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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와곡
철와곡(鐵瓦谷)이란 이름은 철과 기와 골짜기란 뜻입니다. 동남산 자락으로 들어오는 도로에는 화랑교육원 다음에 무, 열왕 김유신 문무왕 영정을 모신 통일전이 있습니다 이, , . 통일전과 안마을 사이에는 전망대 부근에서 발원하여 정동 으로 흘러내려오는 철와곡 골짜기 입구가 있습니다 골짜기. 길이는 1㎞ 정도 됩니다 그 어귀에서. 500m 정도 들어가면 문디바위라는 많은 알구멍 성혈 이 파여져있는 바위가 있는( ) 데 여기서 북철와곡과 남철와곡 여울이 합쳐집니다 길을, . 따라 오르면 전망대에 이르게 됩니다.
철와곡 석조불두 (국립경주박물관)
년 몰아부친 태풍 영향으로 철와곡 입구에서 발견되 1959
었습니다 높이. 153 ,㎝ 너비 81㎝에 이르는 거대한 불두입 니다 아직 이 불두에 맞는 몸체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만. , 약 불두의 몸체가 서있는 입상(立像)이었다면 10m 높이가 넘는 대불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습니다.
경주국립공원 역사문화유산
경주 남산의 보물 계곡들 40
한편 철와곡 골짜기 길 외에도 철와곡의 왼쪽 산줄기를 따라 나란히 오르는 능선 길이 있습니다 이 능선은 철와곡. 입구에서 남쪽으로 150m 가량 떨어진 양사 사찰 부근에서( ) 올라가는 길입니다 이 길을 타고 오르면 중간에 고깔바위. 를 지나 역시 전망대로 이르게 되어 철와곡 골짜기에서 올라 오는 길과 연결됩니다 철와곡 입구에서 남쪽에 있는 마을. 의 이름은 안마을인데 서출지, (書出池)란 유서깊은 큰 연못 주변에 촌락을 이루었습니다 서출지에는 반은 땅에 있고. 반은 물에 떠있는 누정이 있습니다.
삼국유사 권 기이 사금갑 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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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전하고 있습니다.
신라 21대 비처왕 소지마립간( , 479~500) 10 (488)년 왕 이 천천정에 행차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습니다.
쥐가 말하기를,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시오 라고 하였” 습니다 왕은 기사에게 명하여 쫓아가게 하였습니다 기사. . 가 남쪽 피촌 오산계곡 어귀 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 ) , 우는 것을 한참 구경하다가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잊어버, 리고 길가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오면서 편지를 전해주니 겉봉투에는 봉투를 떼어보면, ‘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라고 쓰여있는 것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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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돌아와 왕에게 바치니 왕은 두 사람이 죽은 것, “ 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 . 자 일관(日官-천문관 점술관 은 두 사람은 보통 사람이고, ) “ , 한 사람은 왕일 것입니다 왕이 그렇다고 여겨 떼어보니” , 그 글에 거문고 갑 통 을 활로 쏘아라 고 하였습니다 왕이‘ ( ) ’ . 거문고 갑을 쏘니 그 안에는 궁궐 승려와 궁주 왕의 첩 가, ( ) 은밀히 간통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처형되었습니다. .
이로부터 나라 풍속에 해마다 정월에는 매사 조심하고 함 부로 하지 않고 대보름을 오기일, (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 지냈다고 합니다 또 편지. 를 받은 그 연못을 서 출지(書出池)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경주 서출지 사적[ 138] (철와곡 남산동, )
철와곡 입구 통일전 옆의 안마을에 있는 연못입니다 여름. 이면 연꽃이 만발하고 백일홍이 붉게 피어납니다 연못 서. 편에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이요당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에서 남쪽으로 500m 떨어진 양기못 양피못 이 본래의 서출( ) 지라고도 합니다 탑마을 쪽에 있는 양피못이 본래의 서출. 지이며 현재의 서출지는, 17세기 이요당이 세워진 뒤 명명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요당은. 1667년 세워 지고 1730년대에 중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