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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측 사회자:총괄토론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의 논의에 참가한 감상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는 지금의 한일 양국의 상황을 참작하면 서로 충돌하는 논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 「한-일 저널리스트 다이얼로그」라는 방식의 효과인지 거의 같은 멤버로 여러 번 회의를 실시해 옴에 따라 매우 좋은 의미에서 논의가 성숙되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냉점함도 느껴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에서 자주 쓰이는 유행어를 흉내내자면, 이와 같은 비교적 냉정한 형태에서 성숙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한일관계라는 것이 뉴노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뉴노멀의 문제점으로서는 일종의 차분한 거리감이 있지만, 현안사항을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 열의를 추진함에 있어서는 큰 추진력이 되지 못하는 그러한 모순이 있는 것 같다.

또, 정치나 안전보장상황을 생각했을 때에 아무래도 중일관계가 한일관계에 짙게 투영되고 있 것처럼 보인다. 중일관계가 매우 어려운 가운데 극단적인 표현을 하자면, 마치 줄리어스 시저의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느낌이 일본측에 있는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이 아시아태평양이라는 큰 지역의 상황의 변화에 대응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러한 대응이 보이기 때문에 일본측에 욕구불만이 높아지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 모순에 대해서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유라시아그룹의 이안 브레머가 올해 1 월 흥미로운 리포트를 발표했다. 「올해의 10 대 위험」이라는 리포트인데, 2014 년에 예상되는 10 개의 큰 위험 중에서 그들이 첫 번째로 꼽은 것은 「동맹국의 위기」라는 테마였다. 그것에 따르면 일본, 영국, 이스라엘과 같은 미국에 있어서 Tier-1(중핵적인 동맹국)은 올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Tier-2, 즉 이안 브레머가 이야기하는 한국, 호주 등의 동맹국은 아마 미국이 내정상의 이유와 기타 이유로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가운데 중국으로 이행해 간다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 변화 속에서 한일관계를 어떻게 인식해 갈 것인가라는 시점은 중요하며, 이것은 단순히 내년의 국교정상화 50주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직면할 수 있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아침의 Wall Street Journal 등에 크게 보도되고 있듯이 예를 들면 고고도 미사일 방위시스템(THAAD)의 한국배치와 같은 문제도 표면화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향후의 동맹관계, 안전보장관계, 일본과 한국과의 지정학적인 위치의 차이, 경제적인 입장의 차이와 같은 것을 어떻게 「조절」해 갈 것인가.

또, 일본과 한국 사이에 GSOMIA(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와 같은 협정에 합의하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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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와 같은 상황의 영향이 향후 어떻게 확산되어 갈 것인가. 그러한 점도 중장기적인 한일관계를 생각했을 때에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한국측 사회자:양국의 언론미디어를 접하고 느낀 감상을 문제제기로 대신하고 싶다. 먼저 첫 번째는 한일관계에 좋은 영향을 주는 보도는 어려운 것인가라는 것이다. 지금 한국과 일본에서 보도되고 있는 뉴스를 보면 긍정적인 뉴스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측에서 좋은 뉴스도 전하고 있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것이 작은 소리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지면을 크게 장식하는 것은 역시 부정적인 뉴스 뿐이다.

특히 정치외교분야에 있어서 그러한 현상이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나도 부정적인 기사를 싣는 주간지 관계자에게 왜 부정적인 기사를 쓰는지 이유를 물어 본 적이 있다. 그때 돌아온 답은 대개 「부정적인 기사를 쓰는 쪽이 팔리기 때문이다」라는 안이한 것이었다. 과연 저널리스트는 그러한 가치판단의 기준을 직접적으로 변화시켜도 되는 것일까. 또,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은 언론의 본질에 맞지 않는 것일까.

두 번째는 오전의 세션에서도 논의되었던 「언론의 자기검증」이라는 문제에 관해서이다.

양국의 미디어를 접하고 느낀 것은 균형을 유지하기보다는 한쪽으로만 몰아가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양국의 불신감이 조장되고 매우 과민하게 반응하는 측면이 현저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아사히신문은 이번에 여러 가지 문제를 경험했지만, 기사를 철회한 후에도 계속 맹비난을 받고 있다. 이것은 「언론의 자기검증」에 비추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자정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미디어 간의 경쟁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과 같은 양상은 공정성을 보장한 자정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제 3 자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우려되는 바이다.

조금 전에 「품격 있는 언론」이라는 표현, 또 프로 저널리스트의 모습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실은 언론만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학자들도 품격을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 특히, 최근의 한국에서는 종합채널이라는 장르의 방송이 활발해지고 있는데, 훌륭한 학자는 저런 프로그램에 나가서는 안된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한 영향 때문인지 신문기자 등에게 「그 기사내용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 내용은 이미 인터넷에 나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주요 신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지금은 그런 시대다」라는 답이 돌아와서 놀란 적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가십성의 기사가 어느새 「정설」인 것처럼 되어 버린다. 아마 산케이신문 건도 산케이 자체의 잘못보다는 찌라시에 실릴 법한 내용이 지면에 게재된 것에 보다 큰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터넷에서 엄청나게 이야기되고 있다는 초조함, 다른 미디어에 뒤처져서는 안된다는 초조함, 쓸 수 있는 소재는 써야 한다는 초조감이며, 조금 전의 「여유 있는 미디어」라는 표현과는 정반대의 초조함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이미 옛날이야기가 됐는지도 모르겠지만, 때로는 침묵도 하고, 또 침묵하는 방법을 아는 언론・보도기관이라는 것이 실은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것이 아닐까라고 느껴진다. 빠짐없이 모든 것을 전하는 것도 언론의 역할이지만, 동시에 non-decision

making(무의사결정)의 입장에서 침묵을 통해 방치하는 것도 보도기관의 역할이지 않을까.

오늘날 그것은 실현불가능한 꿈・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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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측 참가자:과거 30 년 동안에 일본의 신문사 내에서 상업주의는 꽤 진행되었다. 그 배경에 있는 것은 전체적인 경영기반의 약체화와 신문기자에 대한 관리통제의 강화라고 생각한다. 판매수입과 광고수입의 비율은 예전에는 50:50 이었지만, 지금은 20%대까지 광고수입이 저하되었다. 판매수입도 부수감소 따라 저하되었으며, 사원수도 감소하고 있다.

1980 년대까지의 경영과 저널리즘이 예상대로 움직이던 시대는 끝났고, 많든 적든 경영이 저널리즘에 우선되는 구조로 되었다. 그것에 맞추어서 무엇이 보도되고, 어떠한 진로를 가질까가 외적 요인에 의해 규정되는 부분이 확대되고 있다. 이 문제는 향후에도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문사가 가지는 당파성이라는 것은 물론 유럽의 신문을 보더라도 존재하고 있으며, 일괄적으로 부정해야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터넷상에서 기자 개인에 대한 공격을 보면서 깨달은 것은 저널리스트는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교과서에 적혀 있는 것이 과연 실제로도 그런가라는 것이다. 당파성을 전제로 한 위에서 신문이라는 매스미디어가 가지는 포럼성이나 제언성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특히 한국 참가자에게 물어 보고 싶은 것은 글로벌화시대에 있어서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것이다. 이번 산케이신문의 문제는 대통령이 어떻고라기보다도 세계에서 보면 언론의 자유나 기본적 인권문제에서의 글로벌 스탠다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비판이 나온 것이다. 저널리즘의 세계, 혹은 위안부문제로 상징되는 듯한 여론과 글로벌 스탠다드의 관계성을 어떻게 정리해 갈 것인가가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

일본측 참가자:나는 한일기본조약체제라는 것이 그렇게 엄격하고 짜임새 있는 것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한일기본조약은 국교도 없는 단계에서부터 일본과 한국이 서로의 주장을 펼치면서 겨우 힘들게 만들어 낸 타협의 산물이며, 그것을 화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 아닐까. 그 타협에는 애매한 부분도 있으며, 뒤로 미루어진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타케시마 문제는 일본측은 뒤로 미룬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측은 원래 문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일기본조약체제는 원래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첫걸음일 것이다.

내가 한국에 있었던 무렵 한국의 친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한일조약을 맺은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본은 한마디도 사죄해 주지 않았다. 한마디 정도는 사과해 줘도 좋지 않았을까」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그처럼 일본의 합법정당론과 한국의 불법부당론의 대립은 한일기본조약체제 아래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그러나 1995 년의 무라야마담화에서 그것은 합법이었지만 정당하지는 않았다라는 이른바

「합법부당론」으로 일본측은 전환했다고 생각한다. 즉 한일조약에 대한 모종의 수정 혹은 보충이 이루어진 것이며, 그결과로 김 대중-오부치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가능해진 것이다.

한일기본조약체제를 생각할 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의견이 일치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원점 부분에서 합법이냐 부당이냐라는 논쟁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고, 그것이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의 판결에 반영되고 있다.

한국의 전통은 도덕이나 정의, 정당성 등을 중시하는 문화이며, 만약 틀리다면 정정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일본의 문화는 문언이 중요하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바른지 어떤지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와 같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너무 과격하게 논의하는 것은 아마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것보다도 오히려 그 사이에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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