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서 17세기 청과 내륙아시아의 여러 정치 세력과의 관계가 실록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그 기록은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반 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16세기 말 요동에서 누르하치가 흥기하기 전까지 사실 몽골은 한동안 거의 조선의 시야에 들어오지 못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누르하치 세력의 영향력이 몽골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선은 몽골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누루하치가 요동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명과 후금 사이 에서 양면 외교를 구사했던 몽골의 모습은 당시 명, 후금, 몽골 사이의 관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조선은 그러한 현실을 면밀하게 분석할 만큼 충분히 정보를 축적하고 있지 못하였다. 병자호란 이후가 되면 심양관의 존재로 인하여 조선 관인들이 직접 몽골인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고, 또 몽골 지역을 직접 여행하거나 체험할 수 있 는 기회도 있었다. 이에 따라 청과 몽골 관계의 구체적인 양상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사실적인 지리 정보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로써 몽골은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닌 익숙한 실체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런데 입관 직후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몽골의 이상 동향은 청조 사회의 불안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순치제 폐후 사건’이나 이에 가탁하여 만들어진 ‘강희제 폐후 사건’에 관한 소문은 사실을 다 소 과장하거나, 심지어 완전히 왜곡한 것이 틀림없지만, 당시 청조 사 회 내부, 특히 북경과 요동 등지에 널리 퍼져있던 소문이라는 점에서 청조 황실과 몽골 귀족 세력의 갈등 관계를 두고 불안해하는 사회 분 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그 중에서도
‘아부나이 수금 사건’과 ‘부르니 반란’은 청-차하르 관계의 악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에 관한 실록의 기록은 청 조와 몽골 측의 사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중요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1670년대부터는 ‘태극달자’의 존재가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당시 몽골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던 오이라트, 구체적으로는 준가르 의 갈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준가르의 갈단은 강희제가 3차에 걸친 정벌에 성공함으로써 대청제국의 확고한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청-몽골 관계는 물론이고, 대청제국의 외적 질서의 완성에 중 요한 전환점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만큼 준가르는 청에게 손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때문에 청조에서도 거의 대부분의 신료 들이 강희제의 준가르 정벌에 반대하였다.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입관 이래 지속된 강력한 반청 세력(남명정권, 삼번의 난, 대만의 정씨 세력 등)을 막 진압한 시점에서 다시 대외 정벌을 단행한다는 것은 매우 위 험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강력한 반청 세력의 진압 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청조 사회의 위기감이 지속된 한 요인이 되 었다.
이 시기 이러한 정세를 관찰한 조선에서 몽골의 강성과 청조의 쇠 퇴를 전제로 한 소위 ‘영고탑 회귀설’이 절정에 이른 것은 너무나 당연 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청조 사회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킨 것은 ‘대비달자’의 등장이었다. 준가르와의 대결도 위험한 선택인데다 가 여기에 ‘대비달자’의 위기까지 겹쳐진 것이다. 이러한 청조 대외 관 계의 불안정은 청조 사회의 불안감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그대로 조선 의 ‘영고탑 회귀설’로 옮겨졌다.
이렇게 보면 조선의 내륙아시아 정세 인식의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는 ‘영고탑 회귀설’이 그저 막연한 ‘胡運不百年’에 대한 허망한 기대 나 맹목적인 ‘華夷意識’에 근거한 왜곡된 정세 판단의 결과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거시적으로 보면, 당시는 몽골의 시대에서 한인의 시대를 거 쳐 만주의 시대로 변화하는 역사적 흐름 속에 있었다. 이 흐름에서 몽 골은 주역의 하나였다. ‘영고탑 회귀설’로 대변되는 조선후기의 대외 의식에는 이러한 몽골의 역사적 역할이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고 탑 회귀설’에는 청조 멸망이라는 상황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대와 우려의 공통된 전제는 강성한 몽골이었다.
시대가 지날수록 기대보다는 우려에 무게 중심이 실리게 되었고, 더 나아가 우려는 현실적이기 보다는 관념적, 고식적이 되어갔다. 여기에 는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일어난 만주-한-몽골의 역학 관계의 변 화가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고탑 회귀설’을 청조 멸망에 대한 헛 된 기대감의 산물로만 치부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물론 ‘영고탑 회귀 설’이 조선 국내 정치에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