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8년 오이라트 칸인 호슛(Hoshut)의 구시칸(Gushi Khan)이 진경에 사신을 보내 관계가 성립되기 전까지 청과 오이라트 사이에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성익은 내몽골을 거쳐 외몽고까지 여행하며 지역을 일주하면서 지리정보를 습득했다.
입관 이후 내륙아시아 제 세력의 동향
정보수집방식에 있어서는 요동지역의 소문이나 소문에 주로 의존하던 것에서 관리들이 몽골인과 직접 접촉하고 몽골을 체험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조선은 몽골을 이전보다 더욱 인지도 높은 존재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고, 청-몽 관계를 비교적 긴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몽골의 동향은 이와 관련된 중요한 대외적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조선의.
칼카, 코르친, 차하르
스가 출신의 여인은 어린 나이에 순치제의 황후가 되었지만 황제의 총애를 잃고 고국으로 유배되었고, 나중에 낳은 아들은 이제 14세이다. 청나라는 몽골로 보내달라고 요구했으나 보내지 않아 조만간 싸움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청나라 사람들이 와서 왕으로서 그와 논쟁을 벌이면 틀림없이 큰 걱정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에 매우 걱정하고 있다고 합니다.38)
"고등학생이 되어 한국에서 최치립이라는 사람에게 붙잡힌 사람의 이름을 들었고, 최치원은 요동의 육군장교에게 들었다"고 한 것으로 판단된다. ,” 이 사건은 당시 몽골과 심양 전역에 널리 퍼진 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부나이는 리그단 칸의 장남 이제이의 남동생이었다. 결국 순치제는 관용적이었고 왕위는 유지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몽골의 지도자 아부나이는 청나라에 대해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상징성만큼 그들과의 관계가 약화되거나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청나라 사회의 위기감을 크게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오이라트 준가르(太極㺚子)
조선 역시 다양한 정보활동을 통해 청-몽 관계의 현황과 청나라의 위기의식을 잘 알고 있었고, 지켜보면서 티베트 동향에 대해 큰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게다가 강희제는 티베트 뒤에는 달라이 라마를 정신적 보호자로 모시는 몽골의 오이라트가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강희제는 정착을 위해 청나라에 접근하여 칼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할 기회를 얻었고, 갈단과 계속 교섭을 하다가 결국 정복을 단행했다.
이 무렵 오이라트(Oirats)를 의미하는 '阿魯得'65)라는 이름이 등장하자 "지금은 아직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으며 청나라는 전투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고 반드시 동원될 것이다. 봄이 오면 군대"라고 사무실을 통해 보도됐다. 특히 갈단정벌은 대청제국의 경계를 정하는 대규모 사업의 시작이었으며, 실제로 대청제국이 멸망할지 여부의 기로에서 존속을 결정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몽골은 왕조로, 과거에는 진이나 중국 역사상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66).
러시아(大鼻㺚子)
러시아는 청나라, 청나라와 무역 협상을 거듭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궁신들이 떠나고, 군사들이 마중 나가서 북해에 이르러 배에서 내리자, 몽골 다섯 왕이 차례로 말을 타고 그들을 보냄. 이런 점에서 보면 강력한 곳인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이런 환대를 보면 아마도 멋질 것입니다.鼻.76)과 강약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謝恩使 GuoShen君 lee俣 등이 청나라에서 귀국하여 먼저 길 한가운데서 협의하였다. 사람마다 경계를 정하고 영원히 함께해야 한다는 말이 있고, 동등하게 만나자는 의례도 있었지만 무시되는 것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대타격' 역시 청나라의 상황을 불편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또한 조선에서는 '대침략자'를 다른 유형의 몽골로 인식하였다.
맺음말: ‘영고탑 회귀설’의 이해
이런 상황을 우리가 볼 때 몽골의 세력과 청나라의 쇠퇴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영고탑귀환론이 조선에서 최고조에 달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청나라 사회에 불안을 더한 것은 '끝을 맞이한 자'의 등장이었다. 준가르와의 충돌 역시 위험한 선택이며, '라이벌'의 위기가 겹쳐진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와 관심의 공통된 출발점은 강대한 몽골이었다. 물론 영고탑귀환론이 조선 국내정치에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