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東觀漢記 卷六 明德馬皇后의 校注에 의하면 “夫人八妾所舂米之臧以奉宗廟 者也”에 대해 顏師古注云 “一娶九女, 正嫡一人, 餘者妾也, 故云八妾.”라고 한 점 으로 보아 집안의 부인과 첩이 방아 찧기에 참여하고 있다.
131) 齊民要術 養牛、馬、驢、騾第五十六相牛、馬及諸病方法.
132) 中國農業博物館 編, 漢代農業畵像磚石 (中國農業出版社, 1996), p.121.
133) 通典 卷163 刑制上 漢 “舂者, 婦人不參外徭, 但舂作米. 皆四歲刑也. 今皆就 鬼薪、白粲. 鬼薪, 已具上. 白粲, 坐擇米, 使正白為粲. 皆三歲刑也.”; 漢書楚王 元傳: “衣之赭衣, 使杵臼推舂於市.”
134) 藝文類聚 第三十五卷 人部十九 奴, “奴老力索. 種莧織席. 事訖欲休. 當舂一 石. 夜半無事. 浣衣當白. 若有私錢. 主急賓客. 奴不得有姦私. 事事當開. 初學記作 關. 白. 奴不聽教. 當笞一百.”
135) 苗栗縣志 卷7 風俗考(番俗附) 番俗, “其喪祭也. 內山番死, 男女老幼皆裸體, 用鹿皮包裹; 親屬四人舁至山上, 用鹿皮展鋪如席, 以平生衣服覆之, 用土掩埋. 服 尚白. 既葬, 家人及舁喪者三日不出戶, 不舂、不歌, 所親供給飯食. 一月後, 赴園 耕種. 通社亦三日不赴園, 以社有不吉事也.”
고대 맷돌 역시 일종의 사회경제적 변화의 산물이다. 이미 신석기말 기부터 硏磨盤이 등장하고, 철기가 출현하면서 석재의 가공이 용이해 져 맷돌의 사용도 확대되었다. 단단한 돌로 만들어진 맷돌은 상하의 石板 사이에 곡물을 넣어 원심력을 이용하여 갈아 분말을 배출하게 하 는 도구이다. 이것은 도정한 豆, 麥類의 곡식을 분말로 만들거나 물에 불인 콩을 갈아 걸쭉한 용액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된다. 맷돌을 사용 할 때는 대개 1인 노동으로 작업하지만, 크기에 따라 2인이 참여하거 나 漢唐시대에는 수력이나 축력을 이용하여 생산성을 높이기도 하였 다.
說文解字
에는 磨는 “䃺
” 또는 “磑”라고 한다. 두 돌을 합치하여 그 가운데를 쪼아 이빨을 만들어 물건을 가는 것을 磑라고 하며, 강남 에서는 磨라고 불리었던136) 곡물의 製粉機이다. 전국시대부터 등장한 맷돌을 보면, 그 기본적인 구조는 상판, 하판의 두 돌이 중심의 철심에 연결되어 있고, 상판의 가운데에 곡물을 넣는 홈이 있고 상판의 가장 자리에는 손잡이를 끼울 수 있는 홈도 있다.1986년 李發林의 조사에 의하면 漢唐시기 맷돌의 출토량을 보면 戰 國 1점, 前漢 7, 後漢 38, 三國 5, 南北朝 3, 隋 1, 唐 1점이었다. 그리 고 맷돌의 출토지역을 보면, 섬서 7점, 산서 1, 북경 3, 하북 3, 감숙 1, 영하 1, 하남 17, 산동 7, 강소 8, 호북 4, 호남 1, 안휘 3으로 주로 화 북지역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후한 永元 5년(93)에 서북 변방의
居 延漢簡
에 “釜一口 磑二合”이라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137) 변방에서조차 양식 가공에 石磨는 필요불가결한 도구였으며, 西域 지 역에서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石磨盤, 石杵臼가 출토되며, 石磨와 石 碾도 漢唐시대에 적지 않게 출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138) 게다 가 장강유역의 호북(후한2, 삼국2)과 강소성에도 후한 이후 줄곧 맷돌 136) 元 戴侗 六書故, “合兩石 琢其中爲齒 相切以磨物曰磑”; 一切經音義, “磑北土名也. 江南呼磨也.”
137) 勞幹,居延漢簡考釋 卷3.
138) 韋斯, 西域農業考古資料索引(續) (農業考古 2005-3), pp.226-230.
이 발견되고 있으며, 강남의 호남(唐1), 남경(三國 吳1)지역에도 당대 이후 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남북조시대 이후 점차 江南지역으로 맷돌이 확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139)
李發林이 수집한 75개의 맷돌 중에서 石材가 21점이고, 陶製 模型 明器가 54점이 달하는 것이 주목된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중 도제 명기는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며, 그 중에는 대야나 器臺가 달 려있기도 하고, 액체가 빠져나가는 홈[槽]이 달려있기도 하다. 이는 단 순히 가루를 내기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물을 넣어 곡물을 가는 용도로 도 활용된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맷돌에 빠져나가는 구멍[漏孔]과 곡 물 진입구[進料口: 漏頭]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맷돌은 비록 시대마다 발견된 숫자는 다르지만 전국시대부터 당대 까지 줄곧 발견되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맷돌이 농가 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한당시대에 맷돌이 무덤 의 부장품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현실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지하세 계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물품으로 인식한 것 같다. 이것은 한대 製粉 을 통한 가공식품이 상당한 정도로 보급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부 장품이 출토된 墓의 상당수가 畵像石墓인 것으로 미루어 한대의 맷돌 은 서민은 물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지배층에까지 다양하게 이용되었 음을 알 수 있다.
한대에 실제 사용된 맷돌의 크기를 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戰 國 후기 이래 맷돌의 직경은 50-55cm 전후이며, 두께는 산서 襄汾 趙 康公社 故城유지의 맷돌을 보면 윗부분[上扇]이 9cm, 아랫부분[하선]이 10cm이었다. 실제 사용된 맷돌의 크기와 대체로 비슷했음을 알 수 있 다. 이러한 크기는 현재 남아 있는 맷돌과 큰 차이가 없다.
맷돌은 대개 손잡이를 상판에 부착하여 이것을 잡고 직접 곡물을 넣으면서 상판을 돌려 제분하는데, 강소 泗洪縣 重崗鄕 전한 말 화상 석에 등장하는 맷돌은 맷돌 밑에 器臺가 있으며, 맷돌 상판에 ㄱ 字형 139) 李發林, 古代旋轉磨試探 (農業考古 1986-2).
의 나무를 끼우고 다른 쪽 끝에 橫木을 설치하여 한 農婦가 이 횡목 을 두 손으로 잡고 서서 맷돌을 돌리면서 製粉하고 있다.140)
문제는 맷돌의 기능이다. 맷돌은 크기도 중요하지만 상, 하판의 마찰 에 의해 곡물이 얼마나 잘 갈리는가에 달려있다. 전국시대와 전한에는 대개 상, 하판에 대추씨, 원형 또는 장방형, 菱形, 삼각형의 홈을 파서 맷돌의 이빨을 만들었다. 전한시대에는 또 수레의 바퀴살 모양의 輻射 紋이 등장하며, 간 것을 원심력을 이용하여 양변으로 흘러내리도록 제 작된 것이 특징이다. 후한대가 되어 이런 양식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 앞 시대의 성능을 크게 개선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후한대에는 석면의 무늬가 輻射形 또는 區分 斜線形으로 다원화된 다. 즉 가는 상하의 面을 4區 또는 8區(삼국시대 호북에는 6區도 등장) 로 나누어 斜線狀을 설치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제분할 수 있도록 설계했던 것이다. 후한 안휘성의 수현, 강소성 서주, 하남 琪縣에 八區 科線狀의 맷돌이 등장하며, 唐代의 호남 湘陰墓에서도 같은 문양이 보 이는 것을 보면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후한의 산동 陵縣에서 四區斜線狀이 등장하고, 삼국시대에는 호북 鄂城에서는 六區科線狀의 맷돌 이빨도 등장하며, 섬서 서안에서 는 북조시대의 三區科線狀의 맷돌도 보인다.
이처럼 맷돌 石面의 이빨 형태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 지만, 그것과 사용된 곡물과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區數가 많 을수록 제작 과정이 어렵고 크기도 컸을 것으로 판단되며, 후대까지 계속해서 많이 이용되었던 것을 보면 區分 斜線形이 輻射形보다는 성 능이 훨씬 좋아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맷돌 작업은 주로 부녀노 동으로 이루어지며, 한 사람이 돌리기 때문에 맷돌의 크기를 무한정으 로 키울 수 없어 생산량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이런 현상은 새로운 기술의 출현을 요구했다.
이상에서와 같이 漢唐 시대 맷돌이 출토되는 지역을 보면, 대개 華 140) 尤振堯․周曉陸, 泗洪重崗漢代農業畵像石刻硏究 (農業考古 1984-2), p.73.
北지역에 집중되며, 점차 후한 이후 長江 유역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남북조시대 이후에는 강남지역으로 전파되고 있는 것을 보면 대개 豆, 麥 지역을 중심으로 맷돌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알다시피 稻나 黍粟類는 단지 껍질만 벗기면 먹을 수 있지만, 豆麥類는 삶아서 찧거 나 제분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고 소화도 쉽지 않다. 따라서 豆麥類의 효율적인 이용과 식품가공을 위해 맷돌이 등장했던 것이다. 맷돌이 등 장하여 製粉이 가능하게 되면서 豆麥의 알곡을 취사하여 섭취하던 방 식에서 麵食과 餠食은 물론 醬豉, 豆腐와 같은 식품의 출현이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