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융경연간의 경연은 각신들 간의 갈등 과 대립이 각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전개 된 ‘내각파동(閣潮)’을 빈번하게 거치면서, 國初에 제정된 경연의 당초 취지와 목적을 실현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융경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은 채 逸樂에만 탐닉하고 있었던 황제 개인의 문제점과 함께, 이로 인해 야기되는 내각 중심의 정국운영, 그리고 내각의 권한, 그 중에서 특히 내각수보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조정운영 시스템상의 문제 가 그 원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렇듯 융경연간에는 황제 의 리더십이 발휘되지 못하는 공백 상태에서, 정국운영의 권한은 자연 히 내각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융경연간에는 閣臣이 6부의 상서직을 겸직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閣臣 사이에서도 首輔-次輔- 群輔 등으로 엄격하게 서열화 됨으로써, 각자의 권한과 이해관계에 따 라 권력투쟁이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융 경연간의 ‘내각 파동’으로 표출되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시기 경연 또한 이러한 정국과 조정시스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융경제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면서 밝힌 등극조서에는 가정 遺詔 에 입각하여 가정연간의 폐정을 일정 정도 극복하는 방안이 담겨져 있 었다. 그 가운데 특히 ‘大禮議’에서 처벌되거나 희생된 사람들의 복직 과 복권을 조치함으로써, ‘新政’에 대한 朝野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으 로, 이는 곧 유교주의 이념에 따른 ‘祖宗之制’의 정치 복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특히 구신들과 언관을 중심으로, 유교적 황제 체제의 통치이념에서 중요시되는 제왕학의 학습장인 경연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에 따라 등극조서 조치의 기반이 된 가 정제의 遺詔를 초안한 내각수보 徐階의 요청으로 경연의례가 제정됨에 따라, 융경원년 4월 22일에 처음으로 경연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황제 융경제의 등극을 계기로 신ㆍ구 정치세력의 교체가 불가 피한 상황과 맞물려 일어난 내각의 갈등과 내분은 내각수보 서계를 중 심으로 하는 구신세력과 융경제의 潛邸시절 강관출신인 高拱을 비롯한 신진세력의 양보할 수 없는 대립과 투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로써 서계를 중심으로 이를 지지하는 언관들로 대표되는 구신세력을 중심으 로 이들이 지향하는 유교주의 이념에 따른 정치체제의 복원과 가정제 의 폐단 청산이라는 隆慶 ‘新政’의 정책방향과 이상은 등극조서를 통 해 구체화될 수 있었지만, 이는 오히려 융경제를 옹호하는 고공 등의 친위세력에게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이에 따라 특히 가정연간의 ‘大 禮議’와 관련하여 처벌되거나 희생된 사람들의 복직과 복권을 밝힌 등 극조서의 첫 부분의 내용에 대해, 융경제의 父皇인 가정제를 부정하는 불효이자 반인륜적 행위로 매도하면서, 신진세력의 본격적인 공격과 정치세력 교체가 지속되는 가운데 내각의 내홍은 끊임없이 지속되었 다. 융경연간에 지속된 내각의 내홍은 전반기에는 주로 ‘대례의’의 연 장선상에서 가정연간 정치의 인정 여부를 둘러싼 명분과 인사를 둘러 싸고 전개되었다고 한다면, 후반기의 내홍은 주로 각신 내의 권력투쟁 의 성격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과정에서 융경제는 결국 자신을 옹호하는 신진 정치세력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등극조서에서 밝힌 ‘新政’의 이상과 정책방향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제왕학으로서 경연 또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내각의 극심한 내홍이 겹치면서 비정상적이고도 의 례에 불과한 형태로 시행되었다고 하겠다. 이는 경연의 시행 여부와 그 운영 실상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실록에서 관련 기록이 소략 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융경원년의 춘강에서는 4월 22일 경연을 시작하여 의례적인 형태로 지속되었지만, 일강의 경우는 춘강시기에는 시행되지 않았다가 추강시기 직전인 8월에 비로소 시행 하기 시작하였다. 그나마도 융경2년에는 2월 12일에 경연을 시작하다 가 5월 22일에 마감하였고, 일강은 열리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융경3년에는 다른 때보다 경연 관련 기사가 비교적 적지 않게
보이지만, 이 당시 경연의 춘강과 추강, 그리고 일강 역시 아주 의례 에 불과한 형태로 간헐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전반 기인 융경제의 즉위이후 융경3년까지는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황제의 聖學 완성이라는 기본 원칙과 틀에서, 경연(월강)과 일강은 의례에 불 과한 형태로 간헐적으로 시행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융경3년 12월 고공의 재 입각을 계기로 정국운영의 주도권 이 융경제의 친위세력에 의해 장악되면서, 언관을 비롯한 비판세력이 기대하는 유교적 이념에 따른 ‘祖宗之制’의 복원은 황제와 이를 옹호 하는 신진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융경4년 이후 후반기 정국은 주로 高拱와 張居正을 중심으로 하는 융경제 친위세력 에 의해 주도되는 상황에서, 내각의 내분과 갈등 또한 정치적 이념이 나 명분, 정책방향을 둘러싸고 전개되기 보다는 다분히 권력 투쟁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는 곧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국 운영시스템 의 붕괴인 동시에, 내각수보를 비롯한 내각 중심의 정국 운영시스템으 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있어서 경연은 儀禮的 명분조차 그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이로써 융경연간 후반기에는 경연과 일강조차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채, 당 시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황제가 이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 행위로 시행되거나, 심지어는 실제가 아닌 기록으로만 존재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볼 때, 명대의 경연제도는 天順연간을 시작으로 成化ㆍ弘治 ㆍ正德ㆍ嘉靖연간을 거치면서105) ‘祖宗之制’가 형해화 되기 시작한 명
105) 拙稿, 「正統ㆍ天順年間의 經史 講論과 정국 운영 -經筵의 제도화와 내각제 운영과 관련하여-」 (中國史硏究 61, 2009.8), pp.84-112; 拙稿, 「成化年間 (1465-1487)의 經筵과 정국운영 -내각제 쇠퇴와 科道官體系의 성립과 관련하 여-」 (明淸史硏究 34, 2010.10), pp.1-30; 「弘治年間(1468-15505)의 經筵 과 政局運營 -내각제 복원과 공론정치와 관련하여-」 (中國史硏究 73, 2011.8), pp.118-148; 「正德年間(1506-1521)의 정국 운영과 經筵」 (中國史 硏究 85, 2013.8), pp.71-100; 「嘉靖前期(1522-1528) ‘大禮議’政局과 經筵」
(中國史硏究 92, 2014.10), pp.207-254 등 참조.
대 경연제도가 융경연간, 특히 그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제왕학의 학습과 정사협의라는 기능과 그 의미조차 근본적으로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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