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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부문

Dalam dokumen 김정일 현지지도의 특성 (Halaman 67-78)

군사부문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경제부문에 대한 현지지도이 다. 김정일은 1981년 이후 김일성과는 별도로 각 지역을 돌면서 공 업부문에 대한 현지지도를 했었다. 예컨대 1984년 5월 15일에서 18 일까지는 함경남․북도로 가 김책제철소와 룡성기계연합기업소 등을 시찰했고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는 평안남․북도의 락원기계공장과 평북제련소, 121호공장 등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러한 공업부문에 대 한 현지지도는 예외적인 것이었다. 김일성 사망 이전 경제부문에 대 한 지도는 거의 김일성에 의해 수행되고 있었고 경제부문과 관련한 김정일의 현지지도는 일부의 경공업부문과 건설사업 등에 국한되어 있었다. 더욱이 경공업부문에 대한 김정일의 현지지도도 1991년부터 는 공식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공업부문에 대한 김정일의 현지지도 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1월 16일에서 21일까지 자강 도를 방문해 여러 공장과 기업소를 시찰한 때이다.

현지지도가 해당 부문에 대한 김정일의 관여를 상징한다면92) 이는 김정일이 경제부문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1996년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하여 했다는 다음과 같은 비밀연설은 이 점을 강력히 시사한다.

지금처럼 정세가 복잡한 때에 내가 경제실무사업까지 맡아보면서 걸린 문제들을 다 풀어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혼자서 당과 군대를

92) 서동만, “김정일의 경제지도에 관한 연구,” pp. 32~50.

비롯한 중요 부문을 틀어 쥐어야지 경제실무사업까지 맡아보면 혁명 과 건설에서 돌이킬 수 없는 후과를 미칠 수 있습니다. 수령님께서 는 생전에 나에게 절대로 경제사업에 말려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하 시면서 경제사업에 말려들면 당사업도 못하고 군대사업도 할 수 없 다고 여러 번 당부하시었습니다.…경제사업은 다른 일꾼들과 행정경 제일꾼들이 책임지고 하여야 합니다.”93)

위의 인용문이 사실이라면 1980년대말과 1990년대초 사회주의권 이 붕괴되고 북한에 체제유지 위기가 닥치면서 김정일은 경제부문에 대한 관여를 최대한 줄이거나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91년 이 후 경제부문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김정일의 현지지도라면 1991

년 10월 7일에 개업을 앞둔 광복백화점을 둘러본 것과 1992년 2월

26일에 준공단계의 애국천연색텔레비젼조립공장을 시찰한 것이 전부 이다.

김일성이 사망한 뒤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체제유지의 가능성에 숨통이 트이자 김정일은 1997년 1월 24일 ‘전당 당일군회의’를 하도 록 하고 여기에 “올해를 사회주의경제건설에서 혁명적 전환의 해로 되 게 하자”라는 제목의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김정일은 “우리 혁 명과 우리의 사회주의 조국을 믿음직하게 수호할 수 있는 군사적 담 보를 확고히 마련”하여 놓은 것이 “지난 2년반 동안 우리 투쟁의 주되 는 총화이며 우리의 위대한 승리”라고 하면서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는 경제건설과 인민생활에서 전환을 일으 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올해에… 나라의 경제를 추켜 세우고 93) 「월간조선」, 1997년 4월호, pp. 305~317. 「김정일선집」에 실려있는 이

연설은 많이 개작되어 인용한 부분은 빠져있다. 김정일,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게 대학 교육을 강화할데 대하여,” 김일성종합대학창립 50돐 에 즈음하여 대학교직원, 학생들에게 보낸 서한 1996년 10월 1일. 「김 정일선집 14」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pp. 232~248 참조.

인민생활문제를 결정적으로 풀려는 것은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라 고 강조하면서 “경제문제와 인민생활문제를 풀기 위한 투쟁에 전당, 전국, 전민을 힘있게 조직동원”할 것을 촉구했다.94) 이는 김정일이 경제사업에 대한 지도에서 떨어져 있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그 책임을 맡겠다는 자세로의 전환으로 해석된다.95)

경제부문에 대한 김정일의 본격적인 현지지도는 1997년 10월 김 정일이 당총비서에 취임한 후인 1998년 1월 자강도에 대해 이루어지 기 시작했고 1998년 9월 국방위원장으로 재추대되어 명실상부한 최 고지도자가 된 이후인 1999년부터 더욱 강화되고 있다. 따라서 경제 부문에 대한 현지지도 횟수는 1998년부터 급격히 증가하여 경제에서 의 실리보장을 강조한 2000년에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으며 2001년 에 약간 추춤한 이후 2002년부터 다시 증가추세를 보인다.

<표 12> 연도별 경제부문 현지지도 횟수

횟 수 연 도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경제부문 현지지도 횟수/

전체 현지지도 횟수 1/11 4/32 1/29 11/49 23/50 23/42 18/41 22/46 비 율(%) 9.1 12.5 3.4 22.4 46.0 54.8 43.9 47.8

한편 경제부문에 대한 현지지도는 제한된 자원과 자금을 특정 분야 에 집중적으로 투입함으로써 이 분야를 발전시키고 점차 이를 다른 부문으로 확산시켜 경제를 정상화 내지 발전시킨다는 전략하에 행해

94) 김정일, “올해를 사회주의경제건설에서 혁명적 전환의 해로 되게 하 자,” 전당 당일군회의 참가자들에게 보낸 서한, 1997년 1월 24일. 「김 정일선집 14」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pp. 277~279.

95) 서동만, “김정일의 경제지도에 관한 연구,” p. 47.

진다. 따라서 현지지도는 경제논리에 입각한 해결방안이라기 보다는 최고지도자의 정책적 의지에 의해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96)

이 점에 주목하여 경제부문 현지지도가 크게 증가하는 1998년 이 후 김정일이 현지지도한 경제관련 단위를 일정한 범주로 나누어 연도 별로 살펴본 것이 <표 13>이다.

<표 13> 경제부문 연도별․단위별 현지지도 횟수

구 분 현지지도 단위 연 도

1998 1999 2000 2001 2002 총계

공 업

공장․기업소 10 6 7 8 11 42

발전소, 군대발전소 3 5 9 6 6 29

제염소 1 1 1 0 0 3

광 업 광산, 광산기업소 0 0 1 1 1 3

농 업 농장, 농촌기계화 1 6 7 4 6 24

토지정리사업 0 3 3 1 0 7

축산업 목장, 닭공장 0 2 3 5 7 17

수산업 양어장, 메기공장 0 6 4 4 1 15

임 업 묘목장, 임산사업소 0 0 1 0 1 2

기 타 연구소, 과학원 2 3 0 0 1 6

총 계 17 32 36 29 34 148

* 1~2일동안 한 지역의 여러 공장․기업소를 방문한 것은 1회로 계산, 공장과 농장 등을 같이 방문한 것은 각각 1회로 계산

<표 1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지지도를 가장 많이 한 단위는 공장 과 기업소이다. 이는 공업부문에 대한 현지지도를 뜻하는 것으로, 그 함의는 북한경제의 회생에서 공업부문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96) 김상기, “김정일 경제부문 현지지도 분석,” p. 14.

공장․기업소 다음으로 김정일이 많이 찾는 곳은 발전소이다. 공업 발전의 선행조건이 전력생산에 있음을 감안하여 공장․기업소․발전 소 방문을 같은 범주로 본다면 전체의 절반에 가깝다.

공업발전과 연관된 것이지만 북한정권이 당면한 과제중의 하나는 먹는 문제의 해결이다. 그래서 1998년의 신년 공동사설에서 2002년 의 신년 공동사설에 이르기까지 북한은 농업이 “사회주의경제건설의

1211고지” “강성대국건설의 천하지대본”이며 “전국이 달라붙어 농사를

지음으로써 농업생산을 획기적으로 늘이고 먹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97) 먹는 문제의 해결에 대한 강조는 <표 13>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표 13>에서 보는 바대로 먹는 문제의 해결과 직결되어 있는 농업, 축산업, 수산업에 대한 현지지도의 횟수는 63회에 이른다. 공업부문 으로 분류된 공장․기업소에 대한 현지지도에는 식료가공공장에 대한 현지지도가 다수 포함되어 있고 제염소에 대한 현지지도의 실제 내용 은 먹는 문제의 해결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이를 모두 합친다면 첫 순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만큼 김정일이 먹는 문제의 해결에 신경을 쓰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경제부문에 대한 연도별 현지지도 횟수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현지 지도 단위가 1999년부터 다양해지기 시작한 점이다. 토지정리사업이 97) “위대한 당의 령도따라 새해의 총진군을 다그치자,” 「로동신문」, 「조선

인민군」 공동사설, 1998년 1월 1일; “올해를 강성대국건설의 위대한 전 환의 해로 빛내이자,” 「로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공동사설, 1999년 1월 1일; “당창건 55돌을 맞는 올해를 천리마대고조의 불길속 에 자랑찬 승리의 해로 빛내이자,” 「로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 위」 공동사설, 2000년 1월 1일; “<고난의 행군>에서 승리한 기세로 새 세기의 진격로를 열어 나가자,” 「로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공동사설, 2001년 1월 1일; “위대한 수령님 탄생 90돐을 맞는 올해를 강성대국건설의 새로운 비약의 해로 빛내이자,” 「로동신문」, 「조선인민 군」, 「청년전위」 공동사설, 2002년 1월 1일 참조.

시작되면서 농장에 대한 현지지도가 크게 증가했고 각종 목장과 양어 장으로 현지지도가 확대되었다. 이는 먹는 문제의 해결이 보다 구조 적이고 다양한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98)

경제부문에 대한 현지지도에서 관찰되는 흥미있는 형태는 몇일동안 한 지역을 돌면서 여러 단위를 일괄적으로 지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반드시 경제부문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간 동안 평양을 떠나있게 된다는 점에서 즉흥적으로 결정되었을 가능성 이 적을 뿐 아니라 그만큼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지역․부문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일별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현 지지도에서 김정일이 지도한 단위에는 다소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표 14> 일괄 현지지도 단위

기 간 지 역 부 문 현 지 지 도 단 위

’81.5.18~22 평북 사회문화 부문

국제친선전람관, 묘향산 문화유적 및 명승지

’84.5.15~18 함북,

함남 경제 부문

김책제철소, 5월10일공장, 무산광산, 청진조 선소, 청진화력발전소, 성진제강소, 5월24일 수출품수산사업소, 룡성기계연합기업소 등

’84.10.22~24 평북,

평남 공업 부문 락원기계공장, 평북제련소, 121호공장 등

’88.7.5~6 함북 경제 부문 경성도자기연합회사 등

’90.6.16~17 량강도,

자강도 종합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 남포태온실농장, 혜 산-만포 청년선 북부철길 등

98) 김상기, “김정일 경제부문 현지지도 분석,” p. 6.

Dalam dokumen 김정일 현지지도의 특성 (Halaman 6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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