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雍正-乾隆年間 莽牛哨 事件과 淸-朝鮮 國境地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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雍正-乾隆年間 莽牛哨 事件과 淸-朝鮮 國境地帶

金 宣 旼 (高麗大)

*1)

Ⅰ. 머리말

Ⅱ. 국경지대의 양상

Ⅲ. 盛京將軍과 莽牛哨

Ⅳ. 조선의 변경인식

Ⅴ. 맺음말

Ⅰ. 머리말

明 萬曆20년(朝鮮 宣祖 25년, 1592년) 누르하치가 막 建州 여진을 통 일하고 퍼알라(Fe Ala, 興京)에 근거하고 있을 당시, 그 휘하의 여진인 들이 조선 영내에서 인삼을 캐다가 붙잡혀 머리가 베이고 가죽이 벗겨 지는 처벌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분개한 누르하치가 조선 병사의 가혹행위에 항의하자 선조는 “천하의 封疆은 분명히 나뉘어 있는 것이 며 天朝[명]의 허락 없이는 조선과 여진은 사사로이 통할 수 없다”는 뜻으로 夷狄을 다스리고자 했다. 3년 후 조선의 鄕通事 河世國이 명의 관리와 함께 퍼알라를 방문했을 때 누르하치는 명의 龍虎將軍이 되어 있었다. 명과 조선의 방문객을 맞이한 누르하치는 “명이 조선을 宣諭 하였음을 고려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로 하고 소를 잡아 이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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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후대했다.1)

後金 天總2년(조선 仁祖6년, 1628년) 부친을 이어 후금의 칸에 등극 한 홍타이지는 조선인들이 후금 영내를 침입하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그는 “양국의 인민이 사사 로이 경계를 넘어 수렵하는 것은 마땅히 엄금하여 멋대로 행동하고 사 단을 일으키게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듬해 후금 경내에 서 인삼을 채취한 조선인 두 사람은 서울로 압송되어 후금 사신이 보 는 앞에서 참수되었다. 이어 홍타이지는 조선인의 범월과 불법채삼을 근절하기 위해서 범월 당사자 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의 관리까지 처벌 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淸 崇德 元年(인조14년, 1636년) 이후에는 청의 영내에서 불법채삼한 조선인은 압록강변에서 효시되고 해당 지역 관원은 혁직 또는 유배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2)

康熙24년(肅宗11년, 1685년) 조선인들이 압록강을 건너 청 영내에서 인삼을 캐다가 三道溝에서 지리 측량을 하고 있던 청의 관리를 조총으 로 쏘아 상해를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희제는 사건의 책임을 추 궁하여 숙종에게 罰銀 2만량을 바치도록 명령했다.3)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을 조사하도록 지시하고 강희51년(숙종 38년, 1712년) 마침내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조선은 이후 정계비가 두만강의 수원을 잘못 비정하고 있음을 발견했으나, 이후 양국 어느 쪽도 다시 경계를 명확히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4)

16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청과 조선 사이에서 발생한 이 범 월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상황이 중첩되고 있음을 고 1) 선조실록 권28, 25a (선조25/7/26);선조실록 권66, 8b (선조28/8/13).

2) 홍타이지 시기 후금과 조선의 범월문제는 김선민, 인삼과 강역: 후금-청의 강 역인식과 대외관계의 변화 (명청사연구 30) 참조.

3) 三道溝 사건의 전말은 이홍렬, 三道溝 사건과 그 先後策 (백산서당 5, 1968.12); 이화자, 朝淸國境問題硏究 (서울: 집문당, 2008), pp.91-108 참조.

4) 백두산 정계비 설치에 관한 대표적 연구는 조광, 조선후기의 변경의식 (백 산학보 16, 1974);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경세원, 2000);

안드레 슈미드 저, 정여울 역,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 (휴머니스트, 2007); 이화자, 앞의 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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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할 필요가 있다. 첫째, 위의 사건들은 변경의 만주족이 흥기하여 제 국으로 팽창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6세기 말 누르하치는 명으로부터 받은 용호장군의 직함을 이용해 명과의 호시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여 부를 축적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기반을 구축해갔다. 그 러나 이후 명의 권위가 보호가 아닌 간섭으로 작용하자 그는 후금을 건국하여 명군과 싸우며 요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초 누르 하치를 계승한 홍타이지는 여진 전통의 부족적 분권통치를 타파하고 칸 일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킨 후 내몽골로 진출하여 차하르 부를 복속 시킴으로써 大淸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홍타이지는 만주족·

몽골족·한족 왕공들의 추대를 받아 대청의 황제로 등극했지만 청이 중 원으로 진입한 것은 그의 사후인 順治 元年(1644년)이었다. 홍타이지의 대청은 강희·옹정·건륭년간을 거쳐 청 제국으로 팽창해갔다. 17세기 말 강희제는 三蕃의 난을 진압하고 대만의 鄭成功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중국 내지의 통일을 완수했고, 옹정제가 이룬 內治의 성과를 바탕으로 18세기 중반 건륭제가 신강 복속에 성공함으로써 청 제국의 판도는 최 대로 확장되었다.5)

둘째, 위에서 언급한 범월사건들은 여진족의 후금이 만주족의 청으 로 발전하면서 조선과 여진의 상하관계 역시 청과 조선의 사대관계로 변화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16세기 말까지 조선과 여진의 관계는 ‘人臣無外交’의 원칙 하에 명을 매개로 이루어졌고 독자적인 관 계를 맺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진에게 事大를 종용했고 이들을 藩籬·藩屛으로 거느림으로써 명 중심의 중화 질서 속에서 이와 유사한 형태로 조선-여진간의 “중층적” 복속관계를 형성했다.6) 여진을 열등한 야만 부족으로 여기는 인식은 앞서 소개한 5) 16세기에서 17세기 말까지 후금에서 청으로의 발전과정에 대한 개설적 설명으 로는 Pamela Crossley, The Manchus (Blackwell Publisher, 1997); 이시바시 다카오 저, 홍성구 역, 대청제국 1616-1799 (휴머니스트, 2009)이 유용하다.

6) 정다함은 야인과 대마도에 대한 조선의 경차관의 파견을 분석하여, 조선이 명 의 대외정책 모델을 여진과 대마도 정책에 적용하여 “중층적” 臣屬관계를 이 루었다고 논증한 바 있다. 朝鮮初期 野人과 對馬島에 대한 藩籬·藩屛 認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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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처럼 조선병사의 여진 불법채삼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조선과 여진의 갈등이 명의 중재로 해결되었 다는 것은 16세기 말까지 명 중심의 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 음을 의미했다. 조선 지배층의 성리학적 가치관과 조선왕조의 “再造之 恩”에 대한 신념은 명에 대한 事大를 조선의 절대적인 지배 이데올로 기로 만들었다. 내외적으로 對明 事大는 조선의 일관된 원칙이었다.7)

그러나 후금의 건국은 명-조선-여진의 중층적 복속관계에 균열을 일으켰고 뒤이어 계속된 후금의 도전은 명과 조선의 사대관계까지 위 협하기 시작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의 대명 사대에 끊임없이 도전했고 군사정벌을 통해 이를 전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앞서 소개한 조선인 범 월 문제는 홍타이지가 조선을 위협하고 굴복시키기 위해 범월문제를 정치적으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누르하치 시기의 건주 여진이 인삼 을 찾다가 조선 영내를 침범한 것처럼 홍타이지 시기의 조선인 역시 인삼을 찾다가 후금 땅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단순 한 월경사건이 아니었다. 홍타이지에게 조선인의 인삼채취는 불법적인 범월이자 후금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궁 극적으로 조선의 대명 사대를 끊어야 했고, 결국 조선은 두 차례의 전 쟁 끝에 청과 조공관계를 맺었다.8)

숭덕원년(1636년)에 시작된 청-조선의 조공관계가 19세기 말까지 유 지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공과 책봉의 관행이나 조선사행의 북경방문이 계속되었다고 해서 현안의 처리방식이나 상호인식에 변화 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홍타이지가 조선을 정벌한 이래 청과 조선의 관계는 줄곧 경색되어 있었고, 이러한 긴장관계는 강희제가 중 국 내지의 통일을 완수할 때까지도 대체로 지속되었다. 청에서 삼번의

형성과 敬差官의 파견 (東方學志 141, 2008), p.256.

7) 조선의 대명 사대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대표적인 최근 연구는 계승 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2009).

8) 후금-청 시기 조선과의 관계에 대한 대표적인 최근 연구는 한명기, 정묘·병 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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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반청의식에 사로잡힌 조선조정을 자극했고, 조선의 불온한 움직임은 청 조정에서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9) 17 세기 후반 조선에 대한 청의 불신과 의혹은 조선인 범월사건의 처리과 정에 잘 드러난다. 앞서 소개했듯이 범월한 조선인이 청의 관리에게 상해를 입힌 일과 관련하여 강희제가 전례없이 조선국왕에게 벌은이라 는 조치를 내린 것은 조선에게 상당한 응징을 가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10) 그러나 18세기 초 백두산 정계비 설치 당시 조선에 대 한 강희제의 태도는 과거와 같이 강경하게 번국을 통제하려는 상국 황 제의 모습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조부인 홍타이지와 비교할 때 강희제 의 대조선 정책은 매우 유화적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 내지의 통일에 성공하고 청의 중원 통치가 안정적으로 실시됨에 따른 자신감의 표현 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홍타이지의 강경책이나 강희제의 유화책은 모두 상국의 권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는 점이다. 중원과 조선의 관계는 명에서 청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의 변화나 부침과는 무관하게 늘 조공관계의 외피를 쓰고 있었다.

9) 이화자, 앞의 책, pp.75-80. 삼번의 난 당시 조선조정에는 청조의 패망에 대한 기대가 팽배했고, 이는 조선사행을 자주 접하는 만주인 예부시랑 뿐만 아니라 황제조차도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삼번의 난이 진압된 후 청은 조선조정 이 올린 외교문서가 격식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조선국왕에게 罰銀 을 부과했다. 夫馬進에 따르면 강희년간의 이른바 ‘외교문서 違式 사건’은 중국 이 조선을 다스리거나 견제하고자 할 때 사용된 방법으로, 14세기 말 명 초기 부터 조선과의 관계에서 이미 여러 차례 등장하였다. 夫馬進, 明淸中國の對朝 鮮外交における 禮 と 問罪 (中國東アジア外交交流史の硏究, 京都: 京都大 學學術出版會, 2007), pp.340-346.

10) 강희제의 벌은에 대해 이화자는 “이는 삼번의 난 당시 조선의 태도에 대한 응징이라기 보다 월경 행위에 대한 응징”으로 파악한다. 이화자, 앞의 책, 103 쪽. 한편 김경록은 명대에는 조선인과 조선국왕에게 벌은을 부과한 사례가 없 었던 사실에 주목하여 강희제의 벌은은 청이 조선을 “독립된 번국으로 인정하 면서도 직접적인 통치의 영역의 일부로 인식”했다고 파악한다. 김경록, 조선 의 대청관계 인식과 외교체계 (이화사학연구 37), p.157. 강희제의 벌은에 대한 이화자의 평가는 다소 약하고, 김경록의 평가는 다소 과하다는 인상이다.

강희제는 조선에게 벌금을 납부하게 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상국의 힘과 권위 를 과시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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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세기 청의 중국지배가 안정되어 가면서 청과 조선의 관계 는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는지 파악하기 위해 옹정-건륭년간에 양국의 외교현안으로 등장했던 망우초 수로초소 설치 시도에 주목한 다. 압록강에 위치한 망우초라는 섬을 누가,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둘러싼 청 황제, 성경장군, 북경의 신료들, 그리고 조선국왕과 조선의 신료들이 주고받은 대화는 동문휘고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 문휘고는 정조8년(1784년) 왕명에 따라 인조 이후 고종18년(1881년)까 지 조선이 청·일본과 주고받은 사대-교린에 관한 외교문서를 정리한 것으로 1978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영인되었는데, 이 가운데 일부가 표점·번역되어 국역 同文彙考 疆界 史料 와 국역 同文彙考 犯 越 史料 1으로 출판되었다.11) 동문휘고에 실린 지방관리의 보고와

淸實錄과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중앙의 논의과정을 함께 검토함 으로써 18세기 중반 청과 조선의 상호인식과 변경인식을 이해할 수 있 을 것으로 기대한다.

Ⅱ. 국경지대의 양상

17세기 말까지 청과 조선 사이에서 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조선 인이 청의 영내로 침범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초에 이르러는 청인들이 조선과의 국경지대에 출몰하는 일에 대한 보고도 잦아졌다.

청인들이 조선 영내를 침입하는 것은 대체로 인삼 채취와 관련된 경우 가 많았다. 숙종33년(1707년) 청인 채삼자들이 평안도로 건너와 파수졸 을 붙잡아 가고 魚鹽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했다.12) 청인 채삼인들이

11) 배우성·구범진 역, 국역同文彙考 疆界 史料 (동북아역사재단, 2008); 구범 진·배우성 역, 국역 同文彙考 犯越 史料 1 (동북아역사재단, 2008). 망우초 수로초소 설치에 본고의 분석은 국역 同文彙考 疆界 史料에 크게 힘입었 다. 이하 본문에서는 이를 국역 강계 사료로 약칭한다.

12) 사건 발생 당시 조선조정에서는 범월인들이 봉황성에서 보낸 채삼인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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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에서 인삼을 채취하다가 조선 영내에 들어와 민가에 침입하는 경 우도 있었다. 숙종37년(1711년) 咸鏡觀察使 李善溥의 보고에 따르면 청 인 10여명이 갑산의 古雲籠 일대에 장막을 치고 거주하면서 민가에까 지 들어오는 일이 발생했다. 조선인 파수꾼이 이들을 붙잡아 심문하자 청인 범월자들은 자신들이 합법적인 蔘票를 지닌 採蔘人이라고 주장했 다. “저희들은 심양 사람으로 공문을 가지고 삼을 캐다가 방향을 잃고 백두산 일대를 헤매다가 이곳에 이르렀습니다.”13) 이들이 정말로 성경 장군으로부터 합법적인 채삼 허가를 받았는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당 시 청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조선과의 국경지대에 출입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숙종40년(1714년)에는 청인 수렵꾼들이 평안도 理山의 강변에 침입 하여 파수꾼을 납치하고 식량과 소금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4) 이 무렵 조선조정은 청인들이 국경지대에 출몰하는 일이 잦아지는 것 을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고 청조에 보다 적극적인 범월 방지책을 마련 해 줄 것을 요구했다.

上國人들은 사냥과 채삼을 위해 왕래할 때 수십 혹은 수백명씩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겨울이 되면 사냥하고 봄이 되면 채삼하며, 장막을 치고 둔거하며 오랫동안 머무릅니다. 가진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돕는다(有無相

사실 때문에 사건이 발생했다는 자문을 아예 청에 보내지 못했다. 봉황성은 조 선사행의 출입을 관리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만약 봉황성 성수위가 조선조정에 불만을 품게 되면 결국 조선 사행에게 불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 때 문이었다. 숙종실록 권45, 32b (숙종33/7/20).

13) 숙종실록 권50, 44b (숙종37/7/30). 이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조정에서는 이 번 기회에 범월금지를 위한 강경한 조치를 청조에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 기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조선인 李萬枝의 범월사건을 조사하고 백두산 일대를 탐사하기 위해 파견된 목극동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청으로 돌아간 직후 였다. 만약 조선이 범월 방지책을 요구하면 청에서 이를 구실로 다시 백두산 탐사를 시작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었고, 결국 조선조정은 청조에 대한 항의를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이들의 월경사실을 알리는 자문을 보내면서 이 들이 고의로 경계를 넘은 것이 아님을 애써 강조하였다. 이화자, 조청국경문 제연구 (서울: 집문당, 2008), 177-178.

14) 숙종실록 권55, 29a (숙종4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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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는 구실로 소방의 변민들과 몰래 왕래하니, 이 때문에 과거 李萬成과 李萬枝(의 범월)사건과 같은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오늘 또 금령을 어기 고 멋대로 경계를 넘어와 파수꾼을 잡아 갔으니, 이런 일이 그치지 않는 다면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중략) 상국인이 변강을 침범하는 일은 소방이 제어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번잡함을 피하지 않고 奏聞을 올리니 황송할 뿐입니다. (중략) 금령을 어기고 월강한 자들 을 엄히 단속하시여 함부로 범월하여 곡식을 약탈하는 일이 없게 하시어 소방의 변민들이 놀라고 근심하는 걱정을 덜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15) 이와 같은 조선의 자문에 대해 강희제는 월경자와 소속 지방관을 엄칙하라고 지시하고 아울러 조선에게 청인 범월자를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사사로이 월강한 자를 조선국의 사람이 체포하여 해송할 경우 엄히 죄를 다스리고 지방관은 해당 부에 교부하여 심의하 라. 또한 조선에 자문을 보내 연변을 방수하는 관병을 엄칙하여 수시 로 순찰하게 하고, 만약 이러한 (범월자들이) 있으면 즉히 체포하여 해 송하게 하라.”16)

실제로 조선이 청 황제로부터 청인 범월자를 체포할 권한을 위임받 은 것은 이보다 몇 년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康熙 51년(1712년) 황제는 조선과의 변경일대와 근해지역에서 불법적으로 사냥과 어업을 하는 자 가 있을 경우 盛京將軍은 연해의 지방관에게 交付하여 엄히 체포하고 早期에 사태를 막으라고 지시했다. 동시에 청인의 선박이 떼지어 바다 로 나가 조선에서 漁業하는 것은 도적질에 해당하니 조선에서는 이들 이 “天朝의 백성”이라고 해서 용서하지 말고 체포하여 처형하라고 명 령했다.17) 康熙 61년(1722년)에는 표문을 소지하지 않고 어업을 하다가

15) “上國之人往來採獵, 十百爲群, 冬則行獵, 春則採蔘, 結幕屯聚, 曠日淹留之際, 稱以有無相資, 與小邦邊民潛相往來, 至於生變如前日李萬成、萬枝等是也. 今又不 遵禁令, 恣意越界, 捉去把守, 若此不已, 則輾轉生事, 將何所不至 (중략) 事係上 國人侵越邊疆, 非小邦所可制者, 則不避煩猥每輒聞奏, 第增惶悚 (중략) 至於違禁 越江者亦加嚴飭, 毋得任意攙越, 橫討糧饌, 使小邦邊氓得免驚擾之患, 不勝至願.”

同文彙考 원편 권61, 犯越 7b-8a.

16) 通文館志 권9, 60b, 숙종대왕 41년 乙亥 (국역통문관지 2권, 서울: 세종대 왕기념사업회, 1998, p.187).

17) 原奏 , 同文彙考 卷61, 犯越, 18b;欽定大淸會典事例, 권511, 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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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을 일으킨 자는 조선에서 조선의 법률에 따라 처벌하는 것을 허용 했다.18) 황제의 윤허 하에 조선국왕이 청인을 합법적으로 체포·처벌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7세기말까지 조선인의 범월사건으로 청과 조선의 관계가 극도로 경색되고 조선국왕이 황제에게 벌금까지 내야했던 상황과 비교하면 강 희제의 이러한 조치는 18세기 초에 이르러 양국관계가 크게 달라졌음 을 시사한다. 조선국왕에게 청인 범월자를 처벌하게 함으로써 황제는 이제 더 이상 그가 번국과의 범월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제국의 질서가 공고해졌음을 자신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690년부터 1697년까지 강희제는 제국의 북방과 서방 변경을 위협하는 준가르의 갈단을 정벌하기 위해 네 차례에 걸쳐 親征에 나섰 다. 갈단의 죽음 이후 황제의 친정을 찬양하는 親征平定朔漠方略 편 찬과 제국의 판도를 조감하기 위한 皇輿全覽圖 제작은 모두 청 제국 의 통치가 공고화되었음을 널리 알리기 위한 사업이었다. 청의 서북변 경이 완전히 평정되기까지는 아직 반세기가 더 있어야 했지만, 강희말 년의 청은 이제 더 이상 존립이 위태로운 정복왕조가 아니었다.19) 제 국통치에 대한 강희제의 이러한 자신감이 조선과의 관계에서는 범월사 건에 대한 태도변화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강희제가 범월 사건에 대해 조선의 능동적 대처를 허용함으로써 조선은 청인의 범월 에 대해 이전보다 강경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 근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청 제국통치가 공고화됨에 따라 국경문제에 있어서 조선 이 오히려 상당한 발언권을 얻게 된 것이었다.

청조가 조선 경내에 침입한 청인 범월자의 체포와 처리를 조선에 위임한 후에도 청인들의 국경지대 출몰은 계속되었다. 이 가운데 조선 조정을 가장 크게 자극한 것은 숙종40년(강희53년, 1714년)의 사건이었

18) 原奏 , 同文彙考 卷61, 犯越, 18b-19a; 欽定大淸會典事例 권511, 5b.

19) 강희제의 준가르 정벌과 청 제국의 안정화에 대해서는 Peter C. Perdue,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ral Eurasi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5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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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해 8월 경원 인근에서 조선 군관들은 어업중인 청인을 목격하였 는데, 이들은 강변에서 집을 짓고 경작을 하고 있었다. 청인들이 조선 국경에 머무는 까닭을 추궁하자, 이들의 대답은 놀랍게도 다음과 같았 다. “이곳의 땅이 비옥하고 또한 앞으로 영고탑의 청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한다고 하기에 먼저 토지를 차지하려고 온 것입니다.”20) 이후 조 선의 조사 결과 영고탑 장군의 주청으로 경원 건너편의 훈춘에 병사를 배치하고 이곳을 군병 주둔지로 개발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음이 밝혀 졌다.21)

청인들이 경원과 두만강 일대에서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는 계속 이 어졌다. 같은 해 11월 숙종은 함경도 관찰사 李光佐와 절도사 趙相周 로부터 경원 인근에서 청인들이 집을 짓고 토지를 경작하고 있다는 보 고를 접했다. 당시 경원부사 趙世望 등이 올린 정문에 따르면, 청인들 은 경원의 맞은편 강역에서 2-3리 떨어진 곳까지 접근하여 초막[草舍]

를 짓고 있었다. 처음에 경원 군관들은 이 초막이 청인들이 사냥할 때 잠시 머무르면서 쉬는 곳으로 곧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어도 떠나지 않고 오히려 땅을 일구고 길을 닦는 등 오 래 머물 태세를 보이기에 조정에까지 보고하게 되었던 것이다.22)

영고탑의 청인들이 국경지대로 진출하여 정착하려 한다는 소식에 대한 조선조정의 반응은 당시의 대청인식과 변경인식을 동시에 보여준 다.

皇朝의 시대[明代]에는 九連城부터 여러 鎭堡가 我國과 경계를 접하고 있어 닭과 개 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습니다. 遼東人이 혹 위화도에 와서 경작하는 일이 있으면 我國은 遼東都司에 자문을 보내어 이를 금지시키고 비석을 세워 경계를 정했습니다. 당시는 천하가 一家였 고 우리 백성과 華人[明人]이 이웃처럼 가까웠는데도 방어의 경계선이 없 을 것을 근심했으니, 하물며 지금은 어떠하겠습니까. 청인의 소행은 그 20) 숙종실록 권55, 19b-20a (숙종40/8/8).

21) 숙종실록 권55, 38b (숙종40/12/3).

22) 請撤毁訓戎鎭越邊房屋咨 , 同文彙考 권48, 강계 12a-13a (배우성ㆍ구범진 역, 국역同文彙考 疆界 史料,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08, pp.116-117).

(11)

속뜻을 알 수는 없지만 띠처럼 가는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가까이에서 왕래하면 사고가 생기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심히 우려할 만합니다.23) 중화인 명을 섬기던 과거에도 경계가 불분명한 것을 걱정했는데, 이 적인 청과 접경하고 있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국경지대에 접근하는 것 은 결코 불가하다는 주장이었다. 이어 청인의 접근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그들의 일은 우리가 금할 수 있는 바가 아니나 또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서북을 왕래하며 형세를 살펴보니 六鎭과 강변의 7읍은 (조선과 청이) 강을 경계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계를 넘어서 는 모두 빈 땅으로 사람이 살지 않고 수목이 울창할 뿐입니다. 지금 저들 이 만약 농사를 짓고자 한다면 넓은 들과 비옥한 땅 어느 곳에서나 가능 합니다. 그런데 어찌 반드시 강 근처에서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고 도 로를 정비하겠습니까. 그 뜻은 실로 알 수 없지만 근래에 경계 너머의 청 인들이 채삼과 수렵을 이유로 사시사철 왕래하는 것이 전보다 잦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해를 넘겨 머무르며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양식을 얻을 방법이 없어 우리 경계의 변민들과 몰래 거래하여 양식을 사고 있으니 폐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들의 변경에서 집을 짓고 땅을 경작하는 것은 우리가 금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부터 변방의 관리들을 엄히 깨우쳐 전처럼 해이하게 대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들의 동정과 기미를 주의깊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24)

이런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조선조정은 영고탑 장군의 두만강 일대 개간을 저지하기로 결정하고 청 예부에 자문을 보냈다. 앞서 조정 신 23) “都提調李曰, 皇朝時, 自九連城, 有鎭堡, 與我國接界, 鷄狗之聲相聞, 遼東人, 或有來耕威化島者, 則輒自我國, 移咨遼東都司, 而禁止, 至於立碑以定界, 其時天 下一家, 我國邊民與華人, 如隣邑之人, 尙慮其無防限, 況今日乎, 淸人所爲, 雖未 知果有深意, 而隔一衣帶水, 而相近, 彼此往來, 不無生事之弊, 此甚可慮矣.” 비 변사등록 67책 (숙종40/6/7).

24) “提調趙泰耉曰, 彼地事, 非我所可禁, 而亦不無可慮矣, 小臣嘗往來西北, 觀其形 勢, 六鎭及江邊七邑, 彼我境以江爲限, 而越邊則皆是空地, 曾無人居, 但樹木成林 而已, 今彼人, 若只爲作農, 則曠野沃土, 何處不可, 而必於沿江近處, 造家墾田, 且 修治道路乎, 其意, 誠不可測, 而近來彼邊淸人, 以採蔘及獵獸事, 通四時無常往來 者, 比前益夥, 或經歲遲留, 而不罷歸, 想其糧道甚艱, 故與我境邊民, 潛相和賣, 以 資其糧者, 不無其弊矣, 彼邊之造家墾田, 雖不可自我禁斷, 而自今申飭邊臣, 勿爲 如前懈弛, 動靜事機, 頻頻偵察, 似宜矣.” 비변사등록 67책 (숙종40/6/7).

(12)

하들이 논한 것처럼, 예전부터 청과 조선의 국경지대에는 사람이 거주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전례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조선의 근거였다.

삼가 생각건대 聖朝[淸]의 영역인 봉황성에 책문을 설치하여 출입을 감찰하시고, 책문 밖에는 여전히 예전처럼 비워두어 사람의 거주를 허락 하지 않으시어 소방의 邊徼와는 다소 떨어져 있어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셨으니, 지금까지 강역에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聖朝의 깊은 계획에 힘입은 것입니다.25)

조선의 주장은 국경일대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야 국경을 불법적 으로 넘나드는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압록강에서 책문까 지의 땅을 공한지로 비워둠으로써 범월을 방지했듯이, 두만강 일대 역 시 무인지대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은 이러한 조선의 주장을 수용했다. 이듬해 청은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여 두만강 일대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청인들을 모두 이주시켰다. 강희54년(1715년) 2월 강희제는 봉천장군과 봉천부윤 및 영고탑장군에게 두만강의 국경지대 에서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는 자들이 누구이고 어디 소속인지, 어떤 이유로 그곳에 집을 짓고 있는지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26) 이해 10월 청의 예부는 조선에 자문을 보내어 조선의 경원에 인접한 安都立, 他 木努 등 지역에 설치된 房屋과 窩舖[움집]를 철거했으며 조선과의 국 경지대로 옮겨간 영고탑 관병의 둔전 역시 이주시켰다고 알려왔다. 이 들에게는 앞으로 두만강 경계를 넘거나 “강 근처에서 집을 짓고 씨를 뿌리는 것을 엄히 금지하고 해당 관원으로 하여금 불시에 엄히 조사하 게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후 만일 청인이 금령을 어기고 국경일대 에 거주하다가 조선에게 발각되어 예부에 자문을 보내는 일이 다시 발 생하면, 해당 관원과 병사를 처벌하겠다는 것도 아울러 약속했다.27) 25) “仍伏念, 聖朝御宇, 設柵鳳城, 以譏出入, 柵門迤外, 不許人居, 與小邦邊徼稍遠,

不相混雜, 至今疆域免致大端釁戾者, 莫非聖朝深計是賴.” 請撤毁訓戎鎭越邊房屋 咨 , 同文彙考 권48, 강계 13a (국역 疆界 史料, p.117).

26) 禮部知會令該管査明後再議咨 , 同文彙考 권48, 강계 14a (국역 疆界 史料

, p.119).

27) 禮部知會撤毁咨 , 同文彙考 권48, 강계 14b (국역 疆界 史料,

(13)

강희53년 경원일대에서 발생한 위의 사건을 분석하면서 이화자는 두만강변에 주둔하는 청인들을 조선의 요청에 따라 철수시킨 것은 이 후 청조의 변경관리에 불리한 전례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 사례를 근거로 삼아 이후 조선은 청인들의 두만강변 정착을 저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뒤에서 살펴보듯이 성경장군의 압록강변 진출 역시 중단시켰 다. 이화자에 따르면 청조가 조선과의 국경지대를 충분히 장악하지 못 함에 따라 청의 변방 군사력은 결과적으로 약화되었고, 19세기 말 조 선 유민들이 두만강 이북으로 월경 개간할 때 속수무책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28)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청이 변방에서 군사적, 행정적 통제를 확고하게 구축하지 못한 결과가 아니라, 전통시대에 청과 조선이 양국 의 국경지대를 관리하는 데 근대와 같은 명확한 경계인식이 없었기 때 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청대 양국의 국경지대가 갖고 있던 근본적인 특징인 경계의 모호성은 18세기까지 양국의 국가 권력이 사람들의 국경 접근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동안에는 큰 문제 를 일으키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청의 제국질서가 이완되고 국경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상대적으로 인구 가 희박한 변경과 국경지대로 이주민이 모여들게 되었다. 국가 통치력 의 이완과 경계의 모호성이 결합되면서 19세기 말 청과 조선의 국경지 대에는 16-17세기 명말의 상황과 유사한 변경적 특징인 여러 집단의 혼거 양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18세기 초 양국의 국경관리 는 조선의 외교적 승리, 혹은 청조의 대조선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당 시 양국의 국경지대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특징 속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pp.120-121).

28) 이화자, 조청국경문제연구 (서울: 집문당, 2008), p.187.

(14)

Ⅲ. 盛京將軍과 莽牛哨

옹정5년 (영조3년, 1727년) 청인 수백명이 무리를 지어 조선의 경내 로 침입하여 불법적으로 인삼을 채취하다가 조선의 관병과 충돌하여 조선인 5인을 살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郭連進 사건”으로 인해 청조는 청인들의 잦은 범월에 대한 조선의 항의를 받게 되었고 범월을 근절하기 위해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범월인과 범월을 방조하거나 단속하지 못한 지방 관리와 병사가 처벌되는 것은 당연했 다. 이에 덧붙여 옹정제는 청인들이 범월하여 조선 땅에서 사람을 해 치거나 인삼을 불법적으로 채취하는 등 사고를 일으킬 경우 조선국왕 이 청 황제의 명령으로 이들을 체포할 수 있게 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만약 청인 범월자들이 체포에 저항할 경우 조선의 관병들은 이들을 죽 일 수도 있었다.29) 조선에게 청인의 범월을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을 인 정해준 이 “雍正皇旨”는 이후 조선이 국경문제에 대해 보다 강경한 태 도를 취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후 성경장군은 압록강 일대에서 청인과 조선인의 범월을 효과적 으로 단속할 방법을 강구하느라 부심했다. 옹정9년(1731년) 성경장군 나수투(那蘇圖, Nasutu)는 압록강 입구에 수로초소를 설치하자고 제안 했다. 그가 특히 주목한 지점은 불법채삼자나 도강자들이 자주 이용하 는 망우초였다. 草河와 愛河는 유조변 안에서 발원하여 변외에 있는 莽牛哨에서 합류하여 中江, 즉 압록강으로 흘러들어갔다. 중강 가운데 에는 江心沱라는 모래섬이 있었는데, 이곳은 “不肖한 匪賊”이 小船을 타고 물길을 이용하여 미곡을 실어 나르는 지점이었다. 문제는 이 모 래섬의 서쪽은 봉황성의 관할이고 동쪽은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이었 다. 비적들이 왕래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이들을 체포하지 못하는 것은

“경계가 조선과 연달아 있어” 청의 병사들이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 29) “郭連進 사건”에 대해서는 김선민, 옹정제의 성경지역 통치 (명청사연구

34), pp.143-145; 이화자, 조청국경문제연구, pp.190-197 참조.

(15)

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30) 불법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나수투가 제 안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초하와 애하가 합류하여 入江하는 망우초 에 소선 4척과 삼판선 2척을 설치하고, (현재) 虎耳山에 주둔하고 있는 官升 1인과 병정 12명에 관승 1인과 병정 20명을 추가 배치하여 이곳 으로 이주시켜 수로 초소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 얼음이 얼면 수로 초 소를 철수시키고 호이산에 육로 초소를 설치해야 합니다.” 나수투의 이러한 제안에 옹정제는 먼저 조선과 협의할 것을 지시했다. “해당 장 군이 수로 초소를 세우자고 한 곳은 조선국과 경계를 접하고 있기 때 문”이었다.31) 외국이자 번방인 조선과의 경계지역은 비록 天朝라 할지 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곳이었다.32)

망우초 지역의 수로 초소 설치에 관한 자문을 받은 조선조정은 청 의 의도가 다름 아닌 국경지대의 “땅을 개척하려는 것”이라고 여겼다.

좌의정 趙文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順治년간부터 柵門 밖 1백여 리의 땅을 버려두고 서로 접하지 못하게 한 데에는 깊은 뜻이 있었습 니다. 근래 아국의 변민 가운데 매우 간악하여 경계를 넘어 이주하는 자들이 있으니 필시 大國에 죄를 얻을 우려가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들어 청에 자문을 보내어 (초소 설치를) 막아야 합니다.”33) 앞서 영고 탑 장군이 두만강 일대로 진출하려 했을 때 조선이 반대의 근거로 들 었던 것과 같은 이유였다. 즉, 국경지대를 비워두지 않으면 사람들이 출입하게 되고 결국 범월과 불법이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에 옹정9년 6월 조선조정은 청의 예부에 자문을 보내어 먼저 국경지대 관리에 관한 순치년간과 강희년간의 전례를 언급했다.

과거 太宗文皇帝께서 (중략) 柵을 설치한 후 번갈아 순검하여 먼 지역

30) 禮部知會詢問設迅便否上諭咨 , 同文彙考 원편 권48, 강계 16a (국역 疆界 史料, p.123).

31) 앞의 책, 16a (국역 疆界 史料, pp.123-124).

32) 옹정제의 성경지역 및 조선에 대한 인식은 김선민, 옹정제의 성경지역 , pp.169-170 참조.

33) 영조실록 권29, 42a (영조7/6/20).

(16)

을 단속하는 방도를 다하게 하시고, 또 반드시 地界를 비워두고 백성들이 인접하여 거주하지 못하게 하셨으니, 그 깊은 뜻은 비범하였습니다. 聖祖 仁皇帝[康熙帝]의 시절에는 영고탑 장군이 小邦 북도의 慶源府 訓戎鎭 국 경 너머에 병사를 배치하고 막사를 지어 농토를 개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방에서 올린 자문으로 聖祖仁皇帝께서 특별히 명하시어 철수하 였으니 황제의 깊고 심원한 뜻은 한결 같았습니다. 소방이 변경의 일로 皇朝로부터 잠시나마 큰 짐을 덜었던 것은 오로지 이에 힘입은 것이었습 니다.34)

조선의 뜻은 분명했다. 만약 국경일대에 수로 초소를 설치하여 관병 을 주둔시키고 인접한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하면 곧 집과 점포가 들어 서고 선박의 왕래가 빈번해질 것이었다. 더욱이 바로 옆에서 중강개시 가 열리고 있으니, 사람들의 접촉이 증가할 것은 당연하니, 결국 국경 초소의 설치는 범월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부추긴다는 논리였다.

결국 옹정제가 손을 들어준 것은 성경장군 나수투가 아니라 조선국 왕 영조였다. 같은 해 9월 청의 예부는 조선에 자문을 보내어 망우초 에 초소를 설치하지 말라는 황제의 뜻을 전했다. “짐은 (草河와 愛河) 가 조선국과 접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국에게 혹시 불편한 부분이 있을 까 걱정하여 특별히 상유를 내려 詢問하게 했다. 지금 조선국왕이 구 례를 준수할 것을 청하니, 이를 고려하여 초소를 설치하지 말라. 兵部 에 교부하여 따로 의논하는 것도 불필요하다.”35) 범월을 효과적으로 방지하기 위해 병사를 국경지대에 배치하자는 변경 지방관의 주장보다 선대의 전례를 준수하여 국경지대에서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이를 공한 지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번방 조선국왕의 주장을 채택한 것이었다. 옹 정제는 나수투가 주장하는 군사적ㆍ행정적 효율성보다 조선국왕 영조 가 원하는 경계의 모호성이 변방 통치와 국경 관리에 더 유리하다고

34) 請寢莽牛哨設迅咨 , 同文彙考 원편 권48, 강계 16a-17b (국역 疆界 史料

, pp.125-126).

35) 禮部知會不設防迅上諭咨 , 同文彙考 원편 권48, 강계 18 (국역 疆界 史料

, pp.126-127).

(17)

판단한 것이었다. 옹정년간 성경장군이 망우초에 초소를 설치하지 못 하게 된 것은 단순히 조선 외교의 승리라기보다 당시 청과 조선이 서 로 인정하는 경계는 선이 아닌 공간이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 보 아야 할 것이다.

나수투의 제안이 부결되자 망우초는 불법인삼 채취자들의 이동통로 로 계속 활용되었다. 건륭년간 성경장군에 임명된 달당가(達爾當阿, Daldangga)는 망우초를 둘러싼 불법채삼과 월경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시 한번 망우초 초소설치 문제를 거론하기로 했 다.36) 건륭11년(영조22년, 1746년) 달당가는 건륭제에게 국경지대 방어 의 중요성과 이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상주했다. 앞서 전임 성경장군 나수투가 옹정제를 설득하는데 실패했던 것을 귀감으로 삼아, 먼저 달 당가는 문제가 되고 있는 망우초 인근지역의 지리적 특징을 자세히 설 명했다. 특히 이 지역의 초하와 애하가 모두 장백산에 원류를 두고 있 으며 일대에서 황실의 재산인 인삼이 생산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일대 山場의 인삼을 보호하기 위해 카룬을 설치하고 관병을 배치하여 순찰 하고 있지만, “불초한 무리들이 불법적으로 小船을 만들어 미곡을 싣 고 망우초를 경유하여 강을 따라 冬河에 이르러 몰래 인삼 생산지에 들어가 인삼을 불법채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37) 인삼 사채자를 단속 하기 위해 달당가는 먼저 수군훈련에 익숙한 南金州의 漢軍 가운데 佐 領 1인, 驍騎校 1인, 領催 2인, 병사 100명을 선발하여 선박 4척과 함

36) 달당가의 망우초 초소설치 제안과 이후 조선과의 논의 전개과정은 이화자,  조청국경문제연구 201-208쪽 참조.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성경지역을 관할하 는 장군으로서 달당가가 오직 조선과의 국경지대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은 아 니라는 점이다. 망우초 초소 설치 문제를 상주하기 전, 건륭11년 2월 7일 달당 가는 이미 威遠堡에서 봉황성 일대까지 변장을 정비하고 토지를 개간해야 함 을 지적했다. 粘單 , 同文彙考 원편 48권, 강계 31a-32b (국역 疆界 史料, pp.150-151). 달당가가 망우초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단순히 조선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경변경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방책의 일환이 었던 것이다.

37) 禮部知會莽牛哨添駐官兵防守咨 , 同文彙考 원편 권48, 강계 19b-20a (국 역 疆界 史料, p.130.

(18)

께 망우초로 파견, 주둔시킬 것을 제안했다. 아울러 달당가는 병사의 주둔을 위해 망우초 일대를 개간해야 한다고 말했다. “旅順 水師營에 서 토지가 없는 관병 100명을 골라 봉황성에 소속된 망우초에 주둔시 키고, 沿邊에서 荒田을 개간하여 각자 耕種”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를 위해서는 “草房 200칸을 봉황성 변문에 짓고, 여기에 佐領의 초방 10칸과 驍騎校의 초방 5칸을 추가로 지어” 관병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했다.38)

달당가는 옹정년간 전임장군 나수투가 망우초에 초소를 설치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조선의 주청 때문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달당가가 보기에 초소를 설치해서는 안된다는 조선의 주장은 “눈이 있어도 그 일을 보지 못해 일을 保全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국경지대에 방어를 강화하는 것은 범월을 방지하여 결국 조선에게도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망우초에 만약 관병을 증설하여 要口를 방어하지 않는다면 시간 이 지남에 따라 이익을 추구하는 무리들이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혹은 朝鮮國 居民들과 서로 교류하며 조선국 경계를 침입하고 어지럽혀 장차 일이 발생하는 것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이는 비단 법을 무시 하는 무리가 불법으로 인삼을 캐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실로 조선국의 邊疆을 편안하게 하여 事端을 영원히 없애기 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39) 달당가는 실제로 망우초를 관할하고 있는 熊岳副都統 西爾們의 보 고를 인용하여 초소 설치가 조선의 영토 밖의 일임을 분명히 했다. 망 우초의 모래섬을 중심으로 강 줄기가 둘로 갈라지는데, 남쪽 물길은 조선으로 흘러 의주로 들어가고 북쪽 물길은 망우초하가 된다는 것이 었다. 달당가는 관병과 선박을 모두 청의 변계 안쪽에 주둔시킬 것이 며 조선과 서로 경계를 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만약 인삼 사채자가 강의 동쪽, 즉 조선 영내로 달아나면 조선의 관리들과 협력 하여 체포하고, 또한 수로의 병정들이 함부로 조선영내에 들어가면 곧 38) 앞의 책, 23a-23b (국역 疆界 史料, pp.136-137).

39) 앞의 책, 20b (국역 疆界 史料, p.131).

(19)

바로 처벌될 것이었다. “이렇게 한다면 금지된 山場에 奸民이 몰래 들 어오는 일이 없어질 것이고 조선의 界址도 혼잡과 소란을 면하게 될 것”이었다.40)

망우초에 수군 초소를 설치하자는 제안은 禮部에서도 적극 찬성했 다. 옹정제가 조선의 주청을 수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海彊의 요지를 방수하고 순찰하는 것은 마땅히 엄밀하게 해야 할 일”이었다. 더구나 관병이 주둔하는 곳은 조선 땅이 아니었다. “내지의 영토에 초소를 방 신을 첨설한다면 형세를 헤아려 현지의 사정에 따라 해당장군이 처리 할 일이니, 조선국왕에게 자세히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 예 부의 주장이었다. 초소를 설치한 후 “가령 어떻게 강역을 분명히 구분 하고 人戶를 떨어뜨려 영원히 서로 편안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는 해당 관리가 자세히 보고하여 처리할 일이었다.41) 강역의 구분이 어지러워질까 두려워 변강의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었 다. 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국경지대의 방어를 오히려 포기한 황제 와 달리, 지방관리들은 현지의 사정을 먼저 고려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Ⅳ. 조선의 변경인식

북경과 성경에서 국경지대에 초소를 설치하는 문제를 다시 논의하 고 있다는 사실은 곧 조선에 전해졌다. 조선의 사행이 오고가며 요동 에서 들은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의주 역관이 봉황성을 방문했다가 소 문을 듣기도 하는 등, 조선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이에 관한 정보 를 입수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조정은 청이 “退柵,” 즉 책문을 조선과 의 국경지대 쪽으로 옮겨 세울 계획을 갖고 있다고 의심했다.42) 조선 40) 앞의 책, 23b (국역 疆界 史料, p.137).

41) 앞의 책, 22a (국역 疆界 史料, pp.134-135).

(20)

관리들은 만약 성경장군이 책문을 옮겨 세운다면 청인들은 조선과의 국경지대 뿐만 아니라 의주, 北路, 폐사군 등 조선 영토까지 차지하게 될 것이며, 결국 조선의 강역이 “하루아침에 5리, 10리씩 줄어들 것”이 라고 우려했다. 국왕 영조 역시 청의 “退柵은 人家의 문 밖에 다른 사 람이 담을 쌓는 것과 같은 것”이니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고 믿었다.43)

청이 국경지대의 책문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의도를 정확히 파악 하지 못한 채 불안해하던 조선은 마침내 청에 직접 사정을 묻기로 결 정했다. 이 같은 결정이 내려진 것은 성경부도통44)이 중강에 와서 이 지역을 순찰하고 갔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였다.45) 건륭11년 4월 19일 조선국왕 영조는 건륭제에게 주문을 올렸다. “咨文을 올려 청하던 전 례를 택하지 않고 天威를 범하면서” 직접 황제에게 주문을 보낸 것은 조선이 이 사안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皇朝에서 천하를 다스려 온 이래 內外의 區界 의 한계를 엄격히 한 것은 간악한 무리들이 함부로 넘나드는 우환을 염 려하시어 나온 조처로, 봉황성에 책문을 세워 출입하는 사람들을 譏察해 왔습니다. 따라서 책문 밖에서 압록강 근처까지 1백여 리에 이르는 땅은 모두 비워둔 채 사람들이 살거나 농사짓는 것을 금지하여 烟火가 서로 바라보이지 않게 하고 聲聞이 서로 닿지 않게 만들어 두셨으니, 이는 깊

42) 영조실록 권63, 11a (영조22/3/28).

43) 당시 조선조정의 논의와 우려에 대해서는 이화자, 朝淸國境問題硏究, pp.203-205.

44) 앞서 달당가의 주청에서 인용되었던 熊岳副都統 西爾們을 조선 측에서는 성 경부도통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請寢添兵屯田奏 , 同文彙考 원편 권48, 강계 26b (국역 疆界 史料, p.142).

45) 실제로 망우초 문제로 청에 奏文을 보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조선조정은 한 동안 논쟁을 벌였다. 아직 성경장군이 아무런 공문을 보내지 않았고 아직 청에 서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문을 보내는 것은 적절하 지 않다는 의견과, 청이 책문을 옮기기로 한 것은 이미 결정된 사안이므로 조 선에서 신속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섰던 것이다. 咨文이 여러 단계를 거쳐 전달되는 동안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될까 걱정한 영조는 결국 먼저 奏 文을 보내 직접 황제에게 조선의 뜻을 전달하기로 했다. 영조실록 권63, 12a (영조22/윤3/5); 권63, 13b (영조22/윤3/15); 권63, 14b (영조22/윤3/21); 권63, 17a-18a (영조2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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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원대한 계책으로 四方에 신중을 기하고 만세를 우려한 더없이 비상 한 조처인 것입니다.46)

조선은 먼저 강희제와 옹정제가 조선과의 국경지대에서 토지의 개 간이나 군영의 주둔을 허락하지 않았던 사례를 설명했다. 아울러 청과 조선의 관계가 얼마나 각별한 것인지 강조했다. “小邦은 皇朝에 대해 비록 外藩이라 하나 內服과 다름없이 여기고 있는 까닭에 호소할 것이 있으면 반드시 청하였고 간청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베풀어 주었으 니, 천지의 덕이 소방에게만 지나치게 관대한 것 같았습니다.”47) 조선 은 대대로 황제를 섬겨왔고 이에 청의 황제들 역시 조선을 아끼고 원 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건륭제 역시 선대 황제 의 전례를 따라 조선의 요청대로 망우초의 초소 설치를 중단해 달라는 논리였다. 天朝를 “事大”하는 조선과 藩邦을 “字小”하는 청이라는 전형 적인 조공관계의 수사가 청에 대한 조선의 이해를 지키기 위한 논리의 근거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국경지대의 토지 개간과 둔전 설치에 반대하는 조선의 완강한 태도 는 건륭제를 불편하게 했음에 틀림없었다. 성경장군이 수차례 조사하 여 망우초 초소 설치가 조선에 유익한 것임을 설명했고, 예부ㆍ공부ㆍ 병부 모두 달당가의 제안을 찬성하였으며 이에 황제가 이미 윤허한 사 안을 번방에서 계속 반대하는 상황이 건륭제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조선국왕이 상주한 것을 보니 조선경내 사람들 가운데 평소에 기회를 틈타 범월하여 채삼하는 자가 있었다. 만약 우리가 군사를 두어 순찰 할 경우 그들이 마음대로 왕래할 수 없게 될 것이니, 그 상주한 것이 또한 비루하다. 小國의 사람들은 일의 大體를 알지 못하고 오직 방종 하게 이익을 꾀할 뿐 변강의 안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어 려운 일을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48) 46) 영조실록 권63, 17a-18a (영조22/4/19); 請寢添兵屯田奏 , 同文彙考 원편

권48, 강계 26b ( 국역 疆界 史料, p.142).

47) 영조실록 권63, 17a-18a (영조22/4/19); 請寢添兵屯田奏 , 同文彙考 원편 권48, 강계 26b ( 국역 疆界 史料,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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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의 거듭된 상주를 무시하고 무조건 달당가와 대신들의 의 견을 따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선은 청의 오랜 번방이자 속국으로

“我朝가 조선에 은혜를 베풂이 전부터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건륭11 년 7월 건륭제는 우선 조선이 가장 우려하는 문제인 국경지대 토지개 간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達勒當阿가 상주한 바, 변경의 토지를 개간하는 안건은 조선국왕이 말 한 鳳凰城 柵門 바깥쪽에 1백여 리의 빈 땅을 남겨 두어 국경 안팎을 멀 리 띄워 놓았으므로, 인가가 모여 서로 뒤섞이어 사단이 발생할 우려는 피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주문은 곧 시행하여야 할 일이다. 봉황성의 책문을 늘리는 곳은 조선 국왕의 정지해 달라는 청을 참조하여 중지하고, 해당 部가 전유(傳諭)하여 그 국왕이 알게 하라.49)

토지개간을 중지하라는 황제의 결정으로 달당가의 국경지대 방비 강화 계획은 이미 어긋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책문 밖 국경지대의 토 지개간은 달당가의 전체 구상, 즉 위원보에서 봉황성에 이르는 변장을 정비하는 국경지대 관리정책의 일환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망우초에 초소를 설치하고 이곳에 군사를 배치하기 위해서는 토지와 가옥이 필 요했고, 달당가는 이를 국경지대의 공한지에서 해결하려 했던 것이었 다. 토지개간에 대한 황제의 부결이 내려질 무렵에도 병부의 관리들은 망우초 초소 설치의 필요성을 황제에게 계속 강조하고 있었다. “변강 을 걱정하는” 병부가 보기에 달당가가 제안한 망우초 초소 설치는 “간 악한 비적을 조사하여 오래동안 안전한 계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

48) “觀該國王所奏, 蓋以其境內之人, 素有乘間偷越挖參者. 若我設兵巡察, 則伊等不 得任意往來, 所奏亦屬卑鄙. 小國之人, 不識大體, 惟知縱下謀利, 不思寧定邊疆, 而故謂難行以示我, 亦未可知.” 大淸高宗實錄 권270, 26b-27a (乾隆11/7/己酉).

49) “達勒當阿所奏 展邊墾土一案 該國王旣稱鳳凰城樹柵之外 向留空地百餘里 務事 內外隔截 以免人烟輳集 混雜滋事之患 此奏尙屬可行 著將鳳凰城展柵之處 照該 國王所請停止 幷令該部傳諭 該國王知之.” 大淸高宗實錄 권271, 10a (乾隆 11/7/甲寅). 같은 내용의 諭旨가 禮部抄錄更察設迅許停展柵上諭及兵部原題咨 ,

同文彙考 원편 권48, 강계 31a (국역 疆界 史料 p.149)에 있다. 비슷한 내 용으로 국경지대 토지 개간을 중지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담은 禮部의 자문은

영조실록 권64, 28a (영조22/10/29)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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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변경이 肅淸되어 영원히 변계를 어지럽히는 일이 없어질 뿐만 아 니라 外蕃에 대해서도 매우 유익한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국왕이 주 청한 내용은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며 변경의 안정을 위 해서는 달당가가 원래 주청한대로 반드시 초소를 설치해야 한다는 것 이었다.50)

국경지대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초소를 설치해야 한다는 청 관리 들의 주장과 국경지대의 혼란을 막기 위해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해야 한다는 조선의 주장 사이에서 건륭제는 결국 부친 옹정제와 마찬가지 로 조선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로써 보건대 防迅을 설치하려는 곳은 원래 정한 [청의] 경계 이내로 조선의 변계와는 관계가 없다. 다만 조선국왕은 대대로 我朝의 國恩을 입 고 매우 恭順하였는데, 만약 이 防迅을 설치하였다가 그 나라의 무지한 백성이 금령을 어기는 경우가 발생하면 자기가 죄를 얻을까 걱정하고 이 때문에 주청하는 것이다. (중략) 만일 그쪽에 속한 하인 등이 금령을 지 키지 않아서 조선국왕이 죄를 얻게 된다면 짐의 마음은 차마 하지 못하 는 바가 있을 것이니, 조선국왕이 청한 바에 따라 망우초 지역에 防迅을 설치하는 문제는 정지시키고 조선국왕으로 하여금 그쪽에 속한 사람들을 엄히 단속하게 하라.51)

망우초에 초소를 설치하여 범월과 인삼사채를 단속하는 것이 아무 리 합리적이고 필요한 일이라 할지라도 번방이 반대하는 한, 천조의 황제는 이를 윤허할 수 없었다. 번방을 회유하는 것은 지방의 안전과 관리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청과 조선의 조공관계란 상국인 청이 자국의 이익을 번방인 조선에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조선이 청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단선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양국의 관계는 상국과 번 방의 위계질서를 전제로 하면서도, 동시에 이 대전제 하에서 상당한 타협과 조율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느슨하고 포괄적인 관계규 정으로서의 조공관계는 양국 사이에 모호한 국경을 용인하였고, 이 과 50) 粘單 , 同文彙考 원편 권48, 강계 32b (국역 疆界 史料, p.152).

51) 禮部知會奉旨寢退柵添迅咨 , 同文彙考 원편 권48, 강계 34a (국역 疆界 史料, pp.15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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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서 상국에게는 천조의 체모를, 번방에게는 자국의 이익을 지킬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이화자가 말하듯 단순히 “군사대국인 청과 접 경하고 있는 소국 조선의 강역보호 노력의 결과”52)만은 아니었다. 양 국관계의 전제인 조공관계가 바로 이러한 모호한 국경지대를 용인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황제의 명령으로 망우초 초소 설치가 중단된 후에도 청이 국경지대 를 점유하려 한다는 조선의 의구심은 계속되었다. 망우초 초소에 대한 황제의 최종결정이 내려지고 1년이 지난 건륭 12년 11월 의주부윤 鄭 夏彦은 달당가가 망우초에 둔전을 세우려는 뜻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다. 조선조정은 청이 조선과의 국경지대로 접근하는 이 유는 성경일대 변경지역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있다고 파악했다. 이주 민의 증가로 경작지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성경장군은 조선과의 국 경지대의 땅을 개간하여 동북변경의 안정을 꾀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좌의정 趙顯命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는 실로 그들이 변방을 편 안히 하려는 큰 책략입니다. 듣건대 流民이 전에는 거의 30만에 가까 웠는데 지금은 다섯 배가 되었으므로, 이익이 생길 만한 길을 열어서 安集할 땅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청이 조선과의 국경지 대를 내지의 유민들에게 개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면 이는 “退柵”

이나 “設屯”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국경지대에 청의 이주민이 거주 한다는 것은 조선으로서는 “국가의 안위와 관계된 일”이었다. 북방의 국경지대는 “토지가 비옥하므로 (청이) 반드시 개간하고자 할 것”이고, 따라서 조선으로서는 “반드시 싸워서” 지켜내야 할 땅이었다.53)

Ⅴ. 맺음말

52) 이화자, 朝淸國境問題硏究, p.208.

53) 영조실록 권66, 33b-34a (영조2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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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시기의 범월사건에서 강희년간의 백두산 정계 비 설치, 그리고 옹정-건륭년간의 망우초 사건에 이르기까지 후금-청 과 조선의 관계에는 언제나 범월과 강역의 문제가 그 중심에 있었다.

다시 말해 양국의 접경지역이야말로 후금에서 청제국으로의 발전과 청 -조선 사대관계의 추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지점이었던 것이다. 누르 하치의 건주 여진이 인삼을 캐고 강희제의 관리가 지리 측량을 한 것 은 같은 압록강 일대였지만, 각각의 시기에 이 접경지역의 성격과 의 미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

명의 종주권이 중원을 너머 요동과 조선에까지 미치던 시기에 조선 과 여진은 압록강 일대의 변경을 공유하고 있었다. 조선과 여진의 변 경은 명과 여진의 요동과 유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파멜라 크로슬리 가 묘사하듯이 요동은 “중간적(between-ness)” 혹은 “超변경적 (transfrontier-ness)”인 성격을 띤 지역으로 한인과 여진인의 민족적 경계가 모호한 곳이었다.54) 이곳은 또한 “사람들의 만남의 공간으로 지리적ㆍ문화적 국경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곳”으로서 “국경이 없 는(borderless) 땅”이기도 했다.55) 선조와 누르하치의 일화가 보여주듯 이, 조선과 여진의 경계는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자연적 지리경계에 따라 분명하게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대를 공유하며 혼거하고 있었 고, 양자의 관계는 명을 매개로 하고 있었다.

홍타이지가 이끄는 후금의 성장은 배타적인 영역설정을 필요로 했 고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불명확한 변경을 허용 할 수 없었다. 누르하치의 후금이 “인접하는 두 정치세력, 혹은 사회집 단이나 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가 모호한 공간으로,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의 세력을 상대방에게 침투시

54) Pamela K. Crossley, A Translucent Mirror: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pp.47-50.

55) Jeremy Adelman and Stephen Aron, “From Borderlands to Borders:

Empires, Nation-States, and the Peoples in between in North American History”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104:3, June, 1999), pp.81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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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고 확장할 여지가 있는 지역”으로서의 변경(frontier)을 갖고 있었다 면, 홍타이지의 후금-청은 “인접하는 두 정치세력이 서로의 영토적 경 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설정한 선을 뜻하는” 국경(border)을 원했다 고 할 수 있다.56) 홍타이지는 조선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후금의 배타 적인 경계를 원했고, 조선인의 범월은 그에게 조선을 압박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그는 조선을 공격하여 결 국 사대관계를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 등장하는 분명한 선으로서의 국경은 홍타이지 시기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9세기 말까지 청과 조선은 그들의 접경 지역이 변경은 아니지만 국경도 아닌, 일종의 중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 서부사 전공자인 제리미 아델만과 스테판 애론이 제시한 개념인 “국경지대(borderland)”에 주목할 만하다. 이들 은 변경과 국경 사이에 국경지대라는 중간단계를 설정하고 “두 세력이 서로 경쟁하는 경계”로 정의한다. 두 세력 사이의 공간이 변경에서 국 경으로 변화하기 전에 일종의 전환기인 국경지대의 단계를 거치게 되 고, 이 때 국경지대는 변경의 성격과 국경의 성격을 모두 지니게 된다 는 것이다.57) 다시 말해 국경지대는 변경처럼 두 집단이 모호한 경계 를 둘러싸고 빈번하게 접촉하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인접하는 두 국가 가 서로의 세력을 인정하고 타협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중반 망우초 초소 사건은 청-조선 양국의 국경지대가 지닌 경계의 모호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조공관계의 특수성을 동시에 드러낸 다. 청과 조선의 국경지대에서 조선인의 범월사건은 누르하치 시기부 터 건륭년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청의 대응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변화해갔다. 초기의 만주족 지배자들이

56) 경계(boundary)ㆍ변경(frontier)ㆍ국경지대(borderland)ㆍ국경(border) 등 관련 된 여러 용어에 대한 설명은 김선민, 청제국의 변경통치에 관한 연구동향 분 석 (윤영인 외 지음,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 동북아 역사재단, 2010), pp.114-118 참조.

57) Adelman and Aron, 앞의 논문, p.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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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인 조선으로부터 후금과 청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조선인 범 월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해야 했다면, 번성하는 제국이 정점에 이른 18 세기의 청 황제들은 공손한 조공국에게 보다 관대한 처우를 내리는 여 유를 가질 수 있었다. 망우초 사건에서 보이듯이 성경 변경일대의 지 방관들은 조선인의 범월을 방지하고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지만 옹정제와 건륭제는 대신 조선의 편을 들어 이들의 요구를 물리쳤다.

이는 제국의 황제가 세계를 아우르는 보편군주로 자신을 자리매김 하고 있었던 18세기 당시 청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관련지어 이해할 필 요가 있다. 광대한 제국과 다양한 민족집단을 통치하게 된 18세기의 청 황제는 이제 단순히 만주족의 통치자만이 아니라, 한인, 몽골인, 위 구르인, 티베트인을 포함한 제국 내 모든 백성들의 군주가 되고자 했 다.58) 청의 이러한 보편군주 이데올로기는 제국 내부만이 아니라 대외 관계에서도 표현되었다. 외국, 특히 조공국과의 관계에서 청 황제는 천 하의 모든 신민을 다스리는 천자로 자임했고 이를 위해서는 외국의 요 구도 어느 정도는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의 경우, 군사적으로 나 정치적으로 위협적이지 않은 이웃과 국경문제로 다투는 것보다 오 랜 조공국의 충성을 확보하는 것이 보편군주의 위상에 부합하는 일이 었다. 결국 외국을 아끼는 천조의 황제는 공순한 조공국 조선의 거듭 된 요구를 묵살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조선은 오히려 자신들의 요구 를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청과 조선의 관계는 종주국과 조 공국이라는 상하 위계질서에 기반한 것이면서 동시에 타협의 여지 또 한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국 조공관계의 특수성이 국경지대 본연 의 모호성과 만나면서 망우초 초소 설치를 무위로 만들었던 것이다.

58) 파멜라 크로슬리는 18세기 청 제국의 이러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보편군주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Pamela K. Crossley, 앞의 책, 5-6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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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Qing and Chosŏn Border Control during the Yongzheng and Qianlong Periods

Kim, Seon Min

Even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tributary relationship between the Qing and Chosŏn courts, local people continued to violate borders in search for ginseng, and border transgression incidents, in fact, did not disappear until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It is interesting to find that as time passed, responses from the Qing court to Korean trespassers gradually changed: if the early Qing rulers who strove to secure their fragile country in the hostile environment attempted to impose a rather harsher policy to curb their reluctant neighbor, their descendents in the eighteenth century when the Qing empire reached its apex became more lenient to their submissive tributary state. Punishments for Korean trespassers were reduced, while curbing on the Qing side was strengthened through issuing the imperial edicts.

In the mid-eighteenth century when Qing local officials in the northeastern frontier proposed to station soldiers at a border post near Chosŏn as a way to prevent Korean trespassing, the Chosŏn made an all-out effort to stop the Qing from approaching near the border and their territory. Finally the Qing emperor decided to accept the Chosŏn appeal and not to place soldiers at the border, a dramatic contrast with the cruel attitude of the early Qing rulers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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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border trespassers. Just as much the Qing emperor wished to reinforce the justice of their claim to the Mandate of Heaven within the empire, they wanted to posture themselves as a benevolent ruler to even embrace foreign subjects. For eighteenth-century Qing rulers, border security with an unintimidating neighbor was an issue of less significance than gaining respects from an old tributary state.

주제어: 옹정제, 건륭제, 망우초, 성경장군, 국경지대 關鍵詞: 雍正帝, 乾隆帝, 莽牛哨, 盛京將軍, 國境地帶

Keywords: Yongzheng Emperor, Qianlong Emperor, Mangniushao, Shengjing General, Borderland

(원고접수: 2011년 3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4월 8일, 수정원고 접 수: 4월 22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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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보면 補納 명목으로 5分의 추가 징수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 는 것, 종래 이중과세를 하지 않겠다는 명분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현실성을 고려하여 완전 철폐를 주장하지 않고 등급의 다분화를 간소 화하고 최대 한도 1元을 넘지 않도록 하는 감경 요구를 제시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