顧頡剛과 손진태 두 사람은 20세기 전반기 중국과 한국 두 나라의 굴곡된 역사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그에 고민하던 지식인의 모습을 상 징적으로 보여주던 인물들이다. 두 사람 모두 민속학과 역사학의 경계 를 넘나들며 문화와 역사에 대한 기억을 다양한 방법과 인식으로 재구 성하고자 하였다. 먼저 과학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顧頡剛은 전통 시대 경학의 자리를 ‘민주’와 함께 ‘과학’이 대신하였던 시대분위기 속 에서 古史가 故事에 지나지 않음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 강조하면서
101) 孫晉泰, 韓國民族의 構成과 其文化 (1927) (全集 6), p.39.
102) 손진태, 朝鮮民族文化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 自序 .
103) 류기선, 1930년대 민속학 연구의 한 단면 -손진태의 ‘민속학’ 연구의 성격 을 중심으로- , p.75.
학문의 영역에서 경학의 우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구호 아래 각종 자료 들을 분석․분류․비교해서 인과관계를 끌어내어 귀납하는 歷史演進의 방법을 주장하였다. 손진태의 경우 ‘조선’의 현존하는 민속문화를 인류 학적 재료로 활용하여 조선상고사 연구를 시도하면서 민족의 문화요소 가 인종들의 이동과 문화전파에 따라서 발달한다는 인류학적 인식을 기초로 하여 역사적 문헌자료와 답사자료를 결합하여 특히 비교라는 방법을 운용하였다. 그러나 顧頡剛이 초기 그의 학문 활동이 가설의 설정과 증거에 따라 ‘求眞’을 지향하는 역사학적 방법론의 특징을 강하 게 갖는 반면, 손진태는 그의 자료 운용이 사료분석과 역사적 검증을 진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민속 소재와 관련된 주제를 인용하여 자의적 으로 해석하는 방식 때문에 역사민속학적 연구방법론이라 단정 짓기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민족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顧頡剛이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疑 古 속의 一元論적 민족의 부정과 이후 救國을 위한 문화민족으로서의 중화민족의 발견으로 발전한다고 본다면, 손진태의 경우는 해방 전 인 류학적 안목으로 민족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으로부터 해방 후 신민족주 의사관에 의한 민족의 발견으로 발전한다. 顧頡剛은 초기에 의고적 관 점으로 경학적 가치관으로 조작된 계보에 등장하는 다양한 집단을 모 두 중국 민족으로 인식하는 다민족 구도를 전제하면서도 한족을 중심 으로 비한족이 동화되어 간다는 인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31년 이후가 되면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중화민족 외래설을 부정하면 서, 중국 영토 내에서 활동하는 한족과 비한족간의 혈통의 차이를 문 제 삼지 않고 문화의 동일함만을 강조하는 문화민족으로서의 중화민족 을 내세웠다. 손진태의 경우, 1920년대 민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단군시 조론에 대하여 “전설을 통해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시대착오적인 주장”
이라는 비판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고, 1939년의 단군에 대한 논의에서 도 단군신화를 둘러싼 일제 식민지주의와 조선 민족주의의 첨예한 역 사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굴절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지엽적인 시비만을 따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해방 이후 손진태가
소위 신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한 글들을 보면 이전과는 다른 주장들이 보인다. 민족의 혼혈성을 강조했던 해방 전과는 달리 이민족 의 혼혈을 극소수라고 하면서 민족의 단결력, 민족적 친밀감 등을 주 장하고, 민족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변화를 보인다.
민중에 대한 두 사람의 초기 인식은 모호한 점이 적지 않았다. 顧頡 剛은 古史를 연구하면서 전통적인 문헌자료와 함께 민간의 전설과 故 事의 演化에 주의하였지만 이는 신성불가침의 古史계통을 민간의 자료 를 이용하여 보통의 역사사실로 인식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후
“민중의 입장에서 민중을 인식해야 한다[要站在民衆的立場上來認識民 衆]”는 전제를 가지고, 귀족중심의 역사, 聖賢문화로 고정된 생활방식 의 역사를 타파하고 민중의 역사를 발견하자는 주장에 이르고, 더 나 아가 통속간행물을 통한 역사지식의 보급 등 보다 적극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손진태의 경우,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上古문화를 탐구하 면서 그 대상을 ‘민간’ 신앙, ‘민간’ 설화 등으로 부르면서도 민중 문화 라고 호칭하지 않았다. 손진태가 인류학적 관점으로 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민중’이 아니라 ‘土俗’을 지니고 있던 미개한 유풍을 가지고 있는 土民들이었다. 따라서 당시 좌우 지식인들의 관심사였던 민중과는 차 이가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좁은 의미의 인류학을 벗어난 손진태 는 민족을 농민과 商工漁民 및 奴隸 등 피지배계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민족문화는 민중의 문화라고 하여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그 들의 가치를 높였다.
(中文提要)
顧頡剛和孫晉泰的歷史認識
李 潤 和
顾颉刚和孙晋泰两人是20世紀前半期中韩两国经历了艰难曲折,痛苦坎 坷历程学者中的代表人物
。
兩人都在民俗学和历史学的領域里徘徊,通过 各種方法和认识把对关于文化和历史的记忆重構起来了。
首先,有关对科 学的认识,顾颉刚打着一定要在打破经学的偶像的科学口號,主张通过对 各種资料的分析,分类,比较,引出其中之因果关系,从而归纳成历史演 进的方法。
而孙晋泰把 ‘朝鮮’的 現存的民俗文化归结成人類學的材料来活 用。
试图在进行朝鮮上古史研究的同时, 根據民族的文化因素,人種的移 动和文化传播,以发达的人类学的认识为基礎,把歷史的文献资料和踏査 資料結合起来, 幷且運用了比較的方法. 顾颉刚在初期,他的文化活动,主 要根據假设的设定和證據强调致力于“求真”的历史性的方法论特徵。
而孙 晋泰他的資料连用,并不是史料分析和历史的检證的进行方式,而是引用 民俗素材和一些相关联的主题,用恣意解释的方式,所以断定所谓的历史 民俗学的研究方法论是有问题的,并且受到了批判。
关于对民族的认识,顾颉刚根據科学的方法论,提出了打破民族出于一 元的观念,为了救国提出了作为一个文化民族的中华民族见解
。
相反的,孙晋泰却是从用解放前人类学的眼光来展望民族文化开始到解放後按新民 主主义史观来看待民族发展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