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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가정제 즉위년~가정7년까지의 대례 논쟁 진행과정에 대한 검 토를 통해 국내의 대례의 관련 연구에서 드러나고 의문점과 규명되어 야 할 사안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양정화가 초안한 정덕 제 遺詔와 자수황태후의 懿旨에 근거하여 주장하고 ‘考孝宗’의 논리는 II장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논리적 결함과 모순 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考孝宗說’이 정통론의 유교적 명분론에 근거하여 繼統을 繼嗣와 동일시하거나 우선시함으로써, 현실적으로는 가정제의 경우처럼 生父의 繼嗣와 主祀 문제를 야기하는 등 개인적으 로는 天倫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더구나 人情을 중시하는 양 명학이 풍미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가정제와 이를 지지하는 의례파의 논리적 비판을 초래하는 것은 어쩌면 예상되는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 었다. 따라서 가정제가 대례의를 제기한 즉위년부터 가정3년까지의 대 례의 논쟁은 ‘考孝宗’의 명분론적 정통론에 대한 의례파의 논리적 문 제 제기인 동시에, 유교적 의례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례의가 시작된 처음부터 이를 단순히 황제권과 내각권의 길항관계로 설정하거나, 특히 양정화 내각을 황제 권력을 견제하는 내각권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편화하고, 심지어는 이 를 개혁적 성향으로 이해하는 견해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라 판단된다.

또한, III장 1, 2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일개 진사에 불과했던 張

璁을 비롯한 의례파와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하급 관료들

로서, 가정제가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양정화 내각을 비 롯한 당시 大臣들의 ‘考孝宗說’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박하는 상소가 황제에게 전달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빠르게 세력화를 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조정을 좌우하고 있었던 사례감 태감 崔文를 비롯하 여 錦衣衛 指揮僉事 聶能遷 등 환관세력의 비호와 가정제의 절대적 지

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가정2년에는 과도관까지 가세하여

‘考孝宗說’을 지지하는 양정화와 병부상서 彭澤 등을 朋黨의 무리라고 지칭하며 탄핵하여 이들 세력을 거세하려는 움직임이 표면화되기에 시 작하였다. 결국 양정화를 비롯하여 正ㆍ嘉 교체기의 大臣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정치세력들은 가정3년에 대부분 사직하기에 이르렀다. 이처 럼 양정화 내각을 중심으로 하는 구 정치세력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 한 채 물러나게 된 데에는, 正ㆍ嘉 교체기 양정화 내각과 일시적 연합 전선을 형성했던 환관세력들이 가정제를 중심으로 결집되었기 때문이 라고 판단된다. 여기에 더하여 장총 등 의례파와 일부 과도관들에 이 르는 신진 정치세력의 가세로 ‘考興獻王說’은 논리적 설득력을 구비함 으로써, 이들 세력의 결집력과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판단 된다. 따라서 양정화 내각의 ‘考孝宗說’을 지지하는 기존의 정치세력이 이념적으로는 유교적 명분론을 고수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정치적 지 향점과 목표를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황제를 중심으로 ‘考興 獻王說’을 지지하는 신진 정치세력에 비해 결집력이 취약할 수밖에 없 었다. 이에 따라 ‘考孝宗說’은 가정3년 2월 양정화 사직과 뒤이은 廷 臣들의 사직으로 구심력을 잃은 채 그 지지기반도 크게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한편, 가정3~4년에는 대례 논쟁이 흥헌왕 立廟 문제를 둘러싸고 새 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양정화 내각 당시 楊이 입안한 ‘考孝宗說’을 둘러싼 대례 논쟁과 양정화 사직 이후 전개된 흥 헌황 입묘 관련 논쟁을 동일 선상에서 파악하여 황권과 내각권의 길항 관계로 이해하거나, 양정화 내각의 역할을 과도하게 평가하는 것은 재 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III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양정화 내각의 붕괴 이후 기존의 廷臣과 환관, 신진 세력 등 각 정치세력의 이합집산은 권력의 핵심인 가정제를 중심으로 논쟁의 초점 과 정치ㆍ현실적 이해관계에 따라 급속하게 재편될 수밖에 없었기 때 문이다. 따라서 즉위년~가정2년 양정화 내각을 중심으로 하는 대례에 대한 이론적 논쟁은 楊의 사직과 함께 일단락되었다고 하겠다. 이로써

가정3~4년에는 가정제와 의례파가 새롭게 제기한 흥헌왕 立廟 문제를 둘러싸고,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한 의례 질서와 명 왕조 개창이래의 정치체제를 고수하려는 정치세력과, 君統을 새롭게 수립하여 황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세력 간의 갈등 양상으로 새롭게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황권 강화에 저항하는 정치세력은 내각권 의 복원과 이에 의한 군신공치의 유교적 이념을 이상으로 여기는 대부 분의 관료층과 공론정치를 표방하는 사대부층을 망라하고 있었다. 그 러므로 황권과 내각권의 길항관계는 실제로 양정화 내각 시기가 아니 라, 바로 이 시기에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왜냐하면, 가정3년 이후 흥헌왕 입묘 문제로 가정제와 그를 옹호하는 세력들이 흥헌왕(이 후 睿宗으로 추존)→가정제로 이어지는 帝系의 수립을 추진하는 동시 에, 인적 물갈이를 통해 황제독재의 권력구조와 정치운영을 노골적으 로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현직 관료와 언관을 포함하는 사대부층의 정치적 이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저항과 반발은 관료와 언관, 그 리고 공론정치를 표방하고 있는 사대부계층으로 확대되었고, 현실적으 로는 내각권의 황권 견제를 통한 ‘군신공치’를 이상으로 하는 유교적 이념과 소양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직결되 어 반감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상의 검토를 고려해 볼 때, 향후 연구는 대례의 논의 과 정에서 나타난 논쟁의 핵심 주제, 각 시기마다 표출되고 있는 각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와 이들이 추구하는 이념과 현실적 지향점, 더 나아가 서는 가정연간의 대례의가 이후 미친 영향과 추이과정 등에 대해서도 정치ㆍ사상ㆍ문화 등 다양한 시각에서 종합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 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과 분석은 추후의 작업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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