 중국 북 송시대 선화화보(宣和畵譜) 연구 (조선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張完碩, 宋代 宣和畵譜를 통해 본 畵論美學 (한국철학논문집 25, 2009), pp.381-410; 이정미, 宣和畵譜의 10문에 담긴 회화분류사적 의의 (동양예술 15, 2010), pp.41-70.
5) 宣和畵譜의 편찬자와 成書 시기에 대한 여러 견해에 대하여는 Patricia Buckley Ebrey, Accumulating Culture: The Collections of Emperor
북송 말 회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인 徽宗은 뛰어난 서화가 이며 당시 누구보다도 풍부한 소장을 지닌 大所藏家였다. 서화에 관심 이 많았던 그의 서화 수집은 즉위 이전부터 시작되었으며 19세인 1100 년에 즉위한 후에는 황실 내부의 소장품에 內臣 童貫(1054-1126) 등이 江浙 일대에서 수집한 작품을 더하여 수량과 수준에서 당시의 개인 소 장가는 물론 이전의 어떠한 왕조도 능가하는 방대한 소장을 형성하였 다. 또 궁정에 서화를 담당하는 기구를 설치해 8천 여 종이 넘는 서화 와 골동품을 분류해 등록하였으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작품을 감정 하고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겨 황실의 문화적 역량을 과시하는
宣和博古圖錄, 宣和書譜와 宣和畵譜를 출간하였다.6)
휘종은 또 畵學의 설립을 통해 궁정 畵院制度의 개혁을 시도하고 자신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회화창작에 반영한 강력한 후원자였다. 그 는 증가하는 회화의 수요를 충당하고 화원화가의 교양을 직업적인 畵 工보다 높은 수준으로 향상시켜 창작수준을 제고하기 위한 조치로 太 宗雍熙元年(984)에 설립한 화원인 翰林圖畵院 이외에 畵學을 운영해 화가를 교육하고 양성하였다. 崇寧3年(1104)에 화학을 개설하고 太學의 敎官制度를 참조하여 博士의 직위를 설치하였으며 進士科처럼 시험을 거치는 “下題取士”의 방법으로 화가를 선발하였다. 大觀4年(1110)에 화 학이 폐지되고 畵學生은 翰林圖畵院에 예속되었지만 교양의 수준이 높 은 士類 학생에 대한 배려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화학의 교육을 바탕 으로 충분한 교양을 쌓고 화원에 흡수된 문인적 성향을 지닌 화학출신 의 화가들이 內府의 회화소장품에 근거해 펴낸 宣和畵譜의 편찬에
Huizong, pp.355-356, pp.370-371 참조.
6) 陳葆眞, 宋徽宗繪畫的美學特質 -兼論其淵源和影響- (文史哲學報 40, 1993), pp.297-298. 휘종의 서화, 골동의 수집방법과 소장규모, 소장과 관련 된 업무를 담당한 궁정의 機構와 관리체계에 대하여는 Patricia Buckley Ebrey, Accumulating Culture: The Collections of Emperor Huizong, pp.102-149; Maggie Bickford, “Making the Chinese Cultural Heritage at the Courts of Northern Sung China” (王耀庭 主編, 開創典範: 北宋的藝術 與文化硏討會論文集). pp.499-521 참조.
참여하였을 가능성도 많다.7)
宣和畵譜는 화가를 시대 순으로 배열하거나 品等, 사회적 신분에 따라 분류한 이전의 畵史書와 달리 먼저 그림의 종류를 열 가지 畵目 으로 나누고 각 분야의 중요한 화가들을 시대 순으로 나열하여 간략한 전기와 작품제목을 수록하는 체제로 이루어졌다. 그림의 유래와 용도 를 설명하고 그림을 통해 만물을 周覽하고 啓導한다는 편찬의 목적을 밝힌 卷頭의 序 다음에 序目에서 道釋, 人物, 宮室, 番族, 龍魚, 山水, 蓄獸, 花鳥, 墨竹·小景附, 蔬果·藥品草蟲附의 열 가지로 분류한 畵目의 의미, 화목을 열거한 순서와 그 이유를 언급하였다. 각 화목에 속하는 화가들은 品等에 의하지 않고 시대 순으로 배열하였으며 따라서 畵譜 를 읽는 사람이 화목으로 그림을 찾고, 그림으로 화가를 알 수 있으며 화가를 통해 각 시대를 이해하게 된다고 하여 수록화가와 작품에 대한 편찬 방침을 명확히 하였다.8)
序目에 이어 吳(222-280)의 曹弗興에서 선화년간에 활동한 화가까지 모두 231명의 화가전과 당시 內府에 소장된 그들의 작품 6,396 점을 수록하였다. 각 화목에는 敍論이 있어 儒敎나 道敎 經典과 연결시켜 화목의 의미를 강조하고 고대에서 북송까지의 발전양상을 간략하게 서 술하면서 畵法을 언급하였으며 중요한 화가를 거론하고 잘 알려진 화 가 중 수록하지 않은 화가를 제외한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전의 화사 와 달리 화목마다 서론을 수록한 것은 역대 書家와 작품을 篆書, 隸書, 正書, 行書, 草書, 八分書, 制詔誥命의 書體로 분류하고 각 서체에 서론 을 수록한 宣和書譜의 체제와 같은 것으로 서화의 분류 체계를 확립 하고 회화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며 각 분야의 전통을 황실의 관점에서 7) 徽宗代 畵學 설치의 배경, 제도와 교육내용, 화원과 화학의 관계 및 화학이 당시 회화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구체적인 연구성과는 박은화, 鄧椿의 畫繼와 북송후기~남송초기의 회화 (미술 사, 자료와 해석, 일지사, 2008), pp.69-72; 현정원, 북송 휘종기 화학설치 와 그 의의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 참조.
8) 序目의 번역은 張完碩, 宋代 宣和畵譜를 통해 본 畵論美學 , pp.402-405 참조.
서술하려는 편찬의도를 반영한다.9) 敍論 다음에 화가를 시대 순으로 배열하고 화가의 생애와 활동 양상, 師承關係, 화풍의 특징을 설명한 畵家傳에 이어 내부에 소장된 작품의 제목을 열거하였다. 화가전과 함 께 소장작품을 열거한 체제는 張彦遠(약 815-875)의 歷代名畵記와 郭若虛의 圖畫見聞誌를 따른 것이다.10) 화가전의 내용에는 歷代名 畵記, 聖朝名畫評, 圖畫見聞誌 등에서 인용한 부분이 많아 편찬자 들이 이전의 다양한 기록을 참고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화가와 작품을 열 가지 畵目으로 분류해 수록한 宣和畵譜 의 편찬방식과 체제는 각 화목의 독립적인 성격을 강조한 점에서 이전 의 著錄과 차이가 있으며 화목별 분류를 부분적으로 채용한 聖朝名畫 評, 五代名畫補遺, 圖畫見聞誌에 비해 화목의 수가 증가하였다.
특히 圖畫見聞誌의 雜畫 항목을 宮室, 龍魚, 畜獸, 蔬果 등으로 세분 하고 다른 저록에서는 花鳥나 花卉鴒毛에 포함한 墨竹을 독립된 화목 으로 분류해 그 의미를 강조하고 小景이라는 새로운 산수화 장르를 첨 부한 점이 주목된다.11)
9) 宣和書譜의 체재와 敍論은 Patricia Buckley Ebrey, Accumulating Culture: The Collections of Emperor Huizong, pp.227-232 참조.
10) 歷代名畵記의 체제는 장언원 지음· 조송식 옮김, 역대명화기 (시공사, 2008) 참조.
11) 門, 業, 科로도 지칭된 화목이 화가와 작품을 분류하는 기준이 되고 화가 가 어떤 화목에 능했는지를 화가전에 반드시 기록한 것은 중국의 화론서가 이른 시기부터 그림의 주제에 많은 관심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화가전을 구 성하는 방법은 品等의 분류에 의한 것, 화목에 의한 것, 활동시대 순으로 배 열하는 방법이 있으며 이 중 두 가지나 세 가지를 함께 사용하기도 하였다.
화목에 의해 화가를 분류한 현존하는 最古의 화론서는 약 950년에서 1050년 까지 활동한 화가들을 수록한 劉道順의 聖朝名畫評(1059 이전)이며 기록 으로만 전하는 張懷瓘(713-742 활동)의 畵斷이 화목별 분류를 사용한 것 으로 여겨진다. Lothar Leddrose, "Subject Matter in Early Chinese Painting Criticism" (Oriental Art, vol. 19, no. 1, 1973), pp.69-78. 聖朝名 畫評은 화목별로 분류한 화가를 품등에 따라 배열해 화목별 분류만을 채용 한 宣和畵譜와 구별된다. 聖朝名畫評의 화목은 人物, 山水林木, 蕃馬走 獸, 花卉鴒毛, 鬼神, 屋木이며 五代名畫補遺는 人物, 山水, 走獸, 花竹鴒毛, 屋木, 塑作, 雕木, 圖畫見聞誌는 人物, 傳寫(초상화), 山水, 花鳥, 雜畵로 분
수록된 화가와 작품의 수는 道釋門에 49명의 1179점, 人物門 33명의 505점, 宮室門 4명의 71점, 番族門 5명의 133점, 龍魚門 8명의 117점, 山水門 40명의 1108점, 畜獸門 27명의 324점, 花鳥門 46명의 2786점, 墨竹과 小景門 12명의 148점, 蔬果門 6명의 25점이며 수록된 작품이 가장 많은 화목은 화조문이다. 宣和畵譜의 화목별 분류는 그다지 엄 격하게 지켜지지 않아 番馬는 番族이나 畜獸 화목에 포함되기도 하고 蔬果는 花鳥門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또 여러 화목에 능한 화가를 각 화목에 반복해 수록한 聖朝名畫評과 달리 한 화가는 대표적인 화목 하나에만 수록하여 여러 화목을 잘 그린 화가의 경우 그 전체적인 면 모를 살피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한편 송대 황실의 초상화와 작가를 알 수 없는 작품은 포함되지 않아 휘종이 물려받거나 수집한 작품을 모두 수록하지 않고 엄격한 기준과 감정절차를 통해 선별했음을 알 수 있다. 또 화가와 작품의 선정을 비롯한 모든 편찬과정이 휘종의 裁可 를 거쳐 이루어졌음으로 그의 의견이 가장 중요시되었고 화가전의 서 술에도 휘종의 繪畵觀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음이 분명하다.
山水門에는 唐代의 李思訓(651-718)에서 편찬 당시 활동하던 화가까 지 모두 40명이 수록되었다. 窠石을 포함한 산수의 첫째 권에는 唐代 화가 10 명과 작품 187점, 五代 화가 2명과 95 작품을 수록하였고 다 음의 두 권에 송대 화가 28명과 826 점의 작품을 수록하고 다른 화목 에는 없는 외국의 그림으로 일본의 산수화를 소개하였다. 작품이 가장 많이 수록된 화가는 李成(919-967)으로 159 점이 열거되었고 巨然, 許 道寧, 王維, 關仝, 董源, 范寬의 순으로 많은 작품이 수록되었다. 화가 는 활동시대 순으로 나열하였고 같은 시기의 화가는 宗室, 文人, 文臣 을 우선하고 직업화가 다음에 內臣과 승려 화가를 열거해 수록한 화가 의 취사선택과 배열에 화가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가 고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魏晉時期의 화가부터 수록한 道釋門, 人物門과 달리 산수 문에 唐代 이전의 화가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당대부터 산수화가 독립
류하였다.
된 화목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12) 현재 산수 화가로 잘 알려졌지만 다른 화목에 수록된 화가는 展子虔(550-600활 동)이 道釋門에, 趙令穰(1070-1100이후)과 휘종년간에 활동한 武臣인 梁師閔이 墨竹·小景門에 수록되었으며 燕文貴(약988-1010활동)는 宮室 門에서 제외한 화가로 언급되어 주목된다.13)
Ⅲ. 山水門에 收錄된 畵家와 畵家傳 敍述의 특징
중국회화사에서 휘종년간은 畵學의 설립을 통한 화원제도의 개혁과 황제의 적극적인 후원을 배경으로 한 궁정화가들과 회화의 새로운 세 력으로 등장한 문인화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북송대 화풍이 변하 는 계기가 마련된 시기로 평가된다. 특히 산수화의 경우 북송산수화를 대표하는 大觀山水畵가 郭熙에 이르러 양식적, 이론적으로 발전의 정 점에 도달한 후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되었으며 문인화 이론의 대두와 그에 자극된 문인화가의 활동으로 文人山水畵가 성립되었고, 米芾의 江南山水畵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華北지역의 산수를 표현한 大觀山水 畵와 구별되는 董巨양식의 부흥과 변용이 이루어졌으며 米法山水畵가 창조되었다. 또 王詵(약 1048-1104이후)과 趙令穰에 의해 靑綠山水畵 가 부활하고 小景畵와 李公麟(약1041-1106)의 白描山水畵가 대두되는 등 매우 다양한 주제와 표현양식의 산수화가 제작되었다. 또 郭熙의 林泉高致를 이어 韓拙의 山水純全集과 같은 산수화의 원리와 구체 적인 화법을 다룬 이론서가 출간되어 산수화는 이론과 창작에서 모두 공전의 발전을 이루었다.14)
12) Patricia Buckley Ebrey, Accumulating Culture: The Collections of Emperor Huizong, pp.258-263.
13) 展子虔은 宣和畵譜 卷1, p.380, 趙令穰은 卷20, pp.624-625, 梁師閔은 p.628, 燕文貴는 卷8, p.455 참조.
이러한 회화사적 상황에서 편찬된 宣和畵譜는 앞서 살펴본 대로 황실 소장품을 중심으로 위진시대에서 북송에 이르는 시기의 회화사를 정리한 저록으로 화가를 먼저 선정하고 그들의 작품을 열거하였다. 화 가에 따라 수록작품의 수에 차이가 많은 것은 내부에 소장된 작품의 수가 적더라도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화가는 포함하였기 때문으로 여겨 진다. 따라서 山水門의 서론과 화가전의 서술은 당시 산수화에 대한 인식과 화가에 대한 평가를 반영하며 북송말의 산수화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1. 山水畵傳統의 成立과 傳承의 系譜
산수문의 서술에서 가장 부각되는 점은 수록된 화가의 사회적 신분, 作畵활동과 작품의 성격, 師承關係를 통해 산수화 전통의 성립과 전승 의 계보, 양식전개의 양상을 정립하여 제시함으로 이전의 畵史書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먼저 서론에서 李成은 荊浩(약 855-915) 를 배웠지만 靑出於藍으로 여러 사람의 화법을 모두 덮어버렸으며 范 寬(?-1023 이후), 郭熙, 王詵 등은 이성의 한 부분을 얻었으나 그의 심 오함을 엿보기에는 부족하다고 하여 이성을 최고의 산수화가로 평가하 였다. 또 畵法이 용렬하거나 지나치게 工巧한 화가는 기록하지 않는다 하여 평가의 기준을 제시하였다.15)
唐代의 화가전에서는 靑綠山水畵와 水墨山水畵 전통의 성립, 文人山 水畵의 기원이 밝혀진다. 宗室이라는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리며 著色山水畵法을 형성한 李思訓·李昭道(8세기 초 활동) 부자를 14) 朴恩和, 北宋末·南宋初의 山水畵 (講座美術史 29, 2007), pp.297-298.
15) 宣和畵譜 卷10, p.473. 李成에 대한 높은 평가는 徽宗의 개인적인 관심과 선호를 반영하는 것이다. 휘종은 즉위 전부터 가깝게 지낸 宗室이며 이성의 산수화법을 배운 王詵을 통해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여겨진 다. 陳葆眞, 宋徽宗繪畫的美學特質 -兼論其淵源和影響- , p.321. 휘종과 왕 선의 교유에 대한 기록은 陳高華 編, 宋遼金畵家史料 (北京: 文物出版社, 1984), pp.442-443 참조.
제일 먼저 수록하였고 宣和畵譜 편찬 당시의 화가들이 이씨 부자의 화법을 따라 저색산수화를 그리지만 뛰어난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하여 靑綠色을 주조로 하는 채색산수화법이 당대에 이미 상당한 수준 에 이르렀음을 암시하면서 董源(?-962), 王詵, 王希孟(1096-1119)에 의 해 부흥된 북송대 靑綠山水畵의 근원을 말해준다.16) 王洽(?-805), 項 容(8세기 후반), 畢宏(8세기 후반), 張璪(약 735-785)는 筆墨의 자유로 운 구사가 두드러지는 水墨技法으로 窠石, 松石과 산수를 묘사하여 수 묵산수화 양식의 기반을 이루었음을 밝힌다.17) 또 격식에 구애되지 않 는 작화태도, 筆法과 墨法을 자유자재로 변용하며 그림에 기운과 생기 를 드러내는 표현력, 畵工이 이를 수 없는 교묘한 경지에 도달한 潑墨 法의 사용을 강조해 북송대에 이르러 문인화의 예술적 가치를 드러내 는 표현적인 양식의 개념으로 정착된 墨戱의 전통이 唐代에 형성되었 다는 견해를 반영한다.18) 隱居한 문인으로 유명한 盧鴻(약713-742 활 동), 높은 관직에 인품과 문장력, 詩畵의 재능을 모두 갖춘 唐代 최고 의 화가로 평가된 王維(701-761)는 가장 이상적인 문인이며 산수화가 의 전형으로 제시되어 북송 후기 문인화의 대두와 함께 성립된 문인산 수화 전통이 당대에 이미 시작되었고 오대에서 북송 초에 활동한 荊 浩, 關仝(약 907-923활동), 李成에 의해 이어졌음을 말해준다.19)
五代에 주로 활동한 荊浩와 關仝, 董源의 화가전은 그들이 산수를
16) 宣和畵譜 卷10, pp.474-475. 북송대 청록산수화의 부흥에 대하여는 朴恩 和, 王詵의 <煙江疊嶂圖>와 文人山水畵의 傳統 (美術史學硏究 238·239, 2003), pp.71-73 참조.
17) 王洽은 歷代名畵記에 王黙으로 기록된 화가와 동일인이다. 王墨, 王潑墨 이라고도 한다. 장언원 지음·조송식 옮김, 역대명화기, pp.403-404.
18) 宣和畵譜 卷10, pp.478-480.
19) 宣和畵譜 卷10, pp.475-478. 송대의 산수화가로 수록된 문인의 화가전은 이들이 대부분 王維, 關仝, 李成의 화풍을 따랐으며 인품과 학문, 작화태도, 시화가 어우러지는 그림의 성격 역시 盧鴻, 王維, 荊浩, 關仝, 李成으로 이어 지는 문인화가의 전형을 계승한 것으로 서술하였다. 북송대 문인산수화에 대해서는 朴恩和, 王詵의 <煙江疊嶂圖>와 文人山水畵의 傳統 , pp.57-84 참조.
전문으로 그린 화가임을 강조하여 이 시기에 산수화가 독립된 화목으 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20) 荊浩는 唐代 화가들의 필묵법을 집대 성하여 수묵산수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關仝, 李成이 그에게서 배웠다고 하여 북송산수화를 대표하는 華北山水畵에 王洽, 項容, 畢宏, 張璪 등의 水墨技法이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수화가 중 수록작품이 가장 많고 서론에서 최고의 산수화가로 평 가한 李成은 당의 宗室이며 儒學者로 놓은 신분에 학문적 소양을 갖추 고 자신의 심경을 화폭에 토로하고 스스로 즐길 뿐 남을 위한 그림을 그리지 않는 문인화가임을 강조하였다. 范寬은 거침없는 행동으로 세 상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처음에 이성에게 배웠으나 후에 실제 자연을 관찰하고 마음속에 얻은 바를 그려냄으로 자신의 화법을 이루어 關仝, 李成과 더불어 최고의 산수화가로 일컬어졌다.21) 역시 이성의 필법을 배운 직업화가인 許道寧(약 970-1052)은 이성과 범관이 사망한 후 허 도녕만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고 만년에 필치가 간결해지고 개성이 드 러났지만 자신만의 화풍을 이루지는 않은 것으로 서술되었다. 郭熙는 畵院畵家로 이성의 화법을 취해 구도가 뛰어남에 이른 후 스스로 깨달 아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었고 자연현상의 천태만상을 그려내어 독보적 인 경지에 이르렀다하여 이성을 계승한 곽희에서 대관산수화가 발전의 정점에 도달했음을 암시한다. 곽희는 산수이론서를 저술하고 그림의 道를 논함으로 직업화가로서 가장 높이 평가되었다.22)
11세기 초에 활동한 산수화가로 잘 알려진 燕文貴가 산수문에 포함 되지 않고 宮室門에서 제외한 화가로 언급되었지만 그의 제자인 屈鼎 은 수록된 점이 주목된다. 굴정은 仁宗年間(1023-1063)에 활동한 화원 20) 宣和畵譜에서 荊浩는 唐의 화가로, 關仝은 五代, 董源은 宋의 화가로 수 록하였다. 卷10, pp.480-483; 卷11, pp.485-487. 작은 화폭에 비교적 단순한 화면구성을 보이는 小景의 화목을 독립시킨 것도 산수화의 발전과 함께 나 타난 새로운 산수화 양식의 대두를 반영하는 것이다.
21) 李成, 關仝, 范寬을 산수화의 三大家로 평가한 것은 郭若虛의 견해를 계승 한 것이다. 郭若虛지음·박은화 옮김, 곽약허의 도화견문지, pp.81-85.
22) 宣和畵譜 卷11, pp.487-495, pp.496-498.
화가로 연문귀를 배워 사계절의 변하는 경관을 잘 그렸는데 문인적인 정서를 담아냈으며 스승인 연문귀는 수록하지 않고 굴정을 수록한 이 유는 배우는 사람들이 진보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라 하였다.23) 圖畫 見聞誌, 聖朝名畫評, 畫繼 등의 기록을 통해 연문귀는 浙江省 吳 興 출신으로 大中祥符年間(1008-1016)에 畵院에서 활동했으며 “燕家景 致”라 칭한 그의 산수화풍을 계승한 화가가 神宗年間(1068-1085)까지 활동했고 굴정은 그 중 한사람임을 알 수 있다.24) 또 현전하는 (傳)徽 宗의 <雪江歸棹圖>, 王詵의 <煙江疊嶂圖>, 胡舜臣의 <送郝玄明使秦 圖> 등에 연문귀의 영향이 드러남으로 북송 말에 이르기까지 그의 화 풍이 이어졌음이 확인된다.25) 그럼에도 연문귀를 수록하지 않고 의도 적으로 제외한 것은 華北山水畵의 전통이 형호에서 이성, 관동, 범관, 곽희로 이어진 것으로 설정한 宣和畵譜 편찬자들의 관점에서 비롯되 었다. 연문귀는 옛 사람의 화풍을 배우지 않고 스스로 일가의 규범을 세워 自成一家했다고 기록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사승관계에 의한 화풍 의 계승과 전통성을 중시한 宣和畵譜의 편찬자들에게 이질적인 산수 화로 여겨져 제외된 것으로 생각된다.26)
한편 徽宗이 殿閣에 걸린 郭熙의 그림을 모두 古畵로 바꾸었다는 畫繼의 기록은 휘종대 황실을 중심으로 산수화에 대한 취향이나 평가 가 크게 달라졌음을 말해준다.27) 북송산수화를 대표하는 대관산수화가
23) 宣和畵譜 卷11, p.499.
24) 嶋田英誠, 燕文貴の傳稱作品と,その北宋山水畵上に占する位置についての 一試論 (美術史 101, 1976), pp.41-44.
25) 이들 작품에 대하여는 朴恩和, 北宋末·南宋初의 山水畵 , pp.305-307, pp.309-311 참조.
26) 현존하는 燕文貴의 전칭작품에 范寬의 <溪山行旅圖>와 양식적으로 유사 한 표현이 나타나 연문귀가 범관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董 源의 <寒林重汀圖>와 공통되는 요소도 있어 강남출신인 연문귀가 강남산수 화풍을 수용해 화북산수화에 도입한 결과 개인적 양식의 특수성이 부각되었 고 따라서 선화화보의 편찬자들이 이질적인 성격의 산수화로 인식한 것으 로 여겨진다. 嶋田英誠, 燕文貴の傳稱作品と、その北宋山水畵上に占する位 置についての一試論 , pp.42-44.
신종년간에 곽희의 활약과 함께 발전의 정점에 이른 후 회화에 대한 새로운 이념을 제시한 휘종의 지도와 화원의 개혁을 통해 산수화의 새 로운 방향이 요구되었고 그러한 맥락에서 산수화의 양식적 계보와 전 통을 재정립하려는 휘종의 의도가 그림을 바꾸게 하였으며 화보의 편 찬에도 반영되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古畵는 宣和畵譜에서 최고의 산수화가이며 화북산수화의 전통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되고 휘종이 선 호한 李成의 그림이었을 가능성이 많다.28)
강남 출신으로 화북지역과 다른 자연경관을 묘사하는 강남산수화 전통을 시작한 董源의 화가전은 그가 李思訓의 著色山水畵 전통을 계 승했음을 강조하였고 승려화가인 巨然(약 960-986)의 그림에 대한 서 술은 강남산수화풍의 양상을 드러낸다. 道釋門에 수록된 강남출신의 화가 陸文通이 산수는 동원과 거연을 배웠다는 기록은 북송 초에 활동 한 화가들이 동원과 거연양식의 강남산수화풍을 습득했음을 말해준 다.29) 975년에 南唐이 북송에 복속된 후 李後主(937-978)의 소장품이 대부분 북송 황실로 들어갔고 巨然을 비롯한 화가와 陶穀(903-970), 徐 27) 神宗年間인 1074년에서 남송 孝宗年間인 1167년에 이르는 시기의 회화에 대해 기록한 畫繼에 저자의 부친 鄧雍이 宣和年間에 提擧官으로 재직할 때 창고에 버려져 있던 곽희의 그림을 모두 얻었으며 신종은 곽희의 그림을 선호해 전각 하나의 벽을 모두 곽희 그림으로 장식했지만 휘종은 즉위 후 모두 古畵로 바꾸었다는 내용이 있다. 또 북송 말에서 남송 초에 궁정에서 활동한 산수화가들이 주로 董源, 范寬, 高克明, 李成의 화풍을 배웠다고 한 같은 책의 기록에서 당시 곽희 화풍의 영향력이 감소되었으며 그 역시 휘종 의 영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鄧椿, 畫繼, p.346, pp.317-321. 선화화보에 수록된 곽희의 작품이 30 점에 지나지 않는 것도 같은 상황을 반영한다.
28) 휘종년간의 화원화가인 韓拙이 1121년경에 편찬한 저서에서 “이전의 화법 을 따르지 않으면 실제 산을 그리더라도 원근과 깊고 얕음이 분명하지 않아 지도와 같다(畵若不從古畵法, 只寫眞山, 不分遠近淺深, 乃圖經也)”라 한 주장 역시 전통적인 화법에 기초한 법식과 표준을 중시한 휘종대 화원의 산수화 법을 반영하며 전통의 계승을 강조한 선화화보 편찬자의 견해와 부합한 다. 韓拙, 山水純全集 黃賓虹·鄧實編, 美術叢書 9, p.33. 휘종의 곽희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 원인에 대한 다른 견해는 朴恩和, 鄧椿의 畫繼와 북 송후기~남송초기의 산수화 , pp.86-87 참조.
29) 宣和畵譜, 卷11, pp.485-487; 卷12, pp.512-515; 卷4, p.413.
鉉(916-991) 등 많은 문인들이 이후주를 따라 북송에서 활동했음으로 강남의 화풍이 북송에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그 후 강남출신 문인인 沈括, 米芾에 의해 강남산수화에 대한 관심의 제고되었고 휘종의 이후 주에 대한 관심과 함께 董源과 그의 화풍을 계승한 巨然의 산수화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북송 말 산수화에서 화북산수화와 강남산수화의 절충과 융합이 이루어졌으며 현존하는 작 품에 나타나는 종합적인 산수화풍이 형성되는 바탕이 마련되었다.30)
이러한 화가전의 서술을 통해 宣和畵譜는 唐代의 수묵기법을 집 대성해 수묵산수화의 기초를 마련한 荊浩와 그의 화법을 배운 후 각기 독자적인 개인양식을 성립한 關仝과 李成, 范寬이 華北山水畵風의 전 통을 확립했다는 북송산수화의 양식적 계보를 작품목록과 함께 분명하 게 제시하였다. 이어 李成의 화법은 許道寧, 翟院深(11세기 전반)과 郭 熙가 계승하였으며 關仝의 화법은 郭忠恕(?-977)와 王士元(10세기 후 반)에게 전해진 것으로 설명하였고 굴정에 대한 서술에서 范寬의 화풍 은 燕文貴를 거쳐 屈鼎에게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董源은 李 思訓의 著色山水畵法을 계승하고 강남산수화풍을 趙幹(약 961-975), 陸 瑾(10세기 후반), 巨然 등에게 전해주어 강남지방의 지역적 특징을 드 러내는 董巨樣式의 산수화가 북송에 전해졌음을 알려준다.31) 산수화 전통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작품의 적극적인 수집으로 이어져 李成, 關仝, 范寬, 董源, 巨然, 許道寧의 작품이 내부에 대거 소장되어 당시 화가들의 작품제작에 典範이 되었고 중요한 작품으로 후대에 전해짐으 로 이후 북송대 산수화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32)
30) 陳葆眞, 宋徽宗繪畵的美學特質 -兼論其淵源和影響- , pp.311-316. 휘종대 의 종합적인 산수화풍에 대하여는 朴恩和, 北宋末·南宋初의 山水畵 , pp.304-317 참조.
31) 다른 화목의 화가전에서도 사승관계를 언급한 경우가 있지만 이전 시기에 서 북송까지 일관된 전승의 계보를 제시한 분야는 산수문이 유일하다.
32) 휘종이 臣僚, 宗室들과 함께 御府圖畵를 감상하고 下賜하기도 했으며 화원 에 가져가 화원화가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는 기록을 통해 내부 소장의 그 림이 당시 궁정내외 화가들의 작품제작에 중요한 範本이 되어 직접적인 영
한편 북송 말기에 이르러 다른 화목의 그림과 구별되는 산수화에 대한 이해나 감상론이 대두되었음이 화가전에 드러난다. 그림으로 自 適했던 張詢(9세기 후반)의 <三景圖>에 대한 설명에서 唐代에 실제 장소의 특정한 계절이나 시간의 경치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음 을 알 수 있고 송대의 陸瑾과 李公年(12세기 전반)의 <四時圖>에 대 한 구체적인 설명은 사계절의 특징적인 경관을 그려낸 四時山水圖에 대한 관심이 증대했음을 말해준다.33) 산수문에 수록된 작품의 제목은 모두 春夏秋冬의 순서로 나열되었고 특정한 장소나 계절을 강조하는 畵題가 많아진 점 역시 우주의 조화로운 순환을 상징하는 사계절의 변 화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관념이 산수화에 반영되었음을 알려준다.34)
2. 文人畵論의 受容과 官撰 畵史書의 性格
宣和畵譜의 서술에 蘇軾을 비롯한 문인들의 繪畵觀이 많이 반영 되었으며 대립적인 관계로 여겨졌던 문인화가와 화원화가들이 상호 영 향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선행연구를 통해 이미 밝혀졌다.35) 휘종이
향을 주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鄧椿, 畵繼, pp.272-273. 宣和畵譜 화가 전의 내용은 淸代에 이르기까지 회화관련 문헌에 지속적으로 인용되었으며 작품 목록은 작품의 眞僞를 판단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 다.
33) 宣和畵譜 卷10, p.479; 卷11, p.499, 卷12, p.506. 다양한 양식과 畵題의 四時山水圖는 淸代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그려져 중국산수화의 중요한 전통을 형성하였고 사시산수도의 성행과 더불어 사계절의 경관을 배경으로 한 花鳥畵, 花卉草蟲畵, 墨竹畵도 많이 제작되었다. 朴恩和, 冬景山水畵의
“雪江買魚” 畵題 (美術史學硏究 266, 2010), pp.227-231.
34) 蕭百芳, 由《宣和畵譜》的繪畵美學探討宋徽宗時代畵院山水畵風 , pp.163 -166. 花鳥門의 작품 제목 역시 계절과 관련된 동식물이 춘하추동의 순서로 배열되었다. Jessica Rawson, “Cosmological Systems as Sources of Art, Ornament and Design” (The Museum of Far Eastern Antiquities Bulletin, vol. LXXII, 2000), pp.154-156.
35) 衣若芬, 《宣和畵譜》與蘇軾繪畵思想 ; Ronald Egan, “The Emperor and the Ink Plum: Tracing a Lost Connection between Literati and Huizong's
畵學을 설치하고 문인화가인 宋迪(1015-1080)의 조카 宋子房과 米芾이 書畵學博士로 재직하면서 문인들의 繪畵觀이나 畵法이 자연히 궁정에 유입되었고 문인과 화원화가의 교류도 증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 나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북송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인 소식과 미불이 宣和畵譜의 어떤 화목에도 수록되지 않은 것은 1106년에 元祐黨禁이 폐기된 후에도 政爭의 여파가 그치지 않아 蘇軾, 蘇轍(1039-1112), 黃 庭堅(1045-1105) 등의 이름이 거론될 수 없었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다.36) 米芾이 제외된 이유는 蘇軾 주변의 문인들과 교유하였으며 화가 와 작품에 대한 개성이 강한 주장과 평가가 편찬자들의 관점과 달랐기 때문으로 여겨진다.37) 그러나 정치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宣和畵譜에 는 문인들의 화론과 회화관이 대거 인용되었고 특히 산수문의 서술은 다른 화목에 비해 그림의 창작방법과 감상, 詩畵의 상관관계를 비롯해 문인화가나 餘技畵家에 대한 높은 평가 등에서 문인화론과 상통하는
Court" (David R. Knechtges and Eugene Vance eds., Rhetoric and the Discourses of Power in Court Culture China, Europe, and Japan,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5), pp.117-148.
36) 글씨로도 유명한 蘇軾과 黃庭堅은 宣和書譜에도 수록되지 않아 그들의 명성과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휘종대의 서화에 대한 官撰書에서 완전히 배제 되었다. 蔡絛(?-1147)가 西淸詩話에서 소식과 황정견을 언급했다는 이유 로 면직되었다는 기록은 蔡絛의 政敵이 그를 제거하는 구실로 詩話集의 내 용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元祐黨에 속한 문인에 대한 언급만으로 비 난받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말해준다. Ronald Egan, “The Emperor and the Ink Plum: Tracing a Lost Connection between Literati and Huizong's Court”, pp.134-136. 蘇軾을 비롯한 보수적인 문인들이 처했던 정치적 상황 에 대해서는 Alfreda Murck, Poetry and Painting in Song China: The Subtle Art of Dissent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pp.28-50; Charles Hartman, “Poetry and Politics in 1079: The Crow Terrace Poetry Case of Su Shih” (Chinese Literature: Essays, Articles, Reviews, 12, 1990), pp.15-44 참조.
37) 특히 李成의 眞作은 두 점밖에 보지 못했다고 한 미불의 주장은 159 점의 이성 그림을 수록한 宣和畵譜의 견해와 대조된다. 米芾, 畵史, p.10;
Patricia Buckley Ebrey, Accumulating Culture: The Collections of Emperor Huizong, p.282.
점이 많다.
특히 당에서 송에 이르기까지 산수화로 유명한 화가들은 畵工의 무 리에 속하지 않고 대부분 縉紳士大夫이며 李思訓, 盧鴻, 王維, 張璪, 荊 浩, 關仝 등은 인품이 매우 높다고 한 산수문 서론의 논의는 화가로서 의 능력이 사회적 지위에 따라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인품에 의해 결정 되며 높은 인품과 천성이 그림에 드러나 작품의 품격을 결정하는데 일 정한 작용을 한다는 문인의 주장과 같은 것으로 문인화 이론이 확립된 시기의 회화관을 반영한다.38)
산수문의 화가전에는 문인화 이론을 체계화하고 확립한 歐陽修 (1007-1072), 蘇軾, 黃庭堅의 화가에 대한 평가를 문구 그대로 인용하 거나 의미를 차용한 곳이 특히 많이 발견된다. 또 작가나 작품의 평가 에 화가를 시인과 동일시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시를 짓는 것과 같 다는 “作畵如作詩”의 관념, 그림에 흥을 기탁하고 스스로 즐기기 위해 자유롭게 그릴뿐 그림으로 명성을 구하지 않으며 속됨을 경계하고, 대 상과 필묵법이 완벽하게 융합된 경지를 추구하면서 작품에 정미하고 심오한 내용을 부여해야 된다는 문인들의 견해를 수용한 곳도 많이 보 인다.39) 王維를 詩畵의 재능을 겸비한 문인화의 시조로 부각시키고 126 점에 이르는 작품을 수록한 것도 그를 가장 이상적인 문인화가로 추앙한 문인들의 평가와 부합한다.40)
한편 산수문에 수록된 화원화가나 직업화가에 대한 평가가 道釋, 人 物, 花鳥 등 다른 화목에 비해 낮은 점이 발견된다. 28 명의 송대 산수
38) 宣和畵譜 卷10, p.473. 이러한 관점은 1074년경에 편찬된 圖畫見聞誌 에 이미 나타나며 선화화보의 경우 산수문에서 특히 강조되었다. 郭若虛 지음·박은화 옮김, 곽약허의 도화견문지, pp.610-612.
39) 衣若芬, 《宣和畵譜》與蘇軾繪畵思想 , pp.212-224.
40) 북송 문인들의 王維에 대한 견해는 Susan Bush, The Chinese Literati on Painting: Su Shih(1037-1101) to Tung Ch'i-ch'ang (1555-1636)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 pp.22-28 참조. 歷代名畵記
의 왕유에 대한 기술과 비교하면 宣和畵譜의 높은 평가가 더욱 두드러 진다. 장언원 지음·조송식 옮김, 역대명화기, pp.354-358.
화가 중 陳用志(11세기 전반), 高克明(11세기 전반), 郭熙, 屈鼎 등 4명 만이 궁정과 관련된 화가이며 작품은 44점으로 827점에 달하는 송대 산수화의 5%에 해당하고 휘종년간의 화원화가로 작품이 전하는 王希 孟, 胡舜臣, 李唐 등은 수록되지 않았다.41) 高克明과 孫可元(11세기)은 직업화가지만 문인화가에 버금가는 作畵態度를 지니고 품격 있고 속되 지 않은 그림을 그린 화가인 점이 강조되었다.42) 직업화가에 대한 이 러한 평가와 서술은 문인사대부의 그림을 士人畵라 부르며 畵工의 그 림과 엄격하게 구별한 蘇軾, 한 점의 俗氣도 없는 뛰어난 인품이 이상 적인 화가의 조건이라고 한 黃公望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으로 宣和畵 譜의 화가에 대한 평가기준이 문인의 관점을 그대로 반영했음을 말해 준다.43)
이러한 점은 蘇軾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문인들에 대한 정치적 편견과 상관없이 그들의 회화이론이 宣和畵譜의 서술에 채용되었음 을 알려주며 선화화보의 체재와 내용이 휘종의 御覽을 거쳐 승인되 었음으로 그 배경에 휘종의 회화관과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추 측할 수 있다. 휘종은 즉위 전에 宗室인 王詵과 趙令穰을 통해 蘇軾 주변의 문인들과 교유하고 黃庭堅의 筆法과 蘇軾의 墨竹畵法을 익혔으 며 즉위 후에는 米巿과 宋子房, 蔡京(1046-1126)의 영향으로 문인의 詩 書畫를 지속적으로 접하고 감상했다.44)
휘종이 화원화가의 교양을 직업적인 畵工보다 높은 단계로 향상시 키고 창작의 수준을 제고하려는 목적으로 설치한 畵學의 제도와 운영, 교육내용은 문인적인 소양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며 詩句를 試題로 畵 學生을 선발하고 화폭에 詩情을 담아내기를 요구한 선발제도는 문인들 이 추구한 詩畵一致 사상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예이다. 따라서 문인에 41) Patricia Buckley Ebrey, Accumulating Culture: The Collections of
Emperor Huizong, pp.288-293.
42) 宣和畵譜 卷11, p.496, p.498.
43) 郭若虛지음·박은화 옮김, 곽약허의 도화견문지, p.611.
44) Patricia Ebrey, “Literati Culture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Huizong and Cai Jing” (Jounal of Song-Yuan Studies, 36, 2006), pp.13-24.
대한 배타적인 태도는 정치적 입장에서 나온 것일 뿐 서화가이며 감상 가인 휘종이 문인사대부들의 회화에 대한 견해를 공유하였으며 궁정회 화를 지도하는 이념의 하나로 수용했음을 말해준다.45) 산수문에서 문 인화가를 중심으로 양식발전의 계보와 전통의 전승을 설명한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聖朝名畫評이나 圖畫見聞誌와 달리 宣和畵譜는 송대의 宗室과 內臣을 화가로 대거 수록한 점이 주목된다. 특히 산수문에 휘 종이 신임했던 童貫을 비롯한 다섯 명의 내신이 포함되었고 그들은 문 인화가 다음, 승려인 巨然 앞에 배열되고 모두 문인과 같은 인품과 자 질, 감식안, 作畵態度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어 산수화에서는 문인사대 부가 가장 이상적인 화가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그들이 문인에 버금가 는 반열이고 문화적인 역량을 지녔음을 암시하였다.46) 이처럼 많은 수 의 종실과 내신을 화가로 수록하고 송대 화가로 관직이 있는 사람은 文臣이나 武臣이라 표기해 君臣의 관계를 강조한 것은 이전의 著錄과 다른 점이며 황실이 회화활동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표출한 것으로 여 겨진다.47)
휘종의 회화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은 개인적인 관심과 함께 황제의 덕목과 위엄을 과시하고 방대한 내부 소장품의 목록과 화가전의 서술
45) 휘종이 궁정회화에서 추구한 또 하나의 이념은 정확한 관찰을 통해 대상 의 특징을 파악하고 정밀한 形寫로 내재적인 생명력과 기운을 표현하는 “以 形寫神”이며 휘종은 이를 문인화론과 상충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陳葆 眞, 宋徽宗繪畫的美學特質 -兼論其淵源和影響- , pp.224-229, pp.307-309.
46) 산수문 이외에 수록된 내신은 인물문에 한 명, 화조문에 네 명으로 모두 열 명이고 전부 휘종대의 내신이다. 15 명의 종실화가는 산수문의 王詵을 제외하고는 화조, 묵죽, 소경문에 수록되었고 역시 餘技로 그림을 그렸으며 문인화가의 소양을 지닌 점이 강조되었다. Patricia Buckley Ebrey, Accumulating Culture: The Collections of Emperor Huizong, pp.297-310.
47) 산수문에 文臣이라 칭한 화가는 여덟 명으로 道釋門, 人物門, 龍魚門의 각 한 명, 墨竹門의 두 명에 비해 월등히 많다. 武臣은 花鳥門에 두 명, 墨竹門 에 한 명, 蔬果門에 두 명으로 모두 다섯 명이 수록되었다. 111 명이 수록된 송대의 화가 중 文臣, 武臣, 宗室, 內臣이 43 명으로 약 40%에 이른다.
을 통해 정립한 畵史로 창작과 이론을 망라한 모든 회화활동의 정통성 과 권위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48) 따라서 그러한 목적을 문자로 체계화한 宣和畵譜의 체제와 내용은 문화의 구심점인 황실의 역할과 휘종의 지도력을 표방한 官撰 畵史書의 성격을 나타낸다. 특히 당시 가장 중요한 화목으로 부상하면서 문인사대부 계층의 회화에 대 한 논의의 중심 대상이었던 산수화에 관한 서술에 그 성격이 가장 선 명하게 드러나면서 편찬의도가 더욱 부각되었다.
Ⅳ. 맺음말
중국회화사에서 북송의 산수화는 주제와 표현양식이 다양해지고 회 화이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어 창작과 이론에서 모두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후 산수화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현재 북송대 그림으로 전하는 작품의 많은 수가 후대의 模本으 로 여겨지고 眞作이 희소한 탓에 구체적인 작품의 평가에 관해 연구자 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며 기록으로만 전하는 화가나 작품이 많아 연 구의 많은 부분을 문헌자료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宣和畵譜는 방대한 규모의 황실 소장품을 중 심으로 위진시대에서 북송에 이르는 시기의 회화사를 정리한 최초의 官撰 畵史書이다. 따라서 개인이 저술한 畵史와 달리 그 체재와 서술 내용이 회화의 분류 체계를 확립하고 회화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며 각 분야의 전통을 황실의 관점에서 정립하려는 편찬의도를 반영한다. 특
48) 徽宗의 詩書畫, 문학, 음악에 대한 관심과 정치적 목적, 당시 문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Patricia Ebrey and Maggi Bickford eds., Emperor Huizong and Late Northern Song China: The Politics of Culture and the Culture of Politics, pp.361-513; Maggie Bickford, “Emperor Huizong and the Aesthetic of Agency” (Archives of Asian Art, 53, 2002/2003), pp.71-104 참조.
히 山水門에서 그러한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먼저 산수문에 수록된 화가의 전기와 작품목록은 화가의 사회적 신 분과 作畵活動, 작품의 성격, 師承關係를 통해 북송산수화를 대표하는 華北山水畵와 江南山水畵라는 兩大 전통의 성립과 전승의 계보를 분명 하게 제시하였다. 이는 산수화의 양식적 계보와 전통을 재정립하려는 徽宗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황실 중심의 繪畵觀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북송까지 산수화의 발전 과정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말 해준다. 따라서 북송대 산수화의 전개 양상을 당시의 시각에서 이해하 고 현존작품에 나타나는 휘종대 산수화풍의 형성배경과 양식적 특징을 포괄적으로 고찰하는 기반을 마련해준다. 또 산수문 화가전의 내용에 는 그림의 창작방법과 감상의 기준, 詩畵의 相關關係를 비롯해 문인화 가나 餘技畵家에 대한 높은 평가 등에서 문인화론과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이는 휘종이 蘇軾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인 문인에 대한 정치 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회화관을 공유해 궁정회화의 지도이념으 로 수용하였고 창작과 이론 방면의 모든 회화활동을 망라한 畵史書의 편찬으로 회화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황실의 문화적 권위를 표방했음을 말해준다.
회화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연구대상은 물론 현존하는 작품이지만 회화와 관련된 문헌기록도 각 시대 회화의 성격과 특징을 비롯해 변화 의 양상과 그 원인을 밝히는 데 도움을 주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역 할을 한다. 宣和畵譜에 수록된 화가전과 방대한 양의 작품목록은 북 송대까지 회화의 흐름을 전면적으로 이해하는 구체적인 자료로 북송 이후에 편찬된 회화 관련 저록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중국회화 사 연구의 불가결한 문헌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宣和畵譜 모든 화목 의 내용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신중하고 면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깊이 있는 연구는 송대 회화의 변화 양상을 역사적 맥락에서 정확하게 규명하고 그 이념적 배경을 밝히며, 현존작품의 의미를 다각적이고 유 기적으로 고찰하여 당시의 회화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 할 것으로 여겨진다.
(Abstract)
Landscape Category of the Xuanhe huapu and Late Northern Song Ideas
on Landscape Painting
Park, Eun Wha
Xuanhe huapu(宣和畵譜 Xuanhe Painting Catalogue), completed in about 1120 during the reign of Huizong(1100-1125), is the first imperial sponsored painting catalogue and one of the most important written records in the study of Northern Song painting.
It includes biographical sketches of 231 painters from the Six-dynasties period to the Huizong's reign and lists their 6,396 works kept in the imperial collection. The Xuanhe Painting Catalogue is organized by ten categories divided according to the different subject matters of painting and lists painters of each category first by period of activity and then by status. The subject matters are representative of their art, and each section of subject matter has essays that explain its cultural significance, key features of its historical development, and achievement of major painters.
By careful reading and reexamining of the text in landscape category which most clearly reveals the characteristic constituents of the catalogue and political intention of Huizong and his compilers, this article aims to illuminate Northern Song ideas about painting, theoretical background behind the development of landscape style, critical opinions about painters, and impact of the catalogue
on later understanding of landscape painting.
The biography of landscapists and lists of their painting reflect Huizong's intention to establish an authoritative, continuous visual history of landscape painting according to his own critical opinion.
It also exhibits his support for the theory of literati painting consistent with the ideas of Su Shi and his circle in spite of their exclusion from the catalogue, from which we can infer that Huizong frame the history of painting with the strong desire to highlight the cultural prowess and centrality of the court and convey the message that the emperor was central to the comprehensive cultural achievement.
The Xuanhe Painting Catalogue continued to be very important source to the study of history of Chinese painting and criticism, therefore, more in-depth studies on each category of the catalogue would provide insight into better understanding of the landscape painting in the Northern Song and succeeding periods.
주제어: 선화화보, 휘종, 북송산수화, 산수화관, 문인화론 關鍵詞: 宣和畵譜, 徽宗, 北宋山水畵, 山水畵觀, 文人畵論
Keywords: Xuanhe huapu, Emperor Huizong, Northern Song landscape painting, ideas on landscape painting, literati painting theory
(원고접수: 2011년 2월 23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3월 30일, 수정원고 접 수: 4월 20일, 게재 확정: 4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