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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5월에 개학한 進士館에 入館한 1기생은 1903년 癸卯科 會 試 합격 進士 315명을 주 대상자로 하였지만, 그 전 2차례 會試 합격 진사들에게도 문호를 열어두었다.

1기생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던가? 1907년 1월에 실시된 진사관 1 기 졸업시험 응시자는 총 106명으로 주 입학 대상자인 癸卯科 85명, 乙未科 3명, 戊戌科 9명, 甲辰科 6명, 不明 3명이다. 이들을 모두 1기 생으로 보면 1기생의 규모는 최소 106명이다. 최소라 한 것은 1기생 으로 입관하였으나 사정에 의해 이수를 중단하거나 졸업시험에 응시하 지 못한 자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06명 중 계묘과 진사 85명도 최소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진사관에 입관한 사실이 확인되는 계묘과 진사는 총 102명 이다. 2기로 입관한 자도 있겠지만, 이들 모두를 1기생으로 보면 계묘 과 진사의 입관율은 약 32% 정도이다. 만약 이들 102명이 모두 1기 생으로 입관하였으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85명만이 졸업시험에 응시 51) 장려 諭旨는 「著將進士館畢業學員朱國楨等分別授職諭旨, 光緖33年11月 11日(1907.12.15)」 (檔案 333), p.326. 朱德坦의 경우 御覽 요청 이력 에는 ‘主事用籤分戶部’로 되어 있으나 장려 諭旨에는 ‘度支部學習主事’로 되어 있다.

하고 17명이 응시하지 않았다고 보면, 1기생의 규모는 17명이 늘어난 최소 123명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102명 모두가 1기생이라 하더라도 계묘과 진사로서 진사관에 입관 한 진사는 입관 강제에도 불구하고 1/3정도였고, 2/3는 입관하지 않았 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진사관에 대한 계묘과 진사들의 반 응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점에서 중요하다.

계묘과 登第 상위 10명 중 9명이 입관했으나 하위 10명의 경우 진 사관 입관자는 1명도 없었다. 진사관 1기(혹은 2기)로 입관한 계묘과 진사 102명을 보면 1甲 3명 중 3명, 2甲 138명 중 76명에 비해, 3甲 174명 중 23명만이 입관하였다. 1갑, 2갑, 3갑으로 내려갈수록 입관 율이 낮았다. 약 100:55:13%의 비율이다. 3갑 진사의 낮은 입관율 이 계묘과 진사 전체의 낮은 입관율로 이어졌던 것이다.

3갑 진사의 입관율이 낮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3甲 진사의 경우 주로 京職이 아니라 知縣 등 지방직을 수직했기 때문이다. 지방직을 수직할 경우 진사관 입관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계묘과 진사 중 약 2/3가 입관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3甲 진사라 하더라도 지방직이 아니라 경직일 경우 진사관 입관이 가능했다. 1기 졸업시험에 응시한 3甲 진사 19명을 보면 모두 京職이었다.

낮은 입관율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높은 연령이었다. 35세 이 상자에게 입관을 강제하지 않은 것은 높은 연령이 진사관 입관의 큰 걸림돌이었음을 말한다. 연령이 높을수록 가족에 대한 부양 의무도 더 해져, 적체가 심해 實缺을 얻기 어려운 京職이 아니라 知縣 등의 지방 직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또 높은 연령은 기숙사 생활을 원칙으 로 하는 진사관 학습을 사실상 어렵게 하였다.

이러한 정황 외에 학비가 없고 기숙사가 제공되었으며 매년 장학금 을 뛰어넘는 봉급 수준의 津貼銀으로 翰林ㆍ中書에게 240량, 部屬에 게 160량이 제공되었음을 고려하면, 진사관에 대한 계묘과 진사들의 반응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고 보인다. 1갑 진사의 100%, 2갑 진 사의 55% 정도가 진사관에 입관했던 것이다. 기숙사 생활을 강제한

것이나 신식 학문에 대한 거부감 등도 있었겠지만 입관율이 1/3 정도 로 낮았던 것은 3갑 진사의 낮은 입관율,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3갑 진사의 지방직 授職, 그리고 높은 연령 탓 등이었다.

진사관은 1905년 9월 科擧 즉시 폐지라는 격랑을 만났다. 더 이상 의 入館 자원이 없어진 것이다. 진사관 운영의 변화는 불가피했다.

1906년 8월 주로 2기생을 대거 일본 東京法政大學에 速成科와 補修 科로 유학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1기생은 그해 말 졸업 예정이었으 므로 진사관에 머물며 계속 수업토록 했다

계묘과 진사 중 유학 경험자는 315명 중 52명(16.5%)으로, 이들 중 진사관 입관 경험자는 19명으로 파악된다. 이들 모두를 1기로 보더라 도 1기로서 유학을 떠난 자는 최대 19명에 불과했다.

1907년 1월에 시행된 졸업시험의 응시자는 기숙사 생활의 내반생 77명, 통학의 외반생 28명, 계묘과 진사로 유학하여 귀국한 1명, 총 106명이었다. 내반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졸업성적은 내반 77명의 경우 최우등:우등:중등:하등이 38:21:16:2명인데 반해, 외반 28명의 경우 0:11:17:0명이었다. 내반생이 훨씬 좋은 성적을 거 두었는데,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수업을 충실히 한 결과일 것이다.

진사관에 입관한 계묘과 登第 상위 10명의 졸업성적 평균 점수는 78.06점으로 하위 10명의 평균 점수 71.98점보다 약 6점정도 높았다.

科擧 성적 우수자가 진사관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07년 4월 졸업시험 응시자 106명 중 90명에 대해 장려를 시행하 였다. 장려는 당시 신식학당 출신이나 유학 출신에게도 시행하던 신식 교육 장려책이었다. 장려에서 내외반의 차별은 없었다. 고려된 기준은 朝考授職과 졸업성적 등급이었지만, 조고수직이 더 중요한 기준이었 다. 아무리 졸업성적 등급이 좋다고 하더라도 조고수직의 한계를 넘어 설 수 없었던 것이다. 部屬 主事나 中書는 졸업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翰林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진사관 성적이 科擧 성적 을 뛰어 넘을 수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 장려는 전반적으로 授職에서 2단계 상승을 원칙으로 하였다.

2, 3甲 庶吉士의 경우 최우등ㆍ우등ㆍ중등 모두에게 각각 2단계 위인 翰林院 編修와 檢討를 授職한 것이다.

졸업시험 응시자 106명 중 조고수직 不明 1명을 제외한 105명 중 한림 54, 주사 48, 중서 3명으로 약 51:46:3%의 비율이다. 한림 54명의 경우 1명 만이 外班으로 그를 제외한 53명은 내반이었다. 주 사 48명의 경우 내반 22, 외반 25, 출양유학 1명이다. 중서 3명의 경 우 내반 1, 외반 2명이다.

내반 77명 중 조고수직 不明 1명을 제외한 76명의 경우 한림 53, 주사 22, 중서 1명으로 약 70:29:1%의 비율이다. 외반 28명의 경 우 한림 1, 주사 25, 중서 2명으로, 4:89:7%의 비율이다. 이들 28 명은 ‘경정 장정’ 이후 새로 생긴 통학의 외반으로 옮겨간 결과였다.

따라서 한림 54명 중 53명, 주사 48명 중 22명, 중서 3명 중 1명은 그대로 기숙사 생활의 내반으로 남았다. 그렇다면 기숙사 생활에 대한 반발을 너무 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사 48명 중 6명이 최우등을 받았는데, 6명 모두 내반이었다. 중서 3명 중 1명이 최우등을 받았는데, 그 역시 내반이었다. 여기서도 내반 성적이 외반에 비해 월등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한림 54명(외반 1명 포함)의 경우 최우등자의 비율이 과반을 넘어 최우등:우등:중등:하등이 약 57:26:15:2%의 비율을 보인다.

주사 48명의 경우 약 13:60:27:0%, 중서 3명의 경우 33:67:

0:0%의 비율을 보인다. 3명에 불과한 중서를 논외로 하면 한림이 주 사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한림이 주사보 다 우수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내외반의 班別 성적에서 내 반 성적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한림의 좋은 성적은 한림의 우수성 때문이 아니라 내반의 우수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건을 같이하여 내반 내에서 거둔 각각의 성적을 보면 다 른 결론을 얻을 수 있다. 不明 1명을 제외한 내반 76명 중 최우등:

우등:중등:하등의 비율에서 대략 한림은 58:26:13:2%, 주사는 27:45:27:0%를 보인다. 하등 2명이 있긴 하나 한림이 주사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한림의 우수성은 科擧만이 아니라 진사관으 로도 이어졌다. 다만 각종 시험에서 한림에 대한 특혜가 없었다고 전 제할 때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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