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이후 존재했던 또 하나의 화교조직으로 ‘漢城華商總會’라 불리던 商會가 있다. 당안 문건에는 한성화상총회, 한성화상민단총회, 화상총회, 총회 등으로 통칭되어 표현되었다.(이하 화상총회) 앞의 동 향조직이 본적을 배경으로 결합되었다면 화상총회는 한성이라는 거류 지역을 배경으로 결합된 상인조직이었다. 상업종사자가 중심으로 된 동업조직이었지만 기본적으로 북방·남방·광방·경방 등 동향단체가 연 합하여 조직한 것이다.63)
62) 광서25년 桂增은 浙江 慈谿縣人으로 前동사 張傳茂(浙江 鄞縣)와 함께 瑞茂 號에서 일했다. 광서25년 장전무가 사망하자 그 업무를 대리하다가 桂增도 귀 국하면서 志豊號에 董事戳記를 넘겨주어 陳德濟, 盧文鈞 등이 代理董事로 활동 했다. 오랜 공석 끝에 광서28년 5월 8일 張振廷을 동사로 선출하였다( 남방화 상들이 총영사 부량필에 올린 稟(광서28년 4월) , 부량필: 인사05 , pp.5-6).
63) 청말 한성화상총회 이외에도 주요 통상도시 6곳, 즉 인천 中華會館(광서31년 4월), 부산 華商公會(선통원년 6월), 신의주 華商公議會(淸년간), 원산 中華會館 (광서15년), 진남포 華商公會(淸 년간), 평양 華商公會(淸년간) 등이 조직되었 다. 명칭은 중화회관, 화상공회, 화상공의회 등으로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한성화 상총회와 유사한 형태의 상회였다( 조선총영사가 일본공사관에 올린 呈文(민 국6년 2월 21일) , 민국6년: 상무01 , pp.26-29).
지금까지 화교사 연구에서 이 화상총회의 성립에 대해서는 ‘張時英 등이 1899년, 혹은 1901년 조직했다’고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64) 당안 내에서는 이를 입증할 만한 어떠한 자료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 히려 1901-1902년간 허태신 공사가 한성에 총회 설립이 지체되는 분파 현상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다. 현재 까지 당안 문건에서 화상총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 점은 1904년이다. 1914년 1월 북방회관동사로 뽑힌 王運甲과 宋金銘의 이력을 보면 모두 “광서18년 조선경성에 와서 상업에 종사한지 22년이 되었고, 광서30년 화상총회 議員에 피선”되었다고 한다.65) 또 1914년 7 월 광방회관동사가 된 譚傑生의 이력도 “광서14년 조선경성에 와서 상 업에 종사한지 26년이 되었고, 광서30년 화상총회 議員에 피선”되었다 고 보고되었다.66) 이 기록이 정확하다면 이미 1904년에 화상총회가 존 재했고, 어쩌면 1904년 화상총회가 설립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담 걸생이 한국화교사회의 거상이며, 청일전쟁을 전후해서 근 14년간 광 방의 동사를 역임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화상총회의 설립 당초부터 임원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그의 이력에서 ‘1904 년 화상총회 議員’ 이력만 기재된 점, 그리고 당안 문건의 ‘수발자’로서 화상총회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이 1905년 이후라는 점67)에 근거한다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64) 한국화교사연구에서 주로 인용되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①朝鮮總督府編의 朝鮮に於ける支那人(1924년); ②張維城·季達 編譯, 朝鮮華僑槪況(中華民國駐 朝鮮總領事館, 1930); ③華僑志編纂委員會編의 華僑志: 韓國(臺北, 1958); ④ 楊昭全, 朝鮮華僑史(中國華僑出版公司, 1991) 등이다. 청말 상회의 조직에 대 해 華僑志가 1899년, 나머지는 모두 1901년 張時英 등이 中華商會(혹은 中華 商務總會, 漢城華僑總會 등)를 조직한 것으로 기술했다.
65) 駐朝鮮京城北幇會館董事履歷(민국3년 1월) ( 민국3년: 인사01 ), pp.125 -126.
66) 駐朝鮮京城廣幇會館董事履歷(민국3년 7월) ( 민국3년: 인사01 ), p.149.
67) 한성부 朴義秉이 청국영사관에 보낸 편지(광무9년 7월 22일) ; 한성총영사 전명훈이 한성화상총회에 보낸 諭知(광서31년 8월 27일) ( 전명훈: 상무01 ), pp.28, 30, 34.
청말 한성화상총회의 조직기구나 직능부분을 분명히 할 總會章程과 같은 직접적인 자료는 찾지 못했지만 확인 가능한 범위 내에서 드러난 사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주한사관이 총회 조직과 왕래한 문건에서 수발의 주체는 ‘한성화상총회 각 幇 商董’, ‘한성화상총회’, ‘상회’ 등으 로만 기재될 뿐 총회의 ‘正副 회장’과 같은 명칭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 다. 동향회의 각 幇 동사가 화상총회의 4幇 동사를 겸했고, 1913년 ‘상 무총회’로 개조될 때까지 張時英, 盧恩封(이상 북방), 杜方域(경방), 盧 文鈞(남방), 袁庚之, 周常賀(이상 광방) 등이 화상총회의 4幇 동사로 활 동했다. 또 각 幇에서 몇 명씩 대표를 내어 議員으로 삼고 북방의원, 남방의원, 경방의원, 광방의원 등으로 불렀다. 1904년 북방의 王運甲, 남방의 宋金銘, 광방의 譚傑生 등이, 1911년에는 남방의 黃庚昇, 경방 의 李書蓂, 高鳴山 등이 議員으로 피선되었다.68) 그들은 각 幇의 동사 이력이 있거나 동향조직 내에서 비교적 유력한 대상호의 경영자였다.
지방사무 및 자선구제사업 등 화상총회에서 의논해야 할 일이 생기면 총회의 4幇 董事가 議員들과 함께 의논하여 처리했다. 매주 1차례 정 한 시간에 모여 회의하는데, 주한사관도 관원들과 함께 가서 제의할 일이 있으면 즉시 의결하고, 제의할 일이 없다 해도 모여 상호간 교류 함으로써 시장상황 및 각 개항장 상회의 정보도 교환할 수 있었다.69)
초기 회원의 범위는 1-2등 巡捐鋪戶로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회비를 납부한 경우 회원이 되었다.70) 화상총회 경비는 회원이 납부하 는 月費와 매년 징수된 籍牌費, 巡捐費 항목에서 지출했다.71) 설립 당 초 화상총회는 한성 南部 錢橋에 위치한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했다.
68) 선통3년 화상총회의 남방의원이었던 黃庚昇이 남방동사의 결원에 보충되었고 ( 남방중상이 마정량에게 올린 稟(선통3년 2월 27일) , 마정량: 인사23 , pp.17-18), 경방이 북방으로 합방되는 과정에서 “화상총회의 京幇議員이었던 裕豊德의 李書蓂과 源豊號의 高鳴山을 北幇議員으로 변경 신청했다( 화상 裕 豊德 등이 마정량에 올린 申請(선통3년 12월 1일) , 마정량: 인사23 , p.40).
69) 光緖33年春夏兩季漢城商業戶口情形冊 ( 마정량: 상무02 ), pp.40-44.
70) 마정량이 4방동사 및 서성춘, 동순태 등 상호에 내린 통지(광서33년 6월) ( 마정량: 상무11 ), p.17.
71) 화상총회의 鋪房 건설자금 조달계획 ( 마정량: 상무11 ), pp.20-21.
1905년에 이르러 원래 사용하던 錢橋 지방의 건물이 너무 좁아서 공사 曾廣銓과 화상총회가 공동으로 건물을 신축하는 협상이 이루어졌다.
협상내용은 당시 南署 駱洞에 위치했던 總署의 轅左, 즉 ‘원세개 진영 앞이라 불리던 官前街(대사관 앞길) 좌측’의 官地를 상회에 임대해 주 고, 官商이 공동으로 화상총회, 화상학당, 위생청사를 신축한다는 것이 다.72)
1906년말 南署 駱洞의 총회 신축건물이 낙성되었지만, 총회 운영에 필요한 판공비를 어떻게 조달할지가 문제였다. 신축 총회건물의 낙성 을 앞두고 총영사 마정량과 각 상동이 대책을 강구한 결과 總署 轅右, 즉 ‘원세개 진영 앞이라 불리던 官前街(대사관 앞길) 우측’의 官地를 화상총회에게 빌려주고, 자금을 조달하여 2층 건물 2채, 총 8간을 건축 하여 상인들에게 점포로 임대하는 것을 허가했다. 이 때 임대료로 받 은 돈은 화상총회의 경상비용으로 쓰되, 해당 항목에서 地租로 매년 400원만 總署에 납부하면 되었다.73)
화상총회는 곧바로 점포건물 신축에 필요한 건설비 조달계획을 세 웠다. 우선 화상총회에 남아있는 적립금 日金 2천원, 金 1700-1800원에 상당하는 용산의 창고, 화상의 부동산등록비 및 문패비 총액의 70%
등 4개 항목에서 5천여 원, 그리고 官과 회원의 기부를 통해 1천원 등 총 6천여만 원을 조달한다는 것이다. 이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는 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확인된 것으로는 화상총회 소유의 용 산의 창고가 1907년 9월 裕德豊號에 매각되어 매각대금이 화상총회수 입으로 들어갔고,74) 1908년 1월에는 南署 駱洞에 건물 2채의 신축이 72) 광서31년 總署가 임대한 화상총회 건물 부지에 대해, 선통2년 10월에는 地租 를 받지 않고 영원히 華商總會의 管業으로 삼을 것을 허락하였다( 마정량에게 올린 한성화상총회의 稟(선통2년 10월) 등, 마정량: 상무12 , pp.133-135).
73) 한성화상총회가 마정량에게 올린 稟 및 마정량의 批(선통2년 10월) ( 마정 량: 상무12 ), pp.136-138.
74) 화상총회(南署 駱洞 소재) 소유의 龍山倉房[貨倉](西署 龍山坊 兄弟井契 소 재)는 이후 中署 二宮街에 위치한 裕德豊號에게 日金 1750円에 매각되었고, 총 영사가 일본이사관에 이에 대한 소유권 증명을 신청했다.( 용산화창房屋地段매 매계약서(광서34년 정월 15일) , 마정량: 상무06 , p.7) 광서33년 9월분 총회학
완료되었다. 그리고 한성화상총회(房住)가 신축한 건물에 대해 1908년 1월부터 5년간, 매월 임대료 130원을 받는 조건으로 일본인 笠井喜之 助(房客)와 임대계약을 체결했다.75) 마정량과의 협상내용대로라면 점 포 건물에서 매년 임대료로 얻은 수익 1,560원 가운데 總署에 납부해 야 할 地租 400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화상총회의 경비로 충당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계획상으로 점포건물이 낙성되어 임대료가 들어오고 자금에 여유가 생기게 되면 기존에 징수하던 회원의 月費와 籍牌費, 巡捐費를 중단하고, 기존 회원을 확충하기로 했다. 즉 1-3등 巡捐鋪戶가 모두 회 원이 되며, 2만 원 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점포를 미개설한 戶도 회원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회원 중에서 辦事會員 15명을 선 거하여 동사와 함께 총20명(판사회원 15명, 4幇동사 5명)이 각 사무를 처리하되, 1-2등 巡捐鋪戶 혹은 10만량 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한 경우 辦事會員이 될 수 있다고 규정했다.76) 이상에서 언급한 회비징수 중지 및 회원확충 사항은 논의된 내용이며, 실제 건물이 낙성 후 별도로 제 정키로 한 總會章程이 작성되어 그대로 반영되었는지, 화상총회의 조 직구성상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총회의 관리는 4幇이 교대로 하되, 반드시 1명은 화상총회에 상주하 도록 했다.77) 총회 및 학당의 회계도 1906년 10월 1일부터 화상총회의 당의 수입내역에는 裕豊德이 넘겨준 ‘倉房房價 金 500元’이 기재되어 있다( 9 월분 총회학당 지출입 장부항목내역(광서33년 10월 14일) , 마정량: 상무11 , p.131).
75) 租房合同(광서34년 1월 29일) ( 마정량: 상무11 ), pp.22-23.
76) 화상총회의 鋪房 건설자금 조달계획 ( 마정량: 상무11 ), pp.20-21. 본 문건 은 생산시기를 알 수 없지만, 화상총회가 소유한 龍山 소재의 倉房이 광서33년 9월 즈음에 매각된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자금조달계획의 논의시점은 대략 화 상총회 건물이 낙성된 광서32년말 이후, 용산창방이 매각되기 직전인 광서33년 9월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77) 마정량이 4방동사에게 보낸 편지(년도 미상, 7월 6일) ( 마정량: 상무11 ), p.24. 당시 마정량은 일본의 요코하마·나가사키 영사에게 해당 지역의 중국인 公立學校章程 및 商會章程를 참조할 수 있도록 필사해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 마정량이 橫濱·長崎영사에게 보내는 공함 , 마정량: 상무11 , p.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