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이후 한국화교를 둘러싼 정치경제환경은 크게 변화되었다.
주한사관이 관할해야 할 화교의 수와 지역범위는 확대되었지만 한중관 계의 변화에 따라 조직은 점차 축소되어 갔다. 이는 한국내 중국의 위 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정치외교적 지원은 점차 사라지 거나 축소되었던 반면, 한국화교들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러일전쟁 이 후 밀려들어오는 일본인들과도 경쟁해야 했다.
청일전쟁이 끝난 직후, 일시 귀국했던 화상들이 옛 거류지를 중심으 로 다시 점포를 개설하고 상업 활동을 시작했다. 화교의 직업분포는 상당히 광범위해졌지만 여전히 비단, 면포거래 등 상업이 중심이었고, 농공업이 그 다음이다. 각 행업마다 성쇠가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발전 하는 추세에 있었던 것은 외국인이 필적할 수 없는 중국인의 특징인 근검, 절약, 인내, 신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일본의 官民이 함께 발전하면서 상품시장의 흐름에 신속하게 대처해 갔던 것과 대비된다.
86) 淸人設校 (대한매일신보 1906.12.13(음력 10월 28일)).
87) 淸人興學 (대한매일신보 1906.12.20(음력 11월 5일)).
88) 마정량이 民政部에 올린 보고(광서33년 11월) ( 마정량: 상무15 ), pp.8-9.
89) 조선경성중화상무총회 정회장 宋金銘 등의 청원서(민국3년 4월 16일) ( 민 국3년: 학무01 ), pp.44-46.
1907년 이후 노동자가 증가하는 가운데 노동자에 대한 관리가 중요해 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노동자나 농민의 이익을 보호하고 조직화할 단 체의 출현은 없었다.
한성화교상점은 자본의 규모가 비교적 큰 상점의 경우 산동자본이 많고, 자본규모면에서도 산동자본이 압도적이었다. 또 산동자본 상점 중 유력상점은 모두 산동에 본점을 둔 한성지점이었다. 이러한 본·지 점관계는 무역거래망의 활용, 상점간 자금과 상품의 변통, 혈연·지연에 기반한 경영자·점원의 고용, 상점개설 지역 간 정보의 전달이라는 측 면에서 상업상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한편 유력상점의 지배인은 많은 경우, 동향회의 대표나 상회의 임원 등 한성화교사회를 대표할 만한 이력을 갖고 있다. 특히 산동출신의 張時英은 1920년대 한국화교 계의 거부이자 리더로 알려진 광동상인 譚傑生과 비견될 만하다. 담걸 생은 청일전쟁 이전부터 官과의 유착관계를 바탕으로 경제적으로 빠르 게 성장해 갔고, 이를 기반으로 광동동향회나 화교사회 전반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官의 지원이 사 라진 청일전쟁 이후 담걸생은 금융, 무역 등 경영의 다각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일전쟁 이전과 같은 세력을 유지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 인다. 반면 장시영은 청일전쟁 이후 비단무역과 목재창 운영을 통해 한성 商界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후 북방동향회의 대 표로 그리고 화상총회의 조직과 개조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장시영은 1910년대 후반까지 한성화교사회에서 담걸생을 압도하는 지 도력을 발휘했다.
장시영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북방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는 화교구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청일전쟁 이후 한성 의 화교단체는 본적을 배경으로 결합된 동향조직 幇會와 한성이라는 거류지역을 배경으로 결합된 상인조직 總會(상회) 등 크게 두 가지 계 통이 있다. 우선 지역별로 각 幇을 형성하는 구조는 한성화교사회에도 예외 없이 존재한다. 각 幇은 동향인의 보호와 상업발전을 목적으로 商民 관련 업무 처리, 자선구제활동과 분쟁중재, 회관건설에 힘썼다.
또 관습적으로 혹은 <장정> 등 규약을 통해 商거래 과정에 관여하거 나 상인의 이익과 신분을 보장했다. 한성의 동향조직은 화교인구구성 상, 북방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며 북방에 대한 관리는 매우 중요했 다. 북방회관의 적극적 협조가 없이 화교사회의 관리는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에서 북방회관과 그 대표인 동사는 단순 히 북방이라는 동향네트워크의 중심에 그치지 않으며, 한성화교네트워 크의 중심으로서 화교사회 전체의 안정과 상업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주 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상인조합인 총회 조직은 1904년 무렵 한성의 4대 幇會의 기초 위에 만들어졌다. 초기에 한성화상총회는 공상업 관련 각종 현안 문제 를 논의하기 위한 자치적 조합형태로 출발했다. 1905년 주한사관과 한 성화상총회가 공동으로 총회건물 신축에 대한 협상을 이루어냈고, 이 후 화상에 대한 체계적 관리를 위한 소통의 창구이며 협의체로서 적극 기능하기 시작했다. 학당, 소방대, 순포 등의 운영과 함께 화교 수와 거주지 조사, 국내외 자선사업 및 주한사관과 화교 간 유대 촉진, 화상 간 상업분쟁의 조정과 판결처리, 사망회원의 재산정리와 시신처리 등 의 업무가 화상총회에서 처리되었다. 이 조직의 지도그룹은 회원 수, 자본상황, 출신지역, 동향회내의 평가, 상업이력 등이 작용하여 선발되 었다. 그리고 회원의 경제이익을 위해서 활동하거나 각종 자선구제사 업 등에 관여했다. 화상총회의 설립은 전통적인 동향별, 동업별 조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열었다.
幇會든, 商會든 모두 각 구성원간의 단결, 화합, 발전뿐만 아니라 주 한사관과 일반 화교 간에 매개 작용을 했다. 청일전쟁 이후 한국내 중 국의 위상이 격하된 것은 사실이지만, 청조가 재한 화교에 대한 실질 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던 것은 아니었다. 주한사관은 우선 상공업 진흥과 자국민보위라는 견지에서 청일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던 각종 자치업무의 부활, 즉 거주화교의 호구조사, 내지행상에 대한 보증, 화 교거주지에 대한 순찰과 방범, 자위 상단의 조직 등과 같은 사업을 회 복, 정돈해 갔다. 더 나아가 화교와 상공업에 대한 중국정부의 달라진
인식에 기초하여 상회나 학당 등의 설립을 추진했다. 동향의식이 매우 강했던 화교사회에서 지역과 혈연 등 분파를 넘어선 화교전체 조직체 로서 상회 설립은 동향의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국가와 민족의식의 형 성에 큰 작용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화교자제들에게 중국인이라는 정 체성을 고취한다는 점에서 화교학당의 설립도 이러한 의식형성의 연속 선상에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에도 주한사관은 한국에 거주하던 화교 사회의 최고지도기관으로서 청일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국민 보호 와 동시에 관리와 감독이라는 중책을 여전히 관철하고자 했다. 상회와 학당 설립 등을 통해 청말 한성화교의 조직화는 크게 진전되었다. 다 만 여전히 확대, 개편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민국에 이르기까지 그다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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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Overseas Chinese, Overseas Chinese Network and Chinese Diplomatic Offices in Korea
Kim, Hee Sin
Chinese departure from Korea due to the First Sino‐Japanese War was a temporary phenomenon and the number of overseas Chinese merchants in Korea increased twice every year. Most of Chinese coming to Korea left coastal area of Shandong to make a living. Although the ratio of merchants was still high among Chinese living in Hancheong, there were significant changes in the composition of overseas Chinese society with the increase of farmers or laborers. In the origin of the people, northern area was dominant. All of Chinese diplomatic offices in Korea in Hancheong and other ports came back to China with the outbreak of the Sino
‐Japanese War and directors of Chinese merchant organizations in each port replaced diplomatic officers until the normalizatio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wo countries. Even when diplomatic supports of Chinese government could not be expected, Chinese merchants could sustain their lives thanks to the existing overseas Chinese network. The formal placement of diplomats after the Sino‐
Japanese War was regulated by the Treaty of Commerce between Korea and Chinese in 1899 and it was regulated by the Treaty of Commerce between China and Japan in 1896 after the diplomatic
cessation between Korea and China due to Korea‐Japan Annexation in 1910.
It seems that there were two systems in overseas Chinese organizations in Korea after the Sino‐Japanese War such as
Banghui
(帮會) andShanghui
(商會 orhuashangzonghui
, 華商總會) based onBanghui
organizations.Banghui
is the organization based on the origin area (same hometown) which has existed before the Sino‐Japanese War. Each Bang was an important part in the operation of the organization such as process of merchant related matters, club construction fund raising and management.Banghui
involved itself in commercial transactions or guaranteed the interest and status of merchants customarily or through regulations such as‘zhangcheng’(章程). On the other hand,
Shanghui
organizations were made based on 4 bigBanghui
in Hancheong. Members held merchants’ meeting, discussed various issues related to engineering and commerce, practiced the decisions or appealed to the government. For example, it functioned as a counter and a consultative group for the communication and for the systematic management of overseas Chinese merchants in Korea with the trend of increase of trading by Chinese. Their roles included collecting membership fees, managing the club, establishing schools, firefighting (water) organizations, purchasing firefighting vehicles (water vehicles) and dispute settlement. What we should note here is the establishment ofShanghui
by overseas Chinese in Korea was closely related to theXinzheng
(新政) measure by Qing government.The establishment and institutionalization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