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는 분열되었고 국가통일은 줄곧 남북 주민들의 절박한 소원이었다. 한반도 분단은 내적·외적 요인이 모두 작용한 결과물이다. 일본이 패망하 고 한반도에서 철수할 당시 한반도 내부는 이미 좌우로 대립하고 분열되어 있었으며, 광복 후 국가 제도 구상에 관한 치열한 정쟁이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경계로 한 반도 분할·점령 후 자신의 지지 세력들에게 점령지역의 통치를 위임했다. 당시 미소관 계는 이미 동맹관계에서 적대관계로 변해있었으며 양측 모두 임시 통일정부 설립을 통 하여 한반도 통일 후의 영향권 확보를 노렸다. 이 때문에 이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결 국 각자 자신의 점령 지역의 한 파벌을 지원하여 국가를 만들었고 한반도는 공식 분단 해외 한반도 연구동향
북핵문제와 한반도 통일
장롄구이중국공산당 중앙당교 교수
되었다. 이는 한반도가 국가분열 이전에 민족분열이 먼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분열은 모든 사람에게 비극이었다. 이 때문에 1948년 전후로 남북 양측에서 협상을 통해 국가분열을 막고 통일을 이루어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분단된 상태에서 권력을 획득한 정치 세력들은 통일 후에 자신들이 가진 권력이 상실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은 통일을 통해 자신 의 권력이 한반도 전역에 미치길
원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 로 이러한 권력 특성이 이후 남북 관계가 제로섬 경쟁이 되도록 결 정지었을 뿐만 아니라, 양측이 평 화적 방법으로 통일 실현이 불가 능할 때 무력을 선택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1950년의‘6·25 한국 전쟁’의 발발은 필연적이었다.
3년간의 6·25 한국전쟁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당시 세계는 동서 양대 진영으로 갈라져 있었고 38선은 이미 바꾸기 힘든 진영 경계선이 되어 있었다. 전쟁은 남북당사자들로 하여금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한 동시에 중요한 가치를 확인시켰다.
바로, 무력통일은 현실적이지 못하며 그 대가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정전 이후 남북 정치인들은 비록 정치적인 셈법 하에 여전히‘남조선 해방’, ‘북진통일’이라는 구호를 지속적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양측 모두 전쟁의 재발발을 극도로 회피하고 있 었다.
70년대 초 미중 사이에 해빙무드가 조성되고 전후 국제관계의 중요한 변화가 일 어났다. 이러한 배경 아래 남북은 대화를 시작하였고 1972년 한 시대에 획을 긋는‘ 7·4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문건은 두 가지 의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첫째, 남북 으로 대치하던 두 당사자가 처음으로 공동 문건에 서명하였고, 국가 재통일을 위한 자
6·25 한국전쟁은 남북 당사자들에게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한 동시에 무력통일은 현실적이지 못하며 그 대가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중요한 가치를 확인시켜
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확립하였다. 즉 양측이 무력통일이라는 선 택지를 버리는 합의를 한 것이다. 둘째, 양측 모두 자기 주도하의 통일이라는 기존 전 략을 버리지 않는 상황에서 남북간 성장 경쟁을 전개하는 암묵적 합의를 한 것이다. 즉 평화로운 경쟁을 통해 통일 주도권의 귀속을 결정짓는 다는 것이었다.
‘ 7·4남북공동선언’서명 당시 남북은 대체적으로 동일 출발선상에 서있었고 남 북 모두 성장 경쟁에 있어서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그 이유로는 북한은 전쟁이 끝난 후 빠른 속도로 성장,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원 아래 3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전쟁 복구 를 마쳤고 60년대에는 고속성장기에 진입했다. 70년대 초반까지 북한은 한국보다 더 발전되어 있었다. 1950년대를 통틀어서 본다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 대 열에 서 있었고 이어 1960년에는 국가 대혼란까지 발생하였다. 1961년 5월 박정희 대 통령이 집권하여 새로운 사회경제개발 발전전략 수립 후 개혁과 개방을 하였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였고 60년대 중반에는 경제 성장의 첫 도약을 하여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한국 또한 경제 발전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1년 후에 상황은 달라졌다. 통계수치를 보면 1973년에 한국의 국력이 북 한을 초월했다. 80년대 한국은 제2차 경제 도약을 성공시켰고 민주화 변혁을 이루어 냈으며 신흥공업국가로 변모해‘아시아 4마리 용’중 최고가 되었다. 반대로, 당시 북 한은 성장 난관에 봉착했고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했다. 특히 80년대 말 소련과 동구권 의 몰락으로 인해 북한은 대부분의 외부원조를 상실했고 북한 경제는 곤두박질쳤으 며, 90년대 중반에는‘고난의 행군’이라는 위기도 맞이하였다. 남북간 성장 경쟁은 북 한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국력차이는 나날이 커져 북한 입장에서는 암울할 정도로 역전하기 힘든 국면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성장 경쟁을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기로 결정 한다. 엄밀히 말하면, 핵무기는 전력이 보여지는 무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정치 의 연속으로, 그 끝에는 승패의 결과가 있어야 하지만 핵무기 사용의 결과는 상대방과 의 공멸이다. 핵전쟁 후 승리자는 없다. 그러므로 핵무기의 기능은 두 가지뿐이다. 위
협·편취, 그리고 종말성 파멸이다.
성장을 위한 경쟁과 적자생존은 자연의 보편적 법칙으로, 진화와 발전의 요소이 다. 경쟁이 있어야‘선수’들은 보다 더 강해지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야 비로소 올바른 진화가 이루어진다. 성장 경쟁은 겉으로 보기에는 누가 더 빠르게 잘 발전하는 지 겨루 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의 오류수정 능력이 더 훌륭한가를 사력을 다해 겨루 는 것이다. 경쟁이 공정하게 진
행된다면 선수들 모두 최적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객관적 효 과를 얻을 수 있다. “행복한 가 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모두 제 각각이다”라는 러시아 문학가 인 톨스토이의 유명한 말처럼
좋은 것은 모두 비슷하다. 남북간 성장 경쟁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양측 모두 좋 은 결과를 내고 종국에는 비슷한 결과로 수렴하여 융화적 통일에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핵무기 개발 계획을 선포하였다. 핵무기는 대규모 살상무기로서 극도의 특수성이 있기에 북핵문제가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하고 긴박한 문제가 되었 고, 또 다시 관련국들은 안보·군사적 충돌과 전쟁을 가장 우려하게 되었다. 남북관계, 북한과 타국관계, 그리고 국제사회와의 관계 등에서 모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군 비경쟁은 성장 경쟁을 대신하여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남북간 성장 경쟁은 축구시합과 유사하다. 신사적 플레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는 양쪽 모두 아래와 같은 규칙을 지킨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경기 규칙을 준수하고, 둘째,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다. 북한은 경기 중 잠시 동안 불리한 상태에 빠 졌었다. 그렇지만 북한은 전략의 변화로 경기력을 향상시켜 승기를 잡는 방식이 아닌 핵무기 개발이라는 방식을 채택했다. 전면전과 핵전쟁이라는 구호를 외쳤으며 남북
남북한 성장 경쟁은 북측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 북한 입장에서는 역전하기 힘든 국면,
북한은 성장 경쟁을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기로 결정
모두 공멸하는 위협으로 인해 결국 시합은 중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