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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41)수키와(도면 23, 도판 58)

Ⅵ. 맺음말

동래읍성 하수관거 유적은 조선시대 전기 및 후기의 동래읍성 범위 내에 위치하는 것이다. 금번 조사는 충 렬대로에서 수안시장 앞 오거리로 이어지는 도로의 지속적인 침하를 보수하기 위한 공사 이전의 절차로 진행 되었다. 하수관거의 매설 범위는 충렬대로에서 수안시장 앞 오거리로 이어지는 일방통행로이면서 버스 등 대 중교통의 이동량이 많은 곳이다. 하수관거가 2차로를 교행하고 있기 때문에 하수관거가 매설된 범위에 해당 하는 전면 발굴조사는 불가능하였으며, 교통통제가 가능한 범위만을 한정하여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또한 주변 상가 및 시민의 교통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4구간으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발굴조사하게 되었다.

하수관거가 위치하는 동래읍성은 고려시대 말(1387년) 축조되었다는 기록과 세종 28년(1446년)에 축조되 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까지는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의 읍성 범위가 알려져 있다. 조선 전기 동래읍성은 1446년 동래현령 김시로가 쌓았다고 하는 석축성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 동래읍성은 1731년 동래부사 정 언섭이 전기보다 큰 규모로 성을 쌓아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인생문, 암문 등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 북문 과 인생문이 복원되어 있다. 조사된 하수관거는 동래읍성 내부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고지도와 지적원도에서 살펴보면 하수관거의 동쪽으로 개거 형태의 도랑이 표현되어 있는데, 조사된 하수관 거는 암거시설이므로, 이 도랑과의 상관관계를 단정하기 어렵다.

조사된 하수관거는 뚜껑돌, 벽체와 바닥으로 구성되고, 지표면 아래 매설된 암거시설이다. 뚜껑돌은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장방형의 자연석이나 표지석을 재가공한 석재를 사용하였다. 일부 뚜껑돌의 측면에 명문의 일부가 확인되었다. 명문은 한자의 한 획 일부만이 남아 어떤 글자였는지 추정하기 어렵다. 벽체는 방형에 가 까운 석재를 3단으로 쌓았는데 측면을 맞추고, 뚜껑돌이 덮일 수 있게 윗면을 맞추어 쌓았다. 바닥은 비교적 얇고 납작한 부정형의 돌을 벽석과 맞물리게 하면서 높낮이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도록 편평하게 맞추어 깔았 는데, 편평하고 넓은 돌을 깔면서 사이사이에 잔돌을 놓았다. 뚜껑돌과 벽석에서는 돌을 쪼갤 때 사용한 쐐기 정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원반형 또는 사각뿔형으로 남아있었다.

조사된 하수관거는 본선에 해당하고, 벽체의 4곳에 지선의 하수관거가 연결되고 있었다. 조사범위의 한계 로 총 몇 군데의 지선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으나, 하수관거 축조 당시에 본선과 지선으로 이루어진 어느 정도 체계적인 하수시설이 갖추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수관거의 축조시기를 단정지을 수 없으나, 유구의 양상이 기 조사된 동대문 운동장 유적과 서울 경모궁 지 유적의 조선시대 배수로와 구조가 유사하고, 분청사기 편 등 조선전기의 유물 등이 있으며, 사용된 석재의 대부분이 견치석이 아닌 장방형의 석재이므로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조사된 자료만으로 정확한 연대를 밝히기 어렵다. 뚜껑돌에 사용된 명문 석재의 출처를 밝힌다면 좀 더 명확하게 축조시기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동래읍성 내에서 하수관거의 주변 시설이 추가적으로 발굴조사 된다면, 금번 하수관거의 역할과 성격이 좀 더 명확하게 규명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도 판

도판 1.항공사진( 조사대상지, 동래읍성범위: 조선전기, 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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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2.조사구역 전경(1:북에서, 2: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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