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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산성지 일원 문화재 시굴조사 약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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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산성지 일원 문화재

시굴조사 약보고서

(2)

목차

Ⅰ. 조사개요 1

Ⅱ. 유적 환경 2

1. 자연지리적 환경 2

2. 역사·고고학적 환경 2

Ⅲ. 조사내용 8

1. 조사방법과 토층 8

2. 조사내용 11

1) 체성 14

2) 건물지 15

3) 우물터 16

4) 호안석축 16

Ⅳ. 조사성과 17

학술자문회의 의견서 19

유적 사진 20

(3)

배산성지 일원 문화재 시굴조사

Ⅰ. 조사개요

조사대상지역은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산38-1번지 일원으로 해발 254m 의 배신에 위치한다. 배산 성지는 정상부의 9부 능선을 이중으로 에워 싼 전형 적인 테뫼식 토축산성으로 알려져 있으며1), 현재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로 지 정되어 있다. 배산 성지는 지형적으로 경사가 급한 사면에 성벽이 위치하고 있 는데 산책로 및 소규모 체육시설 등이 조성되면서 크게 훼손되어 성벽의 존재여 부 파악조차도 어려운 실정이다.

2009년에는 부산박물관에서 정밀 측량조사를 실시하여, 성곽의 범위와 규모 및 잔존상태를 확인하였다. 이러한 정밀 측량조사를 기초로 하여 연제구청에서 는 배산성지에 대한 역사적 ․ 학술적 가치를 규명하고 나아가 유적을 정비 ․ 복 원하기 위하여 우리 박물관에 시굴조사를 의뢰하였다. 이에 부산박물관에서는 기본적인 성곽의 축성법과 집수지의 구조를 확인하고, 향후 정밀 발굴조사를 통 한 유적의 초축 시기와 증·개축 여부를 규명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확보하고자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시굴조사는 2016년 3월 29일부터 시작하여 2016년 5월 25일에 완료하였다.(문화재청 허가 제2016-0163호, 실 조사일수 30일)

금번 시굴조사의 자문위원과 조사단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자 문 위 원 : 정징원(전 문화재위원) 심봉근(전 문화재위원)

김두철(부산대학교 고고학과 교수)

김기민(부경문물연구원 고고문물연구실장) ․ 조사단구성

조 사 단 장 : 박방룡(부산광역시립박물관장)

책임조사원 : 나동욱(부산광역시립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조 사 원 : 박정욱(부산광역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준 조 사 원 : 안해성(부산광역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보 조 원 : 박가영(동국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수료)

1) 부산대학교박물관, 1977, 『부산시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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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유적환경

1. 자연 지리적 환경

유적의 위치는 연제구 연산동 산38-1번지 일원으로 해발 254m에 자리 잡 은 배산 정상부 아래에 위치한다. 배산은 금련산맥에 속하는 산으로 안산암 질 암석으로 구성되었고, 조사지역의 대토양군은 송정통의 적황색토이다. 해 발 254m의 독립구릉성 산지로, ‘잔뫼산’ 또는 ‘잘미산’으로 불리고 있 다. 비교적 낮은 산지의 고도와 규모에 비해 산정 부근의 경사가 급하다. 북 쪽 산록은 수영강 쪽으로 향함에 따라 완만해지며, 소 선상지로 이어진다2). 배산의 북쪽에는 온천천과 거제천이, 그리고 동쪽에는 수영강과 온천천이 합 류하여 수영만으로 흐르고 있다. 배산의 남쪽에는 황령산(428m), 서쪽에는 백양산(641m), 북쪽에는 구월산(314m)이 위치한다. 산 정상부는 황령산으로 가려진 남쪽 일대를 제외하면 사방으로 조망이 용이하다. 북쪽으로는 동래와 반송 일대, 동쪽으로는 수영만이 조망된다.

2. 역사·고고학적 환경

배산이 위치한 연제구 연산동 지역의 역사적 유래3)는 조선시대까지 이 일 대의 지명인 동래에서 찾을 수 있다. 동래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으로

≪삼국사기≫ 거도열전(居道列傳)에서 신라 탈해왕 때 거도(居道)가 간(干) 이 되어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멸했다는 내용이 전해진 다. 특히 거칠산국은 삼국사기에서도 등장하는데 ‘거칠산’은 우리 말의

‘거친 뫼’이고, 한자어로 ‘황령산’(荒嶺山) 즉 연산동고분군의 남쪽에 위 치한 산이다. 한편, ≪삼국지≫ 「위서」 한전(韓傳)의 기록에서‘변한 12국’

중 ‘독로국’(瀆盧國)이 보이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거제도설4)과 동래설5) 이 있다.

그 중 동래설과 관련하여, 부산지역 삼한시대 유적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부산에서는 조도패총·두구동 임석유적·거제동 주거지·장전동 지석 묘·복천동 내성유적·온천동유적까지 총 6개소에 이르는 원형점토대토기

2) 釜山廣域市史編纂委員會,2000,『釜山地名總覽 - 연제구·수영구·사상구편 -』, pp. 50~51.

3) 釜山市史編纂委員會, 1989, 釜山市史 제1권.

東萊區誌編纂委員會, 1995, 東萊區誌.

釜山廣域市 蓮堤區, 2005, 蓮堤區誌.

4) 東亞大學校博物館, 1991, 巨濟古縣城址.

5) 丁仲煥, 1970, 「독로국고」, 백산학보 제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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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 수습된 파편이며, 청동기·철기·목관묘 등 삼한 전기의 특징을 반영할 수 있는 유물이나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원형점토대토기문화가 부산지역까지 파급되었다는 것 정도만 확인될 뿐, 지역집단의 규모나 사회구조를 살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삼각형점토 대토기가 출현하는 단계에서는 온천동 환호유적, 동래 내성유적 등 취락과 관련된 유구들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후 노포동유적·온천동유적·방곡 리유적 등지에서 목관묘와 철기·와질토기를 갖춘 삼한 전기문화가 뚜렷하 게 확인된다.

복천동고분군에서는 기원 후 2세기 경에 해당하는 목관묘가 조사된 바 있 어, 복천동고분군 조영의 시점으로 볼 수 있으며, 삼국시대까지 조영되면서 대규모 고분군을 이룬다. 따라서 동래지역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통치 집단 이 등장하였음을 알려준다. 5세기 후반 온천천의 남쪽, 연산동 구릉 일대에 는 연산동 고총고분이 조영되면서, 통치 집단의 세력이 한층 강화되었음을 알려주며, 이 일대가 당시 부산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정 치체와 관련하여, 독로국의 위치가 동래와 온천천 일대였을 가능성이 큰 것 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에 신라 경덕왕 16년 12월에 이전 의 거칠산군을 동래군으로 고치고, 인근의 대증현을 동평현으로 고쳐 동래군 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고 전하고 있어, 동래군 이전에는 독로국이란 명칭 은 보이지 않고, 거칠산국이란 국명이 확인된다.

동래군은 지금의 양산인 양주 밑의 12군 중 하나로 동래군 밑에는 동평현 과 기장현을 두었다. 당시 동래군의 크기는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동으로 기장현 경계까지 25리 60보(약 10㎞), 서로는 양산 임내 동평현까지 10리 20 보(약 4㎞), 남으로는 해안까지 19리 250보(약 8km), 북으로는 양산군까지 22 리 203보(약 9㎞)라고 전한다. 따라서 동래군은 지금의 부산 동쪽 영역, 즉 금정구·동래구·해운대구·수영구·남구·부산진구 일대에 해당된다.

당시 동래군의 치소성(治所城)으로 현재 망미동에 위치한 배산성지 동남쪽 의 동래 고읍성을 들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현 고적조에 “고읍 성은 해운포에 있다. 동남은 석축이며 서북은 흙으로 쌓았다. 둘레가 4,430척 이나 지금은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삼한·삼국시대 부산의 중심은 온천천 일대였음이 문헌 기록과 유적으로도 증명된다.

배산성지의 주변 유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6)

1) 연산동고분군

연산동고분군은 삼국시대 부산지역의 유일한 큰 봉분이 있는 고총고분군 으로서 복천동고분군과 더불어 삼국시대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데 있어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최근 수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연산동고분 군의 면모가 밝혀졌다. 배산의 북쪽으로 뻗어 나온 40~60m 전후의 능선 정 상부를 따라 남북방향으로 18기의 고총고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구릉 사면에는 천여 기 이상의 중소형 고분이 분포한다. 고분군의 조영 시기는 복 천동고분군의 조영이 끝나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대에 이르며, 인근의 배 산성지에서 유사한 토기가 출토됨을 근거로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도 지적된 바 있다.

경주 · 양산 · 고령 · 함안 · 창녕 · 합천 등 영남지역의 주요 거점 지역에 는 구릉 능선부를 따라 고총고분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이 고총고분은 해당 지역을 통치하던 당대의 최고 지배층의 고분이고 묘역이었다. 따라서 연산동 고분군도 삼국시대 부산지역을 통치하던 최고 지배층의 고분군이고 묘역이 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2) 동래고읍성

동래고읍성은 배산의 남쪽 평탄지인 망미동 일대에 위치한다. 동래고읍성 은 그간 정확한 실체를 알지 못하고 문헌으로 위치 비정만이 이루어졌는데 최근 이 일대에 부산지방병무청의 청사가 건립되면서 일부 구간에 대한 조 사가 이루어졌다6). 조사 결과, 동래고읍성은 기단석축형 판축토성으로 지형 상 구릉의 하단 일부에 걸쳐진 평산성이다. 평면형태는 일부 구간만 조사되 어 명확하지는 않으나 발굴조사 및 일대의 지형, 구 지적도상의 지형을 고려 하면 남쪽으로 약간 넓은 말각방형의 형태로 추정된다. 또한 내부에서는 우 물, 건축물과 관련된 지진구등이 확인되었으며, 각종 기와 및 토기 등의 생 활 관련 유물도 다량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9 세기 경에 초축되었다가 11세기 경에 1차 수축, 고려 중기 13세기 중반 이전 에 2차 수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4세기 중반경에 폐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즉 조선시대에 새로운 읍성인 동래읍성이 현재 복천동, 수안동 일대에 축성되면서 중심지 역할을 상실한 것으로 보고 있다.

6) 東義大學校博物館, 2006, 『釜山 望美洞 東萊古邑城』

慶南文化財硏究院, 2007, 『東萊 古邑城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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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래패총

온천천 북쪽의 현 동래역 일대에는 삼한·삼국시대의 생활 폐기장인 동래패 총과 마을유적이 위치한다. 사적 제192호인 동래패총은 기원 전후부터 5세 기까지 형성된 생활쓰레기 매립지이다. 전체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 았지만 패총으로부터 동북쪽 일대에는 패총을 남긴 집단의 사람들이 생활하 던 마을이 존재했던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4) 복천동고분군

사적 제273호인 복천동고분군은 기원전후 시기부터 분묘가 조영되었을 가 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고분군의 남쪽 자락에 기원후 2세기 전반경 의 목관묘와 전기 와질토기가 출토되어 그 가능성이 높아졌다. 고분군은 기 원 전후부터 6세기 말~7세기 초까지 조영되었는데, 5세기 후반 이후에 조영 된 고분은 연산동고분군과 병존한다. 5세기 후반에 조영된 고분은 매장주체 시설이 모두 수혈식석곽인데, 규모가 큰 분구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석곽의 규모는 연산동고분군의 석곽 규모에 버금갈 만큼 크다. 별도의 묘광을 파고, 각각 석곽을 쌓은 후, 나란하게 뚜껑을 덮은 구조와 석곽 내에 격벽을 설치 하여 주곽과 부곽을 구분한 구조 등에 있어서는 복천동고분군과 연산동고분 군 수혈식석곽의 구조는 동일하다. 따라서 5세기 후반의 연산동고분군과 복 천동고분군은 묘제와 구조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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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 조사대상지 및 주변 유적(1: 25,000)

(①복천동고분군, ②조선전기 동래읍성, ③조선후기 동래읍성, ④동래패총, ⑤연산동고분군, ⑥동래고읍성, ⑦경상좌수영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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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2. 동래부 고지도(「輿地圖」 東萊府 18세기 중엽, 채색 필사본, 규장각, : 배산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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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조사내용

1. 조사 방법과 토층

조사대상지는 현재 등산로와 체육기구 및 쉼터 등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훼손되었고, 잡목 등이 우거져 성벽의 관찰이 쉽지 않은 상태이다. 조사범위 는 2009년에 실시한 배산성지 정밀측량조사에서 추정한 성벽선과 문지, 건물 지, 추정 집수지 중에서 행정구역상 연제구에 해당하는 총 29,290㎡의 면적 을 대상으로 하였다.

시굴조사는 조사 여건상 조사지역 내의 남쪽․ 서쪽․ 북쪽 체성, 건물지 등 7개소를 선정한 후 트렌치를 너비 1m로 설치하였고, 추정 집수지는 현재 설 치된 타원형 구조물 내부를 1/4 정도 피트 조사하였다.

조사대상지의 토층은 대부분 산 정상의 능선부와 경사면에 위치하여 표토 층에서 10~40cm 아래에서 생토인 풍화암반층이 확인되었다. 건물지가 확인 된 능선부(5트렌치)는 운동기구 설치로 인해 곳곳이 교란되었고, 지표에서 5~20cm 두께의 자연퇴적층 아래에서 생토층이 확인되었다. 표토와 내부토에 는 다수의 기와편ㆍ토기편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사면 체성의 기준토층(7트 렌치)은 크게 5개층으로 나뉘는데, 표토층(Ⅰ, 암갈색계 부식토층), 평탄면형 성층(Ⅱ), 체성 내부토(Ⅲ), 체성 내벽 되메우기층(ⅣㆍⅤ)이다.

평탄면형성층(Ⅱ)은 2트렌치와 7트렌치에서만 확인되며, 암반편이 포함된 (황)갈색사질점토로 60~80cm 정도의 두께로 수평에 가깝게 형성되어 있다.

하부층에는 10~20cm 크기의 할석이 한 겹 깔려져 있고, 산화철-망간알갱이 가 집적되어 있다. 석성 내벽의 상부 석축에 맞물려 형성된 층으로 수평면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아 석성 붕괴 이후 평탄 대지를 조성하기 위해 쌓은 층 으로 추정된다.

체성 내부토(Ⅲ)는 황갈색사질토로 내벽과 외벽 사이, 그리고 외벽과 기단 보축 사이에 크고 작은 다량의 할석과 천석을 일부 포함된 채움토이다.

체성 내벽 되메우기층(ⅣㆍⅤ)은 (회)갈색사질점토로 다량의 풍화암반석과 암반편이 포함되어 있고, 간층으로 회색점토가 확인된다. 내벽 바깥의 굴광 선 상부에서 내벽 최하단 바닥까지 최대 140cm의 두께로 형성되어 있다. 굴 광토를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상부로 갈수록 수평면을 이룬다.

(11)

지도 3. 조사지역 지형도 및 트렌치 배치도(S=1:2,500)

(12)

사진 1. 5트렌치 능선부(건물지) 토층 파노라마 사진

사진 2. 7트렌치 경사면(체성) 토층 파노라마 사진

(13)

2. 조사 내용

트렌치는 경사면의 경우, 체성을 감안하여 등고선과 직교방향으로 설치하 였으며, 1트렌치는 성벽 연결양상 확인을 위해 주변으로 확장조사를 실시하 였다. 평탄면은 지형과 유구 위치를 감안하여 남-북, 동-서방향의 트렌치를 설치하였다. 조사는 확인된 유구의 기반층까지 제토하였으며, 유구가 없는 곳은 생토층까지 제토하였다. 확인된 유구는 석축성벽

건물지

호안석축 1 기, 원형 우물 1기, 구상유구 1기, 수혈유구 3기 등이다. 조사내용은 성곽과 관련된 각 유구의 성격과 특징을 중심으로 기술하겠다. 아래의 <표 1>은 각 트렌치의 조사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다.

트렌치

번호 확인 유구 규모(cm) 특 징 출토

유물

1

체성, 기단보축, 구상유구 1기

체성 너비 : 570 잔존 높이 : 50 기단보축 너비 : 120

외벽 2단 면석 잔존 내벽 할석 축조 기단보축 1단 잔존 평탄지 구상유구 확인 토층 : Ⅰ-Ⅲ-Ⅳ-Ⅴ

기와편, 토기편, 투석용 몽돌

2 평탄대지 조성면 -

정상부 아래 9부 능선의 평탄 지 절개면에 유사석축 확인, 그 아래 경사면으로 다수의 할․천석 산재

토층 : Ⅰ-Ⅱ

기와편, 토기편

3

체성, 기단보축, 수혈유구 1기

체성 너비 : 470 잔존 높이 : 160 기단보축 너비 : 220

외벽 6단, 내벽 2단 면석 잔존 기단보축 2단 면석 잔존 동쪽 평탄면 내벽 바깥에 토광 묘로 추정 수혈유구 1기 확인 토층 : Ⅰ-Ⅲ-Ⅳ-Ⅴ

기와편, 토기편, 투석용 몽돌

4 - - - -

5

남북축 :

초석(적심석)4개소, 동서축 :

적심석 1개소, 수혈유구 2기

주간거리 남북 : 320 동서 : 300

초석 평면 : 말각방형 직경 : 약 56~70cm 토층 : Ⅰ-일부 소토층

기와편, 토기편 <표 1> 각 트렌치 제원표

(14)

트렌치

번호 확인 유구 유구 규모(cm) 특 징 출토

유물

6 호안석축 1기

굴광 직경 : 1270 내벽 직경 : 950~1040

북쪽은 단차 30cm 정도의 2단 석축으로 조성,

중심을 기준으로 양쪽 토층 양상이 현저히 차이

토층 : Ⅰ-내부퇴적토 및 함몰석

기와편, 토기편/

자기편 (북쪽의 흑갈색층)

7

체성, 기단보축, 평탄대지 조성면

체성 너비 : 390 잔존 높이 : 60 기단보축 너비 : 200 기단보축 높이 : 160 평탄대지 너비 : 560 평탄대지 높이 : 170

외벽 면석 4단 이상 잔존 기단보축 7~8단 면석 축조 초축 내벽 상부에 대지 조성 면 확인

토층 : Ⅰ-Ⅱ-Ⅲ-Ⅳ-Ⅴ

기와편, 토기편, 투석용 몽돌

우물터

pit 추정 우물터 약 200

노출면 상부까지 대부분 교란 및 내부 함몰토(석)로 채워짐,

함몰석은 현 구조물의 바깥에 축조된 석축시설의 것으로 추정

pit의 남쪽에 원형의 석축 확인,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우물터로 추정

토층 : 교란층-내부퇴적토 및 함몰석

기와편, 토기편, 자기편, 가공목재편

(15)

지도 4. 각 트렌치별 확인 유구 배치도(S=1:900)

(16)

1) 체성

체성은 1트렌치(남)ㆍ3트렌치(서)ㆍ7트렌치(북)에서 확인되었다. 체성 라인은 2009년의 정밀측량 지표조사에서 추정된 범위와 거의 일치한다. 배산의 8부 능선을 일주하는 현재의 등산로 지표 하부에 체성의 내벽이, 경사면 아래로 외벽이 위치한다. 체성의 구조는 내벽과 외벽, 기단보축으로 이루어진 전형 적인 고대 석축산성(石築山城)이다. 체성의 너비는 390~570cm로 각 트렌치마 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체성의 축성법은 잔존상태가 가장 좋은 1트렌치와 7 트렌치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트렌치 체성 외벽은 2단 정도 잔존한다. 외벽 축조방식은 기저암반층을 평탄하게 굴착한 후 치석한 장방형 할석을 ‘品’자 쌓기 하였다. 내벽은 외 벽을 기준으로 560cm 떨어진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내벽은 풍화암반층을 굴 착하여 기저면을 조성한 후 할석으로 쌓았으며, 풍화암반편이 다량 혼입된 회황갈색사질토로 이루어진 층을 되메우기한 내탁기법이 확인되었다. 기단보 축은 대부분 허물어져 1단 잔존한다. 기단보축 외벽은 경사면을 따라 기울어 진 상태로 면석을 맞추어 쌓았으며, 내부에는 할석과 잡석을 채워 보강하였 다. 기단보축 외벽 전면 바닥에는 너비 70cm 정도의 구간 내에서 기와편이 다량 집적되어 출토되었다. 또한, 내벽의 되메우기층을 굴착한 너비 160cm, 잔존 깊이 64cm의 단면 ‘U'자형의 구상유구 내부토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 와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7트렌치 체성 외벽은 기단보축에 가려져 바닥까지 조사하지 못하였으나, 기단보축면을 기준으로 4단 정도 잔존한다.

외벽 축조방식은 하단부에서 3단까지는 판상의 할석으로, 면을 맞추어 쌓 았다. 최상단에는 인두대 크기의 할석을 올려 면을 맞추었다. 현재 토압에 밀려 약간 기울어진 상태이다. 내벽은 외벽으로부터 390cm 떨어진 지점에서 확인된다. 내벽에서 약 200cm 바깥 지점부터 경사지게 굴착하여 바닥면에 인두대 크기의 할석과 천석을 혼용하여 내벽석을 쌓아올렸고, 그 바깥으로는 굴광토를 이용하여 수평으로 되메우기 하였다. 내벽과 외벽 사이에는 크고 작은 할석과 천석을 사질토와 혼용하여 채웠다. 그리고 상부에는 회백색 점 토로 이루어진 밀봉토의 흔적이 확인된다. 기단보축 외벽 면석은 60°정도의 경사로 정연하게 쌓아 올렸으며, 내부에는 잡석과 사질토로 채웠다. 기단보 축 외벽에는 대형의 할석을 덧대어 보강한 흔적이 확인되는데, 기단보축을 보수한 흔적으로 판단된다. 기단보축의 기저부 너비는 200cm이고, 잔존 높이 는 160cm이다. 기단보축의 기저부로부터 잔존 내벽 상부까지 높이는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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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cm로 성벽은 5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체성 상부에는 평탄 대지를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확인하였다.

내벽이 위치한 지점의 상단부를 기점으로 3~5단의 할석을 쌓았으며, 내부에는 암반편이 다량 혼입된 황갈색사질토로 되메우기한 수평퇴적층이 확인되었다. 황 갈색사질토층 상부에는 다량을 할석을 깔아 보강한 흔적이 확인된다.

체성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격자 혹은 선문이 타날된 기와편으로 격자타날문이 수습유물의 약 80% 이상을 차지한다. 격자의 너비가 0.7cm 내 외로 넓은 것이 특징이며 대부분 중판으로 타날하였다. 내면에는 포목흔이 관찰되며, 측단부는 전면 와도한 것이 많고, 상단부 내면은 깎기 조정하였다.

2) 건물지

건물지는 배산의 서봉(해발 256m)과 동봉(해발 249m) 양 봉우리 사이의 평탄지에 위치하는 5트렌치에서 확인되었다. 지표에서 초석으로 추정되는 말 각방형의 석재 3매가 나란히 관찰되었다. 가장자리의 초석 2매는 남북방향 으로 일직선상에 있으나, 중앙의 초석은 동쪽으로 50cm 정도 이격되었다.

동서방향에서는 초석 1매와 적심석만 남은 초석자리 1개소가 확인되었다.

전체로 보면, 중앙 초석을 기준으로 ‘十’자상의 평면 배치를 보인다.

초석의 설치는 먼저 바닥을 ‘U'자형으로 굴착하고 내부에 주먹크기의 잡석 으로 채웠다. 그 위로 약 20cm 크기의 할석을 호상으로 1열 돌려 적심석으 로 삼았고 그 위에 초석을 올렸다. 초석의 크기는 직경 60~70cm 정도이고 말각방형 혹은 원형이다.

남북 방향 주간거리는 중앙 초석을 기준으로 북쪽이 340cm, 남쪽이 310cm이다. 중앙의 초석을 기준으로 동쪽에서 초석 1매가 확인되었다. 서쪽 에는 1개소의 초석 자리가 확인되었고, 현재 적심석만 남아있다. 남북 방향 의 초석 배치와 열과는 서로 맞지 않다. 초석과 적심석 간의 거리는 300cm 이다. 전체적인 배치를 봤을 때, 2칸 이상의 건물지로 추정되고, 축이 다른 건물지의 존재 가능성이 있으나 정확한 구조나 규모는 알 수 없다.

출토유물은 대부분 토기편과 기와편이고, 층위에 따라 상층 유물과 하층유 물로 구분된다. 토기편은 대부분 하층에서 출토되었고, 도질의 개신편, 고배 배신ㆍ삼각투창 대각편, 호편 등이며, 연질토기편도 소량 출토되었다. 기와편 은 하층의 경우 주로 격자타날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상층에서는 격자타날보 다 늦은 단계인‘X’자가 가미된 선문타날 기와편이 주로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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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물터

2008년 연제구에서 조성한 방형의 우물과 그 외곽에 조성한 타원형 석축 호안 사이 남쪽 피트에서 확인되었다. 피트 내부는 방형의 우물을 조성하기 위해 대부분 교란되었고, 다량의 할석과 천석이 포함되고 부식기 강한 사질 토로 채워져 있다.

타원형 석축의 아래는 그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축의 장방형 할석이 안쪽으로 밀려들어 간 양상을 보인다. 피트의 중앙부에서는 직경 약 200cm의 원형으로 돌아가는 석축이 일부 확인되었는데, 상부 교란과 함몰석 으로 인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내부에서 청자편 및 다수의 분청사기 편과 백자편이 출토되었다. 또한, 말뚝으로 추정되는 단면 원형의 가공목재 편이 다수 출토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어느 시점까지 사용된 우물터로 추 정된다.

이번 시굴조사에서는 조사 여건 상 현재까지 드러난 석축면의 하부 원 집 수지의 확인이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2008년 우물터 조성과 관련하여 당시 문화재위원이 입회할 때 현재의 타원형 석축 바깥으로 3단으로 된 계단상 석축시설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당시 촬영된 사진과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원형의 집수지로 추정된다. 향후 정식 발굴조사에서 상부 구조물을 해체하여 추정 원형 집수지의 조사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4) 호안석축

호안석축은 이번 조사에서 추가로 확인된 집수지로서, 6트렌치에서 조사되 었다. 기존에 조성된 우물터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20m 떨어진 지점으로 완 만한 경사면에 위치한다. 지표상에서 움푹 패여 진 지형에 트렌치를 넣어 조 사 한 결과, 굴광 직경 1,270cm로 남쪽 석축 1단, 북쪽 석축 2단의 계단상 호안석축이 조사되었다. 석축 내벽 직경은 각 단의 내벽을 기준으로 1,010~1,040cm이다. 각 단의 높이 차이는 30cm 정도이다. 호안석축의 규 모와 구조로 볼 때 원형 집수지로 추정된다.

한편, 호안석축 내부는 중심에 위치한 석열을 기준으로 양쪽 토층양상이 현저한 차이가 있다. 남쪽 내부토는 부식기가 강하고 굵은 입자의 사질토와 다량의 크고 작은 석재들이 함몰된 상태이다. 내부에서 체성에서 출토된 것 과 같은 통일신라시대 기와편과 토기편이 출토되었으나 자기편은 단 1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북쪽 내부토는 이와 다르게 함몰된 석재는 거의 없고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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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고운 입자의 사질토로 채워져 있다. 아래층의 흑갈색사질토에서는 다수의 분청사기편과 백자편이 출토되었다. 토층에서 단절된 양상으로 볼 때 중앙에 서 북쪽 편으로 조선시대 어느 시점까지 사용된 유구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Ⅴ. 조사성과

1. 시굴조사 결과, 다소 급경사면에 성벽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트렌치 상에서 확인된 성벽 기초부의 잔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확인되었다.

2009년 배산성지에 대한 부산박물관의 정밀측량 지표조사에서 추정한 성벽 라인과 거의 일치하였다. 또한 기왕에 알려진 토성이 아닌 내ㆍ외벽과 외벽 에 기단보축을 갖춘 전형적인 고대 석축산성으로 확인되었다.

2. 트렌치 상에서 확인된 석성의 규모는 내-외벽 간 성벽의 너비가 390~570cm이다. 또한, 성벽 기저부를 보호하기 위한 기단보축은 최하단의 너비가 200cm이고 잔존 높이가 최대 160cm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기단보 축을 포함한 성벽의 너비가 최대 800cm에 이르며, 기단보축 기저부에서 잔 존 내벽까지 높이는 500cm로 성벽은 5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 서 축조 당시 상당한 노동력과 기술력이 동원된 것으로 판단된다.

3. 배산성지 정상부 중앙 평탄면에 초석을 사용한 기와건물지가 확인되었 다. 남북 축으로 초석 3매가 확인되었고, 동서 축으로 초석 1매와 적심석 1 개소가 확인되었다. 남북 축과 동서 축의 초석 배치와 열과는 서로 맞지 않 아 축이 다른 건물지의 존재 가능성이 있으나 정확한 구조나 규모는 알 수 없다. 남북 축 배치를 볼 때, 초석 간의 거리가 3m 이상인 대형 건물지로 추 정된다. 입지면에서 조망권이 탁월한 산성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므로 당시 배산성의 경영과 관련된 관청 건물로 추정된다.

4. 배산성지의 북쪽 지역에서 직경 약 12m 내외의 호안석축 1기가 확인되 었다. 호안석축의 규모와 구조로 볼 때 7세기 전반에 축조된 기장산성 집수 지에서 조사된 호안석축과 유사하다. 입지 상 성곽 북쪽의 경사면에서 완만 하게 이어지는 넓은 평탄대지에 조성된 것으로 볼 때 체성 내에 흐르는 물 의 흐름을 통제하고 성내 용수를 사용하기 위한 집수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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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체성과 건물지, 호안석축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삼국-통일신라시 대 기와편과 토기편이며, 호안석축(원형집수지)과 우물터에서 고려시대 청자 편, 조선 분청사기편ㆍ백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기와류는 격자문이 현저히 많은 것이 특징으로 배산성지의 주된 사용 시기 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 정도로 편년된다. 인근의 유적과 비교했을 때 연산동고총고분군의 중심연대에 비해 늦고 동래고읍성 초축 시기보다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 각 유구에서 출토된 토기는 대부분 잔편이나, 삼각투창 대 각편, 2단투창 고배 대각편, 파상문이 시문된 대부장경호편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배산성의 초축 시기가 6~7세기 정도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

6. 배산성지는 테뫼식의 석축산성으로 바다와 내륙으로 이어지는 수영강과 온천천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조망권을 가진다. 따라서 당시 배산성지는 동 남해안에서 내륙으로 진입하는 첫 관문으로서 침입에 대한 해안 경비와 방 어를 수행하는 군사적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 삼국-통일기의 산 성인 기장산성, 남해 대국산성, 거제 둔덕기성ㆍ다대산성, 김해 분산성ㆍ진해 구산성 등의 입지와 축조수법, 구조적 특징, 호안석축(원형 집수지) 등이 통 하는 점에서 그 관련성이 주목된다.

7. 이번 시굴조사를 통해 주변의 석축성곽들과 비교할 수 있는 배산성의 고고학적인 기초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열악한 산성의 조사 여건 상 문지를 비롯한 성내 곳곳에 있었을 건물지와 기 확인된 집수지와 추가 확인된 집수지와의 선후관계 등은 밝히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향후 정식 발굴조사를 통해 좀 더 명확한 배산성지의 성격과 특징을 규명 하고, 이를 토대로 연산동고분군과 동래고읍성과 관련하여 당시 삼국-통일기의 중심지로서 배산성지의 역할과 기능에 관한 연구가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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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조사지역 원경(항공사진)

사진 4. 조사지역 전경(배산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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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1트렌치 전경

사진 6. 체성 외벽 세부

사진 7. 체성 외벽 유물출토상태

사진 8. 동쪽 체성 외벽, 기단보축 세부 사진 9. 동쪽 체성 외벽 세부

사진 10. 동쪽 체성 조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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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1. 7트렌치 전경

사진 12. 체성 외벽 노출 세부

사진 13. 기단보축 노출 및 토층 상태

사진 14. 체성 내벽 상부 추정 평탄면 조성 석축과 뒷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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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5. 건물지 전경(5트렌치)

사진 16. 건물지 초석 세부(북쪽) 사진 17. 건물지 초석과 적심석 세부(남쪽)

사진 18. 건물지 초석 세부(동쪽) 사진 19. 건물지 적심석 세부(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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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 호안석축(6트렌치) 전경 및 추정라인(붉은선: 굴광선, 노란선: 석축선)

사진 21. 호안석축 토층 세부(남-북 토층 단절 양상)

사진 22. 호안석축 세부(남벽) 사진 23. 호안석축 세부(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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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4. 우물터 전경(우물터 피트)

사진 25. 우물터 토층 세부

사진 26. 우물터 세부(동쪽) 사진 27. 우물터 출토 분청사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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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8. 체성 출토유물

사진 29. 건물지 출토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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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0. 호안석축(6트렌치 원형 집수지) 출토유물

사진 31. 우물터 피트조사 출토유물

Referen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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