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1월 조정의 느닷없는 지시로 1904년 5월 26일(光緖 30년 4월 12日) 정식 개학한 京師大學堂 進士館은 시대 변화의 한 상징이었다.
科擧에 최종 합격한 최고 엘리트들에게 전통 학문과는 이질적인 근대 학문을 습득하도록 강제한 것은 새롭고 생소한 시도로서, 시대 변화를 상징하고도 남았다.
1904년 1월 ‘奏定學堂章程’의 하나로 반포된 ‘進士官章程’에서 볼 수 있듯이 진사관은 新進士를 재교육하는 연수과정과 같은 성격이었다.
하지만 癸卯科(1903) 進士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신식 학문을 하 루 4시간, 6개 학기, 3년간 교육과정으로 이수토록 하여, 入學과 卒業 을 강제하였다. 시대는 그만큼 변하고 있었다.
35세 이상으로 힘에 부치어 知縣으로 나가는 新進士에 대해서도 各 省 仕學館이나 課吏館에서 근대 학문을 학습토록 한 데서 근대학문 습 득을 통한 進士 출신 초임 관료의 능력 제고에 대한 제국의 상당한 의 지를 읽을 수 있다. 진사관은 이를 대변하는 상징으로서 그 정점에 자 리했다.
진사관은 경사대학당 최초로 개학한 仕學院을 계승하여 義和團 후 재개된 仕學館과 성격이 유사했다. 그 유사성으로 인해 사학관을 진사 71) ‘원 장정’, 考驗畢業章第四.
72) ‘원 장정’, 入學規則章第三.
관에 합병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시학관을 진사관 내로 이전하 였지만, 따로 수업을 진행하여 독립 과정을 유지하였다. 동거의 형태를 취했던 것은 소속 학생들의 신분이나 이수 학기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 다.
개학한 지 불과 4개월여 후인 1904년 9월 장정을 更正한 것은 진사 관 초기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특히 科擧에 최종 합격한 新進士에게 기숙사 생활과 신학문 학습을 강제한 것은 상당한 불만을 자아낼 수 있었다. ‘경정 장정’에서 기숙사 생활의 內般과 통학 의 外班으로 2원화한 것은 그러한 불만을 고려한 결과였다. 翰林과 中 書는 내반으로, 긴급 사무로 차출되는 경우가 많은 主事 등 部屬 人員 은 외반에 편성하여 통학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경정 장정’에서 3년간의 자비 유학을 허가하고 그 3년의 기간에 진 사관 이수 기간을 합산하며, 各省 학당의 교습으로 충당되거나 學務를 總理하여 3년을 채울 경우에도 진사관 졸업과 같이 하여 입학과 과정 이수의 강제성을 완화한 것도 그러한 불만을 고려한 결과일 것이다.
후자의 경우 各省에 신설하는 신식학당의 교사 부족 상황을 고려한 조 처이기도 하였지만, 입학과 과정이수의 강제에 대한 상당한 불편과 불 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나이가 어리고 신망도 얕은 유 학 출신이 최고 엘리트를 가르치는데 따른 불만이 상당하였던 상황도 읽을 수 있다.
또 ‘경정 장정’에서 학당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자가 없지 않았다고 지 적하면서 엄격한 학칙 준수를 천명한 데서, 최고 엘리트들이 여러 규 칙 아래 공동생활을 하며 科擧 공부와는 다른 근대 학문을 이수하는데 따른 생소함과 이질감, 그에 따른 불편과 불만에서 규정을 위반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음도 볼 수 있다. 또 “大體에 有關한 異說을 엄히 단 속”하도록 한데서, 최고 엘리트들이 群集하여 공부하고 생활하면서 체 제나 왕조에 비판적인 담론들이 오고간 상황도 엿볼 수 있다.
이때의 진사관 學員에 대한 자비 유학 허가는 시대 변화를 상징하 는 점에서 중요하다. 최고 단계에 도달한 新進士에게 유학은 무엇이었
으며, 왜 필요했던가? 유학 허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때의 유학 허가는 당국의 자발적 결정이라기보다 進士들의 요구 를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 해외 유학 확산의 배경으로 1904년 1월의
‘奏定學堂章程’과 함께 결정된 ‘科擧의 10년 후 폐지 방침’이 주목된 바 있지만, 진사관 學員들은 이러한 시대 상황과 나이 어린 해외 유학 출 신 교수에 대한 불만, 기숙사 생활과 각종 규제에 따른 구속감, 해외 유학이 더 큰 자유와 장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유학 허 가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와 시대 상황을 감안하여 자비 유학을 허가하였지만, 이는 역으로 최고 엘리트와 조정 모두 중국의 낙후성과 진사관 교육의 비효율성을 자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1905년 9월 ‘10년 후 科擧 폐지 방침’이 즉시 폐지로 급선회하면서 新進士를 입학생으로 하는 진사관의 장래가 모호하게 되었다. 科擧 폐 지로 더 이상 신입생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1년여 후인 1906년 8월 “進士館 辦法 變通과 學員의 出洋 遊學 파견”을 결정한 것 은 이러한 상황 변화 때문이었지만, 진사관 설립이 애당초 무리한 시 도였음을 자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진사관 개설 당시 각 부서가 사 무를 정돈하고 학당 신설로 新進士들이 교직원으로 충당되는 등의 사 정에 의해 진사관이 그때까지도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을 실토하 면서, 2기생을 대거 일본 東京 法政大學으로 유학을 보내기로 한 것이 다.
진사관 경비를 유학 경비로 전환함으로써, 이제 유학은 자비가 아니 라 국비로 떠날 수 있었다. 1904년 9월 진사관 學員에 대한 유학 허가 와 이때의 결정이 1906년을 頂点으로 한 유학 열풍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추구해 볼 주제이다. 그러한 유학 열풍이 혁명 의 에너지를 공급해 주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이때 진사관을
‘다른 학당’으로 전환키로 결정하였는데, 그것은 1908년 봄 경사대학당 에서 분리 독립한 형태의 京師法政學堂의 개학으로 이어졌다. 과거 폐 지 등의 상황 변화로 진사관은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진사관 1기생은 癸卯科(1903) 新進士 315명 중 최소 108명 이상이었
다. 6개 학기를 마치고 졸업시험에 응시한 자가 최소 108명이었던 것 이다. 계묘과 신진사의 최소 34.3%가 入館하였다. 약 2/3의 신진사는 여러 사정으로 入館하지 않았다. 1기생의 대부분은 기숙사 생활을 하 는 內班이었다.
2기생은 甲辰科(1904) 新進士 273명 중 약 150명이었다. 2기생의 대 다수는 유학 졸업자 시험으로 졸업했는데, 확인되는 유학 졸업자 시험 응시자가 총 150명이었다. 이들을 모두 2기생으로 보면 갑진과 진사 273명 중 54.9%가 入館하여, 1기 때 보다 훨씬 높았다. 150명 중에 극 히 일부의 1기생도 포함되었을 수 있으나, 대부분은 2기생이었다.
진사관의 교육과정은 중국 전통의 ‘果․達․藝’의 범주 아래 15개 교 과를 배치하고, 다시 각 교과에 몇 개의 교과목을 두었다. 이러한 체제 는 학문을 中學과 西學으로 나누던 당시의 일반적 관행과는 차이가 있 는 것으로, 굳이 中學과 西學의 구분이 아니라 이를 통합한 새로운 학 문 체계를 모색하는 시도로서 주목된다. 西學만이 아니라 中學 내의 관련 내용을 포괄하는 교과와 교과목을 ‘果․達․藝’의 범주 아래 재구 성한 것이다. 한편 ‘法學’ 교과 아래 ‘各國憲法’을 교과목으로 설정한 것은 이를 통해 서양 각국의 國體와 政體에 대한 학습과 중국의 그것 에 대한 비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가능성 때문에 시대 변화와 함께 많은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유학 경비의 국비 전환으로 진사관 2기 學員들의 해외 유학이 봇물 을 이루었다. 이는 가뜩이나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악화시켰다. 수강생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유학을 떠나지 않은 2기 內 班生 2명과 外班生 40명에게는 마지막 3개 학기에 대해 스스로 자습토 록 하는 편법이 동원되었다. 6개 학기를 이수하고 1907년 1월 졸업을 앞두게 된 1기생들과는 상황이 사뭇 달랐던 것이다.
新進士로 구성된 진사관 學員에게는 지켜야 할 많은 규칙과 규제들 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상당한 특혜도 기다리고 있었다. 학비는 없었 다. 기숙사와 식사는 물론 각종 학용품, 장학금 수준을 뛰어넘는 봉급 수준의 津貼銀을 지급받았다. 自費에서 國費로 전환된 해외 유학도 누
릴 수 있었다. 졸업 시험을 거쳐 소정의 성적을 거둘 경우 상위 직급 으로 장려되는 것도 중요한 특혜였다. 진사관 1,2기 學員들의 졸업과 그에 따른 장려 상황 등은 다음을 기약하지만, 제국의 강화를 위한 苦 肉策으로 출발한 진사관이 우여곡절 끝에 사라져 간 것은 시대 변화의 상징과 같았다. 그러기에 경사대학당 진사관은 시대 변화를 대변하는 다양한 상징과 의미를 내포한 하나의 코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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