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서 무장햇구/
의료보험이야기
그리움을 가슴에 묻으며...
조정 화
사람들에게 가끔 묻고 싶어진다. 가장 소중한게 무엇이냐고? 난 말하고 싶다. 살아숨쉬는 것이라 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감사드린다. 살아 있음 에...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내 기억 한편에 아련 히 남아있는 엄마의 죽음. 아마 내가 죽는 순간까지 가슴속에서 꺼내지 못할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나의 가족은 엄마와 13살 터울인 언니 그 리고 2살 아래인 남동생이 전부였다. 적지도 않은 그렇다고 고아도 아니었음에도 지금 생각하면 굉장 히 외롭게 지낸 것 같다.
내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무책임한 아빠란 분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엄마의 강한 모습 이 든든함과 때로는 어렵게만 느껴지곤 했다.
말수가 적은 편인 나에게는 당연히 엄마와의 보이 지 않는 벽은 높아만 갔고 엄마는 나에게 있어 무서 움 그 자체였다. 엄마에 대한 강한 이미지 때문에 늘 엄마는 아프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남자와 같 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의 희생이 당 연하다고 생각했고 가여운 생각은 그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철없던 나의 몸과 마음을 성장시켰고 엄마를 향한 나의 어리석은 마음과 세상을 향한 눈 이 조금씩 열리고 있을 무렵 처음으로 아주 약하고
가여운 엄마이자 동시에 한 여자의 모습을 보았다.
한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던 강한 내엄마가 얼굴에서 수건을 놓지 못하고 울고 계셨던 것이다.
“엄마 왜 그래 어디 아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지 만 1시간이 넘도록 횐수건만이 엄마의 얼굴을 가리 고 있을 뿐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한쪽 벽에 걸려있 는 시계바늘만 바라보고 있을 때 얼마나 지났을까 퉁퉁부은 얼굴과 빨갛게 핏발이 선 두눈을 수건으로 닦으시 며 엄마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나와 동생을 부 르셨다. “0 0하고 △△는 지금부터 엄마 말 잘 들 어. 당분간 엄마가 몸이 조금 아파서 병원에 있을거 야. 그러니까 둘이 다투지 말고 △△이는 누나말 잘 듣고 있어야 돼 알았지” 처음으로 엄마 앞에서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울고만 있는 내게 엄마는 타이르시며 오랜만에 부드러운 음성으로 딸의 이름 을 부르셨다. “0 0야 울지말고 있어. 엄마 금방 올 꺼야. 우리 막내딸 너무 순하게 잘 커줘서 엄마는 고맙다. 엄마 맘 알지 그치만 여리고 순한게 그리 좋은건 아니니까 엄마 없는 동안 씩씩하게 학교 잘 다니고 동생하고 잘 지내야 돼 엄마는 우리 0 0만 믿어 알았지” 하시면서 나를 처음으로 안아주셨다.
일주일 뒤 엄마는 여의도 0 0병원에 입원해 긴 수
편집자 註 : 이 글은 의보련이 전국민을 대상으로 시행한「’99. 의료보험 이야기 현상공모」에서 입선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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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받으셨고 한쪽 가슴을 절제하셨다. 나중에 알 았지만 엄마는 유방암 말기여서 어려운 상태였다고 했다. 수술 후 한동안은 우울해 하셨지만 더 힘든건 끝이 없는 약물투여와 항암치료로 엄마의 몸과 마음 은 황폐해져 갔고 눈덩이처럼 불어만 가는 병원비로 우리들 역시 눈물과 한숨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겨 우 고등학교 3학년이 끝날 무렵 난 취 업이 확정되어 발령을 기다리던 상태여서 선생님께 양해를 구한 뒤 오전수업후 오후 1-5시까지 교회 선교원 보조로 오 후 6-11 시까지 식당에서 써빙을 보며 §'둔을 벌어 생활했다. 수술 후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던 우리들 의 소망은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지 얼마 못되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암은 급속도로 번져 폐를 시 작해서 온몸에 펴져나가기 시작했고 아침이면 기침 과 통증으로 얼굴과 손발이 퉁퉁 부었고 복수에 물 이 차서 배는 한없이 불러오기 시작했다. 진통제만 이 유일한 엄마의 버팀이 되었고 한가닥 밖에 남지 않은 머리를 가리기 위해 눌러쓴 아이보리색 모자와 앙상하고 창백해진 엄마의 모습은 우리를 안타깝게 할 뿐이었다. 박사님은 우리를 불러 조용히 말씀하 셨다. 최선을 다했지만 상태가 워낙 악화되어서 이 젠 손쓸 방법이 없으니 병원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 시든지 집으로 가시든지 보호자 의견을 물어 보시는 게 전부였고 우리는 곧 다가올 엄마의 50번째 생신 을 생각해 단칸방이지만 엄마의 혼적이 있는 집으로 모셔왔다. 방안에 누으시던 날 엄마는 말씀하셨다.
오랜만에 웃음을 지으시며 “병원냄새가 안나서 좋 다.” 통증이 심해지자 엄마는 드시기를 거절하고 늘 눈물로 통증을 호소하셨다. 엄마의 50번째 생신인 날 언니는 조심스레 미역국을 드렸고 생각외로 엄마 는 반그릇을 거의 드시고 누우셨다. 기쁘면서도 불
안한 마음을 떨칠 수는 없었다. 점점 우리를 떠날 준비를 하시는 것 같아서.. 하지만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마의 모습은 변화가 없었고 다만 통증에 힘겨워 하실뿐 가끔식 동생을 잘 부탁한다는 힘없는 소리만 하실 뿐이었다. 아마 돌아가시기 3일 전쯤일까? 퇴근을 하고 온 내게 엄마는 말씀하셨다.
“우리 막내딸 고생만 시켜서 정말로 미안하다. 우리 0 0좋은사람 만나서 시집가는거 볼수 있게 10년만 살았으면 좋겠네. 10년만.” 순간 나는 흐르는 눈물 을 참으며 “10년이 뭐야 엄마는 강해서 20년은 문 제없어”라는 말과 함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한참 을 집을 나와 헤메곤 했다.
삶의 끈을 잡고 싶어하는 엄마의 모습이 비칠 때 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메어 왔고 결국 엄마는 긴 자신과의 싸움을 이기지 못한 체 우리와의 짧은 인연을 놓고 말았다. 가여운 엄 마. 자식한번 안아보지 못하시고 타인의 품에서 떠 나가셨으니 생각할수록 평생의 우리들 마음에 상처 와 죄스러움을 남기고 말았다. 3남매중 단 한사람도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기에... 아직도 마음이 저리게 아파온다.
아직도...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는 자식을 가슴 에 묻으며 산다고 말하지만 자식 역시 마찬가진 것 같다. 아직도 내 가슴에는 엄마의 자리가 살아있기 에 ... 어쩌면 부모도 자식도 서로를 가슴에 묻고 묻 히며 살아가는게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는 그만 아파하고 잊으렴 나는 “네” 라는 단 한마디를 해야 함에도 지금까지 말을 못하고 있다.
벌써 2년이 다 되가는 지금 모든 것이 안정되기만을 바라던 나에게 또 하나의 시험이 다가왔다. 복지제 도의 대표적인 의료보험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게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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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를 낳고 만 것이다. 바로 요양급여기간... 주위 에서 요양급여기간이 확대 되었다는 말은 들었었지 만 매년마다 새로이 산정되는데 장기적 치료가 불가 피한 환자의 경우 초과 사용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 의가 필요한 것을 몰랐던 엄마의 경우 365일중 약 물투여 항암치료가 270일 한도에서 모두 사용하고 도 훨씬 초과했기 때문에 지역조합에서 초과진료분 을 환수처분 한다는 고지서를 나에게 발행했고 회사 와 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언니에 게 도움을 청했지만 냉담한 표정이었고 여러곳으로 수소문을 했지만 더러는 책임이 없다고도 하고 또는 자식이니 내야지 어찌하겠느냐는 알 수 없는 말만 되풀이 할뿐 결국 세대주로 등재되있는 나에게 책임 은 넘어왔다. 직장생활 2년이 되가는 지금도 엄마의 뒷정리로 중도해지하기 바쁜 통장만이 전부인 내게 200만원이 넘는 초과진료비와 그에 따른 연체이자 30만원 되는 돈을 완납하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니 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나는 아무도 떠 올 릴 수가 없어 깜깜한 시간들을 보내야했다. 언니에 게도 그렇다고 내마음 따위는 관심조차 없는 철부지 동생에게도 기댈 수도 없는 현실이 야속했고 결국 나는 조합측에 양해를 구한 뒤 모든 상황을 감안하 여 조합은 월5만원씩 납부해 달라는 결론을 내렸고 업무에 지장을 초래한 내게 편의를 봐준 조합측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 만 사람인지라 쉽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혼자 감당하기엔 힘이 들었기에...
서로 당기고 끌려가는 줄다리기 경기처럼 나를 한동 안 지치게 만들었던 의료보험의 시험은 월납으로 끝 이 났다. 새삼 의료보험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많은 주의가 필요한 것임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고 진료를 받을 때 마다 다시 한번 보게된다. 내 나이 22살. 모
든 것을 혼자 갖고 가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들어 때 로는 원망도 해보고 비록 절망뿐인 터널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 가려 한 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 곧고도 밝은 아스팔트 도 로를 생각하면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그래서 야 속하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언니 , 아직도 철부 지 행동으로 내 마음을 아프게하는 동생. 하지만 나 는 생각한다. 막내딸 외롭거나 힘들지 말라고 세상 에 남겨준 엄마의 마지막 가장 소중한 선물이란 걸.... 엄마없는 두 번의 봄을 보내고 이젠 여름을 준비하고 있다. 10년만 나를 위해 살고 싶으시다던 엄마의 모습이 자꾸만 나를 붙잡아 놓는다. 그리움 은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하늘이 맺어준 그 소중한 인연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지...
이제는 나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깨닫게 해준 그 가여운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을 준비를 하려고 한다. 내가 받은 너무나 짧게 허락된 20해의 그 큰 사랑 하나를 지금은 잃었지만 누군가 말했듯이 사랑은 나누어 주는 것이라는 말처럼 이젠 내가 받았던 사랑의 배를 동생과 언니에게 주면서 살고싶다. 엄마에게 있어 막내딸만이 아닌 언니와 동생 역시 아픈 손가락이였을 테니까.... 조용히 두 손을 모은다. 어제와 변함없이.... 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