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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양정화내각 시기에서부터

明倫大典

이 간행에 이르는 가정 전기(즉위년-가정7년)의 경연은, 가정제가 즉위한 정덕16년(1521) 4월에 제기한 자신의 황통 계승문제와 이와 연관된 生 父 흥헌왕의 封號를 비롯한 諡號와 廟號 문제, 그리고 흥헌왕의 墓室 문제 등 大禮議 정국의 전개과정과 궤를 같이하며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양정화내각 시기인 즉위년-가정2년 시기의 경연은 양정 화를 중심으로 하는 조정대신들이 祖宗之制에 따라 내각을 비롯한 儒 臣들이 주도하는 경연제도의 시행을 강력하게 제안함으로써, 군신공치 의 전통적 정치이념과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즉위하자마 자 가정제는 자신의 황위 계승과 生父인 흥헌왕에 대한 봉호 등에 대 해 이의를 제기한 것과 함께, 이어서 즉위년 7월에는 진사 장총이 조 정대신들의 주장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양정화내각을 중심으 로 하는 기존의 조정대신들과의 갈등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로써 이 시기의 경연 또한 개최시기와 經筵儀注의 제정이 즉각적으로 추진 되지 못한 채, 경연은 즉위년 8월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 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경연도 즉위년 11월부터는 중단되다가 가정 원년 2월부터 재개되었지만, 대례의 정국이 점화됨에 따라 가정2년 말 까지는 경연의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면서 간헐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처럼 ‘대례의’정국이 시작된 상황에서, 즉위년 7월 경연의주를 제정하 는 동시에, 간헐적이나마 경연을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은 祖宗之制를 고수하려는 양정화내각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

기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이렇게 시작된 경연은 가정3년 정월 계악이 正大禮疏 를 통해, 조 정대신들이 주장하는 흥헌왕의 봉호에 대해 반박함에 따라 ‘大禮議’ 정 국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가정제가 남경에 있던 장총을 비 롯한 의례파 중심 인물을 북경으로 불러들임에 따라 의례파의 세력화 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친부모에 대한 효를 대례의 근본 원칙으로 강 조하며 논리적으로 무장하여 기존의 정치세력에 총공격을 가하고 있었 다. 따라서 가정제는 대례 논쟁을 통해, 의례파를 중심으로 자신의 지 지기반을 확보하는 한편,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인적 물갈이를 단계적 으로 추진하는 등, 가정3-4년에는 ‘대례의’ 정국이 본격적으로 전개되 었다. 따라서 대례 문제와 자신의 지지세력 확보와 더불어, 특히 가정3 년 7월 좌순문 복곡사건을 계기로 반대파의 제거와 인적 물갈이에 집 중하고 있었던 가정제로서는, 기존의 조정대신들이 추진하고 강조하는 군신공치의 실현 장인 경연을 부차적인 과제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있어서 일강은 가정3년 9-10월에는 지극히 제한적 이나마 간헐적으로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경연은 중단된 채 열 리지 않았다고 하겠다.

앞의 시기의 대례 논쟁을 통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가정제 는 가정4년 12월

대례찬요

의 간행을 계기로, 가정5년 이후로는 자신 을 지지하는 의례파의 인물들을 한림원과 내각 등 황제의 최측근에 기 용하는 한편, 인사와 의례를 담당하는 이부와 예부의 시랑직 등 정의 의 핵심적인 자리에도 대례의에 찬성하는 신진세력들로 채움으로써,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 작업을 단행하였다. 더욱이 가 정6년 8월

명륜대전

의 편찬이 추진되기 시작하여 가정7년 6월에 간 행됨에 따라, 의례파의 대례관련 이론과 논리가 공식적인 법전으로 확 정되는 한편, 이를 통해 반대파의 죄상을 정리하여 定罪함으로써 이들 에 대한 대대적인 제거에 착수하였다. 이로써 지금까지의 대례의는 가 정제의 승리로 일단락되었고, 이로 인해 가정제의 독단적인 정국 운영 은 皇極을 운운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군주로 자리하기에 이르렀다. 이

와 같은 정국 상황에서, 경연은 일강에 병합되어 그 개최여부와 운영 방식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강론과 교재조차도 황제와 일강관에 포진된 의례파에 의해 자의적이고도 파행적인 형태로 시행되고 있었 다. 따라서 이 시기의 경연은 군신공치를 이상으로 하는 祖宗之制의 원형은 이미 와해됨으로써, 군신 간의 정사협의나 황제의 사적 권력에 대한 제약이라는 경연의 취지는 더 이상 발휘될 수 없었고, 단지 황제 의 일방적 요구에 따라 이에 응하는 문학적 자문 기능으로 전락하였 다. 이로써 볼 때, 가정연간 전기의 경연은 대례의 정국 속에서 유교적 정치이념을 이상으로 삼는 조종지제의 경연이 붕괴되었음을 반영하는 동시에, 명 왕조의 개창 이래 지속되었던 禮制的 국가 질서 또한 근본 적으로 동요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예고하는 것 이라 하겠다.

< 참고문헌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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院,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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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提要)

嘉靖前期(1522-1528)的‘大禮議’政局與經筵

尹 貞 粉

在嘉靖前期(1522-1528的)經筵, 就是由嘉靖皇帝登位卽後有所提出而展 開的所謂‘大禮議’政局有所緊密地連繫的. 因此, 在這篇文章裏, 對於嘉靖 前期所施行的經筵的具體現狀, 就要劃分爲三個階段來探討其特徵. 第一個 階段就是自從嘉靖登位年到嘉靖2年的, 那卽楊廷和領導內閣的期間. 第2個 階段, 可說是因由楊廷和辭職以致‘議禮派’逐漸掌握政局的主導權, 尤其以 左順門伏哭事件做爲契機, 在大禮爭論過程當中, 嘉靖皇帝獲得最終勝利的 嘉靖3年(1524)-4年(1525)期間. 第三階段就爲要進行編纂

明倫大典

的嘉 靖5年(1526)-7年(1528)的期間. 通過檢討這三個階段的經筵, 其結果可以 歸納爲如下: 在楊廷和領導內閣的期間, 是以楊廷和爲代表的朝廷大臣們强 烈地建議,, 所以經筵就可以開設而一時的施行了. 但到了第二個階段, 經過 議禮派掌握政局的主導權, 因而對於大禮的爭論也極烈地展開了. 所以在這 種情況之下, 嘉靖帝忽視了經筵, 因而經筵也無法施行了. 到了嘉靖5年 (1526)以後, 嘉靖帝開始登用議禮派等一批新進勢力做爲皇帝的左右, 以推.

行了淸除反對議禮的人物. 爲了實現淸除反對派的政治勢力, 嘉靖帝又進行 了編纂

明倫大典

, 到了嘉靖7年6月, 此書就問世才達到了其目標. 所以此 時之後, 嘉靖帝就變爲無所不爲的皇帝, 因此當時運作政局也就像脫軌的火 車一樣極爲不正常. 在這種情況之下, 經筵也不可能遵守祖宗之制, 因而經 筵就依照嘉靖帝和他的寵臣的私意, 就被爲任意地且非正常地操作.

주제어: ‘대례의’, 좌순문 복곡사건, 명륜대전, 경연, 양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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