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結語에 대신해서-
본고를 통해 가장 강조한 부분은 송, 고려, 서하 3국의 使節이 金이 제정한 ‘외국사 의례’에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이며, 이는 송과 요는 물
59) 당의 경우 辭儀 는 알 수 없다.
60) 김성규, 앞의 논문 契丹의 國信使가 宋의 황제를 알현하는 儀禮 ; 宋의 國 信使가 契丹의 황제․황태후를 알현하는 의례 참조.
론, 당의 의례에서도 보이지 않는 점이다. 그렇다면 3국의 사절이 동일 한 儀式 속에서 서로 어떠한 위치와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 즉 이것 은 그들이 金朝에 의해 평가된 국제적 지위를 반영하는 면이 되므로, 마지막으로 이를 분석하여 결어에 대신하기로 한다.
먼저 송은 금의 ‘신하국’으로 크게 추락하였지만, 그 지위가 고려나 서하보다 월등하게 우위에 있었음은 말할 필요 없다. 이를 반영한 부 분이 의식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外國使의 식장 진입 순서로 見儀 에
‘송의 使․副―송의 人從―고려의 使․副―서하의 使․副’로 되어 있 고, 曲宴儀 에서도 ‘신료 및 使客―宋의 從人―高麗․西夏의 從人’으 로, 宋을 가장 앞세운 것은 그 선후 관계를 반영하는 예일 것이다. 또 見儀 에서 宋만이 金 측에 國書를 전달하는 절차가 있고, 이 자리에 使․副의 수행원(人從)이 동참하지만 고려와 서하에서는 그렇지 않은 점, 나아가 朝辭儀 에서도 송의 使․副만이 上殿해 국서를 수령하고,
‘朝辭之賜’는 宋만이 이를 殿庭에서 받고 고려와 서하는 객관에서 받는 것도 모두 그 같은 송조의 높은 지위를 반영한다.
한편 송을 제외한 고려와 서하 간에는 見儀 와 曲宴儀 에서 고려 가 서하보다 먼저 입장하는 점에서 고려의 지위가 좀 더 앞서는 것으 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이와 관련해서는 金史에 보이는 다음의 설명 이 참고가 된다.
(A)熙宗 때(1135-1149)에···制를 定해 宋使를 三品班에 列하고, 高 麗, 夏는 五品班에 列했다. 皇統二年六月, 臣使의 辭見을 정해, 臣僚의 服 色과 拜數를 常朝起居에 따르게 하고, 三國使의 班品은 舊와 같이 했다.
(B)殿前班과 臣僚의 小起居가 끝나고 나서 宰執이 升殿하고, 나머지 신하 들의 分班이 끝나면, 비로소 入見과 朝辭의 禮를 행하게 했다. (C)무릇 入見은 宋使를 앞세우고, 禮를 마치면 夏使가 들어가고, 禮를 마치면 高 麗使가 들어간다. 朝辭는 夏使를 앞세우고, 禮를 마치면 高麗使가 들어가 고, 禮를 마치면 宋使가 들어간다.(金史 권38, 志 19, 禮 11)
이 중 (A)에 의해 宋使가 國初부터 금의 의례에서 3品班에 배열되어, 5品班에 위치한 고려와 서하보다 월등한 존재임이 확인된다. 또한 (B) 는 본문에서 검토한 見儀 와 朝辭儀 의 내용과 그대로 일치한다. 다 만 (C)에서 설명한 外國使의 入見 순서는 본문의 내용과 차이를 보여,
‘송―고려―서하’의 순이 아니라 ‘송―서하―고려’로 되어 있어, 서하가 고려보다 앞서고 있다. 제1장에서 지적한 것처럼 금은 皇統2년(1142)에
‘신하국’의 조공 의례를 정비하였고, 그 일환으로 본문에서 검토한 見 儀 등의 의례가 제정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은 본문이 보다 정확하다고 생각되며, 반면 단순히 使者의 입장 순 서만을 적은 (C)는 誤記일 가능성이 크다. (C)도 (A)와 (B)처럼 熙宗 연간의 설명이며, 그 사이에 고려와 서하의 지위에 특별한 변화가 있 었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양국은 모두 3품의 반열에 위치하므 로 큰 지위의 차이는 아니지만, 고려를 앞세운 것으로 생각한다.
고려와 서하의 지위를 비교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대목은 見儀 에서 使․副가 서게 되는 계단이 어느 쪽인가 하는 점이다. 즉 이미 검토한대로 見儀 를 마친 송의 사․부는 퇴장하는 반면, 고려사․부 는 左階에 서고 서하사․부는 右階에 서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두 계단 사이에 금의 차등적인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지의 문제이다. 일반 적으로 중국의 位階에서 左와 右의 상하 관계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경향이 있지만, 曲宴儀 에서는 이와 관련한 한 가지 장면으로 宋의 從人이 左廊에 서고 고려와 서하의 종인이 左右의 廊에 서는 장 면이 있다. 그렇다면 송이 고려와 서하보다 늘 우위에 있는 점에서 廊 下에서도 左측이 右측보다 상위임이 암시되고, 따라서 見儀 에서도 左階에 선 고려가 右階의 서하사․부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는 것이 합 당할 것이다.
이와 함께 생각할 문제로, 前引한 金史에 “朝辭는 夏使를 앞세우 고, 禮를 마치면 高麗使가 들어가고, 禮를 마치면 宋使가 들어간다.”는, 朝辭儀 에서도 확인되는 설명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見儀 와 정반 대인 이 순서는 가장 우위에 있는 宋使를 마지막에 둔 점에서, 朝辭
儀 는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은 국가를 먼저 입장시킨 후 그 예가 끝나 면 차례로 퇴장시켜, 마지막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宋使를 내보냄으로 써 의식을 종료시키는 배려가 있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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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提要)
關於金朝的“禮制霸權主義”
-以分析「外國使入見儀」為中心-
金 成 奎
金朝建立十年左右, 相繼滅亡遼、北宋, 還將高麗與西夏也臣屬, 由此成 為了東北亞的霸主. 對南宋的來說, 金朝不再是與遼朝一樣的“敵國(同等 國)”, 而變為要“臣事”的上國. “南朝”-“北朝”的互惠性稱號轉變為“宋”-
“大金”的不平等稱號, 就能看到宋朝與金朝的關係. 女真族認為自己是“天 下”的中軸, 并萌生了自我為中心的世界觀. 世界上有很多國家以及民族都 有自我為中心的世界觀, 不過金朝的這種自豪感尤其突出.
關於金朝的世界觀以及華夷觀問題, 已有不少前人的研究成果. 但在金朝 所訂制的“外交儀禮(賓禮)”上更為明顯看到他們的世界觀. 也就是說金 朝想通過儀禮, 表達自己的這種意圖和理念. 在研究金朝世界觀的問題上, 賓禮佔有如此重要的位置, 但卻沒引人注意. 筆者一直關注唐、宋、遼等金 朝以前王朝的賓禮, 并對它們進行了比較、分析. 通過這些研究, 筆者確認 了宋遼之間的平等關係. 但在金朝的賓禮上看到了與宋、遼的平等關係很 不一樣的地方. 筆者認為這賓禮上的不同之處, 正是金朝炫耀自己在國際上 的威嚴與君臨天下的道具.
日本學者巖井茂樹在其論文上說道“歷史上中華帝國試圖使用很多辦法、 制度來實現霸權主義”, 并說“作為這種霸權主義的一種, 中國明代確實存在 過‘禮制霸權主義. ’”筆者也認為這“禮制霸權主義”, 正是中國皇帝想以自己 為中心并構造天下秩序的概念, 但已在12世紀金朝的禮制上能看到這種 現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