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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적 망각과 희망의 아이덴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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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적 망각과 희망의 아이덴티티

-네팔 포카라 티베트 난민을 중심으로-

朴 宣 泠 (慶北大)

Ⅰ. 서 론

Ⅱ. 네팔 포카라 티베트 난민의 삶과 희망

1. 포카라 난민촌의 형성과 상 호 교류

2. 난민촌 행정관 파견과 역할 3. 난민촌의 일상생활, 교육환

경 및 사회적 처우 4. 티베트 난민의 희망

Ⅲ. 결 론

Ⅰ. 서 론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1951년 평화협정이라 불리는 소위 ‘17개조’1) 를 근거로 중국인민해방군을 티베트에 주둔시켰다. 그러나 티베트에 평화정착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지속적으로 불협화음이 발생하였다.

1959년 중국정부에 대한 불신이 시위로 확산되었고, 결국 달라이 라마 가 인도로 망명하게 되면서 인도 다람살라(Dharamsala)에 티베트 중 앙 정부(the Central Tibetan Administration)2)가 형성되게 되었다.

* 본 인터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주시고 조언해 주신

‘티베트’께 감사드린다.

1) 毛泽东, 军委关于进军西藏的训令(1951年5月25日) (军事科学出版社·中央文献 出版社 编, 毛泽东军事文集 第6卷, 军事科学出版社, 中央文献出版社, 北京:

1993), pp.278-279. 280쪽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티베트 지방정부에게 강요 했던 소위 17개 조문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2) 일반적으로는 티베트 망명 정부라고도 부르지만, 공식명칭은 티베트 중앙 정

(2)

인도 히마찰 프라데시(Himachal Pradesh)주의 뉴델리(New Delhi) 북쪽으로 500km 위치한 다람살라의 티베트 중앙정부는 망명을 시도한 티베트인 뿐만 아니라 티베트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전체 600만 티베 트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이자 티베트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티베트를 탈출해 온 난민들은 8만명에 달하였다.3)

1980년대 초 중국이 라사에서 네팔 카두만두까지 ‘우정의 고속 도로 (Friendship Highway)’를 개통하면서 티베트가 개방되었을 뿐만 아니 라 티베트에서 발생한 저항운동으로 1986년부터 또 다시 수많은 티베 트 난민이 인도와 네팔로 유입되었다. 1986년부터 1996년까지 약 18,700 여명의 난민이 인도에 도착하였다. 인도에 사는 티베트 난민의 20%는 1986-1996년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정확한 통계는 파 악하기 어렵지만 1986년부터 2002년까지 총 6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것 으로 추산하기도 한다.4) 2008년 이래로 중국 정부가 티베트 국경지역 의 경비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강화하면서 난민의 숫자가 급격하게 저 하되었다.5)

달라이 라마 뒤를 이어 망명을 떠난 티베트인들은 티베트를 벗어났 을 때 이미 상처입고 병들었으며 망명 도중에 허기와 굶주림, 문화 충 격, 환경 변화 등으로 많은 어려움에 처하였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였 다. 티베트 중앙 정부는 티베트 난민들의 생존 문제 더 나아가 미래에 닥칠 젊은 세대의 운명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9년 인도 북부 시킴(Sikkim)에 도로 공사를 위해 티베트 난민 3,394명을 파견하

부(the Central Tibetan Administration)이다.

3) 토마스 레어드 저, 황정연 역,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 (서 울: 웅진지식하우스, 2008), p.421.

4) http://tibetoffice.org/exile-community/reconstruction-in-exile; 토마스 레어드 저, 황정연 역, 앞의 저서, p.421.

5) “Refugee Report: Dangerous Crossing -2011 Update” (International Campaign for Tibet, October 11, 2012), p.33. http://www.savetibet.org/

dangerous-crossing-2011-update/#sthash.Xm5JXt3m.dpuf.

(3)

<지도1> 티베트 주변 인도, 네팔, 부탄에서 검은 점으로 표시된 곳이 티베트인 난민촌이다.

출처: http://www.centraltibetanreliefcommittee.org/settlements/india/settlementmap.

html

기도 하였지만,6) 이러한 일시적인 일거리 만으로 티베트인이 정착하여 6) Tsewang Phuntso, “Reconstruction in Exile”, http://tibetoffice.org/

(4)

안정적으로 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티베트인의 건강과 교육, 그리고 티베트의 미래를 위해 그들 삶의 생존 기반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난민촌을 만들어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대해 국제적으로 알리고자 하였다.

망명 나온 티베트인들이 정착하여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 은 인도 네루 수상은 1960년에 ‘Tibetan Rehabilitation Society’를 조직 하였고, 인도 아루나찰 프라데쉬(Arunachal Pradesh)주의 미싸마리 (Missamari)와 과거 영국 전쟁포로수용소이자 부탄 국경인 서부 벵갈 (West Bengal) 부사 두아르(Buxa Duar)에 난민촌을 만들었다. 미싸마 리에 6,000여명을, 부사 두아르에 9,000여명을 수용하였다.7) 이후 기타 다른 지역에도 일정한 땅을 제공하여 티베트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최초로 만들어진 티베트 난민촌은 1960년 12월 16일 데라둔 모소리(Dehradun Mussorie)에 건립되었는데, 이곳에 약 3,000명이 정 착하였다.8)

현재는 14여만명의 티베트 난민들이 인도, 네팔, 부탄에 거주하고 있 는데,9) 티베트 난민촌을 지도로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지도1> 참 조) 총 54개의 티베트 난민촌이 인도, 네팔, 부탄에 흩어져 있는데, 그 중 26개가 농업기반, 17개가 농공업기반, 11개가 수공예 기반 형태로 형성되었다.10) 농업을 제외하고는 주로 티베트 전통 문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종, 불화, 목각, 금속세공품, 비누, 의복 등의 각종 수공예 품과 카페트 등을 만들고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티베트 난민의 대다수가 인도에 살고 있고 티베트 중앙 정부도 다람

exile-community/reconstruction-in-exile

7) Tsewang Phuntso, “Reconstruction in Exile”, http://tibetoffice.org/exile- community/ reconstruction-in-exile

8) 서상문, 중국의 국경전쟁, 1949-1979 (군사편찬연구소, 2013), p.297 참조.

9) “EXILE Life”, http://www.centraltibetanreliefcommittee.org/others/exile-life.

html

10) Tsewang Phuntso, “Reconstruction in Exile”, http://tibetoffice.org/exile- community/reconstruction-in-exile

(5)

살라에 있기 때문에 티베트 문제나 티베트 난민 문제를 고려할 때 일 차적으로는 인도에 거주하는 티베트인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 의 정치적 경제적 위상이 세계적으로 위용을 떨칠수록 티베트인의 목 소리는 외면되고 묻혀지는데, 인도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티베트 난 민들은 더더욱 고의적으로 망각되거나 혹은 자연스럽게 잊혀져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네팔에 도착한 티베트 난민은 1959년부터 1960년 1961년을 거치면서 2만여명에 이르렀는데, 지리적인 이유로 많은 경우 먼저 네팔 포카라 에 왔다가 다른 지역으로 재이주해 가기도 하였다. 초기에 이들은 서 부 티베트에서 양이나 염소, 야크 등을 데리고 가서 생활하였으나 점 차 인도, 네팔, 부탄에 정착하면서 농업, 수공업 아니면 소규모 상업으 로 생활을 연명하였다.

1959년 대대적으로 티베트 난민이 발생한 이래로 그런대로 ‘자유롭 게’ 통행하던 중국의 변경선이 닫히기 시작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였다.

1961년 중국과 인도의 변경지역 갈등이 확대되면서 인도정부는 네팔에 서 넘어오는 티베트인들에 대해 엄격하게 통제하여 티베트인들의 왕래 에도 지장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각자의 형편에 맞게 떠돌던 티베트인들이 정착해서 살 수 있도록 국제적십자사와 네팔왕국, 스위 스 정부, 호주 난민 위원회 및 자원봉사 기관 등의 노력으로 네팔에 7 개의 난민촌을 만들게 되었다. 이로써 2,400에서 8,000여명의 난민들이 네팔지역에 머물 수 있게 되었는데, 현재 10여개의 난민촌이 네팔에 있다.11)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티베트 고원은 히말라야와 분리하여 생각 할 수 없고, 실제로 광대한 히말라야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 중의 하나도 티베트이다. 필자는 티베트에서 거대하고 웅장한 히말라 야를 조망해 보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 안나 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직 접 등반해 보면서 히말라야 주변의 삶이 어떤지에 대해서 다양하게 체 11) http://www.centraltibetanreliefcommittee.org/settlements/nepal/settlements-

in-nepal.html

(6)

<그림1> 타시 팔키엘 티베트 난민촌 행정관과 인터뷰 하는 장면

득할 수 있었다. 히말라야 주변부에 거주하는 사람 들의 삶이 적어도 타자의 시선으로는 매우 고달프 게 보이는데, 정치적 난민 인 티베트 난민촌의 삶은 더욱 중첩적인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중국의 변경 정 책이나 그들의 중화민족주의의 확산 방법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2013 년 티베트와 신강을 잇는 ‘신짱공로(新藏公路)’를 탐방했을 뿐만 아니 라 2014년에는 네팔 포카라에 있는 티베트 난민촌을 방문하였다. 특히 티베트 난민의 실상을 파악해 보기 위해 2014년 4월 5일 네팔 포카라 에 있는 타시 팔키엘 티베트 난민촌(Tashi Palkhiel Tibetan Settlement Office)을 방문하여 행정관(Settlement Officer)인 Tshering Doma와 인터뷰 하였다(그림1). 이 난민촌은 히말라야 관광과 연계하 여 농공업 기반의 난민촌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12)

본고에서는 포카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타시 팔키엘 티베트 난민촌 행정관과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고 티베트 중앙정부의 자료나 기타 관련 자료를 제공하여 참조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결론적으로 티베트 난민촌이 직면한 문제와 인터뷰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시사점을 제시 하였는데, 이 글을 통해 그들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Ⅱ. 네팔 포카라 티베트 난민의 삶과 희망

12) http://www.centraltibetanreliefcommittee.org/settlements/nepal/settlements- in-nepal.html

(7)

<그림3> 타시 팔키엘 티베트 난민촌 중앙에 사원이 있고 그 앞에는 카페트 공장 전시장이 있다. 동자승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는 모습

<그림2> 타시 팔키엘 티베트 난민촌 입구. 왼쪽에는 난민촌에서 제작한

수공예품을 판매하고 있다

1. 포카라 난민촌의 형성과 상호 교류

- 이 난민촌은 언제 형성되었고, 현재 몇 명이 거주합니까?

이 난민촌은 1962년에 형성되었고, 현재 750여명의 난민이 거주하고 있습니다.13)(<그림2>, <그림3> 참조)

- 이곳 난민촌에 머무는 티베트인은 대체적으로 티베트의 어느 지 역으로부터 이주해 온 것입니까?

대부분은 위짱(U-Tsang)(<지도2> 참조) 지역에서 이주해 온 것입니 다. 1959년 이후에 수천 수만여 명이 티베트를 떠나 포카라에 왔지만 인도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가기도 하였습니다.

- 포카라만 하여도 여러 개의 난민촌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형성된 것입니까?

13) 티베트 중앙 정부 홈페이지에 의하면 이 난민촌의 원래 인구는 475명인데, 현재는 976명으로 182가정이 거주하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언제 자료를 올 렸느냐에 따라 인구 숫자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http://www.centraltibetanreliefcommittee.org/settlements/nepal/tashipalkiel.htm l

(8)

<지도2> 티베트 지도의 왼편에 U-Tsang 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출처: http://www.karmacarpets.com/images/tibet.gif

지리적인 관계로 대부분이 먼저 서부 티베트를 떠나 포카라에 왔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갔지만 여전히 1000여명이 포카라에 남아 있었고, 각자의 상황에 따라 현재 포카라의 4개의 난민촌(Tashi Palkhiel;

Tashliling; Paljorling; Jampaling: 이외에 20여명이 거주하는 아주 작 은 규모의 Tashi Gaug가 있다)에 나뉘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인위적으로 나누어서 특정 지역에 살도록 한 것은 아니고 각자의 취향 에 따라 머무는 난민촌이 결정되었습니다.14)

- 이곳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부터 이 난민촌이 처음 형성 되었을 때 스위스가 도왔다고 들었는데 필요한 사항에 대해 지금도 스 위스가 더 도울 수는 없습니까?

14) http://www.centraltibetanreliefcommittee.org/settlements/nepal/settlements -in-nepal.html 자료에 따르면, Jampaling 난민촌은 농업 기반이고, Paljorling 과 Tashi-Palkhiel 그리고 Tashiling은 농공업 기반의 난민촌이다.

(9)

1959년 이후 스위스가 도와서 이 난민촌이 들어설 수 있기는 하였지만 그때는 네팔이 국왕이 있어서 왕의 권한하에 이 지역을 하사할 수 있 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권이 바뀌었고 중국과의 정치적인 관계 등 으로 인해 더 이상 티베트 난민촌에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네 팔에 있는 4개의 난민촌은 스위스가 도와서 형성되었고 나머지 난민촌 은 네팔 적십자사가 도와서 형성된 것입니다.

- 난민촌에 따라 티베트 불교의 종파15)가 조금씩 다르기도 한데, 의식 에 차이가 있습니까?

티베트 불교 예식과 관련하여서 기본적으로는 비슷하여 크게 차이가 있지는 않지만 강조하는 부분이 조금씩 달라 의식에서 조금의 차이는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다른 난민촌에는 몇 명 정도 거주합니까?

다른 난민촌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모든 난민촌마다 각기 행정관이 있고 저는 단지 이 곳 난민촌의 행정관이기 때문에 이 곳 사정만 알고 있습니다. 설사 다른 곳의 사정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말해줄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 다른 난민촌과 교류관계는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 자주 교류를 합니다. 매주에 한 번씩도 모이고 큰 행사가 있을 때는 한 달에 한 번씩도 만나므로 서로 잘 알고 있지만 다른 난 민촌의 사정에 대해서는 그곳 행정관이 말할 수 있지 제가 말하기도 부적절하고 말해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15) 티베트 불교 종파로 여러 가지가 있는데 티베트의 가장 오래된 종파로 여기 는 닝마파, 몽골제국을 사로잡은 사까파, 정연한 승단질서가 있는 겔룩파, 밀교 수행자의 커뮤니티인 까귀파,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은 쫑카빠 등이 있다. 이시 하마 유미코 편, 김한웅, 역, 티베트 달라이 라마의 나라 (이산, 2007) 참조.

(10)

<지도3> 네팔에 형성되어 있는 티베트 난민촌을 표시한 것이다.

출처: http://www.centraltibetanreliefcommittee.org/settlements/nepal/settlements- in-nepal.html

- 다른 난민촌과 만나는 것은 특별한 규칙이 있습니까?

특별한 규칙은 없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자주 만나고 만나는 장소도

상황에 따라 다양한 난민촌에서 모이게 됩니다.

- 주로 언제 다른 난민촌과 같이 만납니까?

특별한 규칙은 없지만 다람살라에서 중요 전달사항이 있거나 긴급한 사안이 발생하였을 때 서로 연락하여 모이고 의논도 합니다.

- 네팔에는 몇 개의 티베트 난민촌이 있습니까?

정확하게 몇 개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13-14개 정도 있습니다.(<지도 3> 참조) 카두만두, 보다 등에도 난민촌이 있습니다.16)

16) 중앙정부의 자료에서는 네팔에 10개의 난민 난민촌이 있다고 하였으나 네팔 지역에 있는 난민촌이라도 관계가 주로 중앙정부와 수직적인 관계에 집중되어 있어서 다른 난민촌의 사정을 정확하게 잘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지도 6에 의 하면 난민촌의 숫자를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어 보인다. 크게는

(11)

- 인도, 부탄, 네팔 등에 흩어져 있는 티베트 난민의 인구 구성은 어떤 가요?

2007년에 인구조사가 있었고 그 이후에는 인구조사를 하지 않았는데, 지금 제 손에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네팔에 2만여명, 부탄에 4-5천명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은 인도에 거주 하고 있습니다.

2. 난민촌 행정관 파견과 역할

- 각 난민촌의 행정관은 어떻게 선출되는 것입니까?

각 난민촌의 행정관은 다람살라 중앙정부에서 직접 파견되는 것입니 다.

- 행정관의 임기는 어떻습니까?

저는 이곳에서 이미 4년을 임직하였는데 언제까지 이곳에서 행정관을 하게 될지는 중앙정부가 결정합니다. 특별한 임기가 있는 것은 아니고 중앙 정부의 판단에 따라 변하게 됩니다.

- 행정관이 되기 위해서 특별한 훈련이나 자격이 필요합니까?

특별한 자격 같은 것은 없습니다. 중앙정부에서 결정하면 행정관으로 파견됩니다.

- 이 난민촌에는 정치적으로 행정관이 있고 종교적으로는 린포체 (Rinpoche)17)가 계신데 둘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이 난민촌의 정치 행정적인 일은 행정관이 제가 맡고 종교적인 것은 9개 난민촌이 있는데 그중 2개 난민촌 아래에 각기 3개의 작은 난민촌이 있기 때문이다.

17) 린포체(Rinpoche)는 티베트 불교의 영적 지도자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된다.

(12)

린포체가 맡기 때문에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우리는 모두 커뮤니티 홀에서 만나 서로 토론하고 도 와가며 의식을 치루곤 합니다.

- 행정관은 임기나 상황에 따라 바뀌고 또 인도 티베트 중앙 정부에 서 파견되어서 오는데, 종교적인 지도자는 거의 수십년을 난민촌에 계 시던 분이어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을텐데 어떠신지요?

비록 하는 일과 자라온 배경이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하는 일이 분명 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충돌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 언제 난민촌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 같은 것을 하나요?

여러 가지 경우가 있지만 급한 일이 있거나 티베트 중앙 정부에서 전 달 사항이 있으면 커뮤니티 홀에 모이게 해서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긴 급 사안에 대해서도 토론을 합니다. 티베트에서 저항운동이 발생하거 나 분신자살이 있을 때 이 사실에 대해서도 공지를 하고 그들의 영혼 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를 합니다.

- 당신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습니까?

저는 1969년 인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저의 부모는 티베트에서 살다가 네팔을 거쳐 인도로 갔고 거기에서 제가 태어난 것입니다.

- 난민촌에서 행정관은 주로 어떤 일을 합니까?

사회복지, 교육 등 난민촌 행정과 관련하여 전반적인 일을 합니다. 물 론 중앙 정부에서 내려오는 공지사항 등을 전달하는 역할도 합니다.

- 지금 하시는 행정관은 이 난민촌에서 몇 대째에 이른 건가요? 행정 관의 공식명칭은 무엇입니까?

이 난민촌이 생긴 이래 제가 지금 12대째입니다. 공식명칭은 영어로는 Settlement Officer입니다.

(13)

<그림6> 티베트 수공예 판매처에는 티베트에서 발굴한 화석 뿐만 아니라

티베트 칼 및 조그만 장신구 등도 판매하고 있다.

<그림4> 안나 푸르나 베이스 캠프로 가는 도중 촘롱을 지나면 등산로에 티베트 수공예품을 판매한다는 간판이 서 있다.

<그림5> 히말라야 등산로 주변의 티베트 수공예판매점은 양말, 옷, 가방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판매하고 있다.

- 행정관으로 네팔에 오기 전에 인도에서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티베트 중앙정부에서 10년간 재정부에서 일을 했습니다.

- 굉장히 중요한 부서에서 일을 하셨는데, 티베트 중앙 정부의 재정은 어떻게 구성됩니까?

대부분은 티베트인들로부터 세금 을 받고 그 세금이 정부가 운영 하는 자금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 해외로부터 오는 원조는 어느 정도입니까?

해외 원조는 많지 않고 많은 부 분은 티베트인의 세금으로 충당 하고 있습니다.

3. 난민촌의 일상생활, 교육환경 및 사회적 처우

(14)

<그림8> 타쉬 팔키엘 난민촌 카페트 공장을 소개하는 팜플렛 전면

<그림7> 타쉬 팔키엘 난민촌 카페트 공정 과정에 대해서 설명한 내용

- 당신은 행정관 이시니까 일반적 인 난민들과는 조 금은 다른 생활을 하시겠지만 티베 트 난민들의 일상 생활이 어떤지 소 개해 주세요?

이곳에 거주하고 계신 분들은 기본 적으로 길거리에 서 기념품을 팔아 생활을 합니다. 히 말라야 관광이 가 능하여 관광객이 많이 있을 시점을 중심으로 하기 때 문에 1년에 4개월 -5개월 정도 기념 품을 팔아서 생활 할 수 있으므로 대 부분의 시간은 기 념품을 만들거나

그것을 판매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그림4>, <그림5> <그림6>참 조)반지나 팔지, 목걸이, 양말, 의복, 카페트 등 일상생활에 필요하고 티베트의 기념품이 될 만한 것을 만듭니다(<그림7>, <그림8> 참조:

이 난민촌의 카페트 제작과 판매에 대한 팜플렛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침 4-5시면 일어나서 사원에 가서 예불드리거나 각자의 집에서 예

(15)

불을 드리기도 합니다. 7-8시에 아침식사를 한 후 일하러 나갑니다.

- 4-5개월 정도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농사 등을 하면서 보냅니까?

농사는 하지 못합니다. 이곳 난민촌은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이어서 농 사를 지을 만한 여유의 땅이 전혀 없습니다. 나머지 시간은 관광 시즌 에 팔 수 있는 제품을 만들거나 쉬거나 신앙생활에 전념합니다.18)

- 네팔 정부에 땅을 더 요구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네팔정부에서 저희를 위해 더 이상의 땅을 내어주지 않 을 것입니다.

- 이 난민촌에는 라마승이 몇 분이며 학생들은 얼마나 있습니까?

110여분의 라마승이 있습니다. 유치원부터 7학년까지 학생들은 133명 이 있습니다. 그리고 68명의 학생들이 타지, 즉 타실링(Tashiling), 마 낭(Manang), 돌파탄(Dhorpatan) 등지에 있는 난민촌에서 와 이곳의 기숙사에 머물면서 학교를 다닙니다. 타지에서 온 학생들은 5학년부터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7학년에 졸업하며 더 공부하려는 학생은 다 른 지역에 있는 티베트인 학교를 다닙니다. 그곳은 8학년부터 12학년 까지 있는데,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겠지만 600-700명의 학생이 있을 것입니다.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네팔이나 인도 등 다양한 곳으로 대학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18) 건물의 옥상이나 여분의 땅 등을 이용한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채소나 특용작 물 등의 농사를 지을 수도 있을 것 같으나 그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고 전통적으로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삶의 기반을 삼고 있는 것으로 보였 다. 거기에는 티베트인들의 식습관이 채소나 과일을 많이 먹지 않아서 그렇기 도 하지만 포카라 기후에 맞는 채소 재배 등에 익숙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 기도 할 것이고 채산성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16)

티베트 난민들은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없습니다.19) 일종의 불법으로 거주하고 대학을 다닌 것으로 되어 있어서 다른 곳에 정식적 으로 취직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 티베트 난민들이 대학 졸업 후 어떤 생활을 합니까?

그들은 물론 일을 할 수는 있습니다. 개인적인 능력에 따라 직업을 찾 아 일을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네팔 정부가 일을 제공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일부는 외국 NGO 단체에서 제공하는 일을 하는데, 기본적 으로 계약에 의해서 1-2년간 일을 하게 되므로 지속적으로 일을 하기 는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도로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도 크게 활용도가 없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 인도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까?

인도는 개방되어 있어서 인도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경지대에서 검문에 의해 티베트인이 붙잡히게 되면 티베트인들은 어 떠한 서류로도 자신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가끔 돈을 주고 빠져 나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 신분증이 문제가 된다면 티베트 중앙 정부가 신분증을 만들 수는 없는지요?

물론 신분증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분증은 난민촌내에서 만 통용될뿐 외부적으로 전혀 인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난민 촌내에서는 특별한 신분증이 필요하지 않구요. 따라서 신분증을 만들

19) 네팔 정부의 정책에 따라 Refugee Card가 있었던 시절도 있었고, 1974년에는 게릴라 활동을 했던 1500명의 티베트인에게 네팔 시민권을 준 Angrikta도 있 었다. 1970년대말 히말라야 주변에 거주하는 티베트인들에게 Nagrikta라 하여 시민권을 주기도 하였지만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이를 활용하지 않았다. 그후 대부분의 티베트 난민은 법적 신분이 보장되지 않은 실정이다. “Refugee Report: Dangerous Crossing -2011 Update” (International Campaign for Tibet, October 11, 2012), pp.58-60.

(17)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20)

- 일반적으로 티베트인을 어떻게 식별할 수 있습니까?

생김새나 옷차림 등으로 식별할 수 있습니다. 언어나 문화 등을 통해 서도 식별가능하지요.

- 네팔내에서 티베트인의 권한과 의무는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네팔 선거에 참여할 선거권 이 없습니다. 세금을 내야할 의무도 없습니다. 네팔정부로부터 돈을 보 조 받거나 정부가 제공하는 일자리를 통해 돈을 벌고 있는 것이 아니 어서 네팔 정부에 세금을 내지도 않습니다.

- 혹시 난민촌이 과거 중국의 ‘인민공사’처럼 난민촌 내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고 공동으로 생산하고 그 결과를 나누는 체제를 갖고 있는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난민촌 내에 거주하는 사람은 각기 자신이 노 력해서 일을 하고 그 번 돈으로 생활을 합니다. 각자의 재정은 각자가 관리합니다. 병원은 네팔에 있는 병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비용은 네 팔인들과 똑같이 지불해야 합니다.

- 직업을 찾기 어렵다고 했는데, 티베트 등과 무역 같은 것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20) 티베트에서 망명한 티베트인은 티베트 중앙정부로부터 ‘랑쩬락뎁’이라는 티베 트인 등록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 등록을 하게 되면 출생증명서, 혼인증명서 등의 각종 증명서 신청권, 티베트 정앙 정부 또는 티베트 대표자의회에서의 취 임권, 선거 투표권, 티베트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공립학교, 승원, 직업훈련 시 설 등의 참가권, 티베트 중앙정부 공인의 비정부기관(NGO) 등에 대한 등록권 등 각종 권리가 보장된다. 이 등록증은 해외 거주 티베트인에게 모두 발급되 고, 외국에서 태어난 망명 티베트인이라고 해도 티베트 중앙정부에 세금을 내 면 이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이시하마 유미코 저, 김한웅 역, 앞의 저서, 295쪽 참조. 본고에서는 네팔 내에서 네팔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할 만한 티베 트인 신분증이 없는 것으로 보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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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와의 무역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네팔 정부가 허락하지 않 습니다. 해외무역을 하려면 등록이 되고 허가증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는 아무런 공식 자료가 없어서 등록을 할 수도 없어서 허가증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 개인들은 각기 벌어서 생활한다지만 종교에 종사하는 라마승들은 어떻게 생활할 수 있습니까?

라마승은 기념품을 제작해서 팔지 않기 때문에 신도들이 공양하는 헌 금으로 생활하게 됩니다.

- 나이 들어 일을 할 수 없거나 자식이 없어 봉양할 수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합니까?

그런 경우는 이 난민촌에도 32명이 있는데,21) 노인 복지원에서 생활하 고 이곳의 경비는 해외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충당합니다.

4. 티베트 난민의 희망

- 개인적으로 희망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티베트가 하루속히 자유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나는 인도에서 태어났 고 아직 한번도 티베트를 가본 적이 없지만 제가 죽기 전에 나의 티베 트 땅을 밟아 보는 것이 희망입니다. 이것은 단지 내 개인의 희망일 뿐만 아니라 난민촌에 거주하는 모든 티베트인들의 희망일 것이다.

- 달라이 라마가 망명하고 나서 티베트 중앙정부가 인정한 판첸라마 가 어떻게 되셨는지 아는 바가 있는지요?

원래 공식적으로 인정된 판첸라마가 어떻게 되셨는지 우리는 알지 못 21) http://www.centraltibetanreliefcommittee.org/settlements/nepal/tashipalkiel.

html에서는 37명으로 명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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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그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20년여 전에 체포되어 감옥에 가 있는지, 중국내 어느 곳에 연금되어 있는지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합니다. 그후 중국 정부가 새롭게 판첸라마를 선출하였습니다만 티베트인들은 원래 판첸라마를 언젠가는 다시 뵐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아직 살아 있다고 믿고 있지 만 안타깝게도 현재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22)

- 티베트 중앙 정부가 중국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티베트 중앙 정부는 중국에게 티베트인의 자유 그 자체를 요구하는 것 은 아닙니다. 티베트 지역은 티베트인이 통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외의 지역에서 중국이 통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티베트가 완전히 독립된 국가가 아닐지라도 우리가 자유롭게 티베트를 드나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만족합니다. 물론 우리는 달라이 라마가 어떠한 정치적 방안에 대해 행복하다고 여기면 우리 또한 그 방안에 대해 만족합니다. 만약 달라이 라마가 중국의 통치하에서 티베트에 있 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함께 행복한 마음으로 티베트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 매우 어렵고 힘들고 한편 슬픈 질문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달라이 라마가 연세가 들어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의 사후에 대해 특별한 계획 이 있으신지요?

개인적으로는 달라이 라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는 확실히 티베트로

22) 1995년 다람살라의 달라이라마 14세는 티베트에 거주하는 6살짜리 겐뒨최기 니마를 입적한 판첸라마의 전생으로 공포했다. 이 발표 후 중국 정부를 그를 납치했으며 이 전생 인정에 관계한 승려들을 처벌하였다. 같은 해 11월 중국정 부가 독자적으로 판첸라마 후보자를 조캉사원에 모아 금병의식을 치루고 겔첸 노르부를 판첸라마로 인정하였고, 12월 8일에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세계 최연 소 정치범’인 겐뒨최기니마는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이다. 이시하마 유미코 저, 김한웅 역, 앞의 저서, p.302.

(20)

돌아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 뿐만 아니라 인도, 네 팔, 부탄에 거주하는 난민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가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난민은 모두 그와 함께 티베트로 돌아가 있을 것입니다.

- 그래도 영원히 살 수 없는 인간이기에 사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 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달라이 라마는 인간이기 때문에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알지만 달라이 라마의 사후를 염려하기 전에 티베트가 해방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만 믿습니다. 그가 113세가 되기 전에 티베트로 돌 아가는데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제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우리의 조국인 티베트에 가 있을 것 이기 때문입니다.

- 왜 달라이 라마가 113세 이전에 티베트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 는지요?

신탁에 의하면 달라이 라마가 113세가 되기 전에 티베트는 독립할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믿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의 사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물론 큰 변고가 없는 한 113세 이상 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Ⅲ. 결 론

본고에서는 해외에 있는 티베트 난민촌 중 네팔 포카라에 있는 타시 팔키엘 티베트 난민촌의 행정관을 인터뷰함으로써 육성을 통해 그들의 실상에 대해 좀 더 살아 숨 쉬는 이해를 시도해 보고자 하였다. 제한 된 시간 동안 깊이 있는 문제까지 세세하게 다루기는 어려웠지만 대화 의 내용을 통해 그들의 삶과 사회적 처우, 또 그들의 희망을 읽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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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조금이나마 실상을 파악해 볼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티베트 난민 촌이 직면한 문제와 더불어 이번 인터뷰를 통해 얻은 시사점을 제시함 으로써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1959년 달라이 라마가 인도에 망명하면서 다수의 티베트인이 종교적 인 탄압을 피해, 자녀들에게 티베트인의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있는 교육을 위해, 정치적인 자유를 위해, 더 나아가 중국의 서부 대개발에 의한 티베트의 경제 잠식을 피하기 위해 망명하게 되었다.23) 티베트인 의 삶의 기반 형성과 티베트의 미래를 위해 국제적인 기구나 인도, 네 팔, 부탄 정부의 협력으로 티베트 난민촌이 형성될 수 있었지만 헤쳐 나가야 할 난제는 첩첩산중이다. 물론 가장 힘든 것은 나날이 드높아 가는 중국 정부의 세계적 위상으로 인해 세계 각국이 중국과 교류를 강화하려고 하므로 어느 국가도 공개적으로 티베트 중앙 정부에 대해 지원하기가 쉽지 않은 점일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는 여기에서 논외로 하고 티베트 난민촌의 문 제에 집중해 보아도 난제는 많다. 난민촌의 인구 규모가 큰 변동 없이 안정되기만 해도 문제해결이 용이할 수 있는데, 중국의 변경정책이나 티베트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지속적으로 난민이 발생하는 것도 문제 이다. 1960년대 초에 난민촌이 형성되었지만 1980년대 말에 티베트에 서 확대된 저항운동으로 또 다시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였고 그 후에도 다양한 저항운동이 있을 때마다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희망을 찾아 사선을 넘어 인도, 네팔, 부탄에 있는 티베트 난민촌까 지 오는 것도 쉽지 않은데, 월경에 성공하지 못하고 중국 당국에 체포 된 티베트 난민들은 전기 고문을 당하거나 심하게 두들겨 맞은 후 감 옥에 수용되기도 한다.24) 티베트 제2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시가체 23) “Refugee Report: Dangerous Crossing –2006 Update” (International

Campaign for Tibet, February 12, 2007), pp. 41-48.

24) “Refugee Report: Dangerous Crossing –2006 Update” (International Campaign for Tibet, February 12, 2007), p.36. http://www.savetibet.org/2006 -refugee-report-dangerous-crossing-2006-update/#sthash.7H5HuLgC.dpuf; 보 노짓 후세인, 「비판적인 눈을 통해 본 티베트: 지정학, 디아스포라 그리고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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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gatse)에 그들의 수용소가 있다. 설사 월경에 성공했다고 해도 해 외 난민촌의 제한적인 주거 공간과 일자리 등으로 신생 난민들을 신속 하고 적절하게 수용하기도 쉽지 않다. 대부분의 국가가 중국과 화해 무드를 조성하고자 하기 때문에 티베트 난민들에게 선심을 베풀기가 어렵고 또한 자국 사정도 여유가 없으므로 많은 영토와 직업을 제공해 줄 수 도 없는 상황이다.

네팔 정부는 1980년도 말에 발생한 티베트 난민을 더 이상 수용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이들이 인도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하는 ‘신사 협정’25)은 체결하였다. 즉, 난민이 네팔을 거쳐 인도를 갈 수는 있지만 네팔에 머물 수는 없으므로 난민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또한 티베트 중앙 정부도 모든 난민을 인도에 수용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진퇴양난이기도 하다.

티베트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제가 산적해 있지 만 네팔 포카라 타시 팔키엘 난민촌 행정관을 인터뷰 하면서 느낀 시 사점을 4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미래 창출을 위한 토론(소통)의 장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티 베트 중앙 정부 뿐만 아니라 티베트인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지킬 수 있는 정치적 문화적 방안에 대해 수직적으로 수평적으로 논의하고 소 통할 수 있는 장을 형성하고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 티베트 난민들은 티베트 중앙정부의 정책이나 달라이 라마가 선택한 정치적 노선 등에 대해 대체적으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지만 티베트의 미래를 위 해 다양한 방안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고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장이 형성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대외적으로 중국 및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며 상호 협 체성의 형성」『아시아저널』창간준비호, 2009년 봄, 80쪽. 고문은 발로 차거나 때리는 것에서 성기나 입 같은 부위에 가하는 전기 고문, 뜨겁게 달군 물건을 피부에 지지는 것, 자동 압박 수갑을 채우는 것, 장기 독방 감금 등 다양한 유 형이 포함된다.

25) “Refugee Report: Dangerous Crossing –2011 Update” (International Campaign for Tibet, October 11, 2012),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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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하고 공조할 것인가 하는 것은 향후 티베트(인)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티베트 중앙정부와 중국 및 국제사회 와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요소에 의해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민첩하고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출 필요가 있 다. 티베트 중앙 정부는 종교적 지도자와는 달리 정치적 지도자도 세 웠지만 역사적, 종교적 문화에서 형성된 수직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 고 종교 및 정치적 지도자의 역할도 혼재된 듯이 보인다. 티베트의 전 통문화와 그들의 아이덴티티도 지키지만 국제사회의 정치 및 시대적 변화와 궤도를 맞추어 가면서 ‘티베트인이 행복할 수 있는’ 구조와 방 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둘째, 민주화 저변 확대를 통한 경쟁력 함양이 필요하다. 민주적 선 거를 통해 유능한 지도자를 선출하여 특색 있는 개별 난민촌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티베트 중앙정부에서 개별 난민촌에 각각의 행정관을 파 견하여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강화하고 정치적으로도 통일된 목소리를 내게 하는 것은 행정적으로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자칫 하명식의 관료주의화가 강화될 수 있어서 행정관이 각 난민촌의 상황에 맞는 진정한 변화를 꾀하는 역할을 하기보다 중앙정 부의 명령 전달과 이행 및 현상 유지에 충실할 수도 있다. 따라서 개 별 난민촌 출신 중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능력이 있으며 난민촌의 정 치적 경제적 위상에 변화를 줄 만한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는 것도 활 력을 불어 넣는 방안이 될 수 있다. 개별 난민촌의 민주화 및 자율화 는 향후 풀뿌리 민주역량을 강화시키고 더 나아가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티베트(인)을 형성하는데 기초를 다져 나갈 수 있다.

셋째, 난민촌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함으로써 처우 개선을 강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난민촌에 거주 하고 있는 티베트인의 법적 신분, 교육문제, 거주문제, 직업 문제 등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국제사회에 알리면서 스스로의 노력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개별 사안에 대해 어떠한 난관 에 봉착하고 있으며 해결 가능한 방안은 무엇인지 또 어느 정도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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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도가 있는지에 대해서 당사자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한다면 국제사 회의 관심을 효과적으로 유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데도 활용할 수 있다. 물론 포괄적으로 티베트인의 처 우 개선이 효과적으로 논의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 서 상호 수용가능한 개별 사안이 무엇인지 부터 고민하여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들이는 것도 큰 문제 해결 방안에 접근해 나가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티베트 문화의 세계화 및 개개인의 교육 강화가 필요하 다. 네팔 포카라 타시 팔키엘 난민촌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난민촌이 티베트 문화를 상품화하고 거기에서 얻은 이윤으로 그들의 생활 기반 을 삼고 있기 때문에 티베트 문화 상품의 전략화, 고급화, 대중화 등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정 문화를 실질적인 상품으로 제작하는 데는 첨단의 과학기술이 요구되기도 한다. 티베트 난민촌에서 제작하 는 모든 제품에 이러한 정교함을 요구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 양한 관광객에게 판매할 수 있는 전략적인 제품을 만들 필요가 있다.

티베트 문화 색채가 담긴 값싼 대중적인 기념품도 필요하지만 그들 문 화를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서 세련되고 고급화된 문화 상품으로 확대 해 나갈 필요도 있다. 이를 통해 티베트 문화를 세계화시키는데도 도 움이 될 수 있고, 경제적인 이윤도 창출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히말라야 관광 시즌 이외의 시간을 활용하여 다양한 층위의 교육 및 재교육을 통해 개별 티베트인의 경쟁력을 강화시켜 나가는 프 로그램을 고안해 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을 당장 시행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조건을 감안하여 점차 확대 시행해 나가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개별 티베트인의 경쟁력이 강 화되어 있을 때 중국 및 국제사회와의 관계에서도 티베트 중앙 정부의 위상이 더욱 경쟁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종합해 본다면, 네팔 포카라 타시 팔키엘 티베트 난민촌 상황에서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세계가 그들을 외면하려고 해도 그들은 여전 히 티베트의 아이덴티티를 지키기 위해 희망을 품고 어려움을 견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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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 있다. 어떻게든 그들의 아이덴티티와 문화를 지키는 것 그 자체 가 그들에게는 큰 희망이자 미래가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티베트인의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아이덴 티티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개별 난민촌의 특성화, 수평화, 네트 워크화, 민주화, 자율화 추진을 확대하고 유능한 인재를 발탁함으로써 티베트 중앙 정부 뿐만 아니라 개별 난민촌의 정치적 경제적 위상을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티베트 문화 상품의 전략화, 고급화, 대중화를 통해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위상 변 화를 꾀하는 것도 희망을 축적해 나가는데 어느정도 도움이 될 수 있 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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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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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Abstract)

Willful Oblivion and Desired Identity

: A Focus on Tibetan settlement in Pokhara Nepal

Park, Sun Young

This paper is trying to dipict the life of the tibetan settlement Tashi Palkhiel in Pokhara Nepal by interviewing Tshering Doma, the executive of the settlement office as of April 5th 2014. Through the following qualitative interview more was understood about the Tibetan life, the social difficulties they face along with their hopes for the future. In addition, The scope of this paper will not only focus on the problems the Central Tibetan Administration(CTA) faces in exile, but attempts to understand what kind of difficulties 14 million Tibetan refugees in India, Nepal, and Bhutan encounter on a daily basis.

Since the 1959 exile of the Dalai Lama to India, a vast majority of Tibetans escaped Tibet for reasons pertaining to religious, ethnic, political and economic hardships. As a result, the Tibetan settlement was established to maintain the future of Tibetan culture, and for sustaining their fundamental life provided by aid given to them from international organizations and in cooperation with the Indian, Nepalese, and Bhutanese governments.

(28)

As China’s global status increases, CTA faces a number of challenging factors. First, If refugees begin to emigrate due to the changing of China’s border policy or political situation in Tibet, CTA has limited resources to accommodate them properly. It’s very difficult to cross the border into India, Nepal, and Bhutan from Tibet; cases of unsuccessful border crossing by Tibetan refugees has resulted in them being arrested by Chinese authorities, imprisoned, and subjected to brute force and torture. Finally, Tibetan refugees have to overcome problems of legal status, residency, career, and education issues. Encountering so many of these challenges on a daily basis, justifies the need for a plan to be implemented that can ensure that the Tibetan people can maintain their own identity. Not easy to overcome cultural conflict between first generation refugees and second generation who born abroad, even different opinion on how to establish a relationship CTA with China.

Consequently, efforts to maintain the Tibetan identity remains a challenge as the Tibetan people face an uphill struggle to sustain hope amidst the constant need to endure hard times and the growing commercialization of their culture. However, In spite of these barriers, The Tibetan people still strive to preserve their identities with great hope for the future.

주제어: 타시 팔키엘, 티베트 난민촌, 티베트 중앙 정부, 네팔 포카라, 다람살라 關鍵詞: 他是 把其儿,藏民村, 西藏中央政府, 尼泊尔 博卡拉, 达兰萨拉

Keywords: Tashi Palkhiel, Tibetan Settlement, the Central Tibetan Administration, Pokhara Nepal, Dharamsala

(원고접수: 2014년 10월 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4년 10월 10일, 수정 원고 접수: 10월 19일, 게재 확정: 10월 25일)

Referen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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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층은 진로 단계, 연령, 성, 학력 등에 따라 다양한 요구와 취업애로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획일적 취업 대책은 청년 취업난 해소에 한계가 있으며, 특히 인문계 대졸자의 경우 대학에서 직업세계와의 연계성이 높지 않은 순수학문을 공부하 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산업계에서 요구하는 역량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상황에서는 취 업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