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지역은 몽골을 포함하여 다른 지역이 아니라 바로 만주지역168)이다. 중국의 국가적 문제를 형성하는 만주문 제는 중국은 물론이고 러시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도 상당히 관심 을 가졌지만 무엇보다도 중국과 일본이 이권을 두고 첨예하게 갈등하 였다. 세계 정치의 난관이기도 한 만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국 과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도 관심을 갖는 문제이기 때문에 IPR회의를 통해 논의하였던 것이다. 만주문제로 어떠한 충돌이 발생할
-0-3_005, p.52. 만주에 남겨진 과제 ① 법률적 정치적 권리 특히 조약상의 권리와 외국인 지위 ② 조약에 규정된 특별 행동이 국제법에 의해 허용되는 한도 ③ 만주관계 조약 및 외국의 정책 변경 ④ 만주에서 조선인 문제 ⑤ 만 주문제의 국제 분쟁 해결 기관의 상호관계 문제 ⑥ 동청철도 현상 및 장래 문 제이다.
166) 齊藤惣一, 앞의 글, pp.98-99.
167) 安富正造, 앞의 글, p.57.
168) Shuhsi Hsu, ibid, pp.473-474.
수 있을지 또 이러한 충돌이 국제 관계를 증진시키면서 해결될 수 있 을지169)에 대해 실마리를 찾아보기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IPR회의 에서 만주문제를 논의한 것은 만주가 중국과 일본, 러시아 한테만 직 접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체 세계와도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평화를 원하는데 만주는 세계 평화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170) 즉 심각한 갈등 이 있는 문제는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라도 구체적으로 논의되어 평화 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3차 IPR회의 중 격렬하게 논의되었던 만주문제는 만주에서의 역 사적 유산을 주장하는 중국과 근대 국제법적 질서와 권리를 주장하는 일본사이에 만주인식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 주었 다. 만주 경제 발전의 요인, 치안유지 문제, 조약상 근거 유무와 권리 남용의 문제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의하였지만 어떠한 사안에 대 해서도 일치점을 찾기 쉽지 않았다. 이는 자연스럽게 만주문제 해결방 안에 대해서도 이견으로 드러났다. 물론 상설적인 화해 조정 위원회 구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였지만 그 전제로서 21개조 폐기 선언 등을 주장한 중국의 의견은 또 다시 일본과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은 일본이 만주에서 행사하는 정치권이 부당하다고 강조하고 일 본은 불가피한 자위책이라고 주장하자 영국 미국 등의 나라는 양국 국 민의 심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중국을 대신 희생하여 러시아를 물리쳤기 때문에 권리가 있다 고 하면서 중국의 병력이 약하기 때문에 일본이 만주에 주둔하는 것은 일본 국방상 필요하다고 보았다. 중국은 러일조약에 규정하고 중일조 약에서 승인한 것 이외에 일본은 만주에서 어떠한 권리도 없음에도 일 본 국방상의 필요로 타국에 병력을 둔다는 것은 황당무계한 소리라고 치부하였다.171)
169) 「自上海至長崎途中」; 稣上达ㆍ祁仍奚 编,앞의 자료, p.204.
170) IPR “Manchuria” Report of Round Table, No. 3, Nov. 5, 1929 (Leader: Newton W. Rowell, B10070179900), p.477.
만주의 중요성이 부각되면 중국과 일본은 정면충돌할 운명이지만, 냉정하게 문제의 본질을 검토한다면 양국 사이에 근본적인 이해 충돌 이 없다고 인식하는 일본은 대만주 정책의 출발점이 근본적으로 다르 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도 일본과 중국이 양국 국민의 생활문 제를 기반에 두고 만주문제를 논의한다면 상호 충돌하지 않고 협조할 수 있는데, 중국은 노동력을 일본은 기술과 자본 및 경영을 공급할 수 있다172)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의견에 중국은 동의할 수 없었 다.
이상과 같이 어떠한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과 어떠한 창도 막을 수 있는 방패를 가진 중일 양국은 서로 합일되기 어려운 논쟁을 계속하면 서도 화해 무드를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만주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것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런 딜레마를 활 용한 논쟁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양국의 국익을 최대화시켜 나가는 이 익을 취하고자 하였다. 한편 IPR을 포함한 서구 열강은 만주가 중일만 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만주문제임을 각인시키면서 만주의 문호개방 을 통해 모두가 참여하는 만주문제로 만들어 나가고자 하였다.
만주 논쟁은 단지 제3회 IPR 논의에서 그치지 않고 중국에서 개최 되었던 제4회 IPR회의 그리고 국제연맹에서도 논의되었다. 시대적으로 만주의 전략적, 경제적 위상이 부각될 때마다 창과 방패로서의 만주문 제는 만주에서의 딜레마 그 자체를 활용하면서 역사적 의의를 새롭게 되새김질해 나가고 있다. 21세기 ‘동북공정’에서 나타난 한중간의 ‘역 사전쟁’도 만주의 역사성을 누가 어떻게 소유하고 장악할 것인가와 관 련이 있다. 따라서 만주의 지경학적, 지정학적, 전략적 중요성이 살아 있는 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만주는 새로운 논쟁을 불러 올 것이다.
171) 稣上达ㆍ祁仍奚 编,앞의 자료, pp.96-97.
172) 長野朗, 「太平洋會議と支那問題」 (外交時報 598號,52卷, 1929年 4期), pp.60-61.
<參考文獻目錄>
「吉林太平洋國交討論會吉林硏究會ノ硏究問題資料」 (機密第286号 1929年8月15日 在局子街副領事田中作 外務大臣男爵幣原喜重郎殿, B02030786200)
C. H. Corey(米國代表判事), 「‘1929年12月16日オレゴンーチャナル紙所報」 (B- 10-1-0-3_005)
Frank C. Atherton, 「ホノルルロータリー俱樂部ニ於ケル演說大要」 (B-10-1 -0-3_005)
George H. Blackesles, 「1929年12月7日Foreign Policy Association主催ノ講演 會ニ於ケル演說」 (B-10-1-0-3_005)
Hon. Newton W. Rowell, 「新聞記者ニ關スル感想談」 (B-10-1-0-3_005) H. F. Angus, 「1930年1月17日晩香坡商業會議所外國貿易部午餐會席上ニ於ケル講
演要領」 (B-10-1-0-3_005)
IPR “Manchuria” Report of Round Table, No. 2, Nov. 4. 1929 (Leader: Rt.
Hon. Viscount Lord Hailsham, B10070179900)
IPR “Manchuria” Report of Round Table, No. 3, Nov. 4, 1929 (Leader:
Newton W. Rowell, B10070179900)
IPR Report of Round Table, No. 1, Nov. 4, 1929 (Leader: James. G.
McDonald, B10070179900)
「R. Greene 발언」 (IPR Report of Round Table, No. 1, Nov. 4, 1929, Leader: James. G. McDonald, B10070179900)
IPR “Manchuria”(Rockefeller) Report of Round Table, No. 2. Nov. 5, 1929 (Leader: Viscount Lord Hailsham, B10070179900)
IPR Report of Round Table, No. 2. Nov. 5, 1929 (Leader: Viscount Lord Hailsham, B10070179900)
IPR “Manchuria” Report of Round Table, No. 3, Nov. 5, 1929 (Leader:
Newton W. Rowell), B10070179900)
IPR “Manchuria” Report of Round Table, No. 1, Nov. 5, 1929 (Leader:
James. G. McDonald, 「第三回太平洋問題調査会大会支那問題円卓会議議事録」
其ノ二/(満州問題), B10070179900)
IPR “Manchuria” Report of Round Table, No. 3, Nov. 4, 1929 (Leader:
Newton W. Rowell, B10070179900)
IPR "Manchuria" Report of Round Table, No. 4, Nov. 5, 1929 (Leader:
Roland Boyden, B10070179900)
IPR "Manchuria" Report of Joint Meeting Round Table, No. 2, Nov. 5, 1929 (Leader: Rt. Hon, Viscount Lord Hailsham, B10070179900)
IPR “Manchuria” Report of Round Table, No. 1, Nov. 5, 1929 (Leader:
McDonald, B10070179900)
IPR "Manchuria" Report of Round Table, No. 2, Nov. 5, 1929 (Leader:
Viscount Lord Hailsham, B10070179900)
IPR “Manchuria” Report of Round Table, No. 1, Nov. 5, 1929 (Leader:
James. G. McDonald, B10070179900)
IPR Report of Round Table, No. 4. Nov. 6, 1929 (Leader: Roland Boyden, B10070179900)
IPR “Manchuria” Report of Round Table, No. 1, Nov. 6, 1929 (Leader:
James. G. McDonald, B10070179900)
IPR “Manchuria” Report of Round Table, No. 1, Nov. 6, 1929 (B10070179900)
Norman F. Coleman, 「1929年12月8日モーニング オレゴニン紙所報」
(B-10-1-0-3_005)
R. W. Boyden(米國代表ボストン在住辯護士), 「1929年12月3日沙港商業會議所主 催ノ午餐會ニ於ケル演說」 (B-10-1-0-3_005)
Walter Young, 「雜誌Pacific Affairs 1930年3月號所載論文要譯」 (B-10-1-0 -3_005)
William M. Birks, 「1929年11月20日晩香坡商業會議所午餐會席上ニ於ケル講演要 領」 (B-10-1-0-3_005)
William W. Ortor, 「オプザーバー紙ヘノ寄稿文」 (B-10-1-0-3_005)
「영국의 Webster 발언」 (IPR, The Manchurias Question, Round Table, No.
1. Nov. 3, 1929, Leader: James. G. McDonald, B10070179900)
Yosuke Matsuoka, “Reply to Prof. Shuhsi-Hsu's Criticisms and Observations” (Third Biennial Conference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1929)
Yosuke Matsuoka, “An Address on Manchuria Its Past and Present” (Third Biennial Conference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1929)
余日章, 「客年12月13日蕪湖支那基督敎靑年會ニ於ケル報告演說」 (B-10-1-0-3 _005)
閻寶衡, 「1929年12月24日奉天大南關靑年會館ニ於ケル報告演說」 ( B-10-1-0 -3_005)
外務省情報部, 「著書‘太平洋問題’送付ノ件」太平洋問題調査会関係一件 第五巻 (B -10-1-0-3_005)
長野朗, 「「太平洋會議ト滿蒙問題」ト題スル論文要領」 (國際知識 1929年12月號 所載, B-10-1-0-3_005)
陳衡哲, 「1929年12月1日北平大學ニ於ケル新東北學會主催ノ講演會ニ於ケル演說要 領」 (外務省情報部, 「太平洋問題調査會第3回大會出席代表ノ同會議ニ關スル演說 並感想」(昭和5年9月), B-10-1-0-3_005)
高石眞五郞, 「「太平洋會議ニ例シテ」ト題スル論文要領」 (東京日日新聞 1929年 11月11日以降連載, B-10-1-0-3_005)
徐淑希, 「支那社會政治學會ニ於ケル報告演說」 (B-10-1-0-3_005)
蠟山政道, 「「太平洋會議ト滿洲問題」ト題スル論文要領」 (滿蒙 1930年1月號所載, B-10-1-0-3_005)
蠟山政道, 「滿洲問題」 (新渡戶稻造 編, 太平洋問題: 1929年京都會議,太平洋問 題調査會, 東京, 1930)
頭本元貞, 「京都會議の效果如何」 (外交時報 601號,52卷, 1929年 4期) 劉馭萬, 最近太平洋問題(上卷) (中國太平洋國際學會出版, 1932)
美國代表楊華德在大阪之演詞, 「東三省問題與世界」 (稣上达ㆍ祁仍奚 编,第三届 太平洋国交讨论会纪要,1930; 沈云龙 主编,近代中国史料从刊续编 第50 辑,台北: 文海出版社,1978)
新渡戶稻造, 「會議の所感」 新渡戶稻造編, 太平洋問題: 1929年京都會議,東京:
太平洋問題調査會, 1930)
長野朗, 「太平洋會議と支那問題」 (外交時報 598號,52卷, 1929年 4期) 齊藤惣一, 「太平洋問題調査會の成立と第三回大會の意義」 (外交時報 597號,52
卷, 1929年 4期)
安富正造, 「太平洋會議如是我觀」 (外交時報 601號,52卷, 1929年 4期) 松原一雄, 「太平洋會議に就ての所感」 (外交時報 601號,52卷, 1929年 4期) 半澤玉城, 「日滿關係と太平洋會議」 (外交時報 596號,52卷, 1929年 4期) 副島道正, 「再び太平洋會議に就て」 (外交時報 599號,52卷, 1929年 4期) 小川節, 「太平洋會議に於ける日支論爭」 (外交時報 600號,52卷, 1929年 4期) 松岡洋右, 「太平洋問題調査會就我國民望」 (外交時報 639號,59卷, 1931年 3
期)
“The Problems of Manchuria” (J. B. Condliffe, eds., Problems of the Pacific 1929, originally published in 1930 b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first Greenwood press reprinting, New York, 1969)
Paul F. Hooper, Remembering the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The Memoirs of William L. Holland (Tokyo: Ryukei Shyosha Publishing Company, 1995)
片桐庸夫, 「第3回京都會議と滿州問題」 太平洋問題調査會の硏究 (東京: 慶應義 塾大學出版會, 2003)
张静, 「中国知识界与第三届太平洋国交讨论会」 (近代史研究 2004-1) 王美平, 「太平洋国际学会与东北问题」 (近代史研究 2008-2)
(Abstract)
Dilemmas between Spear and Shield:
Sino-Japanese controversy on Manchuria in 1929
Park, Sun Young
This article analysis on Sino-Japanese controversy on Manchuria in 1929 use of conception with dilemmas between spear and shield, which was main discussion topic for the third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conference. Arguments mainly discussed by China and Japan because of direct connection to Manchuria historically and emotionally. Discussion was clearly showed that how far difference they had between China, who argue about historical legacy in Manchuria, and Japan who consist rights and oder by modern international law.
Arguments focus on 3 aspects: First, What factors can support Manchuria economic development; Second, How and whom to protect social order in Manchuria; Third, Japanese grounds for treaty and misuse of rights in Manchuria. Even though the IPR conference discussed those topics but no meet the point.
Naturally Sino-Japan had different solution for Manchuria problem although both countries agree to the idea that making of compromise committee to solve the problem. However China ask Japan to declare 21 demands abolition as a precondition but Japan couldn't buy the id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