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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代 士大夫의 生活情趣 및 禪宗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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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代 士大夫의 生活情趣 및 禪宗思想

金 炫 廷 (仁荷大)

Ⅰ. 머릿말

Ⅱ. 명대 선종사상의 배경

Ⅲ. 인생자적(自適) 생활정취

Ⅳ. 명리(名利)에 대한 추구

Ⅴ. 종욕주의 생활정취

Ⅵ. 세속적 생활과 예술정취

Ⅶ. 맺음말

Ⅰ. 머리말

‘정취(情趣)’는 아주 오래전부터 많이 사용되었던 어휘이다. 현대한 어사전(現代漢語字典)은 ‘정취’에 대해 “정취란 성정(性情)과 취향(志 趣), 또는 정서(情調)와 취미(趣味)”1)라고 해석하였다. ‘정취’는 또한 삶 에 대한 사람들의 추구를 반영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활정취는 우아하 고 격조가 있는 부류와 저속하고 천박한 부류로 구분된다. 우아하고 격조 있는 생활정취를 소유한 사람은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자세로 진 (眞)·선(善)·미(美)를 추구하면서 긍정적이고 건강한 삶을 지향하는 반 면, 저속한 생활정취를 가진 사람은 향락에 눈멀어 현실에 안주하고 의기소침하며 심지어 세속의 유혹에 못 이겨 타락의 길로 빠져들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생활정취는 우리의 삶은 물론 사람들의 예술적 심미정취에 대해서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인생철학과 생활정취는 일반적으로 심미정취와 1)現代漢語詞典(北京: 商務印書館, 2005, 第5版), p.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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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용감히 싸우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 는 그런 영웅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인생철학과 생활정취가 있으며, 조용하고 욕심이 없는 무위적인 은둔 형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면 고즈넉한 무인지경 속에서 속세를 벗 어난 듯, 평온하고 담담한 시와 그림을 벗 삼아 한적한 인생을 즐기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욕망추구로 환락에 빠져 남녀 간의 관능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경박하고 방탕하며 저 속한 수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2)

인생철학으로서의 선종(禪宗)은 중국에서 ‘금욕(禁欲)-적의(適意)’로 부터 ‘적의(適意)-종욕(縱欲)’이라는 변화, 발전의 과정을 거쳤으며 또 한 그 과정에서 사대부들의 인생철학과 생활정취에 다양한 변화를 가 져다주었다. 하지만 선종 발전의 전 과정을 볼 때, 발전의 후반기는 명 나라 중후반의 몇 십 년이란 짧은 시간동안 지속된 사상개방운동에만 한정되어 있었기에 그 영향력과 범위가 전반(前半)기에 비해 많이 못 미친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선종사상이 사대부 계층에 미친 주요 영향은 정신적인 자아해탈을 핵심으로 하는 ‘적의(適意)’ 인생철학과 자연스럽고 욕심이 없으며 안정되고 우아한 생활정취로 요약할 수 있 다.3) 이처럼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명나라 중후기 선종의 발전양 상과 사대부 계층에 미친 영향이 아주 특별하므로 본 연구에서는 생활 사적 시각으로 명대 중후기 때 선종사상이 사대부 계층의 생활정취에 미친 영향에 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또한, 선종사상이 강남 일대 지 역에서 활발하게 발전하였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본 연구에서는 강남을 중심으로 논의를 펼치고자 한다.

Ⅱ. 명대 선종사상의 배경

2) 葛兆光,禪宗與中國文化(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86), p.121.

3)禪宗與中國文化, p.121.

(3)

명나라 전에 벌써 기원, 발전, 전성 세 단계(兩宋시기4)를 모두 거친 선종사상은 명나라 때에 이르러 더 이상 예전처럼 유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나라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선종사상은 다시 한 번 발전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주원장(朱元璋)은 명나라를 개국한 뒤 입신양명하기 전에 절에서 지 냈던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의 종교적 환경을 바로잡기 시작하였다. 절 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불교의 내막을 더 잘 알 수 있었고 또 불교 에 대해 비교적 엄격한 통제와 관리를 실시하였다. 그중 선승(禪僧)들 이 외부의 각 계층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을 금하고 스님들로 하여금 깊은 산속에서 은거하여 심신을 조용히 수양(修養)할 것을 권장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러한 조치의 영향으로 선종은 명나라 초기부터 쇠 퇴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선승(禪僧) 도연(道衍)이 명성조(明成祖) 주 체(朱棣)의 황위 찬탈에 큰 공을 세운 점을 인정받아 명성조가 선종에 대해 어느 정도 감싸 주고 보호하였지만 이학(理學)이 한창 성행하고 있던 당시 사회적 배경 하에 통치자의 전제집권사상이 한층 더 강화되 어 있었기에 명나라 초기 선종의 쇠퇴는 불가피하다고 보아진다.5) 하 지만 이학의 침울하고 속박된 분위기에서 사대부들은 염증을 느끼고 새로운 틀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 때 왕양명(王陽明)이 선학(禪學)과 육구연(陸九淵)의 심학(心學)을 기초로 건립한 왕씨심학(王氏心學)을 내세워 선종의 본심청정설을 강조하니 이는 분명 왕양명의 심학이 곧 선학의 변종이라는 것을 입증한다.6) 이리하여 심학은 사대부들에게 선 4) 潘桂明,中國禪宗思想歷程(北京: 今日中國出版社, 1992), p.426 참조. 선종사 상이 중국 내에서 발전하고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사대부와 귀족 계층과 밀 접한 연관이 있다. 불교는 양한(兩漢)시기 중국에 전해진 후 상층 귀족들이 제 일 먼저 받아들였으며, 그 후의 발전도 상층 귀족 및 사대부들의 참여와 연관 되어 있다. 송나라 때에는 사대부들이 참선(參禪)하는 등 번창의 기상이 나타 났다. 杜繼文 魏道儒,中國禪宗通史, pp.401-403에도 비슷한 기록이 남아있 다.

5) 杜繼文魏道儒,中國禪宗通史(江蘇: 人民出版社, 2008), pp.532-538; 潘桂 明,中國禪宗思想歷程, pp.54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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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禪悅)의 기풍을 다시 일으킨다. 그리하여 명나라 萬曆 연간에 이르 러 선종은 몇몇 대사(大師)의 영향아래 강남지역에서 갑자기 다시 유 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유명했던 선사(禪師)들로는 운서주굉(雲棲祩 宏), 자백진가(紫柏真可)(달관(達觀)), 감산(憨山)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선종은 의학(義學)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고 경전을 연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아짐에 따라 여러 선사(禪師)들은 필수과목으 로 경전(經典)을 연구하고 배웠다.7)

명나라 중기 이후, 선종은 몇몇 선사들의 영향아래 다시 한 번 전성 기를 맞아 명나라 건국 이래 부진했던 상황에서 벗어났으며 유명한 선 종 신도(教徒)이자 문인인 이지(李贄)와 같은 인물들도 많이 나타났다.

그들은 사대부들을 널리 사귀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많은 유명한 문인 이나 사대부들이 선종의 추종자가 되었거나 또는 선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많은 문인 사대부들은 선승(禪僧)과 친분을 맺 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당시 문징명(文徵明)은

文徵明 集

에 출행(出行)할 때의 깊은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이번 출행의 특 별한 자랑거리는 고승(高僧)과 함께 있고 함께 돌아가는 것이다.”8) 여 기서 우리는 당시 선승에 대한 문인

사대부들의 동경을 엿볼 수 있 다. 문인과 사대부 중 특히 강남 일대의 문인과 사대부들은 선종에 대 해 이야기하는 것을 풍류일사로 간주하고 선사와 친분을 쌓는 것을 격 조 있고 고결하다고 생각하였다.

명나라시기, 사회발전과 경제성장과 더불어 도시 경제와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면서 시민계층이 지속적으로 확대 되었고 사람들의 사회심 리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 시기 사대부들의 심리와 성격도 전대 (前代)에 비해 비교적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이에 따라 명나라 선종의

6)禪宗與中國文化, pp.73-74.

7) 商傳,明代文化史(上海: 東方出版中心, 2007.5, 第1版), pp.322-323; 杜繼文 魏道儒,中國禪宗通史, pp.543-547; 潘桂明,中國禪宗思想歷程, pp.550-556.

8) 明·文徵明,文徵明集(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87) 卷7, 下縹緲峰小憩西湖 寺 , pp.15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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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도 전대에 비해 다른 양상을 보였는바, 사람들은 본심(本心)을 강 조하고 개성을 존중하는 이론을 받아들였으며 동시에 선종의 거리낌 없고 당당하며 외재경전(外在經典)을 부정하는 풍조도 받아들였다.9)

‘자심시불(自心是佛)’이라는 선종의 사상에 의하면 사람의 본심은 맑 고 깨끗하며 불성(佛性)이 있다. 이 참뜻을 깨달은 자는 현실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부처가 된 이상 외부에서 따 로 성인(聖人)이나 부처(佛祖)를 찾아 가르침을 구할 필요가 없으며, 계율을 지키거나 다음 생을 간절히 원할 필요도 없게 된다. 명나라 유 사(儒士)이고 또 선종(禪宗)의 광도(狂徒)인 이지(李贄)는 이렇게 말하 고 있다:

천지와 나는 근본이 같고 천지간에 나를 이길 자 없으나, 만물은 나와 연결되어 일체를 이루니 천지간에 나보다 못한 자도 없다. 내 마음 속의 부처가 제일 좋은 부처이니 더 높은 경지의 부처가 없고 그 외 다른 부 처를 찾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10)

그 외에 부처의 도움을 청하기 시작한다고 해서 부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또 부처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처가 정말로 존재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있어 “부처가 있는지 없 는지는 자신의 변별력으로 분별할 수 있으며, 만약 어느 누가 함부로 부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한다면 부처가 있든 없든 결국 그가 말하는 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11) 그러므로 사람의 본심(本心)은 모든 것을 가늠하는 기준이자 모든 행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지, 동기창, 탕현조(湯顯祖(문학가)) 등 문인들과 자백선사(紫柏禪師)는 교 류가 빈번하였으며 선종의 본심에 대한 화제를 나누었다.

9)禪宗與中國文化, p.73.

10) 明·李贄,焚書(臺北: 漢京文化事業, 1984) 卷4, 念佛答問 , p.136: “天地與 我同根, 誰是勝我者; 萬物與我為一體, 又誰是不如我者. 我謂念佛即是第一佛, 更 不容於念佛之外複覓第一義諦也.”

11)焚書卷1, 答周西岩 , p51: “或有或無, 自是識心分別, 妄為有無, 非汝佛有有 有無也明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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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원굉도(袁宏道) 또한 성학계율(聖學戒 律)을 폐지하고 ‘본심’을 받들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문집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세상에 명백하고 뚜렷한 선(禪)이 어디 있겠는가? 만약 참선 (參 禪)을 깨닫게 된다면 현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눈썹이 찌푸려지는 원인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참선하지 않는다고 해서 머리카락이 곤두서지 않는 것도 아니고 눈썹이 찌푸려지지 않는 것도 아 니듯이, 선(禪) 또한 참선하지 않는다고 해서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자연스럽게 깨닫는 것이다.12)

상기 선(禪)에 대한 이해에서 보면 선(禪)은 ‘참선’하여 이루어지는 것 이 아니라 인연과 천성에 따라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게 원굉도 (袁宏道)의 관점이다.

이런 선종사상이 성행함에 따라 명나라 문인 사대부 및 일부 선사 (禪師)들의 관점은 이학(理學)사상과 첨예하게 대립되었고, 심학으로부 터 본심을 강조하고 개인적 사고의 권위를 존중하는 이론을 받아들였 고, 선종으로부터 부처와 조사(祖師)를 꾸짖으며 외재적 경전의 굴레를 부정하는 기풍을 받아들였다. 선종은 지고무상을 인정하면서 한편으로 모든 본능. 욕망. 이상을 다 말살하려고 하였다. 사람이라면 마음속에 욕망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심령을 속박하던 족쇄를 일단 깨뜨리고 난 후에 그들의 욕망과 감정이 어떻게 불성과 천리의 제약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심학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명 중 엽 선열의 기풍과 심학은 사람들의 심리가 폐쇄적인 데로 향하게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개성의 해방을 추구하는 반항적 사조가 넘쳐나게 하였다. 갇혀있던 내심의 세계로부터 석방하여 세상의 행복과 즐거움 과 정욕을 추구하며 이단적 사조를 불러일으킨다.13) 그리하여 선종사 상은 문인과 사대부들의 생활에 예전과는 다른 영향을 끼쳤다.

12) 明·袁宏道,袁宏道集箋校(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79) 卷21, 答陶石簣編 修 , p.733.

13)禪宗與中國文化,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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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인생자적(自適) 생활정취

이지(李贄)는 처음으로 인생자적(自適) 관념을 제기하여 이런 생활 정서가 한때 급속히 전파되었으며 명나라 후기 사회에서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는데14), 즉 ‘자적(自適)’은 ‘적인(適 人)’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에 ‘자적(自適)’하지 못하면 백이, 숙제일지 라도 공감할 수 없으며,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수요를 만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응당하기에 그러하지 못한다면 요, 순 두 임금일지라도 비천하고 아무 쪽에도 쓸데가 없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문징명도 친구 왕세보의 참대그림에 쓴 글 題友壻王世寶鈎勒竹 에서 대나무를 빌어 “마음을 비웠기에 본성은 겸손하며 다른 색으로 단장하지 않아도 순수하구나. 그림자는 변했어도 풍골(風骨)이 여전하니 그것은 결코 외부의 형태와 빛깔에 의거하지 않는다.”15)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문인 과 사대부들이 본성에 따른 여유로운 삶(본성자적 本性自適 )에 대한 추구를 엿볼 수 있다.

‘은거(隱居)’는 현실생활을 도피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는 문인 사대부들의 일종의 심적인 생활추구이다. 즉 각 세대의 문인

사대부 들이 산속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의 조용하고 한적한 생활정취에 대 한 추구였던 것이다. 사대부들이 은거를 선택하는 이유는 순탄치 않은 벼슬길로 인해 쌓인 마음속의 울분을 토하기 위해서이다. 진홍서(陳弘 緒)는 명나라 때 파귀(罷歸)된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호소하기 위해서 은거생활을 선택한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그러나 명나라 은사들은 모 두 산속에만 은거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은사들은 복잡하고 시끄러운

14) 李贄,焚書增補(北京: 中華書局, 1975), 答週二魯 , pp.258-259: “士貴為己, 務自適. 如不自適而適人之適, 雖伯夷 叔齊同為淫僻; 不知為己, 惟務為人, 雖 舜同為塵垢秕糠.”

15)文徵明集卷3, 題友壻王世寶鈎勒竹 , p.58: “應以虛心本性在, 不使粉節緇塵 浮. 清陰雖改風骨是, 意足肯於形色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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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들을 떨쳐버리고 한적한 산속에 은거하였으며, 어떤 은사들은 선사 (禪寺)에 은거하면서 선승과 선인(仙人)들과 교제하고 유람하면서 불 선(佛禪)에 감정을 기탁하고, 또 어떤 은사들은 가무와 물욕에 빠져 기 생집과 별장을 드나들며 살기도 했다.16)

자연의 산천에 감정을 기탁한다 해도 그 장소가 아주 중요하여 산 도 물도 있는 깊은 산속의 사원 혹은 농촌의 농가를 은거 장소로 정했 다. 사원의 경우 이지(李贄)는 哭耿子庸 에서 세속 밖의 깊은 산과 사 원에 대한 동경과 산속의 조용한 삶에 대한 미련의 감정을 표현하였는 데, “돌아와 산속에 앉으니 사방이 너무 조용하여 마음이 즐겁다(歸來 山中坐, 靜極心自怡)”17)고 하였고 또 다른 편안하지만 고생스러운 농 촌의 농가의 경우는 꽃을 심고 야채를 캐며 책을 벗 삼아 즐거운 나날 을 보낼 수 있었다. 대표적인 은거자(隱居者)였던 진계유는 29세 때 과 거시험을 단념하고 소곤산(小昆山) 남쪽에서 은거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동사산(東佘山)으로 옮겨 ‘동사산거(東佘山居)’를 짓고 “열무가 넘는 앞마당에 울타리를 세우고 벽에는 책과 그림을 진열해놓으며, 꽃 과 대나무를 심고 손님이 오면 술도 마시고 농사일도 하며, 일을 마친 저녁이면 여자보다 더 좋은 약술을 마시고 홀로 잠자리에 든다”18)고 하니 그는 이러한 생활을 갈망하고 또 즐겼다. 또한 그는 “모피로 만 든 옷을 입고 꽃을 심고 나막신을 신고 야채를 캐며, 남산의 눈과 구 름을 보고 북쪽 창문에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맞는 삶을 만족해하면 서 세상 사람들이 왜 그토록 불쾌하게 사는지 이해 못하겠고 은거생활 이 신선놀음 같은데 사람들은 왜 그리 불쾌하게 살까!”19) 라고 한탄하 16) 清·陳弘緒,寒夜錄(學海類編本, 臺北: 藝文印書館) 卷上, p.11上: “今之仕宦 罷歸者, 或陶情於聲伎, 或肆意於山水, 或學仙譚禪, 或求田問舍, 總之為排遣不平, 然不若讀書訓子之為得也.”(이런 현상에 대해 가장 적절히 묘사한 기록이다) 17)焚書卷6, 哭耿子庸·其二 , p.230.

18) 明·陳繼儒,陳眉公集(續修四庫全書集部·別類集 1380冊, 上海: 上海古籍 出版社; 據上海圖書館藏明萬曆四十三年史兆鬥刻本影印, 1995), 卷1, 隱居 , p.26: “十畝之園數椽之, 屋旁列圖書. 隨意花竹召, 客有酒耕田. 有犢晚厭娥, 眉餌 藥獨宿.”

19)陳眉公集卷1, 山居二首·其二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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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적막한 산속에는 자연히 발길이 적게 닿기 마련이기에 사람은 조용한 산수풍경에 흠뻑 취해 자신과 세상을 모두 잊고 여유로움을 얻게 된 다. 이러한 경지는 깊숙하고 적막하여 아는 사람이 적은 자연산수 속 에서만 진정으로 체험할 수 있다.

문인 사대부들의 이러한 자연 생활정취에도 향락을 즐기는 자유로 운 느낌을 같이 추구하였다. 문징명은 쌍탑원(雙塔院)을 유람한 후 다 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남겼는데, 여기서 당시 문인

사대부들의 진솔 한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사람은 각자 좋아하는 것이 있으니 어찌 서로 높고 낮음을 비교하겠는 가? 하루의 즐거움으로 어찌 일 년간 힘들게 일할 것을 보상할 수 있겠 는가! 고대의 명인들은 장작을 태울 때 탄 부분까지 깨끗하게 사용하였 다. 술을 마시면 속세를 잊을 수 있으니 도연명과 같지 아니한가? 술이 있으면 곧 즐거움이 있으니 내일 아침을 어찌 기다리랴.20)

산이든, 농가든, 전원이든, 야외든 어디에서 살든지 모두 자연의 정 취를 추구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 생활하든지, 경치가 얼 마나 멋있는지를 막론하고 세속을 초탈할 수 없다면 제대로 된 은거생 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만족 하고 자신과 세상을 냉정하게 관조하며 사소한 일들을 내려놓고 내심 만족해하며 물고기와 새와 동무하고 악기를 다루고 책을 읽으면서 산 다면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나와 관계가 없다 라는 자세로 살아야 은거 의 목적을 진정 달성할 수 있다. 고렴(高濂)의 이런 ‘자족론(自足論)’은 바로 휴식(休閒)의 내포인 정(靜), 한(閒), 취(趣), 의(宜)이다. 고렴은 또 그 내포를 확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순조롭거나 아니거나 모두 만족하는 자는 부귀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

20)文徵明集, 九日遊雙塔院次淵明己酉九日韻 , p.53: “人性各有適, 奚但壞與 霄? 奚以一日歡, 酬此卒歲勞! 古來明哲士, 取材不遺焦. 銜觴輒忘世, 何似栗裡 陶? 得酒且複樂, 安能待來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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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얻었거나 잃은 것에 대해 모두 만족하는 자는 천하를 얻은 것과 같 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만족하는 자는 바다와 하늘과 같은 넓은 아량을 가 졌고, 가난해도 만족하는 자는 욕심 없고 깨끗한 심성을 지녔다. 사양하 거나 받을 줄 아는 자는 들나물을 캐는 청고함이 있고, 조용한 분위기를 즐길 줄 아는 자는 물과 같은 고요한 성격을 품었다. 여행을 하면서 만족 을 얻는 자는 여유로움이 있고, 술을 마시면서 만족을 얻는 자는 달관함 이 있다. 자택에 혼자 있으면서도 만족하는 자는 편안함과 안일함을 알 고, 장난을 치며 친구와 교제하는 것에 만족하는 자는 소탈함을 소유했 다. 이 모든 것에 모두 만족한다면 하루하루가 충실할 것이고 몸과 세상 을 잊고 남과 경쟁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고민을 전부 털어버리고 미묘 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사람들은 쉽게 만족하지 않고 탐욕스럽게 살아가 는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참으로 멍청하구나.21)

사대부들은 자연을 추구하는 생활정취에서 적의를 추구하였는데, 은 거생활에서 마음의 공허함을 자연을 통해 만족시키고 친구를 통해 정 신적 자아해탈을 꿈꾸며 청정 담백한 생활을 수행하고 즐겼다. 이는 불교의 금욕주의에서 현실을 도피한 생활정취이다.

Ⅳ. 명리(名利)에 대한 추구

명나라 시기 상품경제가 발전됨에 따라 사회적으로 선비가 학문을 버리고 장사를 하거나 또는 상인이 장사를 접고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나타났지만 문인들의 포부는 그래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 길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과거급제의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 21) 明·高濂,雅尚齋尊生八牋(北京圖書館古籍珍本叢刊61冊, 北京: 書目文獻 出版社, 1988, 據明萬歷19年自刻本縮引) 卷7, 起居安樂上·高子自足論 , p.21下 -22上: “能自足於窮通者, 是得浮雲富貴之夷猶; 能自足於取捨者, 是得江風山月之 受用; 能自足於眼界者, 是得天空海闊之襟懷; 能自足於貧困者, 是得簞瓢陋巷之恬 澹; 能自足於辭受者, 是得茹芝採蕨之清高; 能自足於燕閒者, 是得衡門泌水之靜 逸; 能自足於行藏者, 是得歸雲倦鳥之舒徐; 能自足於倡酬者, 是得一詠一觴之曠 達; 能自足於居處者, 是得五柳三徑之幽閒; 能自足於嬉遊者, 是得浴沂舞雩之瀟 灑. 若此數者, 隨在皆安, 無日不足, 人我無競, 身世兩忘, 自有無窮妙處, 打破多少 塵勞. 奈何捨心地之有余之足, 而抱意外無妄之貪, 果何得哉? 似亦愚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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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일부 문인들은 생계를 위해 상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 하여 명나라 문인 사대부들은 자연히 ‘명리(名利)’에 대해 새롭게 인 식하고 추구하게 되였다. 다시 말해서 전부 배척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앞 다투어 장사하지도 않았다.

이지는 당시 문인

사대부들의 생활추구에 대해여 다음과 같이 적 었다:

후대 자손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음식을 탐하는 모든 사람은 세밀하고 번잡한 마음으로 남모르게 공덕을 쌓거나 떳떳하게 다 른 이에게 은혜를 베푼다. 이는 자손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장만해 주기 위한 욕심이다. 현명한 자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영원할 수 있겠는 가? 만족할 수 있겠는가? "라고 비웃었다. “음식은 몸 밖의 물건이다. 마 음을 힘들게 하여 몸을 섬기다니, 현명한 자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는 다. 게다가 몸까지 피곤하니 자손들을 위해 소와 말이 되겠는가? 이름을 떨치는 것이야말로 대장부가 할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명성을 먹고 사는 사람이다. 이름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이기에 부지런히 추구한 다면 못할 일이 없다. 하지만 이름이 영원히 빛나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어긋나는 것이다. 세상에도 끝이 있거늘 이름이 어찌 영원할 수 있을까?

달관한 자는 “이름과 몸 중에 어느 것이 더 가까운가? 마음으로 몸을 섬기는 것도 멍청하지만, 마음으로 몸 밖의 이름을 추구하는 것이 더 멍 청하지 않는가?” 라고 비웃었다. 즉 이름이 몸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다. 하지만 “병에 걸려 죽어도 이름을 남기다”는 말은 어찌된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익을 쫓지만 현명한 자는 명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명성 으로 유혹하지 않는다면 현명한 자를 속일 수도 없다. 공자는 본심으로 돌아가기를 주장했다. 본심으로 돌아가면 이름 또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자는 사람을 인도하여 교육시키는데 능하다. 하지만 안씨(顔氏) 가 스승의 교육방법을 물려받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공자의 교 육방법은 전해 내려오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22)

22)焚書卷2 答劉方伯書 , pp.53-54: “凡貪此數十世之食飲者所共饑渴而求也.

故或積德於冥冥, 或施報於昭昭, 其用心至繁至密, 其為類至賾至眾. 然皆貪此一口 無窮茶飯以貽後人耳. 而賢者又笑之曰: 此安能久!此又安足云!且夫形骸外矣. 勞 其心以事形骸, 智者不為也, 況複勞其形骸, 以為兒孫作牛馬乎? 男兒生世, 要當立 不朽之名. 是啖名者也. 名既其所食啖之物, 則饑渴以求之, 亦自無所不至矣. 不知 名雖長久, 要與天壤相敝者也. 天地有盡, 則此名亦盡, 安得久乎? 而達者又笑之 曰: 名與身孰親? 夫役此心以奉此身, 已謂之愚矣, 況役此心以求身外之名乎? 然 則名不親於身審矣, 而乃謂 疾沒世而名不稱 者, 又何說也? 蓋眾人之病病在好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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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명리를 추구하면서 당시 문인 사대부들도 명리를 쫓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런 명리추구사상이 머리를 가득 채우게 되면 필 연적으로 인(仁)과 의(義)에 대한 멸시를 초래하게 된다. 그리하여 명 나라 후기의 사대부들은 한창 큰일을 해야 할 시기에 사치스럽고 방탕 한 생활을 하는 것을 풍류를 즐기는 것으로 간주하여 돈을 물 쓰듯 하 고 기생과 놀아나고 술을 마시고 욕설도 퍼부으면서도 ‘명성에 손상이 없다’라고 변명했다. 23)

사대부들이 상인과 교제하는 것도 한때 유행했다. 이일화(李日華)의

味水軒日記

기록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사중순(史仲純)이 안휘에서 온 정(程)씨 손님을 소개시켜주면서 술집으 로 나를 초대하고 함께 원앙호(鴛鴦湖) 중간에 앉아서 광릉(廣陵)의 기생 두 명을 불러 노래도 하고 악기도 연주하였는데 량주(涼州)의 분위기가 느껴졌다.24)

상품경제의 큰 흐름 속에서 문인, 사대부들도 금전의 욕심에 물드는 것은 피할 수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여기서 ‘본심청정설’을 주장하 던 선종사상이 명예와 이익을 따르니 이상할 수 있겠지만, 생활정취에 서 적의는 ‘종욕(縱慾)’과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 선종에서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여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종욕주의 생활정취를 우리 는 선종사상에 입각하여 다음 단락에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Ⅴ. 종욕주의 생활정취

賢者之病病在好名. 苟不以名誘之, 則其言不入. 夫惟漸次導之, 使令歸實, 歸實之 後, 名亦無有, 故曰 夫子善誘 . 然顏氏沒而能知夫子之善誘者亡矣, 故顏子沒而夫 子善誘之術遂窮.”

23) 陳寶良,明代社會生活史(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4), p.41.

24) 明·李日華,味水軒日記(上海: 遠東出版社年, 1996) 卷4,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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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전통문화를 살펴보면 여색과 가무 등 방탕한 생활을 끊을 것을 주장하는 유교든지, 가무와 여색, 미식을 끊을 것을 주장하는 불 교든지, 아니면 주색을 가까이 하거나 재물을 탐하는 등 모든 나쁜 습 관을 끊을 것을 주장하는 도교든지, 종국의 목표는 모두 ‘무욕(無欲)’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25) 본질적으로 말하면, 유교도 쾌락문화(快樂 文化)의 일종에 속하지만 이런 쾌락은 ‘인(仁)’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 고 있기 때문에 큰 책임감에서 근원하는 것이며 또 자신이 아닌 타인 을 위한 것이다.

명나라 시기, 특히 명나라 후기에 들어서 사람들의 관념에서 소위 생활의 즐거움은 일종의 향락주의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향락주의 생 활의 즐거움은 ‘속세의 즐거움(塵世之樂)’과 ‘속세 밖의 즐거움(世外之 樂)’ 두 가지로 나뉜다. 물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명나라 후기 생활은 또 우아한 것과 저속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소위 ‘속(俗)’은 물질적인 향락와 즐거움을 말한다. 반면에 ‘아(雅)’는 정신적인 즐거움을 낙으로 삼는 생활을 말한다. ‘아(雅)’를 추구하는 문인들은 서화작품이나 골동 품을 소장, 감상하고 있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며 감상을 생활취미 로 간주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은 바둑과 악기를 삶의 조미료 로 간주하고 함께 바둑을 두고 악기를 다루는 친구를 ‘지기(知音)’로 대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친구를 불러 명산대천을 유 람하면서 유유하고 편안하며 자연스러운 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26)

명나라 후기 음란한 노래와 곡조는 문인 사대부들에게 있어서 아 주 익숙한 존재였다. 특히 오월(吳越) 일대에서는 학문을 하는 선비들 까지 천한 광대들과도 어울려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27) 친구나 기생과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기생의 노래를 듣는 것이 명나라

25)明代社會生活史, p.39.

26)明代社會生活史, pp.39-40.

27) 明·管志道,從先維俗議(四庫全書存目叢書子部.雜家, 台南: 莊嚴文化事業 股份有限公司, 據天津圖書 藏萬曆30年徐文學刻本) 卷5, 家宴勿張戲樂 , pp.26 下-27下: “甘與俳優下賤為伍, 群飲歡歌, 俾晝作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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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문인 사대부들이 서로 추구하는 생활이 되였다. 이 외에도 자택 에 노래 부르는 기생을 두는 것도 그들의 취미였다. 하량준(何良俊)은 어린 종을 키우며 노래를 연습시키고, 하녀에게 주인을 섬기는 법을 가르쳤다.28)

선종과 심학이 같이 선열의 기풍을 유행시킬 때, 자본주의 생산관계 로 갑자기 상인들의 위치가 높아졌다. 상공업 지주들, 노동 직공자들, 사대부에서 분화되어 나온 지식인들 그들의 가치관과 윤리관념은 기존 과 달랐다. 배금주의 풍조가 관념을 변화시키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청빈하고 고아한 모습을 꾸미지 않고 탐욕으로 돈을 추구하고 사치했 다. 또한 문인

사대부들도 음식과 옷에 대해 완벽함을 요구하였고 또 서로 비교하면서 사치를 자랑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속담에 “백성은 식량을 생존의 근본으로 여기다”라고 했듯이 이런 현상은 음식소비에 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가정형편이 넉넉한 사대부들의 사치는 극도에 달했고 문인과 선비들도 음식의 격식을 중요시하여 일종의 사 회풍기를 형성하였다. 이에 대해 사조제(謝肇淛)는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부자들은 큰 자택에서 산해진미를 먹는다. 남방의 굴, 북방의 곰 발바닥, 동해의 생선, 서쪽의 마유(馬奶)까지 별의별 없는 게 없으며 그야 말로 하늘 아래의 좋은 음식을 집대성 한 셈이다. 한번 연회에 드는 비용 은 중등 수준의 가정에서 모든 재산을 판다 하더라도 그 돈으로는 어림 없다.29)

한 상을 차리는데 천금이 든다는 것은 극단적인 경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반 사대부들도 연회에 은 한 두냥 정도는 소비하였으며 이런 상황은 예전에 보기 드물었다. 이악(李樂)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최근 몇 년간 가흥(嘉兴), 호주(湖州)지역의 사대부들이 군과 읍의 관 리들을 접대할 때 한 상에 은 한 냥을 들여 준비한다고 한다.”30)

28) 明·何良俊,四友齋叢說(北京: 中華書局, 1983) 卷18, p.159.

29) 明·謝肇淛,五雜俎(上海: 上海書店出版社, 2001) 卷11, 物部 3, p.217: “今 之富家巨室, 窮山之珍, 竭水之錯, 南方之蠣房, 北方之熊掌, 東海之鰒炙, 西域之 馬奶, 真昔人所謂富有小四海者, 一宴之費, 竭中家之產, 不能辦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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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도 그들은 음식을 담는 식기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따졌다. 주연에 사용되는 식기는 반드시 정교하고 아름다워야 했으며, 술잔이나 술병 의 경우 금이나 은으로 된 주기보다 오히려 옥으로 된 것을 선호했다.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요리는 어떤 때에 백여 가지나 되었다.31)

명나라 사대부들은 정원과 별장을 짓고 그 안에서 여생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시골의 자택에 눈앞에 펼쳐진 사계절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거나 또는 도시에서 시골과 광야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생활을 동경하였다. 비록 이런 전원 별장을 마련할 만한 재력은 아무 나 갖춘 게 아니지만 명나라 사대부들 사이에는 서로 다투어 본받고 재력을 비기는 풍기가 형성되었다. 특히 숲과 정원이 있는 별장을 건 축하는 붐이 일었는데 극도로 사치했다. 유교의 전통사상에 의하면 거 실은 건조함과 습함을 피하는 곳에 불과하기에 지나치게 장식할 필요 가 없다. 너무 과한 장식은 본분에 넘치고 너무 완벽함을 추구하면 사 치함을 면치 못하므로 진정한 유생이라면 절대 그리 하지 않는다. 그 러나 명나라의 일부 사대부들은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 정원과 별장 을 건설할 때 건축 자재부터 사치한 것으로 골라 사용하였다. 고기원 (顧起元)은 명나라 왕단구(王丹丘)의 建業風俗記 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였다:

가정(嘉靖) 10년 이전에는 예의와 법률을 중히 여겼던 부자들이 집과 음식에 대해 과분하게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 후에는 입고 쓰고 하는 것 과 집 교통도구 〔모두〕사치하여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에 넘 쳤다. 또한 정덕(正德)연간 전에는 집 천장이 낮고 대청은 일반적으로 뒤 편에 떨어져 있었으며 경사가 생겨도 그림을 그리는 방법으로 소박하게 방을 꾸몄을 뿐이다. 그러나 가정 말년에 이르자 사대부들은 물론 백성들 까지도 천금을 들여 방 세 칸을 장식하는 자가 있었다. 그런 방들은 금빛 휘황하고 높은 것이 분위기는 〔마치〕관아(官衙) 같았고 화려한 수준은 30) 明·李樂,續見聞雜記(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86) 卷10, p.829: “近年嘉

湖鄉士大夫宴郡邑官者, 動言客席須銀一兩一桌.”

31)四友齋叢說卷34, 正俗 1, p.314: “另外對於飲食的器皿也是極為講究. 宴會 之物無不講求精美, 至於酒器, 金銀器皿已不是珍貴之物, 反而多追求玉器. 有時請 客菜肴竟然以百來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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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저택도 빛이 바랠 정도였다. 심지어 공연장 안에도 그림을 그려 집안을 장식하는 경우가 많았다.32)

‘종욕주의’ 관념은 사회심리에 변화를 일으키고 사대부에게 직접적 인 영향을 끼쳤다. 내향적인 내심세계에서 방종에 가까운 세속적인 욕 망을 추구하였는데, 이 부분도 정취의 한 겉모습이다. 사대부들의 종욕 생활의 부패성분이 저속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객관적으로 개성 의 자유와 감정의 해방을 고취한 새로운 풍조였다. 생활정취란 본래 자연에서 얻는 것이 깊고, 학문에서 얻는 것이 얕다. 인간이 자연본성 에 순종하고 꾸미거나 감추지 않는 마음이 바로 ‘동심(童心)’이다. 동심 을 통해 자아를 드러내고 개성을 과시하는 풍조가 성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대부들이 지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아하고 세속에 물 들지 않은 생활이기 때문에 사치를 숭상하는 풍기 속에서도 명나라 사 대부들의 생활정취는 다시 변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다시 말하면 사대 부들은 그래도 선비이기에 일반인과는 어느 정도 차이를 보였으며 그 차이가 바로 그들의 생활에는 서재(書齋)가 있다는 것이다. 서재를 생 활의 중요한 장소로 여겼으며 서적, 그림, 대나무, 고목과 꽃으로 장식 하였다. 정신과 물질의 합일로 사대부들은 예술생활을 지향했는데, 서 화를 즐기면서 정신적인 향락과 자아를 추구했다.

Ⅵ. 세속적 생활과 예술정취

32) 明·顧起元,客座贅語(北京: 中華書局, 1997) 卷5, 建業風俗記 , p.170: “嘉 靖十年以前, 富厚之家, 多謹禮法, 居室不敢淫, 飲食不敢過 後遂肆然無忌, 服飾 器用, 宮室車馬, 僭擬不可言. 又云正德已前, 房屋矮小, 廳堂多在後面, 或有好事 者, 畫以羅木, 皆樸素渾堅不淫.嘉靖末年, 士大夫家不必言, 至於百姓有三間客廳費 千金者, 金碧輝煌, 高聳過倍, 往往重簷獸脊如官衙然, 園囿僭擬公侯. 下至勾闌之 中, 亦多畫屋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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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때 사회생산이 발전하고 상업이 번영하면서 사람들은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데로부터 풍요로운 생활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이런 변화는 물질적 수요가 충족된 후 정신적 생활을 영위하려는 안일하고 여유로운 삶에 대한 추구에서 실현된다. 예전에 사람들은 “문을 열고 나가면 쌀, 기름, 소금, 간장, 식초, 장작과 차 등 일곱 가지부터 사야 한다(開門七件事, 柴米油鹽醬醋茶)”(비록 일상생활에서 이것들이 여전 히 중요하지만 명나라 사람들, 특히 사대부들의 생활에는 일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던 것이 이젠 “문을 열고 나가면 농담, 곡조감상, 유람, 바둑, 명품소장(서적, 골동품, 장난감), 기생과 꽃·벌레·물고기·새 이런 일곱 가지부터 해야 한다(新開門七件事)”는 것으로 완전히 바뀌었다.33) 이러한 생활은 반드시 물질적 수요가 충족된 후에야 가능하며 그 누가 이런 세속적인 것을 떠나 살 수 있겠는가? 이지가 答劉方伯書 에서 말했듯이 “이는 배고픔과 갈증과 같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고 싶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싶다. 이 세상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생각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34) 그렇다면, 고상하고 우아한 예술정 취는 어떻게 세속적 생활과 공존할 수 있겠는가? 사대부들이 부유한 삶을 살면서 정신적으로 예술에 의존하는 즉 수준 높은 정서와 사치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골동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귀할수록 더 비싼 게 일반적인데 명나 라에 와서는 당대 작품을 감상하는 ‘시완(時玩)’ 현상이 나타났다. 명나 라 때 성행했던 ‘시완’은 상당히 주목받았으며 특히 많은 소장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선덕(宣德)연간의 동기(銅器), 성화(成化)연간의 도자기 는 물론 당인(唐寅), 심주(沈周) 등 명나라의 서화가들의 그림과 문징 명, 축윤명(祝允明)등 서화가들의 서예작품도 당시 소장가들 중에서 아 주 인기 있는 ‘시완’이었다.35) 이일화는 스스로 만력(萬曆) 연간 초기 의 요진언자(窯真言字) 찻잔 두 개를 샀는데 정말 아담하고 정교하여 33)明代社會生活史, p.46,

34)焚書卷2, 答劉方伯書 , p.53.

35) 明·沈德潛,萬曆野獲編(北京: 中華書局, 1997) 卷26, 時玩 , p.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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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하기 좋았다고 밝혔다.36) 이는 같은 시기의 작품일지라도 정교하 고 우아(精雅)하기만 하다면 충분히 문인 사대부들이 유희대상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화작품의 감상은 언제나 조용하고 깨끗한 환경을 전제로 한다.

‘창문이 밝고 깨끗한 방(明窗淨室)’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면 그야 말로 인생의 큰 즐거움인 동시에 선의(禪意)도 느껴진다. 왕조운(王兆 雲)은 자신의 감상생활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고대의 정(鼎), 송나라의 벼루, 소나무와 시냇물의 소리. 주인은 말도 잘하고 시도 잘 쓴다. 문승(門僧)이 차를 끓이고 소주(蘇州)사람이 술을 가져오며 손님이 활짝 핀 꽃을 그리고 있고 반가운 친구가 찾아와 책을 베껴 쓴다. 밤이 깊어 종소리가 들려올 때 아내와 첩과 함께 이야기를 나 눈다.37)

문인들에게 있어 골동품은 생활의 조미료이며 또한 정신적인 기탁 일 때도 있다. 많은 문인

사대부들은 평소에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 인 것으로 자신을 보완하였는데 서화

골동품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인 힘이 되었다. "목영로(木癭爐), 왕우군(王右軍)의 반월첩(月半 帖) 진적, 오도자(吳道子)의 관음변상도(觀音變相圖), 송나라판 화엄경 존숙어록(華嚴經尊宿語錄)과 같은 서화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면 몸이 아픈들 뭐가 대수인가? 침대 하나 크기의 작은 방에서 친구와 마주앉 아, 조용하게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함께 이런 서화 진적을 감 상한다면 장안(長安)의 행인이 어찌 이 정취를 알 수 있을까? “38) 문 인

사대부들이 소장한 작품에

觀音變相圖

나 화엄경과 같이 선종과 관련된 진적도 있었다.

‘감상’과정은 마음을 통해서 관조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이는 선종 36)味水軒日記卷1, p.36: “購得萬曆初窯真言字茶杯二隻, 甚精雅可玩.”

37) 明·王兆雲,白醉璅言(筆記小說大觀, 景刊本, 37編) 卷上, 花快意與折辱 , pp.54下-55上: “古鼎 宋研松濤溪聲主人好事能詩, 門僧解烹茶, 蘇州人送 酒, 座客工畫, 花卉盛開, 快心友臨門, 手抄藝花書, 夜深鑪鳴, 妻妾校花故實.”

38) 明·董其昌,畫禪室隨筆(觀賞彙錄上, 台北: 世界書局, 1988), 記事 . p.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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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사유방식으로 마음의 흐트러짐을 막고 물아일체의 경지에 도달하는 직각체험으로 감상자와 작가의 정감을 교류하게 한다.

선종 남북종론의 영향을 받은 동기창은 문인산수화도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으로 나누었다. 그는 왕유(王維)를 대표로 한 남종 화가들이 사용한 ‘선담기법’의 안정되고 시원한 화법과 풍격이 자유분방하여 자 연과 조화를 이루는 창작, 그리고 산과 물을 그리는 자연스러운 분위 기를 좋아했다. 그 외, 문인화는 ‘풍골(風骨)’과 ‘기운생동(氣韻生動)’을 중요시하였다. 문징명은 題石田先生畫 에서 “옛 사람들은 그림을 논 할 때 기골(氣骨)을 제일 중요시하였는데 [스승님]의 그림이야말로 진 정 기백이 넘친다.(古人論畫貴氣骨, 先生老筆開嶙峋)”고 하였다. 39) 여 기에서 화가인 문징명은 기골을 매우 중요시 하였으며 문징명의 스승 인 심주(沈周)는 ‘기백있는 조필(粗筆)’로 기골을 잘 표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계유(陳繼儒)는 ‘풍골(風骨)’과 ‘기운생동(氣韻生動)’을 중 요시하는 두 사람의 회화기법을 높이 찬양하면서 동기창에게 이렇게 감탄하였다:

그림에 생기와 운치를 그려 넣는 것이 바로 진정한 대가이다. 문징명 과 심주의 그림은 문민(文敏)과 백구(伯駒)가 크게 한번 다툰 뒤로 기운 이 많이 약해졌다. 당신은 고상하고 우아한 그림으로 높은 위치에 올랐는 데 고대의 명화가와 비슷하다. 내가 볼 때, 당신의 그림은 문징명과 심주 의 그림보다 가치가 더 높다.40)

따라서 진계유는 동기창의 그림이 ‘고아(古雅)’ 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기골’도 보이는데 대해 너무 즐거워했다.

문인과 사대부들이 자연스러운 기운과 풍골을 떠받들기 시작하면서 유행이 형성되면 또 필연적으로 이름 없는 화가들이 대가를 모방하는

39)文徵明集卷4, 題石田先生畫 , p.61.

40)陳眉公集,卷12, 寄董玄宰 , p.170: “今氣韻生色而複不廢精征如, 此乃真大 家. 文沈之筆, 自文敏 伯駒血戰而氣衰矣. 兄位置古雅見之, 宛然耆舊. 吾看其價 必在石田徵仲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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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한다. 동기창은

畫訣

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 였다.

그림은 한쪽에서부터 그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이 기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림에 교묘함이 없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려면 이 기법을 사용하여야 그림이 완벽해질 수 있다. 다음으로 실제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을 잘 표현해야 한다. 실제적인 것은 상세하게 그려야 한다. 상세한 부 분이 있으면 생략해야 하는 부분도 있기 마련이기에 이 두 가지를 잘 다 루어야 한다. 너무 간략하게 그리면 심오하지 않고 너무 세밀하게 그리면 운치가 사라지기에 허와 실을 잘 판단하고 선택하여 그린다면 그림은 자 연스러워지니 신기하다.41)

그외, 문징명도 題石田先生畫 에서 이렇게 밝혔다.

요즘 일반 화가들이 대가의 그림을 모방하여 하룻밤 사이에 그림 한 폭을 그려내려고 안달이다. 이에 선생은 화내지도 나무라지도 않으시고 그저 자신의 정취에 만족할 뿐이다. 사실 그들은 그림에 경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어떤 경지는 색깔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도 모른다. 그런 평범한 자들이 제멋대로 그림을 그려 서로 비교하는 와중에 당신의 그림 은 그야말로 군계일학이다. ……그림이 신비로운 경지에 도달하니 고대 명인이 그렸다고 한들 누가 믿지 않겠는가? 42)

예술적 경지(意境)는 명나라 회화가 최고 경지가 아니지만, 선종사상의 영향아래, 문인 사대부들이 선종사상을 받아들였고 창작하는 과정에 서 자연을 중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림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그려야 하며 속세의 사람은 단지 그림속의 조연(助演)일 뿐이다.

산수화를 그릴 때, 먼저 마음속으로 이미지들을 잘 생각하고 나서 큰 틀을 그린 다음 우물, 나무, 집, 사람 등을 추가하면 된다. 자연스럽게 그 41)畫禪室隨筆, 畵訣 . p.484: “古人畫, 不從一邊生去. 今則失此意, 故無八面玲

瓏之巧, 然作畫則需皴法足以發之, 是了手時事也. 其次, 須明虛實. 實者, 各段中 用筆之詳略也. 有詳處必要有略處, 實虛互用. 疏則不深邃, 密則不風韻, 但審虛實, 以意取之, 畫自奇矣.”

42)文徵明集卷4, 題石田先生畫 , p.61: “近來俗手工摹擬, 一圖朝出暮白紙, 先 生不辯亦不嗔, 自謂適情聊複爾. 其實這些俗工們豈知中有三昧在, 可以意傳非色 取. 庸工惡劄競投集, 鳳凰一出山雞糜. ···神完意到輕千年, 題作古人誰不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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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되 일부러 꾸민 흔적이 안 보인다면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43)

문인, 사대부들은 마음속의 안정과 편안하고 담백한 생활정취를 추 구하였다. 그리하여 산수화에 그려진 적막하고 조용한 산, 깊숙한 산 림, 우불구불한 골짜기 사이의 시냇물 등 이미지는 적의하면서 담백한 생활정취를 추구하는 문인, 사대부들의 마음에 꼭 와 닿았던 것이다.

그 외에 이런 ‘자연의 조화를 따르는’ 창작기법은 선종에서 중요시하는

‘직감의 관조’와도 잘 매치된다.44) 따라서 문인, 사대부들은 그림속의 자연경물을 보는 사람들이 어떤 상상을 할지에 대해 주목하면서 내면 의 감정을 그림 속 자연경치 속에 잘 담았다.

이처럼 명나라 문인 사대부들이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예술적 경 지도 즐기는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한 폭의 강남춘경도(江南春景圖) 만 해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

비가 그친 강남은 봄 버드나무가 파랗고, 구불구불한 강 위에는 안개 가 걷혔으며 향기로운 새싹과 화사한 복숭아꽃은 여기저기 도처에 피었 다. 강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노인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하루 종일 앉 아있는 것이 아니다.45)

예술적 경지 이외에 그림에 표현된 ‘산거(山居)’정서 또한 필연적으 로 화가들의 공명을 이끌어냈다. 문인들은 서로 상대방의 서화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 회화작품에 시를 쓰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림 에서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경지와 시구의 문자를 통해 떠오르는 상상 이 서로 보완되면서 그림과 시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일화(李日華) 의

味水軒日記

에서 이런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43) 明·李日華,竹嬾畫媵(美術叢書, 台北: 藝文印書管, 1975), 2集 第2輯, 與張甥伯始圖扇題 , p.175: “今在項弘甫處, 大都畫法以布置意像為第一, 然亦止是 大概耳. 及其運筆後, 雪泉 樹石屋舍人物, 逐一因其自然而為之. 所謂筆到意 生, 如漁父入桃源, 漸逢佳境. 初意不至是也, 乃為畫家三昧.”

44)禪宗與中國文化, p.144.

45)文徵明集卷5, 題漁隱圖 , p89: “江南雨收春柳綠, 碧煙斂盡春江曲. 十裡蒲 芽斷渚香, 千尺桃花春水足. 溪翁鎮日臨清渠, 坐弄長竿不為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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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蘇州)의 진숙라(陳叔裸)는 왕숙명(王叔明)에게

山居圖

를 보여주 면서 말했다. 신추년 시월, 문징명이 그린 이 그림은 산이 웅장하고 수려 하며 대나무가 빼곡하고 무성하며 강가의 모래밭이 눈부시다. 노인 한 분 이 정자에 앉아 있고 그 위로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또 다른 노인 한분이 느린 걸음으로 다리를 건너고 있고 주변에는 소나무가 푸르고 싱 싱하게 자라고 있다. 산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고 사립문은 대나무를 향해 활짝 열려있다. 이는

秋山草堂

이라는 그림과 함께 회화작품의 쌍 벽을 이룬다.46)

이처럼 풍격이 남다르고 쉽게 따라할 수 없는 그림이야말로 문인 사 대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회화작품은 일반적으로 산수풍경이나 은거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다.

고대의 문인들은 마음속에 품은 뜻을 이루지 못할 때 어부로 살든지 나무꾼으로 살든지 은둔하여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다만 자신의 정 취와 지향(志向)을 언어의 운율이 있으나 소리가 없는 시(有韻語無聲 詩)로 표현하였기에 시와 그림을 통해 그런 문인들의 감정과 처지를 엿볼 수 있다. 한편, 문인

사대부들이 천하고 점잖지 못한 사람처럼 등을 구부리고 물고기를 잡는가 하면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캐고 작은 일도 시시콜콜 따지면서 자유자재한 편안함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참 가소롭다47) 하겠지만 그것 또한 자연의 정취라고 여겼다.

사대부들이 회화작품에서 추구하였던 자연스럽고 밝고 탁 트인 담 백한 심미적 경지는 생활 속에서도 체현되는데 바로 회화작품을 통해 얻고자 하는 안정되고 초탈한 생활정취이다. 또한 문인과 사대부들은 진정으로 고상하고 성품이 우아한 사람에게 그림을 잘 선사하지만 그 런 사람이 아닐 경우 아예 그림을 그리지도 않는다. 진계유는 題董玄

46)味水軒日記卷1, p.51, “蘇州陳叔裸寄示王叔明山居圖, 款云: 至正辛醜十月 念日, 為古愚徵君寫. 山巒雄秀, 前崗竹樹繁密, 後浦沙渚明媚. 一老兀坐茅亭, 飛 泉正灑其上. 一老緩步平橋, 古松偃仰其側. 徑路鑿山而紆, 柴門映竹而敞. 此幅大 經營構來, 與余所收秋山草堂, 可稱雙璧.”

47) 明·沈顥,畫麈(美術叢書, 台北: 藝文印書管, 1975) 初集 第5輯, p.36, “作 箇穢夫傖父, 傴僂於釣絲, 戚施於樵斧, 略無坦適自得之致, 令識者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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宰畫 에서 “현재(玄宰)는 장안에 거주하면서 덕망이 높은 스님이나 성 품이 고상하고 세속을 떠나 은거하는 사람 외의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 림 한 점도 그려주지 않았다.”라고 서술하고 있다.48) 이처럼 고상하고 우아한 품격을 지닌 승려나 사람만이 회화작품을 선사받을 수 있었다.

사대부들이 선을 통해 예술정취에서 의식적으로 ‘의(意)’를 강조하고 표현하였으며, 남종화나 서화작품에서 자유스러움을 중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간결하고 함축미 있는 표현방식을 통해 선종의 선의(禪意)도 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Ⅶ. 맺음말

명나라 문인 사대부들의 인생관이 변화함에 따라 그들의 생활정취 도 크게 변화하였다. 사회경제와 시민사조(市民思潮)등 여러 가지 사 회요소의 영향아래 선종이 명나라 사대부들에게 미친 영향은 비교적 복잡한 양상을 보였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그들은 어디까지나 ‘선의(禪 意)’가 내포되어있는 적의(適意)하고 청아(清雅)한 정취가 있는 생활을 주로 하였으며 그 다음으로 종욕주의 생활정취를 추구하였다. 명나라 후기에 ‘광선(狂禪)’풍조가 성행하면서, 심지어 예의와 법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아중심의 개성을 방임하는 생활을 추구하였다. 문인과 사대 부들을 곧 사치문화를 규제하고 바로잡아 주었으며, 여전히 자연 담백 하고 자유자적한 삶을 최고의 생활목표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본고에 서는 선종사상과 생활정취를 연계하여 문인사대부들의 생활양상을 고 찰하였다.

첫째, 사대부들은 자연을 추구하는 생활정취에서 ‘적의’를 추구하였 는데, 자연을 통해 공허함을 만족시키고 정신적 자아해탈을 꿈꾸며 청 48)陳眉公集卷11, 題董玄宰畫 , p.160, “宰居長安, 不肯向人作一水一石, 惟高

僧逸民狎得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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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담백한 생활을 수행하고 즐겼다. 이는 불교의 금욕주의에서 현실을 도피한 생활정취이다.

둘째, 상품경제의 큰 흐름 속에서 ‘본심청정설’을 주장하던 선종사상 이 명예와 이익을 따르니 이상할 수 있겠지만, 생활정취에서 ‘적의’는

‘종욕(縱慾)’과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 선종에서는 마음이 가장 중요 하여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니 이 또한 자연스러우며 선의에 부합되 는 ‘정취’의 한 모습이다.

셋째, 종욕주의 관념은 사회심리에 변화를 일으키고 부패성분이 저 속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객관적으로 개성의 자유와 감정의 해방 을 고취한 새로운 풍조였다. ‘동심(童心)’을 통해 자아를 드러내고 개성 을 과시하는 풍조가 성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넷째, 사대부들은 예술정취에서 ‘뜻(意)’을 강조하고, 남종화나 서화 예술품에서 자유스러움을 중시하였으며 간결하고 함축미 있는 표현방 식을 통해 선종의 ‘선의(禪意)’도 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정취는 비교적 복잡하며 그런 관념과 정취를 형성하는 원인 또한 아주 여러 가지가 있다. 다만 선종이 명나라 사대부들에게 미친 영향을 일정한 시각에서 고찰해 보 고자 하였으며, 따라서 그 분석결과는 일부에 불과하여 명나라 문인의 생활정취를 전반적으로 파악하기에는 부족한 상황이다. 일부 분야에 한해서만 현상에 대한 간단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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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提要)

明代士大夫的生活情趣與禪宗思想

金 炫 廷

生活情趣就是指人們在生活中所追求的志趣 志向或情調趣味. 它可以 反映一個人對生活的追求. 但是生活情趣有高雅

低俗之分. 高雅的生活情 趣會讓人以積極

樂觀的生活態度; 而低俗的生活情趣則會讓人因貪圖享 樂而不思進取.

禪宗作為一種人生哲學, 它在中國的發展, 是一個從禁欲到適意, 再從 適意到縱欲的演進過程, 而且這一過程的確對士大夫的人生哲學和生活情 趣產生了種種影響. 但總的來說, 後半過程就沒有前半過程的影響更深刻

更廣泛, 它僅僅局限在明代中後期那短短的幾十年的思想解放運動中. 因此 禪宗在士大夫那裏留下的主要還是追求自我精神解脫為核心的適意人生哲 學與自然澹泊

清淨高雅的生活情趣. 由於明代社會經濟的發展, 城市經 濟

資本主義萌芽的成長發展, 市民階層不斷擴大, 這使得當時的社會心理 也產生了較大的變化. 此時士大夫的心理性格也有了較為明顯的變化. 因 此, 明代禪宗的影響與前代不同, 人們接受了它強調 本心

尊重個性的理 論.

正因為明代中後期禪宗發展及其對士大夫影響在歷史上的特殊性, 因此 本文欲從生活史等角度, 探討明代, 特別是明代中晚期禪宗思想在士大夫生 活情趣中的影響. 又因禪宗思想活躍的地區多集中在江南一帶, 因此本文的 討論也將以江南為中心.

주제어: 명. 사대부. 문인. 선종. 생활. 정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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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鍵詞: 明. 士大夫. 文人. 禪宗. 生活. 情趣

Keywords: Ming dynasty, scholar, literary, Zen buddhism, life, delinght of life, taste of life

(원고접수: 2013년 9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0월 14일, 수정 원고 접수: 10월 21일, 게재 확정: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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