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Ⅵ1. 자민당 총재선거의 주요 정책쟁점

가. 동아시아 외교문제

고이즈미 정권은 미‧일동맹의 강화와 이를 위한 대미 편중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한 반면, 한국, 중국 등과는 심각한 갈등을 빚으며 후유증을 초래하였다.

예컨대, 고이즈미 정권은 2001년 캠프데이비드 미‧일 정상회담 및

2002년 2월의 부시-고이즈미 도쿄(東京)정상회담, 2003년 5월의 크

로포드 정상회담 등을 통하여 ‘21세기의 지도력 분담(Power-

sharing)’을 지향한 미‧일 동맹의 강화, 전략적 중요성 등을 재확인‧

강조하였고, 테러대책특별법의 제정 및 대미지원 기본계획의 수립 등 대미 편중정책의 전개와 더불어 미‧일동맹의 세계화를 지향한 ‘공 통의 전략목표’ 설정과 더불어 미‧일 연합군 유사체제를 지향한 주일 미군의 재편 작업 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외교에서는 이와 같은 대미 편중 협력정책의 적 극적 전개와는 달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역사교과서 문제, 영 유권 문제 등으로 인하여 한국, 중국과는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중‧일관계는 중국내 반일감정의 심화19와 더불어 양국의 개선 노 력이 한계에 직면한 상황에서, 일본정부의 왜곡 역사교과서 검정 통 과‧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추구‧동지나해 무인도서 의 영유권 주장 등에 격분한 중국인들이 1919년 5‧4운동 이래 최대

19_ 2003년 8월 4일에 일어난 일본 제국주의의 유기(遺棄)화학무기 폭발사건의 처리 문제, 9월 18일 중국 언론에 의해 폭로된 일본인 집단 매춘관광, 10월 29일 시안

(西安) 서북대학(西北大學) 교내 파티시 일본 유학생의 음란공연에 대한 중국

교수 및 학생들의 시위사건 등으로 인하여 중국내 반일감정이 재차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30_아베정권의 국내정치와 대외전략 및 대북전략

규모의 격렬한 반일 시위를 전개하게 되면서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악화되었고,20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인해 심각한 수준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한‧일관계 역시 2005년에 접어들어 시마네(島根)현 의회의 ‘다케 시마(독도)의 날 제정’ 및 독도영유권 문제, 일본 정부의 왜곡 역사 교과서 검정 통과 등으로 급속히 냉각되면서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 되기 시작하였다.21 2005년 6‧20 서울 한‧일정상회담은 양국이 국교 정상화를 한지 40주년이 된 해에 개최되었지만, 독도영유권 문제, 일 본 정부의 왜곡 역사 교과서 검정 통과 등으로 한‧일관계가 급속히 악화됨에 따라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22 즉, ‘역사 인식차

20_ 중국의 격렬한 반일 시위는 일본내 우익보수세력의 반중 감정을 자극하였고, 아울러 중‧일간의 ‘기 싸움’ 양상과 함께 일본정부의 단호한 대중국 비판이 야기 되도록 하였다. 2005년 4월 17일 베이징 중‧일 외교장관 회담직후 마치무라 노 부다카 외무장관의 대중국 비판 발언과 더불어 일본 정치권에서는 대중국 비판 의 강경발언이 잇따라 터져 나왔고, 4월 23일에 일본의 우익단체와 일반시민 2,000여명은 ‘중국타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거부’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흔 들며 중국의 ‘반일 시위’에 항의하는 ‘반중 집회’를 전개하였다. 즉, 중국의 격렬 한 반일시위 및 일본의 단호한 대중 강경 대응으로 인하여, 중‧일관계의 갈등은 정면충돌로 치닫으며 증폭되었다. 이처럼 긴장고조의 중‧일관계는 중국정부가 반일 시위가 자칫 반정부 소요사태로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엄중 경고를 내리 고, 나아가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에서 과거 일제침 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표명함 더불어 중‧일정상회담을 가짐 으로써 다소 진정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배정호, 최근 중‧일관계와 갈등요 인 분석 (서울: 통일연구원, 2005).

21_ 일본의 시마네현의 의회가 2005년 3월 16일 ‘다케시마(독도)의 날 제정’을 제정 하자, 한국정부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일본의 과거 침탈을 정당화하는 행위로 규정하면서 독도 문제 및 역사 왜곡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내용의 대일 외교 4대 기조와 5대 방향을 담은 신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이어 3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은 초강경 어조의 대일 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통 하여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독도)의 날 제정,’ 역사 교과서 왜곡 등을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22_ 최대 현안이었던 독도 문제는 ‘우리영토를 불필요한 논란거리로 만들지 않겠다’

는 한국측 의도에 따라 의제에서 빠졌고, 따라서 양국 정상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역사 인식 및 역사교과서 문제 등에 관해 솔직한 의견을 교환하였으

만 확인’( 중앙일보 , 6.21), ‘풀지 못한 넥타이처럼 풀지 못한 한‧일

인식차’( 동아일보 , 6.21), ‘젓가락 들기도 무거웠던 만찬’( 조선일보 ,

6.21), ‘한‧일 입장차만 확인’( 한겨레 , 6.21), ‘과거사 이견 못 좁혀’

( 세계일보 , 6.21) 등으로 평가하였고, 일본 언론들은 ‘역사인식의

간극 메우지 못함’( 朝日新聞 , 6.21), ‘양측 주장의 평행선’( 每日新聞 ,

6.21), ‘역사에 관한 간극 해소 실패’( 讀賣新聞 , 6.21) 등의 평가처럼,

한‧일 양국의 주요 3대 현안인 독도영유권 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문제 등을 그대로 남긴 채, 끝났다. 이후의 한‧일관계는 냉각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고이즈미 총리의 10월 야 스쿠니 신사 참배로 인해 12월의 정상회담의 유산과 함께 한층 악화 되었다. 특히, 2006년 4월 일본의 동해 탐사 문제로 야기된 ‘배타적 경제수역(EEZ)과 독도’ 문제는 영유권 이상의 문제로서 한국인의 일 본에 대한 정서적 문제와 얽히면서 한‧일관계의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는 불씨이다.

일본은 동북아 지역에서 독도 영유권 문제뿐 아니라, 댜오이타이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 문제로 중국과 갈등을 빚어 왔고, 에토로후

등 북방 4개 도서의 영유권 문제로 러시아와 갈등을 빚어 왔다.

일본 국내에는 미국에 너무 편중된 고이즈미 외교를 비판하며 동

며, 나아가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해 논의하였다. 그 결과, 북한 핵문제 의 평화적 해결과 이를 위한 한‧미‧일 3국의 외교적 공조원칙의 재확인, 차기 정상회담의 연내 일본에서의 개최 합의 등은 이루어졌지만,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문제 등 주요 과거사 현안에 대해서는 현격한 인식 의 차이만 확인되었을 뿐 합의는 도출되어 나오지 못했다. 즉, 노무현 대통령은

‘철저한 과거사 인식’을, 고이즈미 총리는 ‘평화에 대한 의지’를 강조했다고 하는

데, 한‧일 양국의 주요 3대 현안인 독도영유권 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문제 등은 그대로 남게 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표현처럼, 제2기 역사공동위원회 발족 및 산하에 교과서연구위원회 신설 등 ‘낮은 수준의 합의’만이 이루어졌다.

32_아베정권의 국내정치와 대외전략 및 대북전략

아시아 외교를 중시할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한국, 중국 과의 관계 개선은 포스트 고이즈미 정권의 주요한 외교과제로 부각 되었다.

일본의 정치권, 언론계, 재계 등은 동아시아 외교의 핵심 과제로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중시‧강조하였는데, 미‧일동맹외교와 동아시 아외교의 균형을 취하는 것은 포스트 고이즈미 정권의 주요 외교과 제이다.

나. 야스쿠니 신사 문제

일본이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 제국(諸國)과의 갈등을 초래한 결 정적 계기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이다. 고이즈 미 총리는 총리로 취임하기 전에는 한번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바가 없지만, 총리 취임 후 한국, 중국 등의 강한 반발 및 비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였다.

야스쿠니 신사는 1869년 메이지 천황 시절 황군(皇軍)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국가신사로서 ‘쇼콘사(招魂寺)’라는 이름으로 건립되 었는데, 1879년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로 개칭되었다.

도쿄(東京)중심가의 황궁 인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 사에는 1868년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한 내전인 보신(戊辰)전쟁 이후 태평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11개 전쟁의 전몰자 총 246만여명의 위패 가 안치되어 있고, 이 가운데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기 때 강제로 전쟁에서 희생된 한국인 21,000명의 위패도 포함되어 있으며,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 14명의 위패도 봉안되어 있다.

따라서 1978년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의 위패 봉안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한국, 중국 등 주변국들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전쟁 정

당화 행위로 간주하면서, 우려와 비판을 표명하게 되었다.

일본 천황이나 총리는 주변국의 비판을 의식하여 대체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신중에 기해왔는데, 고이즈미 총리는 전혀 이를 의식하 지 않고 2001년 4월 취임 이래 2006년 5월까지 5번의 참배를 감행하 였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로 인하여 한국, 중국 등과의 갈등이 증폭되고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면서, 일본 국내에서도 고 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대해 비판이 비등해졌고, 미국 정계에 까지도 문제시되었다.

오사카(大阪) 고등법원은 2005년 9월말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 배는 위헌(違憲)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일본 보수‧우익계의 거물 와 타나베 츠네오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주필은 「論座」(2006년 2월 호)에서 와카미야 요시후미 논설주간과의 대담을 통하여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면서 A급 전범뿐 아니라 전쟁 관계자들의 책임을 확실히 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23

또, 제1야당 오자와 이치로 대표는 대중관계 개선을 지향한 동아시

아 외교를 중시하고 고이즈미 총리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2006년 4월 10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A급 전범은 처음부터 야스쿠 니 신사에 모셔질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A급 전범 합사문제의 해결책으로서 전몰 영령부에서 A급 전범의 명단 삭제를 제시하였다.

이는 정치인으로서의 A급 전범 합사문제의 해결에 관한 최초의 공개 적 의견 표명이기도하다.

아울러, 2006년 7월 20일에는 고(故)히로히토 천황(1901~1989)이

23_ 論座 , 2006年 2月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