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력 14년(779) 5월 덕종이 즉위하여 번진개혁의 의지를 강하게 보
135) ‘諸侯의 예’라고도 할 수 있으며, 여기에는 공납의 상공 등도 포함될 수 있 다.
136) 정병준, 李正己 一家 藩鎭과 高沐 -온건파와 강경파의 내부분열과 대립- (역사학보 180, 2003), pp.137, 144-146; 정병준, 李師道 藩鎭의 滅亡과 郭昈
(중국학보 52, 2005), p.258 참조. 여기에는 兩稅를 바치고 鹽法을 행하는 방안도 보인다.
137) 신당서 권210, 田悅傳 , “建中二年, 鎭州李惟岳․淄靑李納求襲節度, 不 許”(p.5927) ; 자치통감 권227, 건중 2년 8월 조, “李納始發喪, 奏請襲父位, 上 不許”(p.7307).
이자, 할거 번진들은 불안해하면서 조심스럽게 덕종과의 타협을 모색 하였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이정기였다. 같은 해 7월 이정기가 錢 30 만 민을 헌상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덕종은 사신을 보내 그것을 평로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이어 건중 원년(780) 4월 이정기와 위 박절도사 전열이 각각 비단 3만 필을 바쳤는데, 덕종은 그것을 度支로 보내 조세를 대신하게 하였다. 두 번 모두 타협점을 찾지 못하였던 것 이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이정기가 막료를 조정에 파견하였지만, 덕종 은 涇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劉文喜의 수급을 막료에게 보여주었다.
이로써 타협의 여지는 사라지고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건중 2년(781) 정월 성덕절도사 이보신이 죽자 아들 이유악이 절도 사 자리를 세습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덕종이 거절하였다. 덕종의 태도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이에 이정기와 전열이 이유악과 당조에 대항할 것을 모의하였다. 같은 달 汴州城 확장 공사가 벌어지자 이정 기는 1만 군대를 동원하여 曹州에 주둔시키고 전열․이유악․양숭의와 연대를 강화하였다. 덕종 역시 河南 지역의 번진들을 재배치하고 防秋 兵을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양 진영 모두 사실상 전쟁 태세로 돌입하 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정기는 재상 양염의 죄상을 거론하며 조정을 비판하였는데, 실제는 덕종의 번진 개혁 정책에 대한 비판이었다. 양염 은 결국 궁지에 몰려 실각하고 뒤에 살해되었다. 같은 해 5월 덕종은 군비 마련을 위해 상업세를 올렸다. 이제 남은 것은 전쟁뿐이었다.
선제공격을 가한 것은 위박절도사 전열이었다. 먼저 영토를 넓히기 위해 건중 2년(781) 5월 昭義 번진의 영역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다음 달 덕종은 淮寧節度使 이희열에게 양숭의를 토벌하게 하고, 전국에 걸 쳐 군대 동원령을 내렸다. 그때 이정기가 전격적으로 徐州를 지나는 대운하를 차단하였다. 당시 당조는 江淮 지역의 곡식과 물자에 절대적 으로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정기가 당조의 숨통을 졸랐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운명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양측이 막 전면전으로 접어들던 같은 해 7월 이정기가 사망하고 아 들 이납이 그 지위를 계승하였다. 하지만 이후의 싸움은 이정기가 주
도하였던 구도에 따라 진행되었고 마침내 ‘사왕이제의 반란’으로 이어 져 번진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덕종이 즉위한 직후부터 이정기는 할거 번진을 대표하여 타협을 시도하였을 뿐 아니라, 번진들의 연대에 중요 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전쟁이 시작되자 곧바로 대운하를 차단하 였다. 말하자면 이정기는 사왕이제의 반란이 일어나는 과정에 주도적 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정기 등은 처음에 덕종에게 공손한 태도(제후의 예)를 취하는 대 신 기득권을 인정받으려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덕종은 무조건 복종을 주장하였고 가장 중요한 절도사 계승권까지 회수하려고 하였다. 요컨 대 덕종은 번진 할거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했고 이것이 번진 개혁이 실패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정기 등은 기득권 박탈에 대해 서는 모든 위험을 각오하고 지키려 하였고, 불가피하다면 당조를 전복 시키는 것도 결코 주저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에서 다루겠다.
(中文摘要)
德宗的藩鎭改革政策和平盧節度使李正己
鄭 炳 俊
大曆14年(779)5月德宗即位,帶有强烈的藩鎭改革的意志
。
割據的藩 鎭非常不安,小心地與德宗摸索妥協的辦法. 其中最先出頭的是李正己. 李 正己與德宗摸索妥協的辦法的同时,與其他藩鎭連繫。
建中元年(780)5 月李正己再次試圖跟德宗妥協,德宗在涇州把發動叛亂的劉文喜的首級給 了李正己的部下, 正式的拒絶了他的妥協.建中2年(781)正月成德節度使李寶臣去世後, 圍繞着他的繼承權德宗 和割據藩鎭們互相争搶以至于暴發了戰爭. 同月末在汴州城展開了擴張的 攻勢, 李正己發動了1萬人的軍隊, 在曹州駐軍并與田悅․李惟岳․梁崇義 彙合. 德宗找到了在河南地區的藩鎭們, 派秋防兵向東出發发. 兩個陣營已 經進入了戰爭的狀態中了.
魏博節度使田悦採用了先發制人的策略. 首先爲了擴張領土, 建中2年
(781)5月攻入了昭義軍的領地. 次月, 德宗派淮寧節度使李希烈去討伐梁 崇義, 對全國的軍隊下達了指令. 得知此事的李正己火速的切斷了通往徐州 的大運河的通路. 然而, 现在唐朝和李正己只能各自爲戰了.
戰爭全面爆發的同年7月, 李正己死亡, 長子李納繼承了他的位置. 但是 之後的戰爭按照依舊按照李正己的構想進行, 最终以‘四王二帝之亂’割據藩 鎭們勝利而告終.
주제어: 당 덕종, 이정기, 평로군, 절도사, 서주, 전열 關鍵詞: 唐 德宗, 李正己, 平盧軍, 節度使, 徐州, 田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