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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서양의 사상과 실제에서 자유교육의 역사 속의 문제들 전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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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사상과 실제에서 자유교육의 역사 속의 문제들

UC 버클리 셸던 로스블라트(Sheldon Rothblatt) 역사학 명예교수

2021년 8월

滄波講座

전제들

나는 몇 가지 중요한 전제를 내걸고 이 글을 시작해야만 한다. 첫째,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1)의 ‘자유(liberal)’나 ‘일반교육(general education)’의 ‘일반(general)’, 혹은

‘인문학(humanities)’과 같은 단어들이 지식의 영역들을 지시하거나, ‘인본주의적’이라는 표현을 특정한 종류의 교육 성과를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항상 애매모호하다.

이런 개념들이 어떻게 정의될 것인지는 언어와 역사적 맥락에 달려 있다. 영미 모더니즘 시인 T.S. 엘리엇의 사투리로 쓰여진 시에2) “너에게 말할 때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that I gotta use words when I talk to you)“라는 구절이 있다. 물론 단어라는 것은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다양한 언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오역이 종종 발생한다.

둘째, 자유교육을 논하는데 있어서 항상 명심해야 할 점은 ‘입력(Input)’을 기술할 수는 있지만 입력이 ‘출력(Output)’과 동등할 것이라고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자유교육은 직업 준비와는 거리가 멀었다. 학습자를 특정한 노동 시장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이 아니기에 전문적 혹은 직업적 형태의 교육과는 다르다. 다만 간접적으로 향후 직업에 영향을 미치기는 한다. 흔히 전통적인 자유교육의 ‘출력’이라 함은 지식, 비판적 사고, 인간행동의 이해 또는 사회 공헌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가리킨다. 이러한 자질들은 우리 사회에 큰 도움이 되며 심지어 특정 업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그럼에도 자유교육의 장점을 명확하게 짚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자유교육을 논할 때 흔히들 학생에게 특정 커리큘럼을 제공하면 결과적으로 거기서 얻은 가치, 교훈, 내용이 학생의 이후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의 ‘성격’이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점은 대학의 학위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업무적 환경이 대학에서 배운 것 이상으로 개인의 신념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정교육이 제일 중요하다. 계획된 학습 성과는 보장될 수

없다. 19세기 영국 로만 카톨릭 교회의 추기경이자 자유교육을 기술함에 있어서 아직도

영어권 최고의 권위자인 존 헨리 뉴먼(J. H. Newman)은 이런 어려움들을 강조했다. 그의 저술에서 관련 구절은 거의 인용되고 있지 않지만 나는 이 글에서 그 내용을 풀어쓰고자 한다. 뉴먼은 기독교의 초기 역사를 돌아보면서, 로마의 두 명의 위인인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the Emperor Julian the Apostate) 1) ‘liberal education’은 일본에서는 ‘敎養敎育’, 중국에서는 ‘博雅敎育’으로 번역되고 있다. 다른 한편

‘general education’은 일본에서는 ‘一般敎育’, 대만에서는 ‘通識敎育’, 중국에서는 ‘(文化)素質敎育’

으로 번역된다. 다른 한편 한국에서 ‘교양교육’은 공식적으로 ‘general education’의 의미로 사용되 고 있지만, ‘liberal education’ 혹은 ‘liberal arts education’에 대한 합의된 번역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 ‘자유교육’ 혹은 ‘자유학예교육’이 번역어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 추가하여 ‘liberal education’과 ‘liberal arts education’이 동일한 개념인지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다. 로스블라 트 교수의 이 논문에서 ‘general education’은 2회 사용되고 있을 뿐이고, 문맥을 볼 때 그 의미는 분명하다. 이 글에 한정하여 ‘general education’을 ‘일반교육’으로 번역한다. 譯註

2) T.S. Eliot, ‘Sweeney Agonistes’, 譯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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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테네에서 같은 학교를 다녔고 같은 자유교육을 받았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이후 전자는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고 후자는 교회를 파괴하고 로마제국을 이단의 길로 이끌었다. 만일 교육이 같았다면, 두 인물의 경우 어떻게 이런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세 번째 전제는 모든 지식 분야에 적용되는 이야기지만 특히 자유교육과 큰 관련이 있다. 우선 모든 지식은 어느 정도의 선별과 해석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아무리 전문적인 교육일지라도 오늘날의 지식은 12세기에 대학들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보다 훨씬 방대하다.3) 기존 학문들의 영역과 깊이가 넓어졌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분야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가령, 인간 삶의 기본 요소들에 대한 놀라운 탐구나 생물학, 우주과학 분야에서 큰 진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새로운 학문들 모두는 현재 디지털 기술의 놀라운 발전과 결합되고 또 이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한 결과와 가능성들은 고무적이기도 하고 경계할 부분도 있지만 그것은 이 글에서 논할 주제는 아니다. 필자는 이 글을 단순한 관찰로 제한할 것이다. 지식의 범위는 매우 넓기 때문에 나는 교육자로서 이 중 어느

부분이 ‘자유’교육으로 간주되어 현실적으로 교육에 사용될 수 있는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내가 자유교육의 일환으로 학생들에게 특정 텍스트나 역사물을 제공할 때 해당 자료에 접근하는 방식에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이러한 선택지는 주로 이념이나 정치적 신념, 사회적 안건, 일련의 도덕적 판단을 포함할 수 있다. 혹은 학생들에게 자료를 검토할 때 상당한 폭을 허용하면서 이들이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이해를 추구하도록 노력할 수도 있다

첫 번째 방식은 교조적(dogmatic)이다. 역사적으로 두 번째 방식보다 흔한 교육법이었다.

선생은 학생들이 알아야 할 지식을 알려준다. 반면 두 번째 방식은 학생들이 독립적이고 비판적으로 자료에 접근하도록 장려한다. 이는 항상 해석에 있어서 논쟁과 차이로 나타난다.

‘올바른’ 해석은 없다. 결과는 일정한 정도의 혼란이다. 몇 세기 동안 교육자들은 종종

[현재] 고등학생 정도 나이에 불과한 학부생들이 서로 반대되는 정보에 노출되면 정서적인

혼란을 겪을 것을 염려하였다. 혹은 이들을 기존의 정립된 견해들이나 기관에 도전하도록 장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할 때의 나이가 더 올라가고 이들이 더 성숙해지면서 이런 우려의 상당 부분은 잠잠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주의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해석이 동등하게 정당한 것은 아니며, 동등하게 힘을 갖는 것은 아니며 자료를 평가하는 데 있어 동등하게 주의를 기울인 것도 아니며 동등하게 진실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한 단계 더 높은 자유교육은 증거를 더 엄정하게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장소’로서 캠퍼스

나는 자유교육의 의미와 효과에 대해 한 가지 더 전제를 내걸고 싶다. 우리는 자유교육을 교과목 커리큘럼으로 생각하고 앞서 언급했듯이 교실에서 자료들이 어떻게 해석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자유교육에는 또 다른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 바로 교육이 행해지는 환경이다. 그래서 나는 라틴어 ‘field’에서 유래된 미국적 개념인 대학의

‘campus’에 대해서 몇 가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대학 건물이 지어진 조경학적 공간 ‘캠퍼스’는 18세기에 생겨났다. 처음에는 프린스턴

3) 물론 전 세계적으로 다른 형태의 교육기관이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의 대학들보다 먼저 존재했다.

주로 왕궁, 수도원, 교육원, 지방 당국에서 교육을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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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의 넓은 잔디밭과 정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궁극적으로 오늘 날의 캠퍼스는 아마도 강의실이 모여 있고, 학생 및 교사들의 거주공간이 있으며, 도서관, 학생 식당 및 휴게실, 때에 따라 예배 시설도 갖추고 있는 형태의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캠퍼스의 구조는 식민지 시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전파되었으나 미국의 대학 캠퍼스는 영국의 캠퍼스와 달리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지 않고 개방된 형태를 하고 있다(물론 몇몇 대학의 정문은 지금부터 입장할 부지가 특수 목적을 띠고 있고 사유지임을 명시하는 역할을 한다). 누구나 이용 가능한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민주적인 정신과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닌 캠퍼스는 다수의 단과대학(small

colleges)이 100년 뒤 종합대학(larger university)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캠퍼스 공간은

영국의 대학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전통 건축물들의 특징을 현대식으로 본떠 만든 구조로 유명동문의 동상이나 초상화, 대학 문장, 예술적인 조각상, 장식품, 탑, 광장, 호수, 분수가 있다. 이와 같은 캠퍼스의 형성은 다소 의도치 않게 마치 도시계획과 유사한 전문적인 캠퍼스 조성 방식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몇십년 전에는 이를 ‘공간조성(place-making)’이라고 불렀다. 20세기 후반, 전 국가에서 새롭게 대학을 설립할 때 전문적으로 공간을 조성하는 작업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캠퍼스를 더 편리하고 아늑하고 흥미롭고 아름다운 장소로 만드는 것이 자유교육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다시 한 번 역사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물론 다른 시기에도 낭만주의 시대의 흔적이나 움직임은 찾아볼 수 있으나 서양에서는

1790년 이후를 낭만주의 시대로 분류한다. 당시 미국과 영국에서 교육자들은 학생들이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독립전쟁의 영향으로 정치적 급진파가 되는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신세대 학생들은 개인적, 정치적 자유에도 흥미를 느꼈지만, 동시에 역사나 해방의 상징물로 둘러싸인 환경 속에서 성인기를 맞이하고 즐기며 보수적인 가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학 지도자들은 적절한 상징물로 가득 찬 아름답고 아늑한 캠퍼스 공간이 학생들의 배움을 자극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근사한 대학 건물에서 학생들은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들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공간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끼며 학생들의 애교심은 올라갔다. 미국 고등교육 기관들은 사적 기금이 매우 중요한데, ‘모교(Alma Mater:

17세기 영어단어)’에 대한 특별한 애착은 졸업생들이 모교를 위한 후원과 기부로 이어졌다.

졸업생들이 특별한 계기에 모교를 방문했을 때 기억되는 것은, 나이가 들었을 때보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젊은 시절에 그들이 누비던 캠퍼스와 건물들이었다.

자유교육의 내용과 형식은 매번 바뀌며 논쟁거리가 되고는 하지만 아름다운 캠퍼스의 중요성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 낭만주의 당시 젊은 학부생들을 위해 만들어진 캠퍼스는 자유교육 이론가들과 이상론자들이 오랫동안 꿈꿔온 자유교육의 지속적이고 예상치 못한 총체였을 것이다. 미국의 유명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는 캠퍼스를 설계하면서 자유교육은 비자유적인(illiberal) 환경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환경이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공간에 둘러싸여 배우고자 하는 욕구가 커져가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시라.4)

대학교 자유교육의 유래

학자들은 서구 자유교육이 기원전 4~5세기 그리스의 과학자, 철학자, 소피스트들

4) 자유교육에서 캠퍼스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 셸던 로스블라트(Sheldon Rothblatt)의 "Consult the Genius of the Place,” in The Modern University and Its Discontents, The Fate of Newman’s Legacies in Britain and America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chapter 2 참고. 해당 저서는 중국어 번역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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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자유교육에 대해 구약성서를 전수한 지식인들의 도덕적, 정치적 기여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지만 미 식민지 시절에 가르친 몇몇 자유교육에서 구약성서는 ‘고전’ 교육 커리큘럼의 일부였다. 그러다가 17세기 말에 ‘고전’이라는 단어는 우수한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을 지칭하게 되었다. 또한 학부생들은 고전 언어로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공부했다. 해당 언어를 아는 사람은 교육을 잘 받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반대로 고전 언어를 배우지 못한 이들은 사회적으로 열등하거나 못 배운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차별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는 행태였고 고전 언어를 공부하는 것은 학생들 입장에서 부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도 많이 소요되었으며 직업을 구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5)

1900년경 영국의 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헤이스팅스 래시들(Hastings Rashdall)은 대학의 탄생을 다루는 중대한 역사서를 저술했고 대학 설립의 목적은 의학, 법학, 신학을 공부한

‘자유 전문직(liberal profession)’의 양성을 위한 전문 교육에 있다고 기술했다. 당시 각

도시들은 혁신과 경제발전의 중심지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정치 단위의 구역이 생겨나고 교회와 국가 행정을 맡을 사람이 필요해지며 기존 길드 형태에 접목한 새로운 전문 교육 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후에 이러한 교육기관은 ‘학부 시스템(collegiate governance)’의 토대가 되었고 나의 연구 분야는 아니다). 래시들 이전에는 대부분이 고전 문명에서 전수된 자유교육을 가르치는 것이 초기대학의 목표라고 생각했다.

특히 로마시대의 7가지 자유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핵심이었는데 이 학문들은 다시

3학4과로 나뉘어 각각 언어학과 수학을 담당했다. 3학은 논리학, 문법, 수사학으로 총 3개의

학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4과는 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기 대학에서 자유교육은 전문교육으로 넘어가기 전 예비단계였다. 당시 대학교 내 학생들의 수는 많지 않았고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비용문제로 중퇴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사실상 학생들은 자유학문 밖에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더불어 중세 자유교육의 배경을 살펴보면 그리스 철학자 아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그간 많은 이들이 염원한 방대한 자유학문들의 통합을 실현시켰다. 심지어 20세기 초 미국에서 자유교육은 ‘일반교육(general education)’으로 불렸고 많은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처럼 수많은 자유학문들을 연결하고 해석하려고 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지금까지도 수많은 미국 대학에서 이와 같은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오늘 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일부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나, 대부분 아랍인과 유대인 학자들의 해석을 따른 것이며 이는 초기 대학 시절에도 똑같았다.

중세 커리큘럼의 변화

앞서 언급했듯이, 특정 커리큘럼에 대한 설명이 있다 해도 실제 그 커리큘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의 호기심 때문에 필연적으로 시대가 바뀌면 학문적 논쟁이 일어나는데 중세교육의 비판론자들은 중세 커리큘럼이 과도하게 전문적이고 지엽적이라고 비난하며 너무 지식 위주의 이론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 중 일부는 맞지만 틀린 부분도 있었으며 특히 3학 4과가 혁신되고 급진적인 해석이 곁들여지면서 논리학, 건축학, 정치학 교육에 대한 반대가 서서히 증가하기도 했다.

5) 내가 본 글을 작성할 때 마침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는 그리스, 라틴 문학 전공생들이 해당 언어를 반드시 이수할 필요가 없게 학칙을 바꾸고 있어 큰 반발을 사고 있었다. 동시에 그리스와 로마 문명이 서구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근간을 확립했다는 주장과 맞물리며 충돌이 심화되고 있다. 이는 그 어떤 학문도 편파적인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무수히 많은 사례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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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9세기에 학문적 연구가 발견, 탐구, 새로운 지식 추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알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 중세시대에 연구를 등한시한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차이는 바로 당시 연구의 목표가 오늘 날 위대한 대학들이 공언한 연구의 초석이라는 점이다. 오늘 날 많은 국가에서는 연구목표, 기술, 응용과학, 문제해결 목적 간의 연결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다시 말해, 이렇게 서로 다른 우선순위들이 상충되지는 않지만 이들의 관계를 파악할 때 비용, (정부, 기업과 같은)외부지원 유치, 여론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시대 대학들은 기존 지식을 전수하는 데 초점을 맞췄고 동시에 정통 학문을 벗어나 위험한 사상이나 종교적 이단이 성행하더라도 근대 학문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에 기여했다. 상당히 모순적이지만 모든 인간사가 모순으로 뒤덮여 있지 않은가.

방금 내가 제시한 요점은 15세기에 지중해 지역부터 북부 유럽까지 펼쳐진 이탈리아 르네상스에도 적용되고 그때 당시 자유교육의 내용과 목적이 변곡점을 맞이했다. 우선 자유교육, 혹은 자유학문(liberal art)은 더 이상 전문교육의 예비단계가 아니었으며 의학, 법학, 신학의 이론적 근간을 마련했다. 자유교육은 점점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그 자체로 가치가 생겼다. 자유교육을 받은 사람은 특징이 뚜렷했다. 이들은 흔히 ‘신사’나

‘코띠에(courtier)’로 여겨졌다.6) 이 ‘코띠에’와 관련된 개념을 중국의 궁정관리(mandarin)

개념과 일치시키는 것은 그리 무리가 아니다.7) 올바른 인품을 갖기 위해 원하는 결과에 집중하여 공부를 하였고 중세교육에서 소외된 시, 소네트 창작, 악기 연주, 문학, 음악, 무용, 승마가 교육의 핵심이 되었다. 이는 이탈리아에서 궁정 문화가 대세가 되며 사교활동에 유익한 학문이 중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비평가들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너무

‘미(美, belle-lettristic)’8)에만 치중되었으며 속물적이고 겉으로만 지적이고 아름답게

보였다고 지적했으나 당시 신분과 지위가 중시되던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이 성공할 수 있었고 그러한 경향을 가지게 된 것이다. 품격 있는 대화, 우아한 행동거지, 여성을 유혹하는 행위가 그 당시 교육의 올바른 표본이었다. 교육을 통해 배운 행동과

말솜씨 또한 지극히 ‘인본주의적(humanistic)’인 것으로 여겨졌고 이후 이것이

‘인문학(humanities)’이 되었다. 사실 인문학이나 인본주의적인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당시 교육이 온전히 예의를 갖추고 ‘인간적’인 행동을 위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르네상스 시대 자유교육의 실무적 정의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오늘 날로 와서, 나는 해당 정의를 ‘실생활의 학문(living arts)’, 즉 충만한 삶을 위한 교육이라고 하고 싶다.9)

물론 실제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자유교육이 이처럼 행해졌다고 할 수는 없다. 여타 교육 논쟁들과 마찬가지로, 중세교육과 르네상스 교육의 실질적인 차이도 어느 정도 과장된 면이 있다. 르네상스에도 학생들은 이론 위주의 교육을 받았고 예상과 달리 단조로운 교육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라틴어, 그리스어, 소네트 창작, 문예 창작, 화술을 공부한다고 해서 목표를 단번에 달성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는 단지 내가 서두에 말한 “입력과 출력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르네상스가 ‘부흥’으로 해석되는 것도 그리스와 라틴 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6) 원문의 courtier는 ‘궁정에 출입하는 사람’을 뜻한다. 의미를 온전히 살리기 위해 음차 번역하였다.

譯註

7) 이와 관련된 더 자세한 내용은 조세프 레벤슨(Joseph Levenson)의 Confucian China and Its Modern Fate, a Trilog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8)에서 확인 가능하다.

8) 원문의 belle-lettristic은 ‘언어의 아름다움에만 치중된 문체’를 뜻한다. 편의상 여기서는 ‘미(美)’로 번역하였다. 譯註

9) Sheldon Rothblatt, The Living Arts, Comparative and Historical Reflections on Liberal Education (Washington, DC: (Association of American Colleges and Universities, 2003).

(6)

물론 중세시대 교육도 고전 학문에 큰 기반을 두고 있었다. 다만 르네상스에 그리스 언어와 학문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고 대학설립 초기에만 해도 소실된 줄 알았던 문헌들이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플라톤 같은 고대 학자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르네상스 학자들은 지금까지 전승되어 온 고전에 대한 타인의 해석보다 고전의 근원 자체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대학교육의 중심이었던 라틴 학문이 과도하게 ‘신앙적인’ 사실에 개탄하며 더 순수한 텍스트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이탈리아의 지식인들은 1492년 아시아 유목민들로부터 동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오늘 날의 터키 이스탄불)에서 쫓겨난 그리스 학자들의 영향도 받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자유교육은 종종 대학에서 거부당하거나 암묵적으로 들여왔지만 르네상스식 자유교육은 주로 특수교육기관에서 이루어졌고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미국으로 건너가 더 짙은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학문 연구의 도전과제

이제 중세, 이탈리아, 영미권 대학교육에서 벗어나 유럽의 교육과 학습 목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19세기 초 프랑스와의 전쟁 이후 독일의 대학교육으로 넘어가 보겠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중세시대 지식의 보급은 ‘전수’의 형태로 이루어졌고 중세 대학의 목표는 전수받은 지식을 전문교육과 결부시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뉴먼 추기경이 ‘인간형성’을 강조했듯이 르네상스 자유교육은 직업훈련보다는 그 사람의 성격 형성을 목표로 행해졌다.10) 이제 중세대학에서 윤곽이 잡혔지만 완성되지 못한 다양한 개념이 자유교육에 가져온 영향을 살펴보고 그 어느 때보다 광범위한 대변화를 알아보겠다.

역사학자들의 입장에서 시대의 대전환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각한

공동의 위기가 닥쳐 국가적 차원의 대책을 세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변화가 왜 발생했는지 밝히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책을 세울 때 다른 나라를 참고하기도 하지만 자국의 지식과 정신적 유산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가치와 신념, 또는 정체성, 안정성, 보장성을 제공하는 제도적 건설이 비록 현실과 동떨어져 보여도 국가 재생의 지름길이 된다.

전쟁에서 패배한 프로이센 및 (통일되기 이전)독일의 국가들은 풍부한 민속학, 계몽주의, 낭만주의의 유산을 바탕으로 국가의 회복과 영적 각성을 위한 수단이 그간 서구에서 알려진 것보다 더 심도 있고 더 독창적인 지식에 기반 해야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1810년 베를린 대학교의 설립은 새로운 교육의 제도화를 상징했다.

그러나 1850년이 되어서야 한 층 더 완성된 교육의 제도화가 이루어진다. 19세기 말, 혹은

그 이전까지 유럽, 영국, 미국의 대학들은 독창적인 연구를 대학교육의 주된 목표로 삼은 독일의 지식혁명에 감명을 받았다. 타 국가에서 온 학자와 학생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학문의 틀을 다시 만들고 있는 신세대 교사들과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된다.

학문을 전문화시키고 발견을 중시하며 학문적 명성을 얻기 위해 독창적인 탐구를 중시하는 독일의 교육 철학은 다른 나라에 다시 전해지게 되었다. 여기서는 독일식 교육 철학에 저항한 미국과 영국 대학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초기에 기존 학자들은 상당히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이들은 중세 교육자들과 마찬가지로 전수받은 교육의 내용을 뒤엎게 되면 학부생들이 혼란스러워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학문의 전문화가 일반 지식을 다루는 자유교육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학문적 명성의 기반을 바꾸게 되면 대학 내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논쟁은 몇 십년간

10) Paul Shrimpton, The “Making of Men.” The Idea and Reality of Newman’s University in Oxford and Dublin (Leominster, Herts: Gracewing Publishing, 2014)

(7)

계속되었다. 실제로 자유교육과 연구가 적대시되는 곳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물론 독일의 지식혁명이 미국의 자유학문과 인문교육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도 있다. 그러나 기존의 자유교육에 대한 모든 개념들 중 여전히 독일의 지식은 타국의 교육 환경에 적용시키기가 매우 까다롭다. 특히 독일의 지식은 영미권과 달리 자국의 철학적, 지적 전통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Bildung’(독일어로 교양, 학식을 뜻함. 19세기 독일의 이웃나라였던 스웨덴어로는 bildning, 노르웨이어로는

danelse라고 한다)은 자기실현 혹은 자기계발의 교리였다. 올바른 교육을 받은

사람(Gebildet)은 해당 국가 문화의 본질, 혹은 적어도 최상의 자질을 갖춘 이로 여겨졌다.

즉, 이는 어느 정도 성격형성과도 관련이 있었고 이전 코띠에 전통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었다.

일부 사람들에게 독일식 교육과 철학의 목표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Bildung으로서 독일의 지식은 심도 있는 연구를 동반했으며 뛰어난 수준의 정리와 이해를 바탕으로 모든 분야를 추상적으로 포괄했다. 해외의 지식인들은 여기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자국의 자유교육을 고등학교 수준으로 여기며 독일식 자유교육에 이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이 자국 문화에 대한 철학적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Bildung은 그저 영국과 미국 블레셋 문화와 대립하는 지식인들의 환상에 불과했다.

교육적 이상으로서 Bildung은 영미권 학자들의 실용적인 관심사보다 한 층 더 희귀하고 이론적인 것이었다. 당시 독일은 독재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정부는 현 정권에 반하는 학문을 경계했다. 독일의 교수들은 관리 당국의 검열을 받아야했고 난해한 지식과 이론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프랑스와 독일의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공직자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독일학자들의 생각을 모른 채, 해외 비평가들은 말하기를,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추구된 지식이 열등한 정부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관점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찬사에도 불구하고 Bildung은 영미권 국가 특유의 자유주의적인 개인주의 문화와 대립했다. 비록 수많은 미국과 영국의 학자들이 독일의 뛰어난 민족문화를 선망했지만 미국과 영국은 개인주의가 지배적이었고 다양한 인종, 사회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단일한 민족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대학교육의 확립이 어려웠다. 최선의 방법은 이상적인 교육 롤모델을 학생들에게 제시해 각자 걸맞은 방식으로 자기계발을 도모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영국과 미국의 고등교육 구조에 기인했으며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미국 헌법은 각 주에서 모든 단계의 교육을 총괄하도록 만들었다. 미국의 고등교육 형태는 매우 다양했다. 공립대학, 사립대학, 미션스쿨처럼 여러 종류로 나뉘었고 때로는 불행히도 인종에 따라 구별되었다. 또한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여성 전문대학도 많았다. 이는 자유교육 커리큘럼을 아무리 다양한 전통에서 차용하더라도 세부내용과 강조점은 다르다는 것을 의미했다. 같은 이유로 일반적인 자유교육 모델이 부재했기 때문에 대학 및 대학교들은 자유롭게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고 이상적인 교육 모델을 모색할 수 있었다.

제럴드 그랜트(Gerald Grant)와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에 따르면, 이것이야 말로

미국의 ‘영원한 꿈(perpetual dream)’이었다.11) 플로리다의 롤린스 대학, 노스 캐롤라이나의

블랙 마운틴 칼리지, 버몬트의 베닝턴 대학, UC 산타크루즈는 자유교육을 재구성하는

11) Gerald Grant and David Riesman, The Perpetual Dream: Reform and Experiment in the American Colleg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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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을 진행했다.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고 상황의 여의치 않아 기존의 목표를 포기해야 했다.12) 남아있는 대학 중 세인트 존스 칼리지의 아나폴리스 캠퍼스와 산타페 캠퍼스만이 과거부터 내려온 자유교육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학부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21세기 미국의 자유교육

영어 단어 ‘liberal’은 라틴어의 ‘liberalis’에서 왔으며 정치적, 철학적, 심리학적으로 많은 뜻을 담고 있다. 교육 측면에서 단어 ‘liberal’과 ‘servile’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두 단어의 차이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자유를 보장받은 계급과 노예로 부려진 계급이 존재하던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다. 자유가 있던 계급은 일을 할 필요가 없었고 여가 시간을 통해 교육을 받아 폭넓은 자기이해가 가능했다.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기에 이들은

‘완전하고(whole)’, ‘완성된(complete)’ 인간으로 여겨졌다.13) 반대로 노예들에게 공부를 통해

완성된 인간이 되는 것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당시 사회상을 나타내는 또 다른 단어가 있다.

자유롭게 교육을 받은 계층은 ‘문화인(civilized)’, ‘교양인(cultivated, 독일어: Gebildet)’, ‘예의 바르고(polite)’ ‘세련된(polished)’ 사람으로 여겨졌다. 교육의 특권이 없는 계층은

‘저속하고(vulgar)’, ‘평범한(common)’ 사람들로 간주되었으며 사회적 신분상 노예였을 뿐만

아니라 외야이나 정신 상태도 비천하다고 여겨졌다. 즉, 노예계급은 불완전하고 인간으로서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일찍이 자유교육은 사회적, 경제적 특권과 관련이 있었다. 이 특징은 근대까지 수 세기를 걸쳐 내려왔는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귀족계층이어야만 자유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직업을 갖기 위해 특정 기술을 연마해야 되는 사람들은 직업학교에 다른 교육을 받았다. 불과 최근까지도 직업훈련은 자유교육에 비해 평판이 떨어졌지만 오늘 날과 같이 기술, 기업가 정신, 서비스 규범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그러한 일은 더 이상 없다. 더불어 엔터테인먼트 위주의 미디어 산업 발달과 소비자 쾌락주의가 지배적으로 자리 잡으며 더 고품질의 교육 문화나 무한한 자기실현이 외면되고 있고 ‘완전하고’ 조화로운 인간으로

12) 본 실험은 단일한 핵심 교과를 모든 학생들이 최소 2년 동안 듣도록 했다. 이를 통해 방대한 학문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다양한 학제 간 교과 과정을 만들었다. 이는 그리스와 독일식 학제 간 통합모델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었다. 혹은 다양한 학제 간 관점으로 전쟁, 산업화, 빈곤, 국가발전 문제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자유교육‘이나 ’일반교육‘에서 문제를 다룰 때 모든 학문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예를 들어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에든버러 대학의 연구원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식의 사고방식을 주장한다. 이 위대한 르네상스 시대 거장은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또한 기후문제야 말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가 지구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다루는 결정적이고 실존적인 분야로 제시되고 있다. 저자들은 학교 커리큘럼을 염두에 두고 이를 주장했지만, 대학 학부 커리큘럼에도 적용 가능하다. 자세한 내용은 Curriculum Perspectives (https://link.springer.com/article10.1007/s41297-020-00128-y) 와 Teach the Future (https://www.teachthefuture.uk) 참고.

대다수의 교육기관에서 추구한 가장 흔하고 무난하며 지속되는 자유교육의 형태는 배분이수 교과이다.

학부생들은 2년 동안 포괄적인 인문학, 사회학, 물리학, 자연과학, 생물학, 환경연구를 선택해서 공부한다. 지난 몇 십년간 대학들은 ‘위대한 저서(Great Books)’에 속한 그리스, 라틴, 러시아, 영국,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정전들과 히브리어, 크리스천 성경을 위주로 자유교육을 진행했다. 위대한 저서가 인기를 끌 무렵, 이에 대항하여 여성 작가들의 작품 및 미국의 소수인종들이 저술한 책들과 동시대 다른 나라의 작품들도 ‘정전’에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위대한 저서의 범위가 상당히 방대하여 이에 근간한 커리큘럼을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13) 필자의 에세이에서 전체적인 목표를 다루었다. “The Limbs of Osiris: Liberal Education in the English-speaking World,” The European and American University since 1800, Historical and Sociological Essays, eds. Sheldon Rothblatt and Björn Wittrock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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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기 위한 커리큘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해당 커리큘럼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교육을 고루하거나 시대착오적인 교육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현재 무관심한 기조가 지배적이라고 생각한다.

교육방법의 전문화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자유교육의 크나큰 도전과제였다. 교육 전문화의 비판론자들은 특정 학문을 세밀하게 파고 들면 자유교육의 총체적 특성을 훼손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넓은 시야를 갖지 못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교육의 폭을 정의할 수 없었고 자유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학생들이 넓은 시야를 가진다는 사실도 증명할 수 없었다. 뉴먼이 언급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율리아누스 황제의 예시를 다시 떠올려보자. 정규교육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넓은 시야를 갖게 만드는가, 아니면 이는 경험을 통해 얻는 것인가? 반면에 ‘넓은 시야를 가지는 것’은 쉽사리 정의할 수 없겠지만 반대로 시야가 좁고, 편협하고, 주체성이 없는 사람은 쉽게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버튼 로버트 클라크(Burton Robert Clark)는 특정 학문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곧 그 학문을 전문화 시키는 것과 동일하다고 주장했다.14) 역사학자들이 시공간을 뛰어넘는 여러 연구를 종합하여 인간을 탐구하거나 도시 개발자들이 다양한 시민들의 요구를 취합하여 최적화된 도시를 만드는 것처럼 한 학문을 공부하면서 인접한 다른 학문으로 시선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지적 호기심은 곧 넓은 시야를 갖게 하는 원동력이며 배우고자 하는 욕망과 직결되어 있다. 이제 중요한 교육적인 문제는 교수자로서 학생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해 단일한 개념을 넘어 복잡함 속 인간의 잠재력을 수용하는 데 있다.

오늘 날 미국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수가 늘고 자유교육 비용은 계속 증가하고 있어 학생들은 심각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으며 학부모들과 정치인들, 심지어는 고용주들까지 직업훈련과 무관한 교육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의 ‘타당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오래 전부터 ‘인문학’은 편의상 문학 비평, 철학, 언어, 미술사로 분류되었다. 인문학 옹호론자들은 통계적으로 대다수의 인사 담당자들이 다양한 교육 경험이 있는 졸업생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분명히 자유교육의 일부는 학생들이 전문 교육기관에 입학하기 위해 필요한 역량을 기를 수 있게 도와준다. 내가 언급했듯이, 이것은 중세 자유교육의 주된 목표였다.

자유교육의 타당성, 적어도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타당성은 미국의 첨예한 이념적, 정치적 차이로 도전과제를 마주하고 있다(이는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다). 비유럽 혈통의 소수민족에 대한 미국 역사의 고질적인 병폐를 고발하는 ‘다양성 정책’이나 ‘비판적 인종이론’은 ‘자유교육’으로 분류된 학문들의 통합성을 위협하고 있다. 만약 자유교육을 받는 것이 포괄적인 관점과 이해를 바탕으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는 것이라면 오늘 날의 문화전쟁은 여러 문제와 기회박탈로 그 이상을 위반하며 문화교육이 부정적이고 분열을 초래하는 만큼 자유교육의 교육적 이상은 긍정적이며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

결론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유교육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한 가지 도전과제는

‘입력(input)’과 ‘출력(output)’, 가르침과 배움, 인간역사, 사회, 인간문제에 대한 관점 제시,

그리고 포괄적으로 ‘유용한 것’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한 가지 방법은 자유교육을 설계할 때 출력부터 시작하여 거꾸로 가는 방법이다. 즉, 원하는 결과에 맞게

14) Burton R. Clark, “The Problem of Complexity in Modern Higher Education,” in Rothblatt and Wittrock, The European and American University, 263-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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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목과 접근법을 고안하는 것이다. 오늘 날의 지식과 문제해결이 진정으로 폭넓은 시야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직업훈련 및 기술훈련을 포함한 모든 분야는 자유교육의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실로 오늘 날 학문 간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모든 탐구의 영역에서 비판적인 역량이 요구된다. 늘 그래왔듯이 자유교육의 가장 큰 난관은 교육자가 학생이 호기심과 넓은 시야를 갖도록 지도하는 것을 실패했을 때다. 내가 말했듯이, 어떤 학문이든 편협한(narrow) 관점에서 가르치거나 개방적인(open) 관점에서 가르칠 수 있다.

자유교육에서 지양해야 될 것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간단한 해결책을 갈구하는 것이다.

교육자는 자유교육을 원활하게 지도해야 되는 부담을 떠안고 있다. 지도는 기술이다.

교육자는 고귀한 직업이다. 또한 가르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교육자도 결국 사람이기에 실패를 한다. 또한 외부의 압박과 직업적 목표는 종종 진리와 이해를 추구하는 것과 상충된다. 교육자 스스로가 자유교육의 핵심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 한, 우리의 목표는 상실된다. 그렇게 된다면 학생들은 모든 인간 경험의 중심인 불안과 혼란을 마주하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만약 교육자가 이러한 불안과 혼란 속에서 등불이 되어준다면 내가 이야기한 역사 속 다양한 자유교육의 목표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Referen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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