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천하의 중심에 위치했다고 자부했던 중국인들에게 19세기 이래의 경험은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국민국가 건설의 실패와 제국주의 침략 에 따른 위기의식과 공포감은 중국 지식인 계층의 ‘憂患意識’을 자극 했다. 중국인에게 천하의식은 있어도 국가의식은 없고, 가족의식은 있 어도 국가의식이 없다는 것이 지식인들의 고민거리였다. 양계초의 국 가 구상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승열패의 시대에 국가와 민족을 최우선으로 상정한 양계초는, 국 가가 강국으로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변법을 통한 제도의 정비가 시급 하다고 보고 변법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물거품이 되자 그는 중국의 현실과 전도에 대해 극히 우울한 생각을 한다. 문명대국이자 군자의 나라가 생기 넘치는 변혁의 기운을 상실한 채 만신창이, 몰락 의 위기에 빠진 노쇠한 대제국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망명생활 중 에 보고 느낀 중국과 중국인의 실상은 그를 더욱 울적하게 했다.

99) 徐剛, 앞의 책, p.573.

100) 체스타탄, 앞의 책, p.39.

양계초는 강건한 육체와 정신을 가진 새롭고 젊은 중국을 만들 것 을 다짐하고 계몽의 길로 나갔다. 그가 소개한 새로운 지식은 낡고 보 수적인 것들을 파멸시켰고, 신성시되었던 것들은 존엄을 잃어버리고 이성적 회의와 검증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양계초가 뿌린 계몽의 역 량과 의의였다.

국가의 강약은 국민의 품격에 의해 결정된다고 확신한 양계초는 신 민 만들기에 나섰다. 이때의 신민이란 보수와 진취 그리고 동양과 서 양의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사람이다. 양계초의 신민설에 따르면 국가 나 사회는 하나의 유기체로, 이를 유지하는 어떤 정신의 힘이 공덕이 다. 이 공덕을 갖춘 국민이 신민이다. 그는 공덕이라는 관념을 통해 국민의식과 사회의식을 개념화하고자 했다. 특히 그는 사덕보다 공덕 을 더욱 중시했는데, 이는 그가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인간존재의 도덕 적 주체성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공덕을 강조한 다고 해서 사덕을 부정한다고 보아서는 안 될 문제이다.

신민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도덕, 곧 국가를 이롭게 하는 것, 단체를 이롭게 하는 것은 최고의 善으로, 결국 양계초의 최종 관심은 국가였 다. 때문에 그는 국가의 재건에 장애가 될 수 있는 개인주의를 반대하 고 단체와 국가의 자유를 강조했으며 군주의 존엄을 인정했다. 그에게 입헌군주제는 버릴 수 없는 꿈이었다. 그래야만 우승열패의 시대에 살 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울의 시대는 양계초로 하여금 국가주의 와 애국주의로의 길을 걷도록 재촉했던 것이다.

양계초에 대해 保守主義者ㆍ改良主義者ㆍ反動ㆍ買辦이라는 다양하 고도 엇갈린 평가가 있다. 이는 그의 종잡을 수 없이 우왕좌왕한 정치 적 행보 때문일 것이고, 보수와 진보ㆍ개혁과 혁명ㆍ입헌과 공화 등 각종 사조가 착종된 20세기 중국의 시대적 산물이기도 하다. 양계초의 고민은 자유ㆍ입헌ㆍ공화 등은 좋지만 문제는 중국의 현실에 맞느냐는 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중국현대사의 수차례의 비극적 결과는 그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증명했다. 따라서 혁명사 중심의 중국현대사 이해 는 재고되어야 하며, 이에 입각해 내린 양계초에 대한 이왕의 평가도

재고되어야 한다.

한편, 20세기 초 중국에서 서화의 조류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풍조 가 되었으며, 비록 신구의 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되었지만 중국은 西化 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반면에 서구에서는 이성에 의한 역사의 진 보를 믿는 합리주의 사상이 더 이상 인류 구원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인간 소외와 인간 상실의 극복 논리 를 찾으려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진화론과 국가주의를 추수하면서 쉼 없이 매진해도 그 결과를 얻을 수 없었던 양계초는, 대전후의 유럽을 목도하고 국가주의 사고 경향을 지양하고 국민의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지향했다. 그는 과학의 도움 을 받은 순물질적이고 순기계적인 인생관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책임을 부정한다면서, 과학만능이라는 유럽인들의 꿈이 파산했다고 선 언했다. 그러나 양계초가 지적한 문제는 과학만능주의이지 과학 자체 는 결코 아니었다.

인생관을 논함에 있어 양계초는 인간의 삶의 원동력을 정감이라고 보고, 그 중에서 ‘사랑(愛)’과 ‘아름다움(美)’을 과학으로는 다룰 수 없 는 신비한 것으로 보았다. 이 사랑과 아름다움은 5ㆍ4 시기에 성행했 던 민주 및 과학과 서로 보완을 이루는 사상체계를 가리킨다. 정신과 물질,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등을 하나로 묶어 절충ㆍ조화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양계초에 따르면 서양의 국가주의는 극단적으로 협소한 애국심을 조장하여 타국을 배척하나, 반대로 중국의 유가정신은 동류의식을 확 대해 나간다. 그리하여 공자는 양계초에 의해 다시 자유정신의 수호자 가 되고, 인류애의 담지자라는 새로운 옷을 바꿔 입고 여전히 불사의 정신으로 남는다. 끝내 양계초는 진화론과 국가주의에서 대동적 세계 주의로 되돌아 왔다.

근대중국의 탄생과 근대사상의 형성에 양계초가 끼친 영향은 대단 했다. 양계초는 신선한 지식 속의 수많은 참신한 이론과 관점, 기준과 척도를 소개함으로써 사람들이 고대의 성현 외에도 세계에는 그렇게

정심하고 박아한 사상과 도리, 원칙과 방법이 있음을 알게 했다. 중국 인들은 자기민족의 낙후함을 느끼게 되었고, 구국과 혁명의 열정을 더 욱 강력하게 불태우게 되었다. 좁은 식견을 가지고 자기 잘났다고 뽐 내던 모든 보수적인 것은 새로운 지식과 개념의 선전과 소개과정에서 저절로 파멸되었으며, 신성한 빛과 불가침적 존엄을 잃어버리고 이성 적 회의와 검증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양계초가 뿌린 계몽의 역 량과 의의였다.101)

예컨대, 魯迅은 양계초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1896년 이래 양계초 는 드러내놓기 부끄러운 관료제, 과거시험장의 추태, 고질적인 아편흡 연, 잔인한 고문이나 진배없는 전족 풍습 등을 낱낱이 고발함으로써 민족적 수치감을 일깨울 수 있었다”면서, 대중들이 그와 같은 내용의 백화소설을 읽도록 권장했다.102) 胡適에 따르면 양계초의 문장은 당시 에 영향력이 있던 시대였고, 그는 분명하게 민족혁명을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청년층의 가슴에 적지 않은 혁명의 씨앗을 뿌려주었다.

공산주의자 郭沫若에 따르면, 양계초는 중국의 봉건제도가 자본주의 에 의해 파괴되는 시기에 살면서 시대적 사명을 짊어지고 자유사상을 표방하며 봉건의 잔해와 싸웠다. 양계초의 예리한 신흥언론 앞에서 거 의 모든 구사상과 옛 풍습은 추풍낙엽처럼 그 정채를 잃어버렸다. 당 시 젊은이들 가운데 찬성하건 반대하건 그의 사상 또는 문자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103) 이로써 볼 때 양계초는 ‘근대 중 국을 기획’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근대=서구라는 모식이 그 설득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서두 에서 언급했듯이, 근대성은 연대기적 범주나 추상적인 형식이 아니라 일종의 질적 범주, 즉 ‘관습의 피상적인 연관에 대한 거부, 조화라는 가상의 거부, 단순한 모사에 의해서 뒷받침된 질서를 거부하는 정신적 태도’이거나,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갱신하여 활성화시키는 시대정

101) 李澤厚, 앞의 책, pp.678-679.

102) 스펜스, 앞의 책, p.99.

103) 李澤厚, 앞의 책, pp.680-682.

신’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양계초의 근대중국 기획에서 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문화보수주의자들에 따르면, 중국의 근대는 타자화ㆍ식민화 된 역사이다. 왜냐하면 아편전쟁 이후 중국 근대성(modernity)의 역사 는 서구 근대성의 이식 혹은 맹목적인 추종에 의한 구성이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국은 순정함과 자족성(autonomy)을 잃었으 며, 서구화로 인해 민족 고유의 문화적 특징을 상실했다. 곧 중국의 근대는 주체를 잃은 타자화의 과정으로, “강하고 낯선 서구라는 타자 의 거울을 빌려 중국인들은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의 참다운 면모를 발 견했으며, 이러한 자아를 발견함과 동시에 이미 자아를 잃어버렸 다”104)는 것이다.

그러나 양계초를 통해서 보는 중국의 근대는 유럽을 초월하고 있지 도 않고 낙후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국은 유럽적 근대에의 추향 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105) 중국 근대의 새로운 정신은 중국 고 유의 전통 안에서 형성되어 공고한 지반을 구축했다. 중국은 문명을 만들어 남의 것을 빌리지 않았고, 제도든 사상이든 유럽 문명이 낳은 결과만을 빌려오지 않았다. 외래사상은 자기 안에서 본질적인 것을 이 끌어내는 도구로 활용되었을 뿐 중국문화의 독자성을 상처 입히지 못 했다. 중국은 착실히 자기 길을 걸으며 근대로 이행했던 것이다.106)

결론적으로 중국의 근대는 서구의 모사이거나 전통의 답습이 아닌 이것들을 새롭게 갱신한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근대는 서구적인 것 이 아닌 ‘중국적’인 것이었으며, 유교적 보수주의로의 귀향이 아닌 ‘근 대적’ 지향이었다. 이러한 결론이 양계초의 경우에서 얻은 것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논리적 비약일 수 있겠지만, 근대 중국에 끼친 그의 영 향을 고려했을 경우 크게 잘못된 결론만은 아닐 것이다.

104) 張頤武ㆍ玉一川ㆍ張法, 「從現代性到中華性」 (文藝爭鳴 1994-2).

105) 溝囗雄三, 앞의 논문, p.283, p.291.

106) 竹內好 著, 윤여일 역, 내재하는 아시아 (휴머니스트, 2011), pp.183 -184.

Dalam dokumen 梁啓超의 '중국적' 근대 기획 (Halaman 30-37)

Dokumen terka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